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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극의 기원
연극의 기원은 원시 지역사회의 종교의식에서 비롯된다. 무대의 생성과 그 기원을 같이하는 것은 그 형태 자체가 종교의식에서 기인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자체가 상연의 기원이 된다 볼 수 있고, 무대는 제단에서, 배우의 행위는 제사를 주체하는 제사장과 그외 무희들의 움직임의 양식에서, 제사를 구성하는형식과 그 규칙 그리고 후대 그리스연극에서 오케스트라로 변형되는 종교음악의 지휘양식과 그구성의 양식을 정리하는 형태의 범주는 희곡의 기원으로 전하게 된다
2.그리스 로마시대의 연극
서양 문명에서 최초의 위대한 연극의 발생 즉, 비극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로마 연극의 발생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시대라 볼 수 있다.
근대적 연극양태의 기원은 앗티카 (ATTICA)로 그리스 남동부의 아테네 주변 국가 명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는데, 그 지역의 酒神讚歌형식이 그 기원이 된다. 주신 디오니소스에게
50명의 코러스와 함께 했던 제전은 후에 점차 축제로 자리하게되고 이는 디오니소스제로 발전하게 된다. 연극은 이 디오니소스제에서 하나의 축제형태로 변형되어 3일간의 연극제 형태로 자리잡고 발전되었는데 여기서 즉, 주신찬가의 형식에서 50명의 코러스를 지휘했던 지휘자의 이름 THESPIS (코러스의 지휘자)가 후에 연극예술을 지칭하는 단어로 읽혀 지는것도 여기서 기원한다.
그리스시대의 연극은 곧 비극이다란 말처럼 비극적 양식이 시대연극을 대표하는데 이는 비극이라는 언어 (TRAGEDY)의 기원에서 그 형태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TRAGEDY란 말은 제사시 올리던 제물을 일컫는 말인 트라고스(양)에서 비롯됐는데 이는 그리스 비극양식의 기원도 고대 제사 형식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범주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 연극을 대표하는 이는 세사람을 들 수 있는데 가장 뛰어났던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아킬로스와 소포클레스 그리고 유리피테스가 그들이다.
아킬로스는 기원전 525년에 태어나 465년 지금의 시칠이아 섬에서 사망했는데 8-90편의 작품을 썼고 그중 7편의 완본과 다수의 단편이 남아있다.<<오레스테이아ORESTEIA>>현존하는 유일한 3부작의 유일한 그리스극 양식으로 전한다.
소포클레스(sopocles)는 아테네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의 작가로서 약 90편의 작품이 전하고 18번의 연극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유명한 작품으로서는 <오디프스왕(oedipus the king)>, <콜로누스의 오디프스(oedpus at colonus)> 여성 심리묘사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안티고네(antigone)>와 <엘렉트라(electra)>가 있다.
유리피테스 B.C. 484년~B.C. 406년에 사망. 그는 개인주의자로 유명하며 92편 중 12편이 남아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키클로페스(cyclops)외눈박이 거인>이 있다. 이 사람은 극양식이 이해하기 쉽고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의 희극적 비극의 형태에서 드러나는 통속적이고 사실적인 부분은 후대에 또는 현대사람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의 작품 <Media 메디아>,<Hippolytus 히폴리투스>는 대표적 여성심리 묘사의 그리스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세 극작가에 의해 그리스연극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그 영향은 중세를 거쳐 셰익스피어 연극에도 영향을 주게된다. 이들의 연극이 발전되는 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희극이 융합하여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극이 탄생되었는데, 이는 그리스 연극을 대표하는 또다른 한 형태의 연극양식으로 그리스 연극의 대표적 특성인 비극적 양식을 벗어난 희극적 작품으로서 그는 40여편의 작품을 썼고 현존하는 11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서는 그 제목에서도 희극적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 Knights>,<벌 Wasps>, <새 Birds>, <구름 Clouds>, <개구리 Frogs>등이 있다.
이 작품들의 제목은 코러스 즉 합창단이 입었던 의상에서 비롯된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외설성 등이 포함된 서민적이고도 통속적인 그리스연극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셰익스피어와 같이 그의 능력을 의심받는 미묘한 부분이 있다.
이 시대의 연극은 모두 출연자가 남성이며 그들의 배역에 대표적 특징을 드러낸 가면을 썼으며 이는 신분, 연령, 성 뿐만 아니라 고통, 노여움, 증오, 절망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렇게 발전했던 그리스 극 양식들은 후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을 거쳐 발전하다가 공연예술의
주도가 극작가에서 배우로 바뀌면서 그리스예술의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로마 시대의 연극은 그리스연극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풍으로 발전하였으나 로마 나름대로의 자기적 연극형식을 융합하여 로마식 연극을 창출해 낸다
로마의 지배가 그리스로 확대되면서 그리스극의 웅장함을 이어받아 plautus terentius (플라투스 티렌티우스)극과 팔리아타극 으로 발전했다
플라투우스극도 20편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이 극들은 줄거리는 로마화했고 일반적인 로마인의 생활관습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허풍선이 병사 milesglorions, 구두쇠,식객, 일란성 쌍새아 (이 쌍둥이 이야기는 세익스 피어의 희극 (실수연발 comedy of emos)의 소재를 재공하기도 하였다.로마극을 대표하는 또하나의 인물 티렌티우스 는 귀족출신의 극작가로 그의 독창성이 뛰어난 현존하는 6편의 작품에 의하면 익살스러움과 화제 언급은 적으나 줄타기곡예 관람객을 위한 칼싸움 컴투사의 팬터마임을 포함 극의 흠미를 유발하는 방법을 구로 사용하는등 로마 나름대로의 극 형식을 창조하기도했다. 관객들에에는 당시 인기가 없었으나 후대의 작가들에게는 그 형식의 독창성 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주게된다.
프라투스와 티렌티우스 가 쇠퇴하고있는동안 남 이탈리아의 짧은소극 아텔리라극이 인기를 얻었다 이극은 문학적 가치는 없었으나 즉흥적이고 동시에 일시적인것이어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초기표현양시과 비슷한 유형을 남기게된다.
로마연극에있어 로마연극의 극장 구성은 그리스와는달리 경사진면이없는 평평한 토지위에 세워졌고 종종 소품이나 무대장치를 보관하기위한 벽이꾸며져있으며 오케스트라가 필요없게되자 높은무대형식을 갇게된다. 로마시대 연극은 독재왕권정치하에서 보이는 당연한 특징중 하나인 외설성 완전 배제의 특징을 갇기도한다
3.중세의연극.
고전극의 소멸 이후 서유럽의 전래극 또는 교회극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 연극이 디오니소스제에서 출발 한 것처럼 중세 연극의 기독교도의 숭배에서 발전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보다도 부활쪽이 기독교의 연간 행사중에서 가장 중심을 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제의 제전에서 발전한 것이다. 소제 또한 성서의 이야기들이었으며 노아의방주, 요나와 고래 , 사자굴속의 다니엘, 삼손과 데릴라.등이 그소제로 채택 되었다.
디오니소스 숭배에서 그리스 연극이 발전한것처럼 중세의 전래극은 기독교 숭배에서 발전하였다.
주제와 소제 또한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양태를 뛰며 나타나는데 영국의 (성전극 mystery play)프랑스의 (성사극mystres)이탈리아의(성극scare rapperentazioni)스페인의(성찬비극autos sacramentales)독일어권 나라의(종교극geistspele)등으로 나타난다.
4.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연극
중세의 종교극은 14세기에 그 정점에 달하였으나 15세기에 쇠퇴일로에 접어들기 시작 르네상스의 충격으로 그 쇠퇴가 더욱 빨라지게 된다.
중세의 연극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중심의 새로운 모티브를 구하게 됨에 따라 그 극적 경향의 전기를 맞게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연극의 특색은 오늘날 현대극에 그 영향을 가하기도한 극장형태의 규정이 다 중세 교회극의 성격을 배제하고 그리스 보다는 로마의 고전극에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건축물에 로마시대 극장건축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이에따라 프로시엄 아치가 딸린 새로운 형식의 극장건물과 원근화법을 적용한 배경그림의 발달을 가져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무대에 등장한 극과 화려한 연예에 관해서는 배경과 의상디자인 그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남아있지않다.
고전극의 전통을 계승한 학식이 풍부한 후계자들은 그들의 심혈을 기울이기보다 오히려 붙끝으로만 쓸 뿐이었다. 그리고 특히 명성있었던 자를 든다면 라틴어의 원본에 의거해 희곡을 쓴 아리오스토 그다지 고전적이지않고 일상적인 생활에 근접하여 글을쓴 아리티노9칼란드리아)를 쓴 비비에어(만드라고라 )를 쓴 마키아벨리 그리고 전원풍의 희극을 최초로 개화시킨((아민라))를쓴 시인 타소등이다. 위대한 극작가가 없었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아름다운 극장건축과무대배경 또한 오페라와 발레를 동
시에 발전시킨 이탈리아는 근대연극의 발생지로서 명에를 받을 많한 기치가있다.
또한 이탈리아 연극형식의 부류,진실로 아카데믹한 연극의 성장과 평행한 것처럼보이는 이 연극 형식은(코메디아 델라르테)다 전성기의 코메디아 델라르테만큼 강렬하게 연극적인 것은 지금까지 없을 것이다.즉흥,극단양식의 등장이란 연극사의 커다란 양식을 낳는다..
엘리자 베스 왕조의 연극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생겨나고 근대유럽에서 최초로 완전한 직업배우 극단이 조직된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의 활약에 의해 무대배경과 프로시엄아치가 갖춰진 실내 극장 발전의 토대가생겼다.
이무렵 영국에서는 세익스피어가 등장하여 그리스극의 기적과 비교할 만한 최초의 근대적 극작가를 제공하는 특권을 지닐수 있었다. 세익스 피어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연극이 아직 요람에 있던 시대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지만 영국 뿐만아니라 대륙에서도 그를 배우고 그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경향이 보인다. 이하 연극의 역사p80-98 참조
스페인과 프랑스 황금시대 연극
영국과 스페인의 극장은 평행하여 발전했다. 스페인에 있어서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로 연극인이 된 사람으로 로페데루이다. 스페인의 직업배우는 코메디어 델라르테 극단의 순회공연, 특히 가나사가 인솔하던 극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스페인 연극의 확립, 로페데베가의 작품 750편이 현존. 이후 페드로 칼데론 데라 바르카의 200편의 현존하는 작품이 전함. 스페인의 초기무대 형식이 영국의 형식과 흡사하다고 할지라도 극 자체는 상당히 다르며 프랑스 연극시대의 개막은 코르데이유의 등장과 함께다.
<로사드>희비극, <거짓말쟁이 남자> 프랑스 연극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몰리에르의 등장이다. 몰리에르는 프랑스 뿐 아니라 아리스토파네스를 제외하면 유럽 연극계에서 가장 위대한 희극 작가이다.
아르망드란 여배우와 후에 결혼함에 따라 그녀를 위한 최고 여성 배역을 창출한 작품 <티르투프>의 엘미르.<인간차별>의 셀리메뇨 <여학자>의 아르망드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의 배역이다. 몰리에르는 자신의 힘만으로 프랑스의 희극을 프랑스 비극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고 하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다. 그 외, <안드로메드>, <프시체> 그 후 그의 배우 데뷔작인 <니코메드>등이 있다.
영국 왕정 복고기의 연극
찰스 2세의 국외 망명 생활 이후 영국 연극은 많은 변화를 필요로 하게 되고, 새로운 극장 형식이 망명생활시 궁중가면극의 영향을 받는다.
종래의 형태를 파괴하는 여배우의 등장, 세익스피어 비극의 희극적 각색 등도 상연되었다.
5. 18세기 독일의 연극
1741년 <코트세트>에 의한 전통 연극 타파의 움직임 등장.
그는 품위없는 어릿광대 연극 중심의 즉흥극과 그것에 따라 다니는 시끄럽고 수선스러우며 단순히 웃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저속한 희극과 곧 만족해 버리는 관객을 특히 혐오하고 프랑스 고전양식의 진실한 극으로 바꿔 놓아 일시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은 확실한 시대적 착오였다. 동시대 그의 경쟁자로서는 레싱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최초의, 걸작<만나폰 바르헬름>을 상연하였으나 실패했다.
18세기 말 독일의 무대는 괴테가 단연 우위를 차지하였다.
괴테는 풍부한 재능의 일부를 연극에 쏟았고 <게츠 폰 베를리히겐>은 세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아서 쓴 최초의 독일극이다. 젊은 작가 쉴러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다.
다음 작 <콜라비고>는 현재에도 자주 상연,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에>와 <파우스트>등이 전한다. 실러 <발렌시타인>,<빌헬름텔>에 이르는 대부분 연극이 괴테의 사설 극장, 바이마르 극장에서 상연, 그 후 괴테는 1799년,1805년까지 실러와 극장운영을 분담했다.
6. 19세기 전기의 연극
독일에 국립 극장이 등장 하였고..다른 유럽 제국에서도 연극기업의 커다란 통합이 이루어진 18세기 중엽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에서는 상설 극장이 설립되었다. 아메리카연극의기초를 구축한 사람은 최초로 버지니아에 상륙한 영국에서 온 배우들에 의해 발전하였다.
초기의 극은 산발적이었다.
1716년경 윌리암스버그Williamsburg에서 찰스 Charles와 메어리 스태그 Mary Stagg가 인솔하는 극단을 위해 극장이 세워졌다. 1730년대에는 찰스톤 최초의 독 스트리트 극장에서 어떤 극단이 런던에서 성공한 <고아 The Recruiting Officer>을 상연하였다.
1747년에는 토마스 킨Tomas KEAN과 월터 머레이 Walter Murray 가 인솔하는 버지니아 희극단이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대개의 순회극단 배우는 뉴욕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이러한 세 개의 마을이 연극활동의 중심지였다. 뉴욕에서는 1750년에 킨과 머레이가 나소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극장을 열었으며, 콘그리브의 <사랑에는 사랑을>, 파커의 <멋쟁이 남자의 계략 The Beaux' Stratagem> <리처드 3세>등을 상연하였다.
이 가운데에 <리처드 3세>는 대개 콜리 시버의 각색에 의한 것이다.
1753년 나소 거리의 두 번째 극장에 루이스 할렘Lewis Hallam이 직접 런던에서 데리고 온 극단이 들어왔다. 그들은 나쁜 도로와 부적당한 수용설비는 물론이고 초기의 개척자들로부터 남겨진 고유의 청
교도 기질과도 싸우지도 않으면 안 되었으나 그 뛰어난 연기와 폭넓은 레퍼토리는 신세계 연극의 발
전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은 피라델피아의 사우스워크 극장과 뉴욕의 존
스트리트 극장과 같이 런던의 헤이마켓에 있는 포터 극장과 유사한 극장을 건축할 확고한 토대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1756년 자메이카에서 할렘이 사망하자, 미망인은 경쟁상대 극장의 지배인 데이비드 더글라스 David Douglass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767년 존 스트리트 극장에서 <멋쟁이 넘자의 계략>으로 개장한 것은 할렘의 아들 루이스를 필두로 한 그들의 합동극단이었다. 이 극단은 아메리칸 컴퍼니로 광고되었고, 찰스톤에 재건된 독 스트리트 극장에 출현하였으며, 전쟁으로 서인도제도로 가기까지 순회공연은 계속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전쟁중에서도 그 미숙한 극단은 유지되었다.
존스트리트 극장 건물은 영국 장교들의 상연은 위해 사용되었다. 그 중에도 연기도 하고 배경도 그린 유명한 스파이 존 안드레Jhon Andre 육군소위도 있었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멀리 떨어진 발리 포그에서는 에디슨Addison의 <카토Cato>가 조지와싱톤의 적인 캠프에서 상영되었다.
독립을 획득한 후, 몇 개의 새로운 주에서는 연극이 바람직스럽지 못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금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직업배우들은 몰래 돌아왔다. 1785년에는 할렘 2세와 아일랜드의 배우 존 헨리 John Henry가 인솔하는 아메리칸 컴퍼니가 뉴욕으로 돌아와 존 스트리트 극장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하였다. 여기에서 1787년, 최초의 아메리카 희극인 로얄 타일러Royall Tyler의 <대조THE Contrast>를 상연하였다. 연극에 대한 편견이 몇 년간 강하게 계속되었던, 작가가 태어난 고향인 보스톤에서 이 작품이 상연되기까지는<오델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훈계>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자신의 극단에 멋진 배우 존 호지키슨 Jhon Hodgkison을 가입시킨 존 헨리는 1789년, 최초의 아메리카 출신의 걸출한 연극이으로 1790년부터 1810년까지 아메리카 무대에서 지배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윌리엄 던랩William Dunlup의 <아버지 - 아메리카적 혼합 The Father; or, American Shandyism>을 상연하였다. 그는 미술 공부를 위해 런던에 유학하였지만 연극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런던에 체재하는 기간을 이용하여 당시의 일류배우들을 연구하였다. 그후 아메리카로 돌아와 존스트리트 극장 경영을 계승하였다, 1796년에는 유명한 아메리카 최초의 연극 일가 죠셉 제퍼슨 Joseph Jefferson 1세를 고용하여 극단을 보강하였다. 2년 후 호지키슨과 함께 던랩은 뉴욕에서 파크 극장을 개장하였다. 초기에 상연된 극으로는 아메리카를 제재로 한 최초의 아메리카 극으로 생각되는, 독립전쟁 때 배우 직업을 가진 스파이크의 일생을 기초로 한<안드레 Andre>가 있다. 호지키슨이 안드레역을 연기했고, 극단원으로는 새로 영국에서 온 젊은 배우 토마스 쿠퍼 Thomas Cooper가 있었다. 그는 나중에 파크 극장 경영을 던랩에게서 계승하였고, 합중국의 연극발전상의 지극히 중대한 요소가 되었다.
조지 와싱톤이 몇 번 방문한 것을 계기로 존 스트리트 극장과 파크 극장의 성공은 연극면에서 뉴욕의 우위성을 잠시 동안 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794년에 주연 연극배우였던 토마스 위그넬 Thomas Wignell이 아메리칸 컴퍼니를 버리고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영국 바스의 로열 극장을 규범으로 세운 우아한 체스너트 스트리트 극장을 개장하였다. 그후 런던의 드루리 레인 극장보다 앞섰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메리카에서 가스등 조명을 사용한 최초의 극장이었다. 런던에서 온 왈랙Wallack 부처와 제퍼슨 일가의 세 사람을 거느린 멋진 극단으로 위그넬은 가벼운 희극의 전통을 완성시켰고, 이 때문에 그의 극장에는 <올드 드루리Old Du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용되며, 오늘날에는 합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왈너트 스트리트 극장이 1811년에 개장되기까지는 필라델피아에서 독점공연하였다. 이 두 개 극장의 경합, 그리고 높은 출연료의 배우를 유럽에서 데리고 온다고 하는 지출비가 큰 경영방침은 결국 파경을 초래하였고, 연극의 우위성은 다시 뉴욕으로 옮겨졌으며 최근에는 국내에 극장이 설립되었기 때문에 그 지위를 위혐받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우위성을 유지하고 있다. 합중국이 아메리카 출신의 걸출한 배우를 탄생시키는 때가 도래하였다.- 극작가는 이보다 훨씬 후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분간 아메리카 관객이 주요 즐거움은 일시적이나마 외국에서 온 배우들의 화려한 등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칭찬과 수입의 새로운 길을 적극적으로 잘 이용하였다. 런던에서 에드먼드 킨Edmund Kean 다음으로 쿠크Cook 와 맥레디Macready가, 파리에서 라셸Rachel, 페슈터Fechter, 프라하에서는 야나우세크Janauschek, 바르샤바에서 모제스카Modjeska, 이탈리에서는 리스토리 Ristory 와 살비니Salvini가 찾아왔다. 그들은 주로 잘 알려진 옛잘극이 레퍼토리에 등장하였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새롭게 내보낼 만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달도상에 있는 아메리카의 관객은 주로 연기에 흥미가 있었으며, 그 점에서 그들은 충분한 목적을 거둘 수 있었다. 19세기 초기의 유럽은 연극적 실험을 하기에는 좋은 형편을 갖지 못하였다. 영국에서는 1843년까지 계속된 연극의 독점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소시켜 버렸다. 프랑스에 많은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과격한 혁명은 파괴의 효과를 가져왔고, 그후 프랑스 집정시대와 제 1제정이 급속히 확립되었으나 혁신을 위한 시간이나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탈마의 연기를 매우 칭찬한 나폴레옹은 사방으로 흩어진 코미디 프랑세즈 극단 재건을 계획하였다. 그는 극단을 정착시키고 지금도 적용되고 있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극작가들에게는 루이 14세가 몰리에르에게 준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극은 그의 지배하에서 고통을 받았다. 인기있었던 것은 비교적 가벼운 형식의 오락작품, 예를들면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작가 스스로가 말한 픽세레클Pixerecourt의 멜로드라마, 오페레타operetta(경쾌하고 즐거운 단편 오페라), 보드빌vaudeville(노래와 춤을 곁들인 소희극) 등이었다. 그의 극은 폭력과 감상이 교차하고 공들인 무대장치와 무대효과와 적당한 음악을 동반한 빠른 템포의 장면등으로 악의 즐거움 후에 선이 승리를 과시한다고 하는 소수의 낡은 주제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이것은 극장으로 모여든 배우지 못하고 비평능력이 없는 새로운 관객을 즐겁게 하였으며 뒤이어 영국에까지 침투하였다. 1802년에는 토마스 홀크로프트 Thomas Holcroft가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멜로드라마로 이름 붙여진 최초의 영어 희곡<켈리나-신비의 아들 Coelina, ou l'enant de mystere>의 번역<신비한 이야기 A Tale of Mystery>를 상연하였다. 픽세레클의 이름은 실려있지도 않지만 저작권에 관한 법률이 아직 발효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이처럼 후에 그의 희곡의 대부분이 양해도 없이 도작되었다.
코벤트 가든 극장과 드루리 레인 극장도 멜로드라마광에게는 굴복하였다. 두 극장의 지배인들은 그 광대한 규모를 이용하여 대도구와 기계류를 고안할 수 있었으며, 모든 스펙터클한 장치로 정착하지 못한 관객을 끌어들였다. 화재, 지진, 홍수 등 부족한 것이 없었으며 많은 극에 진짜 동물, 예를들면 개, 말, 코끼리까지도 사용하였다. 진정한 작가는 이처럼 기분전환적인 것과 경합하지 않았다. 당시의 두드러진 배우들이 정력을 소비한 것은 기교는 뛰어나지만 질적으로는 뒤떨어진 새로운 극에 대해서였다. 존 필립 켐블과 그의 동생 사라 시돈즈 이두 사람 모두(켐블은 셰리던이 원작을 토대로하여 개작한<피사로Pizzarro>의 로라역으로, 시돈즈 부인은 그녀의 마음에 드는 역할의 하나인<보이지 않는 사람The Stranger>의 불의의 인간긔 아내 하라부인역으로) 코체브의 번안작품에 출현하였다. 그러나 두사람 모두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더 높이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켐블의 햄릿, 시돈즈 부인의맥베드 부인역은 높이 평가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렇지만 비극으로 극장이 만원을 이루지 못했으며, 두 사람 모두 희극적 재능은 그다지 지니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막내동생 찰스보다 열등했다. 둘째동생 스티븐은 뚱뚱하여서 몸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도 폴스타프를 연기할 수 있었지만 배우로서나 지배인으로서도 뛰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찰스는 로미오, 오를란도Orlando, 마커티오Mercutio, 미라벨Mirabell, 찰스 서피스Charles Surface, 젊은 앱솔루트Absolute 등의 훌륭한 신사역에는 우수하였다. 주목해야 할 점은 나중에까지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새로운 작품은 전혀 씌어지지 않았고 모두 재연물이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찰스의 딸이며 당시 일류 여배우의 한 사람이었던
파니Fanny는 줄리엣(로미오와 줄리엣), 포샤(베니스의 상인), 베아트리체(헛소동), 티즐 부인(학교 험담), 오트웨이 작 〈베니스의 안정 Venice Preserved〉의 벨비데라 등의 역을 연기하여 영국과 결혼으로 한때 무대에서 떠났던 미국에서 명성을 얻었다.
지배인과 배우로서 존 필립 켐블과 찰스 켐블은 무대의상과 배경만들기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20년대까지 코벤트 가든 극장이나 드루리 레인 극장도 다른 도처에 있는 극장과 마찬가지로 조명용 양초와 석유 램프를 가스등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예상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혁신이었다. 가스가 갖는 중요한 매력은 밝기가 증가되고, 빛의 강도를 뜻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불행한 것은 화재의 위험을 감소시키기에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지만 그 일렁이는 불빛은 밝기를 증가시켰고, 게다가 양초 불빛이 갖는 주요 매력이던 깜박깜박하는 광채를 계속해서 가질 수 있었다. 19세기 말경 가스가 전기의 안정되고 현란한 빛에 의해 대체되었을 때 극히 유감스러운 것은, 가스등이 자아내던 신비적인 분위기가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윌리엄 카폰(William Capon)은 켐블이 고용한 디자이너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루테르부르의 영향을 받아 <진짜>를 탐구하는 열정으로 셰익스피어극에 꼭 들어맞는 많은 네오 고딕 양식의 장치를 디자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다음 반세기 동안 무대설계를 지배했다. 무대배경에 걸출했던 사람은 클라크슨 스텐필드(Clarkson Stanfield)와 그리브(Grieve)일가였다. 그리브의 자손은 3대에 걸쳐 계승하였다. 일가 창시자 존은 켐블을 위해 일하였다. 아들 윌리엄의 월광 장면은 특히 칭찬을 받았다. 그야말로 관중이 원하던 최초의 무대장치가였다. 찰스 킨을 위해 일했던 존의 손자 토마스는 장치의 화려함과 구성의 예술적인 조화로 유명하였다.이에 장치의 정활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역사적으로 정확한 의상으 ㅛ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저명한 고물 수집가이기도 했던 극작가 플랑체가 확실한 학식과 문장학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의거하여 디자인한 의상은 1824년에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찰스 켐블의 《존왕 King John》을 위해서였다.
이것은 켐블 일가의 유명한 라이벌, 에드먼드 킨의 아들 찰스 킨에게 계승되어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연극계에서 자란 버려진 아이 에드먼드 킨은 거칠고 촌스러우며 교육도 받지 못한 천재로, 리처드 3세와 이아고라든가, 또는 말로우 (Marlowe)의 《말타 섬의 유태인 The Jew of Malta》에서 바라바스 등과 같이 개성이 강한 악당역의 연기로는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유태인 샤일록에서는 맥클린조차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빨간 머리와 털을 장애물로 취급, 그 배역에서 손에는 정육점의 식칼을 들고 눈에는 피에 대한 욕망을 가득 담은 검은 악마를 연출해내어 드루리 레인 극장 관객에게 충격을 주었다. 애주가였던 킨은 연기가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배우였지만 귀족적인 존 필립 켐블과 신사다웠던 찰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연극계에서는 아마 필요한 인물이었
을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되는 조지 프레드릭 쿠크는 킨보다 못하지는 않았으나, 알콜중독으로 신뢰할 수 없었으므로 그 생애의 대부분을 영국의 지방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리처드 3세역을 연기했을 때는 켐블에게서 두 번 다시 그 역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낼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었었다. 더욱이 아메리카에서는 뉴욕의 파크 극장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위대한 비극배우라고 갈채를 보내며 인정하던 관객도, 그가 항상 술에 취해 있게 되자 신뢰할 수 없다고 그를 버렸다. 비참한 지방순회공연 후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 사망했지만, 그의 재능을 높이 샀던 킨은 그 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킨의 아들 찰스도 합중국을 널리 순회하며 돌아다녔는데 다혈질의 부친과는 전혀 닮지 않은 차분하고 세련된 배우였다. 1814년 드루리레인 극장에서 킨이 의기양양하게 데뷔한 데 이어서 관객이 쇄도하자 그는 찰스를 무대에서 소외시키려고 명문 이통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부친의 행동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드루리 레인 극장은 그를 해고하였고, 찰스 또한 배우로서 일가의 생업을 이어 부친을 대신하였다. 부친과 아들은 단 한번 함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오델로와 이아고역을 연기하였다. 에드먼드는 무대에서 쓰러진 후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찰스는 부친의 재능을 전혀 닮지 않았지만 훌륭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배우였으며 뛰어난 지배인이었고, 당시의 연극에 아주 유익한 영향을 미쳤다. 주연 여배우기도 했던 아내 엘렌 트리(Ellen Tree)와 함께 그
는 1805년부터 1859년까지 프린세스 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어 극단을 오랫동안 통솔하였다. 킨의 셰익스피어극과 프랑스극의 번안작품 즉 《코르시카 섬의 형제 The Corsican Brothers》와 《폴린 Pauline》과 《루이 Ⅱ세 Louis XI》등의 상연에는 종종 빅토리아 여왕도 관람하였다. 호화로운 무대에서 킨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빈틈없는 주의와 이야기 방법·음악·배경 등 그 극의 갖가지 구성요소 사이에 확립된 조화, 특히 셰익스피어극에서의 군중장면 취급방법 등은 매우 훌륭하였다. 즉 찰스 킨의 런던에서의 이러한 무대는 그것을 본 적이 없는 유럽 대륙의 무대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연극의 역사에서 기묘한 관계법을 만들어냈다. 착스 마이닝겐 공 게오르게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질녀와 결혼하여 런던 방문 때는 몇 번 프린세스 극장에 들렀다. 연극을 좋아했던 그는 첫 번째 부인이 죽은 후 여배우 엘렌 프란쯔(Ellen Franz)와 결혼하였다. 그녀와 상의 하여 그는 궁전에 마이닝켄 극단으로 유명해진 극단을 창설했다. 공작은 배우 루드비히 크로네크의 도움을 얻어 연출을 했고, 역사적으로 정확도가 높은 배경과 의상을 디자인하였다. 찰스 킨의 방법을 응용하였고, 당시 대륙의 무대에서는 보통이었던 주가 되던 배우의 형식적인 집합을 그만두고, 군중을 몇 개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지도자를 정하여 거기에 속한 배우에게 각기 자신의 역에 스스로가 생각한 성격을 부과시켰다. 또한 계단과 연단을 이용하여서 극의 흐름이 중단되지 않도록 했다. 1870년대에 마이닝겐 극단이 최초로 순회공연을 나섰을 때에는 곳곳에서 갈채를 받았다. 런던에서조차 그들의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와 《12야)는 높이 평가되었고, 그들의 영향은 멀리 모스크바나 파리에서의 상연에도 명확하게 나타났다. 독일에는 마이닝겐 극단의 초기 역사에 영향을 미쳤으면서도 그냥 지나친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리처드 바그너로 그는 현재는 당연히 오페라 역사에 등장하지만 무대문제, 특히 조명·디자인·몸짓 등에 있어서 위대한 개혁자였다. 유럽의 19세기 연극을 개관할 때 그는 〈종합예술)에 관한 이상상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독일의 연극은 조극이 나폴레옹 전쟁의 비극적인 여파에서 회복된 후에도 변함없이 멜로드라마와 프랑스의 〈교묘하게 만들어진극〉에 충실하였고, 주목할 만한 유일한 극작가는 헤벨 뿐이었다. 정치지상주의 와 호헨졸레른(Hohenzollern)가에 의한 국가통일이라는 상황하에서 진정한 극이 불모의 토양에서 개화하는 데는 비료가 되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아야만 되었다. 슈라이포겔(Schreyvoger)에 의해젊은 천재 그릴파르쩌(Grillparzer)가 길러졌던 비엔나에서만은 새로운 생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주로 대중연극의 연극내에서였다. 1778년에 마리넬리의 레오폴트슈타트 극장은 마이어(Mayer)의 요셉슈타트(Josefstadt)라는 강력한 라이벌을 얻었다. 그리고 1801년 모차르트의 《마법의 파리 Magic Flute》작사자 시카네더(Schickaneder)는 유명한 비엔나 극장을 개장하였다. 이 시기가 흥행사·극작가·배우로서 그의 생애의 전성기였다. 그리고 이기간에 그는 《햄릿》과 민속희극·오페라 혹은 그의 후원자 요제프 2세가 즐겼던 발라드 오페라의 《징그슈필레 Singspiele》에 등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즉흥 소극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타입의 대중극인 《마술극》이 그것을 대신하였다. 마술과 소극, 영국의 팬터마임과 비슷한 패러디가 혼합된 이 극은 그 근원이 바로크 연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작을 햇던 세 사람의 작가 글라이히, 마이슬, 보이에를레 - 이중에서 보이에를레는 배우 칼 카를에 의해 오스트리아 안에널리 퍼진 희극적인 인물 슈타베를을 창조한 사람이지만 - 의 손에서 오랫동안 비엔나 연극계를 지배하게 된 라이문트와 네스트로이의 위대한 희극을 향한 길이 준비되었다. 당시의 지도적인 희극배우 라이문트는 보통 대중극장에서 훈련하였다. 그리고 열마후 수심에 잠긴 얄궂음과 미묘한 감상을 교차시킨 비애에 잠긴 그의 독특한 연기에는 특별히 그를 위해 씌어진 제재가 필요하다고 자각, 그와 같은 작품을 스스로 쓰게 되었다. 그 결과《요정왕의 딸》과 《알펜 왕과 인간의 적》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불가사의 한 존재로부터 인생의 근본적인 진리를 알게 된다고 하는 만화극으로 그 중에는 스펙터클·동작·1인2역의 장면·음악·노래 등 대분이 전형적인 비엔나의 천재 극작가의 손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라이문트는 낭만주의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오르스트리아에서 길게 이어졌던 구체제의 사물이었다. 그의 뒤를 계승하여 체제 파괴까지 행한 네스트로이는 1848년의 혁며에서 불만을 폴발시 새로운 세계의 인간이었다. 필치는 경쾌하고 미묘하며 줄거리를 표절하였지만, 지나치게 파괴적인 풍자로 인해 그는 자주 당국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즉흥과 뛰어난 성격연기로 관중을 현혹시켜 다시 비약했다. 그는 라이문트보다 재기가 종횡무진하였지만 상상력과 감정표출면에서는 뒤떨어졌다. 그는 패러디에 우수하였고, 바그너는 그 주요한 표적이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그의 민속연극은 왈츠의 리듬과 합쳐져서 세계극장을 정복한 비엔나 오페레타로 쇠퇴하였다. 그릴파르쩌가그의 비극 - 그 중에 칼데론의 《인생은 꿈》을 그대로 흉내낸 《인생은 꿈》이 있다. - 으로 오스트리아에 공헌한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진실한 극을 만들려는 극작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낭만주의의 강력한 주창자는 빅토르 위고의 극, 특히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일직이 없었던 논쟁을 야기시킨 《에르나니》와 《루이 블라스》에 의해 그 틈을 메우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이 두 작품은 전통적인 스페인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찰스 켐블 극단이 1827년에 방문하여 프랑스의 관객을 만족시켰던 셰익스피어를 통하여 영국 연극의 영향을 받아서 결실을 본 최초의 성과, 뒤마의 극과 알프레드 데 비니의 《챠터톤》도 있었다. 찰스 켐블 극단의 주연 여배우는 해리엣 스미드슨으로 이윽고 베를리오즈의 부인이 되었다. 낭만파, 연극의 생명을 짧았다. 뒤마는 본래 소설가이고, 위고와 비니는 시인이었다. 알프레드 데 뮈세의 매력적인 희극은 무대를 위하여 쒸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러시아에서 어떤 젊은 여배우에 의해 20년 후 파리로 들어왔다. 당시의 극다운 극은 아직 보드빌과 멜로드라마 그리고 낭만주의가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르는 곳마다 극작가에게 모범을 나타내고, 〈잘 만들어진 극〉을 계속 써낸 작가 스크리브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상의 사건을 고도의 비극으로 구성하였던 낭만파와는 달리 스크리브는 역사적인 대사건을 마치 응접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정도의 친밀한 것으로 만드는데 뛰어났으며 또한 그의 기술은 멋진 것이었다. 그의 섬세하고 세밀하게 조합된 구성과 긴장없는 결말을 정연하게 끝내는 방법은 이론적인 프랑스인의 심정에 호소하여 셰익스피어와 그 모방자들이 묘사한 예상이 어긋나는 뛰어난 갈드에 성급하게 친숙해졌던 관객에게 즐거운 탄성을 제공하였다
연극의 역사 - 3 | | | 공연입문 |
2004.08.11 18:00 |
7. 19세기 후기의 연극
1830년부터 1880년에 걸쳐서 각 지역으로 연극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새로운 극장의 수는 더욱더 증가하였지만 그것은 비평 능력이 없는 관객을 수용하게 되었고, 무대 위와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극작가는 극의 줄거리와 대화보다 장치의 우수함이라든가 배우의 뛰어남에 의지하여 생명이 짧은 극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프랑스에서는 코미디 프랑세즈가 여전히 파리의 주도적인 극장이었지만 새로운 극장 - 그 중에서 온데온좌가 가장 중요하다 - 에 의해 그 탁월한 지위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온데온좌는 피카르트(독일에서는 《명랑한 미망인) 영국에서는 《미망인 메어리)로 상연된 음악희극 《작은 마을)의 작가)에 의해서 창설되어, 1829년에 하렐에게 계승되었다. 그때에 프랑스 제 2의 극장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고전작품의 레퍼토리와 또한 동시대 작가의 작품 레퍼토리를 위하여 음악극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오데온좌와 프르트 산 마틴 극장, 르네상스 극장이 평판을 얻은 것은 매크리의 묘사로 유명한 최초의 《루이 블라스를 연기한 프레드릭, 1862년에 템플 대거리에 있는 많은 극장에서 관객을 빼앗은 오스만 남작이 설립한 퓌남뷸좌에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피에로로 팬터마임 배우였던 도뷰로, 많은 로맨틱한 극의 ㅣ로인을 연기하였고 코미디 프랑세즈로가서 《챠터톤》의 키티 벨을 연기했을 때에는 이미 성공해 있던 마리 도르발등에 의해서였다. 코미디 프랑세즈의 주연급 배우들조차 자주 순회공연에 나서서 극장에 없는 일도 있었다. 라신의 극에 출연하여 한때 경시되었던 프랑스의 고전극에 영광을 되돌려놓은 라셸은 1841년에는 영국을, 1855년에는 합중국을 방문하였다.ㅏ 그의 부재 동안에 코미디 프랑세즈는 다른 극장에서 성공한 극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그 좋은 결과에 기뻐하였다. 그러한 극 중에는 오졔의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 《포와르 씨의 사위》가 있다. 또한 그외《가난한 암사자들》과 《지보와르의 아들》을 쓴 그는 1848년의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극작가의 한 사람으로 대개의 동시대인들 -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 뒤마 2세이다 - 보다 위대한 현실주의자였다.
뒤마의 사회비판극 《라 도미몬드》와 《사생아》 또는 《방탕한 아버지》(이 최후의 두 작품은 정력적인 뒤마의 사생아로서의 쓰라린 경험으로 쒸어졌다.) 등은 처녀작 《춘희》에서 성공했던 것보다는 못하다 《춘희》는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 마그리트 고티에의 감상적인 고급창부의 묘사가 초연 이래 대여배우를 향한 멋진 등용문이 되었다. 주인공 청년 아르망 듀발은 샤를르 페슈터에 의해 최초로 연기되었다. 그는 영국인 어머니와 독일계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배우로서 파리에서의 성공 후, 그는 런던으로 갔고 그후 합중국으로 건너가서 죽을때까지 그 땅에 머물렀다. 그의 영어 발음은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위고극의 영어역에서는 루이 블라스역을 훌륭하게 연기해낼 수 있을 만큼 유창하였다. 그러나 그가 최초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861년 혁명적인 햄릿으로 런던의 라이시엄 극장에서 그 자신이 극단장으로서 멜로드라마에 연출하게 되었다. 라이시엄 극장은 올림픽 극장이나 프린세스 극장과 마찬가지로 1848년 극장 조례로 드루리레인 극장과 코벤트 가든 극장의 독점이 붕괴된 후 런던 연극계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위외로 획기적인 일은 아니었다. 무면허 극장은 어떤 극에서나 셰익스피어극에서조차 절반 정도 노래를 삽입하고, 그것을 희가극이라 부르며 법의 눈을 피해 빠져나갔다. 특허가 있는 극장도 무면허 극장과 같은 요금을 관객에게 요구하였다. 켐블의 은퇴 후, 비극에서 에드먼드 킨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유력한 배우 맥레디는 셰리던의 《빌기니우스》와 거의 단기가 드루리 레인극장의 위원을 맡았던 바론 경의 《베르너》, 소설가 벌뤄 리톤의 《리용의 귀부인 》과 같은 새로운 극으로 양쪽 극장의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특허를 지닌 두 극장은 개가 등장하는 《몬타기스의 개》와 극에 출연하는 동물을 위해 순회동물원이 모두 필요했을 정도의 《하이더 알리》와 같은 멜로 드라마를 상연하였고, 매년 크리스마스에 대규모 팬터마임 쇼를 행하였다.
독점 폐지를 전화위복시킨 사람은 사무엘 펠프스였다. 그가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오델로역을 맡기기 위해 맥레이디를 고용하였을 때, 이미 요크 순회극단에서 그만이 비극배우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1843년에는 새들러스 웰즈 극장을 계승하였고, 1862년에 은퇴할 때까지 셰익스피어의 대부분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그 중에 실제로 는 관객이 알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예를들면 《페리클레스》는 왕정복고시기 이후 상연되지 않았다. 위너 부인을 상대역인 주연 여배우로 삼고, 펠프스는 스스로 대부분의 극에 등장하였다. 그의 리어왕과 맥베드는 탁월하였지만 보통역 또한 훌륭하였다. 경영이 좋았던 자신의 극단에서 그는 다수의 젊은 배우를 양성했다. 그 배우들은 후에 와서 웰즈 극장에서 펠프스와 공연한 것을 자만하기도 했다.
코벤트 가든 극장에 등장하기 전에 펠프스는 헤이마켓 극장에 단기간 출연하였다. 이 극장은 푸트가 손에 넣었던 여름 동안만의 특허 덕분에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1821년에는 현재의 장소에 재건되었는데 이곳은 촛불조명을 사용하였던 최후의 런던 극장이었다. 가스등은 1843년에 와서 설비되었다. 그 개조로 초기 무렵의 이름이 남겨져 있던 앞무대와 무대 앞부분의 문이 사라졌다. 이때의 지배인은 광범위하게 걸쳐서 연극에 관계하였던 일족의 한 사람인 벤 웹스터로 그는 젊었을 때 저속한 희극에 손을 대기 전에 팬터마임으로 할리퀸과 판탈론의 역으로 춤추었던 적도 있었다. 그는 《난로가의 귀뚜라미》를 극화하였고 - 디킨즈와 스코트는 상연용의 헤아릴 수 없는 소재를 각색자에게 주었다 - 그 중에서 존 페리빙글역을 연기하였는데 그것은 멋진 성과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호평받은 배역은 페그 워핑톤의 생애를 기초로 한 극, 톰 테일러의 《가면과 얼굴》의 트리플렛역이었다.
웹스터는 한때 올림픽 극자에서 베스트리스 부인 극단의 일원이었던 적이 있다. 파리에서의 대성공 후 곧바로 조각가 바르트롤로찌의 양녀가 되었고, 나중에 발레 댄서 아르망 베스트리스의 부인이 된 이 뛰어난 여배우는 플랑체의 현란한 음악극으로 런던의 관객을 기쁘게 했다. 그녀는 매듀스가의 아들, 경희극배우 찰스 매듀스와 재혼하였다. 찰스는 혼자서 많은 역할을 연기하는 원맨쇼《가정에서의 매듀스 씨》와 《만능배우로 가장 유명했다. 베스트리스 부인과 매듀스는 함께 코벤트 가든 극장으로 옮겼지만 그들의 경영은 성공하지 못했다. 플랑체의 음악극 《보석섬》의 무대설계와 배경화가 비벌리가 런던에서 최초로 종이를 빛을 비출 때 보이는 그림을 사용하여 라이시엄 극장이 성공하였다. 극단을 엄격하게 통솔한 베스트리스 부인은 뛰어난 지배인이기도 했고, 찰스 킨의 예를 본받아 역사적으로 정확한 의상을 사용한다거나 진짜 소도구를 사용하는 등ㅇ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녀는 또한 날개와 늘어뜨리는 막과 함께 배경막 대신에 박스 세트(세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문과 창이 있었고, 팽팽하게 당긴 천의 천장이 붙여졌다)를 사용한 런던 최초의 지배인이었다.
그녀가 코벤트 가든 극장을 빌려쓰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상연한 극의 하나로 당시의 생활을 다룬 희극 《런던의 장담》이 있는데 매듀스는 그 속에서 다즐 역할을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실명 부시콜트로 런던과 뉴욕에서 배우와 극작가로 유명해졌고, 양쪽에서 반반씩 생애를 보낸 젊은 배우 리 모르톤의 데뷔작이었다. 그는 다작으로 130편 이상의 극을 썼으리라 믿어진 . 그러한 것의 대다수는 프랑스극의 개작으로 그 중에는 《코르시카 섬의 형제》가 있다. 그러나 그의 최고 작품은 아일랜드극 《사랑스러운 딸》《아라 나 포그》《쇼론》등이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역에 그의 아내 스코틀랜드인 아그네스 로버트슨이 여주인공을 연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이 극화한 스코트의 《미들로쟌의 심장》에서는 지니 딘스로 분,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다. 헤이마켓 극장에서는 1853년에 또 한 사람의 뛰어난 통속 희극배우 존 바크스톤이 웹스터로 대체되었다. 이 무렵은 비극배우가 부족하였다. 바크스톤은 그 자신의 극 -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것은 《노동자 루크》와 《녹색의 관목》이었다.- 에 많이 출연하였고, 대부분이 상당히 유명하였다. 《녹색의 관목》은 몸짓배우 셀레스트 부인이 호평받은 배역의 하나이기도 했다. 헤이마켓 극장에서는 바크스톤이 훌륭하게 극단을 만들어 대부분이 계속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무대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웃기기에 충분하였다고 한다. 그는 헤이마켓 극장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 이 극장을 빌려쓰고 있는 동안 의미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즉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최초의 아메리카 출신 배우 에드윈 부스가 1861년에 등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샤일록과 리셜리외, 질레스 오버리치 경 등의 역으로 등장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상의 일과 부시콜트의 뉴욕에서의 무대에 의해서도 이제까지의 50년 사이에 아메리카 연극이 얼마나 진보하여 왔는가를 알 수 있다. 18세기가 마지막을 ㄱ ㅗ하기 전, 청교도의 마을 보스톤에까지도 극장이 세워졌고 1796년에는 헤아마켓이라는 극장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연극계에서는 의연하게 뉴욕이 특히 1820년 카프 극장 재건 후에도 주역을 담당하였다. 그곳에서 매듀스가 등장하였다. 그것은 거의 에드윈의 부친, 주니어스 브루터스 부스가 런던에서의 찬란한 경력 후에 뉴욕에 등장한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채탐 극장이 1824년에, 이어서 라파이에트 극장이 1878년 결국 폐쇄될 때까지 4번이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된 거대한 바워리 극장 등이 개장하였고, 파크 극장의 우위도 그 거리에서 어느새 위협받게 되었다. 최초의 걸출한 아메리카 여배우이며 어딘지 모르게 사라 시돈즈의 당당했던 특성을 갖추고 있는 샤롯트 카슈만이 그녀의 가장 성공한 맥베드 부인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 바워리 극장에서였다. 그녀는 또한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 《가이 매너링》의 메그 메릴리스로도 크게 극찬을 바았다. 그녀는 남자 역할을 하는 것을 즐겼으므로 미인 여동생 수잔이 연기한 줄리엣과 오필리아의 상대역 로미오와 햄릿뿐만 아니라 윌시 경과 클로드 멜노테도 연기하였다. 바워리 극장에 관계한 최초의 뛰어난 아메리카 배우는 에드윈 포레스트였다. 이 훌륭한 비극배우는 불행하게도 맥레디를 지나치게 질투하여 1845년에 그가 런던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의 공연 실패에서 맥레디를 비난하였다. 맥레디가 다시 뉴욕을 방문했을 때 포레스트의 역습은, 아스터 플레이스 폭동사건으로까지 몰고 갔고, 그 결과 22명이 살해되었다. 맥레디 자신은 몰래 마을을 빠져나와 영국행 배에 올랐다.
1830년대부터 1840년대에 걸쳐서 뉴욕의 극장수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것은 주로 배우들에 의해 경영되었다. 내셔널 극장은 왈랙에 의해, 올림픽 극장은 미첼에 의해, 최고 극장의 하나인 바톤 극장은 유일한 실제 라이벌은 또 한 사람의 런던 출생의 배우 제임스 왈랙에 의해 1852녕에 개장된 왈랙 극장(원래 라이시엄 극장)이었다.
왈랙은 아들 레스트와 조카 제임스에게 뒤를 위임하여 그가 시작했던 일을 계속하게 하였다. 제임스는 비극과 박력있는 극으로, 레스터는 희극과 로맨스에서 각각 그들의 재능을 발휘, 그것을 대성공리에 수행하였다. 다이안 부시콜트가 주로 관계했던 것은 이 왈랙 극장에서였다. 부시콜트의 아메리카에서의 극으로는 오랫동안 아메리카 흑인을 진짜로 무대에 세우려고 했던 그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실험극인 《 1/8 혼혈아 - 루이지애너의 생활》이 있다. 이 극에서는 아메리카인 2세의 유명한 배우 죠셉 제퍼슨 3세가 셀럼 스카더를 연기하였다. 당시 아메리카인이 가장 좋아한 전형적 인물 제퍼슨의 매력적이로 유머러스한 개성은 그의 자서전에도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의 《난로가의 귀뚜라미》의 켈럽 플럼머 역과 《연적》의 봅 에커스도 훌륭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립 반 윙클역이었다. 여러 사람이 취급하여 어쩐지 완성되지 않은 듯한 극작품이 되어버린 워싱턴 아빙극에 출연한 후 1865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수년에 걸쳐 내용을 크게 바꾸어 각색,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만든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부시콜트의 이 이야기의 극화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퍼슨이 창조한 역의 하나로 《우리들의 아메리카인 친척》의 아사 트렌챠드가 있다.부르스가에는 정신 이상의 혈통이 있었고, 에드윈에게도 우울 병의 형태로 그것이 나타났으며 그의 동생이 일으킨 일에대한 쇼크에서 완전히 완치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극배우로서는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와 희극에서는 최고였던 제퍼슨은 판텔, 질레트, 맨스펄트, 피스크 부인등고 같은 인물을 포함하여 아메리카인 배우 등장시대의 선구자였다. 또한 그 생애가 그 세기의 절반에 미치며, 초기의 아메리카 연극사에 그의 생애가 집양되어 있는 여배우가 존드루 부인이다. 그녀는 오랜시간에 걸텨서 피라델피아의 아치 스크리트극장의 지배인을 역임하였다. 경제적인 압력 때문에 합중국에로의 이주자들이 부득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자 배우도 이에 동행하거나 바로 뒤따르기도 했다. 그리고는 대륙에 이르는 곳마다 극장이 생겼고, 극단의 극장 또한 이곳저곳으로 이동하였다. 이 선구자 중에는 <올드 샘>드레이크에게 인솔된 드레이크 일가, 뉴올리언즈에 최초로 극장을 셍운 콜드웰, 센트루이스를 본거지로 몇 개소의 극장을 경영하였던 러들로와 솔스미스, 시카고 공연에 일족을 데고 갔던 죠셉 제퍼슨2세,<올드 샘> 드레이크의 손녀딸이며, 오마하에서 데뷔한 가련하고 아름다운 줄라이 딘이 있다. 몰몬교도가 뉴욕을 나와 최초로 정착한 ㅇ리리노이주의 노바에서는 그들의 지도자 브라이엄영이 <피사로>에 출연하여 모르몬교도의 연극을향한 정열을 북돋아 주었으므로 후에 그들은 솔트 레이크 시에 입구위에 셰익스피어의 흉상을 붙인 드루리 레인 극장을 모방하여 멋진 극장을 세웠다. 콜로라도와 훨씬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서는 금광 채굴자들이 오락을 위한 대금으로 사금을 지불하였으므로 유명한 연극인은 대개 캘리포니아로 몰여 들었고, 그 곳에서 1850년경 최초의 극장이 세워졌다.
미시시피강 하류에서는 런던의 배우 윌리엄 체프만에 의해 시작된 에드나 파버의 소설<연예선>과 그것을 기저로 한 뮤지컬로 유명해진 연예선이 떠 있었다. 이와 같이 물에 뜬 극장의 주요 상연물은 멜로 드라마와 팬터마임 혹은 해양극등이었다. 아메리카인 극작가는 아직 적었으며, 예외로 여배우기도 했던 안나 코라 마우와트가 최초의 아메리카 사회희극을 상연하였다. 그러나 다작을 했던 부시콜트에 필적할 사람이 나오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거렸다. 한편 흑인가수의 인기는 아메리카 대륙을 휩싸 영국가지 건너 갔으며, 니블로즈 가든의<<흑인 갱>>과 같이 굉장한 노래와 춤의 쇼는 버라이어티쇼와 뉴욕의 팰리스 극장에서는 그 이상의 형태로 까지 이른 보드빌의 인기에 필적하였다. 합중국에서 대략 부시콜트에서 가장 가까운 라이벌은 오거스틴 데일리일 것이다. 90편이나 되는 극의 대부분은 각색물이지만, 주로 뉴욕과 런던에 극장을 만들었던거승로 사람들의기억에 남아있다.
런던의 극장은 1893년, 데일리 극단의 배우 존 드루와 애다리한 중연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로 개장했다. 이 극장은 후에 뮤지컬 코미디 유행의 발상지가 되었다. 델일리는 또한 극작으로 생계를 우지한 최초의 아메리카 극작가였으며 브로슨 하워드 최초의 노작<<새러토거>>를 무댕에 올러 그를 격려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스펙터클하며 후년에 무대조명을 예술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의 극은 문학적 가치는 전혀 없었지만 그이 밑에서 이름을 얻은 배우에 맞추어 씌어져서 멋진 효과를 거두었다. 아레리카 연극은 위대한 극작가를 제외하고는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갖추었다. 많은 점에 뛰어났으나 클리드 피치는 아직 자격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 최고의 배우를 육성한 이는 아메리카인 지배인 헤지키아 베이트맨 이었다는 점이다. 딸 케이트, 버지니아, 이사벨, 등은 모두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섰던 사람이므로, 그녀들의 재능을 발휘할 극장을 물색하여 베이트맨은 런던의 라이시엄 극장을 인수 주연 배우로서 33세의 헨리 아빙과 계약하였다. 그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배우가 아니었으며 목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걸음걸이도 보기 흉하였다. 그이 생애를 통하여 끊임없이 그의 실패를 지적하고 싶어하는 비평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재가 지닌 의지력으로 대부분의 결점을 타파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적인 신망도 얻고 나이트작 칭소를 받은 최초의 영구 뱅가 되었다. 그는 연극 시즌에 기대에 벗어나는 결과 속에서 시작되었을 때 베이트맨을 설득하여 상연 시킨 멜로드라마<<종>>에서 마시어스를 연기하여 라이시엄 극장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고포스런 작품에서 그는 하루삼에 유명해졌교, 그의 명성은 그가 연기한 찰스 1세의 비애와 논의적이었던 햄릿에 의해 더욱더 올라 갔다. 1879년에 그는 스스로 라이시엄극장 경영을 계승, 그것을 런던에서 일류 극장으로 만들었다. 또한 주연 여배우로서 연극 대가족의 차녀이며 매력적이고 여성다움을 모두 겸비했으리라 생각되며, 대중으로부터 더 할 바 없이 사랑받고 있던 여배우 엘렌 테리를 고용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섰으며, 그녀의 장녀도 역시 케잍,라는 이름으로 명배우 존 질거드의 어머니가 되었다. 엘렌의 막내 동생 브레드는 멋지고 로맨틱한 배우로 아름다운 아내 줄리아 닐슨과 함께<<붉은 별꽃>>과 <<나바르의 헨리>>와 같이 인기있는 극에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바빙과 함께 무대를 밟는 것 자체가 교욱이었다. 그가 고용하여 훈련시킨 젊은이들 중에는 윌리업테리스 ,존스톤 폽스 로버트슨, 존 마틴 하베이가 있다. 윌리엄 텔리스는 나중에 아델피 극장에서 해양물 멜로 드라마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지만 분장실 문에서 미친 사람에게 살해 되었다. 뮤지컬 코미디의 증거운 여주인공으로 경희극 배우 세이모어 힉스와 결혼한 엘라린 테리스의 딸이었다. 존스톱 폽스 로버트슨은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햄릿 배웅의 한 사람으로 고상하고 매력적인데다가 멋진 목소리를 가진 주인공으로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의 고별공연에서 나이트작 칭호를 수여 받앗다. 마틴 하벵이 역시 위대한 로맨틱 배우였다. 그는 <<두 도시의 앙기>>를 극화한 작품 <<유일한 길>>의 시드니 카톤 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주연급 배우는 배우겸 지배인 프랑크 벤슨과 벤 그리트가 그들의 셰익스피어 극단과 순회공연을 했던 것 처럼 특히 여름철에 광범위하게 순회공연을 했다. 벤슨은 나중에 영국 연극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연기하게 된 스트래트퍼드온에이번의 셰익스피어제를 제도화 하였다. 그리트는 배우들을 올드 빅 극장으로 덱리고 갔다. 아빙이 시작한 자신의 끄장에서 배우와 지배인의 일인이역을 겸하는 전총은 1891년에 런던에서 조지 알렉산더가 계승한 세인트 제임스 극장, 비어붐 트리가 헤이마켓 극장의 소유에서 올린 수익으로 1897년에 세운 허 마제스티 극장, 그리고 찰스 윈담이 1899년에 세워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극장으로 각각 우지 외었다. 톰 테일러의 <<가출옥자>>는 당시의 하층 생활을 다룬 많은 희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예 스타일의 원숙한 직업인 이상의 것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서은 여배우 매지켄달의 오빠 톰 로버트슨이 그의 이른바 커펜소서드라마 속에서 사실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초기의 노력으로 파괴하게 된 스타일이었다. 이것은 마리윌톤과 남편 스퀘어 반크로프트에 의해 프린스 오브 웨일즈 극장에서 상연되었지만, 연기와 무대의 양변에서 완전한 개혁을 필요로 하였다. 처음의 딱딱한 이야기 방법과 과장된 몸짓은 매우 조용하고 자연스런 형태의 연기로 바뀌었다. 멜로드라마에서 계승된 화려하지만 때때로 격에 어울리지 않는 무대장식이 좀더 현실적인 가구와 장치로 대체되었다. 이와 같은 변경에 따른 효과는 피네로의 경희극에서 약간 볼수 있다. 피네로와 동년배인 존스는 <<성자와 죄인>>과 <<미카엘과 타락한 천사>>로 빅토리아기의 관객을 놀라게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네로도 <<두번째의 텅거리 부인>>과 <<악명 높은 에브스미스 부인>>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을 관념적 연극의 지도자라고 생각했던 존스는 또한 훌륭한 직업인기도 했다. 피네로의 작품중 초기의 어릿광대극만이 지금도 상연 되며 칭찬을 받고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자신은 현실주위자이며 사회비평가라고 행각하였지만, 자신이 내건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성향으로 괴로워 했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인물은 실생활의 관습보다도 연극의 관습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그들에게는 연극의 어느 분야에도 분류할 수 없는 오스카 와일드와 길버트의 기지는 전혀 없었다. 와일드의 반짝이는 인위적 희극중에서 최고의 작품은 <<진실이 제일>>로 이것은 지금도 무대에서 통용되고 있다. 길버트의 극은 당시 인기 있었지만 아더 설리반 의 음악과 확실히 조합된 라이트 오페라 용의 대본이 성공하였으므로 극작품 쪽이 뒤떨어 지게 되었다.
존스와 피네로, 기타 헤아릴 수 조차 없는 극작가들의 작품은 고급멜로드람의 주문에 의해 씌여졌고, 스크리브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리앙 사르두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버나드 쇼 에게 <<사르두 맹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르두 작품의 대부분은 황금 목소리의 소유자인 프랑스 여우라사 베르나를 위해 씌여졌다. 그녀는 활발한하였으며 관례를 무시하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으므로 생개 자체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리석은 행동을 조소하던 사람조차도 그녀의 연기가 뛰어난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며 그녀는 세계를 일주하며 화려한 생애를 보냈다. 토스카와 페도라 처럼 감정적인 멜로 드라마 풍의 역을 하는 데는 최고였지만 어떠한 역할에서도 앞장서서 연기 하였다. 그녀의 유럽에서의 유일한 라이벌은 이탈리아의 여배우 엘레오노라두제였는데 다눈치오는 그녀를 위해 작품을 썼다. 두비극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고, 많은 점에서 화려한 사라 베르나르와는 정반대 였으며 조용하고 깊은 눈, 대단한 박력, 교묘함을 겸비한 여배우였다. 사람을 피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면서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불가사의한 인품으로 그녀도 역시 광범위하게 순회 하였다. 1895년 그녀는 슈더만의 <<고향>>에서 마그다역으로 런던에 등장, 이탈리아어로 연기 하였지만 때를 같이 하여 베르나르는 그 역을 프랑스어로 연기 하였다. 이것은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장소에서 두 사람의 해석에 의한 연기를 비교하는 데 다시 없는 기회로<<새터데이 리뷰>>지의 연극비평가 버나 드 쇼의 멋진 기사 속에서 극찬을 한 희귀한 사건이었다. 쇼는 그 역으로는 두제 쪽을 칭찬 했다.
《고향》이 초연되었을 때는 새롭고 대담하게 보였으므로 1년 후, 루이스 N. 파커에 의해 《마그다》라는 제목의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외국어가 지닌 매력이 상실되었고, 또한 그것과 비견할 매력적인 주 배우도 없었으며 그것이 겉만 번드르한 별볼일없는 작품으로 당시의 연극계에서는 대담한 작품으로 통하고 있던 다른 많은 것의 전형에 지나지 않았음에 틀림없이 그러나 대략 관객이 보고 싶어했던 멜로드라마와 로맨스에 충실하여 계속 이어왔던 점에서 배우 겸 지배인들은 사람들과 생각만큼 책임이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급속하게 성장해온 뮤직홀의 강렬한 도전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1850년대에 지극히 희미하게 시작된 이러한 형식의 오락은 즉각 독자적인 스타를 창조하였고, 그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끊임없이 순회를 계속하였고 남 부럽지않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들 중 몇 명은오늘날에도 아직 기억되고 있다. 예를 들면 베스타 틸리vesta tilley, 리틀 티치 little tich, 마이로이드marie lloyd와 하버드 켐벨 herbert campbell과같은 수완 좋은 뮤직홀에서는 보통의 연기가 이야기 속에 도입되어 연극에 영향을 미쳤다.아울러 옛날 이야기의 머리부분을 확대 시키고, 그리말디grimaldi와 같은 천재에 의하여 일찍이 영광의 자리에 앉은 할리퀸의 어릿광대극이 마지막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오락매체로서의 연극은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거나 영원한문학적 가치를 갖는 극을 기대할 필요는 없지만, 대락 그 종교적인 기원의 흔적이라거나 한찮은 것이라든가 현실과 환상과의 상당한 차이에 대하여 종종 비판적오 움직이는 풍조가 있었건 적도 있다.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일수 있는 쪽이 진실일 테지만 관객은 사회를 향한 항의 와 비판극, 더욱이 선전극 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빈약한 극작이나 단진 선전극 정도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수의 작품이 한변의 역할이 끝나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되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뛰어난 연극과 보편적인 사회문제사이에 조화가 이루어 지면 세계적인 불후의 극문학 축적은 실직적으로 늘어나느 결과가 될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유러연극에서는 입센의 극에서 시작하여 체호프의 작품에서 더욱더 세력을 증가시켰다. 이 두 극작가는 그 이전에는 우럽의 연극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나라의 출신이었다.
1814년 까지 노르웨이와 역사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덴마크는 이미 아담 욀렌실레거라는 독일풍 비극의 유능한 작가와 루드비히 홀버그라는 주로 몰레에르와 코미디어 젤라르테의 영향을 받은 희극작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두 극작가는 유럽안에 이름이 알려지고 극이 상연되었지만, 뒤를 잇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특이한 존재다 되었다. 다른 여러나라가 스칸디나비아으이 창조적인 자극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입센이 그의 초기 시극의 하나인 <<브란드>>에 의해 유럽에서의 명성을 확립하기 시작하였을 때이다. 따라서 창조적인 자극은 충분히 얻을수 있었다.
베르겐과 오슬로 극장의 부지배인으로서, 또한 몇 번의 여행에서 방문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극장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 무대기술을 익힌 입센은 당신의 희극 뿐만 아니라 연기와 무대 배경기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유령>>의 최초 프랑슬어 번역물을 상연하고, 자신은 오스왈드를 연기 하였다. 후에 그으이 앙트완 극장은 젊은 극작가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이곳과 오데온좌에서 그는 베크의 <<파리의 여자>>와 브리외의 <<손상된것>>과 같은 사실적인 걸작을 연출하였다. 후자는 <<손상품>>이라는 제목으로 영국과 합중국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앙트완의 영향은 다음 세대 쟈크코포에 까지 계속 되었지만 독일에서는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을 장려한 오토브람의 자유극장 설립까지 미쳤다. 또한 입센의 상연을 위한 투쟁도 확고한 노력으로 최초의 승이를 얻은 런던에서도 그라인의 독립극장 창설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영향력있는 연극비평가 클레멘트 스코트는 <<유령>>을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입센은 <<인형의 집>>최초의 노라역의 자네트 아처치와 최초의 헤다 가블러역, <<건축사 솔네스>>의 힐다역, <<로스멜스홀름>>의레베가 에스트역을 연기한 엘리자벨스로빈스등의 여배우의 협력을 얻어 결국에는 영국의 무대에서 명성을 얻는 존재가 되었다. 광범위한 분야에걸쳐 흥미를 불러 일으킨 최초의 무대는 노라에 베아틀체 카메론을 배역으롷 나 <<인형의 집>>이었다. 그것은 또한 스코트와 같이 우럽에서의 이 불건전한 수입품에 저항하여 옛날 희곡을 옹호하려는 비평가 윌리엄 윈타에 게 적의를 불러 일으켰다.
입센과 비견할 수 있는 스칸디나비아의 극작가는 그와 같은 나라 국민이며 동시대의 뵈르손고 더욱이 젊은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베리가 있다. 뵈른손도 입센과 같이 베르겐과 오슬로 극장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극 또한 당시 사회의 도덕적인 병폐를 자주 주제로 삼고 있다. 그가 입센과 다른 것은 그의 낙천주의와 속죄의 힘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극 중 몇 가지 -특히 《인력을 초워하여》 - 는 영 에서도 상연되었지만. 그 대부분이 입센보다도 직접적이기는 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으므로 영궁의 관객에게는 접하기 힘들었고 주로 대륙, 특히 독일에서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의 연극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스트린베리는 처음에는 입센과 같은 정도로 적의를 일으켰다.
그의 극은 외국에서 지위를 굳히는 데 입센보다도 시간이 거렸지만 《아버지》《영양 줄리》 《죽음의 무용》은 이상한 정신상태를 탐구, 오늘날에는 사회의 비본질적인 부패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있는 근본적인 악을 지닌 공공연성으로 비난받는 거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스트린베리는 많은 혁신을 일으켰다. 자신의 극 상연을 위한 중요하며, 그 반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또한 멋진 배우로서 쇼의 《존 블루의 또 하나의 섬》에서는 아버지 키간을 연기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연기보다 제작쪽이 좋다고 말하였고, 세속적으로는 연출가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그는 옛날 도덕극 《평범한 사람》의 현대화한 작품을 연출하고, 그것을 영국과 합중국을 널리 순회하였다.
여러 사람 앞에서 상연된 쇼의 최초의 작품은 《무기와 인간》으로, 이것은 루카를 연기한 플로렌스 파(Florence Farr)에 의해 아베뉴 극장에서 1894년의 시즌에서 다루어졌다. 재정상의 후원은 비범한 수완을 지닌 호니만 여사가 담당하였다. 그녀는 더블린에서 아베이 극장을 만들었지만 그 영향은 광범위하게 미쳤으며 궁극적으로는, 여기에서 상연한 신지, 숀 오케지의 극으로 달성한 수준 높은 연기를 보여준 하나의 모험적인 시도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실제적으로 감명을 받을 수 있는 경험을 근본으로 하여 대륙에서 영국으로 현대의 레퍼토리 극장의 이념을 소개하였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그녀는 맨체스터의 게이어티 극장에서 리버풀과 버밍검의 레퍼토리 극자에 창조적인 자극을 준 극단을 후원하였다. 버밍검의 레퍼토리 극장은 바리 잭슨이 만든 것으로, 그는 또한 쇼의 극을 상연하는 맬번 페스티벌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1925년에는 《햄릿》, 1928년에는 《맥베드》를 상연하여 현대적인 의상에 따른 셰익스피어를 런던 관객에게 소개하였다. 이 양쪽 모두 버밍검에서 옮겨온 것이다.
쇼의 《상심한 집》은 〈러시아풍의 환상〉이라는 레테르가 붙여져 있다. 이는 체호프에게 바친 것으로 그의 《벚꽃화원》을 쇼가 무대협회를 설득하여 1912년에 런던에서 상연하였다.
혁명 전의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영국의 관객에게 소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부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다리는 극작가가 대부분 그러한 것처럼 체호프에게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연기해 줄 새로운 형태의 배우가 필요했다. 다른 극장에서 실패를 거듭한 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에 의해 설립된 극단에서 그가 바라던 배우를 발견하였다. 계통있는 배우 양성 〈방법〉이 현대 아메리카 연극의 바이블로 되어 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출현 이전에 이미 러시아 연극은 다른 장소에서 소리없이 발전하였다. 그곳에는 시체프킨, 모챠로프, 카라투킨 등의 우수한 배우가 있지만, 그들의 대다수는 부유한 귀족의 사설극장에서 양성되 하인이었다. 또한 시인 푸시킨의 특히 러시아적인 문학을 기반으로 한 멋진 희곡도 있었다. 그 중에는 레르몬토프의 비극 《가면무도회》와 오스트로프스키의 《뇌우》, 그리보예도프의 희극 《지혜의 슬픔》, 고골리의 풍자적 희극 《검찰관》, 투르게네프의 《전원에서의 1개월》등이 있다 .그러나 톨리토이와 고리키의 극 - 그들은 혁명의 〈폭풍의 예고자 바다제비〉로 간주되었고, 최고의 걸작조차 1917년까지 그 상연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은 유럽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옛날 형식의 연기로 연출되었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체호프의 대화극의 미묘함을 전할 수 있는 배우를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양성하여 최초로 러시아가, 계속해서 전세계가 그의 위대함을 인식하였다. 마찬가지로 체호프의 작품이 영어로 처음 연출되었을 때에는 크게 극찬을 받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그 재상연과 새로운 번역은 그의 의도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연출가와 배우들, 그리고 영국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유럽과 합중국 전역에 그 흔적을 남겼다.
앙트완이 자유극장을 창설한 직후, 아드리아 구알은 스페인에 입센을 소개할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에 인팀 극장을 창설하였으나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입센의 영향은 에체가레이가 《유령》을 모태로 쓴 《위대한 중매》와 《돈 환의 아들》가장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로 19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다재다능하며 창조력이 풍부한 작가 베나벤텐는 《만들어진 이해》와 같은 극에서 셰익스피어와 이탈리아의 코미디어 델라르테의 전통으로부터 많은 것을 이끌어내었다. 그랑빌 바커의 번역에 의해 친숙해진 킨테로 형제의 극은 근대 리얼리즘보다도 카타로니아 연극에서 보이는 감정의 긴장 쪽을 대표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티네즈 시엘라에게도 꼭 들어맞는 것이지만 그의 《자장가》와 《로맨틱한 젊은 여성》은 안팎으로 인기가 었고, 실제로 조국보다도 때로는 외국 쪽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의 이슬라바 극장을 수년간 경영하였으며 스페인의 시민전쟁에서 전사할 소질있던 극작가로 세 편의 비극《피의 혼례》《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옐마》로 알려진 가르시아 로르카의 극을 최초로 평가하고 연출한 인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는 비극배우 옐네스토 로시에 의하여 이탈리아의 관객에게 소개된 셰익스피어와 입센 두 사람의 영향과 가브리엘 다눈치오극에서의 반동으로 20세기 연극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루이지 피란델로를 즉각 보냈다.
초창기의 빈곤도, 아내의 정신병이라는 말년의 비극도 그의 연극을 향한 정열을 상실시키지는 못했다.
1925년 그는 루셀로 루셀리와 마르타 아바를 주연배우로 로마의 오델스칼키 극장에서 극단을 결성하고, 인생의 환상과 인간의 현실을 인식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을 주제로 한 자신의 작품을 그곳에서 상연하였다. 그는 진실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진실함이란 있을 수 없고 언어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보이는 것을 설명할 뿐이기 때문에 의지의 전달 등은 있을 수 없으며, 그리고 정상이란 인간의 상태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안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정신의 정상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고 견해를피력하였다. 이러한 피란델로의 철학이 1920년대의 , 또한 1930년대의 환멸을 느끼고 잇는 세대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깊었다. 그러나 아직 그 힘을 전부 다 써버리지는 못했다. 《엔리코 4세》는 그의 최고 걸작이지만 번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미지의 여자》《어의에 맡긴다》《오늘은 즉흥극을》등이 있다.
새로운 연극은 연기와 배경디자인에도 새로운 방법을 요구하였다. 합중국에서 특히 성공을 거둔 신운동의 선구자는 스위스의 예술가 아돌프 아피아였다. 그는 평면적 배경과 입체적인 배우 사이의 불균형에 충격을 주었고, 배우에게 배경이 아니라 환경을 부여하는 간결함 속에서도 능변한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훌륭한 장치는 호리촌트(조명을 받으면 공간적 느낌을 주는 무대 뒤의 둥그스럼한 배경) 사용을 포함하여 전기의 갖가지 이용방법의 발견으로 가능해진 극적인 조명에 의해 효과는 더욱더 늘어났다. 배경의 단순화를 더욱 강력하게 제창하고, 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실제 무대작업의 양과는 전혀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영향을 각지의 연극에 미쳤던 또 한 사람의 인물은 명여배우 엘렌 테리의 아들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였다. 그는 아빙극단에서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20세기 초기의 영국 산업연극에서는 자유롭게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럽 대륙에서 정주하였다. 그리고 긴 생애의 대부분을 그것에서 보내면서 배웅의 자기 중심적은 버릇과 그가 우매하다고 생각되는 것과 연 ㅏ의 무능, 보통 일반장치가의 미숙 등을 상대로 싸웠다. 요컨대 그의 방법은 상상력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조명을 변화시킨 일련의 커다란 스크린을 배경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서 2,3개의 이동가능한 연단과 계단이 이용되었고, 예를들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가 노린 듯한 압도적인 리얼리즘 열기에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무대배경을 만들어냈다. 원래 100년 전에 세워진 극장이라는 데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지만, 20세기 초의 일반적인 무대에서 이 정도로 신선했던 것은 일찍이 없었다. 연극이란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전위적인 생각과는 언제나 조화되지 않는 견고한 건축물 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고통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크레이그는 다음과 같은 불만을 호소하고 있다. 『극장에는 자기 자신을 통솔하려는 듯한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 즉 혼자서 희곡을 만들고, 익살을 부리고, 배경과 의상 양쪽의 구성을 디자인하고, 그 위에 감독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 필요한 음악을 작곡하고, 필요한 기계장치와 사용되는 조명을 고안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그의 생각을 실현하는 데는 처음부터 다시 한번 극장의 건물을 재계획하고, 배우를 재교육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이츠와 같은 극작가와 마찬가지로 크레이그와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도 영향을 준 연극의 한 형식은 극동연극이었다. 극동연극의 기원은 근대 유럽에서 이해하고 있는 최고의 연극표현보다도 더욱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세기 말까지 사실상 알지 못하였다. 어떤 것에 영향을 바았던 것은 연극 그 자체가 아니라 여행자의 설명과 아더 웨일리와 같은 학자에 의한 몇몇 연극대본 번역에서였다. 19세기의 혼란한 무대를 정리하고 싶어했던 개혁자들은 그 외견의 단순함과 - 일본과 중국의 무대는 대단히 복잡하였기 때문에 오해하여 - 리얼리즘에 대한 반동으로 유럽의 무대장치가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던 막힌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상징주의에 매혹되었다.
유럽의 정신이 극동연극의 전통적인, 또한 의식으로서의 요소의 순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누구라도 극찬할 만한 많은 것이 거기에 있었다. 특히 흥미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상징적인 무대장치와 지극히 아름다운 의상 - 의상에서는 직물의 모든 색과 이음새, 그 겹쳐져서 만나는 곳이 하나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 게다가 배우들의 믿을 수 없으리만큼 예술을 향한 길에로의 정진이다. 손·발·신체 움직임의 어느 하나에 이르는 곳마다 거의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든 엄격한 훈련에 의해 어릴 때부터 단련되어 있다. 일본 연극은 두 개의 형식을 갖는다. 종교적 의식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고전적이며 귀족적인 노우와그 요소가 명칭에서 나타내고 있는 혼성형식의 서민적인 가부끼 이 두 가지이다. 노우는 본래 독백과 회상으로 이루어진 극으로 서구의 극에 있는 것처럼 갈등을 통한 연기도 줄거리의 발전도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주연배우는 가면을 쓰고 있으며, 그리스 비극의 샤티로스극은 교우겡에 해당된다. 몸짓과 익살에 있어서 이상하리만큼 아테네의 소극과 이탈리아의 코미디어 델라르테를 연상케 한다. 노우의 주제는 신화와 전설에서 따오고 있다. 배우는 가수와 무용수를 겸하며, 자신의 대사를 노래하며 당당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반향이 잘 되는 소나무 재료의 무대 마루 위에서 버선발로 쿵쿵 구르는 소리는 연기에 맞추어 리드미컬한 반주를 하는 피리의 찌르는 듯한 음률과 세 개의 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어우러진다. 배우의 옷차림은 화려하고 꼬꼼한 바느질로 공들여서 만들어졌으며 현란한 색채를 띤다. 역사와 일상생활에서 주제를 따온 가부끼의 의상도 마찬가지이다. 노우보다 많은 배우가 등장하지만 가면을 쓰지 않으며, 그 움직임은 오늘날에도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으나 노우와 비교하면 훨씬 자유롭고 빠르다. 노우와 같이 가수에 의한 합창단과 샤미센을 타는 오케스트라도 있다. 서구의 무대장치에 큰 충격을 던져준 가부끼의 한 가지 특징은 칼 라우텐슈레거가 1898년 뮌헨에 설치한 회전무대였다. 무대 위의 완전한 리얼리즘에 익숙해 있던 연극계의 흥미를 끌어들인 이 두 가지 형식의 연극에서 얻은 것은 관례적으로 관객에게는 보일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는 푸른색과 검은색의 옷을 입은 무대계원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의상을 바꿔입는 시중을 든다거나 무거운 소매 주름을 정리한다거나 필요한 소도구를 손으로 건네주거나 받아줄 수 있도록 언제라도 대기하고 있었다.
노우와 가부끼 역시도 인기가 있었지만 오늘날 일본에서는 서구로부터 거꾸로 영향을 받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그것을 번역한 쯔보우찌 박사의 지도에 따라 동경의 와세다 대학에 건립한 운명좌를 본뜬 엘리자베스 왕조식 무대에서 상연하기도 한다. 새로운 유럽의 극도 상연되고, 현대의 여러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룬 일본어 극작을 장려하는 노력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풍적인 스타일의 연기는 이와같은 시도에는 부적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방법에 따른 훈련이 행해지고 있다. 문제는 노우나 가부끼 공연에서 극은 배우에게 종속되므로 한층 복잡하게 된다. 현대 유럽 연극은 배우가 관객에 대해 자기의 해석으로 연기할 의무를 갖고 있는 극작품에 배우를 종속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아마 이 문제의 해결은 아직 오늘날의 생활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확실히 생활을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는 희극 교우겡을 개작한다거나 확대하면 좋을 것이다.
19세기 초기부터 주로 경극으로 성립되어온 중국의 연극 또한 본래 배우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극은 나라의 역사·전설·소설 등에서 주제를 삼고 대화·노래·무용·곡예를 융통성있게 잘 조화시킨 것이 . 의상, 특히 전사의 옷은 장려하기는 하지만 역사적인 정확함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색채는 계급을 의미하고 있다. 즉 황색은 황제, 붉은색은 관리인, 검은색은 거칠고 품위없는 남자의 색이었다. 성격은 얼굴에 그려져 있는 독창적인 선과 착식에 의하여 과장된 화장으로 나타냈다. 청색은 잔인성, 빨간색은 충실한 용기를 나타냈다. 무대에는 오케스트라가 있지만 아무런 배경도 없고, 간단한 소도구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즉 테이블이 다리, 세 개의 의자가 하나의 침대, 하나의 망루가 배, 한 개의 채찍이 말, 황색 깃발은 전차를 의미하였다 부채는 경박한 아첨꾼을 나타냈고, 부인의 작은 신은 바느질을 나타냈다. 마루에 개켜져 있는 빨간 망토는 시체이다.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극의 대부분의 역할은 원래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은 남성에 의해 연기되었다. 국외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유일한 배우는 여자 모습으로 분장한 매란방으로, 그는 최고의 호평을 받은 배역 몇 가지를 지니고 미국·유럽·러시아를 여행하였고 경극의 다섯 가지 여성역의 연기, 우아한 묘기로 가는 곳마다 관객을 경탄시켰다. 최근에는 극단에 여배우가 조직되었고, 중국 도처에서 각기 자기 자신의 레퍼토리와 음악과 연기의 특징있는 양식을 갖고 지방극단의 개혁과 존속을 장려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극의 영향은 입센과 다른 유럽 극작가의 작품이 번역되어 상연되던 20세기 초기에는 확실하였지만, 1949년 이후 새로운 극은 주로 혁명적인 선전극과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전통적인 연극은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0년대 초기 경극단은 유럽과 캐나다를 순회 공연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두 작품의 중국극의 번안되어 유럽의 극문학에도 들어가 있다. 그 최초의 작품은 《중국의 고아》로 이것은 볼테르에 의해 그의 《중국의 고아》에 사용되었다. 독일의 극작가 클라분트는 《애란기》를 소재로 한 영어로도 상연된 《백묵의 동그라미》를 번역하였다. 1930년대에는 영국과 합중국에서 중국 극작가 웅식일이 각색한 《레이디 프레서스 스트림》이 상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일본이나 중국의 연극과 마찬가지로 옛날부터 존재하며, 또한 인습적인 인도의 연극은 무용과 음악은 점차 일반적으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번역으로 알려진 얼마 안 되는 극은 4세기의 슈드라카의 것으로 되어 있는 《작은 찰흙 짐마차》와 5세기의 칼리다사 작 《사쿤탈라》이다. 후자의 번역은 윌리엄 존스에 의해 1789년 출판되어 괴테를 감탄시켰고 처음으로 유럽 독자의 주의를 산스크리트 국문학으로 끌어들였다. 이 극은 1899년에는 런던에서 상연되었다. 현대에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극이 출판되어 읽혀지고 있지만 연출된 적은 거의 없다. 몇 가지의 그들 고장 특수의 언어로 셰익스피어 번역물을 연기하였고, 한때는 현대 스타일에 맞는 극적인 문학을 탄생시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인도극의 창조적 요소인 것처럼 제시되었던 그것은 극장에서보다 시네마에 더 의존하였다. 블랙 아프리카의 연극은 주로 인도의 그것처럼 대륙을 가르지르는 수준 높은 전통을 지닌 것이었다. 그 고장 특유의 언어, 혼성여성, 그리고 동아프리카와 스와힐리어로 상연된 인기있는 민족 오페라는 종족의 노래와 춤을 기초로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도시에서는 초기 지방 역사의 사건을 기초로 하는 것과, 도는 독립투쟁을 다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 나라에서 쫓겨난 유명한 영어 극작가로 나이지리아 정치풍과 작가이며 《콩기스 하비스트》를 쓴 올레 소잉카와 마우마우단(폭력으로 백인 이주자를 추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케냐 흑인의 비밀결사원)의 영웅을 특종 기사화하여 《데단 키메디의 공판》을 쓴 케냐인 니구지 와씨옹오가 있다. 프랑스어 연극은 파리의 드라마 학교에서 교육받은 흑인배우들에게서 볼 수 있으며 아이보리 해안, 기니, 말리, 그리고 특히 세네갈과 알지리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합예술 작품은 미국과 영국에서 행해왔던 것처럼 역시 흑인 구역의 강력한 영어 드라마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남아프리카의 유명한 극작가인 보어인 아돌 프가드는 총괄적으로 작품을 썼으며, 유명한 《스즈와 반시는 죽었다》가 있다. 이것은 그의 다른 작품 - 《보예스맨과 레나》《마스터 헤롤드 ‥‥‥그리고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런던과 뉴욕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었다
8. 근대와 현대의 연극
근대연극의 주류는 시민극이 주도했고 거기에 낭만주의가 가세함으로써 연극의 급격한 근대화를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근대 시민사회의 태동은 연극에도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을 선도한 계몽주의 사조와 더불어 특권층도 서민도 아닌 제3계급, 즉 시민을 위한 새로운 연극 형식이 모색되어 왔고, 영국도 초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에 흥미를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변화에 부응하여 연극형태가 굳어지기에는 시대적 ·사회적 변천이 지나치게 급격했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굳어지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연극이 그 전형적 인간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일정한 기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9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낭만주의 사조도 독일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극작가를 낳지 못했고, 오히려 형성기의 새 사회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서 낭만적 사극(史劇)과 병행하여 대중적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19세기 중엽에 유럽 연극계를 휩쓴 ‘잘 꾸며진 연극’은 시민생활을 빙자하여 교묘하게 꾸며놓은 극진행 방식을 통해 정서의 인위적 소모를 유도하는 데 능했고 연극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시대정신을 연극에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연극의 사회적 타락을 자초한 상황 속에서 진실로 시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연극의 출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연극은 무엇보다도 낡은 형식과 관행(慣行)의 전적인 부정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첫 신호가 1887년 파리에서 생겨난 ‘자유극장’이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운동으로 번져 89년에 베를린에서 ‘자유민중무대’로, 91년에 런던에서 ‘독립극장’으로, 98년에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예술극장’으로, 1904년에 아일랜드에서 ‘애비 극장’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 그 여파가 뉴욕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1920년대에는 서울에까지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극장운동’ 또는 ‘멜로드라마’이라고 불리는 현대극의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19세기 후반의 시대정신, 즉 사실주의에서 자연주의로 이어지는 과학주의 ·합리주의 ·실증주의 정신의 반영이며, 연극이 시대적 현실의 솔직하고도 비판적인 반영(反映)의 한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연극에 대한 기성관념을 타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연극의 스타 중심적 상업주의, 과장된 연기술, 비현실적 장치 등에 대신하여 연출기능의 독립, 사실적 무대장치, 새로운 연기 앙상블의 확립 등이 추구되었다. 이러한 변혁은 뒤에 가서 현대연극의 다양한 무대미학(舞臺美學)의 탐구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현대극이 진실로 변혁을 이룩하기에는 ‘자유극장운동’ 이외에 새로운 극작가의 출현이 필요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H.입센을 필두로 한 스트린드베리, 체호프 등 현대연극의 초기 거장(巨匠)이 출현하게 되었다. 입센이 《인형의 집》(1879) 《유령》(81) 등 그의 대표적 현대극을 쓴 시기를 보면 신극운동이 ‘새 부대에 새 술’이라는 원리를 효과적으로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입센은 근대시민극의 최종주자(最終走者)로서 이를 완성시킨 극작가로 현대극의 한 가지 전형(典型)을 제시했고, 스트린드베리는 자연주의적 시대성(時代性)에 인간의 투쟁의 영원한 모습을 투영시켰으며, 체호프는 리얼리즘에 민족성을 부여하고 종래 비연극적이라고 생각되어온 인물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시대조류가 형성시킨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환각주의(幻覺主義)연극’, 즉 일상현실의 재현(再現)으로서의 연극이 기조(基調)이기는 하지만 20세기 유럽연극은 그 기조를 수정 ·보완하거나 거기에서 탈피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특징이다. 따라서 현대극은 획일성(畵一性)을 거부하고 상업주의에 항거하면서 시대정신을 반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동시대적(同時代的) 문제의식에 민감하고 유럽 문명의 위기감을 재빨리 반영시키는 데 있어 연극은 다른 어떤 예술형태보다도 민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감성은 극작가뿐만 아니라 연출가를 비롯한 많은 연극지도자들로 하여금 연극을 ‘동시대적 인식의 표상(表象)’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표현파(表現派) 연극이나 브레히트가 실천한 서사연극(敍事演劇),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부조리 연극이 모두 현대를 첨예하게 인식한 끝에 나온 연극의 자기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G.B.쇼, 미국의 E.오닐, 이탈리아의 피란델로, 독일의 브레히트, 프랑스의 S.베케트 등은 모두가 ‘사상가로서의 극작가’이고 러시아의 스타니슬라프스키, 메이예르홀트, 독일의 라인하르트, 프랑스의 아르토, 영국의 크레이그 등은 연기나 연출 또는 무대미술의 대가인 동시에 연극 그 자체에 대변혁을 가져온 예지자(豫知者)들이기도 했다.
현대에 가장 깊이 절망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것이 바로 현대의 서양연극이라 하겠으며, 그것은 전통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내는 데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