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 <타임 라인>은 지적 호기심과 과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결합하는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마이클 크라이튼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를 주무르는 이 거물급 지식 소설가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프랑스 라로크 성의 유적을 발굴하던 탐사단 일행은 14세기의 유물 가운데 존스턴 교수의 안경 렌즈와 친필 서명을 발견한다. 탐사단 일행의 대표인 존스턴 교수는 얼마 전 유적 발굴을 후원해 준다는 기업 ITC를 찾아간 후 소식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600년 전의 서명이 담긴 SOS가 존스턴 교수의 아들 크리스와 제자들의 손에 도착한 것일까.
오래전부터 타임머신이라는 소재는 SF의 흥미를 자극하는 존재였다. 3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짜릿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 방면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H.G. 웰스의 <타임머신>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간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런데 웰스는 인간의 미래를 밝게 보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미래의 세계는 인간들이 먹이감으로 전락한 어두운 곳이다. 밤의 주인 '멀록'들이 지배하는 미래에서 인간들은 노예로 살아간다.
아무래도 미래를 엿본다는 것은 작가의 가치관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 탓인지 과학적 상상력을 즐기려는 대다수의 타임머신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간다. 과거의 세계는 역사를 통해 인간이 이미 경험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재미도 있고, 과거의 역사를 미래에서 온 인간이 흔들어 놓으면서 혼란을 자초한다. <빽 투더 퓨쳐>의 재미는 여기에서 나온다. 과거로 간 소년이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위협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
과학과 모험의 만남
<타임 라인> 역시 미래로의 시간 여행보다는 과거를 선택한다. 그런데 ITC의 과학자들이 발명해 낸 것은 사실 타임머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류를 전송할 수 있는 팩스처럼 문서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이동시킬 수 있는 3차원 팩스를 발명했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에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좀 더 구체적인 원리를 위해 원작을 참조하면 대강 이렇다. 초강력 MRI 장치를 이용해 인체의 세포를 원자 단위까지 모두 스캔한 뒤 비트로 변환해 양자 컴퓨터에 저장을 한다. 3차원 팩스는 이러한 비트 정보를 전송하는 장치다. 좀 어려운 용어를 쓰면 3차원 팩스는 양자 원격 이동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송 과정을 실험하는 도중에 우연히 웜홀이 발견된다. 3차원 팩스가 찾아낸 웜홀은 공교롭게도 1357년 프랑스의 캐슬가드라는 곳이었다. 어째서 이 시기에 웜홀이 생겼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ITC는 이 시대의 전문가인 존스턴 교수를 불러들인다. 존스턴 교수는 유적 발굴 비용을 지원해준다는 조건 아래 웜홀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물론 고고학자로서의 호기심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타임 라인>의 양자 원격 이동 장치는 애초부터 시간 여행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우연히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하는 웜홀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14세기에 보낸 존스턴의 메시지를 받은 발굴단 일행은 이제 존스턴 교수를 구하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난다. 문제는 1357년의 캐슬가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타임 라인>의 묘미는 여기에서 발휘된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물리학인 양자 역학과 그로부터 파생된 평행 우주론을 들이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이 한창인 중세 시대를 웜홀로 연결해 놓는다. 과학과 역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평행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나 무한이며 수많은 우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지점이 바로 웜홀이다. 그런데 이 웜홀을 통과해 도달한 곳은 창과 활을 쏘는 14세기의 중세다. 낭만과 모험이 넘치는 활극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웜홀은 영화 <타임 라인>을 SF와 친숙한 활극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현대의 과학과 중세의 로망스의 만남. <타임 라인>의 매력은 과학적 상상력과 중세적 판타지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에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쥬라기 공원>으로 잘 알려진 원작자 마이클 크라이튼으로부터 나왔다. 영화는 많은 부분을 압축했지만 <타임 라인>은 결코 만만한 소설이 아니다. 책의 말미에 달린 각주만으로도 질릴 정도다. 재미도 재미지만 데이비드 도이치, 킵손, 폴 나힌, 찰스 베닛 등 이름도 생소한 양자 물리학의 대가들을 참고 문헌에 올려 놓는 자신감은 크라이튼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쥬라기 공원>이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쓴 유전공학의 해설서라면, <타임 라인>은 '양자 물리학'을 바탕으로 쓴 백년전쟁에 관한 역사극이다. 크라이튼의 많은 작품들은 이렇게 과학적 지식과 공룡, 중세와 같은 흥미로운 소재를 결합시킨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전략이 크라이튼의 창작 방법론인 셈이다.
상상력의 편력가 마이클 크라이튼
크라이튼은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 의 대본으로 에미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하나이며 자신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스피어> 등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영화로 옮겨진 것만 해도 벌써 11편이나 된다. <타임 라인>을 비롯해 <13번째 전사> <콩고> <폭로> <떠오르는 태양> 등을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이처럼 다양한 소설이 쓰여진 것은 어쩌면 그의 행적과 무관하지 않다. 하버드대 영문학부에 들어가서는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꿔 수석 졸업을 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하버드 의대에 다시 들어가 졸업을 한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이번에는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하기사 이 정도의 지적 편력이면 전문 직업인보다는 소설가가 훨씬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지적 편력을 자신의 장기로 삼은 탓에 크라이튼은 '지식 소설'의 대가로 손꼽힌다.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첨단 테크놀로지가 등장한다. 영화 <콩고>에는 레이저 광선, 홀로그래픽, 나이트 고글, 공기 압축형 텐트, 컴퓨터 칩 음성 센서를 부착한 말하는 고릴라 등의 하이테크놀로지 첨단 기기들이 대거 등장하여 최첨단 기술의 영역은 물론 환상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전설이 살아 숨쉬는 미지의 땅 콩고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스릴을 고도의 영상 과학으로 창조해 내며 흥미로움이 가득한 대형 오락 영화의 진수를 보여 준다. 한편, 토네이도를 쫓는 과학자들은 초기 경보 장치를 만들기 위해 회오리 바람을 쫓아다닌다. 크라이튼이 각본을 쓴 영화 <트위스터>는 이들의 뒤를 바람처럼 따른다. 도로시라는 측정 계기를 바람 속에 밀어 넣어서 그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도로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회오리 바람에 도로시가 함께 휘말려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토네이도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잘못 계산하는 날에는 도로시와 함께 사람도 단숨에 날아가 버린다. 이것은 엄밀한 과학이면서 동시에 모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여러 학문과 직업을 오간 크라이튼의 인생을 비유하기도 한다. 소설 <쥬라기 공원>을 미국에서만 1천만 부 이상 팔아 치우며 과학적 지식과 대중적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 크라이튼은 대중문화 시대의 모험가라고 할 만하다. 일부에서는 그가 영화 대본을 의식한 소설을 써내려간다고 비판하지만 메디컬 드라마 의 각본에서 느껴지듯이 의학적 상식과 상황의 연출을 엮어내는 솜씨는 분명 비범하다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가 선호하는 것은 그의 넘치는 지적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상황을 현실감 있게 엮어내는 묘사의 능력 또한 만만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음모와 권력
크라이튼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음모와 권력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타임 라인>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지는 않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대기업 ITC의 야욕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사막에서 튀어나온 한 남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불가사의하다. 신체 부위는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큼 어긋나 있다. 대동맥은 뒤틀려 있고, 3번 척추가 우측으로 들려 있다. 의사들의 말해 따르면 마치 "종이 인형을 두 조각으로 이어 붙인 것 같다". 수수께끼처럼 제공되는 이 사건은 양자 원격 이동 장치의 위험성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인간을 분해한 다음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성은 <플라이>에서도 끔찍하게 묘사된 적이 있다. <플라이>에서는 인간 브런들과 파리의 유전자가 합성되면서 파리 인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ITC는 이 사실을 감춘 채 존스턴 교수와 그를 찾기 위해 후발대를 보낸다. 새로운 발명으로 전세계 물류 운송 회사를 압도하려는 야심에 눈이 멀어 그들은 인간이 겪게 될지도 모를 위험성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는다. <쥬라기 공원>의 인젠사 역시 마찬가지다. 스필버그가 비교적 생생하게 묘사해 낸 인젠사는 공룡의 유전자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연의 생존 본능은 생식 가능한 공룡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 또한 연구소 내부의 부패한 연구원이 일부 유전자들을 빼돌림으로써 사태는 더 위태로워진다. 인간은 자연을 통제할 수도 없고, 인간을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기업이 앞세우는 이윤의 추구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면서 인간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 점은 크라이튼의 다른 작품에서도 생생하게 묘사된다. <떠오르는 태양>은 일본 기업의 미국 침투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사건의 시작은 <타임 라인>이나 <쥬라기 공원>과 흡사하다. LA의 한복판에 신축한 일본 재벌의 나카모토 타워 개관식은 성대한 파티로 장관을 이룬다. 그런데 45층에서 각계 인사가 참여한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는 동안 46층 회의실에서는 아름다운 미국 여인이 시체로 발견된다. 수사가 시작되면서 곧 기업 음모의 비틀린 미로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는 추적이 벌어진다. 확실히 음모를 차곡차곡 해결해 가면서 배후에 놓여 있는 기업의 야심을 폭로하는 스릴러 형식은 크라이튼의 소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쥬라기 공원>이나 <타임 라인>에서도 큰 줄기를 이룬다. <폭로>에서 데미 무어는 자신의 전 애인 마이클 더글러스의 상사로 나타나 직위를 무기로 성희롱을 한다. 이 영화는 과연 성희롱은 남자만 하는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지만 알고 보면 성희롱이 화두가 아니라 기업의 음모가 숙제로 던져진다.
완전하지 못한 모험
크라이튼의 원작 <타임 라인>은 개인적으로 그의 최고 베스트셀러인 <쥬라기 공원>이나 미국에서 비평적 주목을 받은 <떠오르는 태양>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리처드 도너가 만든 영화 <타임 라인>은 소설의 명성에 비해 확실히 아쉬움이 남는다. 앞에서 언급한 크라이튼의 모든 특징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생생함이 부족하다. 소설 <타임 라인>에서 중세 시대를 고증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한 역사 소설가는 저리 가라고 할 만치 꼼꼼한 크라이튼의 욕심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에 반해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라로크 성의 모습은 기존 영화에서 묘사된 풍경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쥬라기 공원>에서 유전공학으로 살아난 공룡을 화면으로 대할 때 받았던 생동감 같은 것이 부족하다. 오락 영화의 대가인 리처드 도너가 맡기에 크라이튼의 소설은 너무 지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지식 대신 활극을 선택한 영화 <타임라인>은 전형적인 블록버스터 모험극의 형태이다.
생명을 담보로 중세 사회에서 존스턴 박사가 만들어내는 그리스 화약은 양자 원격 이동 장치와 일종의 대구를 이룬다. 권력의 욕심이 엉뚱한 발명품을 요구하듯이 중세의 영주들은 신무기 개발로 자신의 입지를 굳혀 왔다. 크라이튼의 원작 소설에는 과거와 현재의 발명품들을 통해 이 점을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타임 라인>에서는 섬세한 요소들을 잘 느낄 수가 없다. 미래, 현재, 과거를 막론하고 새로운 기술과 권력에 몰두하는 인간들을 향한 크라이튼의 비판들이 모험과 활극 속에서 슬며시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그리스 화약은 밤의 전투에서 불꽃놀이처럼 펼쳐지는 화려한 광경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백만장자가 된 크라이튼이 할리우드와 계약을 맺으며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크라이튼이 각종 발명품을 전시하는 SF 작가쯤으로 치부되어서는 곤란하다. 모험이라는 대중적인 서사 매력과 과학이라는 인간의 호기심을 이처럼 절묘하게 다루는 이야기꾼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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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타임라인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