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몽의 변증법
Th. W. 아도르노·M. 호르크하이머 / 김유동 옮김 / 문학과 지성사
대학에 입학해서야 진정한(?) 의미에서‘타자’를 경험하고자 했을 때,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했을 때, 나는 타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야기 할 것이 없다는 허탈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아가 이 땅의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외부들의 이해관계의 인과에 이해 급조·이식되었다는 또한 그것은 ‘민주’라는 기표에 불과한, 단 한번도 이 땅에는 그들이 말하는, 헌법 제 1조의 그것이 단 한번도 실천되거나 신중하게 모색되어 본 적이 없다는, 한데 나는 김영민의 말을 빌려 본다면 민주화 운동 그 운동에 ‘단 한방울의 땀방울도 보태지 못했다는’것은 나로 하여금 한번 침묵하게 했고, 나에겐, 나의 세대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단지 하루키의 소설 속의 인물이 말처럼,“부자들은 다 죽으라지”식의 냉소 쪽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소위‘사건’이라는 것이 굳이 거시적 차원에서만 다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자코메티는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이제야 내게 뭔가 일어났군’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즉 사건이란 필연·우연을 동반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천천히 곱씹어 보면 내가 목격하는, 내 시각이 포착하는 ‘풍경의 발견’은 그 자체가 사건이다. 나를 둘러친 자본주의는 나에게 침묵과 딱 그만큼의 할 말들을 넘겨준다.
이들의 기분도 그러했을까? 2차 대전 중에 집필되었다는 이 책은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전쟁의 인과를 소급해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하고 묻기보다는 망명의 시각 탓일까? ‘내 그럴 줄 알았어’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저자들이 말하는 ‘계몽’이란 어떤 것일까? ―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p25)”단순히 보자면 ‘나’란 존재는 교수가 들고 들어오는 출석부의 호명에, 주민등록번호에, 일련의 자격의 증명 등의 계산 가능한 범주 안에서 현상을 유지한다는 미명(잉여의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아래 부유하고 있다. 그것은 흘러 넘치고 시간 위를 활주해 들어간다. 그것은 분명 관리 당하고 있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밖의 것들은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계몽’에게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나아가 결국에는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이 ‘가상Schein’으로 여겨진다(p28)”지나친 감이 없지 않겠지만, 나는 ‘4천만이 붉은 악마가 될 때까지......’하는 한 이동통신 회사의 광고를 볼 적마다 일상적 파시즘의 징후를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하나’로 포섭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나아가 우리가 그러한 오만가지의 동일성의 늪에 걸려들 때, 그 밖의 차이들은 과연 동일성의 대칭에 있기에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연스러움’이라는 시민적 이상(理想)은 ‘무정형한 자연’이 아니라 중용의 미덕을 의미한다. 난혼과 금욕, 풍요와 기아는 서로 대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체시키는 힘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이다.”(p63)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말하는 ‘함열’이 언뜻 떠오르는 위의 인용문은 자칫 냉소주의로 치닫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만 같다. 그동안 이성이라, 합리적이라, 합목적성이라 하는 계산 가능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반감은 더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과학의 진보는 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겠지만, 기실 그 이상으로 우리를 관리 용이성 내로 끌어들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계몽이란 훈육이나 강제가 아니라 ‘손 안대고 코풀려 하는’그 무엇임에 틀림이 없다. 계몽은 단지 하나의 기준만을 설정할 뿐이다. 어느 누가 소리치지 않아도 이제 사람들은 알아서 줄을 선다. 번호가 매겨지자, 우리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각자는 절대적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로서 절대적인 무(無)p221’가 되어버린다. 요컨대 군대에선 하나의 언덕을 깎아 낼 병력의 숫자만이 중요한 것이지, 천식을 앓고 있는 김일병, 병든 홀어머니를 뒤로 한 채 군에 온 이상병 따위는 고려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데, 소위 ‘사제’는 어떠한가? 사정은 군의 실태에서 몇 걸음조차 앞서 있지 못하다. 그것은 병력에서 인력으로의 대체를 의미할 뿐이다. 인간의 출생과 죽음은 관리되고 그러한 공리계는 “누가 죽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보험회사의 책임과 사건 사이의 관계다.(p135)”하고 말하는 듯 하다.
이러한 공리는 단지 우리의 일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압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문화 전반이 모두 그러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 들이 보는 문화란 저급문화와 고급문화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것인가? 아닌가? 또는 분류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모양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이 보는 문화란 생산자만이 있고 소비자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대의 소비자란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매혹과 현혹의 대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소비자가 직접 분류할 무엇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창작자가 최초에 의도하지 않은 미메시스의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과정을 거쳐 오려지고 색이 칠해져 우리에게 던져진다. 우리의 경각상태는 무기력으로 전유되어 습관화의 귀결을, 무엇보다 그러한 문화의 판단과는 무관하게도 타자들의 대화에 참여하지 위해‘앎’의 대상이 된다. 한데, 나는 HOT노래와 신화의 노래에서 큰 변별력을 찾을 수 없다. 또한 SES의 노래를 핑클이 부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언제나 예쁘장한 용모의 스타는 대체 가능한 그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기준과 규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소꼬리’도 아닐진대, 재탕의 연속이다. 마치 ‘내가 젊었을 때는......’하는 말이 영원히 회자되듯이 말이다. 또한 괴성을 지를 수만의 여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기 중이다. 스타와 대중은 별개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시기를 함께 동행해 나갈 뿐이다. 그리곤 사라진다.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이 자식아, 조선놈을 잡았는데 수상하면 어떻구 아니면 어떻다는 거야? 신문에 뭐가 어떻게 됐다구?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이런 말이야. 조선놈이면 그만이야, 알았나? 조선놈이면 나쁜 놈이야. 조선 놈이기 때문에 수상한 거야, 증거가 있어서 수상한 게 아니란 말야. 조선놈이기 때문에 증거가 있을 터이구, 그 증거는 수상한 게 틀림없단 말이야, 알겠나. 조선놈이니까...... 에익 이 밥통 같으니라구.” ― 최인훈·『서유기』·문학과 지성사·p.31.
‘감시와 처벌’은 ‘죄와 벌’의 인과응보만이 다가 아니리라. 죄는 벌로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법(규칙)을 재전유한다. 나는 가끔씩 아우슈비츠는 대량 학살의 양상으로만 재현되지 않았을 뿐, 그러한 차별과 폭력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화의 과정은 속도의 문제를 해결했을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자. 인간은 딱 그만큼 편해졌고, 바빠졌다. 이러한 속도와 생명의 연장 등등의 발전은 뻔히 자행되고 있는 폭력에 교묘한 덧칠을 한다. 그것은 번번히 “아무런 저항 없이 현실에 부지런히 적응해나간다는 비합리성이 개인들에게는 이성보다도 더 이성적으로 보인다.(p305)” 결국 우리의 이성이란, 반 이성인지도 모르며 , 오히려 반 이성이라 배척되고 폄훼되어온 무수한 가치들, 그에 따른 희생에 빛나는 이성을 우리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저자들이 본 계몽이 이토록 신물이 나는 것이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내 눈앞의 계몽의 공리는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분명 계몽되어진 존재이거나 계몽되려는 존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들이 개정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대로, 이 책은 당분간(?) 유효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잔혹한 세계 속에서 ‘행복한 삶’이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몰염치한 것이다. 이 희생자들이 ‘본질’을 구현한다면, 저 행복한 삶은 ‘무(無)’인 것이다.”(p181)
“굳이 말리지는 않네마는 다시 잘 생각해보게. 저 사람들도 원래부터 저렇지는 않았어. 다 전쟁 탓이야”― 최인훈·『서유기』·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