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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 공모 당선작
절연구간 건너기
김 경 은
도어등에 불이 들어온다. 곧이어 전동차 뒤편에서 차장이 보내는 신호음이 기관실을 울린다. 남자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도어등을 가리킨다. 전방의 녹색등을 확인하면서 왼손으로 파워핸들을 올린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제동변을 잡는 것도 남자는 잊지 않는다. 슉슉-슈슉 전동차가 선로 위로 미끄러지며 시발역을 출발한다. 남자도 가볍게 몸을 떨며 파워를 높인다. 전동차에 가속도가 붙는다. 30, 40, 50……속도계의 눈금이 올라간다. 출발할 때 전동차로부터 전해진 떨림이 오늘따라 남자의 몸에 유난히 오래 머문다. 아무래도 남자는 지난밤 일이 신경 쓰인다.
설마 오늘도 늦는 건 아니지? 아내는 곧장 들어오라는 말을 출근하는 남자의 등에다 그렇게 전했다. 남자가 잠시 섰던 건 이의를 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른쪽 발가락으로 왼발 뒤꿈치를 긁으면서 간밤을 떠올렸다. 이불을 차내기 위해 몸을 뒤척이다가 발뒤꿈치를 긁어대는 자신을 문득 깨달았다. 똑같은 방법으로 긁고 있었다. 현관에 기대어서도 구두에 발을 꿰기 직전 자세로 남자는 마냥 그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지. 우리 얘기해야 하니까, 오늘은 별일 없으면……. 두서없이 말을 하던 아내가 마지막 말을 정정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알람 소리에 아침잠이 달아난 것처럼 남자는 행동을 끊어냈다. 신발을 신기 위해 상체를 구부리자 뇌수가 쏟아지는 듯했다.
남자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던 손을 뗀다. 달리는 열차 시야로 들어오는 가는 빗줄기는 차체까지 못 오고 흩어지거나 한두 줄 앞유리에 선을 그으며 스러진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는 봄 가뭄을 해갈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곳에 따라 저녁에 잠시 뿌리고 새벽부터 개일 수도 있다며 기상 캐스터는 미간을 살짝 모았다. 그 정도 강우량으로 떡잎 하난들 제대로 키워내려나 걱정스러웠을까. 아침 식탁에서 마른 빵을 삼키던 남자는 입으로 가져가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물병이 없는 냉장고를 확인하자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을 보았다. 여태 그런 일이 없었다. 남자는 마른 침을 삼킨 뒤 목이 더 갈라져 잔기침을 했다. 아내가 베개를 들고 아이 방으로 건너간 게 한 달이 넘었다. 더 이상 아침 식탁을 차리지는 않았지만 남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빈틈없이 챙겨 두었다. 아내와 살았던 오 년 남짓은 삼십여 년 남자의 생활 습관을 바꾸어 놓았다. 아침밥을 거르지 않도록 없던 버릇을 만들어 주었다. 간단하게나마 아침식사를 준비할 때면 실소가 터지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생활 습관을 결혼 이전으로 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습관은 제동거리가 긴 열차운전이었다.
플랫폼이 나타나자 남자는 제동변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플랫폼에서 백 미터 떨어진 신호기를 지날 때 남자는 제동변을 2스텝으로 올리며 초제동을 잡는다. 폼에 전동차가 머리를 밀어 넣자 3스텝, 4스텝, 중간까지 오자 다시 한 단 높여서 5스텝, 정지선에 가까워지면서 2스텝, 1스텝으로 다시 낮춰 나간다. 하나두울세엣네엣, 남자는 심호흡에 맞춰 숫자를 센다. 서서히 숨을 낮추던 전동차가 정확히 정지선 앞에서 남은 숨을 토해낸다. 열차 정지 표시등에 불이 들어오고 출입문이 열리면서 도어등은 나간다.
남자는 의자를 펴고 앉는다. 뒤꿈치가 가려운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잠을 자다보면 발에 땀이 차면서 뒤꿈치가 갈라질 듯 열이 났다. 그런 날이면 하루 종일 가려웠다. 남자는 다시 긁으려다 양말을 벗는다. 발갛게 부어 있었다. 깊은 흉터였다. 남자는 그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남자는 흉터를 긁으며 기관실에 울리는 출발버저 소리를 듣는다. 동시에 도어등에 불이 들어온 걸 확인한다. 전방에는 푸른 신호등. 남자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도어등을 스칠 듯 가리킨 뒤 열차를 출발시킨다.
이미 왕복 운전을 일 회 끝낸 남자는 종착역에 도착하면 퇴근한다. 남자는 종착역으로 달리기가 두렵다. 모두 발뒤꿈치가 가려웠던 날이었다. 무심하고 싶어도 남은 운행을 앞두고 자꾸 신경이 쓰인다. 사고와 몸에 오는 신호에 어떤 법칙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종착역으로 달리는 이 길에 불길한 예감이 앞선다.
남자는 한편, 서둘러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선을 따라 내리 앞으로만 달리는 열차가 가는 길은 오직 하나다. 열차는 일차원 운동밖에 모른다. 세우는 데는 몹시 까다롭고 인색하다. 기찻길에서 놀던 아들을 친 기관사가 잠시 내려서 시신을 수습하고 다시 열차에 올랐다는 전설 같은 현실을 기관사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 열차가 지나갈 길을 막으면 안 된다. 관성이 막힐 때 열차는 사고다. 남자는 아내가 요구한 대로 곧장 들어가려 한다. 별 일 없이 궤도만 따라가면 오늘은 그대로 집 앞 현관에 닿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이혼을 말할 것이다. 남자는 그 말까지 들을 생각은 없다. 별거를 요구한 것도 아내였다. 아내는 그리 단호한 성격은 못 된다. 처음엔 남자에 대한 노여움을 충격 요법으로 풀어보려 했을 것이다. 딴에는 못된 버릇을 고치겠다고 그렇게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다. 별거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던 아내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남자 역시 아내의 마음을 꼬이게만 하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남자가 아침을 굳이 차려 먹고 나오는 것은 일종의 포석이었다. 당신이 차린 아침을 먹으면서 시작된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나는 이미 당신한테 길들어 있어. 보여주어야만 아내가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이었다. 아내한테 길 든 습관 때문에 요즘 불편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열차를 끌고 현관을 지나 아내 앞으로 곧장 달려가 세워서라도 남자는 말해야 한다. 하자는 대로 다 할 테니 이제 노여움을 풀어. 오늘이 아내와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에 아내가 한 말을 남자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열차는 궤도에 올라 있었다. 당신 참 열차를 닮았어. 시간에 늦는 일 없고 매사를 정해진 순서대로 하는 남자에게 아내는 말했다. 필요하면 습관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사람이라니까. 남자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을 때 아내는 더 이상 그 말을 농담 삼아 하지 못했다.
열 정거장 지나면서 타는 곳에 점점 사람이 많아진다. 이대로 열 정거장 지나면 2분 남짓 늦도착하고 종착역까지는 7, 8분 늦어질 것이다. 남자는 창문을 열고 플랫폼을 내다본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남자의 이마에 닿는다. 승객 하나가 뒤늦게 허둥대며 출입문을 빠져나온다. 졸다가 역을 놓칠 뻔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허청허청 가는 그의 등이 유난히 구부정하다. 아버지를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게 바로 그 구부정한 등이었다. 자꾸만 손을 잡는 남자를 떼어내던 단호한 모습과 구부정한 등은 남자의 머릿속에서 습관처럼 충돌했고 그 바람에 남자는 몇 안 되는 기억마저도 털어버리고 싶었다. 매몰차게 그의 손을 털어내던 어머니의 행동처럼 모조리 털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모두 남자의 손을 떼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자꾸 달라붙는 남자를 떼어내고 어머니 역시 시장 더 깊은 곳으로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뒤쪽 계단에서 내려온 사람이 반쯤 닫힌 문으로 가방을 들이밀고는 계단을 향해 손짓한다. 뒤따라 내려온 여자가 문으로 다가서는 것을 보면서 남자는 창문을 닫는다.
전동차에 가속도가 붙자 으스름 저녁이 낮은 조도의 기관실과 섞여든다. 굵어진 빗줄기는 어지러이 시야에서 춤추다가 윈도브러시에 밀린다. 하늘이 좁아지고 이윽고 보자기 만해진다. 내리닫던 전동차가 거기 갇힌다. 좌우가 조여들면서 낮아지던 지면이 어느 순간 푹 꺼져들어 열차를 통째로 빨아들인다. 보자기 하늘이 걷힌다.
“애기야 어디 있니?”
아이는 담벽에 세워놓은 함지 안에서 좌우로 시소를 타고 있었다. 땅거미 지는 저녁은 그 안에서 더 어두웠다.
“아버지 어디쯤 오시나 보렴.”
그 목소리는 아이가 하는 행동에 관계없이 이따금 부엌에서 들려왔다. 아이는 함지 안에서 여전히 시소를 타고 있었다.
“애기야 상추 밭에 들어가면 안 된다.”
아이 역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관없이 혼자서 시소를 탔다. 애기라고 부르기엔 좀 컸다. 함지가 앞으로 쏠리며 엎어졌다. 함지 입구가 땅바닥에서 들썩이느라 꿈틀거렸다. 허허벌판 주변엔 허술한 집 한 채만 덩그마니 있었다. 점점 작아지는 집, 굴뚝 위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때 사위로는 먹빛 어둠이 내려앉았다.
기관석에서 남자는 영사기를 돌려대는 착각이 든다. 철도공사에 들어와 차장 생활을 거쳐 전동차를 운행한 지 삼 년이다. 승객들은 측면으로밖에 내다볼 수 없는 곳을 기관사는 정면으로 보며 달린다. 지하를 달리는 전동차 밖으로 승객이 바라볼 풍경은 아무 것도 없지만 기관사에겐 그렇지 않다. 전동차를 몰고 지하에 들어오면 낯선 기억의 회로를 더듬어가는 기분이었다. 궤도를 따라 숫자와 기호로 표시돼 있는 각종 표찰 행렬은 교육을 받았다고 곧바로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그가 몰고 가는 전조등 불빛 위로 영상처럼 펼쳐지는 영문 모를 장면이 있곤 했다. 그것은 불빛이 닿지 않는 저편 어둠에서 오는 듯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자는 그 곳이 두려웠다. 사고가 난 뒤로는 전동차를 몰고 폼에 들어갈 때가 가장 두렵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비상 제동을 걸었지만 소용없었다. 쇳덩어리에 물건 부딪는 소리가 났다. 이내 나가떨어진 사람은 부서진 장난감처럼 선로에 늘어졌고 그 위를 열차가 덮쳤다. 뛰어든 사람을 조각내면서 142미터를 나갔다. 역무원들이 흩어진 몸을 찾느라 타는 곳 아래를 헤매도 끝내 머리 하나만은 못 찾았다. 점검을 위해 기지로 들어간 전동차에서 머리가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남자는 나중에 들었다. 열차의 몸체와 바퀴를 잇는 대차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제동 친 지점과 열차가 선 지점이 계산상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남자는 두 번이나 더 현장에 불려갔다. 60킬로 속도에서 비상 제동을 걸면 제동거리는 128미터가 나와야 했다. 플랫폼 시작되는 곳에서 뛰어들었다는 사실과 전동차에 승객이 거의 없어서 제동력이 떨어졌다는 조건이 감안되고서야 남자는 사상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안식 휴가 삼 일 내내 눈만 감으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이따금 기관실 앞 대차 위에 자신의 머리를 싣고 가는 상상을 했다. 전조등 대신 얼굴에서 두 눈이 빛나며 궤도를 쏘아보고 있었다.
플랫폼이 보이자 남자는 속도를 60킬로미터로 줄인다. 폼은 남자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낯선 기억처럼 공중에 떠 있다. 침침한 주변으로 등을 내건 객주처럼 버티고 있다가 홀연히 궤도를 타고 흘러갈 것만 같다. 남자의 많은 기억들은 이미 그런 식으로 그의 머릿속 회로를 타고 어디론가 흘러나가 버렸다. 어쩌면 기억은 그런 식으로 제멋대로 흐르고 흘러서 벌어진 순서를 달리하며 편집되는지도 모른다. 전동차는 폼으로 달려간다. 남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그녀다. 그녀가 타는 곳 맨 앞에 서 있는 게 보인다. 유실물 센터가 있는 역이었다. 남자가 모는 전동차가 늦어지자 열차 번호를 확인하려고 그녀가 전화한 것이다.
그녀는 운전에 방해되지 않도록 기관실 왼쪽에 자리 잡았다. 왕복 운전을 끝내고 승무소에서 잠시 쉴 때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했다. 통화한 내용이 걸려서 그녀는 기다렸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불쑥 남자를 찾아오기도 한다.
“편집? 맞아.”
그녀가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는 편집 중에 삭제를 가장 큰 무기로 삼으니 문제지.”
어릴 적 십여 년을 함께 보낸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공사에 취직한 뒤였다. 그녀는 유실물센터에 배치되자 운명을 말했다. 요즘 잃어버린 물건 찾아가는 사람 거의 없어. 그나마 택배로 부쳐달라고 연락 오는 경우는 성의라도 가상하지. 하루 종일 얘네들 보고 있으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처지가 똑같잖아, 그러니 운명이지. 남자는 이따금 그녀에게 들러 잃어버린 내 과거 누가 주워온 사람 없더냐고 말했다. 주로 선로에 펼쳐지는 영상을 본 날이었다.
어려서 아이들 모아놓고 곧잘 얘기를 해주던 그녀는 지금도 여전하다. 사진첩에 끼워도 좋을 선명한 이야기부터 가벼운 신변까지 남자에게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결혼은 왜 안 하는데? 언젠가 남자는 물었다.
약 오르잖아. 옛날에도 남 챙기는 게 일이었는데, 결혼해서도 그럴 것 같지 않니? 평생을……그녀는 뿌루퉁해서 말하다가 웃었다. 농담이야. 사실 나 속으로 곪은 데 투성이야. 그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겨울 된바람을 카디건 한 장으로 견디는 막막함이 웃음 속에 피어났다.
“너 또 가려운 거니?”
양말도 신발도 벗어 놓은 남자의 맨발을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말한다. 어릴 적 그녀는 남자의 뒤꿈치 흉터를 보고 대뜸, 아킬레스건에 무늬가 있네, 외쳤다고 한다. 이후로도 남자를 그렇게 기억했다니, 남자의 흉터는 그녀를 알기 전에 생겼던가 보다. 책 모퉁이가 솜뭉치가 되도록 그리스신화를 끼고 살던 그녀의 취향은 지금도 남아 있다. 관계된 버전은 모조리 섭렵하더니 급기야는 이번 휴가에 그리스와 터키를 돌아오겠다고 벼르고 있다.
“참, 잘 생각해 봤어?”
“뭘?”
열차는 플랫폼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녀는 승객들 눈에 안 띄도록 바닥에 앉는다.
“징크스를 알아내려면 네 흉터가 어떤 상처 때문인지 먼저 알아야 하잖아.”
그녀는 남자에게 상처를 기억해내라고 주문한다.
아킬레스가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알아? 여신과 관계해서 아들이 태어나면 왕좌가 위험하다는 예언이 제우스는 께름했어. 프로메테우스를 구슬려서 그게 누군지 결국 알아냈지. 제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펠레우스에게 서둘러 시집보냈고 거기서 아킬레스가 태어난 거야. 그녀는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밤이면 불 속에 묻어두었는데 이걸 본 남편이 말렸어. 화가 난 테티스는 그 길로 바다로 돌아가 버렸대.
그녀가 많은 이야기를 쏟아놓는 데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신화 중에 하필 그 대목만 남자에게 얘기했던 이유도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든 남자의 상처에 접근해 보려는 배려가 남자에게는 보였다.
“어쩌면 너의 강박관념은 기억을 너무 많이 삭제한 데서 오는지도 몰라. 지나치게 잊어버리지는 말되 좋은 기억을 중심으로 편집하기!”
기억에 관한 한 남자와 그녀의 반응은 달랐다. 남자도 때때로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다. 유년을 얘기해 줄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남자에게 이런 증세는 없었을지 모른다. 사진첩을 만들어주듯 그 시절을 첩첩이 들려주는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자신을 소외시킨 채 무의식과 세계가 저들끼리 교감하면서 의식을 괴롭히는 일 따위란.
“잘 생각해 봐.”
“그리스는 언제 갈 거니?”
제동변을 올리면서 남자는 불쑥 묻는다.
“왜?”
바닥에 앉아 남자의 뒤꿈치를 당기던 그녀가 고개를 치켜 눈을 흘긴다. 남자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에게해에 가면 꼭 물어봐 줄래. 왜 자식을 두고 돌아갔는지.”
“알았어. 이 얘기만 할게……내일 병원 가 보자.”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의 뒤꿈치를 안고 상처를 매만지던 그녀가 한 번 깊게 쓰다듬고는 손을 뗀다. 그 손길이 아쉬워서 남자는 깊은 숨을 쉰다. 어쩐지 오래 전 또 다른 손길이 거기 남아 있는 듯하다.
“일 년에 한 번씩 하면 뭐해. 도대체가 쓸데없는 건강검진이라니까. 그리고 사상사고 나면 기관사들 정신과 상담 받게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알았으니까 그만 할래?”
“그러니까 가자. 혼자 가기 불안하면 내가 같이 가 줄게.”
남자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함께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다시 말한다.
“어디쯤 왔지?”
“이번 역에 내리면 돼.”
기관실 문을 열면서 그녀가 말한다.
“일 끝나고 들를래?”
“안 돼.”
남자는 그 말이 모질게 들렸을까 봐, 창문을 열고 그녀를 세운다.
“오늘은 집에 일이 좀 있어.”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 거야.”
남자는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피식 웃는다. 우리는 직류로 통하잖아. 함부로 털 수 없는 속내를 얘기하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난 말이야 그래서 안타까워.”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그녀의 얼굴은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다. 남자는 전동차를 출발시킨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외친다.
“가장 좋았던 기억에 주파수를 맞추고 힘을 얻어서 가는 거야.”
남자의 상처를 쓰다듬던 손이 멀어진다. 전동차가 멀어지도록 남아 있는 그녀가 플랫폼에 실린 채 어디론가 흘러갈 것 같다.
R55. 남자는 전방의 곡선구간 숫자를 확인하자 속도를 45킬로미터로 떨어뜨린다. 전동차가 속도를 늦추며 휘어진 선로를 달린다. 오른쪽으로 휘어든 선로 끝이 오른쪽 기둥에 가려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나곤 한다. 지상의 곡선구간과 지하의 곡선구간은 다른 느낌이다. 지상에서는 휘어진 안팎을 일별할 수 있어서 남자는 심리적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다. 지하에서 열 량 꼬리를 달고 가노라면 자신의 지나간 시절을 한 줄로 꿰고 가는 기분이다. 휘어든 선로를 따르면 거북과 뱀이 서로의 몸을 팽팽히 감아도는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떠오른다. 현무도에서 뱀이 자신의 머리와 꼬리를 묶었던 것처럼, 휘어든 선로를 따라가다가 머리를 뒤쪽으로 획 꺾으면 꼬리를 물면서 서로 감겨들지도 몰랐다. 그러면 남자는 잊었던 유년을 다시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 전방, 꼬리를 물어보게 충동질하는 휘어진 선로, 균형감각을 떨어뜨리는 지하 곡선구간이 남자는 그래서 불안하다.
맞은편에서 전동차가 달려온다. 전동차는 바짝 휘어서 독 오른 뱀처럼 남자의 오른편으로 다가든다. 남자는 손을 들어 마주 오는 열차의 기관사에게 인사한다. 남자는 문득 꼬리가 신경 쓰인다. 힘들 때면 아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털어놓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아내에게 말하려면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지난날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분명하지 않은 기억을 어떻게 들추어내서 어떻게 이해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공유하지 않은 유년이다. 벌레 털어내듯 하네. 연애시절, 아내가 손을 잡으려고 하면 남자는 한사코 뿌리쳤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아내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남자의 손을 포기했다. 남자는 그때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이해를 위해 진술을 강요할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애초, 결혼생활에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불편하지 않을 생활습관을 만들어줄 여자면 되었다. 기관사 아내는 반 기관사라니까. 삼조 일 교대를 하느라 바뀌는 출퇴근 시간과 그에 따르는 하루 일과에 맞추면서 아내는 싫지 않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자의 하루 세 끼를 걱정하고 출근 시간을 챙기고, 현관을 나서는 남편의 옷깃이 구겨져 있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남자에게는 그런 아내가 다행이었다. 좀처럼 캐묻지 않는 아내가 어쩌다 남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겠다고 다가오면 남자는 불편했다. 살을 부비고 살아도 당신 속은 알 수 없다니까. 아내는 그 한 마디로 남자의 태도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살면 세상은 퍽 간단해질 줄 알았다. 남자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결혼생활 내내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있어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급속히 기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남자가 그녀를 부쩍 찾게 된 건 사고가 난 뒤부터였으니까 육 개월 정도 되었다. 어린 시절 친구와 재회했다는 기쁨을 아내는 더 이상 함께해 주지 않았다. 요즘 당신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어? 일은……무슨.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도 문제 삼지 않던 아내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전처럼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아내는 둘이 쌓은 관계 이상으로 남자와 그녀를 보았다.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아내의 조바심대로 남자는 점점 그녀에게 다가갔다.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던 남자의 습관이 바뀌었다. 난 대체 당신에게 뭐지? 급기야 어젯밤, 아내는 현관에 들어서는 남자에게 감정을 터뜨렸다. 여간해선 이의를 달지 않던 아내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잘 써오던 오디오에 이상이 생겨 그제야 속을 뜯던 날처럼 남자는 아내를 뚫어져라 보았다.
남자는 폼에 들어가면 정지선에 전동차를 정확히 대었다. 침침한 조명, 반복되는 동작에 남자는 하품이 나려했다. 전동차 바퀴가 구를 때마다 궤도에 깔린 자갈이 다각다각 떨면서 남자가 앉은 의자를 흔든다. 차체 아래 에어스프링이 완충 역할을 하지만 승객이 많으면 남자에게 미세한 압력이 전달된다. 꼬이는 몸을 펴며 남자가 다음 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할 때다. 전방에 황색과 푸른색으로 나란히 들어와 있던 신호등이 모두 황색으로 바뀐다. 동시에 운전석의 G등에 들어와 있던 불이 나가면서 YY등이 켜진다. 남자는 속도를 25킬로미터로 줄인다. 서서히 전동차를 진행시키는데 백 미터 떨어진 선로에 빨간 신호등이 연달아 보인다. 사령실과 통하는 벨이 울린다. 남자는 송수화기를 든다. 진입하려는 역에서 사상사고가 발생했다. 남자는 전동차를 세우고 차장실에 이 사실을 알린다. 경기가 안 좋으면 전동차 투신 사고도 늘었다. 사고는 간발의 차이로 남자가 당할 수도 있었다. 앞 역에 있는 기관사는 장거리 열차를 운전하다가 전동차로 옮겨온 사람이었다. 그는 객지에서 자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 생활이 지긋지긋했단다. 자살사고가 터지면 그가 하는 말이 있었다.
죽겠다고 덤벼드는 사람을 기관사가 무슨 수로 다 대응해. 자그마치 세 번이나 지하철에 뛰어든 여자도 있었어. 억세게 재수 없다고 해야지. 한 번은 너무 일찍 뛰어드는 바람에 열차가 섰고 한 번은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에게 붙들려 사전에 제지당했지. 그러고도 한 번 더 뛰어들었는데 그게 내 차였어. 그런데 이번엔 열차 밑으로 들어가서 구사일생으로 살았던 거야. 믿기지 않는 일이었어. 죽는 일조차 뜻대로 안 되었던 거지.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끌어낸 여자를 확인한 역무원들은 또 그 여자라며 기가 막혀 했지. 그런데 사람들이 뒷수습하느라 신경 파는 틈에 도망가서는 다신 안 나타난다는군. 늘 똑같은 역에서 자살을 시도한 걸 보면 낯가림이 심한 거 아니었나 싶어.
심상한 어조로 풀어놓는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누군가 내 차로 뛰어들 거라는 스트레스일랑 남자도 심상하게 털어버릴 수 있었다. 남자는 간밤 일을 떠올리며 진입할 역에서 벌어진 사고를 생각한다. 이런 일을 보려고 뒤꿈치가 가려웠던 것이다.
남자는 승객들이 지루함을 덜 느끼도록 열차를 느린 속도로 진행시킨다. 차장이 내보내는 안내방송이 희미하게 들린다.
“앞역에 사상사고가 있어 열차 서행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사의 열차 운행 방침으로 승객 서비스가 각별히 강조되었다. 열차 안전운행을 침해하지 않는 한 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연 사유를 승객에게 알리는 것도 서비스 지침이다.
전방에 푸른 신호등이 들어온다. 호응해서 속도 지시등은 YY등에서 푸른색 G등으로 바뀐다. 사령실로부터 출발 명령이 떨어진다.
아무리 수습을 해도 선로에는 혈흔이 남아 있다. 사고 역에 들어서면 앞에서는 쉬쉬하고 뒤로만 무성하게 떠도는 소문처럼 뒤숭숭한 열기가 자욱하다. 열꽃이 필 때처럼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남자는 제복 윗단추를 푼다.
“말도 마세요. 다리 두 짝이 덜렁거리는 채로 실려 나갔어요. 다행히 의식은 붙어 있지만 가망 없어요. 이 길이 얼마나 확실한 방법이게요.”
안전요원이 전하는 상황이다. 가망 없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의식이 다행이라니. 남자는 세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다는 여자를 떠올린다. 억세게 재수 없어 자살조차 뜻대로 안 됐던, 다행히 목숨 건진 그 여자는 어려운 시기 건너는 방법을 알아냈을까. 아니면.
우리 이제 이렇게 손잡고 살자.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어느 날 공원에 나갔을 때였다. 제 걸음에 바빠 위태로운 아이를 잡느라 아내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남자가 달려가서 아이의 손을 잡자 아이의 남은 손을 잡은 아내가 그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을 공유한 그녀에게 직류로 통했던 기세로 남자는 아이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그게 두려워서 가정에 거리를 두려했는지도 모른다. 잡은 손을 놓칠 때 오는 상실감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기억에 주파수를 맞추고 힘을 얻어서 가는 거야. 그녀는 플랫폼에서 손을 흔들며 외치고 있었다. 남자는 파워핸들을 올리며 나아간다. 예전에 상처에 대한 얘기를 그녀에게 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에 대해서 때때로 그녀에게 듣기도 했다. 너희 어머니도 테티스였던 거야. 얼핏 기억나는 그 말은 남자의 착각일까.
남자는 갈증을 느낀다. 땀이 차고 가슴도 답답하다. 단순히 물 한 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조갈이다. 운전 도중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증세에 시달리다 그만 두는 동료들이 있었다. 공황증세였다. 항상 시간에 쫓기며 촌각을 다퉈야 하는 직업인 데다 무시로 일어나는 투신사고. 한 번 터지면 대형사고인데 그 책임이 기관사 개인에게 떨어지는 데서 오는 강박관념이 크다고 했다. 남자는 병원에 갈 필요성은 못 느꼈다. 그들처럼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의사들에 의하면 공황증은 전체 인구의 이 퍼센트가 인자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 노출되지 않으면 평생을 모르고 살 수도 있다.
남자는 자신의 스트레스와 타인의 스트레스를 비교해 볼 방법이 없다. 극도의 스트레스라는 건 어떤 지경인지. 현대인치고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 없고 스트레스가 반복되면 결국 극도로 몰아간다. 그런데도 누구는 공황증세를 보이고 누구는 멀쩡하다. 어떤 심리학자는 어려서 부모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기 쉬운 증세라고도 했다. 문득 선로 위로 상이 엎어지고 있다. 상 위에 있던 찬 그릇이 상보다 위로 솟구쳐 더 멀리 날아가는 중이다. 찌그러진 양은 재질의 상이 선로 위에 닿는 순간 저 편 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받으며 사라지고 찬 그릇보다 더 높이 튀던 음식들도 공중에서 부서진다.
남자는 다가오는 플랫폼을 보며 제동변을 당기지만 초제동 잡는 시간을 놓쳐버린다. 5스텝으로 한꺼번에 제동변을 올린다. 전동차가 급정거한다. 제동변을 풀 때 남자는 승객들의 크고 작은 아우성을 듣는다. 전동차 앞으로 걸어오는 안전요원이 보인다. 남자는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자 반갑게 말한다.
“어, 역을 옮기셨군요.”
처음 그와 인연을 튼 것은 남자가 모는 열차로 사람이 뛰어들었을 때였다. 창백한 얼굴로 진땀을 흘리는 남자에게 누군가가 음료수를 내밀었다. 그걸 단숨에 마신 후에야 돌아보았더니 거기 오십 대 후반은 됐음직한 사람이 서 있었다. 웬 뒤꿈치는 그리 긁어대던지. 그의 말을 듣고야 남자는 자신이 그때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그 뒤 뒤꿈치가 유난히 가려운 날이면 남자는 자꾸 실수했다. 그럴수록 파워핸들과 제동변을 잡은 손은 불안했고 실수는 실수를 불렀다. 남자는 역에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일도 있었다. 그렇게 빚어진 실수는 사라지지 않고 쌓이다가 어느 날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기관실을 향해 굴러올 것만 같다. 이제 남자는 더 이상 실수하면 안 된다. 그나마 안전요원을 만나면 남자는 그날 마신 음료수를 떠올리면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았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남자는 반갑게 말을 걸었고 그 이후로도 그는 남자에게 몇 번 더 음료수를 건네주곤 했다. 그는 기관사들에게 음료수를 건네 준 일화로 사보에 화제의 인물로 나오고 인터뷰 기사도 실렸다. 십여 년 지하철역에 있으면서 참 많은 걸 봤어요. 사고 난 후 기관사들 보면 타들어가는 고사목 같았어요. 난 그들에게 물 한 모금 전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궤도 위의 오아시스’란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그의 별명은 오아시스가 되었다. 남자는 요즘 그를 통 볼 수 없었다.
그가 활짝 웃으면서 캔음료를 들어 보인다. 남자는 기관실 문을 열어 그걸 받는다. 차가운 음료를 손에 쥐자 몸에 피던 열꽃이 시드는 것 같다.
“맨날 받기만 해서 어째요? 다음엔 제가 약주라도 대접해야겠군요.”
그는 다시 웃기만 하더니 타는 곳과 출입문을 살피며 안전 신호를 보낸다.
그게 바로 교류의 힘이야. 직류의 힘이 세다는 건 산술적 관찰일 뿐이지. 안전요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영문 모를 말만 했다. 남자는 나중에야 그녀가, 돈이 많아 번듯한 집안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사랑이라는 도도한 물줄기로 모든 걸 덮어버리겠다던 그녀의 연인은 집안의 명령에 따랐다. 호기롭던 물살이 가문이라는 댐 속에 갇힌 것이다. 남자는 곪은 데 투성이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가슴 아팠다. 교류가 없는 사회는 닫힌 세계지. 이집트 왕조는 왕족의 혈통을 보존하려고 근친상간했다잖아. 그게 자멸로 가는 지름길인 줄도 모르고. 돈 많고 번듯한 그 남자의 집안은 똑같이 돈 많고 번듯한, 서로 잘 아는 집안끼리 혼인을 맺었다.
선로 위에 나타나는 영상이 유년 어디쯤에서 벌어졌던 일이란 걸 남자는 안다. 열차가 출발하면 남자의 기억도 함께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지하 궤도 안에 있는 어떤 신호를 보고 영사기 돌듯 기억의 회로도 저절로 출발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아이가 엄마에게 흠씬 맞는 장면을 보았고 곧 남자는 그게 자신의 과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확대된 손만 어린 남자의 몸에 세차게 와서 부딪쳤다. 아이는 깜찍하게도 반찬투정을 하다 못 해 밥상까지 엎은 뒤 두들겨 맞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들어가지 말라는 상추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맞았을 수도 있겠다.
남자는 갑자기 숨이 막힌다. 습기 문 퀴퀴한 공기가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다. 몸이 다시 끓기 시작한다. 한꺼번에 열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남자는 곧 나타날 지상을 떠올린다.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창문을 열어야겠다. 남자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목이 타 들어간다. 남자는 캔을 따다가 발뒤꿈치를 만진다. 불덩어리다. 가려워 미치겠다. 그대로 두면 까맣게 재가 될 것 같다. 남자는 캔을 들어 뒤꿈치에 댄다. 남자는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연다. 매캐한 바깥 공기가 자욱이 밀려들어서 숨넘어갈 듯 기침을 한다.
“여기서부터 절연구간입니다.”
방송이 기관실 안을 메우며 절연구간을 세 차례 반복한다. 남자는 막히는 숨을 토해내느라 그만 교직전환 스위치 바꿀 시기를 놓친다. 남자는 전에도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다. 남자가 절연구간 들어설 때 자꾸 실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열차는 직류구간에서 교류구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두 지점이 교차할 때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전기 공급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다. 이 구역을 지날 때 열차는 관성으로 지나간다. 객실을 비추는 조명도 최소한으로 줄인다.
절연구간이 열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결혼한 뒤에는 삶의 절연구간을 잘 넘어온 것 같다고 남자는 생각해왔다. 충돌을 피하며 남자도 아내도 생활습관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교류로 나가는 절연구간에서 번번이 실수하고 있다. 그녀가 안타까워하는 점이었다. 너를 보면 테티스가 이해되는 거 아니?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심술궂었다. 남자가 왜 아내와 결혼했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가장 좋았던 기억에 주파수를 맞추고 어려운 시기를 넘기는 거라던 그녀의 말이 과연 자신에게도 해당될까. 남자는 의심스럽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다. 다음에 만나면 테티스를 더 말해보라고 해야겠다.
떡잎 같지 않아? 발뒤꿈치의 흉터에 대해 남자는 그렇게 말했단다. 보육원을 추억할 때 그녀가 전해준 이야기였다. 보육원에서 그녀는 큰언니처럼 아이들을 살펴주었다. 자기보다 한두 살 어린애들은 물론, 웬만한 동갑하고 있어도 그녀가 훨씬 언니다웠다. 시뻘개진 얼굴로 신발을 벗고 있으면 다가와 뒤꿈치를 어루만져 주었던 것도 그녀였다. 남자는 그녀에게 들러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잠시 만나고 가는 것까지 아내가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를 만나서 잘 생각해 보라고 말하자. 남자가 언젠가 말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다 보면 반드시 상처에 대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녀만이 끊어진 기억들을 이어줄 수 있다. 남자는 마음이 바빠진다. 전동차는 도착 예정시간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이제 열차는 급정거를 해서도 가속도를 붙여서도 안 된다. 열차는 왔던 길을 반추하며 선로에 몸을 맡겨야 한다.
전동차가 절연구간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남자는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밥상이 날아간다. 이번에는 밥상 한 편에 아버지가 있고 밥상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아이가 있었다. 밥상에 있던 뚝배기가 아이에게 날아가고 놀란 어머니가 아이를 당긴다. 어머니에게 미처 안기기 전에 떨어진 뚝배기가 아이의 발뒤꿈치에 맞는다. 아이는 그 순간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뚝배기 안에서 끓어오르던 된장찌개가 아이 발등으로 흩뿌려진다. 혼비백산한 어머니가 아이를 들쳐 업고 밖으로 나간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남자의 열차 앞을 건너고 있다. 놀란 남자가 열차를 세운다. 아이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몸은 고사목처럼 타 들어가고 있었다. 안타까워 남자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민다. 순간 아이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던가. 일순 모든 게 명확해진다. 시장 한복판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는 엄마가 오지 않자 찾아 나선다. 어느 순간 길을 잃은 아이는 온 기억을 짜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에 마주친 엄마가 아이에게 달려와 냅다 엉덩이를 두들겨댄다. 아이는 그 손길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 장바구니에서 쏟아진 고등어자반과 북어포 따위가 주변을 구른다.
그리곤 컴컴한 터널. 남자는 알고 싶다. 열차 운행에 관계된 신호를 꿰듯 기억이 보내는 신호도 감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숨 가쁜 호흡 사이로 솟는다.
차장이 벨을 울린다.
“전차선 전압계가 떨어졌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남자는 1.5킬로볼트 전차선 전압계를 확인해 볼 여유가 없다. 이미 브레이크를 걸어 전동차는 완전히 멈췄다.
“사구간에 빠졌습니다.”
남자의 귀에는 차장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괜찮으세요……기관실, 대답하세요……기관실, 무슨 일입니까? 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남자에겐 아득하기만 하다.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다급해진 남자가 밖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가장 좋았던 일을 왜 기억 못 해내는 거야? 남자에게 그런 소리가 들린다. 난 그런 거 없어. 남자는 소리치며 주저앉는다. 왜 없어? 손을 내밀어 보라구.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주위를 둘러본다. 당신……당신이야? 더 이상 대답은 없다. 말을 하는 바람에 남자는 숨이 차다. 남자는 가슴에 자리잡은 내장들을 다 토해낼 듯 기침한다. 뿌리가 뽑히는 고통에 남자는 숨을 멈춘다. 얼굴로 올라온 열을 뽑아내려 숨을 내뿜는다. 조금 가라앉는 듯하여 다시 호흡하며 바람을 내뿜는다. 한 번 더. 흔들리던 내장들이 제 자리를 찾아 조금씩 움직인다.
아이는 뒤꿈치가 가려우면 온 몸에 열꽃이 피었다. 냇물에 아이를 내려놓았던 엄마가 아이를 꺼내 상추밭으로 데려간다. 떡잎이 돋아난 상추 옆 아이의 발치에 구덩이를 판다. 아이의 발에 흙을 덮으면서 엄마가 말한다. 우리 애기 뒤꿈치에 떡잎이 돋았구나. 비가 내려 우리 애기 어서어서 자라야지.
남자는 심호흡을 하면서 운전석으로 다가간다. 손을 잡던 날을 떠올리며 한 발짝 더 다가간다. 우선 교직전환 스위치를 확인한다. 눈금 영에 멈춘 속도계에도 잠시 시선을 둔다. 이번엔 파워핸들을 한꺼번에 올려본다. 다시 한 번 올린다. 물론 소용없는 일인 줄 안다. 남자는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토해내며 호흡을 조절한다. 차장실로 통하는 버튼을 누르고 말하려다 그 동안 저질렀던 사고와 실수가 떠올라 잠시 주춤한다. 이내 결심을 하고 버튼 앞으로 바싹 다가선다. 기관실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또박또박 말한다. 기관실입니다. 실수로 브레이크 걸었고 속도계 제로에 멈췄습니다. 구원열차 요청하겠습니다. 남자는 말을 마치고 사령실로 통하는 송수화기를 잡는다.
원고지 89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