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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란 ? 스크랩 한국 구상미술의 과제와 전망
sun 추천 0 조회 87 08.12.09 11: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구상미술의 과제와 전망

1. 진취적이며 실험적 성향을 지닌 청년 작가들이 보는 우리 화단의 시각은 기득권의 미술이 구상 일색이라  항변한다. 청년들이 생각하는 구상 미술에는 더 이상의 진보적 개념이나 새로운 내용을 담아낼 수 없다고  보는 모양이다. 구상 미술은 고루하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젊은 세대들에게 만연해 있는가 보다. 
   구상이라는 용어의 개념과 구상 미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현재에 있어 상당한 문제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조형 언어의 양식적인 측면이 논의의 대상으로써는 미흡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50년대 후반 이후에 대두된 구상 미술이 우리 화단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 이거니와 구상 미술이 가진 명료한 개념 설정 없이 자리하고 있는 것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대상의 외관만을 모방한 미술품이 구상 미술로 우리 나라에 널리 유포 되어져 있는 탓 일지도 모른다. 
   본 논고는 우리나라 화단에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구상 미술의 미적 가치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의 개략적 개념 설정과 이후 지향해야 할 바를 구상 미술 단체인「구상전」신작전」목우회」신미술회」와 97년 10월에 개최된 「한국 구상미술 단체연합전」의 참여 작가 작품을 관련시켜 논의 해 보고자 한다. 
   지난 94년 10월 월간 미술 특집 기사로 다루어진 좌담『한국 구상 미술의 흐름과 특징』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구상 미술이란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추상 예술에 대항해서 종래의 재현적 표현을 총괄하기 위해서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이다. 
   자연이나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 추상의 대립 개념이면서도 실제 작품에서는 특별한 분리 개념 없이 중간  형태의 작품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구체적인 사물을 재현하고 있는 형상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어 완전하기 분리하기에는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추상에 대한 구상이라는 개념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본래 figuration의 개념은 다의적 의미 내용을 가지며 회화나 조각에서는 인물상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상과 같은 원론적 문제의 접근을 근저로 하여 이 좌담에서는 사실과 현실, 형상 미술을 어느 정도 분리하여  해석하고 있으며 민중미술 또한 현실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분리 해석하고 있다. 
   그 예로써 「목우회」는 사실주의, 자연주의 경향이며 구상전」같이 구상성을 띤 작가 협회는 구상주의로 묶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론가 최열씨는 『한국 현대 미술 운동사』에서 70년대의 미술계를 규정 지으면서 「목우회」를 인상파 혹은 고전적 사실화의 집단으로, 「구상전」을 반추상 혹은 반구상 파로 말하고 있다.
   97년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 되었던 「한국 구상미술 단체 연합전」이라는 이름으로 목우회, 상형전, 신미술회, 한국 구상 조각회를 하나로 묶어 전시된 바 있는데 평론가 유준상은 서평에서“한반도의 구상은 그 도입부인 눈을 통해서 인지된 것이었고 처음 불가피하게 이러한 감각의 報告 곧 쎈스테이터의 기록으로  나타난 것이었는데 이러한 눈의 미술은 그곳으로 비쳐 들어온 데이터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도입기의 구상 미술은 외관을 모방해 내는 기술을 중요시 여겼으나 이만을 가지고서는 예술의 개념에서 일정 정도 멀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의 미적 체험을 포함 시키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유동하는 생활 근저를 바탕으로 영속성과 진일보하는 인식의 정도에 따라 문화가 발생되며, 문화란 사회  속에서 인식되어진 상태가 언어화 되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지극히 보편적인 사고 방식으로 귀결 되어야 한다.
   비논리적 형태로 등장해서는 화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형태의 언어들을 정신사적으로 분석 할 수 없게 된다. 
   현실 직시의 예술 작품에 외관적 형태만을 그려넣어서는 단순화된 자기 만족의 논리에 그치고 만다.
   특히,작가가 자신의 사고 방식이 포함되어있지 않은 여타의 것으로 제작해낸 미술품으로는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기에 다소 문제가 있다. 구상 미술을 광의적 의미로서 구체적 형상성을 가진 모든 것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미술 작품의 한 계류로써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우리나라 미술계에 상당한  혼란을 가중 시키고 있다.


2. 구상 미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논의에만 멈춰서는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 
   많은 용어의 혼란과 개념의 미 정립으로 화가 자신뿐만 아니라 미술계에 종사하는 여타의 사람들까지 작품을  통한 논쟁 보다는 오히려 용어에 대한 입씨름으로 인한 부정적인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외형적  모습의 구상 미술이 하나의 계류로써 유지되고 있는 것은 우리 미술계의 여건과 환경이‘그러하지 않으면 안될 필연의 조건을 수반해 왔다. 
   불특정 다수의 예술에 관한 소유욕에 부응했던 것과 일제 강점 시대의 반 정치적 이데올르기가 80년대까지  지속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술품 소비자의 소유욕의 대상에서 가치의 대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 미술계 종사자의 미의식 습관화 결여가 우선된다고 본다. 
   사실과 추상의 대별에서 생긴 구상 작품의 모호한 인식을 불식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구상전」의 예를 보아도 이러한 사실은 쉽게 발견할수 있다. 조각을 제외한 서양화,한국화,수채화,판화, 드로잉을 제작하는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67년 5월에 창립된「구상전」은 그 해 9월 서울 신문회관(현 서울 갤러리)에서 1회 회원전을 갖게 된다. 여기에는 박영성, 박창돈, 박석호, 홍종명, 정건모, 전상수, 신석필, 강우문 등 당시를 대표하는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참여 작가 대다수의 작품들은 현재에 흔히 말하는 구상 미술의 요소가 상당히 배제된 화면 구성과 다양한  재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80년대 홍종명의 '위대한 변리' 황유엽의 '情談' 역시 대상의 외형적 재현 보다는  대상이 가지는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일상생활 전반에 널려진 보편적인 소재로 작가 나름대로의 해석과 미적  체험을 첨가시켜시대적 상황의 재현적 틀거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초창기 구상전 참여 작가들의 대다수는 자신이 속하고 있는 기본적 사회 구조를 개인 특유의 재해석을가지고 출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사회구조의 변화와 미적 체험의 다변적 구조 속에서 60년대 후반의 작품 형식과 내용이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를 두고 신진 작가들이 말하는 구상에는 발전  지향점이 없다라고 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58년 창립된「목우회」도「구상전」과 비슷하게 시대 변화에 따른 형식과 내용의 진보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96년12월 예술의 전당에서 가진 전람회 작품들을 살펴보면 출품 작가 140여명 중에서 작품  대상의 변형이나 미적 경험의 이입없이 대상에 대한 경외심으로 진솔되게 접근한 작품들이 과반수에 이르고 있다.
   미적체험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외관 모방에만 그치지 않는 많은 작품들이 있는 반면 여전히 60년대의 형식적 측면만을 유지하며 외형적 기술만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품 몇 장면을 두고 작가의 경향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는 없다.    
   작가가 지극히 보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진보적인 작품을 제작해 낼 수 있으며, 작품  제작 활동의 영속성 속에서 또 다른 의미의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일회적인 판단으로 모든것을 말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구상 미술계가 안고 있는 진보적 예술 개념의 부재와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이나마 거론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등장된 구상미술의 경향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자연에 대한 동경과 경외심에서 출발하여 대상의 외관 모방 접근을 통해

         조형 언어가 단순성으로 나타난 경우.

       ② 조형 구조의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형태 변형을 가지면서 포착된 대상위에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감각적 모방의 것.

       ③ 인간의 삶을 바탕에 두고 자의적 해석을 가하는 대상의 외형 모방을 기조로 한접   근.

       ④ 역사적 사실을 심미적으로 분석하여 이질적인 대상과의 결합을 시도하여 화면을 구성한 것.

       ⑤ 자연에 귀속된 나약한 존재로써 삶의 전반에 나타나는 사건의 포착점을 시도한 것 
   등 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이 구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 작품이 자연의 모방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추상에도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논고에서는 가시적 대상을 화면으로 옮겨진 것을 전재로 했으며 민중 미술과의 차별성을 위하여 정치적  사회적 접근의 방법은 시도하지 않았으며 자연의 외형적 모사에만 그친 작품들 또한 제외하였다.
    「 목우회」를 예로 들면 강길원,송기성,이용환,송 용,남충모,강정영,이양로 등은 ①의 경우에 속하며,  이경순의 '실내',김인화의 '연의 찬가',김재형의 '춘색', 백성도의 '昔-96' 등은 ②의 경우에 포함된다. 
     ③에는 오승연의 '풍수', 정승주, 남충모, 김흥수, 신양섭, 박주하, 박종식, 유수종, 이종대, 김종언 등
     ④에는 손수광, 권영호, 김교만,이강하, 류봉현, 황순칠, 
     ⑤에는 오승우, 이필언, 임봉재, 원현욱, 유수종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굳이 이러한 분류를 하고자 하는 것은 미묘하게 분화된 다양한 정서의 표현 문제를 정서들 사이의 차별로  인지하는 것이 거시적 관점에서 구상 미술이 지향해야 할 바를 밝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들의 작품은 시각과 촉각에 의한 느낌을 가지고 있고, 대상을 통한 거칠음,매끈함,삶의 고독함  등의 정서와 부합 시키고자 한 작품들이다.그러나 이러한 분류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문제에 관한 일정한 혼란의 가중이 현재 보다 훌륭한 예술과 훌륭한 미의 체제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상 미술이 예술로써 예술 작품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작품 성향이 어느쪽에 속해야 하고 그 작품의 주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 주제를 선정한 후에 주제에 대한 정성 어린 관심으로 작품에 임해야 한다는 것 등의 20세기 초반의 관념에 속박되지 말아야 한다. 소재의 선점 능력이나 화면을 잘 구성할 수 있는 구도, 실제 사물과 흡사한 묘사 능력, 어릴 적 느꼈던 
     정감 어린 전경의 구가의 문제가 예술 작품으로써의 기능보다 앞선다면 이미 불특정 다수의 예술 소비자의 정서에 봉사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상태로 지속된 미술품을 생산해 낸다면 불특정 다수의 정서에 봉사하고 미술의 기능적인 문제에 상당한 발달을 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예술품으로써의 기능이 퇴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 해야 한다. 
    96년 11월 서울 갤러리에서 가진「신작전」에 출품한 김경렬의 '생'과'겨울나무', 김택화의 '범섬이 보이는 마을' 등은 예술을 기조로 한 미술 작품으로 볼 수 있는 예라 할 것이다. 대상을 통한 개인 의식의 포함 정도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화면속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떠한 의도 속에서 어떻게 구성해야 할 것인가는 좋은 미술품과 그렇지 못한 미술품의 생산에 관여되는 것이지 예술품의 범주에서는 이러한 상태는 명료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미술품  생산자가 지극한 보수적이라 하더라도 진보적 성향의 작품을 생산해 낼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정도, 알고 있는 지식으로써의 접근은 다소의 위험성을 소지한다.
    여기서는 알고 있는 지식이 반드시 화면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식이 일반화  된다는 것은 지성을 가진 기능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경렬의 '생' 이나 '겨울 나무'를 보면,알고 있음의 접근이 아니라 상상적 경험 속에서 일정한 정서를 표현해 놓고 있다.
    심리적 체험적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의 경험의 단계로 끌어 올리면서 의식적으로 화면 구조에 자신의 정서를 공공연하게 풀어 헤쳐 놓고 있다. 묵직한 재질감을 바탕으로 부러진 나무 등걸과 새로 돋아나는  잎새를 화면 좌측에 두면서 90년대의 인간성 마모와 버려지는 정서의 메마름 속에서 새로이 시작되는  무한한 가능성의 근거를 보여 주고있다. 일시적으로 다가선 대상을 근거로 하여 작가가 가진 생활환경과  재해석의 여유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설령 김경렬이나 김택화의 개인적 사고 방식이 이러하지 않다 하더라도 예술품 생산자의 개인적 견해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의식적으로 그러한 작품이 제작된 것인가 무의식적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며, 예술이라는 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재 창조에 의한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구상 미술 단체 연합전」에 출품된 전용훈의 '노후대책'이나 이강하의 '영산강과 어머니'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요즘과 같은 문화 소비가 미흡한 상황에서 실천적 창의성을 발휘하며, 고급 미술로써 소비되어지는 소통의 허구성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노력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기 개념의 일반성을 세 노인을 통한 개연성으로 드러낸 '노후 태책'이나, 대상을 통하여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획일화 개인화 되어진 모습을 통렬히 조성해내는 '영산강과 어머니' 는 조형 언어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해 상상의 이미지로 투영해낸 재 생산의 근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신미술회」의 유성하, 하동균 등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투철한 자기적 해석 역시 우리나라 구상 미술이 지향해야 할 바를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사물을 들여다 볼 때 보이는 것을 재생하기 위하여 선이나 색채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를 통한 정서적 이미지를 기호화 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상을 선택하고 채색해 나간다.    나무가 나무같이 보이고 집이 집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차원적인 평면의 보임이 아니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행태인 것이다.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형식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도 작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유의 근거와 주변 환경이 대상의 외형을 통해 독특한 정서로 표현 되어질 때 드러나는 것이다. 

    상기와 같은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구상 미술의 최소한이 기본 요건은 대상에 대한 모방에서 출발하는것으로 귀결된다. 모방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내용과 형식으로 작품을 제작해야만 구체적인 구상 미술로근접하게 되는가? 구상 미술로써 실험적 구성을 하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구상 미술이 실험적 미술로의 발전 가능성이 드러난다면 구상 일변도의 화


3. 토양에 맞는 새로운 개념의 구상을 한국 구상 미술로 규정하여야 한다.구상 미술의 범주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은 그림의 계파나 조류를 형성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에 유포 되어져 있는 통속적 구상 미술을 재 정의하여 바람직한 예술로써의 미술품을 생산해 내자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구상 미술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리기 힘든 상황이나 조금은 더 구체적인 개념의 설정이 필요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상을 모방하는 형식에 따른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구상 미술을 리얼리즘,사실주의 등으로 구분해 내고 있는 상황을 인정하면서 현재 우리 화단의 상황을 중심으로 개념을 재 정립해 내야 할 것이다. 
   인상주의적 화풍의 그림도 구상 미술로 봐야 한다는 견해와, 민중 미술은 결코 구상 미술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는 문제에서부터, 대상이 드러나 있는 미술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적극적 접근과 토양에 맞는 개념의 설정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우리 주변에서 바라보는 구상 미술이 지나칠 정도로 형식미에만  치우쳐 있다는 시각을 바꿔줄 필요가 절실히 요구된다. 미술은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구상 미술이 대중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중의 사상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미술품 생산자의 미적 경험에서 우러나는 상상의 인식 상태가 우선되어 화가 본연의 언어 활동인 조형 언어의 정서적 생산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유홍준의 『시대 상황과 미술의 논리 - 리얼리즘과 민족미술』에서는, 리얼리즘의 개념에 대하여 허버트  리드를 예로 들면서 “「처음에는 철학에서 이 용어를 빌어 왔고 곧 이어서 그 사용법이 부정확하게 되었다」고  했듯이 매우 복잡하며, 사실주의 (寫實主義), 사실주의(事實主義), 현실주의(現實主義) 등의 번역을 피하고 원어 그대로 부르는 것이 보통 이다.”라고 했으며,또한 허버트리드는『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리얼리즘이란
    "대상의 정확한 외관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외관이란 단순히 눈에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 뿐 아니라외관이 처하고 있는 상황의 논리도 포함된다고 했다. 

    이러한 용어의 혼란은 미술품을 생산해 내는 화가들에게 뚜렷한 필요성과 개념의 인식 정도가 미미한 상태로도 서로의 한계선을 그어 왔다. 단순한 용어의 문제로 분류되어도 될 말이 우리 주변에서 하나의 계류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평론가 신항섭은 『구상미술에의 초대』에서 사실주의와 구상 미술을 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사실주의 작품은 그 형태적인 미보다는 내적 의미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라고 조각가 강관욱의 작품을 설명 하면서 말했고, 구자승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가 추구해온 사실주의 미학은 사물에 대한 냉철한  작가적 시각을 통한 객관적 사실을 표현하는,묘사 중심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유하는 공간으로서의 새로운 조형  어법을 창출 하는데서 일단 멈추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신항섭이 구상 미술이나 사실주의나 같은 개념으로 파악한 것이 그 개념의 사실로 유지되고 있다면  우리나라 화단의 지향점이 더 명료해 지겠지만, 현재의 상황은 딱히 구분할 명분도 없을 뿐더러 마땅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적어도 구상 미술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자연의 정의가 풍경이나 정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온갖 사회 구조의  현상을 포함한 것이라면 말이다. 여하튼 신항섭의 말대로 구상 회화에 관한한 관념성은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관념성이 강조되다 보면 그림이 지나치게 자기 논리화 하기 때문이다.논리적인 구상화는 감동에 약하게 마련이기 때문 이다.


4. 우리나라 형식적 미술에 있어서 현실성이 결여된 외관 재현의 미술품이 상당 수준으로 평가 되면서 관주도적 가치관에 부합되어 80년대를 장악해 왔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 우리나라 미술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구상 미술임에 자명한데 각종 국제적 행사나 비엔날레에서 다소 소외되어 가고 있다. 
   90년대에 이르러 미술사적 관점이나 미학적 연구에서 다소 멀어져 있거나 예술로써 구상 미술이 차지하는  부분이그만큼 작아 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구상 미술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속적인 영속성을 유지한다. 단지, 대상의 순전한 외관의 변화는  없으나 내포된 내용의 변화는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등장할 뿐이다. 이는 지금까지 논해 온 바와 이 구상 미술의 계류로 분리되어야 할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이 사회적, 정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하여 주변인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경우를 조성해 온 것이며, 구상 미술을 학적 대상이나 연구의 과제로  삼지 않아온 것에 기인한다.


   「대한민국 구상미술 단체 연합전」에서 박용숙씨는 19세기의 신경학자인 죤 휴링스 잭슨의 두개의 대뇌반구 이론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오른쪽 뇌에서 포착된 일획적대상을 바탕으로 치밀한 구성으로 변화 시키는 것이 왼쪽 뇌의 역할이라 보고 있다. 또한, 양쪽 뇌의 결합 없이는 안전한 삶을 보장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여기에 덧붙여지는 제3의 구성 역할을 그림을 제작하는 제작자의 손끝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양쪽 뇌의 결합된 재조건 속에 제작자 자신이 처한 제반 환경의 재인식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박용숙의 말대로 구상 미술이란 순간적 착상과 인식을 근거로한 여건 분석,여기에 따르는 대상의 외관을 모방해 내는 기술력의 총화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구상 미술의 본질에 대하여 논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조형 미술 대략적으로 반성하고  미래를 나타내는 미적 근접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 미술은 삶과 예술을 존중하며 서로 다른 사회 구조의 저변확대와 각기 다른 삶을 확장 시키는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나라 구상 미술이 가지는 가치는 일반 대중을계도하거나 미술 인구의 저변확대라는 커다란 목적 지향점이 자리하고 있지만 미적 가치의 공유와 보편성을 넘어서는 성숙한 미학적 지향점을 추구해야만 한다. 
    단순히 보기 편하게 감상하는 문화의 저변확대의 문제는 또 다른 형식과 의미로써 유포 시켜야한다. 
    삼각지 미술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더 큰 비중을 주어 현 화단에서 배척하거나 하지 않고  이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수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된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완전한  미의식을 끌어내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캔버스 위에 가상의 공간으로 그림이 해석되어서는커다란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렇다고 손끝에서만 나오는 외관의 모방 작품을 완전히 배제시킬 필요는 없다. 대다수의 일반인들의시각에서는 이러한 미술품이 미술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 언어로 취득 되기 때문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단지, 새롭게 시작하는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서 구상 미술의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뿐이다. 

    외국에서의 사례가 어떠하든 우리나라의 미술계가 구상 미술을 하나의 쟝르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구체적인연구가 지속되어야 한다. 96년「신작전」서평에서 윤진섭은 신작전에 대하여“이 모임은 회원들의 학연을 초월하고 전국을 망라한 구상 작가들의 모임이다.”라고 했듯이 거시적 관점에서 인상주의아류나 사실주의든 리얼리즘이든 구분하지 말고, 계파 형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구상 미술의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새로운 개념으로써 구상 미술을 파악해야 한다.

 

 

 

 

글쓴이 : 박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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