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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철목사, 연세대 세브란스원목실장, 한국기독교연구소 후원회장, 한기연 독서 모임 좌장, 함께나누는세상 사무총장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특히 역사적 예수 목회와 예수 살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본문: 요 14:12“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인사말
오늘 저는 예수살기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하는 의미에서, 예수살기와 관련한 한국교회의 현상, 이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I. 현상: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수를 믿기는 해도 예수를 살지는 않는다.
1. 통계로 본 현상: 한국갤럽조사연구소
1998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관한 통계는 우리에게 매우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종교인은 전체 인구 중 46.9%인데, 그 중 개신교인은 20.3%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개신교인이었다가 다른 종교로 개종한 사람이 4.4%, 그리고 과거에 개신교인이었다가 비종교인이 된 사람이 무려 17.5%나 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과거에 개신교인이었다가 현재 개신교를 떠난 사람이 도합 21.9%라는 것입니다. 이 수치는 과거에 개신교인이었다가 개신교를 떠난 사람이 현재의 개신교 인구보다 1.6%나 많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를 떠난 사람들이 개신교를 떠나지 않고 그냥 남아 있었다면, 산술적으로는 42.2%가 개신교인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계산은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하는 문제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수치가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계속해서 비종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종교를 선택한다면, 어느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선호도 1위는 불교, 2위는 가톨릭, 3위는 개신교였습니다. 이 셋이 한국의 3대 종교라고 할 때, 개신교에 대한 한국인의 선호도는 가장 하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의 통계와 이 통계를 합하면, 우리는 매우 슬픈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상당수 개신교인들도 싫어하고, 비종교인들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이것입니다. 개신교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개신교의 종교적 정체성과 어느 정도 상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번 더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통계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개신교인들에게 왜 기독교를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전체 개신교인 중 66.8%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고, 12%가 복을 받기 위해, 또 다른 12%가 죽은 다음 천당 가기 위해, 그리고 6.9%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고, 복을 받고, 또 천당을 가고자 하는 기대가 크게 잘못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에 비해, 삶의 의미를 찾고,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기독교인의 6.9%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에 뭔가 중대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이러한 통계는 독교인들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기초가 예수에게 두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 사례로 본 현상: 어느 권사님 아들의 이야기
이제 이러한 통계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너더러 예수 믿으라고 그랬지, 예수처럼 살라고 그랬냐?”
3. 통계와 사례가 주는 함의: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기는 해도 예수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II. 진단: 두 가지 신학적 기초와 그 결과
1. 신학적 기초
1) 니케아 신조
저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기만 하고 예수의 삶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게 된 데에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리적 배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1600여년 전, 정확히 325년에 기독교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신조를 결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니케아신조인데, 이 신조는 예수는 본질상 하나님과 같고, 인간이기는 하지만 보통 인간과는 달리 죄가 없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후 기독교의 정통적인 고백이 되었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의 고백도 상당 부분 여기에 기초되어 있습니다.
2) 사영리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를 사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된 데에는 니케아신조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교리적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사영리입니다. 사영리는 미국에서 대학생선교회(CCC)를 조직한 빌 브라이트(Bill Bright)가 전도용으로 만든 소책자이지만, 이는 오늘날 한국의 대학생선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대부분의 신앙 내용을 결정할 정도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2)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죄인이다.
(3)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 다.
(4)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
3. 신학적 결과: 예수의 삶과 나의 삶의 분리
니케아신조와 사영리가 한국교회에 미친 가장 큰 부정적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의 삶과 기독교인의 삶이 완전히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는 있어도, 예수를 믿고 예수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분리현상을 기독교인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세 가지 주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처럼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처럼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지만, 죄인인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2) 저는, 이러한 주장은 결국 예수의 삶을 우리 시대에 재현하려는 우리들의 생각을 처음부터 체념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2) 둘째,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처럼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1) 그 이유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셔서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 굳이 우리가 예수처럼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다소 궤변적인 주장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문자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도, 은연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의외로 많습니다.
(2) 이러한 생각은 많은 경우,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3) 셋째,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마 그러랴 싶지만,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교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1)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된 태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형태만 갖추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예수처럼 살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적인 태도와 같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도덕적 조항들을 지키는 것과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은 둘 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주장은 궁극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삶을 이 시대에 재현해 보려는 신앙적 의지를 사실상 원천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세 가지 주장은 예수의 삶과 나의 삶을 분리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께서 사셨던 것처럼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교리적인 명분과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4. 예수의 삶과 나의 삶을 분리시키려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
저는 방금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삶을 재현하지 못하게 되는 세 가지 이유를 열거했습니다만,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실상 또 다른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세 가지 이유들이 다분히 교리적인 이유들이라면, 그러한 교리적인 이유들의 배후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가 깔려 있다고 봅니다.
1) 실존적인 이유: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원색적으로 말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면,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교리적인 명분 뒤에는 바로 이와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기저기에 강연을 다니면서, 오늘과 유사한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의식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이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은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바람직한 삶이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2)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은 이유: 힘들다
왜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을까? 예수의 삶이 올바른 삶이었다면, 당연히 예수처럼 살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인의 마땅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물론 그것은 상식에 맞는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등학교나 혹은 기껏해야 대학생 때까지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사회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그것도 부정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성인 기독교인들로서는 쉽게 그렇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의 삶은 물론 올바른 삶이었고, 그래서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이 시대에 예수처럼 사는 일은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고, 너무 어렵고,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손실이 큽니다. 요즘같이 각박하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그래서 누구도 예수께서 사셨던 삶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예수처럼 산다고 하는 것은,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왕따가 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삶은 사실 우리들에게는 큰 걸림돌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예수의 삶을 살아야 되는 줄은 알지만, 솔직히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고, 이것이 우리들의 내적 고민입니다. 예수의 삶을 재현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의 세 가지 교리적인 주장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고민이 간접적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III. 대안: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사는 것이다.
1. 대안: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인일 수 있는 길은 없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예수의 삶을 우회하거나 회피하면서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길이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하더라도, 예수의 길을 떠나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의 길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와 함께 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려고 애쓰다가 실패한 기독교인은 용서될 수 있어도,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처음부터 우회하거나 회피하는 기독교인은 용서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길을 피하고서 기독교인으로서 남을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의 삶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마주 대하고, 그 삶을 자신의 삶으로써 재현해 냄으로써 예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2. 관점의 전환
1)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앞 서 사신 그 삶의 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학적 관점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우선 예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관점, 즉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셨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는 그 분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예수의 길에 동참할 수 있는 그 가능성과, 그 길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온 인류가 본받아 따를 만한 위대한 삶을 사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와 형이상학적 본질이 전혀 다른 기이한 존재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이 쉽게 살아내지 못하는 남다른 삶을 살아 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2) 예수와 우리의 차이는 본질에 있지 않고 삶에 있다
그러면 예수가 보통 인간과 남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형이상학적 본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삶에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특별히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부지간, 부모자식지간, 혹은 친인척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과연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일까? 또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 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과연 하나님이 사람들의 판단과 결정과 실천의 실질적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서 과연 하나님은 사람들의 일터와 직장, 그리고 우리들이 당면한 사회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의 판단과 결정과 실천의 실질적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매순간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을 결정하고 바로 세우는 궁극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지 못합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권력이나 돈, 재물이나 부동산, 인기나 명예, 지위나 권위같은 것을 삶을 결정하는 보다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삶의 매순간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욕망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그의 마음 속으로부터 제거하시고, 그의 전체 삶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도록 했습니다. 예수께서 당시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여성, 불치병 환자나 지체 부자유자, 매춘부나 세관원, 힘없는 자나 가난한 자를 대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 예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유일한 그리고 궁극적인 기준은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시 힘에 의존해서 힘없는 자를 억누르고 있던 정치권력자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부자들을 대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하나님은 역시 예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유일한 그리고 궁극적인 기준이었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매순간 그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하나님뿐이었고, 그 어떤 무엇도 예수의 삶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이셨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 자신으로 높여질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인간과 질적으로 다른 어떤 특이한 본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철두철미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삶을 살았다는 데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3.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
저는 이 점에서,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하나이셨다는 빌립보서나 요한복음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성서가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말하는 것은, 예수가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본질을 가졌다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에 있어서 예수와 하나님은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었다고 하는 예수의 삶의 특징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그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에, 예수를 본 사람은 예수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제 요한복음 몇 구절을 통해서 이 점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 요 7:14-18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명절이 중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유대 사람들이 놀라서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인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에게는 불의가 없다.”
이 구절은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요 10:37-38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거든, 나를 믿지는 않더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근거로서 자신의 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일이 아니면, 믿지 않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일, 곧 예수의 삶을 통하여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요 14:8-11입니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이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는 자신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과 같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자신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대담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예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택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자신의 삶에 동참하여 함께 그 삶의 길을 가도록 부르시고 초청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4. 저는 이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첫째,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삶이 철두철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다시 말하여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이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도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삶의 길, 곧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 속에서 철두철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의 길을 예수와 더불어 함께 걸어가겠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전자가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를 말한다면, 후자는 예수와 나의 일치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앙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삶을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임과 동시에, 나도 예수처럼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삶을 살겠다는 단호한 결단을 함축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둘은 반드시 함께 존재해야 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이 수반되지 않는 예수에 대한 고백은 자칫 아첨이 될 수 있고, 예수의 삶에 기초하지 않은 나의 삶은 자칫 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하나가 될 때에만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비기독교인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삶에 기초한 기독교인의 삶, 바로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사는 것은 하나입니다.
5. 결론에 대신하여: 우리가 마땅히 물어야 할 두가지 물음
저는 이제 끝으로 두 가지 물음을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면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1) 우리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철두철미 일치시키셨던 예수의 삶이 정말 참되고 올바른 삶이라고 믿고 있는가?
2)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의 삶을 우리들 일생의 삶을 통하여 정말로 재현해보기를 원하는가?
예측되는 대답이 있는 질문이지만, 손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두 개의 질문에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멘”을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이제 예수살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예수살기를 시작하시는 여러분들 위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동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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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부 진보적 내용이 있으나 한번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