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폭포는 백담사에서 설악산국립공원 백담탐방안내소를 지나다보면 백담계곡과 대승령에서 내려오는 흑선동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상상했던 폭포와는 사뭇다르다. 누구나 이게 폭포야?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대부분의 설악산 지도에 황장폭포로 기록되있다.
황장폭포에 대해 두가지 의문이 듭니다.
① 언제부터 폭포라 불려졌을까?
② 황장(黃腸)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옛문헌을 살펴보면 1698년 곡운 김수증이 백담계곡을 유람하고 지은 유곡연기(遊曲淵記)에는
" 還過吉洞。至黃腸隅。(삼연정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길동을 지나 황장우에 이르렀다)"
고 黃腸隅 즉, 모퉁이 우(隅)를 쓰고 있습니다.
한편 성해응(1760~1839)은 기관동산수기(記關東山水) 寒溪에서
" 過大乘菴復行二十里。得松林大溪。乃曲百淵洞府也。淵深可二丈。廣袤數百步。淸澈見底。色如綠玉。又過熊井洞。緣崖數百步。得一奧區可耕。其東數十里。可至五歲菴。過吉洞黃膓瀨。山脚遮水口曰千春嶺。谷雲翁所命名。"
고 黃腸瀨, 즉 여울 뢰(瀨)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 설악산을 대중에게 소개한 육당 최남선의 이조선(裏朝鮮)의 명산(名山)에서는 백담계곡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글에서
"금강산과 설악산 중에서 어느 산이 나으냐 못 나으냐 하는 문제는 얼른 대답하기 어렵고, 또 아래도 금강산이 나으리라 함이 보통 가지고 있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마는 설악산에는 분명히 금강산에서 볼 수 없는 경치가 많이 있습니다.
첫째, 산의 입구인 갈역(葛驛:朴聖源의 <寒雪錄>에는 <加歷>이라 하였다)으로부터 시작하여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70리 길이의 긴 계곡에 바위 벼랑과 돌바닥이 깊은 골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을 덜고 굽이굽이 갖은 재주를 부려서 토막토막 소도 만들고 폭포도 드리우는 일대 필름은 금강산은 고사하고 조선의 어느 명산에도 다시 없는 장관일것입니다.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서 본다면 청룡담(靑龍潭)·황룡담(黃龍潭)·제폭(際瀑)·황장폭(黃腸瀑), 무엇무엇 하지마는 온통 합하여서는 곡백담(曲百潭)이라고 부릅니다. 해주의 석담(石潭), 청주 보은의 화양동(華陽洞)등을 다 한데 연접해도 그 길이나 그 기이함이나 다 설악의 곡백담을 따르지 못할 줄 나는 생각합니다. "
라고 황장폭(黃腸瀑). 황장폭포란 명칭을 사용합니다.
황장폭포의 異名
* 黃腸隅(隅 : 모퉁이우) : 유곡연기(遊曲淵記) 김수증 1698년
* 黃腸瀨(瀨 : 여울뢰) : 관동산수기(關東山水記) 성해응(1760-1839)
* 黃腸瀑(暴 : 폭포 폭) : 이조선(裏朝鮮)의 명산(名山)-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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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모퉁이인가? 여울인가? 폭포인가? 하는 것에 제 답은 '폭포는 아니다' 입니다.
황장(黃腸)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글자 그데로 '누렇게 창자처럼 구비구비져있다'고 풀이할 수도 있지만, 지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춘향목으로 알고 있는 좋은 소나무 즉, 황장목을 지키기 위한 황장금표에서 그 유래를 찾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부터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禁山 封山 제도가 있었습니다.
黃腸 封山
연륜이 오래 된 소나무 중심부에 황색이 된 부분이 있는 것을 황심이라 하며, 이런 황심을 가진 소나무를 황장목이라 한다. 황장목은 흔히 춘양목으로 부르며, 적송·직송·금강송·강송·춘향목·미인송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황장목의 황심은 목재가 견고하고 오래되어도 썩지 않아 중국에서는 천자·제후의 관곽을 제작하는데 황장목이 사용되 었다. 조선왕조에서도 세종 때에 임금의 관곽을 황장목판으로 짰다 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황장목이 있는 산림을 금산으로 금양하는 제도가 실시되었으며, 황장목을 구하기 위해 경차관(敬差官)을 지방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황장목이 있는 산림을 "봉산(封山)"하는 제도로 변하였다.
봉산에는 산직(山直)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고, 감관(監官)이 이를 감독하였다. 정부는 각 도의 황장봉산에 경차관을 보내 황장목을 베는 것을 직접 관리 케 하였다. 경상도 전라도는 10년에 한번, 강원도는 5년에 한번 날 을 택하여 경차관을 임명해 보내 황장목을 베도록 하였다. 산직은 나무를 베고 난 후 그루 수를 일일이 보고하여 매해 말에 상황 일 체를 비변사(備邊司)에 보고하도록 했다.
18세기 중엽에 황장목 산지 를 봉한 "황장봉산"은 전국에 모두 32개처가 있었다. 즉 경상도에 7 개처, 전라도에 3개처, 강원도에 22개처가 있었다. 그러나 순조 9년 (1809)에는 전국에 황장봉산은 60개처로 늘어났다. 전라도는 3개처 로 변동이 없지만, 경상도에 14개처, 강원도에 43개처로 1746년 보 다 각각 거의 2배가 늘어났다. 1830년경에는 강원도에 황장봉산이 41개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황장금표가 남아 있어 발견된 것은 인제군 북면 한계3리,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치악산 구룡사 입구, 영월군 수주면의 두산 2리 황장골(1802년 건립) 과 법흥 1리 사자산(건립 년대 미상), 그리고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1리 대광천 장군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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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곳이 황장봉산중 하나였을까요?
다시 고문서를 뒤집니다.
일성록 1800년11월 8일자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 설악산의 한계, 곡백담등 봉표에서 (황장목을 )어렵게 구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강 命黃腸木作板更自長生殿嚴飭
목 江原道 黃腸木 敬差官 李在安狀啓 雪嶽 寒溪曲百潭等 封標 僅得作夜者三十二立內五立以疵病退之二立以本縣常別制封進十五立以原州等九邑常別制推移移封次恪印捧上事敎以狀辭多駭然不貽弊未可知還下送更自長生殿嚴飭
바로 곡백담이 황장봉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장봉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제 추측이 맞는 것같습니다.
설악산에는 몇개의 황장봉산이 있었을까요?
순조왕(純祖王) 8년(1808년)경에 지어진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5 송정(松政) 각도 봉산(各道封山) 을 보면 인제에 3곳의 황장봉산이 있다고 기록됩니다.
○ 강원도의 봉산 43처 전부 황장 : 금성(金城)4처. 양구(楊口)3처. 인제(麟蹄)3처. 횡성(橫城)1처. 영월(寧越)1처. 평창(平昌)1처. 이천(伊川)1처. 원주(原州)3처. 홍천(洪川)2처. 강릉(江陵)3처. 고성(高城)1처. 양양(襄陽)2처. 정선(旌善)1처. 회양(淮陽)1처. 삼척(三陟)6처. 낭천(狼川)2처. 통천(通川)1처. 평강(平康)4처. 울진(蔚珍)3처. ○ 함경도의 송전 29처. ○ 이상 6도의 봉산 282처, 황장 60처, 송전 293처.
그러나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大東地志)》인제현 기록에는 "【토산】 붕어[鯽魚]ㆍ삼[麻], 황장봉산(黃腸封山) 두 곳이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3곳? 2곳?
그중 한 곳은 황장봉산은 雪潭堂 浮屠 (2) 라는 포스트를 통해 소개한 1690년 한계사에 불이나 한계천 30리 아래 치마골 북쪽으로 옮겨 지은 운흥사 터에 "黃腸禁山自西古寒溪至東界二十里'라는 암각문이 남아있어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 암각문은 1981년 당시 보성고등학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셨던 향토사학자 故 김종권(1917~1987) 선생님이십니다(속초문화원 발행 속초문화 3권 참조).
< 설악산 한계리 운흥사지 황장금표>
한편, 1899년에 쓰여진 인제현 읍지(麟蹄縣邑誌를 보면 봉산(封山)이 설악산, 한계산, 용대산 3곳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제현읍지 http://221.145.178.204/nrichdata/liter/godo/large/Mf02480424.jpg
인제현에 있는 황장봉산 3곳, 즉 한계3리 운흥사지, 설악산 곡백담이고 나머지 한곳인 용대산은 현재 용암이 있는 용대휴양림 부근이라 추측됩니다.
조선지도(奎16030)(1750에서 1768년 사이에 제작)
이상을 정리하면, 황장폭포는 이곳이 곡백담의 일부로 곡백담은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황장봉산중 한 곳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폭포보다는 황장봉산에 있는 모퉁이 또는 여울이이란 뜻으로 '황장우' 또는 '황장뢰'라는 표현이 타당합니다.
* 황장우 부근 어딘가에 운흥사지에서 처럼 황장금표석(黃腸禁標石)이 있다고 추측됩니다. 특히, 지금은 통제구역으로 설정되어있는 흑선동 계곡 입구에 지금도 벌목한 목재를 쌓아둔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력한 후보지입니다.
첫댓글 하일이 올만이네^^ 덕분에 유익한 지식 하나 알았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