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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기도 전체는 ‘마침 영광송’으로 종결된다. 사제는 성반과 성작을 들고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며 찬미하는 감사기도가 이렇게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로 끝맺음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의 전 생애의 목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최후만찬 석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당신 삶의 중심에 두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청하셨다(마태 6,10). 또한 아버지의 뜻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둔 힘들고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 뜻에 충실했던 성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광스럽게 해주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하시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셨다. 이는 창세기 11장 바벨 탑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제쳐놓고 자신들을 드높이려는 잘못된 길을 갔다.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하지만 이런 오만은 서로의 말이 뒤섞여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세상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창세 11,7-9). 이들의 허망한 모습은 하바쿡 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제 힘을 하느님으로 여겨 죄를 지은 자들, 그들은 바람처럼 지나가 사라지리라.”(하바 1,11).
예수님은 오만으로 인해서 불행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신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성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매사에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찾으려는 노력은 우리 안에서 소중한 덕성이 자라나게 하는데,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들을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우선 성실한 자세를 길러준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의 이야기에 나오는 무명의 조각가가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독일의 퀠른 대성당 전면에는 까마득히 높은 두 개의 종탑이 있다. 이 종탑 맨 꼭대기에 아름다운 꽃 모양의 조각이 있다고 한다. 그 조각은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이 조각과 관련해서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성당을 짓던 당시의 일이다. 무명의 한 조각가가 높은 종탑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꽃잎 하나하나를 아주 정성껏 열심히 조각했다. 하루는 같이 일하던 인부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여보게, 무얼 그리 열심히 조각하고 있나? 저 밑을 내려다보게,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데, 누가 그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라도 하겠나? 대충 해두게나." 따지고 보면 그 인부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데, 굳이 세밀하게 조각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조각가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밑에서 누군가가 보아주기를 바라지 않네. 내가 열심히 조각한 이 작품을 보아주실 분은 바로 저 위에 계신다네."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이 조각가처럼 누가 보든 안 보든 성실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 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하느님의 영광과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을 거두고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다. 아무리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도 하늘의 도우심이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데,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기 혼자의 힘으로 성공을 이룩한 것처럼 우쭐대고 거만하게 군다.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태도를 취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한 때 바리사이였던 바오로 사도는 성공을 거두고도 겸손할 줄 알았다. 바오로 사도가 바르나바와 함께 리스트라에서 전교를 하다가 앉은뱅이 한 사람을 고쳐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곳 백성이 바르나바를 제우스 신으로, 바오로를 헤르메스 신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두 사도는 그들 사이에 뛰어들어 옷을 찢으면서 이를 극구 만류하였다(사도 14,8-20). 두 사도는 치유 기적이 하느님의 업적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빌미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키는 교만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헌신적인 봉사로 인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지만, 결코 자기를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하느님 손에 쥐여진 ‘작은 몽당연필’에 불과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물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를 지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업적과 성공이 한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 세상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인간 안에는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 칭송 받고 싶은 욕망이 아주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교황 요한 23세(+1963)도 이런 욕망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개미나 모래알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우쭐대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내가 스스로 위대한 사람인 양 착각하고 있다. 나는 무에서 나왔는데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 때문에 스스로 우쭐대고 있다. 나는 마땅히 창조주께 헌신해야 한다. 주님, 제 눈의 빛이신 당신께서 제 앞으로 지나가실 때 큰 소리로 당신을 부르며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이 눈먼 사람의 소리를 들으소서.” 교황 요한 23세는 예리고의 맹인이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애원했던 것(마르 10,46-52)처럼 스스로도 영적인 눈을 떠서 자기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있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영적인 눈을 떠서 자신의 업적과 성공 앞에서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루카 17,10)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영광과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일이 어그러졌을 때에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이에 집착하는 사람은 실패를 당하면 절망과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생동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보살피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던 마더 데레사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더 데레사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대통령, 수상, 국왕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참석자 모두가 고급 의상과 화려한 보석으로 꾸미고 있었지만 마더 데레사는 언제나 그렇듯 옷핀으로 고정시킨 낡고 소박한 사리를 입고 앉아 있었다. 한 정치인이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마더 데레사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더 데레사에게, 그 자신이 하는 일이 전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마더 데레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천만에요. 전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주셨기 때문이지요."
현대와 같이 자아실현과 개인의 자유를 거의 절대시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뜻을 우선시 하라.’는 말은 호소력이 없어 보인다. 내가 아닌 하느님을 앞자리에 두는 것은 자아실현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여기거나 어디에 속박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앞자리에 두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남의 이목에 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에게 예뻐 보이기 위해서 골다공증이 걸릴 정도로 단식하고, 고통스러운 성형수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명품 옷을 사 입히고 해외 유학이나 연수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대만큼 되지 않아서 실망하기를 거듭하고 자책과 자학 속에 사는 경우도 적지 많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영광과 뜻에 우선권을 둔다면 타인의 시선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성실하게 살 수 있고, 교만과 명예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겸손할 수 있으며, 실패를 당해도 절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과 뜻을 우선시하는 삶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내적 평화를 선사한다.
마침 영광송을 바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나는 일생동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면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너희 역시 먼저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 뜻을 생각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려라. 그러면 너희는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누릴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에서 천사들이 노래했던 것처럼 너희도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평화를 누리도록 하여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생활성서> 08년 1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