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이씨방 원문보기 글쓴이: 이민영
무궁화 꽃은 정말 피었을까? 이휘소 핵무기개발과 노벨상 수상후보의 진실
jstinKIM의 탐구생활
이휘소, 핵폭탄 제조 책임자라는 오명을 쓰고 불우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한국 출신의 천재적인 물리학자 이휘소를 두고,
1960년 중반에 이미 이휘소에게 노벨상이 수여되어했을 거라는 인터뷰를 했고,
1962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국제 고에너지 물리학회의 참석후, 이휘소는 말했다.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 ............. ----------------------
박사는 우리광李가 낳은,천재학자이시다,
이휘소 李輝昭 jstinKIM의 탐구생활
이휘소(李輝昭, Benjamin W. Lee, 1935년 1월 1일 ~ 1977년 6월 16일)는 한국 출신의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1974년 미국 원조 AID 차관(서울대학교 교육 차관)의 평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그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다.
무궁화 꽃은 정말 피었을까? 이휘소 핵무기개발과 노벨상 수상후보의 진실
jstinKIM의 탐구생활
의문사 논란 뉴욕 타임스의 부고에 따르면, 도로 건너편에서 사고가 난 유조차의 바퀴가 굴러와서 이휘소 가족의 차 앞유리를 강타한 것이다. 가족들은 경상을 입었지만, 이휘소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반대편에서 사고가 난 타이어가 운전석 창문에 맞는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 미심쩍다고 여겨, 당시 국회에서 의문사 청문회를 했다.
대중문화에서의 이휘소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밝히는 진실
이휘소 소문의 진실들
핵무기 개발 참여설
우리나라에서 이휘소 선생은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철학과는 무관하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정책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마치 선생께서 이 사업에 깊숙이 관여한 중심인물이어서 미국 정보기관이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암살했을 가능성이 사고 당시 언론에 제기된 적이 있었다. 1989년에는 "핵 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책이 출판되어 이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필자는 미망인 마리안 여사에게 사실 무근임을 확인한 후 책의 저자를 만나서 조용히 책의 수거를 다짐받았는데, 1993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베스트 셀러로 등장하면서 사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비록 픽션이라는 단서를 달았어도 뼈대는 사실이라며 주인공으로 가명을 썼어도 이휘소의 작품명이라는 등 그럴듯하게 꾸며대었다.
선생께서 한 때 Princeton의 고등연구소에 재직했었는데 맨하탄 프로젝트 책임자이었던 Oppenheimer가 소장이었고, 최초로 핵 반응로를 건설한 Fermi를 기념한 Fermi연구소에 재직했으며, 필자가 추모사에서 자녀들이 박정희 대통령께 편지하여 한국 우표를 받아 학교전시에 사용했다고 기술한 것과 그의 사후 선생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는 사실을 마치 대통령의 친서가 오가는 등 청와대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각색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핵무기 개발은 소립자물리 이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 초기단계에서는 핵반응 산란단면적 등 과학적 데이터가 중요하였기에 핵 물리학자들이 참여했으나 이들은 이미 공개된 과학정보이고 핵무기 개발의 핵심은 핵연료 농축 등 제작공정과 관련된 기술이기에 선생과는 더욱 무관한 것이다.
실제로 선생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고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도 비판적이었다. 1970년 전후로 인도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과학자간에 화제가 되었는데 필자는 당시 선생께서 핵무기 확산에 관한 큰 우려와 함께 개발도상국 특히 독재 체제하의 개도국에서 핵무기 개발을 매우 비판적으로 언급한 것이 기억난다.
선생의 개인 소유 학술자료는 북경대학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경대학에는 도서관에서 흔히 보는 학술지 인쇄본이 기증되었으며, 유품 중 연구일지, 연구노트, 개인장서 등 귀중한 자료는 1991년 미망인 마리안 여사가 고려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여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필자는 기증 자료들을 인계하기 전 세밀하게 검사하였으나 한국정부와의 접촉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
선생의 독제 체제에 대한 비판은 유신 이전부터 강했다. 보기로 1971년 여름에 당시 한국과학원 정근모 부원장(전 과기처장관)과 선생간에는 한국에서 물리학 하계대학원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잘 정착되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선생은 한국에서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을 보고 1972년 초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 중인 하계대학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하계대학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유신 이후에 선생은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 친구들에게 말씀하면서 한국 정부를 더욱 비판하는 자세이었다. 1974년 서울대 AID 차관 심사 때에도 주위에서 한국정부는 미워도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해서는 도와야 한다라는 한국인 동료 과학자들의 조언 때문에 마지 못해 응했다는 것이다. 그 후 생각이 바뀌어 1978년 동경에서의 고에너지 국제학술회의 직후 여기에 참석한 세계 석학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학술회의를 열 수 있도록 가까운 해외 한인 동료들과 추진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선생께서 계획했던 1978년 서울에서의 물리학 국제학술회의는 이휘소 추모 학술회의가 되었다.
노벨상 후보
우리 나라에서는 그 동안 상당한 과학기술 투자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아직 노벨과학상 수상자 한명도 배출하지 못하는가 하는 사회의 아쉬움이 크다. 가끔 언론매체를 통해서 홍보되는 많은 "한국의 노벨상 후보자"들이 과연 국제적으로 얼마나 그 수준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궁금한 가운데 이휘소 선생에 관한 세간의 인식은 상당히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노벨과학상 시상규정에는 최다 3명까지, 또 2개 분야 이내에서 시상하는 제한조건이 있고 한번 수상된 분야는 다시 시상되지 않는다. 물론 죽은 사람은 수상할 수 없다. 흔히 "이휘소는 가장 노벨상에 접근한 한국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비록 제자된 입장이지만 이휘소 선생의 업적만으로는 노벨상 수상이 힘들고 생존해 계시다면 그 동안의 쌓은 업적으로 충분히 수상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지금까지 유지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일 선생께서 노벨상을 수상한다면 그 업적은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와 "참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업적 중의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후자에 관하여는 J/Ψ 입자의 발견으로 이미 1976년 Richter와 Ting이 수상했다. 이 때가 선생께서 수상하기 좋은 기회였으리라. 그러나 참쿼크에 관한 아이디어를 먼저 제공한 Glashow와 이를 십분 활용한 "GIM 기법"의 다른 저자들을 고려할 때 최다 3명의 제한 때문에 노벨상 위원회로서는 선생만 포함시키기는 어려웠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똑같은 업적으로 수상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참입자와 관련된 수상기회는 1976년에 사라졌고 남은 것은 재규격화로 수상하는 것인데 원래 이론물리 분야는 실험물리 분야보다 수상하기 힘들며 또한 재규격화에 관한 한 일차적 공로는 't Hooft에게 돌아가기에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t Hooft와 그의 지도교수였던 Veltman이 금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임을 볼 때 선생께서 생존하셨더라면 이들과 함께 수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는다. 노벨상 위원회는 "물리학에서 전자기-약작용에 관한 양자구조를 밝힌" 공로로 시상한다 했는데 B. W. Lee, 't Hooft, Veltman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상자가 될 것이다. 비록 그 동안 생존만 하시고 더 이상 아무 학문업적이 없으셔도 금년도 수상자 대열에 끼는 것은 재규격화 이론에 관한 그의 업적으로 볼 때 상당한 객관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휘소는 가장 노벨상에 접근한 한국인이라기보다 이휘소는 생존했더라면 1999년 노벨상을 확실히 수상했을 한국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생존하셨을 경우 과거 22년 동안 그 이전에 이미 이루신 이상의 학문업적을 성취하셨을 것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휘소 선생께서 타계하신 1977년 이후 우리 나라의 과학계는 엄청난 발전을 하였다. 그러나 과학자 인력층이 넓어지고 다양해졌을 뿐 최소한 물리학 분야에서는 선생의 학문적 경지와 수준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없다고 본다. 우리 나라는 언제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겠는가 하는 국민적 갈망을 가끔 듣는다. 이휘소 선생께서 생존해 계시어 금년도 수상자 대열에 포함된다면 선생은 30대 후반 나이에 이룬 업적으로 25년 이상 지난 60대 초반에 수상하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볼 때 앞으로 과연 20년 정도 후에 노벨상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세계적 수준에 이미 도달한 과학자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선생께서는 6.25 전쟁통에 중·고등학교 교육도 부실하게 받았으나 미국에 유학하여 대학/대학원 시절에 좋은 교육을 받으므로써 한국인으로서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셨다고 본다. 가령 선생이 아직 생존, 금년도 노벨상을 받는다고 가정해도 한국계 미국인이 받고 미국이 배출하는 것이며, 한국인이 수상 또는 한국이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는 노벨과학상을 배출한 26개국 대열에 아직 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과학교육에 무슨 문제점이 있기에 국내에서는 아직 선생과 같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배출하지 못하는가 반성되는 바가 많다.
업적
쉬운 예로, 언덕 꼭대기에 놓인 공을 생각하자. 공이 사방으로 동일하게 보이는 언덕위에 놓인 상태는 주위 어느 방향이나 동등하므로 회전적으로 대칭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불안정하다. 약간만 건드려도 공은 어느 한 방향으로 굴러 떨어진다. 공이 굴러 떨어지는 방향은 다른 방향들과 구별되므로, 대칭이 깨진다. 자발적으로 대칭이 깨질 때 바닥 상태 근처에서는 대칭이 깨져 보이지만, 이론 전체는 여전히 대칭을 지닌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대칭 깨짐이라는 말 보다는 "대칭 숨겨짐"(hidden symmetry)이라는 말을 쓴다. 대표적인 예로 선형 시그마 모형 (linear sigma model), 살람 와인버그 이론의 힉스 메커니즘, BCS 이론이 있다.
이휘소와 c 쿼크
특히 그 발견으로 이후의 물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더욱 괄목할 일이다. 1970년대 K-중간자의 희귀붕괴 과정에서 새로운 쿼크가 예견됐는데 이 현상을 연구하던 입자물리학자들은 이 쿼크를 c 쿼크라고 가정했다. 이휘소는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이 가상입자에 관해 심층적으로 연구했고 1974년 c 쿼크의 존재를 입증했다. 1976년 이를 연구한 연구자들 중 리히터(Richter)와 팅(丁筆中) 두 사람이 대표로 노벨상을 받게 되는데 이휘소도 노벨상에 매우 근접했다고 한다. 새로운 c 쿼크의 발견에 이어서 b·t 쿼크가 발견됐다. 이로써 현재 널리 활용되는 소립자 물리이론의 틀이 갖춰졌다. 이처럼 이휘소의 수많은 연구 업적 중에 c 쿼크라는 새로운 소립자를 알아낸 것은 물리학사의 큰 흐름을 만들었다.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글 jstinKIM의 탐구생활
1977. 6. 16 교통사고로 타계
1953서울대학교 화공학과 입학 1955미국 유학 1956Ohio주 Miami 대학 졸업(이학사) 1958University of Pittsburgh 대학원 졸업 (이학석사) 1960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원 졸업 (이학박사)
1960~66University of Pennsylvania 물리학과 교수 Princeton,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연구원 1966~73뉴욕 주립대학 (Stony Brook) 물리학과 교수 1973~77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이론물리학부장 University of Chicago 물리학과 겸임교수
이휘소(李輝昭, 19351977) 선생은 1935년 서울 출생으로 경기 중·고등학교를 거쳐 고교 재학 중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공대 화공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끝난 직후 1954년 도미하여 1956년 Miami 대학에서 학부를 졸업, 1958년 Pittsburgh 대학에서 석사, 1960년 Pennsylvania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Princeton의 고등 연구원, Pennsylvania 대학, 뉴욕 주립대(Stony Brook) 교수를 거쳐 1973년 Fermi 국립가속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하였다. 곧 Chicago 대학의 교수도 겸임하였다. 소립자 물리학자로서 우수한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연구활동이 절정기에 이르러서 세계의 주목을 크게 받고 있을 때, 1977년 6월 16일 향년 42세로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타계하셨다.
이휘소 선생의 타계 후 2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한국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평가된다. 미국 이름이 "Benjamin W. Lee"로 알려진 그는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 전개되는 이론 선두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아간 세계 정상급의 이론가였다. 1960년대에는 수학의 그룹 이론이 소립자간의 핵력과 같은 강상호작용 현상연구에 많이 응용되었는데 SU(6) 그룹을 이용하여 양성자, 중성자 같은 핵자의 자기 모먼트 계산으로 입자계의 대칭성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카이랄 대칭과 유동대수 이론을 통하여 강입자들의 상호작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므로써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다. 이것은 곧 카이랄 역학으로 이어져 대칭의 자발적 파괴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휘소 선생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에서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과 참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이다. 핵의 베타붕괴 같은 소립자의 약상호작용에 관한 Fermi 이론은 1950년대 후반 공간반전 대칭의 깨짐이 알려져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전자기작용과 약상호작용을 통일장 원리에서 추구하는 이론들이 생겨났지만 약작용과 관련되는 게이지 장의 재규격화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 문제는 1970년대 초기에 이론적으로 해결되었는데 지금은 표준이론이 되어서 "전기"와 "자기" 현상을 통합설명하는 Maxwell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휘소 선생은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물리학자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에는 K-중간자의 희귀붕괴 과정연구에서 새로운 참 쿼크가 예견되었는데, 이휘소 선생은 참 쿼크의 탐색방도를 여러 방면으로 제시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1974년 가을에 발견된 J/Ψ 소립자로 이휘소 선생은 단순히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에서 더욱 유명한 "현상론 물리학자"가 되었다. 그 후 이 논문에서 제시한 입자탐색 방법은 지금까지 고에너지 물리 현상 연구에 관한 정통적인 연구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재규격화 이론에 관한 그의 업적도 세계 정상급이었지만 참 입자 탐색에 관한 논문으로 그는 흔히 노벨상 수상자 후보였다는 평을 많이 받고 있다. 선생께서는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14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1974년부터 전산화된 SPIRES 데이터베이스에는 비록 60여편 정도 수록되어 있으나 인용회수는 모두 10,000회에 이르고 있다.
이휘소 선생은 그의 학문적 업적 이외에도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큰 기여를 하였다. 1974년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학의 이공계 교육 증진 계획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같은 외국 차관에 의한 국내 대학교육 기자재 구입, 확충은 1980년대 한국의 대학원 수준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실험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한국이 고에너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하였다.
선생을 소재로 한 허구적인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그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려졌는데,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는 정반대로 한국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선생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무리 미화하려는 의도라 해도 당신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어 오히려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이고, 학문적인 업적에 관한 학계의 일반적 인식을 돕기 위하여 필자가 제자로서 관찰했던 바를 물리학 발달의 큰 맥락에서 몇 가지 기술하고자 한다.
재규격화 이론
양자역학의 틀이 완성된 후 1930년대에는 전자기장을 양자화하려는 양자 전자기학에 문제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섭동이론을 쓰는데, 사용하는 매개변수인 미세구조 상수, α(=1/137)가 작아서 언뜻 보기에는 체계적인 급수전개에서 고차항을 포함할수록 예측정밀도가 높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에 수반한 상수가 무한대가 되어 의미 없는 이론이 되었다. 해결책으로 전자기장을 재규격(renormalization)하므로써 양자 전자기 이론이 비로소 "예측가능한 이론"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공"에서 "가상적인 입자"들이 창생되어 원래의 입자 주위에 구름을 만들어 전하나 질량이 다시 새로운 규격에 맞게 되는 것이다. 재규격화된 양자 전자기 이론은 놀랍게도 그 성능이 엄청나게 좋아서 음전자의 자기 모먼트처럼 10-12의 정밀도 이내에서 실험값과 이론예측이 일치하는 사례도 알려져 있다. 이는 서울-부산간의 거리를 종이 한장 두께의 1/100 정도까지 이론적으로 예측하는 것에 견줄 정도이다. 양자 전자기장 이론 확립에 관한 공로로 Feynman, Schwinger, Tomonaga는 1965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약상호 작용에 관하여는 비록 Fermi 이론이 있었으나 양자전자기 이론과는 달리 재규격화가 불가능했고 대칭성이나 상대론적 변환에 따른 특성도 분명하지 않았었다. 1950년대에 발견된 공간반전 대칭의 파괴현상(1957년 Lee, Yang 노벨상 수상)으로 약상호작용의 구조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게이지 이론의 입장에서 본 전자기 이론을 약작용력에 적용하여 비가환성의 게이지 Yang-Mills 이론으로 발전되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전자기 이론은 가환 게이지 양자장론이다. 게이지 대칭과 연관된 게이지 입자는 무질량이어야 하는데 전자기에서는 광자가 바로 무질량이어서 괜찮다. 그러나 약작용을 매개하는 게이지 입자는 지극히 큰 질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며 재규격화 문제와 맞물려 게이지 대칭도 깨져야 하므로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더욱이 고에너지로 갈수록 양자역학적 확률이 보존되지 않는 소위 유니타리티 문제까지 겹쳤다. 게이지 대칭이 "자발적"으로 깨지는 Higgs 현상에 근거하여 Weinberg, Salam, Glashow(1979년 노벨상)는 현재 "표준모델"의 모체가 되는 전자기-약작용의 매력적인 통일이론을 제창했지만 재규격화 문제 때문에 "예측가능한 이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 Veltman은 네델란드에서 Schoonschip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오늘날 Mathematica 프로그램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것은 수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기호를 조작하여 대수적 연산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비가환성 게이지 이론을 섭동전개할 때 상당수의 Feynman 도식에서 "무한대"들이 서로 상쇄되어 유한해지고 의미있는 이론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지도학생이었던 't Hooft는 비상한 수학지식을 활용하여 학위논문에서 이를 입증했다. 곧이어 이휘소 선생은 "Spontaneously Broken Gauge Symmetry"라는 제목으로 5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틀을 굳건히 만들었다. 그 이전에 제안된 Feynman, Fadeev, Popov 등의 아이디어를 "Functional 방법"으로 깨끗이 처리하여 유니타리티 문제도 해결하고 비로소 자발적으로 깨지는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이론이 정립되었다. Feynman, Schwinger, Tomonaga가 가환 게이지 이론을 재규격화하였다면 B. W. Lee, 't Hooft, Veltman은 비가환 게이지 이론을 재규격화한 것이다. 선생의 Functional 방법은 그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론 물리학도들의 정통적인 연구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재규격화에 관한 업적으로 Veltman과 't Hooft는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휘소 선생이 생존하셨더라면 금년에 노벨상 공동수상이 확실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휘소 선생의 서거 후 게이지 이론은 물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전자기-약작용의 통합 뿐만 아니라 핵력같은 강상호작용까지 포괄하는 소위 "표준모델" 이론이 통용되었고 대칭성에 근거한 여러 가지 변형된 "모델"이 심도있게 연구되고 있다. 현재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최대 관심사는 비가환 게이지 대칭이 자발적으로 깨져서 극히 짧은 작용거리의 약작용을 가능케하는 Higgs 입자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휘소 선생은 물리학 발전과정에서 큰 획을 긋는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다. 그 밖에도 K-중간자의 희귀붕괴, 천체 물리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내셨으며 이 모든 것이 향년 42세까지의 업적임을 감안할 때 선생같은 세계적 석학이 일찍 타계하시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물리학계 발전에 얼마나 큰 원동력이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참 입자의 탐색
필자가 학위를 마친 다음 해인 1973년 이휘소 선생께서는 Fermi 국립가속기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시어 이론물리학부의 초대 전임부장에 취임하셨다. 선생 정도의 학문업적과 사회명성을 가진 학자라면 대개 좀 더 자유스런 분위기의 대학 연구환경을 선호하는 것이 보통이겠으나 그는 Fermi연구소에서 새로운 도전을 느끼신 것이었다. 당시 Fermi연구소에는 세계 최고의 에너지로 입자를 가속시킬 수 있는 가속장치가 건설되었다. 당연히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대학과는 연구환경이 약간 다른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선생은 눈에 안보이는 압력과 시선을 느꼈다. 대학의 이론가들은 관련학계의 추세 변화에 따라서 비교적 쉽게 연구주제를 바꿀 수 있다. 연구소에서도 원칙적으로는 마찬가지이지만 엄청난 국고지원을 받는 거대 연구시설이 있기에 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연구가 더욱 환영받는 분위기였었다.
앞서 기술한 재규격화 이론이 정립된 후 커다란 학문적 진전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점근적 자유론(asymptotic freedom)"이었다. 입자의 에너지가 높아져서 이들이 서로 가까이 갈수록 입자간의 작용력이 약해지고 마치 자유로운 입자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Politzer와 Wilczek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에 't Hooft가 인지하고 있었다. 한 세미나에서 Symanzik이 재규격그룹 방정식을 강의하면서 그중 어떤 계수의 부호가 양자 전자기학과 반대가 되면 점근적으로 자유로울 가능성을 제기했는데 't Hooft는 자기의 연구노트를 보고 비가환 이론에서는 사실임을 알았다. 후에 Wilczek은 필자에게 이휘소 선생의 논문에서 Feynman 법칙 중 부호가 틀렸기에 자신이 점근자유 이론을 발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토록 선생의 재규격화 논문은 당시 이론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 점근자유 이론에 의하면 양전자-음전자가 소멸하여 모든 에너지가 강입자로 변환하는 빈도를 뮤온입자 쌍생성 빈도와 비교할 때 충돌 에너지가 높을수록 자연에 존재하는 쿼크의 종류로 결정되는 특정한 상수 R에 접근해야 함이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 MIT에서 운영종료를 앞두고 측정한 가속기 자료에서 이 R 값이 상승하는 것이 밝혀지면서 여러 가지 이론적 예측이 나돌았다.
1974년 여름 선생은 이 문제를 몇 년 전 제안된 참 쿼크의 존재와 연계하여 "Search for Charm"이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완성하였다. K-중간자의 희귀붕괴 과정을 분석하면 기묘도가 바뀌는 중성흐름은 없어야 하는데 이에 앞서 수년 전에 Glashow, Iliopolous, Miani (GIM)가 당시 알려져 있던 u, d, s 쿼크 이외에 질량이 훨씬 큰 c 쿼크가 추가로 존재하면 가능하다는 이론을 발표한 바 있었다. 점근이론에 어긋나게 R값이 상승하는 것을 당시에 필자는 다른 관점에서 연구했는데 선생께서는 이미 c 쿼크의 존재와 연결시킬 혜안을 갖고 그 탐색방안을 연구하셨다. 당시 Fermilab을 방문했을 때 필자의 연구방향을 말씀드리자 "주상군, 점근이론은 맞을 터이므로 R이 올라가면 다시 내려와야 하고 그러면 그 사이에 무언가 새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시면서 c 쿼크를 암시하였던 점이 기억난다. 그는 비록 이론 물리학자이지만 실험물리학에도 전문가가 되어 c 쿼크가 존재할 경우 이들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입자들의 성질을 규명하였다.
그런데 1974년 11월 11일 "혁명"이라 불리울 정도로 역사적이라 할 수 있는 J/Ψ 입자가 BNL과 SLAC의 두 연구소에서 동시에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1976년 Richter, Ting은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새 입자는 곧 c 쿼크의 결합상태임이 분명해졌고 선생의 "Search for Charm" 논문은 실험 물리학자들간에 필독의 지침서가 되어 많은 실험제안서들이 나왔다. 이 논문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cc 결합상태는 평균수명이 지극히 길어서 사진건판으로도 수명 측정이 가능하리라"는 이론적 예언이다. 일반적으로 입자의 수명이 길 때에는 검출기에 나타나는 비행거리로서 수명을 재고, 짧을 때에는 입자가 표시하는 공명상태의 에너지 폭에서 Heisenberg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 평균수명을 계산한다. 보통 강입자들의 붕괴는 빨리 일어나므로 평균수명이 지극히 짧고 흔히 후자의 방법이 이용된다. 그러나 ss 결합입자인 φ-입자의 수명이 의외로 긴 점에서 착안된 Okubo-Zweig 규칙은 선택률처럼 입자붕괴 문제에 응용되었고 선생은 이를 cc 결합상태에도 적용하여 J/Ψ 강입자의 평균수명을 비행경로에서 직접 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J/Ψ 입자가 발견된 후 이 착상은 Fermilab의 E531 실험으로 추진되었고 한국이 고에너지 물리실험 분야 국제 공동연구 사업에 참여하는 기반을 닦고 국내의 고에너지 실험물리학을 활성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Search for Charm"같은 현상론적 논문은 실험물리 학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었고 곧이어 이론적으로는 알려져 있으나 실험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현상탐구의 "Search for xxx"식의 현상론 풍조가 생겨났다.
무궁화 꽃은 정말 피었을까? 이휘소 핵무기개발과 노벨상 수상후보의 진실
이휘소 Benjamin W. Lee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글 jstinKIM의 탐구생활
|
첫댓글 "광주 이씨" 인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