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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주 산내들 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한타
**** 풍기읍의 유래 ****
신라시대에는 칭호가 미상이나 혹은 기목진(基木鎭)이라 하였다 하며 고려 때에는 기주라 칭하였다. 1018년 현종9(顯宗9)에 길주에 예속시켰다가 1172년 명종2(明宗2)에 감무(監務)를 두고 안동부 속현이 되었다. 그리고 1390년 공양왕2 (恭讓王2)에 은풍현이 편입되었고. 조선시대 1413년 태종13(太宗 13)에 기천(基川)이라 개칭하고 별호를 영정(永定) 또는 안정 순화소정이라 하며 현감을 두고 은풍의 고적아현(古蹟牙縣)을 소관하였다. 그후 문종왕의 태(胎)를 은풍 명봉산에 매안(埋安)함에 따라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서 풍기(豊基)라 하고 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군수를 두었다. 은풍현은 신라 때 적아현이었는데 경덕왕 예천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은풍으로 개칭하였고 현종때 안동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때 별호를 은산이라하여 래속하였다. 1457년 세조3(世祖3)에 단종복위운동의 진원지인 순흥이 폐부되어 그 일부가 풍기 관할이 되었다가 1683년 숙종9(肅宗9)에 순흥이 부로 복원됨으로 풍기에 귀속 되었던 일부 지역은 순흥으로 복귀 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개편에의하여 영주군으로 병합하고. 1973년 7월 1일(대통령령 제6543호)에 의거 풍기읍으로 승격 하였으며. 1980년 4월 1일(법률 제3188호)에 의거 영주군 풍기읍에서 영풍군 풍기읍으로 개칭. 1995년 1월 1일(법률 제4774호)에 의거 영주시. 영풍군을 통합. 영주시 풍기읍으로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 **** 지역별 유래 **** 성내 1리 옛 풍기군 동부면 성내리였는데 성(城)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내리라하였다. 현재 풍기읍사무소, 풍기초등학교, 풍기우체국, 풍기지구대, 농협중앙회풍기지점 등이 소재하고 있다. 성내 2리 옛 풍기군 당시 이곳에는 죄수(罪囚)들을 가두어 두는 옥사(獄舍)가 있어 옥대가리(獄垈街里) 옥대거리라 하였다. 1975년 이 마을에서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안길을 확장하다가 당간장식용두가출토되었다. 성내 3리 옛 풍기군 당시 이곳에는 죄수(罪囚)들을 가두어 두는 옥사(獄舍)가 있어 옥대가리(獄垈街里) 옥대거리라 하였다. 성내 4리 옛 풍기군의 역대 수령(郡守)들의 선정비를 비롯하여 많은 비석들이 거리를 메웠다 하여 비집(碑集)거리, 비치(碑置)거리라 하였으며, 이 마을 서쪽에 옛 풍기 성 (城)의 서문(西門)이 이곳에 세워져 있어 이 거리를 서문거리, 서문박 거리라 부 르고, 금계리 마을에서 흐르는 냇물에 다리를 놓아 그 다리를 유다리라 했으며, 현재 풍기소방서 옆 부지에 다리를 복원하였습니다. 동부 1리 옛 풍기군의 동부면 동문리로 지역이 가장 넓고 큰 마을로 풍기성(豊基城)동문 밖에 있다 하여 동문리라 하였다. 1941년 왜정(倭政)때 풍기군이 영주군에 편입되면서 영주군 풍기읍 동부동으로 개칭되고 구역을 분활하여 동부6리까지 되어 있다. 동부 2리 옛 풍기군의 동부면 동문리로 지역이 가장 넓고 큰 마을로 풍기성(豊基城) 동문 밖에 있다 하여 동문리라 하였다. 1941년 왜정(倭政)때 풍기군이 영주군에 편입되면서 영주군 풍기읍 동부동 으로 개칭되고 구역을 분활하여 동부6리까지 되어 있다. 동부 3리 이 마을은 새마, 새마을(新村)로 구름밭 본 마을 북쪽으로 경계하고 있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구름밭(雲田)마을구역으로 이 지역은 전부가 자갈밭이 었는데, 1930년경에 이 자갈밭을 개척(開拓)하여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리 하여 마을 이름을 새마을로 불렀다. 동부 4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동부면 동문리로 속칭 구름밭(雲田)마을이라 한다. 구름밭의 유래는 동문밖에서 이 마을까지가 풍기장터(市場)였던 것으로 풍기장 날이면 여러곳에서 장꾼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하여 구름밭이라 하였고 또 풍수설(風水說)에 의하면 이 들 어느 곳에 운중선좌(雲中仙坐)의 명당(明堂) 자리가 있 어 구름밭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동부 5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동부면 동문리였으나 속칭 토성리(土城里) 옛 풍기성(豊基城)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성리(東城里)가 잘못 전해져 토성리로 되었다는 설(說) 과, 마을 뒤 덕아산 모양이 토성처럼 생겼다 해서 토성리라고 부른다는 두가지의 설(說)이 있는 마을이다. 동부 6리 이 마을은 본래 동부2리 구역으로 풍기읍이 발전됨에 따라 마을의 인구가 날로 증가되어 동무수행(洞務遂行)에 어려움이 많아 1970년네 분동(分洞)되어 동 부6리로 갈리어 나왔다. 풍기 미곡시장(米穀市場리)이 이 마을 구역으로 장날이면 순흥방면이나 단양, 영춘, 하일, 한듬 방면에서 생산된 곡물(穀物)들이 모여들어 성시(盛市)를 이루어 인근에 널리 알려져 왔다. 산 법 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동부면 산법리(山法里)로 속칭 산의실(山意室), 산내실(山內室), 산내곡(山內谷) 산법리라고 불려져 왔다. 마을 북쪽으로 노인봉(老人峰)을 비롯하여 옥녀봉, 동자봉, 산맥과 서쪽으로 점방(点方)재에서 토성(土城) 마을 앞까지 쭉 뻗어내린 진등(鎭登)이 동서 (東西)로 막혀 있어 내부구릉(丘陵)지대라는 뜻에서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미 곡 리 이 마을은 옛 부터 미곡리(味谷里)로 되어 있다. 위치는 풍기에서 순흥 으로 들어가는 도로 서쪽에 들어가 있어 도로(道路)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 마을이며, 풍기읍 산법리와 순흥면 태장리, 안정면 단촌리와 대평리를 접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안마, 웃마을, 안맥기실, 바깥 맥기실, 목기실(木器室), 모계실 (牧鷄室), 미곡리라 한다. 고려말(高麗末)에 나라에 고관대작(高官大爵)으로 있던 신하들이 이 마을에 와서 피난을 하던 중 산적(山賊)들의 습격을 많이 받아 폐동(廢洞)이 되었다가 약 250년 전부터 다시 이 마을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삼 가 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욱금리였는데, 왜정(倭政)때 행정구역 개폐로 삼가동(三街洞)으로 분리되었다. 이 마을을 삼거리라 이름한 유래는 소백산 비로봉을 중심으로 세갈래 골짜기로 되어 있고, 골짜기 마다 마을이 산재해 있어 삼거리라 이름했다고 한다. 욱 금 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당시 장선리를 경계로 소백산 밑까지 전부가 서부면 욱금리로 되어 있는 큰 마을로, 마을의 형태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양지쪽 본 마을과 음지쪽 영전 마을이 분리되어 있는데 본 마을을 우금, 웃금, 욱금리라 하는데, 유래는 이 마을에 욱양서원(郁陽書院)이 있어 그 서원의 이름을 따서 욱금리라고 하며 음지 마을에는 영전사(靈田寺)가 있어 절의 이름을 따서 영전말, 영전, 영전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금계 1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이다. 풍기향교(豊基鄕校)가 처음 이 마을에 창건(創建) 되었다가 1735년에 교촌리 현 위치로 이건(移建)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구교리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개폐로 영주군 풍기면 금계1구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산재해 있는 마을로 임실 안마, 부계발 밭마 쇠바리, 잿밭, 용천동,공원밑이 행정구역으로는 모두 금계1리로 되어 있어 풍기읍에서 큰 마을로 평을 받고 있다 금계 2리 이 마을은 속칭 장생이, 장시이, 장선이, 장선동이라 불리어 왔다. 그 유래는 마을 지형이 긴 배(船) 모양 같다 하여 장선이라고 이름하였다 하고, 또 일설은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마음씨 좋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長善)으로불렀다 한다. 이 마을에는 금선정과 욱양서원이 소재하고 있다. 교촌 1리 이 마을에는 정림사라는 절이 있어 그 절 이름을 따서 정림촌이라 불리기도했다. 1542년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 그 이듬해에 풍기향교가 금계1리 임실마을 서쪽에 있었는데 이 마을 정림사 절터로 옮기고 나서 풍기군 서부면 신교리로 되어 속칭 향교마, 향교말, 향교마을, 신교리라고 불리어 오다가 왜정때 행정구역개폐로 영주군 풍기면 교촌1구로 개칭되었다 교촌 2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등구리이다. 속칭(俗稱) 둥두들, 등드들, 등고, 등구리라 불리어왔다. 그 유래는 마을을 들어가려면 언덕을 올라 들어 감으로 등구라 하였을 것이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에 개폐로 교촌 2구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백 1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백야리(白也里)였으며, 속칭 희야골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마을뒤에 호랑이와 모양이 흡사한 두 개의 바위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동호암, 서호암이라 하고, 이 한쌍의 백호가 서동, 부서(?東, 婦 西)의 형상(形 象)으로 위치하여 혼례식을 올렸다는 전설에 따라 백호의 백자를 따서 백야리라 하여는데 지금은 이 바위들이 없어졌다. 1914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편입과 동시 가운데 야자를 버리고 영주군 풍기면 백동1구로 개칭되었다. 백 2리 이 마을은 속칭 미안, 뫼안, 모내(暮內), 산내라고 불렀는데, 좌우로 산이 둘러 쌓였다 해서 이름한 것으로 희여골 마을 남쪽 산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들을 미안들이라 하고 1934년에 죽령으로 통하는 우리나라 5번국도가 개통 되었으며 도로변에도 민가 몇 채가 있었다. 속계, 속포는 미안마을 남쪽 냇물 건너에 위치하고 있으며, 냇가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빨래하기 좋은 냇가 마을이란 뜻에서 속계 또는 속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신 1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백야리 구역이었는데 1910년 무렵 안동권씨 안동김씨 홍해 배씨 삼성(三姓)이 이곳에 정착하여 새터전을 개척하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마을이름을 샛터말, 샛터, 신기동이라 불렀고 4년후 행정구역 개폐로 백야리의 백자 와 신기동의 신자를 따서 백신동 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신 2리 이 마을은 옛 군당시 서부면 백야리 구역으로 웃마을, 아랫마을 바깥마을로 산재해 있는 마을로서 속칭 웃마을을 흰물내기, 백수동(白水洞)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 뒷산에 넓은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덮쳐 흐르는 물이 몹시도 희개 보인다는데서 유래되는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앞에 수령이 약 90여년 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수호목으로 숱한 애 환을 겪으면서 지금 까지 마을을 수호(守護)하고 있다. 우우실, 우이실은 백신2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서 지형이 흡사 큰황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우이실이라 불렀 다고 한다. 서부 1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북문리였는데, 옛 풍기성을 사방으로 쌓아 놓고 동서남 북으로 4대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성북문 밖에 자리한 마을임으로 북문리라 하였다. 1914년 왜정때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편입되어 영주군 풍기면 서부1구로 개칭 되었다. 이 북문은 순흥방면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당시는 이 북문이 풍기 4대문 중 가장 출입이 많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서부 2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북문리로 풍기성 너머 위치해 있다 하여 성둑넘 마을이라고 해 으며 마을 서쪽 지역은 서문밖이라고도 불렀다. 서부1리와는 도로를 접계하고 성내1 리와는 옛 풍기성 북쪽둑을 접계하였는데 성북문 바로 서쪽에 크고 넓은 반석이 있어 그 곳을 너븐들거리, 넓은 돌거리라고 불리어왔다 서부 3리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노고촌리(老古村里)라고 하였으며 웃마을, 아랫마을, 한림촌(翰林村)으로 불리어 왔다. 한림촌은 본마을 동쪽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에 인명미상의 한림학사 세사람이 태어났다 해서 한림촌 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창락 1리 이 마을은 옛 순흥부(順興府) 창락면 관촌리(館村里)로 영남북부에서 가장 큰 역 (驛)이 이 마을에 자리하고 있어 창락면 관촌리라 하였다. 창락면은 본 마을인 관촌리, 수철교리, 죽령촌리, 전고리 등 4개 마을을 관할(管轄) 하였다. 창락 2리 이 마을을 속칭 곰수골, 웅수동(熊水洞)이라고 했는데 산세가 곰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하는 설과 산세가 너무 험준해서 곰이 많이 살았다고 곰수골이라 했다 는 설도 있다. 또 이 마을을 대사동(大寺洞)이라 함은 마을 북쪽에 큰 사찰인 유석사 (留石寺)가 있으므로, 이름을 대사동 이라고 한다는 설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절터를 찾아 이곳에서 쉬어 갔다고 해서 대사동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수철리 이 마을은 옛 순흥도호부 창락면 수철교리(水鐵橋里)이다. 속칭 무쇠다리, 수철교리,수철,수철리, 이 마을 앞에 무쇠다리가 있어 이름한 것이다. 이 무쇠다리라는 신라(新羅)때 계림부(鷄林府) 호장(戶長) 유석(兪碩)이 그의 딸을 구해 준 두운스님을 위하여 희방사(喜方寺)를 지어주고, 그 삼문밖 시내에 무쇠로 다리를 놓아 주어 두운 스님의 은혜를 보답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전구 1리 이 마을은 옛 군당시 와룡동면(臥龍洞面) 전구리였는데 왜정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폐로 풍기군이 격하되어 영주군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풍기면 전구동으로 개칭되었다 전구 2리 이 마을은 옛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창락면 전고리(前皐里)였는데 왜정때인 1914년 행정구역개폐로 순흥도호부가 격하(格下)되고 영주군으로 편입과 동시 풍기면 전구2 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도솔봉 바로 밑 첫 마을로 뒷산 봉우리에 옥녀라는 선녀가 내려와 바위 위에서 베를 짰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베틀 바위라 이름하고, 그 산봉우리를 옥녀봉이라 하고, 이 옥녀봉 밑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으로 마을 이름을 옥동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첫댓글 가까이 살면서도 우리 고장의 유래를 잘 몰랐는디 고맙게 잘 이해하고 공부하고 가니더...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