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유배의 땅 남도를 향하여
이천 일년 이월 스무 하룻날 이른 아침에 들꽃마을 사람들 여덟명이 분당에 모여 이박 삼일 여행길에 올랐다. 엊그제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다가오는데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물안개 잔뜩 피워 땅의 것들을 모두 적셔가며 겨울잠을 깨우고 자연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빗물이 흐르는 소리에 사람들은 가슴 속 깊숙히 잠가둔 마음의 빗장을 풀고 나그네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숨을 죽이고 기지개를 펴는 생명의 몸짓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 봄 ! 봄이야 !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그리고 서서히 우리곁에 다가오는 봄의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온통 재색의 짙음과 옅음으로 하늘 땅 사람이 하나가 되고 정지된 산천의 만물이 천리의 화폭을 이루니 겨울내내 묵향을 뿜어내는 이 거대한 동양화를 보는 행운으로 벌써 내가슴은 설레이고 나는 그림 속에 뛰노는 한 마리의 사슴이다. 이순간 나는 철학자도 되고 시인도 되고 음악가도 되고 화가가 되어 스쳐지나는 나그네 설움과 감격이 뒤범벅으로 자연에 흠뻑 빠져 점점 회색빛 안개에 젖어든다. 오직 기억 속에 이 아름다움을 담으려 하니 자연의 섭리를 통한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미약한 나의 존재를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섬이 가장 많고 복잡한 해안선만큼이나 질곡의 삶이 진하게 배인 유배의 땅! 남도를 향하고 있다. 남해를 끼고서 반도에 첫발을 내딛는 곳 그래서 왜적의 침략을 받을 때는 최선봉에 섰던 곳이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은 주로 농업과 어업으로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밝고 소박한 삶으로 인정이 많은 곳이다.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나라의 혼란한 정세에 밀려 많은 의인들이 이곳 남도 땅끝으로 귀양살이를 오게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의로운 정신을 그곳에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유배문화가 형성된다. 그곳을 밟지 않고서야 우리 문화와 역사를 어찌 얘기 할 수 있으랴! 한양땅에서 천리 먼 길 남도로 죄인의 누명을 쓰고 소달구지에 묶여 억울하고 힘든 그 고행길을 우리는 너무나 편히 가고 있다. 이런저런 깊은 생각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우는 빗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망향휴게소에 도착했다.
우리일행은 차에서 내려 김밥과 유부국수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다시 차에 올라 허허로운 안성벌판을 지나 천안에 다다르자 매사에 꼼꼼하고 자상한 총무님은 지난해 손수 담근 구절초주라 하며 술 두병을 꺼내놓고 잔을 돌리기 시작하여 한잔씩 쭈ㅡ욱 들이키니 달착지근한 맛과 향이 차 안에 가득하여 지난해 늦가을 만발한 하얀 구절초 꽃밭에 그만 푸ㅡ욱 파묻히는 것 같았다. 기왕지사 이렇게 비도 오는데 우리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룻배를 타고 이태백과 마주앉아 주거니 받거니 흥을 돋구며 기분좋게 술에 담근 꽃향기를 두고두고 마시고 취하여 한 시절을 시 몇 수에 담아 술술 풀어 풍류를 즐기면 어떠랴!
호남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당도하는 여기는 내고향 정읍이다. 백제의 가요 망부가인 정읍사가 전해 내려오는 나의 고향산천에 오늘 발을 딛고서도 그리움 타는 내 가슴은 온통 물안개 속에 머물고 녹두꽃이 하얗게 피어오르다 세차게 불어오는 눈비바람에 사라진 녹두장군의 불꽃은 눈물비로 하염없이 흐르는구나!
ㅡ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ㅡ
이땅의 주인인 농민의 후손으로 우리들은 어려서 이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렀던가! 해마다 녹두꽃이 필 때면 갑오농민전쟁을 기리는 동학제가 열려 낮에는 풍악놀이에 시조대회 명창대회 등 시민 문화행사가 열리고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몇 개월 씩 노래와 춤을 연습하여 행사에 참여했고 초롱불을 밝혀 밤거리 등불행진을 하고 불꽃놀이 등 온 시민들이 밤낮 며칠은 시내에 다 나와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졌다. 그때 나는 행사가 즐거워 들뜬 기분으로 친구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휩쓸려 구경하길 무척 좋아했는데 철든 후에는 역사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던 전봉준 녹두장군이 이시대에 얼마나 그리운지 늘 아쉬움으로 고향을 바라본다.
힘겨운 농사일을 대물림 받아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들을 핍박하며 가렴주구를 일삼던 많은 관리들과 위정자들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운명은 모른체 자신들의 안위와 권세와 자리를 지키기 급급하여 외세까지 끌어들여 제나라 백성을 치고 망국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가슴을 치며 통탄을 금치 못할 비운의 역사가 서려있는 내고향을 오늘 잠시 머물다 비를 흠뻑 맞으며 떠난다. “나는 또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다시 빗길을 남쪽으로 달리고 달린다.
2) 사림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남도의 맥과 사림정신(士林精神)의 뿌리를 이루던 담양으로 향했다. 호남고속도로에서 동광주로 빠져나와 5.18 광주묘역을 지나 광주호쪽으로 15분 정도 달리다 광주호 끝자락에서 5분정도 더 가서 소쇄원에 다다른다. 일찍이 아침의 나라 조선땅에 찬란히 떠오르는 한 태양이 있었으니! 그빛이 매우 밝고 강렬하여 이나라에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 했으나 하늘을 뒤덮은 검은 먹구름에 삼키어 그만 어둠속으로 묻혀버렸다. 후세에 이땅의 백성들은 너무나 짧았던 그 아름다운 빛을 끝없이 그리워 한다.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 개혁의 기수로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인물이 바로 정암 조광조라 할 것이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의 개혁을 중종은 받아들이고 실행하려 했으나 왕 자신부터 감당하기 벅찼고 거기에 훈구세력의 거센 음모까지 가세하여 정신없이 혼탁한 정국으로 휘말려 보수에 밀린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기묘사화로 많은 개혁의 사림파들은 참패를 당해 유배길에 오른다.
이때 중종은 조광조의 유배지 뜻을 정암에게 물어 자신의 고향 경기도 광주를 놔두고 친구 양팽손이 있는 화순 능주를 택하여 그곳으로 귀양을 보내니 그는 그곳 능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석달 후 사약을 받는다. 이때 죽기를 각오하고 남도 유배지까지 따라와 조광조의 제자가 된 청년 양산보는 참신한 젊은 인재들을 뽑아 도학정치를 실현코자 조광조가 실시 했던 현량과에 급제한 신진사림의 한 선비로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겪은 후 일체 제도정치에 뜻을 두지않고 고향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돌아와 소쇄원(瀟灑園)을 지어 조광조의 사상을 이어간다. ‘소쇄(瀟灑)’라는 말은 맑고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으로 이곳 소쇄원에서 김인후 송순 고경명 기대승 김성원 정철 등 당대 기라성같은 선비들이 드나들며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하고 나라에 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정치토론장을 조성하여 훗날 남도의 재야정신의 바탕을 키운다. 지난 겨울 혹한을 견뎌낸 푸른 대나무 숲에 싸인 소쇄원을 우리는 들뜬 기분으로 바라보며 차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황토길을 걸어 올라간다. 나는 무성한 왕대숲을 고향 떠난후 아주 오랫만에 보게되어 정답고 또한 이곳 옛 선비들의 곧은 절개를 보는 것같아 무척 기분이 좋았다. 긴 담에는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시(詠詩)가 걸리었고 고암정사 부훤당의 건물이 있고 물레방아도 있고 석가산과 초정 화묵이 있어 안개 피는 산기슭에 아늑한 소쇄원이라!
우리는 바라보기만 하여도 옛님들의 그시절이 몹시 그리워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이곳을 들락이던 선비들은 자연과 어울려 지내며 아름다운 소쇄원에 애착을 갖고 곳곳에 이름들을 지어주었다. 이 소쇄원에 들어서면 광풍각과 제월당이란 정자가 있는데 ‘비가 개인 뒤 하늘에 뜬 밝고 청명한 달이 머무는 곳’이란 뜻으로 제월당(霽月堂)은 소쇄원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집주인이 사색하고 독서하는 서재와 같은 곳이고 ‘비가 지나가고 난 후 맑은 날씨에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는 곳’이라는 광풍각(光風閣)은 가운데가 방이 있고 둘레는 마루로 돼 있어 소쇄원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곳으로 손님 맞는 사랑채와 같은 곳이다.
이 두 정자 앞에서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대봉대(待鳳臺)가 있는데 그사이를 두고 고암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경계를 둔다. 봉황과 같은 귀한 손님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소쇄옹은 모든 예의와 멋을 갖추어 곳곳에 선비의 맑은 숨결이 절절히 흐른다. 우리는 사방을 둘러보고 이곳을 방문하는 그 올 곧은 선비님들의 마음가는 곳이 어디일까? 하고 눈길 닿는 데마다 우리의 마음도 정지하고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천년의 하늘이 있어 깊고도 넓은 곳이라!
정자주변에 있는 매화나무에 꽃봉우리가 봄을 제촉하는 비를 머금고 금방이라도 터트릴 듯 숨을 죽이고 푸른 하늘은 한가로이 연못 물속에 몸을 담그고 지나는 나그네 발길을 붙들어 “당신도 유배의 땅에서 오백년 세월의 강을 건너보오! 물 맑고 산세가 좋아 대나무 바람으로 몸과 맘을 씻어 세상짐을 다 벗어보는 것은 어떻소?”하고 속삭이는 이말은 내가슴에서 맴돌고 사람은 가고 없어도 옛모습 그대로 남아 그때를 잊지 않고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다행인가?
발걸음을 옮겨 봄비 맞는 부영정 식영정에 오른다. 춘란이 한창 자라고 있다. 우리 국문학사에서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훈민가> 16수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어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이 10세 때 을사사화로 가계가 몰락하여 유년기에 공부를 못하고 16세 때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 담양 창평에 내려와 10년간 성산(星山)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김윤제의 문하생이 되어 임억령 김인후 기대승 등 당대를 풍미하던 선비들에게 수학하게 되니 그역시 남도의 의로운 정신을 이어받은 호남의 큰 인물이다. 조선조 14대 선조 때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로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서하당 식영정을 중심으로 사계절이 아름답게 변해가는 성산의 풍경과 그 가운데서 한가롭게 소일하는 송강의 처 외재당숙벌이 되는 서하당 김성원을 위하여 읊은 긴 노래이다 .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란 뜻의 식영정(息影亭)은 조선 명종 15년(1560) 남면 지곡리에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을 위해 지어 바친 것이다. 임억령의 나이 65세이라! “쫒고 쫒기는 그림자가 쉴 곳은 어디인가?”라는 스스로 물음에 석천은 “내가 나무그늘에 숨으려함이 아니고 시원한 바람을 타고 자연과 함께 끝없는 거친 들에서 맘껏 지내고 싶다.”는 뜻을 말하고 이름을 식영이라 짓기를 바랬더니 사위 김성원은 기쁘게 받아드렸다고 한다. 김성원은 식영정의 앞산을 星山(별뫼)이라는 이름까지 지었다는데 성산을 마주하는 사위와 장인 사이가 각별하여 당대 풍류객의 운치와 멋스러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서하당 맞은편에 정통누정형식의 팔작기와지붕의 환벽당(環碧堂)은 을사사화 때 벼슬을 버리고 내려온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가 세우고 이름은 영천자신잠(靈川子申潛)이 지었다는데 김성원은 종질(從姪)인 김윤제와 늘 가까이 두고 지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적힌 대리석이 식영정 앞 늙은 소나무 아래 자리잡고 있어 자세히 읽어보고 돌아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마주 바라다 보이는 거리의 ‘취가정’으로 향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무등산 아래 석저촌에서 태어나 형 덕홍과 함께 대학자인 성혼(成渾)의 문하생이 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킨 형을 따라 전주까지 갔으나 형은 덕령에게 고향의 노모와 어린동생을 맡으라고 권하여 그길로 되돌아와 가족을 돌보고 지내다가 고경명의 참모가 된 형 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김덕룡은 상복을 벗고 담양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사람 5000명을 모집하여 당시 고경명, 곽재우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크게 하여 왜군을 통쾌하게 무찔러 호익장군(虎翼將軍)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으나 선조 29년(1596) 이몽학의 난 때 모함을 받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를 하였다.
김덕령의 뜻을 기리고자 그의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은 석주 권필(石洲 權韠,1569~1612)의 꿈에 김덕령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詩歌)’를 부르자 권필이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는데 연유하여 ‘취가정(醉歌亭)’이라 지었다. 다른 정자들은 자미탄을 바라보고 지었는데 취가정은 자미탄을 뒤로 하고 남쪽으로 펼쳐진 평야와 무등산을 바라보고 세워졌다. 김덕령이 한 잔술 들이키고 가슴을 치며 부르던 노래가사는 이렇다.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 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 구름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저
김덕룡을 난세에 너무나 억울하게 잃은 무등산줄기 광주에서는 오늘날에 무수한 설화와 야사가 전해지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장사(忠壯祠)와 장군의 묘가 있다. 담양에 있는 정자들 중에 가장 나중에 지은 이곳 취가정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나와 우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또 다른 한곳에 시선이 멈춘다.
공민왕 때의 충신 서은 전신민이 남면 연천리 산음동부락의 산 중턱에 세운 독수정(獨守亭)이다. 허름한 독수교를 지나 무등산의 동북쪽 기슭 산허리 구릉에 숲이 우거진 곳이다. 전신민은 계곡의 물줄기를 두고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후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계(前階)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고 하는데.........!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은 고려말 포은 정몽주와 동시대 사람으로 공민왕대에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로서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500년 종사를 지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절의를 지키는 72인은 800리길을 남하하여 서은 선생의 고향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을 말함)줄기 산음동(山陰洞)에 정자 한칸을 짓고 이태백의 시‘夷濟是何人獨守西山餓(이제시하인독수서산아)’의 구절을 취하여 ‘영원히 출세하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독수정(獨守亭)이라 이름을 지었다.
전신민과 두문동 72현(杜門洞 72賢)은 두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여 주나라의 곡식 먹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몸을 숨겨 고사리를 먹고 지내다 굶어죽은 백이숙제의 고결한 절개를 기려 “백이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 (伯夷何人我)”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태조 이성계가 등극후 누차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매일 이른 아침이면 조복을 입고 북쪽 송도(지금의 개성)를 향해 곡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정자가 남향인데 반해 독수정만은 북향이다.
동으로 왔으되 조복만은/ 신하의 몸에 있으며/ 멀리 송경을 바라보면/ 눈물이 수건에 적시네/ 요순세상은 이미 멀어졌으니/ 나는 어디로 갈까/ 저서산(수양산)으로 들어가/ 세상일을 끊으리/
채미헌(採薇軒)의 부원운(附原韻)이다. 이처럼 눈물로 쓴 글중에는 포은 정몽주의 부차운(附次韻)도 있고 독수정에 관한 많은 옛시문과 독수정중수기와 상량문이 아름다운 글귀에 담겨 대나무같은 절개가 전해오는데 산음동의 서은공 후손들은 대대로 선조의 곧은 정신을 이어가려 서로 자긍심을 일깨우고 재력을 힘써 모아 중수하고 서은 전신민의 고귀한 뜻과 높은 표상을 세우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기존의 독수정이 퇴폐되어 고종 신묘년(1891) 7월에 중수했던 것을 1971년에 오래된 독수정을 모두 철거하고 후손들이 새로 건축하였기 때문에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하고 정자주변의 중국 원산종인 회화나무, 자미나무, 매화나무등이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원림으로 1890년대 중건 당시 심었을 것으로 울창한 이 수목들만이 지방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냇물 위에 난간이 허물어진 다리를 건널 때 비로소 시절의 경계를 느끼며 돌아 나온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 담양군 남기면 상덕리에는 안당 조광조 김정 남곤 등 많은 학자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문장가 송순이 태어나 국문시로써 핍박 받는 백성의 고단한 삶을 고발하고 생전에 그의 고향에 세운 정자 면앙정이 있다. 퇴계 선생과 학문을 논하던 그곳을 우리는 가보지 못하고 아쉬움의 눈길만 보내고 떠난다. 호남지방의 모든 시가의 총본산이라는데..............!
식영정과 취가정과 독수정과 소쇄원에서 마음이 열리고 뜻이 통하는 조선시대 원림문화(苑林文化)에 흠뻑 취하고 싶었으나 스쳐지나는 바람같은 나그네 흔적만 그곳에 남기고 우리의 걸음은 다음 행선지를 향하고 있다. 길가에서 단비에 젖은 춘란잎이 무성히 잘 자라고 바로 옆에는 천년을 살아온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 우뚝 서 있어 말을 건낸다. “너는 직접 원림에 들락이는 풍류객들의 우정을 만나고 대나무에 이는 바람결에 들리는 시와 노래를 들었고 남몰래 흐르는 그들의 눈물을 보았을 터인즉 네가 부럽고 부영마을 앞에서 태어난 넌 제자리에서 천년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며 버티었기에 너를 바라보는 우리는 가슴 뭉클하고 물어볼 말도 많건만 우리네 백년을 넘기지 못하는 나그네로 너와 함께 하는 하루 여유가 없어 아쉬운 마음 가득 품고 오늘의 이걸음도 제촉하는구나!” “친구야! 부디 잘 있거라!”
헤어지기 서운한 우리의 발걸음은 가까운 가사문학관을 그냥 스쳐 지나간다 .
3)화순적벽에 천의 얼굴 운주사
운주사를 향하여 능주를 넘고 남평을 지나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에 도착한다. 화순은 내륙 한가운데로 구릉과 산지가 많고 물이 적어 농사짓기가 매우 힘든 곳이다. 소박한 이곳이 일찍이 이나라에 개혁과 이상을 실현코자 했던 조광조가 유배되어 사약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말년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중국의 적벽에 못지않다 하여 화순적벽에 반해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이렇듯 아름다움 속에 아픔이 진한 화순에 ‘구름이 떠돌다가 머무는 절’이라 하여 운주사(雲住寺 또는 運舟寺)는 이곳에 극락세계를 만들고 싶어하는 민중의 염원이 많이 담겨있다. 신라 때 영구산자락에 고승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200년 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창했다. 풍수상으로 배가 움직이는 형상으로 우리나라가 왜구쪽으로 기울까 염려하여 도선국사는 하루 낮 하룻밤 만에 도력으로 천불 천탑을 지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고 이런 운주사가 임진왜란 때는 크게 훼손되어 폐사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일제 때만 해도 석불이 200여구 석탑이 30기였던 것이 석불 93구와 석탑이 21기만 남아 있다가 점점 줄어 지금은 18탑 70불이 현존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나라 문화 유적지 유물 보존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 우리가 계속 다니면서 유물 훼손을 피부로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로 자랑하면 무엇하겠는가? 후손에게 보여줄 것이 없으면 어떻게 교육하고 공감을 얻겠는가? 그곳 공터에서도 석불조각인 듯이 보이는 제법 커 보이는 것이 방치되어 아무렇게 나뒹구는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석불상 코들이 왜 그렇게 떨어져 나갔나 했더니 한때 무지한 민가에서 석불상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 탓으로 그것을 떼어갔다니 웃지 못할 일이다. 산기슭이 아닌 산 밑 평지에 자리잡고 사천왕문이 없는 것이 특징인 이런 운주사에 들어서는데 조광조적려유허비가 제일 먼저 눈에 띄고 구층석탑 운주사석불감 쌍배불좌상이 보인다.
운주사의 거대한 암반 위에 세워진 구층석탑은 탑신부에 기하학적 문양이 조각되어 가득하고 옥개석이 독특하다. 어떤 것은 아무렇게나 생겨 납작하고 거친 자연석 그대로 쌓아 놓았는데 이탑은 거지탑이란다. 또 어떤 것은 실패 모양같이 생겨 실패탑이라 하고 떡시루 쌓듯 하여 시루탑이라 하고 갖가지 형상에 따라 물동이탑 또아리탑 그리고 연화문의 광배가 있는 돌부처 그리고 나란히 선 부부불상과 관모를 쓴 듯한 시위불상 등 운주사와 천불산에는 천가지의 이야기와 천탑의 얼굴이 있고 천년의 역사가 서려있다. 길 옆 가까이 공사바위 아래에 있는 평범한 마애여래좌상은 과거 힘들게 살아 가던 백성들의 눈물과 함께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827~898년)가 1주야에 천불 천탑을 조성 했다는데 그탑들은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나름의 모양새가 특이하고 깊은 의미와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나 나는 이제야 많은 것을 알고싶어 설명서나 안내장 하나라도 더 구하여 보고싶어 했으나 얻어 보기가 무척 힘들어 아쉬웠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었다. 수 백년에서 천년을 훨씬 넘어 비바람 맞으며 때로는 외침에 의한 전쟁 또는 6.25와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의 회오리를 뚫고 견뎌온 것을! 일찍이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앞서 깨인 자와 백성들은 조상의 유산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던가?
아! 난 그동안 너무 무심하여 우리나라 각지에 흩어져있는 유물과 유적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없이 관광을 다니면서 으례히 구경거리로 보고 오는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조상들의 유산과 유물을 발굴하고 연구하고 지키는 것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나 정부에서나 할 일이라고 안이한 생각을 하는 사이 수 많은 유물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함부로 방치하여 훼손이 심각해졌고 조선말 나라가 기울어짐과 동시에 궁궐은 불타고 이땅을 짓밟은 일본인들은 전국의 유물들을 궁궐에서 왕릉에서 사대부들의 무덤에서 사찰에서 민가에서 무수히 수탈해 갔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선에서 가져왔노라고 우리에게 자랑을 한다.
한가지 예로 조선왕릉에 있던 높이가 4~5m나 되는 대형 망주석 4개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뒤뜰 장방형 누각을 받치고 있는 것을 국내신문에 사진과 함께 보도가 됐다. 우리의 신성한 망주석이 일본땅에서 박물관 지붕 받침대로 쓰이다니! 이런 분함과 억울함 속에서도 우리나라 여행객이 나라 밖의 일본에 가서 그곳의 공공건물이나 공원이나 민가에 흩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유물을 미처 몰라보고 그들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될지..........!
우리가 스스로 우리 문화유산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설움이 복받치는 일이다. 나라 안에서는 우리문화에 대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일부 관계인들은 보수공사에서 무조건 콘크리트부터 발라놓는 우를 범하기 일쑤여서 전문가가 아닌 우리 눈에도 흉해보여 가슴이 아프다. 우리의 관심부족으로 문화재 관리가 허술하여 망가지고 잃어버리는 것이 허다하고 나역시 역사를 책에서만 알려고 하였으니 지금에야 부끄러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말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 주위를 살피니 여기 운주사에는 정말 탑이 많았다. 그가운데 눈에 띄는 아름다운 탑이 있어 유심히 바라보니 버섯모양의 옥개석을 포개어 놓은 7층 원형다층석탑이 있다. 골짜기 중간에 아주 특이한 석조불감이 있는데 여러장의 면석으로 감실을 만들고 그안에 두구의 석불좌상이 등을 맞대고 있어 앞에서 보고 뒤로 돌아가 또 하나의 불좌상을 보니 하도 신기해 빙글빙글 돌면서 여러번 봤다. 산을 조금 더 오르다가 돌바위에 7층석탑이 아슬아슬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던지 한참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탑은 땅에 박힌 자연석을 놓여진 그대로 바닥에 이어서 깎아 탑을 세웠으므로 조상들의 지혜와 멋이 돋보인다. 그리고 운주사에는 유명한 와불이 있다. 반듯하게 누어 있는 커다란 바위에 불상 한쌍을 나란히 조각을 했는데 그밑으로 떼어내질 못해서 누운 그대로 있다는 설이 있고 그외에 여러설이 있는 가운데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도선국사가 하루 낮 하루 밤사이 새 세상을 염원하여 천불석탑을 조성 하던중 마지막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날이 샌줄 알고 천상의 석공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버렸단다. 미완의 사연인가? 잠자는 석불인가?
이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는데..............!
몇 걸음 더 가면 칠성바위가 있는데 이위치가 북두칠성이며 기울기가 조금씩 다른데 여기에도 천체 운행의 뜻이 있다하니 우리 범인은 “ 어떻게 ?” 하고 고개만 끄덕일뿐 도무지 시공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내가 한번에 다 알려고 맘 먹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인가! 나는 앞으로 자주 찾아와 보리라! 그리고 옛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리라 ! 숨 쉬어 보리라 ! 다시 차에 올라 산길을 달린다. 으레 차에 오르면 차창 밖을 무심히 바라보며 “산에 있는 나무들은 어떤 빛을 띠고 있나?” 하고 계절을 가늠하고 있는데 벌써 장흥땅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4)역사의 진실이 살아 숨쉬는 장흥의 보림사
여기 장흥은 산세가 험한 지형 탓으로 고립되어 이지방 수령들이 백성들을 마음대로 착취함으로 그횡포가 극심하여 도탄에 빠진 그곳 백성들은 대부분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고 포교하는 동학에 적극 참여하였다. 동학농민전쟁 때 녹두장군 전봉준이 1894년 12월에 공주 우금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관군에 사로잡혀 끌려갔는데도 농민군은 끝까지 뭉쳐 장흥 남외리 석대들싸움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인다. 힘없는 조선농민군의 붉은 피로 물들은 탐진강가에서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성들은 목놓아 통곡 하였다.
이렇듯 역사의 진실이 살아 숨쉬는 장흥에서 우리는 먼저 보림약수를 달게 마시면서 세월을 짚어보려 고목의 뿌리 깊은 내음을 천천히 음미하고 산을 둘러본다. 보림사에서 선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도수 높은 안경을 세련되게 쓰고 다니시던 수학선생님이 모습이 선했다. 그선생님의 부모님은 아들이 없어 오랫동안 애를 태우던 중에 절을 열심히 다니면서 지극정성을 다 쏟아 공덕을 쌓고 부처님의 자비로 아들을 귀하게 얻어 ‘보림’이란 이름까지 지음 받았다는데..........!
보림사(寶林寺)는 1515년 조선 중종 10년에 건립된 것으로 원래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759년에 원표대사가 창립 한 것으로 그때의 이름은 가지산사(迦智山寺)이며 그후 100여 년이 지나 보조선사가 새로 지어 선종의 명찰이 되었고 당시 헌강왕이 중국 조계산의 절 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로 발전하고 번창하여 고려 말까지 많은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동양3보림(인도 중국 한국)의 하나로 선종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고 체증보조선사가 신라 헌안왕의 선유를 받들어 세운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종찰이다. 삼국유사를 지은 승려 일연도 가지산문의 문하였다고 한다.
보림사에는 대웅보전을 비롯 삼층석탑 과 철조불상 그리고 부도들과 탑과 비 그리고 사천왕상이 있고 수많은 사리탑이 있다. 깊은 산속에 천년 묵은 비자숲으로 평평한 절터를 가지산이 끌어 안고 있는 천년 거찰의 장대함을 6.25 전쟁 중에 군경 토벌대가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제외하고 목조건물 모두를 불태워버려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현존 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이 있는데 덩치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과 코 그리고 그얼굴의 형상에 익숙하지 못한 난 무섭게 느껴졌다. 난 그옆을 지날 때는 무슨 뜻이 있을 것도 같아 궁금했지만 거대한 위압에 눌려 차가운 얼음 속을 지나는 것처럼 싸늘하게 올려다보고 지나 다녔다. 보물 제1254호로 지정된 이사천왕상에서는 월인석보, 금강반야바라밀경 등 임진왜란 이전의 귀중한 고서 250여권이 발견되어 역사학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새로 지은 대적광전 앞에 삼층석탑 2기와 석등 1기가 있는데 남과 북으로 두 탑이 마주보고 그 가운데에 석등이 탑과 같이 화강석으로 되어있고 팔각의 화사(火舍) 위에 2층의 옥개(屋蓋)가 포개져 있다. 이렇듯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으로 통일신라의 귀족적이고 화려한 양식이 가미된 과도기의 작품이다. 이석탑은 870년에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탑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어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여기저기 살피며 한바퀴 돌고나서 안내글을 읽다가 마음이 끌려 자세히 보니 비로자나불은 ‘전우주 어디에나 빛을 비치는 참된 부처로 대일여래라’ 하며 대적광전(大寂光殿)혹은 비로전(毘盧殿)이라 한다. 이러한 대적광전이 불타버렸고 다행히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那舍佛坐像)만 남았다. 이불상은 광배나 대좌는 없고 불신만 있는 신라 하대(下代)에 철로 만든 철조불상으로 새로 지은 대적광전에 모셔졌는데 높이가 2.7m이고 앉은 무릎 폭이 2.02m인 건장한 체구의 불상으로 유일하게 조성 연대와 내용이 새겨져 있는 신라말의 걸작품이다.
또다른 쪽에 우리의 관심이 쏠린다. 보림사의 창건자 보조선사의 부도인 창성탑과 창성탑비가 있는데 화려하고 섬세한 제작기법과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예술형태를 느낀다. 그리고 탑비에 새겨진 명문에서 보림사의 창건 내역을 확실히 알 수있다. 정신없이 많은 석불의 아름다운 선을 살피다 해가 저물어 그곳 골짜기를 빠져나와 들길을 달리는데 사방을 둘러보니 저멀리 보이는 산등성에 모양새가 아주 특이한 바위가 보여 우리들의 눈길이 그곳에 쏠린다.
그바위는 어느 여인이 아이를 업고 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는 형상으로 모두들 궁금하여 최선생에게 물으니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저기 저 제암산 아래 평화마을이 있는데 그곳 마을의 제일 가는 부잣집에 어느날 한 스님이 찾아와 시주 하기를 권하였다. 그집 시아버지가 나와보고는 며느리더러 오물을 퍼다 주라고 명하였다. 그말을 들은 그집 며느리는 시아버지 몰래 쌀을 시주했더니 그스님이 받아가지고 나가다 되돌아와서 그며느리 보고 “앞으로 머지않아 이마을에 큰 홍수가 날 것이니 그때는 저 앞산에 올라 계속 앞만 보고 산을 넘으시오! 그리고 저 산을 다 넘을 때까지는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되오!”하고 당부를 하였다. 그런 사실이 있은 후 얼마 안가 그스님 말대로 대홍수가 그 마을을 덮쳐 그며느리는 애기를 들쳐업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제암산에 오르고 있었다. 그며느리는 한참 산을 오르다 산정상에 조금 못미쳐 도저히 자신이 살던 집과 사람들이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어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순간 그며느리와 등에 업힌 아이가 돌이 되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재미있게 듣고나서 생각하니 하도 신기하여 “참! 우리가 잘 아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롯의 아내 이야기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을까?”하고 나는 말했다. 아브라함은 죄악으로 타락한 소돔 고모라를 하느님 심판에서 구하고자 하느님께 매달려 애원하는데 심판을 면할 의인 10명을 끝까지 찾지 못하고 자기가 사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하느님이 소돔성에 보낸 두천사를 맞이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힘든 하룻밤을 지샌 후 두 천사의 손에 이끌리어 그의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심판 받는 죄악의 도시 소돔성을 빠져나와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산으로 도망가는데 유황불이 비같이 쏟아져 활활 타오르는 소돔!
롯의 아내는 소돔 땅에 남기고 온 모든 것이 안타까워 자신이 살던 곳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되돌아 봄으로 그만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으로 변하여 구원의 산을 넘지 못하였다. 이세상 살아가는 이치와 깨우침을 주는 교훈은 시대를 막론하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동쪽나라나 서쪽나라나 또는 서로 다른 종교에서도 통하는 데가 있다. 참으로 우리나라 민가에는 이처럼 들풀 내음으로 잔잔하게 스며드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 이리하여 우리네 마음을 땅의 흙 가까이 낮은 곳에 차분히 가라앉히며 우리의 발걸음은 천년의 신비가 서려있는 청자골 강진읍으로 향했다.
5)청자골에 다산 정약용
조선의 푸른 꿈을 잉태한 강진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 초기에 남해안 지방 일대에 왜구의 해적질이 극심해지자 조선 태종은 1417년에 광산현(현재 광주)에 있던 병마절제사영을 강진으로 옮겼다. 원래 강진군 북부지역인 도강군의 ‘강’자와 남부지역의 탐진현의 ‘진’자를 합쳐 강진이다. 이 병영성은 1656년에 네덜란드 하멜 일행이 7년간 억류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월출산 남쪽 기슭에 무위사가 있다. 그리고 만덕산에 다산초당이 있고 백련사가 있고 그리고 강진군 대구면에는 18만여평의 188개소나 되는 가마터가 있다. 여기 대구도요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집단적 청자 도요지다. 강진 사람들은 훌륭한 전통을 대대손손 이어받아 고려시대는 청자를 조선시대는 분청사기나 백자를 그리고 칠량면 봉황리에서는 이고을에 찰지고 철분이 많은 흙을 이용해 유명한 칠량옹기를 구워냈다.
이 칠량옹기로 음식을 담아 먹으면 맛이 변치않는 최고의 그릇이라는데 오늘 저녁식사는 칠량옹기에 음식을 차려먹으면 어떠하랴? 우리일행은 백제장이라는 숙소를 찾아 긴 하루 여정을 풀고 저녁상을 받으니 강진에서만 나는 특산물 매산이탕이 올랐다. 매산이는 매생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바다풀 파래를 으깨어 만든 것같고 바다 갯내음이 물씬하여 노곤함이 한꺼번에 다 씻기는 듯 하여 입안에서 목화솜을 풀어 놓은 듯 부드러운 매산이가 술술 넘어간다.
식사 후 포만감이 가져오는 나른함 속에 앞으로 있을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잠들었다. 하룻밤을 자고 이른 아침 황선생과 운동복 차림으로 숙소를 나서니 짙은 안개에 한 치 앞도 안보인다. 무조건 변두리를 향해 안개 속을 달려 오랫만에 시골 논둑길을 걷고 싶은 간절함에 애써 찾으려 했으나 좀처럼 쉽게 만나지 못하고 헤매다가 강진 중학교 교정에서 운동장을 두바퀴 돌고 되돌아 아침 식사시간에 대느라 숙소까지 진땀이 나도록 오던 길을 뛰었다. 땀 흘린 덕에 시원한 조개국은 속이 후련하고 아침밥은 고소하여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한가로운 길을 나서서 모두가 상쾌한 기분으로 강진 읍내를 걸었다. 강진 시내를 두루 다니다 보면 두루마기한복을 입은 두동상을 만나는데 갓을 쓴 다산 정약용선생의 동상과 갓을 쓰지않은 시인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 있다. 두분 모두 강진사람들이 특별히 아끼고 존경하는 분으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는 가까이 남성리에 있는 시인 영랑의 생가부터 찾았다. 단아한 초가집과 흙담의 노란 볏짚지붕이 따스한 햇살을 받아 황토빛이 더욱 선명하고 600년 된 동백나무와 3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서 옛농가의 모습 그대로 꽃이 필 때는 얼마나 멋있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깔끔한 흙마당 한 켠에 크고 작은 장항아리가 즐비하게 놓여 있는 장광이 있고 돌틈사이 맥문동은 너울너울 자라나고 반대쪽에는 영랑이 아침마다 목을 축이고 세수하며 맑은 하늘을 대했을 새암이 있었다 .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영랑의 시를 떠올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문간채에는 쇠스랑 괭이 쟁기 떡판 망태기 등 농기구들이 뒤엉켜 있었고 곳간에는 뒤주 절구통 저울이 있고 부엌에 들어서니 검정 무쇠솥이 걸려 있는 부뚜막이 있고 한쪽에는 풀무 사기그릇 다듬이돌도 있고 그리고 벽에는 낡은 바낭이 걸려 있고 방에는 화로 인두 다리미 물레 호롱이 아기자기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도 옛시인의 생활이 묻어 있음을 느낀다. 금방이라도 영랑은 “에헴!”하는 큰 기침소리와 함께 안채 방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뒷뜰에는 대밭이 무성하고 동백나무와 송악나무가 푸르름을 더하는데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의 이 시비는 담장밖의 높은 아파트와 함께 온화한 뜨락에 차가운 대리석으로 남는다. 일본이 이땅을 유린하고 최악의 폭정을 하며 세계대전을 준비하던 시절 1930년대가 떠올라 한가롭게 생가를 돌아서 아름다운 초가를 바라보는 나의 발걸음으로 영랑의 고민에 다가서려 하니 내머리 속이 복잡하고 나의 마음은 무겁고 허전하다. 담장 밖에서 뒤돌아 다시 영랑생가를 한참 바라보는 동안 흙담에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신데 내뇌리에서는 “서정시에서도 시대성과 역사성은 생명과 같다”라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이 떠나질 않는다.
다시 우리 일행은 차에 올라 강진 읍내를 벗어나 곧 다산 정약용 생가로 향했다. 다산은 본명이 약용(若鏞)으로 영조 38년(1762)에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진주목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7세에 역법과 산술에 달통하고 10세에 경사(經史)와 시율(詩律)을 본격적으로 공부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일찍이 모친 (윤씨, 공재 윤두서의 손녀)을 9세에 여의고 그는 15세에 풍산 홍씨와 조혼을 한다. 그의 매부인 이승훈이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고 성호의 유서를 공부함으로 학문의 길을 택한다. 다산은 22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 당시 임금인 정조에게 발견되어 아낌없는 사랑을 받게된다. 23세에 이벽(李檗)과 함께 지내다 처음으로 천주교의 도서를 접하고 후에 천주교의 신자가 되기도 하고 배교(背敎)도 하며 그에게는 종교가 끊임없이 정쟁의 구실이 되어 정적의 무척(誣斥)을 받았으나 정조의 두터운 신임과 보호를 받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28세에 약용은 대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경기도 암행어사,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나 39세에 이르러 정조의 죽음을 맞는다.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함에 따라 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노론계의 집권은 남인계의 실권으로 이어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됐다. 이런 배경으로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남인계 최초의 천주교 신자들인 이벽 이가환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두 형과 권철신 이기양과 함께 약용 자신도 체포되어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 일어나 또다시 강진으로 유배된다. 다산의 천주교와의 인연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고난과 함께 간다.
그의 나이 40세에 신유사옥을 맞아 유배길에 오른 것이 57세 때까지 무려 18년이나 되는 파란만장한 시련의 길이었다. 하지만 다산은 학자로서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와 저술에 온 힘을 기울여 시서예악춘추(詩書禮樂春秋)6경 및 사서에 관한 경집(經集)이 232권이고 시와 의학을 다룬 문집에 해당하는 것이 260여권에 이르러 엄청났다. 다산은 40세 이전 관리생활을 하면서도 쓴<중용강의(中庸講義)> <대학강의(大學講義)> <시경의(詩經義)>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마과회통(麻科會通)>등이 있고 수원성역사의 계획에 참여하여 쓴 <수원성제(水原城制)> <기중가도설(起重架圖設)>도 썼다. 다산은 자신의 저서에 대해 “육경 사서로써는 수기(修己)를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써는 천하국가를 위한 것이니, 본(本)과 말(末)을 다 갖추려 함이다.”라고 간단히 말했다.
그의 불꽃같은 업적을 놓고 부러워서인지 어느 작가는 이시대에도 유배제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난 그의 유배지에서 만감이 오락가락 했다. 나역시 다산선생이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그많은 책을 썼다는 사실과 실학에 바탕을 둔 사상과 학문에 놀라움과 존경을 뭐라 표현 할 수 없지만 잠시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하면 그분이 살아 생전 겪어야만 하는 마음의 고통은 어쩌면 살아있다는 것이 죽기보다 더 힘들었으리라!
한 때는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우고 충성을 다하여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신하일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정쟁에서 밀려나거나 죄인이라는 누명을 쓰게되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유배길에 올라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질시하고 배척하고 언제 죽음을 대할지 모르는 사약을 유배가는 도중에서 만나기도 하고 사약이 유배지에 먼저 와 기다리기도 하고 유배지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사약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찌 그분의 업적만 눈에 띄고 사람은 가고 없는 유배지를 보며 경치 좋은 한가로운 모습으로만 바라볼 것인가? 실제로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어 왔을 때 아무도 그를 받아 들이지 않아 움막같은 곳에 혼자 기거하는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겁을 먹고 그곳의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도망가 귀양 온 그를 악인으로 알고 대하길 꺼려하니 동문 밖 변두리 주막집의 노파가 가엾게 여겨 그 주막집에 거처하게 하여 다산은 그집을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짓고 4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4년 동안 그는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않고 학문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후 1808년 봄에야 외가쪽 사람 윤단이 이 딱한 처지를 알고 마련한 산정으로 다산선생을 모셔온다. 이곳이 도암면 만덕리의 다산초당이다. 원래 이 다산초당은 귤원처사 윤단이 초가로 지었던 것을 후에 다산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차로 20여분 걸려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기슭에 다달아 차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니 양지쪽에 인동덩굴이 겨울을 나고 아주 새파랗게 울타리를 이루어 상쾌한 기분으로 길따라 가는데 우리처럼 문화기행을 단체로 온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을 빽빽이 매워 우리는 이리저리 틈사이로 비켜 찾아 다녔다. 맨처음 발길 닿은 곳은 서암(西庵)이다. 다산이 유배 당시는 초막으로 지었던 것을 지금은 기와집인 이곳에 다성각(茶星閣)이란 추사 김정희 선생의 현판 글씨가 쓰여 있다. 이곳에서는 18명의 제자들이 수학을 했다고 한다. 그 옆으로 다산초당이 있고 동암의 동쪽으로 연못을 만들어 연지(蓮池)라 하고 그 가운데에는 석가산(石假山)이라 하여 탐진강가에서 돌을 주워다 산처럼 봉을 쌓아 섬을 만들었으니 바로 연지석가산이다.
동암 뒤로 돌아가면 약천(藥泉)이라 하는 약수 우물이 있는데 다산은 이 약천의 물로 차를 달여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뜨락에는 ‘다조(茶竈)’라는 큰 넓적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달였다. 주변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고 산비탈의 물줄기 흐름 따라 대나무로 긴 홈통을 만들어 물이 자연적으로 그곳에 모이게 하니 비류폭포도 만들고 잉어도 기르고 하여 삭막한 유배생활에서도 자연환경을 아름답게 가꾸는 여유와 몸소 땀으로 노력하는 모습은 후세 우리들에게 다산의 긍정적인 생활철학이 진하게 다가온다.
연못 옆으로는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고 기와집 동암(東庵)이 있다. 일명 송풍암이라 하는데 그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고 현판에는 다산동암(茶山東庵)이란 글자가 정다산의 친필로 쓰여 있고 그옆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란 추사 김정희 글씨가 멋스러운 대조를 이룬다. 신유박해로 강진 유배생활 18년 중 10여년 동안 솔바람이 부는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책을 썼다. 다산의 그때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초당 오른쪽 바위에 해서체로 깊게 새겨진 글자 정석(丁石)뿐이다.
다산이 손수 쓴 그 뜻은 천년 비바람에도 변함없이 전하여 질 것이다. 우리 일행은 동암을 비켜서 천일각에 오른다. 오랜만에 앞이 확 트여 멀리 구강포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쐬며 다산을 생각한다. 천일각에 올라 가족을 생각하고 저기! 저바다 끝에 손을 뻗치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흑산도에 유배된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며 바라보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다산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애틋하여 부인이 보내온 붉은 치마를 잘라 장첩을 만들어 <매화와 새>란 그림을 애절한 사연과 함께 그려 딸에게 전했다고 한다. 다산선생은 정치 경제 사상 의학 예술 등 우리나라 후세에 끼친 영향이 하도 커 다방면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로 우러러 봄은 이 시대에도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각처에서 필요한 귀감의 교훈을 남기셨고 우리는 그분의 뜻을 기리고 그분의 발자국을 더듬고 싶어 찾아갔는데 다산초당 마루 끝에 앉아보지도 못하였다. 이땅에 다산의 품은 얼마나 크고 깊단 말인가? 그분의 뜻을 어찌 다 우리가 감히 짐작이나 하리오? 보는 것마다 아쉬움으로 우리 가슴을 가득 채우고 아! 더디기만한 나의 걸음아!
그래도 나는 더 알고 싶고 더 깨닫고 싶어서 그분의 이나라 이백성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바라보며 나는 한치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이다. 아쉬운 눈길로 이곳저곳 더 살피고 이생각 저생각에 잠기다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다가 돌아서는데 무엇인가 자꾸 우리의 옷자락을 붙잡는 같아 뒤돌아 보고 다시 앞을 향해 하늘을 우러러 보며 계속되는 뒷산 길을 따라 오른다. 춘란이 기지개를 맘껏 펴고 훼나무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키 작은 녹차나무가 곳곳에 야무지게 잘 자라고 있었다. “아! 이 만덕산 중턱쯤에서 강진만 앞바다가 환하게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하고 우리도 덩달아 마음을 넓히니 양지 바른 이길을 200여년 전 다산은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나러 매일 산책을 했을 터 그분의 사색이 산자락 따라 곳곳으로 흘러 남해안에 소금으로 머물렀으리라! 따뜻한 햇살을 받아 물웅덩이에는 개구리알이 군데군데 모여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뒤를 따라붙는 학생들은 신기한 듯 우르르 몰려와 세심하게 들여다 보느라 그곳에 정신이 흠뻑 빠져있었다. 보드라운 황토빛을 밟으며 풀잎들을 살피니 청보라색을 띤 잔잔한 들꽃이 옹기종기 무리지어 핀 것이 아주 신비롭고 예뻐보였다. 이꽃이 무얼까? 다른 꽃보다 일찍 깨어난 이꽃은 알듯말듯! 최선생이 알아냈다. 아하! 개불알풀꽃이야! 한참만에 알아낸 이꽃 이름은 복주머니꽃을 일명 개불알꽃이라고 하는 꽃이름과 같아 잠시 혼동이 되었지만 전혀 다른 이 작은 꽃은 아주 귀여운 꽃이다.
황선생은 그곳에 숨을 죽이고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댄다. 순간 “찰칵!”하고 수줍은 듯 일어서는 황선생의 미소 띤 얼굴은 활짝 핀 보라꽃같아 바라보는 내마음도 환하게 열린다. 석축을 따라 백련사에 들어설 때 호랑가시나무에 무수한 빨간 열매가 꽃구슬처럼 박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처음엔 이곳 백련사와 이름이 같은 전북 무주에 있는 고찰 백련사가 생각나 어리둥절 했었다. 그곳도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숨어 살던 곳에서 하얀 연꽃이 솟아나와 그곳에 절을 지어 백련사라 이름을 붙였고 불교 전성기에는 9천명이 넘는 수도승이 도를 닦았던 명승지로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강진의 백련사(白蓮寺)는 신라말에 무염선사가 세웠고 13세기초에 무신정권이 들어서자 원묘스님이 천태종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최씨 정권과 밀착하여 이지역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다시 크게 중건하고 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그후 고려말에 왜구 침략에 폐사되었으나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재건되어 또 한번의 중흥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18세기초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곧 무도 백련결사가 길러진 곳 말로만 듣던 백련사가 눈앞에 펼쳐지고 뒤에는 기암괴석이 높다랗게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푸른 하늘빛이 더욱 진하여 우리는 깊은 산속 그림에 머무는 것같아 하늘을 올려다 보며 백련사에 흐르는 산물을 마시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효령대군 때 세운 백련사사적비가 첫눈에 띄는데 고려 명종 문신 최자가 지은 것으로 원묘국사의비등 여러개 중에서 현존하는 것으로는 하나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 모처럼 신발을 벗고 선다원에 오른다. 우리는 정좌를 하고 이곳 차나무 잎을 따다 우려낸 설록차를 음미 한다. 첫잔은 향기로 둘째 잔은 맛으로 셋째 잔은 약으로 마신다는데.......! 차나무는 키가 작고 옆으로 퍼진 것을 귀히 여기고 봄에 싹을 일찍 딴 것은 ‘차’라 하고 늦게 딴 것은 ‘차싹’이라 한다. 아직 잎이 펴지지 않은 차를 따서는 가루차로 만차(挽茶)에 쓰고 잎이 펴진 후에 딴 것은 잎차로 전차(煎茶)에 쓴다. 차나무에서 눈이 터져 나온 새싹으로 만든 차를 작설차(雀舌茶)라 하며 곡우(穀雨)를 전후 해서 우전차(雨前茶)와 우후차(雨後茶)로 구별한다. 차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차종류가 다른데 곡우 전에 딴 것은 세작(細雀)이라 하며 물의 온도를 섭씨 50~60도에서 우려내는데 바로 최상의 차인 것이다. 그리고 입하(入夏) 전에 딴 것은 중작(中雀)인데 섭씨60~70도 물에서 우려내고, 한여름에 딴 것은 대작(大雀)으로 섭씨70도 물에서 우려낸다. 우리가 평상시 섭씨 100도의 물에서 끓여 마시는 차는 엽차(葉茶)이다. 차는 발효의 정도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전혀 발효되지 않고 엽록소 그대로 마시는 차는 녹차(綠茶)이고, 10%의 발효에서 얻는 차는 청차(淸茶)라 하고, 50%의 발효에서 얻는 차는 오룡차(烏龍茶)라 하고, 100%의 발효에서 얻는 차는 바로 홍차(紅茶)이다. 최선생이 우리 앞에서 우전차를 한 번 두 번 세 번 우려낼 때마다 깊은 맛을 알기 위해 나의 손바닥 위에 받아든 찻잔 속으로 내가 빨려들어가듯 숨을 고루 가다듬고 침묵 속에 잠긴다.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을 일으켜 다도와 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선사는 스승 약용에게 승설차를 바쳤다는데! 이차는 아홉번을 볶는다니 정성이 대단하다. 이곳에서 나는 설록차를 천천히 마시다 눈앞의 족자에 쓰인 춘원 이광수 시 <애인 육 바라밀>에서 마음이 멈춘다.
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임에게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를 배웠노라~
이때만은 우리도 마음을 풀어놓고 쉰다. 우리일행 중에는 여섯 살 된 호준이와 네 살박이 호담이가 있다. 아이들의 엄마는 여행가인 고등학교 사회과 선생님으로 여행을 할 때는 꼭 이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닌다. 엄마인 최선생은 우리의 이번 여행길에서 강진을 고향으로 둔 훌륭한 길잡이를 하고 있다. 아무리 힘든 여행길이라도 어린 아이도 참여 시키는 것을 당연시 하는 맹렬엄마 최선생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역시 엄마는 강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이날도 백련사의 차가운 물에 옷을 흠뻑 적셔가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천진하게 노는 호준이와 호담이에게 쏟아지는 무지개햇살이 눈부시고 자유로워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 마음이 흐뭇하고 즐거웠다.
우리의 한가로움도 잠시 사찰을 한번 더 살피고 돌아서 산을 내려오다가 미련이 많아 뒤돌아 보니 절은 숨은 듯 보이지 않고 푸른 하늘을 반쯤 가린 듯 떡 버티고 서 있는 만덕산 바위돌들의 기상이 한없이 위엄스럽고 수많은 동백나무들이 옛시절이 아쉬운 듯이 우리를 내려다 본다. 간혹 꽃이 핀 동백나무가 눈에 띄는데 매혹적이다. 만덕산을 뒤덮은 동백나무가 수 천그루가 넘어 우리나라에 이만큼 많은 곳이 없다는데 한창 꽃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한참 산길을 걸어나와 다시 차에 올라 해남을 향해 달리는데 가운데 길을 놓고 왼쪽과 오른쪽 양옆으로 물이 가득하여 어느쪽이 강인지 바다인지 구별이 안가고 어느 곳에서는 바다와 강이 만난다니 신기하고 놀랍다. 물위에서 노는 고니가 일곱 마리 정도 되는데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6)고산 윤선도가 있는 해남
강이나 바다가 보이면 왠지 내마음도 물처럼 평화롭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고 물이 맑다 싶으면 우선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물만 보면 좋은 것을! 한없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다가서는 해남땅 삼산벌의 어느 넓은 차밭을 지나 덕음산자락 비자나무숲에 자리 한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추원당을 찾았다. 맨먼저 만난 것은 오백년 된 은행나무와 훼화나무이다. 그 뒤로 고산고택 대문을 들어서니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뒷산에 비자나무가 바람이 불면 나는 소리가 마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해서 녹우당이란 당호를 짓고 윤공재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형인 명필가 옥동 이서가 쓴 현판이 우리 눈 앞에 보인다. 여기에는 유명한 공재 윤두서 자화상이 걸려있고 산중신곡집 어부사시사집 등이 있다. 마당 가운데 화단에는 소엽맥문동이 자라고 있고 사랑초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랑초는 잎이 작고 녹색인데 비해 서양 사랑초는 잎이 크고 자주색이란다. 녹우당을 나서는데 삼백년이나 되는 해송을 비롯해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들이 많아 그곳 주민 한 분에게 여기 500년 된 울창한 곰솔숲이 있다는데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뒷산으로 가면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거기까지 갈 여유를 우리는 갖지못했다.
녹우당 길에 해송이 눈에 자주 띄어 최선생에게 어떻게 해송을 일반 소나무와 어떻게 구별하여 알아 보느냐고 했더니 이곳에서 바닷바람을 쐬고 자라는 해송은 잎이 진한 녹색이고 나무등걸은 빨갛다고 한다. 우리가 강진 해남 일대를 돌면서 산들을 무심코 바라보다 민둥산을 많이 보게되었다. 처음엔 아! 여기도 산불이 자주 나서 산이 저렇게 됐구나 생각하고 최선생에게 물었더니 솔껍질깍지벌레라는 해충이 남도 일대를 모두 휩쓸어 흉한 산들이 되었다고 한다. 이벌레는 해송에만 붙어 갉아먹는 송충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해송을 만져보면서 어초은사당과 고산사당을 밖에서 간단히 둘러보고 고산 윤선도 박물관인 충헌각에 들어섰다.
고산은 85세에 완도군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하고 숙종4년에 ‘충헌’이라 시호를 받았다. 고산선생은 보길도에 은거시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간척지 200정보를 만들었다는 기록 앞에 “그시절에 모든 것이 여의치 못했을 그런 유배 상황에서 어떻게?”하고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사실에 놀라웠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몇 백년씩이나 시대를 앞서는 지혜를 갖고 있었으나 높은 이상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외롭게 땅 끝에 유배와서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과 고귀한 뜻을 함께 나누었으니.......!
난 간척사업이란 산업발달과 함께 현대에서나 이루어지는 일로 알고 있었는데 ........!
한편 1642년 (인조 20년) 고산 56세 때 지은 오우가 6수 등 한글시조 19수가 전하고 1651년 (효종 2년) 고산 65세 때 보길도 부용동을 배경으로 어부생활상을 그린 춘하추동 각 10수씩 한글시조 총 40수가 있고 1640년(인조18년) 고산 54세 때 은거시 현산면 금쇄동에서 그곳 지형과 산세에 대해 쓴 한문수필집 <금쇄동기>가 있고 금쇄동에서 도연명 이백 백거이 등 중국 시인 시가를 한데 모아 쓴 책 <금쇄동집고>가 있고 <고산유고집> <고산유고목판> <규방가사> 그리고 고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아악과 속악의 가사를 모아엮은 <아속가사>도 있다. <채애도>에서는 봄날에 경사진 산언덕 위에서 두여인이 쑥을 캐고 있는 모습을 대각선 배치로 그렸는데 바라보는 동안 봄내음이 솔솔 나는 것만 같다.
부채에 그려진 <운룡도>와 <백마도> <사자나한도> <수룡도> <암면묵객도> <탁충도> <선차도> <조어도> <송함망양도> <기마인물도> <초정고목도> <산수도> <경답목우도> 그리고 공재 윤두서의 손자 청고 윤용의 그림 <미인도>가 있다. 이어 <무송관수도> <노유동자도> <초충도>가 있고 공재 윤두서 선생이 천문학 자료로 사용한 <방성도(方星圖)>가 있고 기하학 및 면적산출 책으로 <송양휘산법>이 있다. 공재가 쓰던 나침반이 있고 고산이 직접 제작한 거문고 <고산유금>과 고산이 악보를 기록한 <낭옹신보>와 인장 서구 서죽 흉배판 그리고 거울로 사용한 백동경이 있다. 우리가 이 박물관에서 가장 경이롭게 본 것은 조선 후기 1710년에 공재 윤두서가 제작한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이다. <대동여지지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보다 151년이나 앞섰고 <일본여도>는 공재가 숙종의 특명을 받고 48명의 첩자를 보내 일본의 지형거리를 부호들의 집 위치까지 알아내 상세히 그렸다. 우리 일행은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여 말이 많았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다니! 진작 그시절에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활용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일본보다 훨씬 앞서 개화하고 개혁 할 수 있었을텐데! 조광조 정약용 윤선도 윤두서 등 남도의 훌륭한 인물을 찾아갈수록 이루지못한 선각자들의 한을 보는 것같아 가슴 치는 서러운 파도를 수평선 저멀리 남쪽바다 끝에서 달래었다. 역사의 거울에 비치는 남도의 태양빛은 오늘도 작렬하는데!
우리가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를 어찌 잊으랴! 앞으로 갈수록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이만한 벗을 만날 수 있을까?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한결 가벼워지는 마음으로 우리는 고산박물관을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옆으로 뻗어있는 남쪽 끝자락 하늘 아래 그림으로 내려 앉은 달마산을 등지고 이름처럼 아름다운 미황사(美黃寺)이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이절은 해남 송지면 서정리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후 조선 선조 31년(1578년)에 중창 한 것을 영조 30년(1754년)에 증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미황사의 창건과 연기설화가 숙종18년(1692)에 민암(閔暗)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迹碑)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기록에 의해 자세히 전해 내려온다. 신라 경덕왕 8년에 한 석선(石船)이 여기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닿았는데 배 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울려 어부들이 살피려 다가가면 번번히 멀어져 갔다. 이소식을 들은 의조화상이 향도(香徒)100인과 함께 목욕제계하고 기도를 올려 비로소 그 석선이 해안에 닿았다.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고 배안에는 화엄경80권과 법화경7권과 비로자나 문수보살 및 40성중(聖衆)과 16나한 그리고 탱화 등이 있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벌어 지면서 검은 소가 나와 문득 커졌다.
이날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 인도)의 왕으로 경을 모실 곳을 찾던 중 이곳의 여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一萬佛)이 나타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가 경을 싣고가다 누워 일어나지 않으면 그곳에 경을 봉안하라”하고 일러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다니던 중 처음에 누웠다가 일어난 자리에 사찰을 세우니 통교사(通敎寺)요 마지막에 소가 서쪽을 향해 아름다운 소리로 세 번 길게 울고 누운 골짜기에 경과 상을 봉안하고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미황사가 아름답고 영험한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중국 남송의 큰 배가 이곳에 정박해 한 고관이 산을 바라보고 “이나라에 달마산(達摩山)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산이 아니오?”하고 주민들에게 묻자 그렇다고 말하니 그 고관은 “우리나라는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 산을 보고 성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오.”하고 그림으로 그려갔다고 한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이 달마산을 계속 올려다 보며 “저산 너머 남해 바다가 있는데 ........!”라고 몇번이나 되새기는 우리들의 말은 벌써 달마산을 넘고 있었다.
아직도 유자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미황사는 원래 겹처마에 연등천장으로 다포식 건축이다. 여기 절들은 맞배지붕과 팔작지붕(다포형)으로 지어 비교하여 볼수 있는 곳이다. 옆에서 최선생이 설명을 해준다. 맞배지붕은 앞뒷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배를 마주댄 것이고 거기서 양측면에 세모꼴로 추녀가 모두 고른 것이 우진각지붕이다. 여기에 여덟 팔(八)자 모양을 덧붙여 빛살처럼 퍼져보이는 것이 팔작지붕이라 한다. 이렇듯 화려해 보이는 것이 팔작지붕이라 하나 옛건축물이 오히려 맞배지붕이 많은데 경건함과 위엄이 물씬하게 풍겨 바라볼수록 마음이 은은하게 끌려 우리는 한참을 바라만 보았다.
양지쪽 볕이 따사로운 석등 아래 개가 눈을 떴다 감았다 졸며 객꾼들을 상관치 않는다. 절마당을 천천히 걸으면서 절간을 살피는데 색이 바래서 단청 없는 사찰이 고색창연하여 옛날의 그모습 그대로 멋스러움이 고스란히 간직돼 마음 속 깊은 정이 흠뻑 느껴졌다. 요즘 어느 절을 보면 옛절을 없애고 새절을 거창하게 지어놓아 진한 색칠을 한 것을 보면 마치 번화한 시내 한복판의 어느 호텔을 보는 것같아 마음이 다가가지 않는다. 옆에 서있는 최선생의 말을 빌리면 미황사의 지조 높으신 한 주지스님이 꿋꿋한 고집으로 그분의 뜻을 굽히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사찰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멋있는 스님이시다!” 하고 우리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색이 바램에서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고 지난 세월을 보는 듯하여 우리는 나라의 흥망성쇠 속에서 굳게 지킨 또하나의 불심을 본다. 절을 빠져나와 차 안에서 때늦은 점심을 빵과 우유로 대신 하면서 하늘빛이 높고 더욱 푸르러 하늘 끝에 닿은 물 가운데 길을 달리는데 왼쪽은 바다요 오른쪽은 호수라 우리는 물만 보면 기분이 좋았다. 더군다나 맑고 푸른 물이라 더욱 좋고 거기다 차고 넘치는 강이나 호수나 바다이면 더 무엇을 바라랴? 우리는 자연의 풍요로움 속에서 늘 하늘과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물처럼 맑게 흐르며 살기를 원하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생명의 물을 찾아 다닌다. 호수 늪지 위에 갈대밭이 아스라히 펼쳐지고 또다른 한쪽으로 갯벌 지나 저멀리 염전이 있는 곳이 해남 우항리 철새 도래지이고 공룡화석지로 유명한 곳이다. 행여 우리도 철새때를 만날까? 하고 희망에 부풀었는데 멀리 고니 대여섯 마리가 한가로이 떴다 앉았다가 날아가는 모습만 보였다. 한참을 더 달려 공룡화석지에 다가갔다. 도로 진입로부터 공룡의 큰 모형을 만나고 갈대밭에 내려 갯냄새 펄펄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갈대사이를 걷고 뛰고 달려 공룡을 찾아다녔다.
갈대밭 곳곳에 여러종류의 공룡모형들이 있다. 관리 사무실에서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주의사항과 공룡화석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들었다. 규화목은 9~135cm이고 공룡발자국은 514개가 발견 되었는데 육식공룡은 발가락과 이빨이 날카롭고 초식공룡은 둥글둥글 하다. 규질화 탄산질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화석은 대개 고생대ㅡ중생대ㅡ백악기ㅡ쥬라기시대 것으로 지구역사를 가늠해보는 지난 모습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화석은 중생대 물갈퀴새 발자국으로 약 9천만년 전 것이 이곳에서 발견됐다. 이것은 백악기시대의 미국 에오세(약5500만년전)의 퇴적층보다 약4000만년이나 앞선 것이다. 익룡 발자국 화석 트리케라톱스는 몸길이가 9m이고 몸무게는 5.5t이나 되는 것으로 초식을 하고 백악기 후기에 살던 공룡이다. 디메트로돈은 몸길이가 3.3m이고 몸무게는 160Kg인 육식공룡으로 고생대 폐름기에서 중생대 사이 살던 것이다. 벨로시랩터는 몸길이가 2m이고 몸무게가 28Kg으로 육식을 하며 백악기 후기에 살던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본 공룡 화석은 한 곳에 모두 모아놓고 무슨 온실 포장한 것처럼 돼있어 천포장을 들추고 들어가 쇠철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 봐야 했다. 우리는 음침하고 습기진 그곳 화석을 보며 기쁨보다는 화석을 보존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걱정이 앞섰다. 대충 둘러보고 다시 길고 긴 갈대밭에서 사진도 찍고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잎 사이를 신나게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여 큰 길 가까이 관광상품 판매소로 가 호담이와 호준이는 가지각색의 공룡모형 장난감을 사서 가지고 노는데 신이 났다. 어른들은 가족들 또는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 하고 싶어 옥으로 깎은 배개 자만옥 열쇠고리 사금석 팔찌 등 기념품을 샀는데 나도 아이들 생각이 나서 몇가지를 사가지고 차에 올랐다. 이제 해남 윤씨네 땅 삼산벌을 벗어나나?
7)진도아리랑에 용장산성과 남도석성
우리들의 차는 보배로운 섬 진도를 향하여 한참을 달리다가 진도대교 앞에서 차를 세우고 모두 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진도와 해남 우수영 사이의 해협으로 조수가 빠르고 그 해조음이 우레와 같아 울돌목이라 하는데 명량(鳴梁)의 순 우리말이다. 우리는 굽이쳐 돌아가는 물살을 유심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말없이 시간의 물살을 헤치고 빠르게 거슬러 올라갔다. 선조31년(1598) 왜군 14만명이 쳐들어온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은 이물살을 붙잡고 망가진 배 12척을 거두어 명량에서 적을 대파하고 명나라 진린(陳璘)과 더불어 코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린 500척의 왜선을 무찌르다 안타깝게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니 길이 빛나는 노량해전이었다. 우리가 학창시절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왜군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장면을 늘 연상하며 나라사랑은 이렇게 한다라는 본으로 세종대왕과 함께 우리나라의 위대하고 존경하는 인물로 단연 엄지손가락을 세워 으뜸으로 손꼽았다. 우리가 어린시절 즐겨 외우던 이충무공의 시조 한 수가 물위에 뜬다 .
한산(閑山)셤 근 밤의 / 수루(戍樓)에 혼자 안자 / 큰 칼 녀픠 고 / 기픈 시름 는 적의 / 어듸셔 일성 호가(一聲胡笳) / 의 애를 긋니.
400여년전 그분은 이땅을 지키기 위해 노량 앞바다를 바라보며 밤낮으로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지금은 밝은 대낮이라서인가? 세멘트로 만든 진도다리 위로 쉼 없이 달리는 차들 때문인가? 오늘에야 이곳에 와 지난 역사를 회상하는 나의 가슴에서 이는 바람아! 넌 그 어느 곳에 머무르려 하느냐? 이곳을 못내 떠나기 아쉽지만 우리는 다시 울돌목의 바람을 안고 일어서 차를 타고 용장산성을 향해 진도를 가로질러 달린다. 진도는 기름진 땅으로 옥주(沃州)라고도 부르며 농사가 잘 되어 생활이 풍족하고 주변에 흩어진 작은 섬 228개나 있고 푸른 바다와 따뜻한 기후로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과거 육지와 멀리 떨어져있어 독특한 문화예술을 창조하여 잘 발전시키고 보존하는 슬기로운 고장이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청천하늘에 잔별도 많고 이내가슴 속엔 희망도 많다
약산동네 진달래꽃은 한송이만 피어도 모두 따라핀다
진도아리랑의 흥겨운 노랫가락에 덩실덩실 춤을 추어보고 싶고 씻김굿 다시래기도 구경하고 싶었다. 달리는 차안에서도 우리는 강강술래 들노래 뱃노래를 부르는 아낙네들의 진도소리가 갯바람을 타고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시원한 진도를 가로 질러 한참 달리는데 남선생은 집에 전화를 걸더니 “여기 진도에 오니까 정말 진돗개가 많네!”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한다. 실감나는 이말에 집에 계신 사모님은“정말? 진돗개가 그렇게 많아요?” “응! 그렇다니까! 보이는 것마다 진돗개야!”하고 전화를 끊어 나는 차창 밖에 목을 길게 빼고 “아니! 진돗개가 어딨어요?”하고 두리번 거리며 마침 눈에 띄는 누런 똥개 한마리를 보고 “저 개가 진돗개에요?”말하니 남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진도에 사는 개는 모두 다 진돗개인거지!”라고 말해 모두가 하하하! 즐겁게 웃었다.
진도는 지리상으로 남도 끝 가장 외진 곳이어서 유배지로 많이 이용되어 아픔이 진하게 배인 땅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명사들의 유배생활이 이곳 진도에 좋은 영향을 끼쳐 시와 노래 또는 그림 그리고 후학들의 교육을 통해 아름다운 예술문화를 꽃피웠다. 진도는 과거 역사에서 왕건과 견훤이 세력을 다투는 격전지가 되고 고려의 삼별초가 들어와 몽고와 싸우느라 몽고에 진도사람이 만여명이나 끌려가는 수난을 겪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아 왜구의 침략으로 많은 희생이 뒤따랐었다. 이렇듯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요충지로 환란이 많았던 곳이다. 고려 24대 원종 11년(1270) 몽고와 항쟁 중에 왕실이 몽고에 굴복하자 삼별초가 끝까지 저항했는데 삼별초의 배중손장군은 천여척이 넘는 배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새 근거지 진도로 향하여 74일만에 진도의 벽파진에 상륙하게 된다. 온왕을 추대하여 새나라 ‘오랑’을 세우고 한 때는 세력을 본토 일부와 제주도까지 뻗쳤으나 여몽 연합군에 의해 9개월 만에 쫓기어 삼별초는 의신면 논수골에서 격전중 승하후 온이 홍다구의 칼에 죽어 애마와 함께 이곳에 초라히 묻혔다. 남쪽 해안으로 후퇴하는 삼별초는 진도의 남쪽 끝 임회면 남동리 해변가 남도석성 전투에서 배중손이 최후를 맞는다.
이때 항쟁의 터전이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인데 우리는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용장산성을 먼저 찾아갔다. 이성은 용장산에 둘레 13km 높이가 5척이나 되게 돌로 쌓은 견고한 성으로 삼별초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배중손이 풍수지리에 의존해 보수 개선하여 쌓은 것이다. 석축으로 된 건물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420m 토성이 있다는데 막연히 돌축성터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주변은 사람이 온데간데 없고 어디에 대고 말을 걸을 곳조차 없어 저산 너머로 뉘엿뉘엿 해는 넘어가고 황혼빛에 물드는 하늘 아래 성터 위로 나뒹구는 돌들만 바라보았다. 역사의 현장을 말없이 다 지켜보았을 산과 바윗돌들이 예사로 안보이고 저물어가는 토성은 눈에 잘 띄지않아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다섯 마리 용이 하나의 구슬을 놓고 다툰다는 짙푸른 용장산만 한참 올려다보고 뒤돌아섰다. 점점 날이 기울어가 우리는 빠르게 남도석성이 있는 임회면 남동리를 찾아간다. 이 남도석성은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설과 고려 원종 때 쌓았다는 설이 있는데 어찌됐든 과거 외적의 침입이 잦아 해안을 방어 할 목적으로 삼별초가 오기 전부터 있었던 성으로 요충지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쌓은 것이다. 이리저리 언덕을 넘어 다니다 미처 해몰이를 못보고 드디어 남도석성에 다다르니 바다에서 밀려오는 어둠에 갇힌 성안에 10여채 남짓 되는 돌집 굴뚝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피어올라 우리네 마음은 천년의 역사 속으로 빠져든다.
이성은 185m의 남산을 끼고 둘레가 610m 높이5.1m의 석성으로 동서남문과 홍교2개 활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는 어린 호준이와 호담이랑 모두 성벽 위로 올라가 송악덩굴 사이를 걸어 성벽이 성 입구에서 S자형을 이룬 것을 확인하고 그때 일을 상상해 보았다. 적군이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게 짧은 미로를 만든 것이다. 복잡한 입구를 돌고 있을 때 적을 살필 시간을 버는 것이다. 모두가 아하 ! 하고 감탄했다. 이 남도석성은 유일하게 보존이 잘 된 성이다. 성벽 위에서 남도 뻘 앞바다를 보면서 삼별초가 이곳에서 다시 제주도로 옮길 때 최후를 대비하는 장수들의 비장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이 자리에서 편안하게 이런저런 생각하면서 성벽 위를 한 바퀴 돌고 내려와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하룻밤을 지낼만한 곳을 찾기 위해 주변 바닷가 마을을 기웃거렸다. 서망이라는 곳에 당도하여 보니 점점 어두워가는 이집저집에 밥짓는 굴뚝연기가 뿌옇고 골목길에서는 된장국 냄새도 솔솔 나고 왠 북치고 장구치는 소리가 신나게 들린다. 우리는 마을어귀에서 어느 아저씨에게 이곳에 머무를 곳을 찾는 물음에 고개를 가로 저어 돌담마을 한 바퀴를 더 돌고 나오려는데 자꾸 나의 마음이 끌리는 것이 있었다. 그동네의 흥겨운 북장단 소리에 묶여 난 뒤를 자꾸 돌아본다. 나는 궁금하여 최선생에게 물어보았다. “이마을에 무슨 잔치가 있나보죠?”하며 나는 결혼식이나 회갑잔치를 생각했다. 최선생은 그때야 “아하! 그러고보니 내일이 음력 이월 초하루네! 바로 내일이 하드레야! 그래서 오늘 준비하고 있어!”하며 최선생 이야기는 계속 된다. 이고장에서는 ‘하드레’날이 되면 미리 준비한 칡과 볶은 콩을 앞에 놓고 두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한 사람이 상대방 이름을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면 이름을 부른 사람이 검지 손가락을 펴 상대에 대고 “칡콩!”하고 빠르게 말한다. 이렇게 서로 마주하고 계속 상대하며 “칡콩!”이라고 말 할 때마다 칡을 씹고 볶은 콩을 열심히 깨물어 먹는다. 그러면 악귀가 물러가고 아픈 것이 넘어간다고 하는 풍습이다.
우리가 듣기에 마치 정월 대보름에 부럼 깨무는 풍습과 비슷한 해안가 어촌의 또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그마을의 풍물소리 나는 집에 들어가서 잔치 준비하는 것을 꼭 보고 싶었지만 또 아쉬움 하나를 더 품고 마을 언덕을 넘는다. 붉은 해는 진작 우리와 숨바꼭질을 하다 저바다 끝 너머로 숨어버리고 석양하늘이 팽목 앞바다 깊숙히 발 담글 때 갯냄새 물씬한 남해바람이 어둠과 함께 급하게 둥지를 틀게한다. 팽목 해안가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선착장에 둘밖에 없는 숙박업소 중에서 한 곳을 골라 여정을 풀었다. 그곳에서 저녁식사로 비빔밥과 세발낙지가 올라왔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시조시인 남선생은 천진스런 소꿉동무처럼 큰 눈을 반짝이며 “진도 앞바다에서 세발낙지를 엄지와 검지를 집게 삼아 탁! 집어올려 초고추장에 꾹! 찍어 한 입에 넣으면 낙지가 입안에서 꿈틀꿈틀 입천장에 볼태기에 낙지발이 쩍쩍 들러붙어 감칠맛 나는 그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 시가 술!술!술! 절로 날겁니다! 꼭! 같이 가자구요!”하면서 나에게 남도여행을 강력하게 권하여 “그렇게 좋아요? 알았어요! 그럼 같이 가기로 하죠.”하고 그자리에서 설레는 기분으로 수락을 했다.
그 세발낙지를 이밤에 먹게되니 정말 나의 입에서 절로 시가 나오나 궁금했다. 접시에 올려진 세발낙지를 먹기좋게 잘랐는데 계속 꿈틀거린다. “그래! 넌 죽었느냐? 살았느냐?” 유심히 살피면서 보고있으니 옆에서 어서 먹으라고 독촉을 한다. 먹기도 전에 벌써 내 뱃속에서 세발낙지가 꿈틀거리는 것같아 걱정스럽게 쳐다만 보다가 마지못해 젓가락으로 낙지발을 하나 골라 집어올리니 계속 젓가락에 감긴다. 어려서부터 꿈틀거리는 것은 보기만 해도 모두가 징그러웠다. 뱀 지렁이 송충이 기생충 벌거지들을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다. 어쨌든 꿈틀거리는 것을 입에 억지로 집어넣으니 옆에서 열심히 씹으란다. 그렇지않으면 목구멍에 붙어 숨이 막히거나 창자에 들러붙는단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살기위해 꼭!꼭! 정말 열심히 씹어야 했다. 온 신경이 입안에 집중했다. 아! 나는 살아야한다! 상황이 이럴진데 시는 무슨 시? 아이구! 어째 점점 뱃속이 차가워지는구나! 긴장 속에 저녁을 마치고 난 숙소에 들어가니 영~ 뱃속도 이상하고 몸도 피곤하여 일찍 잠부터 청하려니 김선생 황선생은 이밤이 아쉬운 밤이라고 밖으로 내손을 잡아 끌어낸다. 마지못해 나와보니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의 숨결소리가 어부들의 거칠어진 손바닥처럼 시원스럽다. 선착장에 묶어놓은 목선 한 척이 부딪치는 파도에 출렁출렁 기우뚱거리며 춤을 춘다. 우리는 선상에 올라 노래도 목청껏 부르고 체조도 하고 캄캄한 망망대해를 향해 소리도 질러보고 선착장 불빛 아래 총무님이 썼다는 10년전 시도 감상하고 별들의 사랑이야기로 밤하늘에 수를 놓으며 우리들의 밤은 점점 하얗게 깊어갔다.
남도 끝에서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스르르 고이 잠든 우리의 곤한 잠을 깨운 것은 창문을 힘차게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다. 촉촉한 습기로 차분한 아침을 해장국으로 간단히 하고 물안개 자욱한 팽목 앞바다와 이별을 한다. 아 !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오려나? 비를 맞으며 백동제를 넘고 송월마을을 지나 귀성- 탑립- 죽림을 거쳐 김양식장이 보이는 의신 앞바다를 보며 달린다. 홍해 바다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처럼 신비의 바닷길이 여기서 열린다는데 우리는 때를 맞추지 못해 물줄기 껴안고 떨어질줄 모르는 하나의 큰 물바다를 바라보고 아하! 감탄사만 드넓은 바다에 쏟아놓으며 눈길을 떼지못하고 계속 달린다.
8)소치 허련의 운림산방
송정마을 저수지를 지나 명금- 원두리- 만길리- 돈지리- 진설리를 거쳐 운림산방에 다다랐다.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와 온왕릉 근처에 있는 운림산방이다. 진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조선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은 순조 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해남 대둔사에서 다선일사상으로 유명한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며 공부했다.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고 추사는 허련에게 소치라는 호를 지어주고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을 하며 그를 아끼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헌종에게 그림을 바친 이래 왕실을 위해 일하기도 했으나 후에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자 고향에 내려와 운림산방을 지어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대표적 작품은 부채꼴 모양의 ‘선면산수도’인데 이 그림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첨찰산 아래 그림처럼 펼쳐진 이곳 운림산방을 운림각이라고도 하며 ㄷ자형 기와집과 초가집인 살림집과 기념관이 있다. 말만 듣던 운림산방을 부슬비를 맞으며 걸어 가는데 키가 큰 나무들이 많아 올려다보니 나의 시선따라 생각도 고고해지는 것같아 들뜬 기분으로 여유롭게 넉넉하게 살피며 걷는데 팽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광나무가 쭉 뻗어 있어 열심히 본다. 그사이 최선생과 남선생이 나를 빨리 오라고 불러 달려가보니 이나무가 돌롱개나무란다.
이지역에서는 돌롱개나무 열매를 구충제로 써 최선생은 어려서 많이 먹었다고 한다. 돌롱개나무에 아직 열매가 달린 것을 최선생이 나에게 따주며 먹어보란다. 미색이 도는 것이 모양이나 크기가 꼭 은행같기도 하고 겨울을 나무에 그대로 매달려 있어서인지 약간 쭈글쭈글한 이것이 구충제라 어쩐지 말만 들어도 찜찜한 맛이 이상할 것 같았으나 궁금하여 받아 입안에 넣고 맛을 음미해본다. 처음 먹어보는 이맛은 닉닉하여 쓰지도 달지도 않은 것이 영락없이 열매가 아니라 어릴 때 먹던 회충약이다. 애초에 구충제란 말을 안듣고 먹었다면 다른 맛일수도 있을텐데 혀끝도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낄수있으니 말이다. “집에 가면 재민이 재영이에게 먹여봐야지!” 하고 나는 열매 몇 개를 더 따 호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저만치 연못이 있고 그가운데에는 섬이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빗방울이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고 내메모장에도 잉크를 번지게 하여 난 계속 옷소매 끝으로 닦으며 쓰고 또 쓴다. 주변에는 상록침엽관목인 눈향나무 그리고 배롱나무가 있는데 이나무는 공예재 고급목재 가구재로 널리 쓰인다고 한다. 주로 따뜻한 남부지방에 잘 자라는 배롱나무를 목백일홍이라고도 하며 이꽃이 한여름에 피었다가 질 때는 벼가 무르익는다고 하여 쌀밥나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자미(紫薇)라는 별칭이 있는데 이말은 원래 중국 당나라 때 중서성(中書省)에 배롱나무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당현종이 중서성을 자미성이라고 한데서 비롯됐다. 당나라 현종이면 으레 양귀비를 떠올리게 되는데 활짝 핀 백일홍꽃으로 둘러싸인 그성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던 것 같다.
우리가 어제 거쳐왔던 소쇄원과 송강정, 면앙정, 명옥헌이 있는 담양 땅에는 목백일홍이 많아 그곳을 흐르는 증암천을 자미탄이라 부르고 이고장에서 7월이면 꽃이 피어 9월까지 100일간 빨갛게 피어 오르는 백일홍을 보고 반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한다. 나는 재작년 여름에 남선생 댁에서 문학회 모임이 있어 방문 했는데 그때 정원에 활짝 핀 백일홍을 보고 그아름다움에 그만 “와! 멋있다!”하고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사모님이 가까이 다가와 정답게 나에게 백일홍의 이야기를 해주어 인상깊었던 생각이 난다. 아! 다가올 여름에 여기 남도에서 백일홍이 활짝 피는 미소를 우리는 꼭 보고 싶구나! 운림산방에는 이외에도 느릅나무, 목련, 옥향나무 등 나무가 많아 더욱 한적해 보인다. 소치기념관에 들어서 멋진 한폭의 그림 매화나무를 보고 평원, 단석, 월석, 괴석, 진연봉, 연유봉, 안수산, 고원, 채석산 등 여러모양의 이름이 붙여진 돌세상을 본다. 그리고 백자유병, 백자자기, 분청음각장도, 백자투각필통, 꽃꽂이병, 청화백자포도문항아리, 분청운학대병, 분청인화문항아리, 병풍화가 있다. 미산이 그린 설국화도와 산수화가 있고 제주도의 부운방, 충북충주의 오은방도 있고 울산의 구갑석, 충북 덕산의 적봉이 있고 전남 담양의 답석 그리고 단양의 괴형, 제천의 두꺼비 형상의 가지각색의 돌들이 있다. 소치선생은 돌에도 관심과 취미가 많았던 것같다. 신라의 소구대항아리 고려의 청자항아리와 유병 그리고 조선시대의 청동어용향로 대나무필통 흑유물병 등이 있고 우리에게 친근한 제기 배 향로뚜껑 컵도 신라시대 것이라 하니 긴 역사의 세월을 세삼스럽게 느낀다. 남종화의 성지를 이룬 화가 허씨집안 내력은 소치 허련(소痴 許鍊), 미산 허형(米山 許瀅), 남농 허건(南農 許楗), 임인 허림(林人 許林), 임전 허문(林田 許文) 이렇게 대를 이은다. 그리고 미산에게 먼 집안간으로 미산의 문하생으로 화법을 익힌 의제 허백련(毅齊 許百鍊)이 있다.
한 일가에서 대를 이어 굵직한 호남예술의 한 물줄기 남화의 대가를 이루었으니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기 운림산방에 있는 그림은 모두 복제그림이란다. 나는 돌아서기 아쉬워 운림산방을 한바퀴 더 살피고 나오는데 먼저 나온 우리일행이 이미 차에서 기다리고 있다. 난 또다시 헐레벌떡 뛰어 차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부지런히 기록하는데도 언제나 난 늦장이라 미안 했으나 회원 모두 인내하며 기다려주고 색다른 것을 발견하면 일부러 나를 불러 빨리 기록하라고 격려해주고 밝은 미소로 상대 해주어 비록 힘든 여행길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다닐 수 있었다. 이곳 운림산방을 떠날 때는 빗줄기가 더욱 세차고 장언마을을 지나 군내삼거리를 지나 진도대교를 뿌연한 차창으로 바라보며 스치고 산이면을 지나는데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해남호수가 있는 금호방조제를 건너고 있다. 빗길을 달리고 달려 영암호 곁으로 금호마을을 지나는데 들밭에서 겨울나기를 한 겨울배추가 비를 흠뻑 맞는 것이 심심치않게 눈에 자주 띈다.
9)남농미술관과 해양박물관을 찾아서
모밀항마을을 거쳐 영산강 하구를 지나 목포에 다다른다. 이곳을 영혼이 거쳐간다하여 영달산(靈澾山) 또는 유달산(儒達山)이란 이름이 지어졌고 그 유달산 입구에는 유명한 노적봉이 있다. 우리는 목포에서도 허씨네 예술세계가 궁금하여 남농미술관을 찾았다. 아름다운 바위 야산을 등뒤로 하고 한가롭고 널직한 현대식 건물이 정원과 함께 여유로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한참 걸어 미술관에 들어서니 키가 큰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일행을 안내하시며 허씨네 내력과 자랑 그리고 그림설명을 재미있게 하시면서 가끔 유머섞인 이야기로 우리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첫 그림은 <일지묵매육곡병(一枝墨梅六曲屛)>으로 소치선생의 1870년 작품이다. 그옆에는 아주 특이한 그림으로 이<수자매수(壽字梅樹)>는 1885년 소치선생이 그렸는데 수(壽)란 글자나무에 붓놀림마다 주렁주렁 매화꽃이 피어 자세히 보니 너무나 신기하였다. 우리는 할아버지께 “이 그림이 지닌 뜻이 무슨 뜻이여요?”하고 여쭈었더니 “나이 80세에 미쳐서 꽃이 피길 기다린다는 뜻이여!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꽃피는 봄이라 하지않는게비여?”라고 말씀하시는 말꼬리가 멋드러지게 치켜올라가 할아버지의 전라도 사투리가 정겹고 즐거웠다. 우리모두 “아! 그래요? 음! 80세에 무엇에 미쳤을까?”하고 물끄러미 그 그림을 바라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치선생은 과연 멋진 예술가야!”하고 감탄했다. 미산의 <노송도> <미점산수>가 있고 남농의 <산사> <동백도> <매죽도> <하경산수>가 있고 <조춘고동(早春古洞)>의 모습은 바로 나의 살던 고향이네! 하늘엔 새가 날고 산에는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고 염소 한마리가 풀을 뜯고서 배불러 한가하게 앉아 쉬는데 흰 적삼 입은 우리 어머니! 은비녀 쪽진 머리에 새참을 이고 밭이랑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고 있고 산모퉁이를 돌아 소쟁기로 밭갈이 하는 아버지가 있다. 우리의 눈길을 당기는 또 다른 그림 <낙지론(樂志論)>은 천에 그렸는데 기가 살아 있는 듯 하고 안개속 강물에 바위산이 옷자락을 적시고 돛단배가 유유히 바람을 탄다. <금강산소견(金剛山所見)>은 좌불상 그림인데 그앞에 삿갓 쓴 두 선비가 있다. 할아버지 얘기로는 실제로 금강산 바위에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정말인지 모르겠다.
다음은 <맥구(麥丘)>라는 허림의 1941년 작품으로 국보라는데 같은 맥구의 이름으로 책에서는 허문의 1971년 작품으로 실려있고 허림의 맥구는 없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또 한폭의 그림 <닭파는 노인>은 흰수염에 주름진 얼굴에 턱을 괴고 짚신 신고 쭈구리고 앉아 한손에 긴 담뱃대를 땅에 대고 닭장 속에 닭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닭들이 언제 다 팔리려나 생각한다. 할아버지 신세를 아는지 모르는지 긴 꼬리를 치켜 세우고 기세가 등등한 장닭 그리고 노랗고 하얗고 검고 통통한 암탉들이 편안하다. 닭장 위에 달걀꾸러미 두줄이 토종닭들과 정다워 옛고향 장날 풍경이 눈에 선하다. 우리가 그림 속에서라도 옛추억을 되살리니 정말 그때 그시절이 그리웠다.
현재 전남대 교수로 있는 허진은 선대 조상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현대화이다. 작품으로 <회(懷)> <유전(流轉)> <다중인간(多重人間)> <잉여인간-현대산수도>가 현대 사회상을 말하듯 복잡하여 우리의 생각을 오래 붙들어 맨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도 전시돼 있다. 겸제 정선의 <산수(山水)> 오원 장승업의 <노안(蘆雁)> 석연 양기훈의 <쏘가리> 이당 김은호의 <여명(黎明)> 추사 김정희의 <산해숭심(山海崇心)>과 <전경자손(傳經子孫)>이 있고 의제 허백련의 <팔군자팔폭병(八君子八幅屛)>이 멋스럽고 소정 변관식의 <강촌유정(江村幽情)>이 있다.
남농 미술관 개관 기념으로 그려준 운보 김기창의 <비파(批杷)>는 동지섣달에 꽃이 핀다는데 황금빛을 띠고 탐스럽게 익은 열매가 소복하게 달렸다. 소전 손재형의 <도언교사팔폭병(道言敎辭八幅屛)>이 있는데 각 폭마다 글체가 달라 한 눈에도 변화무쌍한 서체에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글뜻에 따라 글체를 자유자제로 구사하여 예술의 무한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림 소재 중에 호랑이 그림이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다. 맹호도를 남농과 황종하가 각각 그린 것이 있는데 황종하의 <맹호도>는 착시법을 사용하여 보는 위치에 따라 호랑이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호랑이 눈동자는 계속 우리를 따라 다니고 목덜미가 통통하게 또는 마르게 목이 길게 또는 짧게 보이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실제로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느라 애를 쓰신다. 그다음에 운정 김흥종의 <미인도>를 가리키며 요즘시대 젊은 여성들의 미인상은 서구미인을 좇아가고 있는데 한국적인 미인상은 눈도 크지 않고 쌍꺼풀도 아니고 바싹 마른 몸매도 아니다고 갑자기 할아버지는 열을 내신다. 여인들이 목욕하는 그림 앞에 선 할아버지는 우리보고 정색하고 “선상님들! 이 그림에서 키!포인트?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오?”고 갑자기 묻는다. 우리는 어리벙벙해 한참 그 그림을 들여보고 도대체 무얼까? 고민하는데 할아버지 말씀이 그림 중심 하단 부분에 돌아앉은 여인을 가리키며 “바로 이여인의 항아리만한 엉덩이여!”라고 구성지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넋을 놓고 하하하! 웃었다. 할아버지는 이어서 “이그림에서 이엉덩이를 빼면 이그림은 볼품이 아주 읍서!”하고 자신있는 표정을 지으며 높은 억양으로 힘있게 말하면서 손바닥으로 그림의 엉덩이를 가렸다가 떼었다 하면서 우리에게 보인다. 돌아서 석전 황욱의 <여천무극(與天無極)>이란 글자는 87세에 오른손을 잃고 왼손으로 썼다는데 붓자루를 통체로 쥐고 쓴 악필이라 한다. 서체가 굳세고 힘이 넘쳐 보여 우리는 아주 감탄을 했다. 오지호의 정관물아(靜觀物我)는 “고요히 나를 헤아려 보라! 그려면 내가 보일것이다.”라고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철학의 세계로 이끄신다. 그리고 덧붙여 예인은 모름지기 서예와 시와 그림에 달통한 자를 말한다고 열심히 해설하시는 할아버지에게 인생수업도 받으면서 즐겁게 고개를 계속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느낀 것은 그림속에 있는 많은 글들이 모두 어려운 한문으로 고고한 서체가 우리와 거리가 너무 멀고 어려워 그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 무척 아쉽고 우리 스스로 답답했다. 아주 많은 그림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가 밖에 나오니 계속 비가 온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차분히 길 건너 맞은 편에 국립해양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드넓은 땅에 덩그라니 떡 버티고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커다란 박물관에 궁금증을 가득 품고 투명 유리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니 견학 온 학생들로 북적댔다. 어린 학생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전시품을 본다.
수중발굴장비, 심해잠수헬멧, 유물인양공기주머니, 갯벌굴착기, 스쿠버, 진도 벽파진에서 인양된 세계 최대의 통나무배가 있고 완도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되었다는 완도선(1983~1984)도 있는데 11세기 중후반 고려 때에 침몰한 배다. 그리고 안압지배(통일신라)가 경주에서, 달리도선(13~14세기)은 목포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로왕의 왕후가 된 인도여인 허황옥이 가야로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돌로 바사석탑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장보고와 진포대첩 그리고 고려수군과 최무선 그리고 대외사절단과 조선통신사 그리고 이순신과 거북선의 그림을 통해서 그때의 모습을 본다. 정약전의 <자산어보3권> <어류분류집> 그리고 <한선(韓船)> 그림이 있다. 조선후기 평양감사 한영도의 <주교도(舟穚圖)>가 있고 조선후기 조영석의 <출범도>와 신유복의 <선유도>가 있고 정선의 <귀범도>, 작가 미상인 <주상어부도>와 <귀선도>가 있고 완도의 해저도자기들이 있다.
동양 고대 선박중 유일하게 존재하는 신안 해저보물선의 비밀은 목패, 나막신, 맷돌, 지대통보, 골각인이 있고 중국 원나라 14세기 때의 도자기로 청자양각모란문대화병과 백자대접과 청자잔받침이 있고 고려 12~13세기 것으로 청자양각연당초문매병 등이 있고 원나라의 무수한 동전들, 청자정형향로, 청자호문호, 금속촛대 등 금속유물도 많다. 한편 신안선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길이가 34미터이고 200톤의 무게다. 하나하나 살피는 나는 또 늦장이다. 내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고 마음을 가누기조차 힘들게 뛰어 문앞에서 기다리는 일행을 만나니 정말 반갑고 미안했다. 우리는 그곳을 나와 목포 시내에서 병어찜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시 비를 맞으며 계속 영산호 방조제를 달린다. 다시 강진으로 향해 탐진강가를 달리다 군동면의 마늘밭이 새파란 최선생의 고향 친정마을에서 호준이 호담이도 엄마와 함께 차에서 내려 “안녕! 빠이빠이!”하며 계속 손을 흔든다. 아쉬운 우리도 “호준이 안녕! 호담이 안녕! 잘가라!”답하고 돌아서는 우리 옆자리는 내내 허전하였다. 아이가 있어야 웃을 일이 많다는데! 어른들만 있는 차안이 조용하다.
10)극락보전이 있는 무위사
우리가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월출산자락 무위사(無爲寺)로 향했다.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관음사(觀音寺)란 이름으로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절은 네 번에 걸쳐 중건하여 세종 12년(1430)에 세워졌다. 조선 13대 명종10년(1555)에 이르러 무위사란 이름으로 바꿨다. 이는 신라 승려 원효가 백제의 땅에 사찰을 세운 것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특히 선각대사 형미(864~917)는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에 머무르면서 사찰을 중건하고 널리 교화를 펼쳐 대중적인 큰 지지를 받았고 선종세력으로 크게 번창했다고 하는데 결국 후백제의 강진지역에서 친왕건세력인 형미가 성장한 것은 후삼국의 세력들의 각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 한다. 이런저런 깊은 상념 속에 비를 맞으며 무위사에 당도하여 처음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에 들어서니 범종이 보이고 수백년 된 팽나무가 우리를 내려다 본다. 정면에 보이는 극락보전은 성종 7년(1476)에 지어 주심포집에 배흘림기둥의 맞배지붕으로 고려 후기의 경건함과 단아한 조선의 건축양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극락보전 뒷벽에는 유명한 수월관음도가 1476년에 조성되었다. 극락보전 안의 후불벽화는 고려 불화의 마지막 연대의 작품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 불화양식을 구분하는데 소중한 유물이다. 여기 아미타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가 원화 그대로 보존되어 전해오는데 고려불화의 엄격한 상하구도를 벗어나 평등한 원형구도를 취하고 있다.
원래 고려불화에서는 협시보살로 관음과 지장보살이 아미타여래 무릎 아래에 있어 부처의 권위가 최상으로 높임을 받는 그림인데 반해 이곳 무위사 벽화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협시보살이 양옆에 서고 그 위로 6인 나한상이 구름속에 싸여 평화로운 조화를 이룬다. 이렇듯 극락보전 안벽에는 이외에도 많은 벽화가 있는데 최근 이불화의 훼손이 심각하여 손질을 하여 벽화들을 통째로 드러내어 전시관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는데 우리가 벽화 보존각 안에 들어가보니 바로 여기다. 나는 수많은 불화에 그저 놀란 토끼마냥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봤다. 그리고 처음엔 뭐가뭔지 어리둥절 했지만 놀랍고 황홀하여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찬찬히 바라보다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시간조차 넉넉치 않아 안타까웠다.
아쉬움만 남기고 밖으로 나와 절간 뜨락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처마 끝에서 풍경소리가 비바람에 흔들린다. 우리시선 안에 들어오는 무위사 3층석탑은 통일신라 전형양식으로 고려시대 석탑이다. 절간 뜰에 내려서 단청이 벗겨진 극락전 극락보전을 다시 뒤돌아보니 더욱 고풍스런 멋이 있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 옆에는 무위사를 세 번째로 중건한 선각대사의 편광탑비가 천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서 있다. 이비는 대사가 입적한 후 28년 되는 고려 정종 원년(946) 에 건립됐다. 양뿔이 조각되고 입을 벌린 용머리와 귀부 위에 비신이 세워졌다. 여기 무위사에는 이외에도 선각대사탑, 미륵당의 석불입상, 사리탑 등이 있다. 우리는 천천히 여기저기 살피는 동안 우리 일행 외에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조용하기만 한 절간에 말을 건네고 싶어도 사람이 보이지가 않는다. 스님 한 분이라도 만나면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주위를 둘러보고 절간을 나오려 할 때 보살같은 한 분을 만나 “저 팽나무는 몇 년이나 됐어요?”하고 묻자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라며 느리고 짧은 대답이다. “그러면 혹시 여기 무위사에 대한 안내장이라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다시 묻자 “여기 그런 것 없어요.”하고 대답도 귀찮아 한다. 나는 되돌아서 만감에 젖었다. 이번 여행에서 속시원하게 안내장 하나 제대로 받은 곳이 없다. 팜플렛 하나 얻으려면 관리사무소 같은 곳을 찾아 통사정을 해야 간신히 한 두장 얻어 가질 수가 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할 수 있을 때는 다행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말을 걸을 곳조차 없을 때는 막막하고 참으로 답답했다. 이런 훌륭한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갖고도 알리려 하지도 않으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우리문화를 우리가 홀대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누구라고 말 할 것인가? 뿌리가 약하거나 흔들리면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도 없고 뿌리 없는 나무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다. 허전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 무위사를 등 뒤로 하고 빗길 달리기 시작한다.
11)함박눈 내리는 성남
청림마을을 지나 남성촌을 지나 신북면을 지난다. 우리가 오늘의 일정에서 한 곳이 빠졌다. 왕인 박사 유적지다.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북쪽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 오장성을 지날 때 천둥이 으르렁 거리고 번개가 번쩍번쩍 우리 몸을 오싹인다. 앞에 가는 버스는 계속 물보라를 치며 달리고 어느새 우리는 배가 많이 생산되는 나주평야를 달린다. 송정리역을 지나 광주에 다다랐을 때 어둠이 짙게 깔려 불빛만이 우리를 인도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백양사를 지나 밤안개가 짙은 정읍에 도착한다. 정읍휴게소에서 짜장과 우동으로 저녁 시장기를 달랜다. 한번이라도 더 밟고 싶은 나의 고향이라서인지 이곳에서 숨쉬는 공기조차 달게 느껴지고 잠시 머무는 이순간마저 나에겐 행복이다. 나는 총무님의 특별한 배려에 정말 고마워했다. 불 밝힌 내고향 간판글 “숲에는 미래와 희망이 있다”를 마음에 담고 여러번 되뇌어본다.
하늘 한 번 더 올려다보고 숨 한 번 가슴 깊숙이 들이키고 차에 오른다. 그때 차안에서 총무님은 곧바로 가방 속에서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더니 책자 하나를 꺼낸다. 무엇일까? 궁금한데 총무님은 빙긋이 웃으며 “우리가 들꽃을 연구하는 사람들인데 갈대와 억새를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하면서 식물연구회에서 발간한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식물학자 이영노교수의 칼럼이다. 가을의 상징으로 피는 억새와 갈대는 예로부터 시와 그림 그리고 문학의 소재로 많이 쓰인다. 어느날 TV방송에서 소개하는 갈대제에서 나오는 식물은 갈대가 아닌 억새여서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전 어느 시화전에서는 한 시의 내용이 우리나라 강산에 흔하게 피는 제비꽃을 소재로 했는데 곁들여진 그림은 서양의 팬지(삼색제비꽃)이었고 어느 일간지에서는 5월 5일 단오절과 창포에 관한 기사와 사진이 실렸는데 글내용으로 봐선 천남성과의 창포여야 하는데 사진은 화려한 붓꽃과의 꽃창포였다고 한다. 더욱 심한 것은 어느 제약회사의 약광고에서 “우리 조상들이 머리 빗던 창포로 만든 XXX"하면서 보여주는 화면은 역시 꽃창포였다고 한다. 이꽃창포로 만든 약은 그야말로 약효가 없는 엉터리 약인 것이다. 갈대와 억새의 모습을 말하자면? 갈대는 강가나 바닷가에 나고 지하경(地下莖)이 긴데 반해 억새는 산지에서 나고 지하경이 짧다. 따라서 설악산 한라산 무등산 등지에서 난 것은 모두가 갈대가 아닌 억새이다. 그리고 갈대는 듬성듬성 나고 줄기에 붙는 잎은 꽃이삭이 나올무렵에 거의 수평을 이루고 억새는 수북하게 다발로 나며 줄기에 잎이 비스듬히 붙고 잎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갈고리가 있어 스치기만 해도 살갗을 벤다. 억새는 웍, 웍달, 고아(苦芽)라 하고 갈대를 노초(蘆草), 위초(葦草), 노위(蘆葦)라 하여 갈대(葦) 갈잎(蘆葉) 갈꽃(蘆花)이란 시어를 시경(詩經)에서 또는 여러 한시에서 간혹 볼수 있다. 갈자리 엮어 갈삿갓을 쓰고 갈대밭에서 흔들리는 갈바람 끝 저멀리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는 나룻배 타고 동정호수에서 그토록 갈대를 사랑한 소동파를 만나리라!
오늘의 우리는 강가에서 호숫가에서 바닷가에서 늪이나 뻘이 점차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이 현실의 안타까움을 어찌하랴! 갈대밭에서 청둥오리와 두루미가 날고 강바람을 쏘일 우리 아이들은 언제 낭만과 이 아름다운 자연을 접할 수 있을까? 이리하여 나의 할 말 많은 생각들도 차와 함께 계속 달린다. 모두가 지쳐서인지 별로 말이 없다. 이번 여행길에서 회원 한분은 착실히 유홍준님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챙겨와 나역시 즐겨보던 낯익은 책이라 반가워 간간히 들여다보는데 어느사이 천안삼거리를 지나고 안성땅을 밟고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캄캄한 하늘을 보고 혹시 우리를 기다리는 별자리라도 있나 한참 더듬어 보았지만 깊은 침묵의 검은 천을 두른 밤하늘 뿐이었다. 안성에서 김밥을 먹으며 이번 여행의 마지막 휴식을 가졌다.
아! 이곳은 비가 멈춘 안성이다!
가끔 여행을 오가는 길에 난 일년에 몇 번씩은 꼭 이곳 안성을 스쳐 지나간다. 그럴때마다 드넓은 안성평야 끝 저멀리 희망의 불빛을 바라보며 좇아간다. 난 언제나 이곳에서 맑은 하늘을 보고 신성한 땅의 공기를 마시고 그리고 사람들의 저녁 밥짓는 굴뚝연기를 무척 보고싶어 했다. 수도권 언저리에서 몹시 힘들어 하는 농부들의 얼굴이 떠올라 이곳 안성을 떠날 때는 나의 고향을 바라보듯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우리 부모님이 계시고 나와 나의 형제들이 자라던 곳이다. 그리고 푸른 꿈을 키우던 친구와 함께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곳이리라! 난 이곳에 마음을 내려놓아 사랑의 비밀을 복주머니에 담아 넘겨주고 떠난다. 산과 들에 우리들의 수없는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동안 우리의 삶은 변함없이 그리고 천천히 앞을 향해 계속 달린다. 밤의 평화가 깃드는 안성을 지나 곡창지대 여주 이천을 지나 광주에 다다른다. 안도의 숨을 길게 쉬며 우리는 빛을 쫒아 시간을 당기며 계속 달린다. 캄캄한 갈마터널을 지나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깨어보니 성남이다.
낯익숙해 편안한 성남의 거리 그리고 간판들이 환하게 우리들을 비추인다. 옛날과 오늘날이 정겹게 만나는 곳 모란에서 나의 몸과 맘이 스르르 미끄러지듯 천천히 차 밖으로 나서자 뜻밖에 우리를 반기는 임은 하얀 함박눈이다. “와! 눈이야! 함박눈이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구나! 세상 모두 하얗게 되네........와!” 나의 탄성과 함께 두팔 벌리고 허공속에 내려서는 임을 껴안고 하늘을 보며 빙글빙글 돌고돈다. 임은 살며시 나의 속눈썹을 누르고 눈을 감는 나에게 반가워 볼을 비비고 사뿐사뿐 춤을 추며 머리 어깨 등을 어루만지고 임의 보드라운 숨결이 나의 입술에도 촉촉히 내려 앉는구나!
아! 사랑하는 임이여!
축복을 비는 당신의 손길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나이다.
2001 . 7 . 3 변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