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이었다. 월요일인데도 국경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국기의 깃면을 깃봉까지 올린 후에 다시 내려서 조기를 달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태극기 다는 일이 어색했다. 아마도 그동안 국경일에 대한 소중함을 몰라서였을 것이다. 태극기를 달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사는 곳은 공무원 아파트이다. 그런데도 우리 동에 태극기를 단 집이 겨우 다섯 집 밖이 되지 않아 기분이 찝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 친구 중에는 현충일 날 무엇을 할 것인지가 궁금하여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물어본 아이가 있었다. 친구들의 대답은 거의 가족끼리 야외나들이를 간다든지 외식을 할거라는 대답이었다. 간혹 학원을 간다는 친구도 있었다. 국립묘지에 간다든지, 10시 사이렌이 울릴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조상들을 위해 묵념을 할 거라는 말은 없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TV를 보았다.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현충원에서 한 할머니가 비석을 잡고 울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영상물도 보여 주었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가족의 슬픔이 가슴으로 크게 다가왔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하는 날이므로 국민 모두는 경건한 마음을 갖고 나라와 민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현충 일 아침에는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각 가정이나 기관에서는 반기를 계 양하고 아침 10시에는 순국선열을 위로하는 묵념을 하고 국립현충원, 국립묘지, 전 쟁기념관, 독립기념관등 위령을 모신 곳을 방문하는 헌화를 하는 뜻 깊은 날이 되 면 좋겠습니다.’
하고 아나운서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논술학원에 다닌다. 오양심 선생님은 현충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현충일은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휴일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한 것이다. 현충일을 굳이 6월 6일로 정한 것은 우리 민족의 풍습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24절기중 손이 없다는 청명일과 한식 일에는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1956년 제정당시 망종일인 6월 6일을 현충일로 정한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또한 오양심 선생님은 현충일이 일년 중 다른 어떤 날보다 뜻깊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국가 유공자 가족이시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육군 상사라고 하셨다. 거의 10년을 전선에 계셨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를 않아서 죽은 줄만 알았다고 했다. 동네에 시체가 들어올 때마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어서 돌아왔는가 싶어서 시체를 들추며 많이도 울었다고 했다. 6.25전쟁이 끝난 3년 뒤 선생님은 태어나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잠깐 집으로 휴가를 나왔을 때 엄마와 아빠가 뿌린 사랑의 씨앗이라고 하셨다. 소식이 없던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수 년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 마을이 몇날 며칠 잔치 분위기였다고도 했다.
오양심 선생님은 국가 유공자증을 보여 주셨다. 거기에는
국가유공자
오삼식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 유공자의 공헌과 희생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
1973년 6월 1일
대 통 령 김 영 삼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물론 오양심 선생님의 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앞서간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그 가족이신 오양심 선생님께 들으니 훨씬 실감이 났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 봉사를 하신 앞서간 조상님들처럼 내가 애국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실천을 해야 하는데 나는 오늘아침 태극기는 달았어도 묵념은 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조상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내가 나에게 심각한 질문을 한번 던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