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시철망이 있는 풍경
[페이지] F01
극단 성좌 제 73회 공연
(장막극)
가시철망이 있는 풍경(風景)
-2막 7장-
노경식 작
권오일 연출
[페이지] 001
(등장인물)
윤노인(60대)
아내(50대)
아들 철환(40대)
딸 명순(30대)
외손자 정식(10대)
(때와 곳)
1980년대, 어느 가을날.
휴전선 비무장지대 (DMZ)에 가까운 민통선 마을.
(무대)
긴 마루와 방이 세 개, 부억이 딸려 있는 가자형의 아담한 한식 가옥. 마루벽에
걸린 괘종시계와 부억쪽 마루끝에 놓여 있는 조그만 냉장고 등이 비교적 깨끗하고
조촐한 세간살이이다. 무대 앞은 마당이 되고, 무대 우측 구석 (부억 앞)에 수도
펌프가 박혀 있는 우물과 그 옆에 감나무 한 그루. 무대 좌측 쪽으로는 얕으막한
산 언덕과 멀리 푸른 바다의 수평선이 그림같이 바라다 보인다. 그리고 가능하면
객석이 사립문쪽이 된다. 그 수평선을 배경으로 하고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집 뒤
쪽으로 하얀 페인트질을 한 상자 모양의 꿀벌통 대여섯 개가 가지런히 길게 일렬
로 놓여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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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경계를 나타내는 돌담과 대문 같은 것은 특별히 없고, 생울타리가 듬성듬
성 둘러쳐져 있을 뿐이다.
[막] 제1막
[장] 1장
[시간] 달밤.
조각달이 서쪽하늘에 걸려 있고, 마당에서 벌이는 조촐한 환영파티. 마치 캠프
파이어처럼 작은 화톳불이 피어 있으며, 그 옆에 놓인 긴 평상에는 술과 안주들-
평상가에 놓여있는 큼직한 스테레오 카세트가 뿜어내는 디스코 음악의 선정적
리듬 속에 온 마당이 떠나갈듯이 시끄럽다. 딸 명순이와 어린 외손자가 능숙하게
흔들어대며 춤추고, 아들은 어색한듯 그저 시늉으로 엉거주춤 ------ 이 모양을
평상에 앉아서 지켜보는 윤노인과 아내. 윤노인은 한껏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 있
으며, 아내는 그저 다소곳이할 뿐이다. 윤노인은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전날
떠돌이 꿀장사의 습성으로 조금은 시끄럽고 경망스런 편이며, 딸 명순은 활달하고
꾸밈없는 성격의 전형적인 현대여성. 40대의 아들은 초록색 바탕에 노랑 글씨의
북쪽 "기자" 완장을 차고 있으며, 인텔리로서 몸에 밴 품위와 처신을 잃지 않고
세련되어 있다.
[외손자] (큰소리로) 히히, 신난다. 신나. 외삼촌. 흔들어. 흔들어요. 빨리 빨
리, 더 빨리 ------.
[아들] 외삼촌은 양춤 출 줄 모른다. 애. 춤이야 우리네 조선춤이 좋지. 허허-
[외손자] 쉽단말야. 자. 두 손 이렇게 높이 처들고, 엉덩이 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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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 몸뚱이만 비틀면 돼요.
[딸] 호호호! 야호, 야호-
[윤노인] 임자. 저것들 노는 꼴을 좀 보라고! 사람은 안죽고 오래 살고 볼 일이
다. 안그렇소. 여보? 허허허. 저렇게 중늙은이가 다 된 신사 어른이 바로 내 자식
놈이라니. 원- 글쎄 다시금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임자? 세상 천지, 생사기별조
차 모르고 지내왔던 자식새끼 내 큰아들놈이, 글쎄 오늘날 늙은애비 눈에 이렇게
불쑥 나타났단말씀야! 허허. 세상 좋아졌다. 참말로 세상은 좋아졌어. 인생은 그
래 설람은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고 볼일인겨!
[아내] (차분하게) 술잔을 채워 드릴까요?
[윤노인] 아암. 마시고 취해야지!
[아내] ---- (술을 따라준다)
[윤노인] 하늘가에 저렇게 조각달 뜨고, 가을 바람 시원하고 ---- 오늘밤은 내
평생에 처음으로 한번 마음놓고 웃어보는 것 같소그려. 안그래, 임자야? 하하하.
[아내] ---- (착잡하고 서글프기까지 한다)
[딸] (다가와서 손을 끌며) 아버지도 춤춰요! 자, 얼른 한번-
[윤노인] 늙은이도 말이야?
[외손자] (다가와서) 그래, 그래. 우리 할머니도 춤춰. 히히, 하나도 어려운 것
없단말야.
[아내] (손을 저으며) 어서 너희들이나 실컷 춤춰라.
[윤노인] 좋오타. 그래! 아무렴 늙은 할애비가 그까짓 서양춤 한번 못출까 봐
서---- 오냐. 오냐. (아내에게) 그렇다면, 내 술잔 좀 들고 있어봐. 허허 ------.
[아내] ------ (잔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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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인 리듬에 맞지 않게 덩실덩실 춤춘다. 딸은 아들과 마주하며 신나게 흔들
어 댄다. 한동안 길게, 소리까지 질러대면서 - 외손자가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찰칵"! 플래시 터지는 소리- 윤노인, 객석을 향하여 자랑스럽게 소리친
다.
[윤노인] 자자- 여러분! (숨을 몰아쉬며) 동네 사람들아, 내 사설일랑 좀 들어
보시오. 원 세상에, 이렇게 기쁘고 좋은 날이 언제 또 있겠냐? 꼬박 40년도 더 흘
러가서 기적같이 청천벽력으로 오늘날에 발생한 일인데말씀야. 이거야말로 생시인
지 꿈인지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구료. (아들의 손을 끌며) 이리 이리 가까히
와봐, 철환아! 시제 여기 서 계시는 우리 신사양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다름 아
닌 바로 내 내 ------ 내 큰아들 윤철환씨란말요! 윤철환이- 여러분들 아시겠소?
그러니까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세상 모르고 지내왔던 지애비와 자식간 사이
란 말씀야. 아- 그러고서설람은 서로 떨어져서 남남으로 살아왔던 참인데, 글쎄
이 자식놈이 그동안에 저쪽 북녁 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버젓이 살아가고 있었어
요. 그뿐인가? 지금껏 옛날옛적 내 본마누라까지도 죽지 않고서 확실하게 살아있
었다는구랴. 하하하. 저쪽에 박영감아 안그래, 이놈아? 이제야말로 남쪽과 북쪽이
제정신머리가 들어서, 쥐구멍에도 햇빛 둘더라고 바늘귀신만큼은 물고가 트인 모
양이지 더구나 이 신사어른은 지금 저 평양의 무슨 통신산가 하는 데서 훌륭한 신
문기자까지 돼가지고 말씀야. 그래가지고 시제 사흘간 말미를 얻어내서 이렇게 애
비 날 만나자고 내려온 것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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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놈의 탯자리 고향땅을 찾아서 이렇게 ------. 허허허. 오매불망, 얼마나 피맺
히고 한스러운 세월들이었느냔 말씀야. 안그렇소, 여러분?
그들 술잔을 들고 불 앞에 둘러서 있다.
[딸] (기다렸다는 듯이) 음- 예예- 그러니까 45년만에 꿈에 그리던 아들을 만나
늙으신 아버지를 축하하고, 멀리 평양 땅에서 찾아온 ----, 실은 그렇게 먼곳도
아닌데 하옇든 평양에서 온 큰아드님 윤철환씨를 환영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
리고 평양에 살고 있는 가족과 우리들의 이웃을 위하여!
[외손자] (혼자만 큰소리로) 위하여, 히히. 술잔을 서로서로 부딪치란말야. 자,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두 ----
[윤노인] (객석에) 동네 사람들아, 한차례 박수라도 힘껏 쳐줘야지! 이렇게 좋
고 좋은 날, 꿔다놓은 보릿자루모양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지 말고-
[모두] (박수치며 크게 웃는다. 사이)
[아들] 이거 고맙구나. 명순아. 허허.
[딸] (아내에게) 엄마도 오늘밤은 술 한잔 들어요. 자아-
[아내] 술 마실 줄을 알아야지, 내가-
[딸] 기분 내, 엄마? 왜요? 어디가 우울해?
[아내] 아- 아니다! 이렇게 뜻깊은 날, 우울하기는?
[아들] (정중하게, 무심코) 그렇게 하시디요, 아주머니!
[딸] 아니, 이렇게 나오기우? (새침한다)
[아들] 뭘말이가?
[딸] 아주마니가 뭐예요, 오라버니?
[아내] 무, 무슨 소리냐? 아무렇게나 부른들 어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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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편한대로 부르시게.
[딸] 으음. 지금 자네라고 불렀어요! , 엄마두?
[아내] 괜잖다, 명순아! (잔을 들고 파르르 떤다)
[딸] 마땅히 작은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러줘야지. 뭐, 평양에 있는 어머니만
진짜 어머닌가? 오빠두 안그래요?
[아들] (까딱없이) 으음- 그래. 차차 익숙해지겠디, 머. 허허허-
[윤노인] (혼잣말로) 저쪽 조각달 걸려있는 저 능선이 바로 우리들의 아군 208
고지였단말씀야. 그러니까 저 능선 너머에 엎드려서 우린 싸웠단다. 내 고향마을
을 지척에 두고 이렇게 빤히 내려다보면서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어요.
온동네가 불바다가 되고, 피아간 포탄 공방전에다가 비행기 공습까지 겹쳐서 말이
아니었어요. 여기저기 집과 나무들이 온통 새까맣게 불타버렸고, 폭탄 자국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서 커다란 웅덩이가 산지사방에 생겨나더란말씀 야. 마치 무서운
괴물 영화에서 등장하는 어느 마귀할멈이 살고 있는 처량하고 무시무시한 동굴속
땅덩어리같이- 이제야말로 내 집과 우리 마을은 흔적도 사라져 버렸구나, 하고 생
각했었지! 허허허. (아내에게) 그런 힘든 시절도 있었는데말씀야. 임자, 그런데
오늘 같은 날이 다시금 올 줄이야 꿈엔들 어느놈이 생각이나 해봤겠소? 귀신도 점
칠수 없었을 게야. 내 말 맞지? 안그래, 진실로?
[아내] ---- (또 한잔 따라준다)
음악이 잔잔한 블르스곡으로 바뀌고, 딸이 아들의 손을 잡아끈다. 아들의 사양
하는 몸짓. 윤노인은 아내에게 손짓발짓으로 <<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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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크게) 호호호! 왜 이렇게 얼굴값을 못하지, 오라버니?
[아들] 어색하니까니 그렇디. 춤을 난 모르니까니 말이다. 호호, 내가 리드할
테니까 오빤 잠자코 있으면 돼. 자자- 손 잡아요, 이렇게- 그러고 이쪽 팔 내 어
깨에 얹고
두 남매,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딸] (이윽고) 이러다간 누구 덕분에, 평양 구경 한번 우리도 하게 되는 것 아
니겠수?
[아들] 으음, 한번 댕기러 오라우. 내가 초대해서,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그렇
게 될 때가 오갔지!
[딸] (작은 노래로)
[노래] "대동강 부벽루에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
악수논정 하는 것도 오늘뿐이요----"
대동강 부벽루가 그렇게 멋지고 좋아, 오빠?
[아들] 그럼. 모란봉 을밀대에서 부벽루쪽으로 내려가는 한적한 오솔길은 정말
좋디. 인적도 드물고 아늑하고 말야. 그래서 젊은 남녀들이 쌍쌍으로 자주 찾는
곳 아니 갔니?
[딸] ------
[아들] 모란봉에 올라서 바라보면 평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디. 바야흐로 세계
혁명의 수도 우리 평양 도시가 말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지 깜짝 놀래고 말
고-
[딸] 혁명의 도시 평양? 그럼 서울은 뭣이지?
[아들] 아무런 혁명성도 없으며, 사치와 낭비에 젖어서 방탕과 타락의 도시일
뿐이지. 서울은 평양 도시에 비하면, 제국주의의 썩은 식민지 도시에 지나지 않는
다.
[딸] (날카롭게) 호호- 식민지 도시라구? 나 같은 식민지 도시의 여자가, 그럼
혁명의 도시 평양에선 어떻게 살지?
[아들] 우린 우리 식대로 살아가고, 너희네는 너희 식대로 살면 되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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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그렇다면, 요즘 유행하는 "통일" 같은 것은 언제쯤 하고 ?
[아들] 그러니까니 바로 그 지점이 문제디.
[딸] 아이고, 골 때려! 역시 신문기자 오빠는 다른데요? 호호호 ----
(사이, 자조와 냉소로)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고 서글프다! 어느 날 중년남자
가 불쑥 나타나서는, 당신과 나 사이가 배다른 혈육간 오누이 사이라니 말야. 오
빠와 누이동생 ------. 뭣이가 좀 생경하지 않우?
[아들] -----
[딸] 한 남자에게 두 여자! 본처는 북쪽에 살아있었고, 쎄컨드는 남쪽땅에 ----
-- 호호호. 어쩐지 배배 꼬이고, 가뜩이나 뒤틀렸단말야.
[아들] 역사의 운명이고 민족의 비극이야요.
[딸] 그래요. 그 누구도 책임지는 자가 없고, 아무에게도 잘못은 없지, 머.
[아들] 책임질 자가 있디!
[딸] 누구?
[아들] 바다 건너 저 일본 왜놈과 미제 ------.
[딸] 미제라니? 미국 제국주의? 그럼 소련 공산당은 책임없단 말예요.
[아들] ------(사이) 명순이 네가 경영한다는, 무슨 경양식 집은 잘돼가네?
[딸] 내 까페말야? 응- 비교적 잘돼가는 편이예요.
[아들] 그러니까니, 저 어린 정식이는 이렇게 외갓댁에다 맡겨놓고 말이디?
[딸] (머리를 끄덕이며, 잠시 물끄러니 올려다 본다)
[아들] (계면쩍은듯) 와, 그래?
[딸] 오라버니?
[아들] 싸게싸게 말하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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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차라리 요염하게) 오빠? 우리 오빠? 오빠, 오빠?
[아들] 으응?
[딸] 나말야 ---- 오빠 같은 남자 만나서, 당장 연애 한번 하겠다!
[아들] 무슨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네?
[딸] 아이, 왜 이렇게 무드를 모르고 멋대가리가 없지?
[아들] 무에가?
[딸] (가볍게) 호호호. (어리광부리듯이) 오라버니, 숙녀가 무례하고 건방지다
고 생각해, 나?
[아들] 아직은 잘 모르디 않네?
(조금 누그러진다)
[딸] 그렇다면?
[아들] 음흉한 인간보다는, 쾌활하고 솔직담백한 성격이 좋디, 머.
[딸] 댕큐, 써! 오늘 밤 귀한 손님한테서 나 점수 땃는데?
[아들] 점수라니?
[딸] 점수가 점수지, 머.
[아들] 너희네 생활과 말버릇은 료해하기가 어려워서 말야 ------.
[딸] 그건 우리또 마찬가지잖아요? 아까 뭣이라고 그러더라? 아이스크림을 가지
고 얼음보숭이? 호호호-------
[아들] -------- (잠시 흐른다)
[딸] 여학교 시절에, 난 오빠 가진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그저
말끝마다 깔깔대면서 자랑스럽게 우리 오빠 우리 오빠! 우리 오빠가 말야. 이것은
오빠가 내게 해줬다? 좋지? 이쁘지? 방학 숙제말이야? 그까짓것 오빠에게 몽조리
떠넘겯지 머. 애들아 볼래? 우리 오빠가 해준 생일 선물이란말야. 그래 이것 어떻
니? 호 호------- 왜 그런 좋은. 오라버니가 내겐 없을꺄? 그런데 이렇게 하늘에
서 오빠가 뚝 떨어졌으니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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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좋아! 마찬가지로 오빠에게도 생전에 없던 누이동생 하나가 이렇게 생겨
났고말야-------
[아들] 고마운 생각이다! 그럼 그럼--------
딸 아들의 가슴에 다소곳이 안겨 춤춘다 이 모양을 외손자가 카메라에 땀는다.
"찰칵"----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 소리가 방안에서 불안하게 들려온다.
길게----------
[장] 2장
[시간] 이튿날 아침.
마루에 윤노인과 딸. 딸은 잠옷 차림으로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하고 있
고, 윤노인은 빛바랜 누런 사진 두 장을 요모조모 바라보면서 골똘해 있다. 방안
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전화 통화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도 보인다.
[윤노인] (볼멘소리로) 쯧쯧쯧! 이놈의 할멈쟁이가 정신머리가 없었구나! 제정
신이 아니었어. 누렇게 빛바랜 사진 두 장만 그냥 이렇게 보내다니,
[딸] 사진 그만 봐요, 아버지. 닳아지다 못해서 뚫어지겠수.
[윤노인] (방안에 대고) 평양에는 카메라 사진기 한대도 없었단말이냐, 그래?
이것이 뭐냔말이글쎄. 쭈글쭈글한 옛날 사진만 두 장 달랑 가지고, 엉? 사진을 보
낼 생각이었으면 옛날 것 아닌 요즘 것도 보냈어야지! 이치가 안그렇냐? 그래야만
그새 얼마나 늙었는지도 알아보고 말씀야. 자, 봐라? 화투짝만 한 이것들- 자기가
시집오기 전에 찍은 독사진이 하나, 그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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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옛날 내 할머님 칠순 생신 때 박았던 가족 사진밖에 더 돼?
[아들] ----
[윤노인] (꾸짖어) 아- 네 생각도 그렇지! 알아서 애비가 잘 챙겼어야 하는 법
아니냐? 그러니까 네 처와 손자새끼들 사진도 한장씩은 챙겨졌어야 마땅하고 말씀
야. 엉?
[딸] 호호호. 글쎄 평양 할머니가 그렇게 시키고 명령 내리셨다 잖아요? 옛날
사진만 들고 가라고 말야.
[윤노인] (사진을 다시 보며)
허허허. 그래, 맞다! 생각나고 말고 --- 여기 애비 네가 이때쯤 세살인가 네살
먹었을 때고, 이쪽 가운데서 세번째가 아마도 당숙모님일 게야. 지금 살았다면 90
도 훨씬 넘으셨을걸? (일어나서 사진을 들고 뒤꼍으로 돌아간다)
아들이 마루로 나온다. 수첩에 뭣인가를 열심히 메모하면서 ---
[딸] 무슨 전화가 시도 때도 없어요. 그래? 밤에 오고, 또 아침에 오고 ------
[아들] (건성으로) 업무 연락이디, 머. 조직생활이란 그런 것 아니겠네?
[딸] 조직생활? 아이구, 골 때려!------ (화장품을 챙기며) 그러나저러나 할아
버지는 저렇게 난린데 3박4일 동안은 너무나 짧다!
[아들] 내 방문 기간말이가?
[딸] 긴긴 이별에 짧은 만남! 무슨 단편소설 제목 같지 않수?
[아들] 얼굴 서로 대하고, 소식 알았으면 됐디, 머.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그
제서야 바라본다)
[딸] 글쎄 겨우 사흘 밤이 되느냐말야. 벌써 어젯밤 하루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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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 그러고 모레 아침엔 또 일찍감치 출발이라며?
[아들] 당국에서 정한 일정이니까니 ----
[딸] 당국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예요? 당국이 누구냔말예요. 글쎄! 내 핏줄 내
살붙이를 내가 만나겠다는데 --- 이치가 안그래, 오빠? 그저 남쪽도 북쪽도 한다
는 소리가, 맨날 "당국"이 "당사자끼리" 어찌고 저찌고 ---- 아이고, 지겹지, 머.
[아들] 허허허.
[딸] 나 담배 피워도 돼요, 오라버니?
[아들] 좋을대로 하라우!
[딸] ----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인다)
[아들] 어제 보니까니, 너 자동차 운전을 잘하더구나.
[딸] 영화의 한 씨인 같지 않습디까? 신나고 멋있었지, 머, 처음 본 낯선 남자
를 옆에 태우고 아니지. 처음 본 낯선 오라버니를 강릉 터미널에서 픽업해가지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노을 비낀 동해안 푸른 바다를 따라서 일로 북상하기 반
시간 남짓 --- 호호, 아-- 얼마나 낭만적이고 그림같이 멋져! 그래서 이곳 민통선
우리 집까지 시속 120을 놓고 달린 것 아니겠수? 유명한 낙산사를 지나고 주문진
속초 거진을 거쳐서 대진 마을 옆에 있는 저 아름다운 무송정을 발 아래 빤히 굽
어보면서 말야!
[아들] 허허--- 명순이는 시인이 되든가, 영화배우가 됐으면 좋을 뻔했구나(사
이)
[딸] 오빠! 내가 부탁 하나 드려도 돼요?
[아들] 뭘?
[딸] 이건 여자만이 갖고 있는 섬세하고도 미묘한 쎈스와 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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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인데말야. 어제밤 파티 중에, 새삼스럽게, 문득 깨달았어. 갑자기 우리
엄마가 초라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웬일이죠, 오라버니?
[아들] ----
[딸] 한쪽에선 노친네가 감격과 흥분에 젖어서 저렇게 날뛰는데, 우리 엄마는
뭐죠?
[아들] ---- (담배에 불을 붙인다)
[딸] 아마도 심한 갈등과 서글픔 속에서 뭔가 아쉽고, 어쩐지 몸둘 바를 몰라서
서먹서먹하고 어색해 해야만 하는 그런 여자 ---- 좋아요! 물론 열백번 스므번도
더 마땅히 서로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서두 말야 ----
[아들] (끄덕이며) 짐작이 가누만 ------
[딸] 그러니 부탁이예요, 오빠? 부디 여기 있는 2,3일 동안 만이라도 우리 엄마
한테 잘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들] 그래애. 내가 노력하디! 나도 요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마 행동과 사고가
잘 맞물리지 않아서 그럴 뿐이디 머.
[딸] 고마워요. 오빠--------
이때 아내가 포도 접시를 들고 부억칭에서 등장. 그녀는 나들이 차림에 성경을
끼고 있다.
[딸] (짐짓) 아- 엄마 예뻐!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우리 엄마 10년은 애뙈 보인
따. 그렇죠. 오라버니?
[아들] (어색하게) 허 허 허.
[딸] 엊저녁에도 그렇게 차려입지? 그옷 교회에 나갈때만 있는 옷이우!
[아내] 어미가 옹 입는 걸 처음 본 사람같이 수선을 떠는 구나, 너는 담뱃불 끄
도록 해라!
[딸] 미안해요. 엄마! (얼른 부벼끄고) 똑같은 옷두 분위기와 기분 따라서 다른
법이란 말예요. 아시겠수?
[아내] 자- 이것 들면서 얘기하도록 하시게. 뒤안 텃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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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것이라네.
[아들] 고맙습니다. 함께 앉으시지요.
[딸] 그래. 여기 좀 걸터 앉아요. 엄마두 ----
[아내] (앉으며) 부디 내 집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시기 바랄 뿐이네.
[딸] 엄마 그렇게 어려워할 것 없잖우?
[아들] (무심코) 아무럼요, 아주마니!
[딸] 으음- 아주마니? 호칭이 아직도 바뀌지 않았네?
[아들] --------(어색해 한다)
[아내] 아무려면 어때서--------
[딸] (스스럼없이) 비록 생모는 아니더라도 작은 어머니라고 불러야지! 그렇지
않우, 오빠?
[아들] ------(떫은 감을 씹은 맛이다)
[아내] 쓸데없는 데 신경쓰지마라, 얘야. 나는 괜찮다!
[딸] 하긴 그래! 자그만치 이산가족 1천만이 넘는 따는 때, 딱한 경우가 하나
둘이겠어요? 그렇고 그런것이지, 머. 자, 오라버니? 우리 집 포도 맛도 한번 보시
구랴? (포도 한알을 성큼 떼서 준다)
[아들] 으음. 그래. (받아서 입안에 넣는다)
[딸] 자아, 엄마두- 그렇게 내외하듯이 얌전만 빼지 말고말야. (자기 입에 먼저
넣고. 엄마에게도 준다)
[아내] -----(받아서 입에 넣고 음미하듯이 우물거린다. 사이)
[아들] ---------
[아내] (가까스로) 간밤에 잠 한숨도 못이루고 두 부자간에 애기가 길더구만!
[딸] 아이구 참, 그래. 무슨 말이 그리도 길고 많았는지, 원. 밤새껏 큰방에서
두런. 둘런 웅얼웅얼------- 그저 자다가 깨고, 깨서 또 들으면 무슨 소린지 쿡쿡
! 웃다가 이야기하다가, 만리징성을 쌓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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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고 말야. 무슨 사설이 그리도 길었수?
[아들] 이런 애기 저런 애기 되는 대로디, 머.
[딸] 하기사 40년도 넘게 쌓이고 쌓인 회포와 추억이 하나 둘이었겠수? 호호호.
(짐짓 아내에게) 모처럼 아버지하고 떨어져 딴방에서 딸하고 자려니가, 뭣인가 허
전하고 빼앗긴 기분이었지? 안그래요. 엄마?
[아내] (뱉듯이) 뱉으면 말인 줄 알고 못할 소리가 없구나! 한두 살 먹은 누굴
어린애로 알아?
[딸] (찔끔하여) 미안해요. 엄마! 여자는 여자가 잘아니까- 말야. 내가 농담이
너무 심했나?
[아내] 들어가서 옷 갈아입도록 해라! 되지못하게 허튼소리는 그만 나불대고--
----
[딸] ---------(어깨를 으쓱하며 방으로 퇴장)
잠시 흐른다. 원노인이 뒤껀의 벌통으로 다가간다. 그는 함지박을 들고 나타나
서, 모기장으로 만든 "보충망을 얼굴에 뒤집어 쓰고 하얀 담배연기를 뿜어가며 꿀
통을 벗기고 꿀을 따기 시작한다. 가만히 조용하게----------
[아내] (가까스로) 어제 처음으로 날 만났을 적에, 당신님은 무척 놀랐을 거예
요. 북쪽에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데--
[아들] 뭐,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읍니다!
[아내] 지금 철환씬 내가 밉지요? 매우 귀찮고 성가시고-----
[아들] 아- 아닙네다. 별말씀을----- 허허허. (어색하고 웃는다. 사이, 둘러보
며) 그런데, 정식인 어디메 갔읍네까?
[아내] 아마 교회에서 지금쯤 동무들하고 놀고 있을 겝니다. 오늘이 마침 주일
날이서서-------
[아들] 참, 그렇구만요. 일요일이니까니--- (사이, 대화가 끊긴다)
[아내] 이따가 저쪽 통일 전망대에도 한번 올라가 보시고, 마을도 한바퀴 둘러
보도록 하세요. 지금은 이렇게 민통선 마을이 돼놔서. 그 옛날 같지는 않을겝니
다.
[페이지] 016
[아들] 말씀을 놓으시리요? 허 허 허.
[아내] 포도 더 드십시오?
[아들] 감사하게 먹갔읍네다. 에에-- (한 알을 입에 넣는다)
[아내] --------(사이)
[아들] (이윽고) 명순이 저 아이가 남정네도 없이 홀로히 살아간다니, 고생스럽
지 않같습네까?
[아내] 젊은것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들] 왜요? 에미나가 리혼녀가 된다는 사실 불행한 일이디요!
[아내] 그까짓 신랑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굳이 울고 불고 따라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아들] 무슨 뜻입네까, 지금?
[아내] 그래서 위자료 받아가지고 저렇게 가게나 하나 꾸리면서 홀가분하고 자
유스럽게, 마음속 썩힐 필요도 없이 구속 안받아서 차라리 좋다고 말이지요.
[아들] 구속을 안받다니요? 뭘 말입네까?
[아내] 요즘 세상엔 시집 한번 가지도 않고, 혼자서 사는 독신여자들도 우리나
라엔 많답니다.
[아들] 우리 북조선 리북에선, 남녀가 한번 혼인하면 리혼이 쉽디 않디요. 더구
나 자식까지 딸렸으면 말입네다. 허 허 허! 강릉 터미날에 내렸을 적에 봤읍네다.
어제 낮에 거기서 손가락으로 이층쪽을 지적하면서, 무슨 "카케"라고 일러주드만
요.
[아내] 그럭저럭 자리는 잡혔다는군요. 단골손님또 생기고, 지배인인가 하는 사
람 하나에 다가, 심부름하는 종업원도 일곱씩이나 된다니까말입니다.
[아들] -----(머리를 끄덕인다. 또 사이)
[페이지] 017
[아내] 평양에 있는 철환씨 부인은 마음씨 착하고 고운 여자 겠지요?
[아들] (의외여서) 내 에미나 말입네까?
[아내] 아마도 미인리란 생각이 드는군요.
[아들] 고맙습네다. 허 허 허. 얼굴이 예쁘기로는, 명순이 저 아이가 내가 보기
에도 미인이드구만요.
[아내] 그럴리가------ 호 호. (가볍게 웃음)
[아들] 여자 나이 40대니까니, 나잇살 먹은 에미나가 그렇고 그렇디요, 머. 늙
어개지구 어떻다고 말할 수 있갔읍네까?
[딸] (방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고) 무슨 소리유. 오빠? 여자 40이면 아직은 한
창때라구요. 요즘 세태는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글쎄? 그까짓 젖비린내나고 철없
는 이팔청춘보다는, 뚜욱- 곰삵아 터진 중닭이 훨씬 볼거리있지, 머.
[아들] 중닭이라니?
[딸] 호 호 호. 중닭이 중딸아니우? 알맞게, 농창하게 잘 익은------
[아들] ----------?
[딸] 내 말 접수됐수까, 오라버니?
[아내] (불쾌한듯) 경망스럽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어른들 앞에서---------
[딸] 미안해요 또, 엄마! (투피스의 웃저고리에 팔을 끼며 들어간다)
[아내] 너무 무례하고, 버르장머리 없이 길렀지요?
[아들] 아닙네다. 허 허 허. 그러니까니 지어미는 "창광 유치원" 에서 일하고
있디요. 평양 시내에선 제일 크고, 그 곳 선생입네다. 그러고 큰딸년이 이곳에서
말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그 맡으로 동생 하나가 인민
[페이지] 018
중학생입네다. 그런데 키는 벌써 누님쪽 보다 남동생 놈이 더 크디요.
[아내] 마땅히 그래야만 옳지, 머.
[아들] 어쨌거나 그것들 사진 한 장씩이라도 빼개지구 왔어야 하는건데------
그러고 보니까니 아버지 말씀따나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도드는구만요.
장래에 가설람은 차차로 그렇게 발전 돼야갔디요.
[아내] ----(머리를 끄덕인가)
[아들] (새삼 생각난듯 둘러보며) 그런데 노친네는 어디매?----
[아내] 뒤껑에서 꿀을 따고 계신 모양이죠, 엄아마?
[아들] (일어나며) 벌굴을 말입네까?
[아내] 평양으로 돌아갈 때, 선물로 싸서 보내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윤노인이 꿀덩어리를 높이 치켜들고 소리친따. 마치 떠돌이 약장수가 꿀
전전하뜻이-------
[윤노인] 자--- 꿀이요 꿀 덩어리! 백화천초 진수만 뽑아다가 1년 열뚜달 숙성
시킨 토종 꿀.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설악산---- 기산영수 소부허유가 소몰고 가
다가 따먹었고 백이숙제도 고사리 캐다가 따먹고, 또 매월당 김시습이가 금강산으
로 부처님 찾다가도 따먹는 꿀이요-산후롱은 부인네 시아버지는 해소기침 시어머
니 손발 시린데도 좋고, 고혈압 당뇨병 부인병 성인병 우리 금동 애기 허약체질에
서방님 술마시기 전에도 좋고, 술취 과음 정력부족 발기부진 만병통치 특효약이요
특효약!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 순수 종합 영양제로 말할 것 같으면 꿀의 주성분
인 전화광이란 것이 소화와 분해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직접 체내에서 흡수되
기 때문에 말씀야. 어린애기에게 노인에 이르기까지 노약자 병자 현대인 가릴 것
[페이지] 019
없이 머리털 가진 인생이면 가장 이상적이고 자연적인, 합동으로 농축해서 만뜰
어 낸 최고 최상의 종합영양제, 천연 위생식품이 나왔읍니다------
어느새 딸도 등장하여 그를 바라본다. 첨단의 유형 스타일 이때 "땡그랑" 교회
의 종소리------- 아내가 마당으로 나와서 성경을 안고 머리숙여 기도한다.
[장] 3장
[시간] 두 시간쯤 뒤
윤노인과 아들이 무대 뒤 언덕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다. 노인은 그저 기쁘고 좋
을 뿐이다.
[윤노인] 허 허 허, 어떠냐? 북쪽 사람이 남쪽 땅에 와서, 이렇게 <<0>><<북>>
쪽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감상이------
[아들] ---------
[윤노인] 저 넓게, 질펀하게 퍼져 있는 하얀 갈대 꽃밭을 봐라! 늙은 할미의 하
얗고 고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잖아?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우냐.
아니, 아니다. 꼭 밤하늘의 하얀 은하수 띠가 길게 누워 있는 꼴이라구나!
[아들] 은하수는 남북으로 뻗쳐 있지만, 저것들은 유서로 길게 널려 있으니까니
다르디오. 아바지!
[윤노인] 동서쪽이든 남북이든지 다를 게 뭐냐. 하얗고 저렇게 아름다우면 그만
이지! 허허허.
[아들] 허 허 허(가볍게)
[윤노인] (다시 바라보며) 그런데 눈에 가시라고, 저렇게 아름다운 갈대밭 사이
를 가로지르고 있는 저놈의 가시철망이 항상 문제란 말씀야. 저 쇠울타리, 가시철
망말이다---
[페이지] 020
[아들] 저기 보이는 군사분계선 말입네까?
[윤노인] 그럼, 그럼. 언젠가 문뜩 떠오론 생각이다만, 저런 가시철망은 본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저놈의 철조망이란 것은 꼭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
놓고 이웃간에 벽을 쌓게한 다든지, 아니면 사람이나 짐승을 우리안에 가둬놓고
쇠울타리를 만뜰어내는 데나 소용되는 물건이란 말이다. 꼼짝 달싹을 못하게시리
저따위 차가운 가시철망은 아무짝에도 좋지 않아요. 안그러냐, 애비야?
[아들] ------
[윤노인] 허 허? 저놈의 찰조망만 보면 생각나는 게 있지! 옛날 일정때, 저 너
머 일인 왜놈이 경영하던 과수원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왜놈 주인이 어찌나
지독하고 무서웠던지, 도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 그 큰 과수원 전체를 탱
자나무 울타리로 빙 둘러치고 나서는 그것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또 탱자나무 아랫
또리에다가 삐죽 삐죽한 가시 철망을 칭칭 감아놓는 게야. 어느 해 가을인가 소학
교 때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과수원을 한번 털어 먹기로 작정을 했었지. 그러
니까 그 빨갛고 사근사근한 능금이랑 단물이 철철 흐르는 배 하며, 실컷 한 타작
할요량으로 말이다. 어둠 컴컴 땅거미질 무렵을 기다렸다가 우린 개구멍을 뚫고서
살금 살금 기어들어 갔었지. 그래 가지고 갖고 간 보재기 자루 속에다가, 우선 몇
개 따서 짇어 넣으려고 마악 했던 참인데, 귀신 같은 그놈의 영악한 세파트 개가
어느새 알아보고는 컹컹! 짖으면서 냅다 쫓아나오는
[페이지] 021
거야. 그래서 우린 질겁을 해가지고 다시금 도망쳐 나올밖 에--- 아이그머니,
날 살려라! 그냥 허겁 지겁 정신없이, 그러다가 설람은 탱자가시에 찔리고 가시철
망에 걸리고 넘어지면서 등어리 옷이 부욱-- 찢기고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간 게야.
그러자니 붉은 피가 옷에 배고, 살가죽은 터져서 아프고 쓰리고 말이다-----
[아들] 괜스레 혼만 나섰구만요.
[윤노인] 허 허 허, 그 뿐인 줄 알아? 이튿날 집에서는 또 새옷 찢어먹었다고
어머니 한테 혼찌검이 났고, 아버지께는 종아리 걷어올리고 피멍이 나도록/ 회초
리를 맞았어요-
[아들] 허 허 허-----
[윤노인] 이래 저래 저놈의 가시철망 때문에, 우린 옛날부터 손해가 많았단다.
허 허. (사이)
[아들] 무엇보다도 내게는, 저 통일전망대가 인상적이군요. 아버지!
[윤노인] 아까 너도 봤듯이 거기서 바라다보면 모뜬 것이 지척간이지, 머. 곧바
로 휴전선 너머가 금강산이고, 또한 원산 앞바다도 손아귀에 잡힐 듯하고 말이다.
[아들] (수긍하며) 그렇습니다! 큰 소리로 고함쳐서 부르면, 금세 알아듣고 손
흔들면서 달려나올 것같이 말입네다.
[윤노인] (손 나팔을 하고) "야호!" "야호" "야호"----
(긴 메아리)
[아들] ------(물끄러미 바라본다)
[윤노인] 저쪽으로 저, 끊어진 철길을 봐라! 저것이 바로 원산가는 경원선 철도
란다. 경원선이야! 그띵고 그 옆에
[페이지] 022
서 있는 커다란 입간판 글씨또 보이지? "잠자는 철마를 깨우자!" 아암-어느 날
엔가는 끊어진 철길또 따시 잇고 철마를 잠깨워서 기적 소리도 요란하게 달리또록
해야 하고 말고-----
[아들] -----(묵묵히 마땅으로 내려온다)
[윤노인] (따라 내려오며) 애길 들어봐라, 더. 그러니까 말이따. 지금 여기서
강릉 시내는 130킬로 밖에 안되고 원산 쪽이 차라리 더욱 가깝다는 게야. 그런데
도 천리가리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원--- 이것이 될 말이냐! 옛날 일정 때는 말
이다--- 재판 같은 것은 저 원산으로 먼저 나가서 받았어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속초관할이 돼 있따만 그땐 달라. 저 북쪽 함경도 원산 시에 따가 관할 법원을 뒀
으니까 말이따. 그래서 그 시절엔 그쪽 노정이 훨씬 가깝고 편리했었거뜬? ------
[아들] 아바지, 담배나 한대 태우시죠. 그만 하고---(권한다)
[윤노인] 응, 그래. 오냐! 허 허 허. (권하는 뎨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사이)
[아들] (새삼 둘러보며) 사실 내게는, 이곳이 옛날 고향땅이라고 합네다만, 별
반 회상되는 것도 없구만요. 아바지!
[윤노인] 그럴밖에 없지. 그때 너는 겨우 일곱 살 나이였으니까 말이다.
[아들] (감나무께로 가며) 이 감나무는 몇녜쯤 됐읍니까?
[윤노인] 그 감나무? 가만 있거라! 한 17. 8년쯤은 더 됐을걸, 아마? 이렇게 내
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서, 정착한 뒤에 심었으니가말이다. 본래가 옛날에도, 우
물가 바로 그자리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지금처럼 서 있었지.
[페이지] 023
아마, 십수년도 훨씬 넘고, 해묵어서 늙은 커다란 감나무였어요. 너는 기억 안
나?
[아들] --------(머리를 젖는다)
[윤노인] 그래서 가을철에는 연년이, 새가마니 이상씩 프짐하게 감을 따내곤 했
딴다. 그런 좋은 감나무가 흔적도 없이 불타 버렸어. 지난 전쟁통에-- 그래서 옛
날대로 다시금 하나 심어놓은 것 아니겠냐? 그렇게 기념으로 말이다.
[아뜰] (머리를 끄덕이며) 어마니께서 묻떠구만요. 상기또 감나무가 살아있는
지. 눈 여겨 보고 오라고 해서말입니다. 허 허 허---
[윤노인] (반가워서) 뭣이어? 니어미가 그렇게 말했어? 아니, 그런 것까지도 세
세하게 물어봐? 허 허, 신통하다! 기특하구나, 기특해. 그렇다면, 저쪽 텃밭 엎
도랑가에 서 있던 대추나무에 대해서는? 대차나무는 안물어보고?
[아들] -------(머리를 젓는다)
[윤노인] 그럴리가 있나! 감나무를 물어봤으면, 땅연지사로 대추나무도 챙겯어
야지! 안그러냐, 애비야? 허허. 그 대차나무란 놈도 내가 재차 심어놨어요. <<00
000000>> << >>
[아들] ------ 옛날같이 멀쩡하게 말이다------
[윤노인] (소매를 끌며) 우리 그쪽으로 한번 가보랴?
[아들] 괜찮습네따. 아버지.
[윤노인] 왜? 보고 싶지 않단말이냐?
[아들] 후에 보겠읍네다.
[윤노인] 가기가 싫어서?
[아들] 싫기는요.
[페이지] 024
[윤노인] (뾰료통하여) 그만둬, 이것아! 싫으면 그만둬요. 늙은 애비가 억지는
안부릴테니까. 이놈, 남의 속심또 몰라주고------(그의 손을 부리친다) 으음--
[아들] 허 허 허-------(사이) 어마니 말씀에의하면, 아버지가 38선을 넘어서
남조선으로 월남한 뒤에는, 우리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답네다. 그러니
까니 전쟁이 나면 해 봄, 온 마을 주민이 집딴이잎도 말입네다. 38선 가까운 이곳
은 중요 전략 지구였으니까니 당국의 주민 소개령에 따라서, 멀리 안전지대 북쪽
으로 북쪽으로--------
[윤노인] 쯧쯧! 그러니 나중에 내가, 너희들은 어디가서 만나보고 찾을 수가 있
겠어! 깜깜 절벽으로 소식 한자, 기별하나도 바람결에 엿뜰을 수가 없었고 말이
다. ---- 사람 팔자 운명인 게야! 지나간 세월에 모뜬 것이 그렇고 그런 것이지.
머. 안그러냐?
[아들] (냉랭하게) 처음에 아버지가 남조선으로 월남하지 않았다면 우린 리산가
족이 되지 않을 수도 었었잖아요!
[윤노인] (의외여서) 지금 무슨 소리냐?
[아들] 아버지께서 우리 공화국을 배반하지 않았으면 말입네다.
[윤노인] (불쾌하여) 뭣이라고? 가당찮은 소리는 하지마라, 이것아!
[아들] ------(말을 참는따)
[윤노인] 그땐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이었다. 일정때 애비가 금융조합 서기를
지낸일이 화근이 돼가지고, 공산땅에게 우익 반똥 불순 분자로 지목 받게 됐어요.
그러니까 나는 가만히 집에 늘어붑어 있을 수가 없었단말이다. ---------
[페이지] 025
[아들] 매국노와 친일파, 봉건지주----- 그리고 민족반역자뜰은 그 죄과를 반드
시 치뤘어야 합네다.
[윤노인] (떨며) 뭐여? 죄과?
[아들]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딴죄를 받는 것이띠요!
[윤노인] 아니,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애비가 인민재판 받고 돌팔매 맞
아서 죽었어야 옳단말이냐! 엉? 이런 못된 불효자식 같으니라구----- 쯧쯧!
[아들] 남쪽과 북쪽이 똑깥딴 말입네다. 제 말듯은 능구렁이가 담벼락 넘어가듯
이 그렇게 도망지고, 쉽사리 숨어버릴 순 없디요. 무릎 끓고 빌 것은 빌고, 과오
는 참회하고 사죄해 가면서 다시금 시작해야디요!
[윤노인] 듣기 싫어. 이것아! 으흠---(사이) 그렇다면 나도 한번 물어보자! 그
때 너희들은 왜 남쪽으로 못 따라 내려왔어? 엉?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대한민
국 국군이 북진해서 올라 갔다가 14후퇴로 남하 했을 때말이다. 100만이 넘는 북
한 사람뜰이, 업고지고 빨갱이 공산치하에서 죄다 피난길에 나섰는데 말씀야----
[아들] (지지않고) 아버지! 간밤에도 말했다시피 그때 우리 모자는 돌아가신 할
아버지 모시고 멀리 압록강변 자랑도 땅에 있었읍네다. 그 양키놈 미제의 무차별
폭격속에서도 죽을둥 살둥----
[윤노인] 뭐여, 제국주의라고? 그렇다면 저 아라사놈 로스케가 준 장갑차 앞세
우고 빨갱이가 남한 천지에 내려와서 저지른 갖은 살육과 방화, 무자비한 약탈 민
행은 또 어떻게 설명할 테냐! 이 자식아, 엉?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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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인] (꾸짖어) 몰상식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 늙은 아비한테 공산당 애길
들려줄 작정이냐, 이놈아! (부르르 떤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딸. 선글라스까지 손에 들고, 흥미롭다느듯이 깔깔 웃는다.
[딸] 호 호 호! 도둑질도 너무 이른 것 아니우? 반세기만에 겨우 하룻밤 자고,
의견충돌이라니!
[윤노인] ------(피하여 꿀통으로 간다)
[딸] 오라버니, 나가십시다? 우리 드라이브나 하지, 머. 강릉에 나가서 내 가게
도 좀 둘러보고, 적당히 쇼핑또 하고 말예요.
[아들] 혼자서 가라우!
[딸] (불쑥) 그러니까 평양 노부인께는 옷감 같은 것이 좋겠지. 오뺘?
[아들] 무시기 소릴 하네? (빤히 본다)
[딸] 과거 역사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지, 머. 슬프고 창피스럽고 후회되는 일
뜰 뿐일테니까-------- 말 뇌까리면 싸움밖에 안되고 상채기 건드리면 덧나기 밖
에 더하겠수? 작년 세계 올림픽딪말마 따나, 인류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번영이
랍니다! 호호호---- (안경 끼고 퇴장)
잠시 흐른다. 윤노인,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여다보고 또 먼 하늘을 본다.
아뜰이 그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가간다.
[윤노인] (힐끗, 퉁명스럽게) 지난 40년 동안은 니네뜰과 헤어져서 외로움과 그
리움속에 이렇듯 살아 왔다만, 내가 월남한 것 그 자체를 뚜고 후회한 적은 한번
도
[페이지] 027
없었다. 이놈아! 애비는 빨갱이 사상도 싫고, 무슨 무슨 혁명주의도 보기 싫어-
----(사이)
[아들] 꿀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많다고 들었는데, 아바진 벌꿀에 대해서는 그럼
박사시겠구만요!---------
[윤노인] -------
[아들] 어디매를 그렇게 바라봅십네까?
[윤노인] (볼멘소리로) 꾸불 끄불 저 길 따라서 탐동쪽으로 가면 진부령 고개가
나온다-------
[아들] 진부령?
[윤노인] 그래서 진부령은 넘어가면, 바로 그 아래 마을이 인제자는 곳이지. 언
제 고을말야---
[아들] 예-- 아, 인제라는 곳 말입네까? 그렇다면 명순이 에미나의 고향이겠구
만요. 간밤에 내게 말씀하신-----
[윤노인] 그럼, 그럼. 인제 땅이란다-------
[아들] --------- (사이)
[윤노인] (불쑥) 애비야. 평양에 돌아가서, 너 니어미에게 뭣이라고 할래?
[아들] 예?
[윤노인] 그렇다고 내가 언제까지나 홀애비 신세로만 살 수도 없었잖아? 평양
니어미는 날 야속하고 섧다고 여기겠지? 못된 영감이라고------
[아들] 허 허 허------
[윤노인] 왜 웃어, 이것아? 이렇게 되니까 큰각시 작은각시, 내 주제에 마누라
가 둘씩이나 된 셈이야! 사실이 안그래? 내가 무슨 기구한 팔자로말 야--------
[아들] 왜, 걱정되십네까, 아바지?
[윤노인]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떻냐! 그러니까 말이다. 애시당초 감추는 게야.
명순이나 명순어미 얘길랑 꺼내지도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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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무시하고 모른척해 버려! 제발 아무 소리도 말고-------
[아들] 아바지!--------
[윤노인] 그리고 나서는, 늙은애비 나는 지금껏 홀애비 신세가 돼 가지고, 불쌍
하게 혼자서 살아가고 있더라고 말이다.
[아들] 사실대로 밝혀야디요. 아바지. 그렇다고 거짓부정이 할 순 없지 않겠습
네까?
[윤노인] 아니, 내 얼굴은 어떻게 되고, 그럼?
[아들] 허 허 허----- (사이)
[윤노인] (조용히) 사실은 저 할멈은 아무런 잘못은 없지! 인제 고을에서 나서
거기서 자라다가, 애비한테 처녀 시집을 왔으니까말이다. 잘못이라면 어디까지나
내게 있고 명순 어미한테도 눈꼽만큼도 없어요. 사리가 안그러냐, 애비야?
[아들] 예 예--- 진정하시라요. 아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네다!
[윤노인] ----- (사이)
[아들] 요즘엔 무슨 꼴이 많습네까?
[윤노인] 계절 따라서, 아카시아도 있고, 피나무 자운영꽃 밤나무 또 있고-----
가짓수가 많고도 많지, 머.
[아들] 아카시아 꽃은 봄철에 피는 것 아닙네까?
[윤노인] 그러니까 아카시아꽃은 늦은 봄에서부터 유월달까지가 채밀기간이예
요.
[아들] 허허허! 벌꿀 종류도 한뚜 가지가 아니겠구만요.
[윤노인] 아카시아의 꽃은 향네도 좋고 맛도 있어서 먹기에 좋단다. 우리 정식
이나 철부지 애들은 피나무 싸리꿀이라면 딱 질색이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대
면서 말야. 허 허 허. 혓바닥이 톡 쏘고, 떫고 독하다고-------
[페이지] 029
[아들] -----(멀리 바라본다. 사이)
[윤노인] 그 시절 나는 군대를 갓 제대하고 마땅하게 직업도 할일도 없었다. 그
래서 우연찮게 꿀벌 장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낡은 헌 오토바이를 한대 장만해
서 벌통 서너개를 싣고 방방곡곡으로---- 꽃따라 꿀 찾아서 말이다. 꽃이 만발한
곳이 곧 내 집이요, 그 옆 천막이 바로 잠자리였다. 한겨울 지나가고 새봄이 오
면, 저 남쪽 경상도 땅으로 서둘러서 내려가는 게야. 그래가지고 장디리꽃과 자운
영 꿀을 제일 먼저 채취하고, 그러고 나서는 점차로 북쪽으로 이동해 가면서 다시
금 올라오기 시작하는 겨. 5월 중순에서 유월 초까지 아카시아꿀, 유월 중순부터
는 또 밥꿀을 따내고------ 밤꽃은 그 비릿하고 영겨운 꽃냄새가 향기라면 향기
지! 허허허. 그러다가 한여름 장마비와 함께 7월엔 오애산과 설악산에서 피나무꽃
을 보고, 또 8월달이면 휴전선 이 근방까지 북상해서 올라온다. 산지사방 숱하게
많이 피어있는 그 하얀 찾아서--- 바로 이 시기, 요즘같은 때 말이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러기 울고 찬서리 내리는 늦가을이 오면 메멜꽃과 국화꽃을 만나는
게야. 그런것은 다 잡꿀일 뿐이지, 머. 아무런 시세도 없어요. 값이 안나간단다!
허허허. 그렇게 해서 한해가 가도 또 두해 세해가 흘러가고----- 세상살이 그런
것 아니겠냐, 애비야?
[아들] 허허, 짐작이 갑네다. 그러니까니 그 인제 땅에서 벌막짓고 살다가, 정
식이 할머니를 모처럼 만나게 됐구만요.
[페이지] 030
[윤노인] 말하자면 그런셈이지 뭐, 허허허. 이야기가 어쩐지 엎길로 새버려구
나, 그만.
[아들] 아바지 고생이 많으셨읍니따레!
[윤노인] 고생이랄 것 있겠냐? 그러다가 이렇게 고향 마을에 정착하게 되고부터
는 저절로 그만둬 버렸어요. 딸년 명순이도 숙성해지기 시작해고, 내 나이도 점점
높아져서 힘도 부치고 말이다.--------- (사이) 꽃냄새라면 아마도 찔레꽃과 아카
시아 향내가 그중 으뜸일 게야. 그것들이 산과 들에 다투어 피이오로면 코를 두를
수가 없어요. 꽃향기에 마냥 취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를 않는단다! 그냥 푸욱
파묻혀서 눕고, 딩굴고, 언제까지나 그속에서 잠들고만 싶어지지. 허 허 허-----
(눈앞에 아련히 그려본다)
[아들] ------(그의 손을 잡는다. 비로소 혈육의 정을 느끼고 따뜻하게 미소 짓
는다)
부웅 부웅, 높아지는 벌소리--
[페이지] 031
[막] 제2막
[장] 1장
[시간] 그날 오후.
외손자 정식이가 평상에서 아이스크림을 함아먹고 있다. 아들은 방안에서 전화
를 받으며 수첩에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외손자] (힐끗 돌아보고 혼잣말로) 신문기자는 무엇이 저렇게 바쁘지? 어젯밤
에도 전화 오고, 아침에도 오고, 또 아까 낮에도 오고---
[아들] (전화기에 대고) 아 예. 남조선 당국입네까? 본인이 윤철환 기자올시다.
아-예예. 그러믄요. 예, 에-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네다. 그럼, 말씀하시라요. 계
속 적겠읍네다. 예예, 예------
이때, 윤노인이 사진을 들여다보며 기분좋게 등장.
[윤노인] (크게) 하하하? (밖에다 대고) 그래, 박영감 네놈 말이 맞다. 맞아요,
옳커니-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일리가 있어요! (정식에게) 외삼촌은 어디 있냐,
아가?
[외손자] (턱으로 가리키며) 제기, 방에- 전화 받아, 할아버지.
[윤노인] 전화? 무슨 놈의 전화 또 ------
[외손자] 할아버지, 신문기자는 맨날 글만 써요? 수첩에다가 쓰고 또 쓰고-----
--
[윤노인] 허허. 평양에 돌아가거든, 여기서 보고 들은대로 이북신문에 낼려고
그런 모양이지? 한가지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말이다.
[페이지] 032
허허허. 정식아! 그래도 꺽다리 박영감이 뭘 알기는 안다니까?
[외손자] 뭘, 할아버지?
[윤노인] 글쎄 들어봐라, 아가. 할애비가 이 늙은 사진쪽에 대해서 불평을 했더
니만------
[외손자] 왜?
[윤노인] 옛날 헌 사진이니까말여. 지금 사진이 아니고- 그랬더니만 박영감이
한다는 소리가 이러질 않겠냐? 평양 할머니가 이런 사진을 보내온 것은, 다 깊은
생각과 은밀한 속내가 있었다고 말이다.
[외손자] 은말한, 어쩌고?
[윤노인] 허허허. 그 뜻은 왠고 하니, 이렇다! 그러니까, 옛날 당신 서방님의
추억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을 자신의 새각시 시절 모습을 깨뜨려가지고, 그래서 실
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말씀야. 물론 자기도 나같이 흰 백발이 돼서
쭈글쭈글 늙었을 테니말이다. 이렇게 허리통도 꾸부러지고------
[외손자] 무슨 잔소린지 모르겠다!
[윤노인] 허허, 그래서 다 꿍꿍이속이 있었던 게야, 아가! (또 사진을 보며) 그
옛날 젊디 젊고, 새색시같이 고운 모습으로 당신을 기억해달라는 뜻이렸다! 이런
영약하고 귀여운 인생을 봤나. 당신은 언제나 영리하고 예뻤지. 임자는 안순하고
속이 깊어서 훌륭한 며느리감이 들어왔다고 흡족해 하셨지만, 난 성미 급하고 앞
뒤 생각이 부족하다고 해서, 종종 아버님께 꾸지람도 많이 들었단말씀야! (정식에
게) 애기야, 네놈 생각은 어떻냐?
[외손자] 에이- 사진 한장 가지고 이렇쿵 저렇쿵 ------
[페이지] 033
[윤노인] 허허허 ------
윤노인, 벌통 있는 데로 가고, 아들이 방에서 나온다.
[외손자] 그래서, 우리 집에 어제 오기 전에 어디 어디를 구경했다고, 또?
[아들] 으음- 경주에 가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이랑, 또 신라시대 왕인가 귀족인
가 하는 사람의 "천마총"이라는 옛무덤도 관람했단다.
[외손자] 그건 아까 말했잖아요, 외삼촌? 히히-
[아들] 그러고 또, 포항에 있는 종합제철과 거제도의 옥포조선소, 울산 현대자
동차, 수원에 있다는 삼성전자 등등 ------ 남조선 당국의 일정에 따라서 몇군데
를 둘러봤지, 머.
[외손자] 나는 아직은 한곳에도 구경 못해봤는데, 감상이 어때요?
[아들] (의외라는 듯) 감상?
[외손자] 북한에서 우리나라를 둘러본 소감말야!
[아들] 남조선도 꽤나 발전됐더구나. 우리가 공화국에서 듣기 보다는 ------
허허허.
[외손자] 이 아이스크림 이름이 뭣이라구요?
[아들] "얼음보숭이"-
[외손자] 으응, 그래. 얼음보숭이- 그러면 이 "땡"도너츠는요? (종이 봉지에서
도너츠를 내 보인다)
[아들] 그건 "가락지빵"이디.
[외손자] 가락지빵?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들] 동그랗게, 가락지같이 생겼으니까니. 여자 손가락에 끼는 반지 처럼 보
이지 않네?
[외손자] 히히- 자요, 외삼촌? 그럼, 가락지빵 ------ (불쑥 내민다)
[아들] 고맙다. 허허- 그래애. (받아서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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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자] (두리번거리다가) 그럼------ 마루에 있는 저 냉장고는요?
[아들] 냉장고? 그것 이름은 "냉동기"디. 냉동기야.
[외손자] (또박또박) 냉.동.기? (고개를 갸웃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
에 트랙터는?
[아들] 어디메말이냐?
[외손자] 아이- 저기 있는 산밑 들판에 말예요, 외삼촌?
[아들] 으응, "뜨락또르"------
[외손자] "뜨.락.또.르".
[아들] 왜? 뜨락또르가 맞지 않네?
[외손자] 트랙터가 뜨락또르? 그렇다면 땅을 파는, 부르릉 부르릉 부르도자는
요?
[아들] 불도자?
[외손자] 예, 그래요. 불도자-
[아들] 으응, 그래. 넌 "불도젤"을 지금 말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디?
[외손자] 불도젤이 부르도자? 히히히. 야- 재미있다, 재미있어. 말들이 참 이상
해, 외삼촌?
[아들] 이상할 것이 없디!
[외손자] 부르도자는 미국 말이고, 불도젤은 어느 나라 말이지? 소련 말?
[아들] 남조선 말은 주체성이 없고, 외세에 의한 오염과 변질이 너무 많이 됐
어, 애.
[외손자] 에이, 똑같네, 머. 소련 말이나 미국 사람들 말이나 ------
[아들] (순간 당혹감으로) 뭐래?
[외손자] 히히히. (사이. 아들, 담배불을 붙인다)
[아들] 그러고 보니까니 너희들은 칙간을 "화장실"이라고 부르더구나.
[페이지] 035
우리네는 "위생실"이라고 그러디.
[외손자] (신기한듯) 히히, 위생실?
[아들] 그러고 텔레비죤 광고에서 본 여자 화장품 말도 우리네와는 쌩판 엉뚱하
게 다르고 말야.
[외손자] 화장품 선전말이죠? 가만 있어봐. (벌떡 일어나서 광고 흉내로) "맨담
! 사나이의 향취, 사나이의 야망- 맨담!" 이런 것들 말이죠?
[아들] 아암- 그럼. 하하하. 뭐라고 그러더라? "인삼살결물"을 너희네는 스킨로
숀이라고 부르고, 그러고 또 있디? 거, 왜?------
[외손자] 크림로숀?
[아들] 그래, 그것- 그것은 "인삼물크림"이라고 그런단다.
[외손자] 그러면 여자들의, 이렇게 부글부글 파마머리는?
[아들] 파마머리? 그야 "볶음머리"가 맞디.
[외손자] 히히, 볶음머리?
[아들] 그러고 아침에 정식이 어마니가 입고 있던 양장옷 있디? 남자 양복 같은
------
[외손자] 그것을 뭐라더라? 투,투 ------
[아들] 어쨋거나 그런 옷은 위아래가 별도로 떨어져 있으니까니 "공강옷"이 되
고, 위아래가 하나로 붙어서 된 것은 "외동옷"이라고 말야. 그러고 또 많디, 머.
저 도시에 가면 5층 10층 짜리 아파트라는 것도 말이다------
[외손자] 응, 아파트?
[아들] 아파트가 아니고, "고층살림집"이디.
[외손자] "고층살림집"?
[아들] 집 자체가 이렇게 높이 서있어서 고층으로 돼있으니까니말야!
[페이지] 036
안그런네?
[외손자] ------ (알듯모를듯 끄덕인다)
[아들] (짐짓) 내 말뜻을 "접수"하겠네?
[외손자] 접수?
[아들] 그래. 잘료해( )할 수가 있겠느냔말이다.
[외손자] 뭐뭐, 료 --- 해?
[아들] 허허허. 힘 드는 모양이구나. 그렇디?
[외손자] 아이고, 복잡해!
[아들] 복잡할 거야 없디. 배우면 되니까니.
[외손자] 히히. 이렇게 나가다가는 진짜로 중국사람하고 미국사람끼리 만나는
꼴 되겠네, 머. 안그래요, 외삼촌?
[아들] 허허허. 민족문제를 해결하자면 문제가 한두 가지 아니겠지! 모든 구석
구석에 ------
[외손자] 외삼촌, 우리 무슨 놀이 할까?
[아들] 놀이?
[외손자] 응, 생각났다! 우리 미꾸라지 잡으러 가요. 미꾸라지? 저 냇가 도랑으
로 말야. (위에 대고 할아버지! 할아버지, 빨리빨리 내려와 봐? 도랑에 나가서 미
꾸라지랑 붕어 잡게- 외삼촌, 삼태기 들고 붕어 잡고, 피라미도 잡고 말야. 엉?
[아들] ------
[윤노인] 허허, 옳커니- 우리 새끼가 생각 한번 잘해냈다! 그래, 물고기나 한번
잡도록 하자. 어떻냐, 애비 생각은? 옛날같이 삼태기로 말이다.
[아들] 좋을대로 하시디요! 허허.
[외손자] 야- 신난다. 물고기 잡으러 가자!
[페이지] 037
[윤노인] 암- 그렇지. 미꾸라지 압아서 가을 추어탕 끓이면 별미고 말고 허허
허. 가만 있거나! 그렇다면, 소쿠리 하고 삼태기부터 우선 챙겨야 해요. 안그러
냐, 애기야?
[외손자] 소꾸리는 내가 챙길께-
[아들] ------ (빙그레 웃는다)
윤노인이 뒤안으로 들어가고, 외손자는 부억으로 뛰어간다. 아들이 그들의 뒷모
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
[장] 2장
[시간] 세 시간쯤 뒤.
아내가 수도가에서 그릇을 씻고, 또 펌푸질하고 있다. 아들과 외손자가 떠들고
웃으며 등장. 외손자는 플라스틱 바께스를 들었으며, 삼태기와 대바구니는 아들이
들었다. 두 사람 크게 웃음-
[외손자] (소리) 히히히. 할머니! 할머니-
[아들] (소리) 정식아, 무거워 외삼촌하고 바꿔서 들어야디!
[외손자] (소리) 하나도 안무겁단말야.
[아들] (소리) 하하하-
[외손자] 할머니, 미꾸라지 잡았다. 자, 봐요? 붕어도 몇마리 잡고 ---
[아내] (쫓아가 받으며) 아이고, 많이도 잡았구나! (다시 수도가로 가져온다)
[페이지] 038
[외손자] 빨랑빨랑 미꾸라지국 끓일 준비하래요. 할아버지가. 히히, 추어탕말
야.
[아내] 할아버진?
[외손자] 으응, 곧 뒤따라와요. 저기-
[아들] (정식에게) 삼태기와 바구니는 어디메 둬야디?
[외손자] 줘요. 내가 갖다 놓을께. (받아서 집 옆으로 치운다)
[아내] 이리 와서, 얼른 씻어요?
[아들] 허허, 도랑물에 대강 씻고 왔읍네다. 정식아, 이리 오라우. 넌 씻지 않
았으니까니, 외삼촌이 씻어줄께.
[외손자] (다가와서) 할머니, 할머니.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해 줄까?
[아내] 응, 뭣인데?
[외손자] 잘 들어봐요. 외할머니? 으음- 아까 미꾸라지 잡으면서 할아버지가 그
랬거든? (흉내까지 내며) 으응, 그렇구나.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허허허 --
---- (아들에게) 히히, 이야기할까, 말까?
[아들] 해도 괜찮디, 머. 거짓부리로 나쁜 얘기는 아니니까니. 허허.
[외손자] 그러니까 옛날에 외삼촌이 쬐끄만 애기였을 때말야. 이렇게 나보다 훨
씬 작은 ------ 그래가지고 오늘같이 할아버지가 외삼촌 데리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었대나? 너는 꼬마니까 꼼짝말고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만 하라고- 그랬었는
데말야. 히히- 할아버지가 삼태가 갖고 요리저리 도랑물을 뒤지면서 한참 고기를
몰고 있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더라는 거야. (흉내로) "아버지 아버지,
고기 잡았다. 고리 잡았다, 나도-" (혀 짧은 소리로 흉내). 그러면서 두 주먹으로
이렇게 긴 물건
[페이지] 039
을 꽉 움켜쥐고 있더라고 말야. 열심히 꿈틀꿈틀 ------ 그것이 뭐게, 할머니?
[아내] 글쎄다 ------ 작은 뱀이었던 모양이지?
[외손자] 그래애, 뱀은 뱀인데 무슨 배암?
[아내] 무슨 배암이라니?
[외손자] 히히. 새끼물뱀이었단말야. 새끼물배암!
[아내] 저런! 호호(가볍게 웃는다)
[아들] 허허허.
[아내] 그만 씻어라, 정식아.
아내, 바께쓰와 그릇을 챙겨서 부엌으로 총총히 퇴장. 아들이 물을 퍼서 정식의
손발을 다정하게 씻어준다. 새삼스럽게 솟아나는 따뜻한 인정-
[아들] 가만 가만! 종아리를 깨끗하게 씻어야디.
[외손자] 에헴, 기분좋다! 발도 씻어주고- 히히, 발바닥은 간지럽단말야!
[아들] 그래그래, 알갔다! (사이) 자, 됐다. 방에 가서 수건으로 닦아라. (꼬마
를 번쩍 안아서 마루에 올려다 놓는다) 아이구, 정식이가 통통하게 무겁구나!
[외손자] (자랑스럽게 명령하듯) 고무신도 씻어야지, 외삼촌? 명령이다, 명령!
[아들] 예에- 잘 알갔습네다! 허허-
[외손자] 히히히. 기분 나이스다.
외손자, 방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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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고무신을 대강 씻어서 토방에 갖다 놓고 평상에 걸터앉는다. 그 사이 윤
노인이 토란대를 한아름 안고 등장하여 부엌 앞으로 간다.
[윤노인] (혼잣말로) 상추쌈에 된장이고 비빔밥 고추장이라고, 추어탕에는 반드
시 토란대가 들어가야만 제격이지. 옳은 맛이 나는 게야. 임자, 그래서 토란대 좀
베어 왔소. 자- 받아요?
[아내] ------ (부엌에서 받는다)
[윤노인] (마루로 가며) 얼큰 하고 맛있게 잘 끓여 봐. 그래야만 애비가 평양에
돌아가거든, 임자 솜씨 자랑도 할 수 있게끔 말씀야. 거, 테레비에 나오는 "맛자
랑 멋자랑" 같이- 허허허.
[아들] (새삼 다정하게) 아바지, 피곤 하시디요? 오늘은 이것저것 저땜에 ----
--
[윤노인] 아니다, 무슨 소리! 늙은 애비는 기분만 좋아요. 허허허. (담배에 불
을 붙인다. 사이) 지금은 이렇게 민통선 마음이 들어서 있다만, 지난 전쟁때는 최
고 격전지 중의 하나였어요. 여기도-
[아들] 동서로 휴전선 부근이 격전지 아닌 곳 있었겠읍니까?
[윤노인] 아까 우리가 고기 잡을 때 얘기했던, 그 새까맣게 초라하고, 다 늙어
빠진 느티나무말이다. 그것 하나만 전쟁통에 살아남아서, 그래도 오늘날까지 없어
지지 않고 버티고 서있는 것이란다! 아마도 그 느티나무는 니어미도 기억해낼 수
있을걸? 옛날에는 냇가 물줄기가 그 무성한 나무 밑으로 흘러가서, 마을 아낙네의
좋은 빨래터였으니까말야. 벌거숭이 동네 꼬마들이 멱도 감고------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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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정식이 어민, 오늘은 가게에 나가서 잡네까?
[윤노인] 아니다. 그럴 리 없지. 내가 심부름 시킨 것도 따로 있고 ---
[아들] ------ (기자 수첩을 꺼내서 뭣인가 적는다)
[윤노인] (약간 비위에 거슬려) 신문 기자는 시도 때도 없이 바쁜 직업이냐?
[아들] 생각나는 점이 있어서말입네다.
[윤노인] 내 말을 적는겨, 지금?
[아들] 아, 아닙니다, 아바지! 다른 것입네다. 말씀 하시디요. 듣게- (사이)
[윤노인] (개의치 않고 혼자 생각에)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전투를 했으
니까 말이다만, 밤낮없이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 때문에, 집과 농토는 고사하고 풀
한포기 돌멩이 한개도 제가리에 남아나는 것은 없었단다. 온통 폐허와 잿더미로
변하고, 썩는 시체가 언덕이 되고 흐르는 핏물이 냇가를 이루었어. 들리느니 까욱
까욱 까마귀 울음소리와, 아파서 울부짖는 젊은 병사의 고통의 소리뿐- 승냥이와
늑대가 울어대는 적막한 밤이면, 토치카에 엎드려서 정말 외롭고 무섭고 미칠 것
만 같았어요. 차라리 콩 볶듯하는 전투때가 더 괜찮아. 피안간에 한뼘 한치 땅을
놓고서 밀고 당기며, 죽을둥살둥 빼앗기고 빼앗 는 싸움질이었으니까. 휴전협정
불과 한달 남겨놓고서는, 문자 그대로 매일매일 이 지긋지긋한 혈투였다. 밥은 싫
소! 우리에게 총알을 주시오 하면서- 그러니까 옛날 모습같은 것은 찾아볼래야 찾
아볼 수가 없는 곳이다, 여기는. 저쪽 너머로 월비산 옆에 351고지라는 것 있어
요. 본래는 해발 356미터였는데, 산 봉우리가 5미터나 깎아져서 붙여진 이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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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 아니냐? 허허허-
[아들] ------ (가만히 일어나서 하늘을 본다)
[윤노인] (은근히 자랑스럽게) 애비야! 너한테 미리 귀띔 하나 해주랴? 오늘밤
자고 내일은 말이다. 우리 온가족이 자동차 타고 나가서, 속초 바닷가엘 가기로
했어요. 펄펄 뛰는 생선회도 먹어보고, 설악산이랑 낙산사, 강릉 오죽헌과 경포대
도 한바퀴 돌아보고 말이다. 오래비 너와 우릴 위해서 명순이가 짜놓은 스케쥴이
라는 게야. 허허허------
[아들] 공중에 벌떼가 날고 있구만요!
[윤노인] ------ (하늘을 올려다본다. 두 사람 공중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들] 어디메까지 날디요?
[윤노인] 반경 4킬로니까, 십리만큼씩이란다.
[아들] 꽤나 멀리 날 수가 있구만요, 그러면-
[윤노인] 그럼, 그럼.
[아들] 춤추는 것 같디요?
[윤노인] 멋있어 보이느냐?
[아들] 예에- 처음 봅네다, 저는-
[윤노인] 꿀벌은 유익한 벌레고 말고- 나무한테는 열매 맺게 결실을 도와주고,
인간에게는 꿀까지 제공해 주고 말이다. 각종 영양분이 골고루 들어 있어서 건강
과 미용에 필수적이며, 가장 이상적이고 자연적인 종합영향식품이예요. 허허허---
---
[아들] 저것들이 방향을 바꾸고 있읍네다! 아바지, 어느 방향입네까?
[윤노인] 휴전선 쪽 아니냐? 가시철망이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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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못돌아오면 어드렇게 하디요?
[윤노인] 무슨 소리냐! 꿀벌세계에도 가시철망이 있다던? 마음대로 넘나들 수가
있단다!
[아들] 꽃 찾아서, 꿀 찾아서입네까?
[윤노인] 아니다. 꿀 찾아서 꽃 찾에서지!
[아들] 그럼 두 개가 모두 맞구만요.
[윤노인] 허허허. 꽃도 보고 꿀도 따고, 꿀도 보고 꽃도 따고 ------
이때, 자동차 멎는 소리와 "빵빵" 경적 소리- 외손자가 뛰쳐나가서 맞아들인다.
선물 꾸러미를 한아름 안고 등장하는 딸-
[외손자] 엄마다, 엄마!
[딸] (소리) 자- 이것부터 받아, 얘.
[외손자] (소리) 무슨 보따리가 이렇게 많아, 엄마?
[딸] (등장하며) 보따리는 무슨 보따리? 선물 꾸러미 아니니? (마루에 쏟아 놓
는다)
[외손자] 히히 ------
[딸] 엄마! 우리 엄마 어디 있수?
[외손자] 할머니 부엌에 있단말야.
[딸] 아이고, 힘들어! (마루에 털썩 앉는다)
[윤노인] 우리 딸 수고가 많았구나! 허허허. (아들에게) 네 처랑 평양집에 보내
줄 물건들이란다. (마루쪽으로 다가간다)
[아들] (그대로 선채) 불필요합네다, 그 따위 것들은! 뚱딴지같이 무슨 ------
(곤혹스럽다)
[페이지] 044
[윤노인] ------?
[딸] (의외여서) 아니, 무슨 소리유? 선물이 필요없다니!
[아들] (꾸짖어) 명순이 넌, 쓸데없는 짓거리 제발 그만두라우! 시키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은 그따위 일은 왜 하네?
[딸] 뭐야, 오빠? 아니, 정말 ------
[아들] 지금 난 북남기자 교류 계획에 따라서 취재차 왔어요. 그러다가 아버지
를 만나러 잠시 방문했을 뿐이고 말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구------
[아내] (어느새 등장하여) 오는 정 가는 정! 선물이란 받는 사람 기쁘고, 주는
사람도 기분 좋은 것 아니겠나? 아침에 아버지 하고 의논해서, 내가 정한 일이라
네!
[외손자] (천진스럽게) 싫으면 나 줘요, 외손촌? 몽땅 내가 가질 테니까- 히히.
[아들] ------ (말을 더 하려다가 참는다)
딸이 윤노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장] 3장
[시간] 잠시 뒤.
평상에 모여 있는 가족들. 선물 꾸러미를 풀어헤쳐 놓고, 딸을 중심으로 모두
둘러서 있다. 아들은 마루에 앉아서 메모하는 일에 열중이다. 거의 관심없다는 듯
이-
[페이지] 045
외손자가 옷감을 자기 몸에 걸쳐 보며.
[외손자] 야- 옷감 멋있다. 엄마. 히히, 이것은 누구 것이야?
[윤노인] (흡족하여) 허허허.
[딸] 아이구, 헷갈려! 수선떨지 마, 너는 좀? 그것 이리 줘. (뺏는다)
[외손자] 내 물건은 없어?
[딸] 넌 해당사항 무야, 얘.
[아내] 아가, 나중에 너는 사다 준대요. 더 좋은 물건으로-
[외손자] 에이! 스냅사진이나 나는 찍어야겠다. 히히. (카메라를 들고 적당한
때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찍는다)
[딸] 엄마, 색깔 어때요? 은회색 빛깔- 고상하지?
[아내] 그래, 좋구나.
[딸] 그러니까 들어봐요? 평향 할머니는 한복감 치마저고리 한 벌을 뜨고, 은회
색 이 실크는 최고급 짜리란말야.
[아내] (머리를 끄덕이며) 모처럼 인사 옷인데 그래야지.
[딸] 그러고 올케에게는 말야 ------ (돌아보며) 오라버니, 이리 와 봐요? 응?
[윤노인] 그만하고 가까히 오너라, 애비도- 물건 구경도 좀 해야지! 허허.
[아들] ------ (묵묵무답)
[딸] 아버지, 올케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준비했지, 머. 이렇게 모직 양장이 한
벌에다가, 캐시미아 오바감이 하나 더.
[아내] 어느 것이 어느 것이냐?
[딸] 아이, 엄마두- 구별도 못해요? 베이지색 이것이 양장지이고,
[페이지] 046
당연히 오바감은 이쪽 진초록색 아니우?
[아내] 그래, 그래. 호호호.
[딸] 이 베이지색도 멋있지? 지금 가을에 입고 내년 봄에도 있게말야.
[아내] ------ (머리를 끄덕인다)
[딸] 엄마, 오바감은 사실은 보라색 계통에 유행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초록색
좋아하니까, 내 마음대로 진초록으로 끊었지, 머. 아니면, 초컬릿 색보다 좀 얕은
것으로 연밤색을 선택할까도 했었지만말야. (건너다보며) 오빠, 이 컬러는 어때
요? 괜찮지?
[아들] ------ (잠시 바라볼 뿐이다)
[딸] 정말 무심하게 그러기유? 남의 진심도 몰라주고- 진짜 그렇다면, 나 화낼
거야?
[아들] ------
[딸] (혼잣말처럼) 모처럼 기분내서 쇼핑 한번 했지, 머. 생전 처음 만난 오라
버니 덕분에- 호호호.
[아내] 그러고 아들과 딸은?
[딸] 으응, 참! (호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며) 남자조카한테는 머슴애니까 이
전자 손목시계. 또, 여자조카는 이렇게 트랜지스터 하나 샀어요. 여학생은 카세트
라디오가 진짜 필요하단말야. 고요한 밤에 음악감상도 하고, 학교에서 영어회화
공부도 하고 말예요.
[외손자] (불쑥] 이북에선 소련말이야, 엄마!
[딸] 뭐야? 네가 어떻게 알아?
[외손자] 난 안단말야. (쫓아가서) 그렇지, 외삼촌? 거기서는 소련말------
[아들] 그래, 맞다. 공화국에선 로서아어가 필수과목이디!
[페이지] 047
[외손자] 엄만 몰랐지? 히히-
[윤노인] 허허, 우리 정식이가 똑똑하구나!
[딸] 그래. 그렇다치고- 하여튼 소련말이든지, 미국말이든지 ---- 어차피 배우
기 힘들고, 똑같이 귀찮은 것은 외국어지, 머. 안그래요, 오빠?
[아들] ------ (그제서야 다가와서 엉거주춤한다)
[딸] 여학교 때 난 영어시간이 제일 싫더라 ------
[아내] (끌어당기며) 여기, 이것들은 또 뭐냐?
[딸] 으응, 쉐타 두 개예요. 두 조카들 하나씩 껴입으라고 말야. 적당한 것으로
샀지, 머. 평향은 북쪽이니까 여기보다도 겨울에 더 춥다며? 오빠, 그래요 안그래
요?
[아들] ------
[딸] 그러고 오빠 것 생각해 봤는데말야?
[아들] 선물 같은 것은 필요 없다니까-
[딸] 호호호. 글쎄 남자 사이즈를 도대체 내가 알아야 말이지? 와이사쓰랑 넥타
이 양말, 셋트로 깃차게 뽑아줄 테니까 걱정말아요, 오빠. 입센로랑이나 크리스찬
디오르로 말야. 아버지, 됐어요? 이만하면 ------
[윤노인] 딸이 고맙다! 아암, 흡족하고 말고- 하하하.
[딸] (다른 봉투에서 여자 핸드백을 꺼내 들며) 엄마! 그러고 이것은 엄마 것.
엄마 위해서 특별히 하나 샀어요.
[아내] 그것이 뭣이냐?
[딸] 보면 몰라? 여자 핸드백-
[아내] 핸드백을?
[딸] 선물 고르다 보니까 생각이 떠올랐어. 엄마 엄마, 들어봐요?
[페이지] 048
아침에 내가 보니까 말야. 그 성경책 손으로 끼고 다니지 말고, 이렇게 백속에
넣어서 갖고 다녀요. 노래책이랑 두꺼운 성경책도 ------ 얼마나 편하고 좋아요?
그러고 멋도 있구- 앞으로 겨울철엔 손도 안시리고 말야. 시내에서도 보니까 다른
부인네들도 많이 그러든데, 머. 받아요? 자아-
[아내] (짐짓 사양하며) 나야 괜찮다! 손가방 없어서 교회에 못 다니려구!
[딸] 아이, 엄마두 참! 한번 들고 서 봐요? 이렇게-
[아내] 얘는 무슨 ------
[딸] 자아- 어서요? 얼마나 우리 엄마 폼나고 멋있는가 보게- 호호호.
[아내] ------
[딸] 진짜 말 안듣기야, 엄마? 뭐가 부끄러워서 그래요?
[아내] 부끄럽기는 ------ 호호호.
[아들] 손에 들고 서 보시디요, 머.
[아내] ------ (가벼운 흥분과 기쁨까지 느끼며 이러저리 흔들어 본다)
[아들] 허허, 보기가 아주-좋습네다!
[딸] 그래, 그거야! 얼마나 세련돼 보이우? 호호. 그렇지, 아버지?
[윤노인] (불쑥) 늙인이가 핸드백은 무슨 ------
[딸] 아이, 아빠!
[아내] ------ (그대로 선채 파르르 떤다)
[윤노인] 허허허 ------ 기왕이면 그것도 평양 올케한테 보내 버려라. 핸드백은
젊은 사람들이나 들고 다니는 것 아니냐?
[딸] (골이 나서) 진짜 이러시기예요? 천방지축 아버지 기분 대로 ---
[윤노인] 내 말이 어때서? 허허허 ------
[페이지] 049
[아내] (단호히) 아버지 말이 맞다! 나 같은 못난년이 이런 것 들 자격이나 있
겠냐! (내버리듯 평상에 놓는다)
[딸] 아이, 엄마!
이때, 방안에서 요란한 전화벨 소리. 모두 침묵-
[외손자] 전화 왔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받는다. 소리) 예, 예예- 맞습니
다. 그런데요? 예? 평양에서 온 우리집 외삼촌말이죠? 윤.철.환씨 ------
[아들] (황급하게) 가만! 정식아, 나다 나야요. (부리낳게 방으로 간다)
[윤노인] (외손자에게) 누구냐, 아가?
[외손자] (마루끝에 털썩 주저앉으며 시큰둥하게) 모르겠어! 무슨 당국이라나?
[윤노인] 어느쪽 당국? 남한이냐, 북한이냐?
[외손자]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할아버지? 급한 일이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는
데- 돼지 소리같이 ------
잠시 어색하고 불길한 분위기-
[아내] (떨며) 어찌 그리 야속하고 섭섭한 말씀만 골라서 하십니까! 아무리 애
를써도 참을 수가 없군요!
[윤노인] 무슨 말 하는 거요. 당신?
[딸] (싸늘하게)아버지가 너무 하셨어요. 글쎄 엄마 심정과 기분도 이해하셔야
죠! 좀-
[페이지] 050
[윤노인] (오히려 대수롭잖게) 그까짓 핸드백 하나 때문에? 허허허. 임자가 아
침에 못먹을 것을 먹은 모양이구만! 왜, 갑자기 시샘이라도 났어?
[딸] 뭐예요, 아버지? 도대체 평양 사람들이 지금 우리한테 뭐냔말야! 이제와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들이 뭔데 우리집에 나타나서, 잔잔한 호수에 돌
멩이를 던져! 안그래요, 아버지?
[윤노인] (거슬려서) 뭣이라고? 돌멩이 ------
[딸] 단되겠어요, 아버지! 엄마에게 빨리 사과하세요. 그것도 정중하게말예요.
사과해요, 아버지!
[윤노인] 듣기 싫어, 이것아! 아니, 너희들 모녀가 늙은 애비한테 지금 공박한
셈이냐? 으흠- (마루로 간다)
[딸] (다가가서 아내에게) 미안하게 됐어요. 아버지 대신으로 사과할께! 내가
괜히 사가지고 와서 ------ 엄마의 심난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난 위로하고 싶었단
말이야.
[아내] 그래, 고랍다. 마음을 한사코 넓게 써야 한다고 아무리 속으로 타일러
봐도,그렇게 잘 안되는구나! 아버지 말대로 다 늙어가지고 시샘인지 아닌지 ----
--
[딸] 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엄마.
[아내] 어미의 한평생이 헛세상을 살아온 것만 같아서말이다.
[딸] 어느 미친년이 한 사내의 허깨비만 붙들고 일생을 살아왔다면, 너무나도
소름 끼치고 무서운 일일 거예요. 얼마나 공허하고 보잘 것 없는 삼이었느냔말야.
지금까지 그것이 삶의 전체인양 한껏 살아왔는데, 어느 날 유리 파편처럼 산산조
각으로 깨져 버리는 현실을 눈앞에 놓고는, 그 당혹감과 비애와 절망감말야.
[페이지] 051
그건 한없이 허망하고 너무 너무 처량한 일이지, 머! (울음을 씹으며 그녀를 끌
어안고) 괜찮아요, 우리 엄마!
[아내] ------
[딸] 엄마, 딸이 이렇게 있지 않우?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신경쓰고 피곤
해서 그래. 제발 염려말아요. 글쎄 괠찮다니까? ---
[아내] ------ (딸에 안겨서 부엌으로 들어간다)
[아들] (동시에) 예, 예! 명심하고 알갔읍네다. 지금 그런 결정이 양쪽 당사자
끼리의 합의사항입네까? 예, 예- 그럼 만발 준비하고, 기다리도록 하갔읍네다!
[윤노인] (돌아보며) 뭣을 기다린다는 말이냐?
[아들] 별일 아닙네다, 아바지! (사이)
이윽고, 아들이 웃저고리와 손가방을 챙겨들고 총총히 나온다.
[아들] 아바지, 미안하게 됐습네다. 당장 돌아가야겠읍네다.
[윤노인] 돌아가? 아니 ------
[아들] ------ (신발을 신는다)
[윤노인] 어디로 말이냐, 애비야?
[아들] (섭섭함을 감추고) 당국에서 저를 데릴려 온다누만요. 저밖에 ------
[윤노인] 누가 그래?
[아들] (돌아보며) 어디를 가셨읍네까?
[윤노인] 글쎄 어느 것들이 그런 헛소리를 해!
[아들] 웃사람 ------ 당국의 지시와 상부 명령이디요, 머. 미안합네다, 아바
지!
[윤노인] 그렇게는 못한다!
[페이지] 052
[아들] 예?
[윤노인] 당국이란 작자가 대체 누구냐? 상부란 데가 어디에 있어? 엉?
[아들] ------
[윤노인] 애시당초 약조가 틀렸잖아? 3박 4일이란 말이다. 3박4일간 ---
[아들] 일정은 변경될 수도 있디요. 제도와 조직사회에선 흔한 일입네다. 어느
쪽에서든지-
[윤노인] 겨우 하룻밤 새고 나서 훌쩍 떠나버리겠다는 말이냐? 이런 미친 것들
------ (바르르 떤다)
[아들] 아바지?
[윤노인] 듣기 싫다, 이것아! 생이별 40년만에 하룻밤새이라니 말이 돼, 이놈
아?
[아들] ------
[윤노인] (어처구니 없다는듯) 허허, 맹랑한 일이다. 오래 살다가 보니까, 별
해괴망측한 꼴을 당하는구나! 철부지 애들 장난질도 아니고 말여.
[아들] 아바지께서 리해하셔야 할 일입네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국이 ------
[윤노인] 당국 당국 찾지 마라, 이놈아!
[아들] 아바지, 용서하십시오! 호상간에, 우리가 만나봤으면 됐디요, 머. 정식
아? 정식아! 정식인 어디메 있네? ------ (둘러본다)
이때, 자동차의 크랙숀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윤노인, 벌떡 일어나서 무대
앞으로 나오며.
[윤노인] 가만 있거라!
[페이지] 053
[아들] 아바지?------
[윤노인] 잠자코 있어! 내가 사정해 볼테니까 ----- (객석에다 대고) 여보시오
들! 늙은놈이 사정 한번 합시다. 엉? 당국이 일단 약조를 했으면, 마땅히 그렇게
지켜야지. 안그렇소, 여러분? 3박4일, 3박4일! 그 까짓 나흘간 말미가 얼마나 대
단하고 그리도 길어서 ------ 눈 한번 찡긋할 사이밖에 더 돼? 그러니까 오늘 저
녁자고 내일밤 자고 나면 또 끝이란말야. 익히 아다시피 늙은 애비는 지금 40년
만에 만나보는 자식새끼입니다. 이런 꿈같은 사건이 다시 생겨날 수 있겠소? 내가
죽기 전에 어느 세월에 다시금 말야! 그런데 아무리 도깨비 같은 세상이기로, 그
까짓 쥐꼬리만한 시간을 주었다 빼았다, 엿장수가 가위질 하고 썩은 무우쪽 베어
내듯이, 싹뚝 단칼에 잘라버려요? 불과 단 하룻밤새로 말야. 여러분 안됩니다. 절
대로 그것은 못해요. 도저히 용납될 수가 없읍니다! 저기 저 팔짱끼오 편안하게
앉아 있는 높으신 양반들! 경우가 안그렇소? 허허허. (무릎을 꿇고) 가자- 높으신
어른들! 한번만 여러분 봐주십시오. 약속은 약속이었으니까, 제발 지켜주십시오!
늙은것 내가, 무릎꿇고 두 손발로 이렇게 빕니다! ----- (빈다)
[소리] ------ (재촉하는 크랙숀 소리)
[아들] 침착하시라요, 아바지!
[윤노인] (번쩍 고개를 들고) 뭣이어? 지금 꼭 데리고 가겠다고? 안된다! 여기
는 내 집이고 내 땅이어! 내 문전에 한발짝이라도 들어서선 안된다. 글쎄 못해,
이것들아! (크게 고함친다)
[소리] ------ (또 크랙숀과 소음)
[페이지] 054
아내와 딸, 외손자가 뛰쳐 나온다.
[아내] 여보!
[외손자] 할아버지 ------
[윤노인] (홀린듯) 이런 처죽일 것들 봤나! 글쎄 안된다니까? 여기는 내 집이
다. 문안이란말여, 이놈들아! (뒤로 밀려나며) 아니, 이놈들이 구둣발로 마구 짓
밟고 들어오는구나! 좋다, 그래, 엉? 해볼테면 해봐라. (벌통 있는데로 밀리며)
이런 고약하고 버르장머리없는 것들. 에라, 이놈들 당해봐라! ------ 당해봐, 이
놈들아!
윤노인, 벌통을 불끈 들어서 깨뜨려 버린다. 무대 가득히 벌떼 소리와 벌떼의
공격. 혼돈과 비명의 일대 아수라장- "윙윙 윙윙" ------
[윤노인] (소리) 이놈들아, 맛을 봐라! 따끔한 맛 좀 봐요! 하하하-----
[장] 4장
[시간] 석양 무렵.
저녁놀이 붉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마루 기둥에 기대어 초연히 앉아있는 윤노
인. 딸은 평상에 엎드려서 하얀 종이쪽에 뭣인가를 적고 있으며,
[페이지] 055
조금 떨어져서 외손자. 그러고 평상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아들의 손가방. 아들
이 윤노인에게 큰절을 올린다. 그 사이 아내는 보자기로 싼 작은 꿀단지를 안고
방에서 나와, 손가방 옆에 갖다 놓는다.
[아들] (꿇어앉아) 아바지, 부디 건강하시라요!
[윤노인] ------ (외면한 채 말이 없다)
아들, 마당으로 내려온다. 딸에게 다가간다.
[아들] (내려다보며) 다 적었네?
[딸] ------ (종이쪽지를 내민다)
[아들] (받아들고) 그래. 이렇게 목록을 적으면 되디, 머. (읽는다) 평양 큰
어머니:한복옷감 한벌, 은회색 실크- 실크는 누에고치, 명주옷감이란 말이디? 비
단견직말이다. 올케:모직 양장지 한벌, 베이지색 투피스와 캐시미아 오바감 한벌,
진초록색-캐시미아란 무슨 말이가?
[딸] (설음을 참으며) 양털로 짠 털옷이야.
[아들] 으응, 털옷감- 큰조카:카세트 라디오와 쉐타 하나- 작은조카:전자손목시
계와 쉐타 한개- (사이) 이만 하면 됐다! 꼭 물건을 받아야 맛이간? 내가 잘 말로
전할 테니까니.
[딸] (뱉듯이) 말도 안된단말야. 엉터리야, 이건 엉터리! (운다)
[아들] ------
[외손자] 자, 필름? 평양에 갖고 가서 맡겨요, 외삼촌?
[페이지] 056
[아들] 으음- 그럴 것 없다, 정식아. 사진 만들어서 보관해 두면 된다. 정식이
네가말야.
[외손자] 좋아요, 그럼. 우리집 앨범 속에다 잘 꽂아놓을 테니까말야.
[아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외삼촌이 감 한가지 꺽어도 괜찮겠지?
[외손자] 감은, 왜? 아직은 땡감이예요. 떫단말야. 못먹어요?
[아들] 그러니까 꺾어개지구-평양에 가서 벽에 걸어두면 잘 익지 않간? 시간이
약이니까 말야. 허허허- (성큼성큼 가서 감나무 한가지를 꺾어들고 돌아온다. 가
방 옆에 놓고 아내를 본다)
[아내] 자, 여기-
[아들] 뭣입네까?
[아내] 꿀이랍니다!
[아들] 벌꿀 좋디요. 감사합네다. 작은 어마니!
[아내] 예?
[아들] 왜 놀라십네까? 작은 어마니 하고 내레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갔
디요?
[아내] ------ (놀람과 흥분으로 바르르 떤다)
[아들] (가만히) 작은 어마님?
[아내] 예?
[아들] "예"가 아니고, "응"이 맞디요. 안그렇습네까, 작은 어마니? 허허허 ---
---
[아내] ------
[아들] 작은어마니, 부탁이 있읍네다.
[아내] ------ (본다)
[아들] 아바님 모시고, 부디 오래오래 복되게 사십시오!
[아내] ------ (벌떡 일어나서 윤노인에게 간다. 손을 잡으며) 여보!
[페이지] 057
평양에서 온 귀한 손님이 나를 지어미라고 불렀읍니다. 작은 어마니라고 말예
요! ------
[윤노인] 그럼, 그럼. 허허허! 내 아들 철환이가 그렇고 말고- 날 부축해주구
료, 임자!
그들, 마당으로 내려온다.
[아내] 떠난 뒤에 섭섭타 말고, 말씀하세요, 영감!
[윤노인] (다가가며) 무슨 할말이 있어서 ------ 평양 니 어미도 죽지 말고, 오
래오래 살아있으라고 해라! 통일 되는 그날까지는------
[아들] 예에- 그대로 전하겠읍네다, 아바지.
[윤노인] 또 이것도 ------ (종이봉투를 건넨다)
[아들] 뭣입네까?
[윤노인] 나도 줄 것이 이것밖에 더 있겠나? 그속에 사진 한장을 넣었어요. 옛
날 금융조합 다니던 시절에, 읍내사진관에 가서 둘이 서만 찍은 ------ 아마도 그
사진을 대하면, 자기도 깜짝 놀랄게다! 허허허. 그러고 또 한가지 부탁은 ------
[아들] 말씀하시디요. 에-
[윤노인] 애비가 쭈글쭈글 늙어 보이더라고 그러지 마라. 알겠나. 내 말을?
[아들] 명심하갔읍네다. 허허허. (사진을 속주머니에 넣는다)
아들 한손에 손가방과 감가지를, 다른 손에는 꿀단지를 들고 객석을 통하여 퇴
장. 외손자가 얼른 윤노인의 다른쪽을 부축하고, 모두 따라나선다.
[페이지] 058
무대 앞에까지-
[아들] 안녕히뜰 계시디요!
[윤노인] 오냐, 그래. 잘 가거라. 가시철망에 옷 찢기지 않도록 몸조심 부디 하
고-
[아들] 예, 명심하겠읍네다.
[윤노인] 그래, 어서 가봐!
[아들] (외손자에게) 너 공부, 열성적으로 잘해야 한다?
[외손자] 으응,-
[딸] 안부 전해줘요, 오빠!
[아들] 그럼, 그럼.
[딸] 그러고, 언제쯤이면 평양 구경을 우리도 좀 하지?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와
야 할 텐데말예요.
[아들] 한번 댕기러 오라우? 오래비가 초대해서, 대동강 부벽루도 같이 산보하
고, 금강산 묘향산이랑 백두산도 구경시켜 줄테니까니-
[딸] 그래요. 우리 한번 기대해 봅시다!
[아내] 열심히 기도를 드리겠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들] ------ (퇴장)
그들, 멀리 손 흔들어 준다. 그 자리에 선채 언제까지나- 막, 천천히 내려온다.
(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