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저 강물에 달 뜨거던...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붕붕아
    2. 유청산
    3. 별의미소
    4. 무심
    5. 채호준
    1. 보운 김달선
    2. hamlet
    3. 이종식T2UE
    4. 이종율
    5. 달마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추억의 물품들(2)
청산 추천 0 조회 308 10.05.05 17: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물질의 풍요는 정서의 삭막함으로 바뀌는 것.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발전이 함께 할 수 없듯

정신과 물질문명이 함께 발전하기는 힘들다더라.

 

춥고 배고팠으나 즉 육체적인 고통은 심했으나

가족간에 친구간에 정은 더 많았던 시절이 우리 초,중학교 시절 같다.

껌 하나도 소중했고 밖에서 빵 한조각이라도 생기면

고생하는 부모님,아니면 사랑스런 동생들과 나눠 먹으려고 몰래 감춰오던 시절.

잔치집에 가신 무뚝뚝한 아버지도 품속에 마른 문어조각이라도 품어왔던 시절

그 때가 아래 그림의 물품들이 가치를 발하던 때 인 것같다.

 

지금 생각하면 조잡하지만

그 때는 이런 것들이 최고였다,.

지금 베트남이나 필리핀,중국의 농촌에서 이런 물건들이 소중히 다뤄질 것이다.

 

 유리병 속에 든 사탕들이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침 넘어 가게 하는 것이었다.아껴 먹을려고 깨먹지 않고 빨아 먹었다.

껌은 그래도 우리 중학교때 쯤의 것이고 그 이전엔 종류도 몇개 안됐다.초등학교 때에는 씹다가 버리기 아까와서 벽에다 붙여놓고 잤고

아침에 다시 떼어서 씹을라 치면 벽지까지 같이 찢어져 벽지를 상하게 했으나 당시는 벽지도 수년 된 것이라 장식의 개념이 없어

혼나지 않았다.

때로는 동생이나 언니가 먼저 발견해 얼른 씹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남이 하루종일 씹었던 것인데 더러운 개념보다는 귀한 물건이라는 가치가 더 컷었으니까.

"아가씨 그 향기 어찌그리 고운가요?~~~~아아아 아아아아 아카시아 껌"이란 CM송과 "롯데껌 한 마~음"이란 광고 노래가 생각난다.

 국수공장?가내수공업으로 조그만 방앗간에서 운영하기도 했고 순천 역전운동장 부근에도 있었다.

길 가 막대기에 기게에서 뺀 국수를 걸어서 말린 후 규격품으로 잘라 중간에 종이로 말아서 메이커 표시 한게 요즘 잔치국수 한 롤이다.

지금의 5인분이 당시 2인분 밖에 안됐다.그만큼 먹는 량이 컷다는 얘기다.

지금 생각하면 비포장 도로 먼지 나는 길가에서 말린 국수 가락이 얼마나 비위생적이었겠는가 마는 그 때는 위생관념이 거의 없었다.

98년도 연변 시장에 갔더니 리어커에 방금 잡은 돼지고기를 아무런 조치도 아니한 채 싣고 가는 것을 봤다.

아마 그 수준이 60~70년대 우리나라 수준이었을 것이다.

'에스명수'는 소화제이다.원래 동아제약의 '활명수'를 본 따 만든 삼성 이병철씨 제약회사 제품.

'미원'의 후발제품으로 역시 이병철씨가 제일제당의 '미풍'을 만들었고

'금성'의 가전제품 후발로 삼성전자에서 이병철씨가 가전제품을 만들었다.

껌은 해태껌이 최고고 나중에 롯데껌이 나왔으며 라면도 삼양라면에 이어 농심이 나왔다.

 우리 초등학생 시절에는 왜그리 물품이 귀했던지~~

미술준비라 해봤자 도화지와 크레용이면 됐는데 도화지 살 돈 2원도 없었고 크레용은 더더군다나 귀했다.

크레용중 사진의 왕자파스가 최고였다.나도 그림을 좀 그리는 편이였다.

하지만 왕자파스는 좀 비쌌기에 고학년 때가 돼서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으로 사생대회에 나가서 상을 몇 번 탓다.

소방서에서 매년 주최하는 '불자동차 그리기 대회'에서는 아마 장려상을 탓을 것이다.

광만이도 그림을 잘 그렸고 운동 윤상이도 잘 그렸던 기억이 난다.

미술시간에 봄이면 학교 뒷산에 올라가 신월과 운동쪽을 내려다보며 사생대회를 했다.

나는 순천실고의 강당을 수양버느나무와 함께 화면 가득 그렸는데 선생님이 잘 그렸다고 교실 뒷편 게시판에 붙여 놓았었다. 

 우리나라에 PVC가 도입되던 시기의 장난감들---

세로판 테이프도 신기했지만 플라스틱 활과 바람개비도 갖고 싶은 훌륭한 장난감이었는데 지금 보니 참 조잡하다.

총에 비비탄을 넣어 한 두방씩 쏘면 어찌그리 신기했는지~~그러나 몇방 안쏘고 금방 고장나기 일쑤였다.

이어폰식 귀마개는 업그레이드 된 것-집에서 기르던 토끼를 잡아먹고 그 털 달린 가죽을 동그랗게 말아 원형으로 꿰맨 후

고무줄로 연결하여 겨울 추위에 귀를 보호했는데 그것에 부가가치를 넣어 상품화 한 것이다.

그 때는 어찌그리 추웠는지...지금보다 기온이 훨씬 낮았고 옷차림은 지금보다 훨씬 소홀했으니 얼마나 추웠겠는가~~

지구 온난화~~옛생각 하면 심각한 수준이다.

 지금 문방구에 가 봐도 옛날보다는 조금 고급스러워 졌지만 "저런게 팔릴까?"하는 물건들이 많이 진열돼 있다.

어린이들 마음과 어른들의 마음에는 분명 차이가 많다.완구는 어른들이 만들진데 어린이들 맘을 어찌그리 잘알고 만드는지~~

양철로 돼서 누르면 '똑깍똑깍' 소리가 나던 장난감 매미.개구리와 돼지는 종이로 만든 탈이다.

축구게임은 종이판에 받침 조각 같은 것을 연필로 꾹꾹 눌러 전진시켜 상대방 꼴문으로 튀겨 넣는 게임이었다.

 라면은 비싸서 못 사먹었으나 먹고 싶은 음식 순위 1위였으리라.

그런 욕망을 조금이라도 채워주기 위해 갖가지 라면을 흉내낸 과자가 많이 나왔다.

'라면땅'과 '뽀빠이'.씹으면 미끄덩거리는 '고무과자'.그리고 인스탄트 식품으로 쥬스 가루가 생산됐다.

오랜지 쥬스라는 것은 시원한 물에 가루를 타면 붉은 색으로 새콤달콤한 쥬스 맛이나는 음료수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불량식품이었는지도 모르는데 그 때는 왜그리 맛이 있었던지 모르겠다.

쥬스는 비싸니까 가루 쥬스를 타서 식구대로 먹는 것이 경제적이었기에 잘 팔리는 제품중의 하나였다.

설탕은 참으로 귀했고 서민이 먹으면 안되는 줄 알았던 귀족 식품이었다.서민들은 그저 '사카리'나 '당원'으로 단 맛을 냈다.

설탕은 명절에 인사로 돌리는 물품이었다.어쩌다 설탕을 만나 한 수저 먹었는데 왜그렇게 달고 맛있었는지

 여름에 먹는 빙과는 오로지 아이스케키였다.

중,고등학교 형들이나 총각 형들이 메고 다니거나 자전거에 케끼통을 싣고 동네 골목을 누비며 "아~~이스 케키"하고 외치면

집에있던 공병,흰 고무신등을 갖고 나가면 주던 얼음과자..

이것이 발전하여 서울의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후 가게에 냉장고를 놓고 냉동차로 배달해 판매케 하던

요즘처럼 현대식 아이스크림 판매가 시작됐던 제품이 "삼강"이었고

그 후 둥그런 막대 아이스케키에서 모양과 맛이 다양한 얼음과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해태에서도 '부라보 콘'이나 '누가바','바밤바',빙그레에서 "비비빅" 삼강에서 '아맛나 '등을 생산했다.

 반공이 국시였던 자유당 시절을 거쳐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군인 출신들이 집권한 시절까지는 온통 반공방첩이었다.

때문에 반공방첩에 관한 포스터,표어,간판등이 우리나라 방방곡곡 골목골목마다 다 붙어 있었다.반공으로 먹고사는 인구도 대단히 많았다.

노동조합을 관장하는 조직은 노동조합의 "강성""좌익성"을 강조해야 자기들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에 적당히 노조의 힘을 길러주는

아이러니가 있듯 반공을 아니 국가의 안보를 팔아 먹고사는 직업인들은 항상 북한의 위험성을 강조해야 한다.

경제력과 군사력은 비례하고 경제가 강하면 전투력도 강하다.

그럼에도 재래식 무기 숫자를 북한과 비교하며 남한이 열세임을 강조하면서 정말 여러사람들이 먹고 살았다.

아마도 북한을 들여다보면 그 쪽에서는 더 할 것이다.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정권 유지를 위해 주민들을 겁을 주고 있을 것이다.

궐기대회,웅변대회,표어,글짓기,포스터 그리기대회등 참으로 많은 행사를 했고 예비군 훈련,교련,민방공 훈련도 많이 했다.

그 때에는 안하면 죽는 줄 알았다. 

 서민들의 공부방.

과외 안하고 전기불 없이 석유 등잔불 밑에서 저런 책상이 없어 사과궤짝을 놓고 공부했어도 서울대에 들어 갔고

고시에 패스한 영웅들이 많았던 시절이다.까만 겨울 교복은 대한민국 고교생의 공통된 복장이었다.

당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학생들 모습을 보면 어땟을까? 여고 교복도 모두 단발머리에 까만색 일색이었다.

가구라고 해 봐야 서랍장,박스였고 식기류는 밥그릇,냄비,주전자 모두 알루미늄 제품이었다.

그래도 양은이라 불리는 가볍고 단단한 도구가 나와 여자들은 무척 ?해졌다.

무거운 사기그릇 일색이라면 얼마나 무거울 것인가?놋그릇도 무겁긴 마찬가지 였다.저 세대가 지나고 스테인레스 밥그릇이 나왔다.

침구는 무명 솜을 타서 손바느질로 만들었고 미군부대나 파월장병이 가져온 군용 담요가 있었다면 소중하게 다뤄졌다.

당시는 담요가 무척 귀했기 때문이다.

사발시계라 불리는 탁상시계에 시간을 맞춰두고 새벽 공부도 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라도 하나 있었다면 부유층이었다.

중요한 것은 모두 스스로 했다는 것이다.

요즘 얘들은 밥먹는 것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것,시험공부 하는 것까지 스스로 하는 얘들이 드물다.

 중학교에 가고보니 학교 앞에는 아침 저녁으로 잡상인들이 많았다.

어린 맘에 욕심날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팔았던 것이다.

유리로 앙증맞게 만들어 내용물은 사춘기 감성을 자극하는 멋진 말을 써 넣은 유리 병풍도 학교 앞에서 팔았던 물건이다.

난 학교앞에서 나눠주는 사진관의 할인 촬영권을 애용한 적이 있다.

필름 한 판에 모양만 달리하여 많은 사진을 인화해 주던 그런 것 말이다.

맨 하단 우측엔 아주 가는 철사로 만든 스프링(용수철)이다.

플라스틱 생활용품이 본격적으로 생산되던 시절 신발깔창,젓가락,수저통들도 과거 주로 대나무로 만들던 생활도구 들이다.

 우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유행하던 생활도구와 장식품들이다.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는 저 액자는 택시에는 물론 이발소에까지 아주 많이 걸려있던 그림이다.

밀레의 '이삭줍기'그림보다 더 많이 걸렸었다.

보관이 쉽고 단단한 우승컵은 우리집에도 있었다.형님이 웅변대회에서 타다 놓은 것이었다.

저기에 파랑색과 빨강색 리본이 손잡이 상단에 매달려 품위를 더했었다.

진열된 인형들도 보편화 된 대량생산 물품들이었다.

나일론 재질의 색동 손지갑도 거의 모든 여자들이 들고 다녔다.

약탕기,콩나물 기르던 옹기,알루미늄 밥통도 익숙한 물건 아닌가!!7080 세대들이여.

 황동 세면대야(세숫대) 양철 쓰레받기.나일론 빗자루,갈잎 빗자루,주부들의 빨래 2세대를 풍미한 빨래판.

조명시설이나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시절 야간 화장실 역할을 톡톡히 했던 요강. 모두 정겨운 물건들이다.

동네 도랑물이나 시냇물에서 추우나 더우나 빨래를 했었는데 그 것이 집안으로 들어온 게 저 빨랫판이다.

빨래판의 개발로 주부들의 고생을 한 층 덜어줬다.

 사제 담요가 생산됐다면 꽤나 진화된 시절이다.옛날엔 베개 높이도 꽤나 높았다.

베개 속에는 메밀 껍질은 고급이었고 벼 껍질인 왕겨를 많이 넣었던 것같다.

옷은 대개 멋보다는 기본적인 편리함만 갖춰진 수납장이 대부분이었다.해서 걸어 놓는 옷은 벽에다 대나무 말린 장대를 매달아

그곳에 걸었고 목단이나 봉황이 수놓아진 큰 보자기로 덮개를 씌웠다.'햇댓보'라  했던가?

 샴프와 린스가 분리되어 나오던 시대가 언젠가?"유니나"샴프가 최초인 것같기도 하고~~

 하얀 도자기로 만든 종재기---저곳에 석유를 부어 끝에 나온 심지에 불을 켜 공부를 했고 어머니들은 바느질을 했다.

그 때는 우리들의 시력이 모두 3.0은 됐던 것같다.

 그 옛날은 장식품도 왜 저리 조잡했는지 모른다.하긴 먹고 살기 바쁜데 멋은 둘 째문제 아닌가?

전라도 음식문화가 발달 된 것은 당시 논 농사로 배고프지 않았기에 양보다 질을 생각하게 되어 맛을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민요나 춤사위가 발달해서 예향의 도시를 광주라고 하는 것도 배고픔이 덜해서 '즐기는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해서 강원도는 배고프고 척박하여 음식문화가 좀 뒤져있고 하다못해 상여소리도 경사도가 높아 빨리가서 묻고 오는게 급하므로

속도도 빠르고 멋이 없다 한다.반면 진도나 남도의 상여가는 처량맞기도 하지만 멋이 서려 있다.

 요즘이야 녹음테이프,CD,이젠 MP3로 대변되는 컴퓨터로 노래를 듣지만 당시에는 LP판이라 불렸던 레코드 판을 전축으로 들었다.

전축도 부유층에게만 있었고 서민들은 야외전축이면 족했다.

밧테리 넣어 야외에 나가 그것 틀어놓고 남여 사춘기 얘들이 열정을 불살랐던 때가 그립다.

김희갑,박춘석,이봉조 ,박시춘 이런 음악 천재들이 그 시대를 풍미했다.

이젠 저런 레코드판은 장식용으로 쓰이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 하다.

  7080 세대를 주름 잡았던 가수들--금과은,어니언스등이 보인다.당시 촌스런(?) 의상,헤어 스타일/통키타

 신간 소설을 선전하는 포스터---순정,돈과 사랑,가난과 권력 뭐 이런 것들이 주제였을 것이다.

 

 70년대 80년대의 대표적인 대중잡지 선데이 서울이다.주간지였고 연예계 소식을 제일 흥미롭게 빨리 전달해 줬다.

지금의 방송인인 이상벽씨가 선데이서울 연예부 기자 출신이라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기사라기 보다 흥미거리로 지어서 쓴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정신 차리고 보면 과장된 기사가 많았다는 생각이다.청춘 남여들에게 인기 좋았던 잡지다.

서울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교복차림의 남자 즉 고학생이 엽구리에 저런 주간 잡지를 잔뜩 끼고 경례를 붙이며

팔아 달라고 했던 70년대 풍습이 떠오른다.

지금 필리핀 마닐라 식당에 가면 가끔 남학생들이 말린 파파야를 가지고 와서 팔아달라고 한다.

  최 고급 용지에 최고의 인쇄를 했던 화장품 잡지.태평양 화학과 한국 화장품이 당시 우리나라 2대 메이커였다.

 아모레와 쥬단학을 생산하던 회사.

  어찌보면 회사 잡지인 사보 정도인 것같은데 당시 아가씨들이 많이 봤다.

 아마도 비매품.---회사에서 화장품 판매를 위해 무료로 배포 했었다.

 이 때도 못살아 농촌 처녀들은 크림 바르는 정도가 전부였고 도시에 갔던 동네 누나들이 눈화장을 하고 나타나면 '누구한테 맞았냐'고

 어른들이 못하게 했고 모두들 화장품 냄새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화장품은 중국 여자들이 가장 갖고싶어 하는 물건 중의 하나이고 대부분이 조선족 동포인 중국의 관광가이드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 화장품을 쓴다.

 그 유명한 마라톤 타자기.

처음에는 스미스 코로나등 외국산 타자기였다. 타자기 이전에 기안지나 보고서는 오로지 육필,손으로 쓰는 수기였다.

해서 글씨 잘쓰는 사람이 최고 였다.

대량 생산이 필요한 문서는 가리방을 긁어 등사기로 인쇄를 했다.

가리방인란 파라핀이 발라진 등사원지를 긁을 때 받쳐주는 철판이다.

그후 타자기가 나왔고 품위있는 보고서나 기안은 타자로 쳤으며

타이피스트는 주로 여자 실업고 졸업생들이나 인문고 출신이며 타자학원을 따로 다녀 '타자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여

회사나 관공서에 특별채용됐는데 그녀들은 콧대가 높고 행패가 심해 신입 사원등 신참들은 감히 타자 쳐 달라는 말을 못했다.

해서 아예 독수리 타법으로 배워서 손수 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량생산할 문서도 타자원지를 대고 타자를 쳐서 그것으로 등사를 했다.

나중에 윤전등사기까지 나와서 손에 등사잉크 안묻히고 편하고 빠르게 등사하기도 했다.

또 전동 타자기가 나와 자판을 살살 쳐도 찍혔고 줄을 옮길때도 누르고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편했다.

이런 물건들은 컴퓨터 등장으로 사라졌고

아울러 웬만한 인쇄는 컴터와 칼라 프린터가 해 내서 인쇄소도 밥줄이 끊겨 문닫는 영세 업소가 많았다.

 60년대나 70년대만 해도 우리 시골에서는 모두 나무나 말린 풀을 때서 취사를 했다.

 다음이 연탄이었고 자취생들이나 신혼부부에게 등장한 것이 석유곤로 였다.

석유곤로 메이커는 중소업체가 더러 있었지만 제일 유명한 것이 후지카였다.

후지카 석유제품은 회사나 가정용 난로도 있었으나 석유는 간편해서 좋지만 이동시 자칫 새어나온 석유에 불이 붙게되고

흐르는 석유는 움직이는 불이돼서 끄기도 힘들어 화재 위험이 아주 높았다.

그래서 요즘에 가스로 취사하고 전기로 난방하게 됐다.

 화판---초등학교 시절  미술도구. 사실 중학교때부터 스케치 북이라는 것을 사용했고

초등학교때는 화판과 화판에 꽉 차는 '표지'라는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알고보니 표지의 정식 명칭은 '백표지'였다.장부의 겉장으로 쓰이는 것이 흑표지 였고...

그런데 백표지의 한얀 면에는 크레파스가 미끌어져 잘 묻지않았다.

그래서 뜻있는 친구들은 검은 면인 뒷쪽 까칠한 부분에다 그림을 그렸다.

 금성 트랜지스타---우리나라 가전업의 선구자 금성은 골드스타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LG전자가 됐다.LG는 럭키 금성의 약자이다.

금성의 창시자인 구씨 일가에서 생활용품인 럭키 치약등 럭키라는 회사를 운영하다가  그 계열사를 모두 합해 '럭키 금성'으로 하여

LG그룹으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해서 LG25시를 비롯 많은 계열사가 LG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

금성을 선전하는 광고 카피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문귀는 최불암씨가 했는데 지금도 우리 일상에서 많이 얘기 한다.

삼성전자는 그 후에 나와 영원한 2류인듯 하다가 A/S를 잘해주는 친절로 인기를 얻어 1위자리를 탈환했고

반도체를 만들어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그러나 혹자들은 아직도 가전제품은 LG가 훨씬 낫다고 한다.

중국등 동남아에 가면 가정용 에어컨이 거의 LG전자 것이다.

금성트랜지스터는 우리동네에서 우리집이 빨리 장만한 편이었다.옆집 할머니가 라디오를 들으려고 매일 오셨던 기억이었고

내가 어렸을 때 "태권동자 마루치"라는 어린이 연속극이 5시에 방송돼 놀다가도 시간 맞춰 들었던 기억이 난다.

 미싱=재봉틀. 이 재봉틀 하나면 어머니들의 바느질로 한 가족이 먹고 살기도 했고 우리나라 조국 근대화를 이끈 물건이기도 하다.

 동대문 의류공장에서 우리들의 누나,남동생 공부시키기 위해 희생하던 누나들의 야무진 손놀림으로 질좋은 의류를 만들어

 외국으로 수출하여 달러를 벌어들인 조국 근대화의 공로 기구이다.

요즘엔 거의 모두 전자 재봉틀이지만 당시에는 발로 동력을 만들어 바느질을 했다.

 교실에 설치된 난로---난로만 있으면 뭐하나?학교에서 예산 부족을 이유로 땔감인 조개탄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학교 뒷뜰에서 나뭇가지를 꺽어와 피우기도 하고 장작을 지고와서 피우기도 했다.

 

 

                달력---옛날에는 달력도 참 귀했다.농협이나 국회의원들이 만들어 보내주는 한 장짜리 달력을 벽에 붙여두고 봤다.

             매년 그자리에 덧붙였다.

             월력으로 한 장씩 넘기는 달력은 아주 귀했고 시골에서는 습자지로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을 좋아했다.

             음력과 절기가 자세히 기록돼 있었을 뿐 아니라 종이가 귀해 매일 한 장씩 뜯어 화장지로 쓸 수도 있었고

             담배를 말아 피우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달력은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김우경씨 달력이 몇 년간 붙어 있다가 민주당 소속 조연하 의원 달력이 조금,

             그리고 강길만 의원 달력이 마지막으로 붙었던 것같다.위 달력은 그래도 화장품 회사 달력이다.

        월력이라 일컫는 12장짜리 달력 사진은 풍경이나 풍물,명화가 실리게 되는데 그래도 다들 좋아하는 인기있는 달력은 주류회사 것이다.

        소주회사나 맥주회사에서 만들어 돌리는 달력엔 여배우들의 야한 사진이 게재되기 때문이었다.

 사진까구--사진 액자.--- 우리 초등시절엔 앨범이 없었다.아니 사진이 귀해서 앨범을 채울 정도가 안됐다.

그래서 집집마다 저런 사진곽을 문틀 위나 아랫목 벽에 고정시켜두었다.

응접실이 없었고 지금보다 훨씬 남의 집에 가기가 쉬웠으며 대개 안방으로 안내됐기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고 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주로 결혼사진,졸업사진이 많았다. 아니면 회사에서 공동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돈이 귀했기에 사적으로 몇몇이 찍은 사진이 귀했다.피치못해 찍어야할 단체사진이 많았다.

자녀들이 사각모를 쓰고 찍은 대학 졸업사진은 큰 자랑거리였으며

시골에서는 자녀중 한 사람이라도 고등학교 교복차림의 사진만 있어도 부러움의 대상이 됐었다.

 대한민국 남자 중고생이면 모두가 들었던 가방.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저런 가방을 들었다. 떨어지면 꿰매고 감아서 사용한 것이 가난한 집 가방.

 부잣집 얘들은 도시락 가방이 분리돼 오래 써도 가방에서 김칫국 흔적이 보이지않았고 냄새도 안났으나

가난한 집 또는 멀리서 자전거로 통학하는 학생이 쓰던 가방은 1년만 지나면 김칫국물등 반찬국물로 얼룩지고 냄새가 났다. 

                 동네마다 있던 연탄가게--소매점///도심의 판자촌 골목은 리어카가 못들어 가므로 연탄지게로 날랐다.

               고된 직업이었지만 그래도 농사 짓는 것보다 훨씬 벌이가 나았다.

               연탄배달 하다가 개인택시 사서 70이 넘도록 개인택시로 먹고사는 사람도 있다.

               어쨋든 연탄 가게 아저씨는 머리카락부터 얼굴,옷까지 모두 시컴했었다.웃으면 이빨만 하얗게 드러났다.

 연탄 규격은 19공탄이 기본이고 22공탄 큰 것은 49공탄도 있었다.

화력은 크기에 비례했다.연탄도 아끼기 위해 불구멍을 꼭꼭 막도록 어린애들은 교육을 받았고

너무 꼭 막아둔 나머지 꺼트려서 결국 더 낭비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번개탄은 도시 있는 사람이나 썼지 시골에서는 막대기를 잘라 불을 붙였다.하루 연탄 두 장이면 난방이 됐다.

 

연탄을 때던 시절엔 연탄가스 사고로 많이들 죽었다.

나도 연탄가스에 중독돼 오후 두 시에 깨어난 적이 있었다.어린시절 아이큐 146으로 꽤나 영리 했었는데

중학교 2학년때 연탄가스 마신 후로 머리가 완전히 맛이 가서 기억력이 엄청 떨어졌다.

연탄 보일러로 진화된 후 연탄가스 사고로 죽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겨울이면 항상 연탄가스로 일가족 5~6명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사회면을 장식했다.

당시에는 대가족이라 일가족이란 규모가 지금과는 달랐다.

연탄 산업으로 파생되는 산업의 일종인 아궁이 공장은 연탄산업의 쇠퇴와 함께 사라졌다.아파트와 함께 기와공장이 사라지듯.

이 모두가 진흙으로 만들어 진 것이고 우리 어렸을 때 비포장 도로로 논에서 캐 낸 진흙을 한구루마씩 실은 말들이

콧바람 내며 다니던 생각이 문득 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