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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김순진
추석이 며칠 지난 어느 가을날, 포장 이삿짐 센터의 1톤 트럭이 제비울 마을 어귀를 들어서고 있었다. 마을은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과 함께 벼 베는 콤바인 소리와 함께 방앗간의 방아 찧는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 농로를 달리는 트렉터 엔진 소리, 낫으로 콩 꺽는 소리, 툭 툭 밤이 아름 벌어 떨어지는 소리, 빨갛게 익은 고추 따는 소리, 부짓갱이로 깨 터는 소리가 은행나무 정자 꼭데기에서 손님이 왔다고 우는 까치소리와 함께 이삿짐 센터의 트럭 엔진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제비울은 38선이 지나는 동네로 8.15해방 직후,미군은 지이프를 타고 들어오고, 소련군은 말을 타고 내려와서 서로 협상을 하더니, 개울을 따라 내려가며 말뚝을 박고 38이라는 숫자를 말뚝에 써 놓았는데, 개울 남쪽은 미군의 신탁통치에 이어 이남의 민주주의 정치를 받았으며, 개울의 북쪽은 해방 이후, 소련군 공산 통치를 받다가 김일성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었다. 전쟁 전에는 북쪽에는 압록강의 수풍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 불을 켰으며, 남쪽에는 고무신과 먹을 것이 그런 대로 많았다. 그러던 중에 6.25동란이 터졌는데 전쟁 중에는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의 한군데였다. 마을이 있던 자리가 주암산으로 둘러 쌓인 모습이 마치 제비둥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제비울이라는 지명이 생기기 전에는 풀이 많은 동네라 하여 모동(茅띠모,洞고을동)이라 불렸다. 주암산은 주라이산이라고도 하였는데, 광주산맥의 국망봉을 깃점으로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싼 것과 달리 혈이 없는 산으로, 산의 생김새가 마치 바위가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주라이산이라고도 불렀다. 주라이산 뒤에는 동기 개울이라 불리는 큰 개울이 있었다.
해방촌은 6.25동란 때 가장 먼저 수복되어 공산군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둔덩말은 해방촌 앞 개울의 남쪽에 있는 높은 둔지에 위치한 곳의 이름이고,아랫말은 군대가 주둔하고 동네가 크게 형성하면서 신작로가 생겼는데, 신작로 아래를 아랫말이라고 불렀다. 마을의 남쪽과 북쪽에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고, 남동 쪽으로는 옹장골이 있고, 남서 쪽으로는 돋움산이 있다. 옹장골은 골짜구니가 깊지만 산세가 낮아서 아이들이 새둥지를 찾고, 찔레,시경이를 꺽어 먹고 놀던 곳으로 옛날 고려장 터가 있었던 곳이며, 돋움산은 산의 생김새가 어디에서 흘러 내려온 산이 아니라 홀로 돋움 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잔잔한 산 말미에 산소들이 많아 아이들이 칼을 나무로 깍아 전쟁놀이를 하고 놀던 곳이고, 산자락 밑에는 흰 고령토가 들어 있어 이를 캐어 학교에 준비물로 가져가 탱크도 만들고 지이프 차나 총을 만드는 것이 미술 공부였다.
포장 이삿짐 센터의 트럭은 마을 어귀를 들어 서더니 다리를 건너 해방촌의 스레트 지붕에 블록 벽돌로 조적한 어느 허름한 집 앞마당에 정차했다.
효식이가 귀향한 것은 상경한지 꼭 42년 만인 음력 팔월 스무 나흗 날이었다.
아무도 효식이가 서울로 출세해 보겠다고 간지 42년 만인 팔월 스무 나흗날에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는 반백이 넘는 흰머리에 학계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요,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효식이가 남은 여생을 집필이나 하면서 고향에서 보내려는 것이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냥 귀향해서 여생을 보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꼭 해야 할 숙명같은 일이 남아 있었다.
42년전 부모님께서 개간하여 그분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땅을 팔고 상경할 때에는 그의 이웃이나 친지들이 강경하게 만류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만류를 뿌리치고 상경하였고, 지금은 단군대학 교수이자 어느 정도 부도 쌓은 나름대로의 출세를 하였던 것이다.
그는 우선 작고하신 부모님께서 돌각정이 땅을 개간하여 기름진 땅으로 만들었던 그 땅을 시세보다 윗 돈을 얹어 주고 사들였다.
지금은 수확이 많이 나는 옥토지만 부모님이 개간하시기 전에는 큰 홍수가 나서 흙 한줌 없고 자갈과 바위 덩어리들 만 가득한 황무지였다.
논 옆으로 개울이 흘렀다.
개암밭골과 장좌골에서 흘러 나오는 찬물과 저수지에서 고였다 넘쳐 내려오는 물이 만나 흐르는 냇물이었기에 똥고기라 불리는 1급수에서만 사는 버들치, 개구리를 잡아 돌로 찧어 나뭇가지에 달아 물속 바위틈에 넣으면 잡을 수 있는 가재, 체바구니로 잡던 찡게미 새우, 성질급한 피라미, 무지개 빛을 띈 피라미 숫놈 불거지, 바다에 사는 돔처럼 생겨 등에 가시가 많은 꺽지, 입가에 양쪽으로 가시가 있어 쏘는 빨간색의 퉁가리, 퉁가리처럼 생겼지만 가시가 없는 산메기, 입이 커 작은 물고기를 한입에 잡아먹는 메기, 모래를 잘 파고들어 모래무지라 불리우는 마자, 끓이면 국물이 구수한 미꾸라지나 미꾸라지 보다 좀 짧고 점이많은 미꾸리, 입가에 가시가 있어 쏘는 미꾸라지처럼 생긴 모래무늬의 기름종개, 머리는 버들치처럼 생겼고 꼬리는 미꾸라지처럼 생긴 중태기, 입이 크고 손으로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미련해서 멍텅구리라 불리기도 하는 쭉지, 가지런한 비늘에 손바닥만한 것을 잡을 때면 기분이 썩 좋아지는 떡붕어, 떡붕어 보다 등의 선이 날렵한 참붕어, 붕어처럼 생기고 무지개 빛인 납자루가 살던 개울이었다. 때로는 뱀장어가 잡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구산 앞의 젖소 단지와 장좌골 옆의 돼지 사육 단지에서 흘러 내리는 축산 폐수로 이미 개울의 역활을 상실하고 시궁창이 되어 있었다. 개암밭골은 개암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고 장좌골은 옛날 장씨라는 부자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골짜기에 흐르는 물에는 가재가 많았고 봄이면 개구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 내려와 돌을 한개만 들쳐도 서너마리씩 잡을 수 있었다.
개울의 둑과 바닥에는 무성하던 화번과 식물의 대부 갈대,잎새가 부드러워 송아지가 잘 먹는 아들멕이, 담배 잎처럼 생긴 소르쟁이, 닭 벼슬처럼 생긴 파란꽃이 피는 물 달개비, 가늘고 긴 넝쿨이 죽죽 뻗고 순은 나물로도 먹는 할미밀빵, 나팔꽃처럼 분홍빛의 꽃이 피고 뿌리는 봄에 떡을 해먹거나 밥에 두어 먹는 메꽃, 잎사귀나 마디를 자르면 노오란 진이 나오는 독풀의 애기똥풀, 잎사귀를 따 입에 넣으면 신맛이 나는 괭이밥, 국도 끓여 먹고 나물로도 무쳐 먹는 는쟁이 나물이라 불리는 명아주, 엄지 손톱만한 새콤한 딸기가 달리는 가시가 많은 넝쿨의 멍석딸기, 모양은 집 딸기와 똑같이 생기고 조그만 딸기가 열리지만 먹어 보면 싱거운 뱀딸기,땅속 2미터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방울이 달렸다는 솔잎 모양의 쇠뜨기, 밟을수록 생명력이 강하고 잘 퍼지는 나물 질경이, 물기있는 돌 틈에서 잘 자라는 돌 미나리, 돌 미나리와 함께 물 김치를 담그면 국물 맛이 시원한 돌나물, 봄이면 가장 먼저 나와서 뿌리째 캐어 토장국을 끓이면 구수한 나물 냉이,토끼가 잘 먹어 토끼풀이라 불리는 행운의 풀 클로버, 강아지 꼬리처럼 이삭이 달린 강아지풀, 살짝 데쳐서 고추장에 쓱쓱 무쳐 먹던 비름, 오라버니가 시집간 가난한 여동생을 찾아가자 풀 한 포기를 뽑아 울타리에 걸며 마르면 밥 잡숫고 가시라 했다던 채송화 줄기처럼 생긴 쇠비름,농부들의 땀을 무던히도 빼던 밭의 천적으로 이삭이 우산살처럼 생긴 바랭이, 꺾으면 하얀 진이 나오고 쌈으로도 먹던 씀바귀와 방가지똥, 삼각기둥에 금빛의 꽃이 피는 잡초 방동사니 ,꽃 반지를 만들어 끼고 놀던 보라색 꽃의 제비꽃, 부인에게 좋은 익모초, 만병통치약 약쑥, 키가 큰 제비 쑥, 홀씨가 가고 싶은 곳에 멀리 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봄의 전령사 냉이, 잎 모양 자체가 꽃처럼 생긴데다 노란 꽃이 피는 꽃다지, 연한 순은 나물로 먹는 흰 꽃이 피는 망초, 보라색 꽃이 피는 구절초, 넝쿨과 잎에 가시가 너무 많아 시어머니가 미운 며느리의 밑을 닦으라 했다던 며느리 밑씯게덩굴, 파리와 벌이 달라붙는 끈끈이 주걱을 가진 보락색 꽃의 엉겅퀴, 밤이면 피어나는 달맞이꽃 등의 토종 풀들을 밀어내고 물이면 그만이라는 물고마니,꽃가루가 날려 눈병을 일으키는 돼지 풀, 키가 2미터도 넘어 개울의 진입을 막는 토종 돼지 감자처럼 생긴 돼지 감자 풀 등의 외국에서 들어온 풀 등이 발 딛을 틈도 없이 무성했다.
그는 비록 스레트 지붕이지만 아직 쓸만한 집을 부수고 있었다. 낡은 집에서 나는 먼지와 함께 집은 금방 쓰러졌고 이내 말끔히 정리되었다.사람들은 다시 새로 집을 지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아주 오래된 골동품의 양쪽에 스피커가 달리고 궤짝처럼 생긴 라디오를 틀고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고 있었다.
입자가 곱고 붉은 황토흙을 파 날랐다.
손 작두로 볏짚을 듬성듬성 썰어 황토흙과 함께 물을 부어 쇠스랑으로 퍽퍽 이겨 가며 맨발로 찌걱 찌걱 밟아 섞었다. 그리고 송판으로 짠 흙벽돌 틀에 거름당으로 퍼 넣고 발로 밟아 빼내면 흙벽돌이 되었다.
그렇게 작업 하기를 며칠이 지나자 작은 오막살이 집 한 채를 지을 만큼의 흙벽돌이 만들어졌다.
효식이는 무 밥과 콩나물 밥을 해먹고, 밀 겨와 보릿겨를 얻어다 개떡을 만들어 먹으며 집을 짓고 있었다. 찬밥을 김치와 함께 끓인 김치 죽을 먹으며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속껍질을 먹으며, 칡뿌리를 캐어 껌을 씹듯 질겅질겅 씹고, 찌게미를 얻어다 먹고,논두렁에서 캔 메 밥과 메 떡을 해 먹고,쑥을 뜯어다 밀가루와 섞어 쑥버무리를 해 먹으며 홀로 고된 노동 속에서도 골동품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사연들에 웃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라디오는 효식이가 어릴 적,그의 어머니께서 인삼 밭에 이엉을 벗기는 날품팔이를 해 주시고 삯을 받아 샀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귀향을 위하여 인사동 골목을 샅샅이 뒤져서 구입한 것이다.
흙벽돌로 한켜 한켜 쌓아 올려 골격을 세우고, 수수깡을 엮어 칸을 막고 흙손으로 황토 흙을 발랐다.
주암산에서 베어 온 굵은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대들보를 얹었다. 가늘고 긴 소나무 여러 대를 석가래로 올렸다. 볏짚이 긴 오대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빙 둘러 지붕을 덮고 용마루 위에 용구새를 엮어 얹으니 근사한 초가집이 드러났다. 처마밑에 불쑥불쑥 삐져 나온 이엉을 곱돌 숫돌에 잘 갈은 왜 낫으로 스무 살 청년의 삼고머리 깍듯이 깨끗하게 깎아 단장하니 기품도 있고 지붕 위로부터 부는 바람이 어머니의 훈훈한 치마폭처럼 느껴졌다.
"어이, 친구! 옛날 살던 집을 그대로 지었구먼! 부모님 생각이 어지간했던가 볼세?"
그의 옛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는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아버지께서 힘든 노동을 하시면서도 옥수숫대 두 마디를 잘라 한 쪽 마디는 물이 담길 수 있도록 칼로 파내고 다른 한 쪽 마디는 뒤쪽에 작은 말뚝을 박아 허리에는 곧은 철사를 꿰어 떨걱 방아를 만들어 물가에 설치해 주시고 호박잎 줄기를 떼어 호스를 삼아 물이 담기면 무거워져서 방아를 찧곤 하던 생각이며, 어린 호박과 오이에 말뚝을 박아 돼지와 강아지, 송아지 등의 가축을 만들어 모래밭에 동물 농장을 지어 주시던 생각, 어머니께서 무쇠 솥에 들기름을 두른 후 감자를 얇게 썰어 솥 안에 깔고 그 위에 막걸리로 반죽한 밀가루 반죽을 얹어 불을 때서 노릇 노릇하게 만들어 주시던 감자 점떡과 솥뚜껑을 뒤집어 들기름을 휘휘 둘러 김치며 부추,고추를 쓱쓱 썰어 넣고 붙여 주시던 잡전, 소당떡(솥뚜껑에 붙이는 떡, 지금의 부침개)을 잊을 수가 없었다.
넓쩍하고 얇은 돌을 주워다 방구들을 놓았다. 철조망을 걸던 철줏대를 구해다 아궁이를 만들었다. 가마솥과 양은솥 두 개를 사다 부뚜막을 걸었다. 1년 생 싸리 가지를 베어다 비틀어 펴 대각선으로 엮어 방문을 만들어 달았다. 뒷 곁이 보이는 창문은 각목으로 짜서 창호지를 발라 들창으로 달았다.벽에는 신문지를 바르고, 천장에는 빙 둘러 못을 박고 철사로 엮어 책장을 찢어 붙였다. 나무를 켜는 제재소에서 죽데기 몇 개를 사다 쪽마루를 놓았다. 긴 낙엽송 두 개의 껍질을 벗겨 방구석에 시렁을 얹었다. 네모나고 넓쩍한 바위를 주워다 댓돌을 놓았다. 부엌의 부뚜막 위에는 나즈막히 그릇을 얹어 놓을 선반을 달았다. 옛날에 큰 절이 있었다던 불당골의 산비탈에 많이 자생하는 어린 참나무를 베어다 집의 둘레를 빙 둘러 지렛대로 지그재그 구멍을 뚫고 참나무를 꽂아 허리를 다시 참나무를 대고 칡으로 엮어 울타리를 세웠다.싸리 가지를 엮어 만든 싸립문도 달았다.
효식이는 비로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하하하,이제 집이 다 되었으니 큰일만 남았구만!"
그는 스스로 흥에 겨워 중얼거렸다.
번개불에 콩을 구어 먹듯 속성으로 초가집을 완성하고 오랜만에 고향에서 겨울을 난 그는 봄이 되어 눈이 녹고 해토가 되자 어디선가 굴삭기 한 대를 임대해 왔다.
우선 그는 그가 사들인 부모님께서 경작하시던 논의 개울 마구리의 물꼬에 들여 놓고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영문을 물었지만 효식이는 양어장을 만든다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장차 큰 홍수가 나면 큰물이 자신의 논에 몰아칠 수 있도록 공사를 지휘하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느 정도 작업을 끝낸 그는 날이 어둡자 굴삭기 기사를 독려하여 저수지 둑 옆에 세워 두었다.
써렛골과 장좌골 사이에 있는 저수지는 날이 어둡고 산속인지라 인기척이 없었다.
써렛골은 산 골짜구니가 많아 마치 써렛발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써렛골에는 다래도 많지만 특히 머루 밭이 있어 처서가 지나면 아이들의 주 공격지였다. 자정이 넘어서자 효식이는 굴삭기 기사에게 뭉칫돈을 건넸고, 굴삭기 기사는 순식간에 저수지 한쪽 둑방을 깊숙하게 파헤치고 가져온 화물차량에 굴삭기를 싣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봄인지라 눈이 녹아 흘러 들어 만 수위를 육박하던 저수지의 잔잔하던 물은 조금씩 둑방을 파헤치며 흘러 내리기 시작하더니, 일제시대에 부역으로 사람을 동원하여 흙으로 막은 사력 댐인지라, 성난 파도와 같이 둑방에 자란 수십 년 된 버드나무의 뿌리를 송두리째 삼키고 마구 파헤치며 휩쓸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물은 태풍을 능가했다.
차라리 토네이도 보다 무서웠다. 성난 맹수의 발톱이 있는 듯 하였다. 콘크리트로 새로 놓은 해방촌의 다리를 삼키고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갈비뼈처럼 물위에 흰 뿌리를 하늘로 솟구치며 물 속에서 구르는 바위들과 함께 쿠르릉쿠르릉 울어 댔다. 아이들 너 댓 명이 올라가 놀던 바위를 공깃돌처럼 굴려 쓸고 갔다. 도랑과 같았던 냇물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물은 차라리 악마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수마라 했던가? 물은 천둥소리를 울리며 효식이가 굴삭기로 유인해 놓은 물길을 따라 그의 논을 사정없이 훑으며 할퀴고 지나갔다.
효식이는 마을 앞 동산의 소나무에 기대고 앉아 먼동이 트는 어슴프레한 시야에 수마가 자신의 논을 삼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큰소리로 웃어 댔다.
"으하하하하!"
그는 마구 소리쳤다.
"잘 두 떠내려간다. 그래! 몽땅 떠내려가라, 흙 한줌 남기지 말고 모조리 떠내려가라!"
그 날 밤 마을의 스피커에서는 홍수가 났으니 대피하라는 이장의 목 쉰 소리가 밤을 새웠다.
날이 새자 개울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조용해졌으나 효식이네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 씨팔눔아 내땅 내놔라, 내 땅 내놔!"
전답이 떠내려간 사람들이 효식이 멱살을 흔들며, 두들겨 패고, 짓밟고 아비귀환이 따로 없는 난장판이었다.
"효식이 어디 갔냐, 이 개새끼! 내 돼지 살려 놔라, 우리 돼지 내놔!"
서울에서 도시 영세민으로 융자를 받아 내려왔거나 영농 후계자로 돼지 사육 작목반을 결성하여 돼지를 기르고 있던 사람들이 미쳐 날뛰며 절규했다.
그가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경찰관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몸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눈은 양쪽이 모두 일그러져 있었고 시퍼런 피멍이 그를 알아 볼 수 없게 했다. 입술은 퉁퉁 부어 음식을 넣을 수 없었고, 팔과 다리,가슴이며 갈비뼈, 허벅지 할 것 없이 온통 피멍이 들어 쑤시고 아파서 돌아 눕거나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며칠간의 치료가 끝나자 그는 수갑이 채워진 채로 구치소로 호송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고 2년형이 구형되었지만 상고하지 않았다. 어차피 치르려 했던 대가 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재산 피해는 컸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재판관의 말은 그가 '초범이지만 선량하고 무고한 많은 사람들에게 물적 심적으로 많은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비교적 무거운 실형을 선고한다'고 하였다.
그가 교도소로부터 출감한 것은 그로부터 꼭 2년 뒤의 어느 봄날이었다.
옥살이를 하며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모습을 보며 동네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그는 이미 교도소에서 그의 처와 두 남매로 하여금 서울 집과 재산을 처분하여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해 주었고, 저수지도 새로 막는 공사가 시작 되었다.
자신이 흙벽돌을 찍어 가며 손수 지은 초가집에 돌아온 그는 수척한 얼굴로 그래도 웃었다.
이제부터 그가 바라던 바를 실현할 수 있도록 모든 걸림돌이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2년의 수감 생활 동안 초가지붕이 썩고 천장이 쥐 오줌에 찢어져, 누워서 하늘을 보니 별이 눈에 들어왔다. 효식이는 또다시 땔나무를 하며 깡보리밥에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보이는 허연 김치 쪽을 찢어 먹고 감자, 무 밥, 쑥버무리로 연명하며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아....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 이제 당신의 아들은 당신이 살고 가신 길을 따라 가고자 하나이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는 그의 아내와 두 남매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엄마 아버지는 이보다 더한 흙벽돌 맨 구들 위에 주무시고 풀뿌리로 연명하시면서 돌각정이 땅을 옥답으로 일구셨지..... 그 땐 배고픔을 자식 얼굴 보는 것으로 이기시고 고된 노동 속에서도 논가에 있는 돌담의 틈에 손을 넣어 파랑새 알을 꺼내 내게 보여 주시며 웃으셨어! 이제 나는 그 때 그 모습으로 돌을 캐고 흙을 손수레로 실어다 부어 논을 만들고 돌담을 쌓아 파랑새가 살게 해야겠어!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풀 죽도 제대로 잡숫지 못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시다가 마흔 두 살의 꽃같은 나이에 팔월 스무 나흘 날 돌아가신 거야. 돌아가실 때 군부대 울타리 밖에서 군인들이 빨기 싫어서 버린 군인 광목 빤쓰를 주워다 빨아 입고, 약 한첩 제대로 잡숫지 못하면서도 내겐 크레용, 도화지 사주지 못하심을 안타까워 하시며 돌아가셨지! 정인보 시인이 <어머니>라는 시에서 '보공조차 없더라'고 하더니 그게 우리 어머니일 줄이야? 우리 아버지는 결혼하여 세간 살이 나오실 때 논 한 마지기 얻지 못하시고 놋 숟가락 두 개와 밥 그릇 두 벌로 살림을 나셨어. 지난번에 내가 저수지를 터놓아 떠내려간 논이 아버지께서 경작하시던 논인데,그전에는 남의 땅을 소작하셨어.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의 어느 가을날,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논가의 논두렁에 아버지께서 나를 업고 서서 말씀하셨지.
'저 벼를 베어서 쌀밥해 줄께'
나는 지금도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여보! 그 이튿날부터 가을 장마가 지더니 집중호우에 저수지가 터져서 그만 금방이라도 베기만 하면 먹을 벼가 지금처럼 모조리 떠내려 갔던 거야."
효식이는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 삼키며 말을 이었다.
"논이 떠내려가고 너무나 변하여 돌 밖에 남지 않은 황무지 땅을 아무도 개간하려는 사람이 없었지.그래서 몇 년 간을 그냥 버려진 땅으로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남의 장려 소를 몇 년이나 기른 끝에 마침내 내 소로 만들어 팔아서 그 황무지를 싼값에 사셨던 거야.그리고 다시 몇 년에 걸쳐서 지금처럼 그 흔한 목 장갑 한 켤레 끼어 보지 못하시고 지렛대로 돌을 흔들고, 곡괭이로 돌을 캐고, 어랭이에 돌을 주워담아 손수레에 실어 날라 개울둑은 아버지께서 캐신 돌로 채워졌지. 그리고 손수레에 황토흙을 싣고 날라다 논에 붓기를 수 삼 년 만에 문전 옥답을 만드셨던 거야. 아버지께서는 하도 돌을 캐시고 들어 올리셔서 아예 손가락에 지문이 없어져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못할 정도이셨으니 당신도 짐작이 가겠지? 내가 출세에 눈이 어두워 그런 땅을 팔아 가지고 서울로 갔으니 어찌 가슴에 사무치지 않겠어요. 여보!"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보! 이제 나는 어머니처럼 풀뿌리로 연명하며 아버지처럼 굶주린 배를 안고 곡괭이로 돌을 캐고 지렛대로 흔들어 당신들의 고행을 체험하며 따르겠소.논 을 일구고 논둑에 돌담을 쌓아 파랑새가 와서 알 낳는 것을 보고 싶소.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요!"
너무도 비장하게 말하는 효식이의 말에 그의 아내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장좌골과 개암밭골에서 얼었던 물이 녹아 효식이의 논 아닌 논바닥을 개울 삼아 흘렀다.
할미새가 미끈한 몸으로 날아와 꼬리를 쫑긋 쫑긋 하며 물을 찍어 바르고 단장했다.
효식이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거의 쉬지 않고 곡괭이로 돌을 캐고 손수레로 실어 날랐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오랜 옥살이와 고된 노동으로 지칠 대로 지쳐 쇠잔하였다.
"옛날, 아버지는 그렇게도 힘들고 궁한 중에도 내게 옥수숫대를 파내어 떨꺽방아를 만들고 호박잎 줄기를 호스 삼아 장난감을 만들어 주셨는데....."
효식이는 어느 정도 돌을 캐내어 평평해진 논에 황토흙을 실어다 부으려고 손수레를 끌면서 중얼거렸다.
효식이는 그 해 논에 모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너무나 심한 노동과 고행으로 인하여 논바닥에 피를 토하고 죽어 있었다. 거친 땅 위에 막대기로 '파랑새'라는 세 글자를 써 놓고서.
아마도 파랑새는 그 색깔로 보아 물총새인가 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