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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사랑 글짱들 원문보기 글쓴이: 디디울나루
잔광(殘光)과 서정의 변주(變奏)
--윤황한 시조시인의 작품 세계
문학평론가 리 헌 석
(사) 대전예술단체 총연합회 회장
1. 윤황한 시인에 대하여
석천(石泉) 윤황한 시인은 1927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난다. 용궁보통학교를 다니던 12세 때 부친을 따라 함경북도 성진으로 이주하는데 그 곳에서 어머니가 별세한다. 누이동생과 함께 고생하며 보통학교를 마치고, 성진항의 운송회사에 취직하여 가계를 돕는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타향살이를 거두기로 하고, 1945년 부친을 따라 귀향길에 오른다. 그처럼 어려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시조로 빚기도 한다.
홀로 된 마흔 나이 재혼도 마다하고
해방된 피난 열차 되풀이한 객지생활
자손들 커가는 모습
낙으로만 여기셨네.
―「사부곡(思父曲)」 둘째 수
예천으로 귀향하던 도중에 대전에서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나 새로운 둥지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잠시 고향에 머문다. 그러다가 1946년 다시 대전에 입성하여 평생을 보낸다. 성년이 되었지만 향학열이 식지 않아, 1947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한 일을 하면서, ‘호서중학교’ 야간에 적을 두고 학업에 열중한다. 당시 대전에는 ‘계룡의숙’ 안에 ‘호서중학교’ ‘호서민중대학’ 등이 설립되어 있었고, 이들 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윤황한 시인은 ‘호서중학교’ 재학 때에 문학적으로 소중한 인연을 만난다. 1930년대에 자오선에 [6월 공]을 발표하여 대전 충남을 대표하는 정훈 시인이 설립자 겸 교장이었다. 박희선 시인, 박용래 시인, 원영한 선생이 교사로 재직하여 그는 문학의 꿈을 가꿀 수 있었고, 향토사학자 최문휘 시인이 동급생이었다. 윤황한 시인은 당시 방송극을 집필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동백 학생시단’에 글을 발표하여 시인의 꿈을 가꾸었다. 특히 ‘동백 학생시단’에는 [대수(大樹)] [기관차]를 발표하고, ‘시민관’에서 그 작품을 낭송하여 주목을 받기도 한다.
그 옛날 계룡의숙
만학도를 불러 모아
세우신 호서대학
외치시던 민족정신
옹골진 개혁정신에
다짐했던 새 출발
―「정훈선생 시비(詩碑)」 둘째 수
중학교를 졸업한 1949년 봄에 ‘대전사범학교’ 특강반에서 교육을 받고, 그해 9월에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서 충남 아산시 염티초등학교에 부임한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6.25 민족상잔으로 인해 고향으로 피난을 가기에 이르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복귀하여 20년 가까이 초등교사로 봉직한다.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공부하여 1968년 중등학교 준교사 자격고시(국어)에 합격하고, 1970년 대전의 청란여자중고등학교에 부임하여 1992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중등교육에 헌신한다.
중등학교에서 문학창작 지도, 문집 창간, 연극지도 등을 겸하느라, 정작 자신은 창작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년퇴임을 맞으면서 새롭게 솟아나는 창작의 열정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시조’를 짓는다. 작품 창작에 열중하여 2008년에 계간 {아동문예}에서 동시조로 신인상을 받고, 계간 {문학사랑}에서 시조로 신인작품상을 받아 등단한다. 2009년에는 동시집 {허수아비와 아이들}을 발간하고, 2010년에 시조집 {아침을 여는 꽃}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3년 사이에 등단을 하고 2권의 저서를 발간하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현재는 대전문인협회, 문학사랑협의회, 대전시조시인협회, 가람문학회, 현대동시조문학회 등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며, 우리 겨레시로서의 시조(時調) 창작에 전념하고 있는 노익장이다.
2. 추억의 잔광(殘光)에 대하여
추억은 잔광으로 남아 그리움을 생성한다. ‘잔광’은 ‘해가 질 무렵의 약한 햇빛’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물리학에서는 ‘외부의 에너지 공급이 중단된 뒤에도 방출되는 빛’이라고 한다. 이는 다시 형광과 인광으로 나눈다. 형광(螢光)은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물질의 성질을 말한다. 어느 물질을 투사했을 때 투사 광선과는 전혀 다른 고유한 빛깔의 광선을 방사한다. ‘반딧불’의 속성이다. 인광은 복사선에 노출된 물질이 자극하는 복사 에너지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해서 내는 발광을 말한다. ‘인(燐)’에 의한 불빛의 성질을 갖고 있으며, 민속에서는 ‘도깨비불’이라고도 한다.
시인에게는 이미 사라져 버린 ‘현실’일 터인데, 추억 속에서 형광이 일어나기도 하고, 시인의 내면에 강렬하게 주입된 추억은 인광처럼 오랜 기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한 형광과 인광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 밖으로 표출되는데, 시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잔광(殘光)은 문학 작품으로 태어나게 된다.
엄마 등 업혀가는
산길 물길 삼십 리
세찬 바람 물소리
겁을 먹은 외아들
동구밖
성황당 장승
반겨 맞는 외갓집.
―「외가 가는 길」 둘째 수
시인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장 큰 잔광은 ‘어머니’와 관련된 것이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그늘에서 여동생과 단출하게 살아온 그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없는 메아리로 맴돌았을 것이다. 그 어머니가 친정을 가는 길은 바로 나이 어린 시인이 외가(外家)에 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산길 물길 삼십 리를 가던 어린 시절이다. 그때는 진달래가 한창 피어나던 봄날이었는가 보다. 산을 덮은 진달래꽃으로 인해 고개 이름도 ‘꽃재’가 된 그 길에서 시인은 ‘참꽃(진달래)’을 따 먹은 추억을 되새긴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추억의 한켠에는 ‘험한 내리막길’ ‘돌다리’ ‘세찬 물소리’ ‘성황당’ ‘장승’ 등 평소에 접하지 못하던 사물들에서 오는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린 소년은 예천에서 문경에 이르는 동안 생경하게 만나는 여러 사물들을 만나 두려움이 생겼을 터이지만, 이 두려움을 씻어주는 곳이 바로 ‘외가’였을 것이다. 외가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을 터이고, 가족들과의 반가운 해후(邂逅)가 이어졌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겪은 어머니의 별세로 인해 외가에 대한 추억은 더욱 간절하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어려서 떠난 고향의 의미도 특별하였을 것이다.
낙동강 긴 강줄기 거슬러 오른 자리
굽이쳐 흐르는 물 저만치 바라보며
용궁(龍宮)터 기이한 지명
머리엔 인 큰 동네.
뒷동산 긴 그림자 마을 덮는 대은리(大隱里)
우물가 미나리꽝 날아드는 잠자리떼
동구 밖 정자나무숲
감싸주던 큰 마을
그 옛적 이웃마을 산을 두고 전쟁놀이
쫓고 쫓는 산허리 나제(羅濟)싸움 흉내질
돌팔매 옛 석전놀이
꿈 커가던 소년시절.
―「내 고향」 전문
윤황한 시인은 초등학교 시절에 고향인 예천을 떠났기 때문에 추억도 그 이전으로 한정된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과 같은 내용을 잘 몰랐을 수도 있다. 해방이 되어 함북 성진시에서 귀향하여 잠시 머물었을 때에 고향의 이모저모를 확인하였거나,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수구초심(首丘初心)에 의하여 상세하게 알아보았을 수도 있다.
그가 추억하는 고향은 <낙동강 긴 강줄기 거슬러 오른 자리>였으며, ‘용궁면’이어서일까, <굽이쳐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뒷동산 긴 그림자가 마을 덮는 대은리>에 있는 우물가나 미나리꽝에는 잠자리떼가 날아다닌다. 그 뒷산에서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하기도 하고, <쫓고 쫓기는 산허리 나제(羅濟) 싸움 흉내질>과 석전놀이를 하면서 자란다. 이러한 사물들이 고향의 잔광으로 남아서 작품에 투영된다.
때로는 기행시(紀行詩)에서도 유사한 창작 형태를 보인다. 산이나 강을 찾거나, 명승지를 찾거나, 기행에서는 수많은 사물들과 만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시인에게는 특정한 사물만이 잔광처럼 남게 되고, 나머지는 보아도 보이지 않는 사물로 지나치게 마련이다. 시인의 내면에 잔광으로 남아 있는 사물들 중에 일부가 작품에 투영되어 나타난다.
동해 대왕암 자리 바라보는 용담산
우뚝 솟은 삼층석탑 옛 절터 일러주고
부왕의 명복 축원 효심 감은사지 남았네.
죽어서 용이 되어 눈엣가시 왜구 걱정
문무왕 호국정신 이어받은 신문왕
바다 속 동해수호신 살아있는 대왕암
문무대왕 나라사랑 ‘충’의 뜻 되새기고
신문왕 부왕 은혜 감사하는 ‘효’정신
‘충효’의 정신 깃들여 본받을 감은사지.
―「감은사지」 전문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해바다에 수중릉을 유언한다. <바다 속 문무대왕릉 세계 유일 수중릉>을 탐방한 시인은 <부처 힘 빌리고자 세우시던 감은사>와 함께 ‘충’의 호국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이 감은사는 동해 대왕암을 바라볼 수 있는 용담산 기슭에 지은 절이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이 부왕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세운 이 절은 ‘효’와 ‘충’의 정신이 깃들어 오늘에도 본받을 가치를 지닌다. 이런 발상에서 그의 작품은 창작되고, 남북 분단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훈기(薰氣)를 발산한다.
이러한 훈기는 역사적 사물에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명사(名士)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추구해야 할 지향을 노래하기도 한다. ‘무소유’를 주창하고 떠난 법정 스님의 열반에 그는 시조 한 수를 바친다. <빈 마음 나그네 길/ 바람 스친 일흔 아홉>이라하여 세수와 함께 인물의 지향을 비유적으로 노래한다. <조촐한 다비식>과 <남기고 간 책의 향기>를 통하여 <가식 없는 구도자 삶>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인품을 지향하는 시인의 내면이 오롯하다.
3. 연작시조의 지향에 대하여
시인이 시를 지을 때는 일물일의(一物一意)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 사물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가장 대표적인 의미와 서정을 찾아내어 노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같은 사물도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투영되고, 시시각각 자라거나 소멸되어 가는 것이 사물의 속성임을 상기하면,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의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망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유사한 무게로 나열되는 각각의 사물 중에서 합집합(合集合)으로 묶을 수 있는 속성은 연작시가 효과적일 수 있다.
윤황한 시인은 1월부터 12월까지의 특징을 잡아 「달맞이 노래」를 부른다. 1월은 ‘해오름달’이라고 하여 <해맞이 반기면서 품어보는 새해 희망/ 소 대한 혹한에도 영그는 새해 꿈/ 으뜸달 새로운 도약 다짐하는 해오름달>이라고 노래한다. 2월은 <때늦은 자리다툼 속 아쉬워하는 시샘달>로, 3월은 <봄 씨앗 뿌리고 싶어 기다리는 물오름달>로, 4월은 <소쩍새 울음소리에 피어나는 잎새달>로 노래한다.
종달새 울음소리 푸르른 입하 소식
진달래 꽃동산에 화전놀이 좋을시고
오월은 감사와 사랑 은혜로운 푸른달
―「푸른달(5월)」 전문
하지 날 매미소리 제철을 자랑하고
망종 지난 보리밭엔 판을 치는 풀무치
단옷날 온갖 풍습을 익혀보는 누리달
―「누리달(6월)」 전문
이러한 창작 과정은 12월까지 이어진다. 7월은 <한해의 긴긴 기다림 미리 맞는 경우직녀달>로, 8월은 <한여름 그 긴긴 한낮 익어가는 타오름달>로, 9월은 <중추절 알밤 터는 소리 축복받은 열매달>로, 10월은 <온누리 한마음 되어 받드는 하늘연달>로, 11월은 <오는 달 반기지 않고 밀쳐보는 미틈달>로, 12월은 <경인년 축복받은 해 보내고픈 매듭달>로 노래한다. 이는 월마다 특징을 잡아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어서 그 의미 또한 크다.
그는 ‘녹색교통의 개가’라는 의미를 찾아 ‘대전도시철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짓는다. 이는 교통의 편리함, 탄소배출을 막는 환경 보전의 의미, 노인들에 대한 배려 등의 가치를 지닌 도시철도(지하철)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와 함께 차남이 대전도시철도공사에 근무하고 있어, 이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특별한 것 같다. <한밭 도심 22개역 2억 명 고객 위해/ 무사고 천만km 목표 야무진 실천 돌입/ 친환경 도시 교통 수단 약진하는 도시철도>를 찬양한다. 특히 22개 역에 대한 세세한 내역을 두 수의 작품에 담아, 역마다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확대 재생산한 것은 중요한 일이다. <출발역/ 넉넉한 인심/ 정에 겨운 판암역> <새터말/ 옛 지명 걸맞는/ 꿈에 부푼 신흥역> <동대전/ 역세권 발전/ 이끌어가는 대동역> 등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지상에는 코레일
지하엔 도시철도
손잡은 형제 우애
행복도시 그려본다
관문역
명예 걸맞는
도시철도 대전역
―「대전역」 둘째 수
대전역은 <철도문화 선진 대전/ 지하철 우리 자존심>의 표상으로 존재한다. 기적소리를 내며 달리던 50년 전의 추억 속에서 대전 시민의 삶과 애환을 포괄하는 곳이다. 특히 <환승역/ 대전의 표상/ 꿈에 부푼 대전역>이어서 시인에게는 특별한 서정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 외에도 <젊음이/ 넘쳐나는 곳/ 활기찬 중앙로역> <자존심/ 되찾는 역할/ 공감하는 중구청역> <환승역/ 미래로 내닫는/ 서대전네거리역> <새로운/ 도시발전 구축/ 도약하는 오룡역> <활기찬/ 미래 모습으로/ 발전하는 용문역> <내 고장/ 활기찬 모습/ 이끌어가는 탄방역> <우뚝한/ 명품 청사/ 60년 전통의 심볼// 자치경영 종합 대상/ 행복지수 1등 도시// 발전된/ 고장의 면모/ 긍지 높은 시청역> 등으로 이어진다.
특히 시인은 22개 역을 여러 번 답사하고 작품을 빚었다고 하니, 이는 머리로만 쓴 것이 아니라 발로 쓰고 가슴으로 쓴 시조라 하겠다. 이와 같은 창작 형태는 진실의 반영으로 보인다. 가보지 않고 쓴 작품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수상을 한 후에 그 곳을 다녀왔다는 어떤 시인의 후일담을 읽으면서 고소(苦笑)를 금하지 못하던 경우와 크게 다르다. 그 시인은 표현의 멋과 재주로 수상을 하였지만, 작품 창작에 임하는 진실성에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황한 시인은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빚기 때문에 작품의 신뢰도가 높게 마련이다.
4. 시조의 멋과 의미에 대하여
윤황한 시인은 진실을 바탕으로 감동적인 작품을 빚는다. 체험을 중심으로 진실을 반영하는 작품을 창작하면서 표현의 멋과 기교를 겸비한다. 양자의 적절한 융합에 의하여 독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시조를 빚는다.
어제 오늘 눈비 소식
땅 속에서 들었을까
지심을 깨우는 듯
메아리가 흐르는데
연못가
버들강아지
홀로 듣는 봄비 소리.
―「수통골 개구리」 둘째 수
시인은 봄비가 내리는 경칩(驚蟄)날에 개구리를 만나기 위하여 수통골을 찾는다. 산은 짙은 안개에 쌓여 있고, 개울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들린다. 개울의 굽이를 돌러보며 개구리를 찾아본다. 그렇지만 늦잠이 들었는지 개구리는 보이지 않고 산새가 반갑게 맞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둘째 수가 빚어진다.
땅 속의 개구리가 이틀 동안 눈과 비로 변덕을 부리는 날씨를 알고 있어 나오지 않았다는 관점이다. 이 작품의 백미(白眉)는 이어지는 중장(中章)과 종장(終章)이다. <지심을 깨우는 듯/ 메아리가 흐르는데>에서 보여주는 표현의 멋은 가히 절창(絶唱)이다. 여울소리와 산새소리가 시인의 가슴을 울리듯이 ‘메아리’가 땅의 깊은 곳까지 울린다는 생각이다. 그 울림은 메아리처럼 멀리 퍼질 것이고, 그리하여 봄을 재촉하는 마음을 담아낸다. 그러나 현실은 연못가에 있는 버들강아지 혼자 봄비 소리를 듣고 있다는 시각이다. 이 버들강아지는 이른 봄에 만날 수 있는 사물의 대유적 표상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간절하게 봄을 기다리는 시인의 서정적 대상이기도 하다.
표현의 멋과 내면적 지향이 고도로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현충원 묘비 앞에서」가 있다. 객관적 묘사와 주관적 정서가 혼재되어 빚어낸 이 작품은 세대를 뛰어넘어 지켜야 할 겨레의 가치를 노래한다.
녹색 잔디 아담한 묘역
꽃바구니 앞에 놓고
묘비석 손자이름 쓰다듬어 불러 봐도
말없는 차디찬 비석
눈물짓는 할머니.
풍상이 지나간 사이
어른 되어 찾은 손자
할아버지 이름 석 자 손으로 만져보며
장하신 조상님 묘비
거수경례 올린다.
현충탑 높이 솟아
웅비하는 세 천마상
사철 고운 무궁화 가을 단풍 만끽하며
영령들 명당 성지에서
고이고이 잠드소서.
―「현충원 묘비 앞에서」 전문
시인은 현충원에 객관적 타자(他者)로 서 있다. 첫째 수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손자를 먼저 보낸 할머니의 정경이다. <묘비석 손자 이름 쓰다듬어 불러 봐도/ 말없는 차디찬 비석/ 눈물짓는 할머니>를 통하여 겨레의 아픔을 극대화한다. 둘째 수에서는 장성한 손자가 조국을 위해 순사한 할아버지를 기리는 정경이다. 셋째 수에서는 현충원의 의미를 내면화한다.
시인의 내면은 가족사로도 드러난다. 「성묘」에서 그는 <술 한 잔 올리고/ 엎드려 사죄해도/ 용서할 리 없으련만 무심히 흐른 세월/ 이제야 후회해본들/ 용서받지 못할 일>을 고백한다. 이와 함께 존경하는 인물이나, 주위에서 자주 만나는 인물들에서도 문학적 제재(題材)를 발굴하여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세상에서 만나는 사물, 존경하는 인물들, 현실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작품으로 빚어내는 윤황한 시인은 앞으로도 새로운 감동을 생성(生成)하는 작품을 빚으리라 확신한다. 8순(八旬)에 등단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는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고 있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의 철학과 서정이 어우러진 작품을 기대해도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