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서 맘모스와 싸우고 산딸기 따먹던 원시인이랑 현대인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 아마도 속도일 것이다. 야생동물에 쫓기거나 토끼 잡으러 달려가는 원시인보다도 현대인들이 더 속도에 집착한다. 컴퓨터는 속도가 빨라야하고 스마트폰도 반응이 즉각적이어야 한다. 5분전에 짜장면 배달시켜놓고도 5분마다 전화하여 닦달해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들... 빌딩 숲 사무실 깊숙이 앉아 전화 한 통화로 ‘퀵’을 부르고 “최대한 빨리”라고 채근한다. 사실 위험천만한 질주는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었다. 피자 한 판에 목숨 걸고, 서류봉투 하나에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그런 무한질주의 삶 말이다. 퀵을 시키는 사람 말고, 퀵을 달리는 사람들은 어떨까. 우리는 삼일절이나 광복절이면 “빠라바라 바라바~” 클랙슨과 함께 신호무시에 차도무시, 게다가 도로바닥에 불꽃을 튀며 달리는 그 철부지 배달부에 대해 한없는 분노를 느낀다. 물론 이들은 1분이라도 빨리 뭔가 결과를 보려는 ‘시키는 사람’들의 욕망이 가져온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이번 여름 그런 ‘퀵’한 인생을 담은 질주영화가 한 편 개봉되었다. 조범구 감독의 <퀵>이다.
전설적인 속도를 자랑하는 퀵 서비스맨 기수(이민기)는 어느 날 특별한 배달 물품을 하나 의뢰받는다. 막 뜨기 시작한 아이돌 걸 그룹 멤버 아롬(강예원)이다. 콘서트장에서 다음 행사장으로 실어 나르는 게 임무이다. 그녀는 그 옛날 광복절 레이스 시절부터 알던 날라리 춘심이었다. 그런데 춘심이를 싣자마자 상황은 급반전한다. 어디서 걸려온 전화. 제 시간 내에 숨겨둔 물건들을 지시한 장소로 배달하지 않으면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춘심이가 뒤집어쓴 헬멧에는 시한폭탄이 째깍거린다. 기수는 춘심이를 뒷자리에 앉히고 서울시내를 폭주해야한다. 강남대로를, 명동번화가를, 한강대교 위를, 고속도로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가 배달하는 물품은 폭탄! 서울시내 곳곳에서 폭탄이 뻥뻥 터지고 서울시내는 초비상 사태이다. 퀵맨 기수를 잡기 위해 사연 많은 경찰(김인권)이 ‘오토바이’를 몰고 나선다. 이제 서울시내와 인천공항을 오가는 특급대작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퀵>은 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초스피드로 달리고, 터지고, 웃긴다. 워낙 완급조절이 잘 되어 허점이나 각본상의 결점은 잡아낼 수 없을 정도이다. 브라이언 드 파머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1편에서는 터널 속에서 고속철도와 헬기가 나란히 달리는 액션 씬을 보여준다. 정재승 교수는 물리학에선 있을 수 없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이 영화에서도 터널에서는 기존의 물리학까지는 모르더라도 만화적인 -판타스틱한- 모토사이클 묘기를 선사한다. 관객은 “와우~”하며 감탄한다. 이 영화의 대중적 성공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공감’에서 기인한다.
물론, 크게 보자면 키아누 리브스의 <스피드>의 변용이다. 스피디한 면은 뤽 베송의 <택시>를 추월하고 말이다. 우연히 폭탄을 배송하게 된 억세게 운 없는 퀵 배달부는 살기 위해 마구 달린다. 그런데 서울시내 곳곳이 마구 터지는 준 테러상황을 막는 것은 국정원이나 경찰기동대 같은 특별한 무력집단은 아니다. 그냥 폭주족 출신의 퀵맨이다. ‘우연한 히어로’라는 콘셉트가 이 영화의 재미이긴 하지만 지구평화와 서울안정 같은 구호는 없다. 단지 ‘내 머리의 폭탄’이 발등의 불이니 말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조범구 감독이다. <양아치어조>라는 제목마저 생소한 영화를 만들었던 조 감독의 전작은 <뚝방전설>이다. 그런 B급 취향의 감독이 올 여름 블록버스터의 감독이 된 것은 ‘충무로의 힘’일 것이다. <해운대>의 흥행감독 윤제균 감독이 제작자로 나서면서 희한한 한국형 스피드 블록버스터 <퀵>의 제작이 실현된 것이다.
올 여름 또 하나의 블록버스터 <7광구>와 함께 <퀵>은 윤제균 감독의 영화의지와 관련된 작품이다. <두사부일체>를 내놓으며 한국영화판에 조폭코미디라는 신선한(?) 흥행 장르를 성공시킨 영화감독이다. 그는 확실히 작품성보다 대중성을 대놓고 홍보하는 특이한 감독이다. 잘 나가던 광고회사를 때려치우고 영화판에 뛰어든 윤제균 감독은 애당초 영화미학이나 깐느 수상 같은 고상함보다는 <색즉시공> 류의 대중성에 천착했다. 당연히 깐느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말이다. 2년 전 <해운대>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윤제균 감독은 충무로의 능력을 완전 파워업 시킨다. 이번 여름 <7광구>와 <퀵> 두 편을 한꺼번에 선보이더니 뒷단에서는 할리우드까지 끌어들인 <템플 스테이>를 착착 준비 중이다.
윤제균 감독은 흥행에 성공하는 대중영화의 공식을 잘 알고 있다. 새로운 볼거리, 특별한 재미와 뭉클한 감동. 이러한 요소가 적절히 배합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두사부일체>는 조폭과 학교의 만남이라는 이질적 소재를 조폭적 콘텐츠로 광폭화시켰고 그 밑단에는 은근한 감동을 배치시켜 관객을 열광시켰다. <1번가의 기적>도 마찬가지였다. 윤 감독은 조범구 감독에게 많은 코치를 해줬음이 분명한데 코미디 요소는 확실히 윤제균 감독의 손길이 느껴진다. 이민기와 강예원이 펼치는 코믹 연기는 물론이고 김인권과 고창석의 끝없는 개그 플레이, 애드립은 오토바이 굉음만큼 관객을 정신없이 웃긴다. 특히 강예원의 헬맷 샤워 씬은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 샤워 씬 이후 가장 인상적인 샤워 장면일 것이다.
<퀵>은 할리우드 영화나 뤽 베송 작품에서나 볼 수 있을 스피디한 장면을 서울을 배경으로 맛볼 수 있을 뿐더러 고속전철이 내달리는 교량에서의 폭파 씬을 목도할 만큼 액션이 화려하다. 코믹적 요소는 액션만큼 전편에 포진해 있고 말이다. 그럼 윤 감독이 말한 감동코드는 무엇일까. 그것은 ‘손발이 오글거리는’ 상황의 드라마이다. 이민기와 강예원의 감정선은 핵심은 아니지만 관객에게 공감의 여지를 남겨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사건의 근원’이 철부지 폭주족의 과거라는 원죄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객들은 마지막 순간 윤제문 가족의 비극을 통해 ‘영화적 인과응보, 사필귀정’ 등등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철부지 바이커 들이여, 광복절날 자유로를 달릴 것이 아니라 울릉도에라도 집결하는 것이 그들이나 보는 시민에게나 유쾌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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