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내 예술제가 있는 날이라 아침부터 서라벌 문화회관으로 출근을 하여 학생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실력을 뽐내고 자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비록 아직 어린 중학생들이지만 모두가 열심히 하였으며 좋은 결실을 맺은것 같다.
그런데 10시가 넘어서면서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지면서 왠지 조금은 불길하고 걱정이 된다. 비가 오지 않아야 될텐데... 이번 구간도 상당히 긴 구간인데다 장미꽃 세송이(여성회원)가 함께 산행을 하기 때문에 비가 내리게 되면 무척 힘든 산행이 될것 같아서...
어제는 이옥순 회원님이 대간팀에게 고생한다고 회를 사 주시고, 이덕상 전회장님은 찬조금을 주시고 모두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이것 저것 챙기고 함께 갈 분들에게 연락을 취하고는 잠시 취침을 하고 저녁을 먹은 후 회장님 댁으로 가니 벌써 몇분 회원님들이 배웅을 나와 계시고 20시 40분 드디어 또 한구간을 가기 위해 출발한다.
오전에는 불안하던 날씨가 저녁에는 가을답게 하늘은 맑은데다 달빛이 무척 밝다. 낙동휴게소에 들어가 간단히 저녁을 먹은후 다시 출발하여 목적지인 죽령에는 23시 57분에 도착하니 봉고차를 타고 오신 몇분이 아직은 이른시간이라서성거리다가 차를 타고 단양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니 이근처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서 산행을 할 모양이다.
구비구비 고개를 넘는 길은 힘겹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주는 우리의 산하 죽령고개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밟으며 이곳에 이르면 누구든지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곳으로 전구간 중 반 이상을 넘어섰다는 안도감에다 교통편이 편리한 곳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소백산의 연봉과 이를 잇는 능선들은 부드럽고 아름답기로 전국의 산중에서도 손꼽히며 소백산은 그 이름이 풍겨주는 뉘앙스 그대로 웅장하면서도 우아하고 소담한 산이다.
소백산의 연봉과 이를 잇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능선의 초원지대는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빛나고 겨울이면 이름 그대로 흰눈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대설원의 부드러움과 장쾌함이 돋보이는 겨울산의 대명사로 설화와 상고대 등으로 온통 백설의 은세계로 변한다.
특히 대군락의 철쭉꽃이 만발하는 봄철과 초원의 능선길에는 에델바이스 등 온갖 고산초화들이 만발하는 여름철이면 소백산은 마치 천상의 화원을 방불케 하는 느낌을 준다. 드디어 우리는 산행준비를 마치고 0시 10분에 또 한구간을 밟기 위해 장미꽃 세송이(달빛을 받아 더욱 화사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롭고 멋져 보임)와 함께 힘찬 출발을 한다.
산행은 죽령휴게소 왼쪽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게 되고 잠시 후 불이 밝게 켜진 매표소가 나오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포장도로를 계속 따라 올라가니 0시 29분에는 소북 02-02지점을 지나고 0시 45분에는 우측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마루금을 밟아 보기 위해 표지 리본을 따라 15분정도 올라가니 묘지가 나오고 다시 반공호가 나오면서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내려와 다시 지루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중간 중간 포장도로를 좌측에 두고 우측능선으로 길이 있는 곳에는 항상 능선길을 따라 올라가니 1시 30분 1357.3m의 제2연화봉 중계소에 도착하게 되고 군데 군데 푯말이 서 있어 길을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며 차가 다닐 정도로 길이 넓다.
중계소를 우측에 두고 넓은 도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돌아 능선을 따라 가면 천문대에 도착하게 되고 2시 2분이라 별은 초롱초롱 빛나며 달은 어찌나 밝은지 보름달 같은 느낌이 들며 후레쉬를 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다. 그러나 날씨는 차갑고 바람이 무척 세게 불어서 체감온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 겨울바지를 차에 두고 입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엄청 추운 날씨라 물을 마시기 위해 천문대로 들어가니 불은 끄져 있지만 휘황찬란한 달빛으로 인해 주위는 선명하게 보이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서 있으니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는 개 한마리가 나타나 불청객들을 보고는 왜 왔느냐고 멍-멍-멍- 고함을 지른다. 옆을 보니 개집에는 새끼강아지가 추위를 견디느라 웅크리고 있었다. 아마 새끼들을 지키기 위한 모성본능에서 어미개가 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국립천문대 소백산 천체관측소는 제 2연화봉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연구용 천체관측소로 첨성대 모양의 92평 첨성관과 연구동 등이 있으며 반사망원경, 굴절망원경 등 각종 기기를 갖추고 있다.
천문대에서 나와 다시 1383m봉쪽으로 향해가다 희방사 갈림길에서 제 1연화봉 가는 나무로 된 계단길인 자연탐방로로 좌회전하여 접어든다. 직진하면 희방사 가는 길이며 희방사는 중앙선 희방사역에서 동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소백산 남쪽 기슭의 희방폭포는 해발 850m 고지에 있으며 거대한 암벽 사이로 쏟아지는 28여m 높이의 물기둥은 시원스러우며 폭포 바로 위에 있는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두운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오랜세월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새로 중건한 사찰로 희방사 연기설화인 두운대사와 호랑이에 얽힌 전설은 특히 유명하다.
조선 철종 때 강월대사(江月大師)는 태백산 심원암에서 지금의 희방사터에 와서 작은 초당을 짓고 수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흰눈이 쌓이는 깊은 겨울밤 갑자기 밖에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 대사는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울부짖고 있었는데 사납게 덤비는 기색이 아닌 뭔가를 호소하는 듯 했다. 대사는 용기를 내어 호랑이에게 다가가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호랑이의 목에 비녀가 꽂혀있는 것이 아닌가. 대사는 "이놈아, 잡아먹을 짐승이 없는게 아닌데, 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잡아먹다 이 꼴이 되었느냐!" 라고 꾸짖으면서 비녀를 꺼내주었다.
며칠 후 호랑이는 커다란 산돼지를 물고서 또다시 대사를 찾아왔다. 이를 본 대사는, "중이 어찌 고기를 먹겠느냐, 어서 가서 너나 실컷 먹어라." 라고 하며 돌려보냈다.
그런데 또다시 어느날 밤 마당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 놀란 대사가 나가보니 이번에는 호랑이가 17세 가량의 아리따운 처녀를 물고 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라 대사는 황급히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와 눕히고 방에 불을 지피고 물을 끓여 온수마찰을 시키는 등 며칠간 치료해 주었다. 다행히 그녀는 의식을 회복하였고 대사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처녀는 계림에 사는 유호장의 무남독녀로 호랑이에게 물려온 그날은 그녀의 혼인날이었다. 혼례를 치른 후 신방에 들었을 때 갑자기 불빛이 번쩍이고 몸이 공중에 뜨는 것 같더니 그뒤로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안 대사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하였다.그런데 마침 그때는 겨울이라 깊은 산에 눈이 많이 내려 산 아래의 마을까지 가려면 이듬해 봄철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대사는 하는 수 없이 몇달을 그녀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처녀는 이것을 인연으로 대사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을 끌기 위해 유혹했다. 그러나 대사는 도가 높아 이에 현혹되지 않았고 좌선에만 열중하였다. 드디어 봄이 되자 대사는 이곳에서 살겠다는 처녀를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집에서는 처녀의 첫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가족들은 그녀가 나타나자 원귀라고 생각하고 도망치려 하자 대사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설명하여 모든 진상을 다 안 가족들은 처녀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처녀의 부모는 대사에게 딸과 혼인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대사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호장은 재정적인 면을 지원하여 희방사를 재건축 하였다. 이것이 희방사의 재건축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러나 희방사는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여기에 보존되어 있던 1568년(선조1)에 새긴 "월인석보" 제1, 제2권의 판목도 함께 불타고, 월인석보 책판을 보존하고 있는 경내에는 희방사 동종(경북유형문화재 226)과 지금 있는 당우는 1954년에 지은 것이다.
비로봉 3km 지점을 2시 35분에 지나고 다시 비로봉 2.8km 지점인 해발 1280m 지점을 2시 40분에 통과하니 이후 한동안 계단으로 된 오르막이 계속된다. 날씨는 엄청 춥다. 가을바지에다 얇은 장갑을 끼고 있으니 손도 시리고 세찬 바람은 귓볼을 때리고 얼굴을 할퀴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른다. 날씨가 추우니 산행기 적는 것도 귀찮은데다 추워서 볼펜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짜증이 날려고 한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평소 동성들만 오다가 이성이 함께 오다보니 분위기가 너무 좋아 화기애애하며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조물주는 참 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같으면 하루종일 걸어도 몇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고 걸어면서 구경만 하고 가는 상태인데 오늘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오늘 나눈 대화는 지금까지 13구간을 오면서 나눈 대화 전부보다도 더 많은것 같다.
새벽에 바라보는 희방사 계곡과 영주시와 풍기읍의 휘황찬란은 야경불빛 또한 너무너무 멋있고 아름답다. 비로봉 2.5km, 천문대 2km 지점을 2시 49분에 통과하여 계단 있는 내리막을 약간 내려간다. 땅위에도 낙엽위에도 서리가 하얗게 내렸으며 그 서리들이 후레쉬 불빛과 밝은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어떤 곳은 얼음이 얼어 밟으면 뽀드득 뽀드득 하면서 땅이 내려 앉는다.
3시 33분에 천문대 3.5km, 죽령 10.5km, 국망봉 1.6km, 비로봉 1.5km 지점을 지나고 10분후 천동리 내려가는 갈림길에 도착하니 비로봉 0.6km, 좌측으로는 천동리, 매점, 야영장 1.7km가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며 곧이어 비로봉 정상과 비로봉 대피소 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우리는 우측길을 따라 바로 비로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좌측으로는 어둠속에서 어슴프레하게 주목군락지와 비로봉 대피소가 보이고 우리가 올라가는 길은 나무로 길을 따로이 만들어 놓아 산행하는 즐거움은 덜하겠지만 자연보호 차원에서는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밧줄도 설치해 놓았다. 양옆으로는 초원지대라 마른 풀들이 세찬 바람에 휘날리고 있으며 소백산 바람이 유명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강풍이 몰아치는 사이를 뚫고 비로봉 정상에 올라서니 3시 55분이다.
정상은 공간이 넓은 편이며 둘레에는 기둥을 박아서 밧줄을 매어 두었으며 정상 밑에는 층계가 지도록 축대를 쌓아두고 정상에는 커다란 화강암 표지석 앞면에다 소백산 비로봉 1439.5m라 음각해 두었으며 뒷면은 서거정의 시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에 경계를 그어 하늘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가 적혀 있고 충청북도에서 세운 비로봉 1439m라 적힌 작은 표지석이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돌탑이 세워져 있다.
소백산은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립공원의 중심이 되는 소백산 비로봉은 북쪽으로 국망봉과 남쪽으로 민배기재와 연봉을 이루어 예로부터 태백산과 함께 신성시 되는 산이다. 소백산 국립공원은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북도 영주시의 1개읍과 4개면과 봉화군의 1개면, 그리고 충청북도 단양군의 1개읍과 3개면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조선 명종때 남사고 선생이 소백산에 올라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하여 감탄하며 엎드려 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저서에서도 태백산과 소백산은 병란과 기근을 피할 수 있는 이른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한군데로 꼽았다.
참고로 십승지지를 소개하면 소백산 아래 풍기의 금계촌, 공주의 유구마곡, 안동의 춘양, 영월의 정동 상류, 보은 속리산, 무주 무풍동, 운봉 두류산(지리산), 부안의 변산, 예천의 금당동, 성주의 만수동 등이다.
비로봉 정상일대에는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된 주목군락지와 에델바이스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비로봉, 연화봉, 신선봉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도와 선도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산이다. 특히 비로봉이 가까워지면서 능선 왼쪽으로 적갈색의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수령이 200-500년을 헤아리는 고목들로 '살아 천년 죽어서 또 천년을 산다'는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는 강풍이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도 대구에서 왔다는 젊은 산꾼 네사람이 텐트도 없이 슬리핑백 속에 한사람씩 들어가 노숙(비박)을 하고 있다가 하도 추워서 두사람은 일어나 소주를 마시기 위해 오징어를 굽고 두사람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아마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돈을 준다고 해도 저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얼마나 산을 사랑하고 좋아하면 이 추위에...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기들은 아침에 일출을 보고는 바로 하산을 한다고 한다. 아직 우리는 갈길이 너무나 멀고도 먼데... 산행기를 적어려고 해도 손이 시려워 글씨를 제대로 쓸 수가 없는데다 볼펜도 얼었는지 글자가 잘 쓰이지 않는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다시 국망봉을 향해 출발하는데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부는것 같고 잠시 후 어의곡리 갈림길에 도착하니 어의곡리는 좌측으로 내려가고, 정상에서 여기까지는 초원의 능선길이라 강풍에다 매서운 추위로 춥다는 말 밖에 할말이 없다.
4시 20분 큰 바위가 있는 곳을 지나서 4시 37분에는 국망봉 1.6km, 비로봉 1.5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곳을 통과하니 바로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곳을 내려간다. 굴곡이 심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철쭉나무들이 많고 큰 바위들이 자주 눈에 띄며 4시 55분에는 비박굴을 통과하게 된다.
5시 22분 초암사 갈림길에 도착하니 야영, 취사금지, 국망봉 300m 전방등이 표시되어 있고 초암사는 우측으로 내려간다. 5시 28분 드디어 정상에 올라서니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봉 앞에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국망봉 1420.8m, 1999년 6월, 설치자는 소백산 국립공원, 기증은 영주 비봉라이온스 클럽이 기록되어 있으며 표지석 뒷 바위봉우리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국망봉에 대한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국망봉은 소백산의 주봉으로서 희귀식물인 에델바이스와 예로부터 왕실 가구제로 쓰여졌던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북으로는 신선봉과 형제봉, 동으로는 선달산, 문수산 능선이 멀리서 아련히 밀려오고 남으로는 연화봉, 도솔봉, 묘적봉이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처럼 시야를 파고 들고 가까이 비로봉으로부터 산능들이 성난파도가 해일을 동반하고 밀려오는 듯하다.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제56대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물려주고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다가 제천의 백운면 방학리 궁뜰에 동경부를 짓고 머무를때 덕주공주는 월악산의 덕주사에 머무르고 신라회복에 실패한 마의태자는 엄동설한에 베옷 한벌만 입고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도달하여 신라의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망국의 눈물을 흘리다가 월악산의 덕주공주를 찾은 후 개골산으로 향했으며 이후부터 국망봉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전한다.
또하나 선조때 수철장 배순이 왕이 승하하자 이곳에 올라와서 왕성을 바라보며 3년 동안 통곡하였다하여 이 산을 국망봉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달빛이 너무 밝아 이른시간이지만 또다시 기념촬영을 하고 바위봉우리에 올라가서 주위 조망을 살펴보니 너무너무 멋있다. 주위에는 온통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길은 다시 북동쪽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고 국망봉 200m 지난 지점에서 좌회전 하면 어의곡 4.9k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다시 1260m 지점에 도착하니 5시 55분이며 상월봉 0.1km, 국망봉 0.6k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고 이곳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좌측길은 상월봉 우회길이며, 우측길로 올라가다 다시 좌측길(정상 바로 밑 우측길은 큰 바위에 내려가는 길)로 올라가면 바위로 이루어진 1394m의 상월봉이며 6시 정각이다. 이제 서서히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상월봉에서 하산하는 내리막은 바위로 된 경사지대며 이곳을 벗어나면 능선은 다시 정북으로 향하며 거의 내리막길인 북쪽으로 내려가면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를 연결하는 늦은맥이 고개 안부에 닿는다. 늦은맥이 고개 우측 능선에는 서리가 많이 내려서 나뭇가지에 꼭 눈이 내린것처럼 흰 빛을 발하고 있다. 6시 30분 여기에서 신선봉 갈림길이 나오고 대간은 우측길로 따라 가야한다. 좌측 신선봉 길은 신선봉을 거쳐 구인사로 내려가게 된다.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는 소백산 국립공원 서북쪽에 치우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은 다소 뜸하지만 독실한 신자들의 발길은 매우 잦다. 금계포란형에 자리한 구인사는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말사를 200여개 거느리고 있다. 백제의 현광법사가 처음으로 들여온 천태종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때 본격적으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근대 들어 중국에서 천태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상월스님이 1945년 '소백산이 중생을 제도하는 곳'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구인사를 세움으로써 천태종은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형제봉을 향해 한동안 가다하니 곧 일출이 시작될 것 같다. 6시 50분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기다리기로 했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면서 빛을 잃은 별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밤새도록 나그네들을 비추어 주던 밝은 달도 아직은 빛을 내뿜고 있지만 그 위력은 많이 떨어져 어둠과 함께 아침햇살의 찬란함에 무력하게 밀려나고...
맞은편 산 능선에는 네온싸인을 켜 놓은듯, 아니 불이 났다고 해야할까, 능선이 온통 시뻘겋게 타오르더니 찰나의 순간, 드디어 찬란한 불덩어리 하나가 빛을 내뿜으며 불쑥 얼굴을 내밀고 솟아 올라오기 시작한다. 6시 56분이다.
불혹의 나이라는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수없이 일출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 찬란하고 화려한 일출은 처음 경험한다. 문장대에서 본 일출도 멋있고 화려했지만 오늘 일출이야 말로 으뜸중에 으뜸 일출이라 하겠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에 솟아 오른 일출이야 말로 바로 우리의 희망이요 꿈이 아니겠습니까? 전부가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탄사만 연발하며... 표현력이 부족한 점을 한탄할 뿐입니다.
장미꽃 세송이는 비록 고생은 했지만 정말 잘 왔다를 연발하면서 해를 향해 절을 하고 본인은 사진 촬영에 정신이 없고...
7시 2분 다시 길을 떠나기 시작하여 7시 27분 국망봉 4km, 형제봉 8km 이정표 설치지점을 지나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아침식사를 한다. 14구간을 오면서 가장 푸짐한 진수성찬이다. 지금까지는 고작해야 아침은 1회용 도시락이 고작이었는데 오늘은 이것 저것 먹을 것도 많고 모처럼 포식을 한다.
아침을 먹고나니 찬바람이 불어와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한다. 다시 짐을 꾸리고 출발하여 8시 16분에 헬기장을 거쳐 8시 46분 해발1031m지점에는 국망봉 6.8km, 형제봉 5.2k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으며 우측계곡으로는 저수지가 보이고 좌측계곡에는 도로공사를 하는 모습이 보이며 대간길 좌우에는 신갈나무 나목들이 빽빽이 자라고 있다.
아침을 먹고 난 후부터는 피로가 겹치는지 여성회원님들의 걷는 속도가 차츰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가야할 거리가 더 많이 남아 있는데다 고치령까지는 길이 무난하지만 고치령 이후부터는 오르내림이 심한 구간이라 지금까지 온 구간에 비해 훨씬 힘드는 구간이다. 마당치에 도착하니 9시 21분이며 형제봉 3.5km, 새목 7.5k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9시 53분에 형제봉 삼거리에 도착하니 이정표에는 고치령 1.9km, 형제봉 2.8km, 국망봉 9.2km라 적혀 있으며 형제봉은 대간길에서 벗어나 좌측 오르막길로 올라가야 되며 대간길은 오른쪽 길을 택해 내리막길로 내려가야 한다.
여기는 낙엽이 엄청 많이 쌓여 있으며 앉으니 푹신하고 다뜻한 느낌이 들며 쉬다보니 여성회원들은 도저히 박달령까지는 무리라고 하기에 여기서 쉬면서 천천히 내려와도 고치령은 얼마남지 않았으니 최병윤 회원에게 연락해서 고치령으로 차를 가져오도록 하고는 부석사에 들러서 구경하고 저녁에 박달령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먼저 고치령을 향해 출발한다.
계속된 내리막을 내려오니 10시 6분 헬기장을 지나 고치령 0.9km 전방지점에 10시 13분에 도착하니 다른 나무들은 낙엽이 떨어지고 없는데 낙엽송은 아직도 노란 옷을 갈아 입고 있으며 잠깐 오르막이 나오고 노송들이 제법 숲을 이루고 있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고치령(꼬치령?)이 나오고 10시 24분이다. 이정표에는 비로봉 14.1km, 국망봉 11.1km, 마구령 8km, 늦은목이 13.9km라 적혀있고 우측은 낡은 시멘트 포장도로고 좌측은 비포장도로이다.
고치령은 해발 770m로 옛 이름은 천적령이라고도 했으며 신라시대에 대가람을 지을려고 터를 잡은 일이 있는데 그때에는 절터고개라 하였으나 차차 변하여 고치고개라 부르고 있으며, 그보다 유명한건 고치재에 있는 산신 신앙인데 그곳에는 산령각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올해 초 4월 23일 아침 화재로 전소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고치령 북쪽 30m지점에는 사계절 마르지 않는 샘터가 있으며, 헬기장이 있고 마침 누군가가 고사를 지냈는지 돼지머리와 북어, 막걸리 한컵, 사과 1개, 배 1개가 놓여 있었다. 사과는 새들이 쪼아 먹다 남겨 두었기 때문에 그냥두고 배는 온전히 있길래 가면서 먹으려고 배낭에 챙겨 넣었다.
10여분 올라가니 헬기장이 나오고 갑자기 카메라를 어찌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배낭을 뒤져 보지만 없어서 혹시나 하고 고치령으로 뛰어 내려와 보았지만 여기에도 없다. 허탈하게 다시 되돌아 올라가니 최현찬 대원은 피곤한지 잠시 동안인데도 코를 골면서 정신없이 자고 있다.
혹시나 싶어서 윗옷 주머니를 만져보니 주머니 속에 카메라가 들어있다.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0여분 거리지만 꽤나 멀고 많이 걸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헛걸음을 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것는 것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하더니...
고치령 1km 지점 이정표를 11시 3분에 지나 20-30m정도 올라가면 길 가운데 떡갈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무 밑둥에는 땅벌집이 있어서 날씨가 따뜻하다 보니 엄청난 땅벌이 붙어서 움직이고 있다. 내년 봄 이후에 이곳을 지나는 분들은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고치령에서 계속된 오르막을 올라오면 고치령 1.1km 지점을 11시 6분에 통과하면서 길은 좌측(북동쪽)으로 휘어지며 11시 21분 고치령 2km 지점을 통과한다.
약간의 오르내림이 계속되다 옛날 고개 흔적이 남아있는 830.5m의 미내치 고개 사거리에 도착하니 11시 57분이며 비로봉 17.3km, 고치령 3.2km, 마구령 4.8km, 늦은목이 10.7km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계속된 오르막 구간으로 굴곡이 심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12시 30분 고치령 5.2km 지점의 폐헬기장을 거쳐 가파른 길로 줄기차게 올라가면 1096m봉 정상 헬기장이며 12시 56분에 도착하게 된다.
헬기장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다 북동으로 굽이돌아 계속 내려가서 낭떠러지를 내려서면 비포장의 마구령에 도착하게 되고 마구령은 경북 영주시 부석면의 임곡리와 남대리를 이어주는 길로서 일반 승용차도 쉽게 다닐수 있을 만큼 노면상태가 좋은 편이다. 13시 23분이며 이정표에는 비로봉 22.1km, 고치령 8km, 늦은목이 5.9km, 선달산 7.8km라 적혀 있다.
마구령에서 대간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어지며 계속 오르막 구간을 올라가다 13시 36분에 헬기장에 도착한다. 주위는 노송이 엄청 많으며 계속해서 오르막 구간을 오르다 보니 14시 22분에는 1057m봉에 도착한다. 다시 내리막을 내려가다 마구령 3km 지점을 14시 46분에 통과하고 4km 지점을 3시에 지나 4.9km 지점인 966m봉에는 15시 14분에 도착한다. 여기가 바로 갈곶산이며 삼거리이다.
삼거리 이정표에는 비로봉 27km, 마구령 4.9km, 늦은목이 1km, 선달산 2.9k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으며 대간길은 왼쪽(정북)으로 휘어져 선달산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으로는 부석사가 자리잡은 봉황산 능선이 뻗어 나간다.
그러면 봉황산 부석사는 마구령과 선달산 사이의 갈곶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819m의 봉황산 남서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다. 부석사는 봉황산 기슭에 있는데도 일주문에는 소백산도 아닌 '태백산 부석사'라고 쓰여 있다. 이는 태백산이 의상의 스승인 지엄선사가 살았던 중국의 종남산과 동격시 되면서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본거지로 숭상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종찰이다. 경내에는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무량수전 앞 석등 같은 국보와 3층 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 등의 보물이 있다. 절 옆의 부석(浮石)에는 이 절 창건에 얽힌 의상대사와 의상대사를 사모했던 선묘라는 여인 사이의 애뜻한 사랑얘기가 깃든 설화가 전한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축 중의 하나이다. 특히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면 이 가람의 건축미와 공간미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의상이 세운 소백산 기슭의 절들은 초암사, 비로사, 흑석사, 성혈사 등 꽤 많다. 이 절들은 의상이 화엄의 뜻을 펼치도록 세웠다는 화엄 10찰과는 달리 규모도 크지 않고 유명세도 타지 않지만 공통점이 있다. 그 하나는 절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빼어나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닷가에 있는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모두 물이 귀하다는 점이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으려고 준비하던 어느 날 서까래가 사라져서 찾아보니 바로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 날아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세운 절이 초암사이다. 날아온 서까래를 확인한 의상대사가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리라 하고 먼저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도한 뒤에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뒤에 이곳에 사찰을 짓고 초막을 얽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초암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뒤에 재건한 것이며 경내에는 삼층석탑과 동부도, 서부도 등이 있다.
비로사도 683년에 의상이 창건한 절로서 정감록의 피난지로 알려진 풍기 금계동에서도 약 10km를 들어가는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말여초의 고승인 진공대사의 부도비와 신라 때의 석조당간지주가 있고 높은 축대 위에 자리잡은 적광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병존은 9세기 신라 화엄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갈곶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약 1km 정도 내리막을 내려가면 영주시 부석면과 봉화군 물야면 경계인 늦은목이 사거리가 나오고, 15시 36분에 도착했다. 늦은목이에서 서쪽 아래로 50m쯤 내려가면 식수를 구할 수 있으며 동쪽 아래 큰터골로 내려가면 오전리가 나온다.
늦은목이에서 북쪽 선달산을 향해 발길을 옮기면 아름드리 춘양목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중간중간 춘양목 아래로 뚜렷한 오르막 능선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참나무와 물푸레나무 그리고 진달래나무 군락이 나오고 이것을 헤치고 능선에 올라서면 시야가 트이고 선달산 정상에서는 오랜만에 시원한 파노라마를 만끽할 수 있다.
선달산 정상에 16시 18분에 도착하니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시멘트 테두리 속에 표지목이 설치되어 있으며 선달산 1236m 잔디밭 산악회 백두대간 종주대라 적혀 있다.
선달산은 왼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오른쪽으로 경북 봉화군, 영주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우선 북쪽으로는 분지처럼 패어져 내린 내리천계곡 너머로 두위봉과 백운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백운산에서 오른쪽 방향으로는 함백산과 태백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봉화 청옥산과 문수산 줄기가 오전약수 계곡과 함께 보이며 남쪽으로는 문수산과 응방산 사이로 봉화읍이 뚜렷이 보인다.
작년 6월 정기산행때 선달산을 거쳐 늦은목이와 갈곶산을 지나 봉황산으로 해서 부석사에 도착할 때까지는 수풀과 안개로 조망이 거의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낙엽이 지고 난 후에다 날씨도 맑아서 조망이 너무 좋다. 같은 산인데도 시기와 날씨 또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이렇게 천차만별 다른 모습으로 보이다니...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북도를 지나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강원도에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워진다. 백두대간 남한구간으로서는 마지막 도(道)인 강원도에 들어왔으니 멀리도 왔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 얼마남지 않았으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선달산 정상까지 북으로 향하던 대간길이 이제부터는 다시 동쪽으로 활처럼 휘어져 나간다. 여기서 한참을 가다보면 안부가 나오고 남쪽 왕바우골로 내려서는 길이 나오는데 오전리로 가는 길이다.
봉화군 물야면에 위치한 오전약수는 조선 성종때 어느 보부상이 발견했다고 하며 탄산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톡 쏘는 맛이 일품이고, 위장병과 피부병을 비롯해서 유해 중금속 및 병원성 미생물을 해독하는데 탁월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일명 쑥밭 약수터라 불리는데 단순히 마시는 약수가 아니라 피부미용을 위해 세수를 하기도 하며 조선조 9대 성종이 전국약수의 우열을 검사케 한 결과 직접 맛을 본 후 가장 좋은 약수로 인정했다고 전한다.
대간길은 그대로 직진하여 가다보면 바위지대를 잠시 오르내리지만 특별히 위험한 곳은 없으며 해가 곳 질것 같아 높낮이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을 뛰다시피 빠르게 내려가다 보니 박달령이 보이지만 벌써 해는 서쪽 하늘에 저녁 노을을 물들이고 있다.
계속해서 완만한 경사지대를 내려가니 헬기장이 나오고 헬기장에는 대간꾼들이 텐트를 쳐 놓았으며 기다리고 있던 장미꽃 세송이와 최병윤 회원 부부께서 정답게 맞이해 준다. 벌써 해는 지고 어둠이 땅을 뒤덮고 있으며 17시 39분이다.
박달령에는 알림 표지목과 백두대간 등산로(봉화군 관내)안내도가 있으며 이것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함께 한다. 고개마루에는 산신각(성황당)이 있으며 북쪽아래 100m지점에는 샘터가 있다.
어둠을 뚫고 박달령에서 임도를 따라 오전 약수쪽으로 내려오니 길이 상당히 험하다. 조심 조심 내려와 풍기를 지나니 잠이 오기 시작하여 모두가 잠이 들고 차는 칠곡에 도착하면서 정체가 심하다. 평사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고, 회장님 가게에 도착하니 김혜실 회원이 오늘 고생했다면서 회와 저녁을 사 주셨다.
또 한구간을 다녀와서 배가 고픈 가운데 맛있게 잘 먹었으며 이번 구간은 여성회원님들이 동참해 주셔서 정말 고마우며 특히 최현찬 산행부대장은 경기도에서 연수 중인데도 불구하고 내려와서 종주를 하고는 다시 올라가야 할 처지라 무척 힘들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종주자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최병윤 회원 및 사모님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진정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