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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내 몸 상처투성인데
세상은 상처를 준 적이 없다고
하얀 해가 떠 있다
상처
백지장에 베일 때가 있다
상처를 지그시 누르고
그를 보면
그는 속도 없다
그저 얇디얇은
하얀 몸이
그의 전부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모두 백지 한 장이다
못
네 가슴에 못을 쳐서라도
네가 원하는 것을 걸 수 있게 해야겠다
왕자님
다섯 살배기
유치원 다녀오더니
자기는 왕자님이
아니라며 운다
유치원 선생님의
손가락이 쑝 쑝
왕자님 공주님을
만들어낸단다
세 살배기
세 살배기
둘째 녀석이
콧물 질질 흘리며
바지 줄줄 흘리며
수퍼 앞에서
얼씬거린다
아빠와
과자 사던 기억
수퍼 유리창에
어른거린다
평등
일곱 살배기
큰 놈이
손가락을 다쳐
대일밴드를 붙이자
세 살배기
작은 놈은
그게 부러워
안 아픈 손가락
아무데나 붙이다
엄마 아빠한테
혼난 저녁
포크로
사과를 찍어 먹다
손가락을 찍었다
엉엉 우는 놈
대일밴드를 붙이자
울음 뚝
생글생글
따라하기
일곱 살배기
따라하지마
세 살배기
구박 준다
그림 그려도
옆에서
연필 죽죽 긋고
노래 불러도
옆에서 혀 짧은 소리
하지마
소리치면
하짐마
맞대거리하고
그렇게 커 간다
국민
아빠, 대통령이 뭐야?
정치하는 사람
정치가 뭐야?
나라살림살이
대통령이 최고 높아?
응
아빠보다?
아니
아빠는 뭔데?
국민
국민이 최고 높아?
그래
야! 우리 아빠 국민이다!
네 살배기
여덟 살배기 형아
초등학교 입학식 하는데
네 살배기 동생
형아 가방 뺏어 매고
옆에 서 있습니다
저도 학교에 다니겠다고
불러도 못들은 채
잡아끌면 악을 써대며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차렷 자세로 듣고 있습니다
네 살배기
- 첫 소풍
과자 사 놓고
좋아라 좋아라
기다린 소풍
엄마랑 안가면
못 간다 해서
아빠랑 소풍가자
이웃마을 냇가로 갔지요
여기가 소풍이야?
과자봉지 양손에 들고
모래밭 걸어가는데
웃음이 썩 해맑지 못하네요
와삭와삭 새우깡 먹으며
아빠보고 웃는 것이
다 아는 것도 같고요
잃어버린 토끼
가까스로 잡아와
여덟 살배기에게 묻는다
집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힘들고
잡아먹을까?
-산에서 살게 하면 되잖아
아빠
어린 시절
입술에서 끊임없이
검은 딱지를 떼냈다
급식 빵은 반쪽만 먹고
반쪽은 책보에 싸 두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과학자가 될 꿈을 꿨다
헝아 엄마 죽었어
복숭아나무 밑에 오면
겁이 났다
부스럼이 머리에 가득한 동생들이
빤히 쳐다봤다
어머니 생각
너는 공부도
외상으로 배우냐
또 장날 지나야
낼 수 있다고?
두 시간이나 꿇었던
다리를 주물러 펴고
책보 옆구리에 끼고
신작로 따라
집으로 와
먼지 폴싹이는 부엌에서
파리 떼 쫓으며
개떡 찾아 먹고
찬물 벌컥벌컥 마시고
냇가 밭에 가면
밭고랑에 하얗게
웅크리신 어머니
엄마...엄마...
기성회비 줘
......
발 동동 구르며
울부짖어도
미동도 않으셨던 어머니
어둑어둑 땅거미 질 때까지
김만 매셨던 어머니
어머니
너희들만 다 키우면 천리만리 날아갈 거다!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 짹짹거리는 우리들에게 어머니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다
자식들이 월급쟁이가 되어 ‘효자’ 노릇을 하기 시작할 때 어머니는 날 수가 없었다 걸어 다니기도 힘들어 하셨다
엄마, 하고 싶은 게 뭐야?
나, 하고 싶은 게 아무 것도 없단다
어머니께서는 초점 없는 눈으로 먼 산만 바라보셨다 그렇게 미워하셨던 아버지는 가셨는데, 그 빈자리엔 휑하니 바람만 불었다
아내의 자리가 없어진 자리엔 어머니의 자리도 없어진 것이다 너희들만 크면...... 우리가 다 큰 자리엔 엄마의 자리도 없어진 것이다
엄마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엄마가 부르시나 보다
너무 먼 거리라
소리는 들리지 않고
목젖 아래가
아리다
저승 마을 어디선가
엄마가 계실 텐데
아들이 이승에 있는 줄
아실 텐데
무심코 부르시는 걸까?
아버지 무덤에
아버지 무덤에
들꽃 몇 송이 피었다
절대로 보여 주실 수
없었던 속내
묵묵부답으로 지켜오신
전 생애를
돌아가시기 전
큰아들에게
무언가 말씀하실 듯
바라보시던 그
눈빛
겨울 밤
이렇게 추운 날 새벽이면
큼 큼
아버지 기침 소리 들린다
메케한
마른 짚 타는 냄새 난다
동그랗게
잠든 아이가 있다
시험답안지
찌르릉-
두 손 깍지 끼고 머리 위로
맨 뒷줄 일어서
앞으로 답안지 걷어 오도록
번호 손서대로
59개 답안지를 손에 쥐고
복도로 걸어 나오면
손아귀에서
달랑이는 아이들 목
핏기 없이 쳐다보는
얼굴 눈
몸통만 남은 교실에
낄낄대는 웃음소리
비명지르는 책걸상 소리
쥘 르나르의 뱀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오느라
몸이 길쭉해졌어
미끈미끈
눈도 쪼그만해졌네
이제 얼마나 자유로운지
몸이 너무 길다는 느낌도 안 들어
스르르
가는 대로 길
몸이 길
훤히
이 세상에
내 지도가 보이네
자유
그대 자유지
오랜만에 고향에 와
자전거 타고 다니며 향수에 젖지
국민학교 동창 만나
살아가는 얘기 서럽게 나누고
시내에서 백차 지나가는 것 보며
중학교 동창 녀석일지도 몰라
차창에 비치는 견고한 옆얼굴 흘깃거리지
신문 뒤적이며 세상을 읽고
TV 채널 돌리며
세상을 선택하기도
지우기도 하지
그러나
저쪽 세상
빤히 보이는 저쪽 세상에
손 뻗쳐 보게
손끝에 차가운 감촉
소리쳐 보아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걸세
들리지 않으니까
빤히 보이는 저쪽 세상
그대의 손이 닿지 않는
투명한 유리 바깥에
그런 금역이 있다네
갑각류
갑각류는 언제부터 단단한 껍질을 뒤집어쓰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연분홍살을 부드럽게 스쳐가던 물과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모래알들을 잊기로 결심하게 되었을까
잊는다는 건 얼마나 자신을 망가뜨려야 가능한가
표정 없이 산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저들을 보면 내 지나간 삶들이 되살아난다
나도 한 때 갑각류로 견뎠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갔다
집에 와서 표정을 풀려고 해도 풀어지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서서야 겨우 표정이 풀렸다
하지만 꿈자리는 늘 뒤숭숭했다
유배일지1
- 용흥寺
나는 여기 용흥寺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알 수 없다
왜 여기
겨울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이 계곡에 옷이 다 벗겨진 채
갇혀 있는지
살결이 오소소 소름 돋으며
기뻐하는 걸 보면
꽤 오래 유폐된 것 같다
뭔가 목울대를 간질이는 게 있지만
나는 이 따스한 햇살에 익숙해져 있다
저 머리 파르라니 깎은 간수들도 나를 이제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다
가끔 팔을 활기차게 흔들며
내 곁을 지나치곤 하는데
이곳을 탈출하지는 말라는
무언의 암시, 경고가 아닐까
때 되면 정량의 밥도 주고
밤엔 꼬박꼬박 연탄불도 갈아 준다
아,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이란 말인가
제비꽃
세월, 세월만
흐르면 어떡하나?
바라만 보다
바라만 보다
훌쩍 마흔 넘기고......
묏자리 마른 풀들 사이에
하늘거리는 제비꽃
꼭 그만큼 웃는
당신을 봐야 하는데
노숙자들
신발처럼 어지러이 널려 있다
이 세상이 신기엔
너무 낡아버린 몸
버릴 수 없는 신발들
어느 발이 그들 몸을
콱! 내리 찍으면
아주 미약하게
신발 신는 소리가 나리라
줄타기
세상을 반으로 가른
가는 줄 위의
저 사람은 불안하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저 지점은
중립지대가 아니다
어느 한 쪽으로의 기울어짐을
다른 한 쪽의 기울어짐으로
간신히 버텨내는
저 길은
어떤 수리공
나는 수리공이야
고장 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면서도
은근히 고장 나길 바라는
고치는 걸 즐기는
개수대에 놓인 그릇들을
말끔하게 수리하여
찬장에 정돈하고
이 방 저 방 흩어진 아이들을
깔끔하게 수선하여
학교에 보내고
또 어디
손 봐야 할 데 없나
옷가지들이군
바닥에 먼지도 보이네
한참 수선 떨다
아함, 이제 나를
수리해 볼까
한잠 때리고
저 남자는 어떻게 하지?
에이, 머리 복잡해
고물이 되어 가는 남자
털털털 웃음 지으며
녹슬어 가는 남자
공원에서
의자 위의 낙엽 하나
얼마나 굴러다녔는지
온 몸이 새까맣다
물장난 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낙엽에게도
저렇게 고운 손을
뾰족뾰족 내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휘리릭-
바람 한줄기에
낙엽은 또 어디론가
마구 굴러간다
논둑길
논둑길을 자전거 타고 가는데
손수레를 끄는 농부가 앞서 간다
미안해 멀찍이 떨어져서 간다
해는 졸리운 채 가다
눈 게슴츠레 뜨고 내려다본다
논둑에 오종종 앉아 있던 콩들도
논에서 누런 이 드러내고
두런두런 얘기하던 벼들도
곁눈 뜨고 쳐다본다
쑥스러워 고개 숙이고
멈칫멈칫 가는데
마침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농부 아저씨
손수레 공터 가에 세우고
짐짓 쉬는 듯
먼 산 보신다
나는 재빨리 자전거 페달을 밟아
지나쳐간다
고맙습니다
우수수수수
콩들과 벼들이
한꺼번에 웃고
해의 눈웃음에
세상이 눈부시다
민들레
산길을 걷다가
솜털 씨앗들 보송한
민들레를 보았다
후- 후- 불었더니
송송송 날아 날아 흩어진다
씨앗 몇 개나 꽃 피울 수 있을까
그 보드라운 것들을 손에 안아들고
흙에 묻어주기로 했다
마땅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아, 묻어줄 곳이 없었다
어디나 생명이 꽉 차 있었다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거나
개미들의 마을이거나
곤충들이 바삐 오고가는
길목이었다
실밥처럼
전철안 사람들
마음이 실밥처럼
붙어 있다
노약자석에 앉은
추레한 할머니가
옆 사람 실밥을
만지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다
옷에 뭐 붙었네
툭 건드리면
술술술
실타래처럼
풀려나올 마음들
동상 같은 사람들
뱃속에 잔뜩
마음이 뒤엉켜 있다
집에 오다
현관문을 닫는다
꼬리처럼 따라온
검은 길을 뭉텅 자르고
폐휴지 빈병 빈 박스...... 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쇠똥구리처럼 밀고 올라가는
할머니의 환영도 지우고
검게 탄 몸으로
어기적어기적
따라오는 겨울나무도
모질게 돌려보내고
진눈깨비를 흩날리던
하늘도 보이지 않게
으- 으-
노숙자의 짐승 같은
신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찰칵 현관문을 잠근다
짐승처럼
그는 나를 실컷 뜯어 먹다 갔다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나에게 그는
꺽 꺽 트림을 해 대며
빨리 상처를 치유해서
인간답게 살라고
볼을 톡톡 두드리고 갔다
웅크려 있는 나에게
멀찍이서 바라보던
옆집 아저씨가 왔다
왜 이렇게 계세요?
그는 나의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며
아직 먹을 데가 남아 있나
이 반 죽은 놈이
혹 달려들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여기저기
찔러 보았다
나는 눈을 빛내며
괜찮아요
이빨을 덜덜덜 갈며
그에게 건재함을 과시했다
빨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그가 부축하려 하자
나는 그의 팔을
죽을 힘을 다해 뿌리쳤다
그래요?
그럼 쉬세요
그제서야 그는
슬금슬금 물러났다
짐승처럼 웅크려서
내 상처를 핥고 핥았다
환경 스페셜
- 생존의 기술
낫 모양의 앞다리로
정확히 마디 사이에
기습적인 공격에
사회성이 뛰어난
함께 키워야 할 애벌레를 식량으로
먹이가 절대 부족한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당신은 오늘 참 잘 하셨어요
사장 부장에게 굽실거린 건
아주 지혜로운 생존의 기술이었어요
김대리에게 함부로 대한 것도 불가피했구요
지금은 당신이 휴식을 취할 시간
마음을 편히 하세요
내일 아니 오늘 밤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그때마다
당신이 살아남는 게 최고 중요해요
지금은 느긋이 누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독을 품으세요
당신은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고 계신 거예요)
생존을 위한 기술은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대들 때
- 發芽
아이가 대들 때 아득했어요 나보다 덩치가 더 큰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내 앞에 서 있을 때
아, 뚜껑이 열리면서 내 몸이 위로 치솟아 올랐죠 핏기가 사라진 창백해진 몸으로
간신히 서 있었어요 내 몸이 낡은 껍질처럼 휘청거렸어요
물에 관한 우화
홍수를 만난 사람들이
물을 공격하기로 했다
고요히 진을 치고 있는 물을 향해
활을 쏘고 창으로 찌르며
총공격을 감행했다
물의 심장부를 공격하라!
물은 풍비박산
허연 거품을 뿜으며
비명을 질렀다
깊숙이 깊숙이
물속으로 물속으로 쳐들어간 사람들은
어디서고 물을 볼 수가 없었다
산소와 수소들이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물을 찾아
아무리 헤매어도
물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물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은 산소와 수소들의 마을을
빠져 나오며 중얼거렸다
어느 흙 알갱이에 관한 우화 1
흙 알갱이 하나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일까?
막막한 허공을 보고
밤하늘에 뜨는 달과 별들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혼자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을 닮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야! 정상이다!
정상에 도달했다!
천둥소리 같은 게 들리더니
시커먼 구름 같은 게 다가와
그의 온 몸을 짓밟았다
야! 참 좋다!
정상에 서서 보니
이렇게 경치가 좋으네
그는 온 몸이 짓이겨지며
숨이 막혔다
정상?
아, 내가 정상이란 말인가?
그는 점점 혼미해져 가며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만
생각했다
어느 흙 알갱이에 관한 우화 2
흙 알갱이 하나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일까?
두리번 두리번 거리던 그는
옆에도 위에도 아래도
저와 같은 흙 알갱이가
무수히 많은 것을 알았다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을 벗어나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산이었어
이제는 언덕이군
그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운명을 알고는
마냥 기뻤다
동물의 왕국
동물의 왕국 한 귀퉁이에
사자 거지 가족이 살고 있다
평원 중앙에는
풍성한 먹이에 둘러싸여
유유자적하는 초식동물들
멀거니 바라보는 사자 식구들
쪼르륵-
자식들 뱃소리를 견디다 못한
엄마 사자가
슬금슬금 물소 떼에게 다가간다
랄랄랄-
원무(圓舞)에 빠진 물소들
한 푼만 줍쇼
엄마 사자가 애처로운 눈으로
물소들을 좇아간다
늙은 물소 한 마리가
사자 엄마의 간절한 호소에
멈칫멈칫 걸음을 늦춘다
내 한 평생 즐겁게 살았으니
이 한 몸 보시하리라
늙은 물소가 털썩
엄마 사자 앞에 눈을 감고 주저앉는다
엄마 사자 감격하여
고마워요, 물소님. 흑흑
여보, 얘들아-
우르르 몰려오는 아빠 사자와 새끼 사자들
비로소 사자 가족들
기쁨에 들뜬다
그
그가 왔다 가면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어둑한 들판에
볏가리를 남기기도 하고
처얼썩 철썩
흘러가는 냇물 위에
다리 하나
얹어 놓기도 한다
오늘은
저 산마루에 등불 하나
장난스레 걸어 놓았구나
의자
밤 고속버스 안에서 무심코 뒤돌아보는데 아, 의자가 희미한 전등 아래 앉아 있었
다 누구의 빠져나가지 못한 혼일까 육체가 쑥 빠져나간 그 순간 그 자세대로 점잖
게 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고독해 보였다
어, 저기 내장이
시내버스가 덜컹 멈추자 손잡이를 잡고 간신히 일어서던 중년 사내 내장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문 쪽으로 황급히 다가가는 사내 어, 아저씨 저기 내장
이...... 뒤돌아 본 사내 잠시 당황한 빛이 스치더니 이내 평상심으로 돌아와 김 모락모락 나는 벌건 내장을 집어 들고 가슴속으로 쓱 집어넣곤 후닥닥 내렸다
수도승
그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나무가 된다
땅 속 깊이 깊이
발을 들이밀고
가느다란
숨결을 모아
하늘로 하늘로
피어 올린다
그렇게 나무로
붙박혀 있다가
한 발짝 성큼
내딛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작은 구멍
작은 구멍에서 태어난 그는
항상 자신을 작은 구멍 속에
집어넣으며 살아왔다
바늘 구멍만한
대학의 문도
취업의 문도
자신의 몸을 한껏 오그라뜨려
끝내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동글동글
걸어 다녔다
광활한 세상은 늘 불편했다
시간만 나면
작은 구멍을 찾아 나섰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쭈글쭈글해졌다
이제 작은 구멍에 들어가기가
한결 쉽겠군
그는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
어느 날-
그는 작은 구멍에 자신을 심기로 결심했다
까만 씨앗처럼
동그르르
작은 구멍에 자신의 몸을 던져 넣었다
사람들이 흙을 덮고
쾅쾅쾅
마구 짓밟았다
이런 놈은 죽어야 해!
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나이 들기
나이 들면서 바람이 내 몸을 휭휭 지나간다
처음엔 몸 주변에서 어른어른 눈치를 보더니
이젠 거침없이 지나간다
속수무책 지나가는 바람들을 힘없이 바라본다
서서히 엷어지는 몸
그러다 완전히 투명해지는 날 오겠지
마음만 남는 날
삼라만상 다 마음으로 이루어졌음을 느낀다
마음들이 얼기설기 짜여진 산
마음이 쫙 활개를 펴고 있는 나무
포르릉 날아가는 마음 하나
고요히 떠다니는 구름 마음들
나도 그런 마음들과 서서히 교유하기 시작한다
점점 더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꽃
땅 속에서 태어났지요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갔지요
그 힘으로
내 마음의 기둥을 세워갔지요
어느 날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하늘을 올려다봤지요
태양을 보자
하하하하하
마구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온 몸의 피가
솟구쳐 올랐어요
맞다
그녀는 책을 읽는다
맞다
그녀는 인터넷 검색을 한다
맞다
그녀는 공부하러 간다
맞다
뱅글뱅글 돌다 돌아온 여기
맞다
풍선
애들은 풍선을 좋아해요
풍선을 들고
하늘하늘 날아가죠
얘야, 풍선이 참 좋구나
좀 만져 봐도 되겠니?
그럼요, 아저씨
그래 느낌이 참 좋으네
네 몸 전체가 풍선이구나
아저씨, 자꾸 주무르지 마세요
풍선이 터져요
괜찮단다 터지면 또 사면 되지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아파요
터지겠어요
가만히 있으래도 얘야
아, 아, 아저씨 터져요
몇 개의 붉은 살점이
계곡에 흩어져 있다
자전거 타기
초등학교 앞이다
조심조심
양손으로 브레이크를 꽉 잡고 간다
그런데, 앗!
한 아이가 앞으로 돌진해 온다
나는 얼른 멈춰 섰다
아이는 다다다다닥 뛰어 오다
내 앞에서 딱 멈췄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씩 웃자
그도 함께 웃는다
(이게 우리의 암호다 나는 아이 나라에서
어른 나라로 파견된 첩자다)
나무
씨앗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지금도 힘겹게 힘겹게 탈출하고 있다
죽음
정신없이 놀다 엄마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처럼
한 여름 밤의 꿈
우리는 술 한 잔씩 먹고
하늘로 돌멩이를 날려보냈다
내 꺼는 별이 될꺼야
히히히 킬킬킬
어디서 퍽 소리가 났다
스쿠터를 타고 가던 두 사람이 쓰러졌다
짱구가 던진 돌에 맞은 게 분명했다
난 하늘로 날렸는데...
쟤들도 하늘로 날려고 했나 봐
술 먹은 거 아냐! 당신들 술 먹었어요?
푸슥거리며 일어나는 걸 보니 아이들이었다
이마가 깨진 아이는 런닝 셔츠가
발갛게 물들어 갔다
야, 빨리 타!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잡아채 뒤에 태우곤
되짚어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거야?
오토바이 훔쳐서 오던 놈들 아냐?
......
하늘에 박혀있는 돌멩이들이
하얗게 떨고 있었다
어떤 사랑
키스가 어쩜 이리 맛있지?
자기 혀는 참 달아
둘은 서로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둘의 몸은 서서히 텅텅 비어 갔다
자기 목소리가 이상해
굴속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아
응? 그래?
자기 목소리도 그러네
둘은 서로의 야윈 모습을 보다가
서로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부스스스
둘의 몸은 매미 허물처럼 부서져 내렸다
껍데기들이 바람에 불려갔다
자기야, 자기야
둘은 안타까이 서로를 부르며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갔다
보석 찾기
어릴 적 냇가에서 예쁜 돌멩이들을 주우러 다녔다 사박사박 모래를 밟으며 뙤약볕 아래를 걸어 다녔다 그 예쁜 돌멩이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 막막했던 마음과 구슬 같은 예쁜 돌멩이를 발견했을 때의 환희가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처럼 보석을 찾아다닌다 사람들 속을 다니다 보면 보석이 보일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섬광처럼 보석이 피어날 때가 있다
사람浴
산림浴 일광浴 해수浴......
나는 사람浴을 하고 싶다
나눔
전철역에서 교통 카드를 충전했다 역무원은 교통카드를 창구 안쪽에 놓았다 나는 성문 같은 창구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냈다
역무원은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다 아마, 어떤 나쁜 승객에게 당했나 보다 막무가내 달려드는 그런 무지막지한 승객을 어찌하랴?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나는 그의 스트레스를 나눠가져야 한다 아주 잠깐, 내 표정은 굳었다가 풀렸다
예뻐서 먹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의 어느 바닷가 주민들은 게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너무 예뻐서’라고 한다 빨간 게들이 바닷가를 종종종 다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우리는 세상을 다 본다 눈으로 보고,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본다 세상이 훤하다 훤한 곳에만 사는 우리는 쉴 곳이 없다 늘 피곤하다 쉬고 싶다 하지만 어둠은 어디에도 없다 항상 불을 밝혀 밤낮으로 알을 낳고 살을 찌워야 하는 닭들처럼 우리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우리에겐 어둠 한 조각이 있어야 한다 바라볼 수 없는 곳, 손이 닿을 수 없는 곳, 다가가기 두려운 곳, 그래서 이 세상이 아닌 곳 그 어둠 한 조각의 힘으로 우리는 신나게 살 수 있다 어둠은 마르지 않는 샘 같은 것이다
조그만 예쁜 게를 어둠으로 만들어 즐겁게 사는 방글라데시 바닷가 주민들, 어둠은 이렇게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만들면 되는 것인데
누 떼
누 떼가 강을 건너고 있다 악어들이 도사리고 있다 악어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가 어린 누를 입에 문다 발버둥치는 누 다른 누들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나 간다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찬다 서로 힙을 합쳐 악어를 물리치면 될 것을......
강둑에 올라 온 어미 누가 자식을 찾아 되돌아간다 하지만 강물에 휩쓸려 가는 어미 누 이렇게 죽는 누가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누들보다 더 많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
누들도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절대 후회하지 않았으리라
황조롱이
털 보송한 황조롱이 새끼가 죽었다
엄마 황조롱이의 커다란 눈에 깊은 슬픔이 고여 있다
잠시 후
엄마 황조롱이가 새끼를 먹는다
와작와작
깃털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는다
훌쩍 날아간다
새끼와 하나가 되어
늙은 숫사자
가족을 거느리며 호령하던 숫사자는 늙어 힘이 없게 되면, 힘이 센 자식에게 가장 자리를 빼앗기고 가족에게서 쫓겨난다고 한다 사냥할 실력도 없어, 평원을 떠돌다 쓸쓸히 죽어간다고 한다
이때 늙은 숫사자는 비로소 눈부시게 아름다운 평원을 보리라 권좌에서는 보이지 않던 온갖 삶의 비의가 드러나리라 높은 곳에서만 산다면 숫사자는 삶을 다 누리지 못하고 한 생을 마칠 것이다
모순(矛盾)
창은 찌르려 하고
방패는 막으려 하고
둘은 공존(共存)할 수 없다 한다
하지만 지금껏
그 둘은 잘 살고 있다
창은 찌르는 흉내만 내고
방패는 막는 흉내만 내며
(그러다 가끔 불상사가 일어나지만)
그 둘은
더 정교해지고 세련된다
그 위험한 놀이는
점점 관객을 모으고
이윽고 세상은
그 둘의 판이 된다
사람들은
그 놀이판에서
아슬아슬 재미있고
잠자리가 늘 뒤숭숭하고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때 이미
지금의 기쁨을 알았겠지만
그때의 기쁨은
지금 모르리라
비눗방울처럼
피어나고 꺼졌던
내 작디작은 우주들
그 찬란했던 시절들은
없었으리라
지금은 더 지혜로워졌지만
무지했던 그때의
허다한 실수와 방황들도
내게는 어떤 여행보다
즐거웠다
난 지금도 좋지만
그때도 너무나 좋다
거지 성자
쾰른에 사는 거지 성자는
수십 년간 이도 닦지 않고
무공해 식품점에서 기한 지난
음식물을 얻어먹으며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잔다고
당신은 누구냐고 기자가 물으니
나는 24시간 기쁜 사람이라고
기쁨에 들떠
이 성자 얘기를 했더니
아니, 왜 남이 만든 음식을
공짜로 얻어먹고
공공장소에서 잠을 자냐고
그게 잘하는 거냐고
허, 이 사람!
공원에 비둘기도 기르면서
값비싼 조각품도 갔다 놓으면서
맑은 공기와 햇살도 들여놓으면서
할머니께서 골목길을 걸어가신다
할머니께서 골목길을 걸어가신다
골목길을 돌돌 말아 거두시며 걸어가신다
골목에 맨땅이 드러난다
할머니가 다시 골목길을 펴시지 않으면
골목의 추억들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
줄탁
알 속의 병아리와
알 밖의 어미닭이
뽀뽀하려
콕콕콕......
알 껍질이
금 가고 있다
1어 1표
바닷물고기들이 1어 1표로 반짝이며 자기들 세계를 끌고 간다 한 표 한 표가 모여 방향을 잡고 한 표 한 표가 그 방향대로 나아간다 1어 1표가 이루는 거대한 생명의 춤이다
무문관
-病
나는 요즘 수행중이다
무문관에 들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방이 벽인 방에 갇혀
간단한 식사만 하며
고행중이다
뒷산에 오를 때도
문 없는 방은 따라온다
그 안에 갇혀
힘들게 산에 오른다
금간 천정으로 보이는
하늘의 눈, 해
나를 눈부시게 바라보신다
네 스스로 벽을 뚫고
나갈 때까지
너는 네 방에 갇혀 지내야 하리라
힘겹게 힘겹게
산길을 간다
스승은 왜 제자의 뺨을 때렸을까
어느 유명한 선사가 임종을 맞이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자들이 곁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여쭸다
스승님, 깨달은 자의 경계는 무엇입니까?
그 제자는 득도하신 스승님의 죽음이 이런 모습일 리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고요히 좌탈입망(坐脫立亡)하는 게 대선사의 마지막 모습 아니었던가? 그러자 스승은 벌떡 일어나 제자의 뺨을 한 대 치고는 헉헉대다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 제자는 결국 스승의 뜻을 알았을까? 아니면 큰 고민에 빠졌을까? 도대체 스승님은 왜 내 뺨을 쳤단 말인가? 생사의 경계를 벗어났다는 스승님은 왜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단 말인가?
스승은 아픈 만큼만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제자는 생사윤회의 큰 고통에 빠져 있다
제자야, 네 뺨 아픈 만큼만 아파 보렴
비밀
바람이 세차게 분다
말해!
말해!
말해!
풀들이 꺾어지고
나무들이 꽃잎들을 우수수
떨어뜨린다
다윈의 약육강식
다윈은 숲 속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지만
나는 소곤소곤 대는 소리를 듣네
나무들끼리 나뭇가지들끼리 나무뿌리들끼리 나무 잎사귀들끼리
서로 소곤대며 햇살과 바람과 물을
나눠 갖는 소리
제 덩치만큼 먹는 소리
풀들과도 곤충들과도 짐승들과도
먹을 것을 나눠 갖는 소리
정 가엾으면
제 몸이라도 주는 소리
수명껏 살다 쓰러지면
함께 받아 안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소리
슈바이처 박사 讚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가 가져온 것은 해부용 칼과 흰 가운과 약간의 의약품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떠돌이가 한 일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영원한 감옥을 지은 것이다 해부용 칼로 밀림의 나무를 잘라 거대한 감옥을 지었다 감옥이 워낙 커 사람들은 그가 여기저기 아득한 거리에 기둥을 세우고 야자수 잎으로 햇빛을 가리는 것만 보았다 사람들은 조그만 상처가 나도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감옥 안이라 들판에 널린 약초도 구할 수 없었고 주술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감옥에서 아이를 낳고 감옥에서 죽고 대대손손 그들은 감옥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감나무
길을 가는데
길가에 선 감나무가
말을 건다
홍시 하나 따먹고 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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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나를
막무가내 구겨 넣으려 했었다
너는 늘 만신창이로 떠났다
하루살이
아침에 도를 듣고
제 하늘 속속들이 날다
저녁에 하얗게 쓰러진다
빈집
그렇게 황황히 떠났는가
문들이 덜컹거리고
이불과 장롱이 그대로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리던
소리들은 아직 잦아지지 않고 있다
조금만 건드리면
아우성치며 일어날 것 같다
도시의 신선한 바람 한 줄기
택시를 향해 손을 들자
끼익-
뒷문이 열리고
화-
신선한 바람 한 줄기가
꿈틀꿈틀 기어나온다
......
손님,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젊은 놈이 술에 취해
아, 술 냄새요?
참 신선한데요
하하하 그래요?
다들 바쁘게 출근하는
이 도시의 무거운 공기 속에
이런 바람 한 줄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택시기사도 비로소 신선한 냄새를 맡았는지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기린과 사자들
커다란 기린 한 마리와 사자들이 놀이를 하고 있다
사자들이 기린의 사원의 기둥 같은 뒷다리에 기어오를라치면
기린이 슬쩍 엉덩이를 휘둘러 사자를 떨어뜨리고
사자에게 뒷발길질을 한다
워낙 조심스레 하는지라
(뒷발길에 채이면 사자의 머리통이 깨진다고 한다)
사자들은 다치지 않는다
사자들은 점점 신이 나
기린에게 대들고 기린은 점잔만 빼다 끝내 지친다
그러다 사자를 밟지 않으려 발걸음을 살짝 옮겨 놓다
에쿠! 쿵! 넘어지고 만다
용감한 수사자가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들어
목을 콱 물고 놓지 않는다
이제 졌지?
으... 응... 숨 막혀...
기린은 항복의 표시로 다리를 몇 번 들었다 놓는다
와- 사자들은 함성을 지르고
기린이 상으로 내놓은 그의 몸뚱이를 마음껏 뜯어 먹는다
기린은 가물가물 깊은 잠에 빠진다
벌겋게 입에 피칠을 한 사자들의 잔치가 이어진다
아이가 내내 잔다
아이가 내내 잔다
그 좋아하는
컴퓨터하라고 깨워도
응... 응... 하곤
또 잔다
세상도 함께 잔다
아이를 들들 볶던
학교도 TV도 잔다
아이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도시 건물들도 일제히 잠들었다
?
강자 앞에선
누구나 몸을 웅크린다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문이 되어
답이 되어
미루다
하기 싫은 일을
미루었다 하면
일을 끝 낸 후
상큼하다
꽃 피우는 일을
미루고 있는
저 나무 풀들
하늘도
무슨 일을 미루는지
엷게 흐려 있다
달려라, 토끼!
‘달려라, 토끼!’라는 그림 동화를
빌려오며
자전거를 씽씽 달렸다
쫓기고 쫓기다
뒤러의 그림 속으로 숨은 토끼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자세로
모나리자보다 오묘하게 웃는 토끼
나는 무엇에 쫓기는 듯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듯
사람들 사이를 건물들 사이를
씽씽 달렸다
눈에 이슬이 맺혔다
어디로 쑤욱- 들어갈 것만 같은
핑- 이 세상을 벗어날 것만 같은
먼지 기둥
내게는 먼지로 쌓아 만든
먼지 기둥이 있다
어릴 적에는
그 안에 연필심을 박아
글씨를 배웠다
커서는 그것을
호신용으로 들고 다녔다
어른이 되어서는
그것을 잘게 부숴
집을 짓고
돈과 바꿨다
이제 함께 늙어 가면서
먼지 기둥이 부스스해지기 시작한다
다시 곧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
언제 개구리 새끼로 대접해 줬니?
쓰레기
나는 저 쓰레기들을 알고 있다
바구니에 쌓여 삭아가는 것들
저 무언의 말들을 듣는다
누가 저들을 제 자리에
놓아주기 전까진
저 웃음들을 그치지 않으리라
웃는 표정 그대로
삭아가는 것들
거미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목구멍에서 밥줄을
줄줄 풀어놓아
내 밥줄보다
약한 놈은
오라를 받으렷다!
큰 아이
군대 간 큰 아이는 항상 빡빡 기어 다녀야 한다고 한다 매점(PX)에 걸어가려 해
도 선임들이 걷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야, 애벌레 주제에 어딜 걸어 다녀? 다리 부러지고 싶어?
그래서 아예 매점(PX)엔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따금 전화를 한다
안 들려, 좀 크게 얘기 해
아직 애벌레이기에 크게 얘기 못해 매미가 되려면 아직 멀었어 그때 되면 크게
소리쳐도 돼
응, 그래 건강해라 건강이 최고다 다른 건 안 중요하다 제발 건강하게만 지내
다오
참회록
- 얼음의 자서전
나를 스쳐간 사람들은
다 베었다
나를 다 보여주었는데도
그건 진정한 내 속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속은
진정한 내 속이 아니었다
그들의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며
온 몸으로 운다
그들에겐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 소리 없는 울음
이제 나를 녹이며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말없이 다가가
그들의 살갗에서
찰랑거리고 싶다
쥐의 죽음
고양이가 쥐를 갖고 논다
발톱으로 눌렀다가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가
잡고 뱅글뱅글 돌다가
쥐는 이러다 살려 주겠지
쥐죽은 듯 고분고분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
낚시
아버지, 낚시 좀 사 주셔요 그래 아버지께서는 낚시 바늘과 낚싯줄을 사오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막대기에 낚싯줄을 묶고 작은 돌멩이와 낚시 바늘을 매달았다 집 뒤 도랑에 가서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 물고기들을 낚아 올렸다 그러다 낚시 바늘이 옷에 걸려 옷이 찢어지고 낚시 바늘이 망가졌다 아버지 낚시 바늘이 망가졌어요 염려 마라 새로 사오마 내 옷은 점점 찢어져 너덜너덜 해지고 낚시 바늘에 찔린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갔다 낚싯줄이 칭칭칭 몸을 감았다 해는 지고 낚싯줄은 풀리지 않고 아버지 아버지 낚싯줄 좀 풀어 주셔요 낚시 바늘이 자꾸만 살 속을 파고 들어가요 피가 흘러요...... 그렇게 3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모란 시장에서
염소 한 마리
목이 따인 채
질질 끌려간다
한 쪽에선 토끼가
툭 툭
둔중하게 머리를 맞고
벌거벗은 닭이
도마 위에서 난도질 당한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누구나 칼자루를 잡으면
만만하게 칠 수 있는 자는
있는 것이다
칼자루를 잡은 여자의 눈이
이따금 파랗게 빛난다
왁자지껄한 시장 한낮
저렇게 삶이 소란스럽다
연속극
일주일을 부드럽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같은 것
월
...화
......수
.........목
............금
...............토
턱 턱 턱
내려가며
월요일 아침을 돌리는
신도림 역 계단
뻑뻑해 뻑뻑해
잘 돌지 않는 날일 때
생각만으로 피댓줄을
힘차게 돌게 하는 연속극
우주를 지구를 돌리시는 힘처럼
어영차 어영차
사람들이 잡고 돌리는
한 주일
겨울나무를 위하여
견디는 자는 굳어 있다
마주 잡는 손에게
손가락 하나
꺾이고 만다
헛, 웃음 같은 소리를 내곤
침묵이다
부스스 떨어질 것 같은
눈 코 입 귀
살갗도 버석버석하다
기다려야 한다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길 끝에
마구 불어 가다
다다른 골목 끝엔
고무 다라이 놓고
배추 무 마늘 무더기 무더기 놓고
두터운 옷을 칭칭칭 껴입은 한 할머니가
앉아계신다
저 쪽으로 가면 된다고
빨간 불이 곧 파란 불로 바뀔 듯
잔뜩 긴장하고 있다
고수 동굴
겉으로 보면
민둥산이다
하지만
작은 굴로
들어가 보면
똑딱 똑딱 똑딱
물이 흘러내리고
물 따라
자라는
꼬불꼬불한
한 세상이 있다
내 안에도 저 혼자 피었다 지는
한 세상이 있다
네 개의 우주
우리 집엔
네 개의 우주가 있다
동 동
서로를 비켜
떠다니며
깜빡 깜빡
스스로의 세상을
피웠다가 진다
이따금
서로의 세상이 겹쳐
새 울음 풀벌레 울음소리 같은 게
일어나기도 한다
네 개의 우주가
어디론가 사라진 한낮
太虛다
노가다 김씨
청미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코가 맹맹했다 강피리 한 마리가 손 사이를 미끈 빠져 나가고 물방울이 튀어 올라 눈에 들어 왔다 와하하하 웃음이 물결 반짝이며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그렇게 웃으며
그는 철근 건조물 옆에 서 있었다
대구 지하철 방화 미수범
... 원한 관계예요... 나 정신 병원에 보내 주세요...
처음엔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 마음에 불을 붙이려 했어요 도무지 불이 붙질 않았어요 그새에 그들은 멀리 가버리고 늘 혼자 불타다 싸늘히 식어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곳에서 불을 붙이려 했죠 그러면 확 타오르리라 생각한 거예요 이번에도 미수에 그쳤지만요 이제 포기할게요 정신병원에 가둬 주세요 사람 마음에 불을 붙이려는 마음을 가둬주세요
옷
어릴 땐 덕지덕지 꿰맨 옷을 입고 다녔다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었다 얘야, 추우니 교복 안에 그 옷이나마 입고 다녀라 네, 어머니 몸이 점점 자라자 그 옷이 너무나 꽉 끼어 벗어지지 않았다 그냥 입고 다니지 뭐 누가 보나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그 덕지덕지 꿰맨 옷을 입고 다닌다 그 위에 하얀 와이셔츠와 번들거리는 양복을 입고 흠흠 다닌다
사이에 대하여
칼로 사람을 찔러 죽여도
절대로 살인한 게 아니라던
철인이 있었다
사람 몸은 원자로 이루어져
원자 사이로 칼로 찔렀을 뿐
그의 몸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았다고
아니다!
이게 바로 살인이다
(사이를 파괴한 것)
모든 존재는 사이인 것이다
왕따는 사람들과의
사이가 없어진 상태고
사업에 실패하는 것은
돈과의 사이가 막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사이의 문제다
나는 지금
내 몸 사이에 음식과 공기가
잘 드나들기에
건강하다
항상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사이좋게 살아라
가랑잎
밤거리를 지나는데
가랑잎 하나가
귤 한 무더기를 덮고 있었다
이거 파는 거예요?
그럼요
얼마예요?
3000원만 주세요
네
가랑잎은 까만 비닐봉지에
귤 무더기를 싸주고는
땅바닥에 바싹 붙어 바들바들 떨었다
1000원 짜리 지폐 3장을 주자
그 갈색 잎 세 개를 가슴에 안고는
사람들 발길에 날아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봄
나도 모르게 다 풀려버렸다
꽁꽁 다잡은 마음
눈빛
어느 모임에서
한 유명인을 보았다
가까이 가려 했지만
완강한 눈빛으로 거부했다
나이가 들면서
저 나무에서 돌에서 새에게서
그 눈빛을 본다
낚시터에서
낚시터 매점에서 막걸리를 한 병 사자
사내가 재빨리 열무김치 한 종지를
쟁반에 받쳐 내준다
길쭉하고 푸릇한 열무김치
덥석 받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쭈뼛쭈뼛 받는다
파라솔 밑에 가져가
물비린내를 맡으며
막걸리를 들이킨다
고요히 앉아 말 없는
낚시꾼들
이따금
낚시 바늘에 꿰인
물고기들만 파닥댄다
햇살에 生을
반짝이는 것들
열무김치를 잘근잘근 씹는다
흰 고무신 두 개
얘야, 빨리 너 태어난 골테에 가야 한단다 너 출세 한 거 얘기해야 한단다 등에 업힌 엄마는 계속 칭얼댑니다 엄마의 발은 딱딱하게 굳어 차갑지도 않습니다 논두렁에 두고 온 흰 고무신 두 개가 살얼음에 하얗게 빛납니다 엄마, 엄마, 조금만 기다려 곧 택시가 올 거야 엄마 몸은 자꾸만 굳어갑니다
부자(父子)의 대화
너희 학교에도 일진회 있니?
응
애들 때려?
아니
그럼, 뭐해?
그냥 담배 피우고 떠들고......
걔들 졸업 후에 뭐하는지 알아?
응, 노가다 해
......
살인범들을 위하여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면
콕 콕 꼬집는다
그러다 너무나 끔찍이 사랑하게 되면
쿡 쿡 칼로 찌른다
病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천 개의 손을 가진 것이
나를 꽉 붙잡는다
내게서 빠져나가 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방향으로 튀어나갈 자세다
저 정지는 눈속임이다
자신의 약점을 최대한 숨기고
약점이 드러날 시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있는 자세다
어디서 맹수가 달려든다면
사방 어디로든 달려 갈 수 있는 자세이고
땅 속에서 괴물이 나타난다면
하늘로 솟구칠 수 있는 자세다
벼락이 내리친다면
그냥 널브러질 수 있는 자세이고
해가 떨어진다면
땅 속으로 꺼질 수 있는 자세다
강자에겐 무릎을 꿇고
약자에겐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자세다
생각하는 사람은 슬프다
소망
저 먼 별에게 말할 게 있으면 네 곁에 있는 아주 하찮은 별에게 말하렴 별은 별끼리 마음이 통하니까 네 말을 전해 줄 거야
옛 기억 하나
머리카락 쩍쩍 달라붙는 돌멩이
용백이 머리에 대고 장난치는데
그 돌멩이 떼구르르
교탁 앞으로 굴러 갔습니다
누구야?
포마드 번지르르 바르신 담임선생님
자수하여 광명찾자고
교편 휘둘러 대십니다
머리에 쇠똥 더덕더덕 앉은
용백이가 나갔습니다
번쩍번쩍 담임선생닙은
용백이 머리에 수없이 광명을 주셨습니다
약
약 먹는다
비디오 먹는다
그는 새벽 3시에
검은 네모난 약을 씹는다
눈을 부릅뜨고
물도 없이 삼킨다
약의 효과가 나타나는지
몸이 스멀스멀 풀리기 시작한다
비로소 비틀어진 입술 새로 웃음이 피식피식 나온다
멀리서 보면 이제 인간 같다
병명을 알 수 없어......
그의 병은 습관성이다
약은 무진장 공급 된다
만유인력의 법칙
사과가 떨어진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사과는 사라져도
만유인력의 법칙은 영원하다
하지만, 사과가 없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이 다 무슨 소용이랴?
막내둥이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재수를 하겠다고 했다
재수 종합반에 처음 보내던 날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밤 이슥해서 아이가 돌아 왔을 때 아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이를 따라 방에 들어가자 아이는 침대에 앉아 허공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가둬 놓고......
붉게 충혈 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도 가슴이 메었다
쯍아, 세상 살려면 공부할 수밖에 없어......
다음 날 아침 달래고 달래 학원에 보냈다
큰 바위 얼굴
그의 몸을 파고드는
비 바람
눈보라
......
덕지덕지 흉터가 쌓인다
그의 얼굴이 새겨지고 있다
에덴에 대한 기억
명절마다 우리 형제가족들이 다 모였다
네 형제가 아이를 둘씩 낳았으니
아이들이 여덟 명이다
항상 여기저기서 말다툼하는 소리, 비명소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형제들은 협약을 맺었다
아이들 일에 일체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외세 개입 금지!
(예외조항- 다치거나 그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면 개입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끼리 술판을 벌렸다
와서 읍소하는 놈. 혼자 조용히 우는 놈......
하지만 우리는 본체만체 했다
그러자 차츰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갔다
처음에는 힘센 아우가 약한 형을 때리기도 했지만
형 아우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지고
형은 형답게 아우는 아우답게 행동을 하게 되었다
아장아장 걷는 막내를 제일 큰 형이 손잡고 놀았다
위험이 닥치면 형들이 아우들을 보호했다
우리는 멀찍이서 지켜보며 희희낙락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명절날에도 다 모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좋은 기억을 갖고 있으리라
에덴에 대한 기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