제5장
신에게 이르는 참된 길은 어떤 것입니까? 일부 요가 수행자들이 믿듯이
극기(克己)로 가능합니까? 그리고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요? 많은 금욕주의
자들이 말하듯이 고행과 봉사가 신에게로 가는 길인가요? 많은 종교들이
가르치듯이 우리는 '선해져야' 천국에 가게 되나요? 아니면 많은 뉴에이지
주창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온갖 규칙을
어기거나 무시하고, 전해오는 모든 가르침을 제쳐두고, 온갖 방종에 빠지
는 것으로 해탈에 이르게 되나요? 어느 쪽입니까? 엄격한 도덕 기준들입
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대로 하라입니까? 전해오는 가치들입니까, 아니면
내키는 대로 만들어내라입니까? '십계명'입니까, 아니면 '깨달음으로 가는
일곱 단계'입니까?
너는 그것이 이 길 아니면 저 길이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모든 것일 수는 없는가?
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묻고 있고요.
그럼 네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대답해주리라. 너는 이미 네
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나는 내 말을 귀담아듣고 내 진리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겠다.
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고 열렬히 묻는 모든 마음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겠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가슴 벅찬 진리를 주리
라. 너희 정신의 여정이 아닌 너희 마음의 길을 따라 내게로 오라.
너희 정신으로는 결코 나를 찾지 못하리니.
너희가 참으로 신을 알고자 한다면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에도 네 질문이 대답을 간절히 구하고 있으니, 나는 그 질문
공세에서 벗어나지 않겠노라.
우선 나는 너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민감한
감성을 건드릴 진술에서 시작하겠다. 십계명 따위는 없다.
오, 맙소사. 없다고요?
그렇다. 없다. 내가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인가? 나 자신에게? 게
다가 왜 그런 계명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것이 왜 필요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내가 계명들을 선포했다면 그것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겠는가? 어떻게 내가 어떤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명령까지 내리고, 또 그러고 나서는 지키고 앉아서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봐 조바심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왕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떤 통치자가?
그러나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왕도 통치자도 아니다. 나는 단지
창조주일 따름이며, 경외스럽게도 창조주일 따름이다. 하지만 창조
주는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창조하고 또 창조한다. 계속해서 창조
하기만 한다.
나는 너희를 내 형상대로, 내 닮은꼴로 창조했고, 축복했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몇가지 약속과 서약을 했다. 나는 너희에게 나와
하나 될 때 너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평이한 언어로 말해준 바
있다. 너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구하는 자다. 모세 역시
네가 지금 그러하듯이, 내 앞에 서서 대답을 간구했다. 그는 외쳤
다. "오. 제 조상들의 신이시여, 제 신 중의 신이시여, 제게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제 백성들에게 말할 만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네게 온 것처럼, 나는 한 가지 성스러운 계약,
영원히 유효한 한 가지 약속, 확실하고 틀림없는 한 가지 서약을
갖고서 모세에게 갔다.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모세는
푸념하듯 물었다. 나는 "내가 네게 그렇게 말했기에. 너는 '신의
말(言約)'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신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계약이었다. 그 약속은 이렇다...
열 가지 계약
너희는 다음과 같은 징후들, 표시들, 너희 자신의 변화들을 갖게 될
것이기에, 너희가 신에게 이르는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될 것이
며, 신을 찾아냈다는 걸 알게 되리라. 왜냐하면,
1. 너희는 너희의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영혼을 다해 신을 사랑하
게 될 것이기에, 그리하여 내 앞에 다른 신을 세우지 않을 것이기에.
너희는 더 이상 인간의 사랑도 돈도 권력도 숭배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들과 관련된 어떤 상징물도 숭배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희는
아이가 장난감들을 치워버리듯 그것들을 치워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보잘것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갖고 놀 나이가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는 자신이 신에게 이르는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되리라.
왜냐하면,
2. 너희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에. 또 하찮은
일들로 내게 호소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너희는 말의 힘과 생각의
힘을 이해할 것이며, 속된 방식으로 신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으리라. 왜냐 하면 내 이름, 그 위대한 '나는'은 결코 헛되이(즉
아무 성과없이)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신을 찾아냈을 때, 너희는 그것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또 다른 징후들도 주겠노라.
3. 너희는 나를 위해 하루를 비워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
이며, 그 날을 성스러운 날이라 부르게 되리라. 나를 위해 하루를
지키는 것은 너희가 자신의 환상 속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자신에게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얼마 안 가 모든 날을 안식일이라 부를 것이며, 모든 순간을
성스럽다 할 것이다.
4. 너희는 너희 어머니 아버지를 공경하게 될 것이다.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너희가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신을
공경할 때, 너희는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신을 공경하고 지상의 네 부모를 공경할(그들
은 네게 생명을 주었기에)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모든 사람을 공경
하게 될 것이다.
5. 너희는 자신이 살인(즉 까닭 없는 고의적인 살인)하지 않을 것임
을 자각할 때, 신을 찾았다는 걸 알리라. 어떤 식으로도 다른 생명
을 끝장낼 수 없다(모든 생명은 영원하다)는 걸 이해할 때, 너희는
가장 성스러운 정당화 없이는 어떤 육신도 끝장내지 않을 것이며,
생명 에너지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경외심으로 식물과 나무와 동물을 비롯
한 온갖 생명체들을 다 존중할 것이며, 최상의 선을 위해서만 그것
들을 건드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다음과 같은, 이것의 다른 징후들도 보내줄
것이다. 너희가 그 길에 들어섰다는 걸 알 수 있도록.
6. 너희는 부정직과 기만으로 사랑의 순수함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
다. 왜냐하면 이것은 불손한 짓이기에, 너희에게 약속하노니, 너희
가 신을 찾아냈을 때 너희는 이런 불손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
다.
7. 너희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또 남을 속여서
빼앗지도 않을 것이며, 나쁜 짓을 눈감아주지도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남을 해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짓들은
도둑질이기에. 너희에게 약속하노니, 너희가 신을 찾아냈을 때 너희
는 훔치지 않으리라.
또 너희는......
8.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지 않을 것이다.
또 너희는......
9. 너희 이웃의 배우자를 탐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네
배우자임을 아는데 왜 굳이 네 이웃의 배우자를 원하겠는가?
또 너희는......
10. 너희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재물이 네 것일
수 있고, 네 모든 재물이 세상 것임을 아는데 왜 굳이 네 이웃의
재물을 원하겠는가?
이런 징표들을 볼 때 너희는 자신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았음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신을 찾는 그 누구도 더 이상 이런 짓들을
하지 않으리라고 내가 약속했기에, 이런 짓들을 계속하는 건 불가능
할 것이다.
이 약속들은 너희를 속박하지 않고 너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내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신은 신이 창조한 것에 대해
명령하지 않는다. 신은 다만 신의 아이들에게, 이것이 너희가 집으로
오고 있음을 알아내는 방법이라고 말할 뿐이다.
모세는 더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
게 징표를 보여주십시오." 모세는 지금 네가 물은 것과 똑같은 질문
을 던졌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누구나 어디서나 물었던 바로 그
질문을. 내 대답 역시 영원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명령이 아니었
으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인가? 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누구를 벌한단 말인가?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건 아니군요.
'천국에 가는' 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가 이미 그곳에 있
음을 아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수고나 애씀이 아니라 받아들임과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이미 서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너희가 있는 곳에서 떠나야 하는데 그것은 그 여행 전체의 목적을
좌절시킨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기네가 있고 싶은 곳에 가려면, 자기네가 지금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역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국에 가려고 천국을 떠난다. 그래서 지옥을 지나가고.
깨달음이란 어디도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될 필요
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희는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말하는 식의 천국이란 어디에도(nowhere) 없다. 이 단어에
서 W와 h 사이를 약간 벌려보라. 그러면 너희는 천국이 지금(now)
...... 여기(here)라는 걸 알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나 다요! 그런 얘기가 절 미치게 합
니다! "천국이 지금 여기 있다"면 어떻게 제가 그걸 모를 수가 있죠?
어째서 저는 그걸 느끼지 못하죠? 게다가 세상은 왜 이렇게 엉망진창
입니까?
네가 김빠져하는 건 이해가 간다. 이 모든 걸 이해하려는 건,누군
가에게 이걸 이해시키려는 일만큼이나 김빠지는 일일테니까.
우와! 잠깐만요! 신도 김빠져 한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김빠져하는 걸 누가 발명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너는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걸 네가 체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느냐?
분명히 얘기하는데, 너희가 겪는 체험은 모두 내가 겪는 것이다.
너희를 통해 나 자신을 체험하고 있는 걸 모르겠느냐? 그렇지 않
다면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없으면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너희를 창조했다.
그런데 나는 한 장(章) 속에서 나에 대한 네 모든 환상을 깨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네가 신이라 부르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나는 짜증스러움을 체험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노라.
휴! 그 편이 좀 낫군요. 당신은 잠시 나를 질겁하게 했어요.
하지만 그건 내가 김빠져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단지 내가 그러
기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 역시 나와 똑같은 선택
을 할 수 있다.
저, 김빠져하든 않든 간에 저는 여전히 천국이 어떻게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지, 그런데도 제가 왜 그걸 체험하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자신이 모든 걸 체험할 수는 없다. 그리고 너희는 천국을 체험하
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바로 지금 '천국'에 있음을 모른다.
보다시피 너희에게 이것은 악순환이다. 너희는 자신이 모르는 걸
체험할 수 없고, 즉 체험할 방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고, 너희
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설명을 하는 건 너희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알아내고,
그리하여 그것을 체험해보라는 것이다. 앎은 체험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런데 너희는 그 반대라고 상상한다.
사실 너희는 너희가 체험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이 안다는 걸 모를 뿐이다.
예컨대 너희는 신이 존재함을 안다. 하지만 자신이 그걸 안다는
걸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너희는 늘상 서성거리며 신을 체험하
길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신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줄곧. 결국
너희는 알지 못한 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체험을
전혀 하지 못한 것과 같다.
이런, 우리는 여기서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어요.
그렇다. 그리고 계속 원 둘레를 도는 대신 아마도 우리는 원 자체
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원이 꼭 악순환의 원이어야 하는 건 아
니다. 숭고한 원이 될 수도 있다.
참된 영적 삶을 살려면 극기가 꼭 필요한가요?
그렇다. 궁극에 가서 모든 영혼은 사실이 아닌 걸 버리며, 너희가
영위하는 삶에서는 너희와 나와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기에, 하지만 자기 부정이라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극기는 불필요하다.
참된 선각자는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다. 참된 선각자는 그것을
그저 옆으로 제쳐놓을 뿐이다. 더 이상 쓸모없는 것들을 처리할
때처럼.
너희에게 자신의 욕구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저 그것들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전자의 실천은 엄격한
훈련처럼 여겨지지만, 후자의 실천은 즐거운 연습처럼 여겨진다.
신을 알려면 세속적인 온갖 열정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희가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
세속적인 온갖 열정들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은 종종
그 일에 너무 열심히 매달린 나머지, 그것 자체가 그들의 열정이
되고 만다. 그들은 '신을 향한 열정', 신을 알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똑같은 열정일 뿐이어서, 어느 한
열정을 다른 열정으로 바꾸는 것이지, 열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열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열정을 느낀다는 판단을
내리지 마라. 그저 그것을 알아채고 난 다음, 되고자 하는 존재라
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지만 알아
보라.
너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너희는 순간
순간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있다. 너희는 주로
자신이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게 열정을 느끼는가와 관련된
선택들을 통해 이것을 결정한다.
소위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은 흔히 모든 세속적인 열정, 모든
인간적인 욕구들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해온 건
그런 열정과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열정들에서 비켜서는 것이었다. 그 동안에도
계속해서 열정이 자신에게 안겨준 환상, 곧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사랑하면서.
열정은 존재가 행동으로 바뀜을 사랑하는 것이다. 열정은 창조의
엔진에 연료를 공급해준다. 그것은 개념을 체험으로 바꾼다. 그러
니 결코 열정을 부정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자신', '참으로 되
고자 하는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극기는 결코 열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극기는 단지 결과에 대한
집착만을 거부한다. 열정은 행동에 대한 사랑이다. 행동은 체험된
존재다. 그런데 흔히 행동의 일부로 무엇이 창조되는가? 기대이다.
기대없이, 특정한 결과들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 바로 자유다. 그것이 바로 신성(神性)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방식이다.
당신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않는다. 내 기쁨은 창조에 있지 결과에 있지 않다. 극기는
행동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아니다. 극기는 특정 결과를 기대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여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열정은 존재가 행동으로 바뀜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존재함(beingness)은 존재(Existence)의 최고 상태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본질이다. 그것은 '지금-지금 아님', '전체-전체 아님', 신
의 '항상 그대로임-결코 아님', 둘 다를 아우르는 것이다.
순수 존재는 순수한 신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았다.
우리는 늘 '우리가 무엇인지' 체험하길 갈망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려면 행동이라는, 신성의 전혀 다른 측면이 필요했다.
예컨대 너희 자아의 핵심부가 그 멋진 사랑이라는 신성의 한 측면
이라고 해보자(사실 사랑이야말로 너희의 실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과 뭔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 속에서 인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에 대
해 뭔가를 하고자 갈망한다. 그리하여 영혼은 행동으로 자신의 가
장 고귀한 관념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려는 충동을 열정이라 한다. 열정을 죽여라. 그러면 너
희는 신을 죽이게 된다. 열정이란, "여어, 안녕"하며 인사하고
싶어하는 신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일단 신(혹은 너희 내면의 신)은 그런 식의 사랑
을 하고 나면, 즉 자신을 실혐시키고 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필
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은 흔히 투자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서 그 사랑을 어느 정도 되돌려받는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라는
식이다.
이것은 열정이 아니다. 이것은 기대이다.
기대는 인간이 겪는 불행의 가장 큰 원천이며, 인간을 신에게서
떼내는 것이다.
극기는 동양의 일부 신비주의자들이 삼매경이라 불러온 체험, 즉
신과의 하나됨과 신과의 합일, 혹은 신성과의 융합과 신성으로의
녹아듦을 통해 이 분리상태를 끝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기는 결과를 거부하지만, 열정은 결코,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 선각자들은 열정이야말로 신에게 이르는 길, 자기
실현으로 가는 길임을 직관으로 안다.
만일 네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열정이 없다면 너는 전혀 사는 게
아니라는 세속의 표현조차도 이 점을 잘 드러내준다.
"너희가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너희가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고 말씀하
셨는데 그 뜻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스스로 어떤 실체성도 부여하지 않은 것에 저항할 수는 없다. 어떤
것에 저항하는 행동은 그것에 생명을 주는 행동이다. 어떤 에너지
에 저항할 때, 너희는 그것이 거기에 자리잡게 한다. 저항하면 할
수록 그것은 점점 더 현실이 된다. 너희가 저항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너희가 눈을 뜨고 살펴보는 것은 사라진다. 즉 그것은 그 환상적인
형태를 유지하기를 그친다.
만일 너희가 어떤 것을 살펴본다면, 그것을 진짜로 살펴본다면, 너
희는 그것을 꿰뚫어보게 될 것이며, 그것이 너희에게 보여주던 모
든 환상을 꿰뚫어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네 시야에 남는 것은 오
직 궁극의 실체뿐이다. 궁극의 실체 앞에서 너희의 허약한 환상은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그것의 아귀 힘은 점점 약해져 너희를 오
래 붙들 수 없다. 너희는 그것의 진실을 본다. 그리고 진실은 너희
를 자유롭게 해 준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살펴보는 것을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다면요?
언제나 그것이 사라지길 원해야 한다! 너희의 현실에서 붙들어야
할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만일 너희가 굳이 궁극의 실체 대신
삶의 환상 쪽을 택하고 싶다면, 너희는 그냥 그 환상을 재창조하면
된다. 애초에 너희가 그것을 창조했던 것처럼. 너희는 이런 식으
로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고, 더 이상 체험하고 싶지 않은 걸
삶에서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마라. 저항하면 그것이 없어지
리라고 여긴다면 다시 생각해보라. 오히려 너희는 그것이 더 튼튼
하게 뿌리박도록 만들 뿐이다. 내가 모든 생각에는 창조력이 있다
고 말하지 않았던가?
제가 어떤 걸 원치 않는다는 생각까지도요?
네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왜 굳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가? 원치
않는 것은 재고하지 마라. 그러나 만일 네가 굳이 그것에 대해 생
각해야 한다면, 즉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 저항하
지 마라. 차라리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정면으로 살펴보고 나서,
즉 그것을 자신의 창조물로 인정하고 나서, 그것을 계속 유지할지
말지 네 마음대로 선택하라.
무엇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명령합니까?
너희가 '자신이라 여기는 존재'가, 그리고 '너희가 되고자 하는
존재'가.
이것이 모든 선택을 좌우한다. 너희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린 모든 선택들과, 앞으로 내릴 모든 선택들을.
그렇다면 금욕주의자의 삶은 잘못된 길입니까?
그 삶은 진리가 아니다. '금욕하다(renunciate)'는 말 속에는 아주
잘못된 뜻이 들어 있다. 사실 너희는 어떤 것도 거부할 수(renounce)
없다. 왜냐하면 너희가 저항하는 건 끈질기게 지속되니까. 참된 극
기는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다르게 선택할 뿐이다. 다르게 선택한
다는 건 어떤 것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움직여가는
행동이다.
너희는 어떻게 해도 그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그것은 지옥 끝까지
도 너희를 쫓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유혹에 저항하지 말고 그저 그
것에서 돌아서기만 하라. 내 쪽으로 돌아서고, 나를 닮지 않은 모
든 것들을 외면하라.
그러나 이 여행에서 너희가 가는 곳에 '이르지 않을' 수는 없기 때
문에 잘못된 길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둬라.
그건 단지 속도의 문제, 즉 단지 언제 그곳에 닿을지의 문제일 뿐
이다. 그러나 그조차 하나의 환상이다. 사실 '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과 '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너희가 자신을 체험하는, 항상이라는 영원한 순간.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곳에 이르지' 않을 방도가
없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 너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이다. 그저 지금 자신이 무엇이 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갖고 있는지 깨닫고,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만
살펴보라.
삶의 목적은 어딘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너희가 이
미 그곳에 있고, 예전에도 항상 있어왔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너희
는 항상 순수한 창조의 순간 속에 있으며,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
러므로 삶의 의미는 '자신'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체험
하는 데 있다.
* 음악 *
Sanctus - 리베라 소년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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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나는 나를 계속 창조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이걸 이해하는건 힘들고 괴롭습니다.ㅠ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