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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 ] 1
*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면서 그냥 건너는 것이 아니라, 기다렸다가 어떤 특별한 날짜를 맞추어서 건너는데, 그것이 바로 유월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호수아를 제대로 알려고 하면, 유월절, 요단강, 할례, 신발 벗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을 알면 여호수아는 제대로 알았다는 것이다.
◈ 레위지파 → 요셉지파 → 유다지파
*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갈렙 땅인데, 이 갈렙 땅이 중심역할을 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중심역할을 하던 레위지파가 여호수아를 통해서 요셉지파로 바뀌고, 그것이 이제는 이 갈렙으로 인해서 유다지파로 바뀐다는 것이다.
* 이렇게 장자 지파가 [ 레위지파 → 요셉지파 → 유다지파 ] 라는 것으로 바뀌는 그 과정을 우리가 모르게 된다면, '좋은 핏줄을 따내면 구원을 받지 않을까?' 라는 혈육에 속한 개념을 유지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이 여호수아에서 중요한 것은, 유월절을 행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할례를 행하고, 신발을 벗고, 그리고 마지막에 갈렙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갈렙의 땅이 유지가 되면 이스라엘 나라는 괜찮은 나라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박살이 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야말로 여호수아라는 것이다. 진짜 모세의 후계자 자리에는 이 갈렙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산위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는데, 이런 정신이 바로 갈렙의 땅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렙은 이방인인데, 민수기 13장을 보면, 12정탐꾼들 중에서 유일하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된다고 한 사람이 바로 갈렙이라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단지 갈렙의 말을 증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여호수아서가 보여주는 것 - 갈렙이 자기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
* 다시 한번 정리하면, 여호수아가 보여주는 것은, 갈렙이 자기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 한다면 여호수아의 전쟁은 언제 끝나겠는가? 갈렙이 땅을 다 차지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을 살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 쉽게 말씀드리면, 믿는 자에게 그 모든 유업과 상속이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 일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여호수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서라는 것이다.
◈ 여호수아서의 주제 - 하나님의 약속대로의 모든 과정은 인간의 손을 결코 빌리지 않는다 !!
*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설교하면서 어떤 특정 인물을 강조한다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갈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끝내주는 분이라고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목사 : 여러분, 지금 우리가 초라해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권사 : 목사님, 그러면 저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갑니까?
* 목사 : 그것은 잘 모르겠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권사 : 목사님, 그것은 저도 압니다. 저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갑니까?
* 목사 :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던 하나님은 약속은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집사 : 목사님, 저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 목사 : 예, 그러면 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갑니다.
* 권사 : 아니 목사님, 금방 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갑니까?
* 목사 : 글쎄요, 그것은 잘 모르겠는데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사실 이 예화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사의 믿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차이점을 한국교회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자기 믿음대로 되는 줄을 알지만, 그러나 약속대로 된다는 것이다.
* 더 쉽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 집에서 열심히 부부싸움을 하는데, 그 옆에는 호텔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한 도사가 그곳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 부부 : 도사님, 우리 부부싸움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
* 도사 : 부부싸움과 상관없이 호텔은 건축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자기교회 중심이기에 자기 교회의 일이 잘 안 되면 주의 일에 지장이 있다고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 사람들은 자기의 종교 감정을 발판으로 해서, 항상 구원을 확보하려는 본능 때문에 복음이 왜곡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제일 왜곡되는 것이 선택인데, '나는 선택을 믿으니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 자기 선택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이렇게 자기의 믿음을 믿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약속은 '예수님은 하신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 라는 것은, '처음 시작한 것은 반드시 끝까지 이루신다' 라는 것이다. 자기 구원문제나, 부부싸움이나, 자기교회의 부흥은 약속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교회란? -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
* 교회란, 자기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라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가 아닌가?
* 기도라는 것도, '우리가 주님의 일하심에 죽음으로 동참합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기도하는가? '주여, 우리교회 부흥되게 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기도인가?
* 어떻게 해야 한 교회가 부흥이 되는가? 옆에 있는 교회가 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 개는 망해야 한 교회가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이것이 얼마나 이기주의인가? 만두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왜 자기 만두만 진짜 만두라고 하는 것인가? '만두는 맛있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 합동 측의 신문이 기독신보인데, 이것을 지옥에서 올라온 신문이라고 하는데, 무슨 무슨 부흥집회, 류광수, 이태희, 피종진 등 이단들을 줄줄이 부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축, 부활' 인가? 축하할 것이 따로 있지 말이다.
* 다시 요약하면, 여호수아서의 내용은, '그 모든 과정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밀어 부친다' 라는 것이다. 어떤 약속인가?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땅을 상속하겠다는 약속을 말이다. '갈렙이 자기의 땅을 상속받은 것으로 전쟁은 끝났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여호수아서라는 것이다.
◈ 약속이란? - 우리는 놀아도 주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일하신다 !!
*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놀아도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내가 놀고, 안 놀고는 약속에 포함된 것이 아니니까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자기가 약속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제가 술을 마셔도 됩니까?' 라고 한다면, '당신이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 하는 것이 약속이 아니고, 십자가가 약속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김 순경,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지 !!
◈ 기도란? - 내 생각을 부수고 주님의 생각을 집어넣는 것이다 !!
* 여기서 열왕기상 3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이것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난 뒤의 내용인데, 이것을 보고 요한일서를 보면, 흔히 한국교회에서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들어주리니' 에서, 내 이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왕상 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주의 마음에, 즉, 주의 이름에 맞으니까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의 이름은, 나의 소원은 박살내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름은 죽여버리고, 그 죽음 위에서 오직 주님의 이름만 피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무조건 '주의 이름!' 이라고 하면 되는가? 이 이름이라는 것은 기능이라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②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주의 이름으로 했다' 라는 것은, 주의 이름에 합당한, 즉,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그 이름에 합당한 기능을 속히 실행에 옮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도 모르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 그리고 기도를 하면서 문자적으로 그 이름을 넣고 안 넣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를 하면서 빼먹었다고 해서 기도에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은, '남묘호랭개교' 라는 것이다. 그들은 주문을 외우고 하니까 말이다.
* 요한일서 5장을 한번 보자.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라는 것 앞에 무엇이 있는가? 분명하게 '그의 뜻대로'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뜻이 무엇인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최고의 사랑이 아닌가?
* 예수님의 이름을 전해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 그것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그게 아니면 밥 퍼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인가? 그들에게 밥이나 퍼주니까 오지, 복음을 전하면 모두가 다 도망갈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사랑이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살려고 성경을 해석하면 몽땅 다 엉터리이고, 죽으려고 하면 몽땅 다 진리이다 !!
* [신앙의 샘물] 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왜냐하면 말씀이 나를 죽음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죽음은 바로 영생이 아닌가? '여보, 뭐하다 죽을까, 목사나 하다가 죽자' 라고 하면 목사지만, 그러나 '여보, 이제 우리 목사를 해서 보다 잘 살아보세' 라고 한다면 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보다 확장시키고 연장시킨다는 것이다.
* 그러면 마누라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보, 당신이 죽어버리면 나는 자식들하고 어떻게 사노?' 라고 하면 뭐라고 해야 되겠는가? '여보, 이리와 봐. 내 말을 잘 들어.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는데, 아내가 있는 자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장가가는 것도 좋지만 안 가는 것이 더 낫고, 시집을 가는 것도 좋지만 안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되 있어. 그러니 당신 앞길은 당신이 알아서 해라. 나는 몰라'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너무 했나?
(고전 7: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고전 7: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 7:34)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 이것이 목사의 한계가 아닌가? 어떻게 하겠는가? 도적질을 할 수도 없고 말이다. - 지금, 보일러를 틀어놓았습니까? 4월 달에 덥게 모슨 보일러입니까?
* 정리하면, 주님은 사람을 사용하기는 하시는데, 그 사람을 살려서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죽여서, 마치 젖먹이처럼, '주님, 나는 못 합니다' 라는 고백하는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모든 일을 다 알아서 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여호수아서가 기록되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갈렙만이 믿었는데, 그래서 이 갈렙 땅은 유다 땅이고, 갈렙의 중심지는 베들레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전이 시작되는데, 즉, 갈렙의 믿음 위에 생겨난 땅이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차 나올 왕은 갈렙 땅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갈렙 땅을 누가 차지하도록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통해서 하시는가? 여기서 어려운데(?), 두 가지 견해가 나온다는 것이다.
* 첫째로 대부분의 한국교회이고, 선교단체 등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인간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주 소수의 견해이지만, 지독한 칼빈주의자들로서, 죄인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일을 하시는가? ① 인간, ② 죄인
* 이 둘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죄인을 통해서 함을 고백한다면, '주여,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방해만 했습니다. 정말 저는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안 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직 주님만을 높이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을 통해서 한다고 하면, '역시, 주님도 인간이 없이는 일이 안 되는군요. 하나님도 대단하지만, 역시 인간도 가치가 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기능이, 즉, 경영적인 기법, 행정적인 수완, 기도, 전도 테크닉, QT 등의 능력이 있으니, 이것을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겠다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등장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한 문화 이루기' 라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의 '다스리고 정복하라' 라는 것을 들고 나와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해서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세상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공명선거운동, 환경보호운동, 기독교윤리운동 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칼빈주의를 포기하고 알미니안주의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 만세, 알미니안 !!
* 이렇게 교회에서 외치면, 소위 배웠다고들 하는 지식층들에게 호감을 준다는 것이다. '역시, 교회가 그렇게 해야 되. 자기 교회에 건축하는데 돈을 쓰지 않고 저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하니까 말이다. 나도 그런 교회에 헌금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이 진홍김이고, 최일도라는 것이다. 홍정길은 장애인 등을 하지만 조금은 멀었고 말이다. 넣어줄까? 그리고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등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정말 한결같이 '하나님도 인간을 통해서 일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번도 '죄인을 통해서' 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인간의 문명을 통해서 한다' 라고 하면 안 되는가? 그것은 인간의 문명이란,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이 개입되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만드는 인간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왜 이렇게 인간들이 자기들의 문명을 만드는가? 자기가 보다 잘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을 외쳐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집단을 위한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이다. 자기 집단에게는 도덕적인 것이 얼마든지 남에게는 비윤리적인 것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면, 사람이 착한 일을 하려면 먼저 자기가 배가 불러야 하는데, 여기서 배가 부르다는 것은 배가 튀어나았다는 것이 아니고, 배가 부르고 난 뒤에야 고아원도 방문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배가 불러야 힘을 쓴다는 것이다. 기도를 해도 배가 불러야 하지 배가 고프면 잠이 온다는 것이다.
◈ 인간은, 가까운 열 명을 돌보는 사람이 멀리 있는 열 명을 돌보지 못해서 마귀의 시험에 든다 !!
* 자 그런데, 이것이 제한된 양식일 때는 선한 행동이란 것이 항상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을 열 명 돌보는 사람이 멀리 있는 사람 열 명을 돌보지 못해서 마귀의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전라도의 할머니에게 자기 신장을 떼 주지 못해서, 멀리 아프리카에 굶고있는 사람을 TV를 통해서 보고 그만 미친다는 것이다. 자기의 윤리적인 욕구는 넘치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지 못하니까 말이다. 이것은 미친놈이라는 것이다. 분출되는 자기 욕망을 억제하지를 못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은 자비와 온유와 양선과 화평인데, 이것은 이것을 하나씩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살면 한꺼번에 다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훈련을 한답시고, 서로 형제우애를 한답시고 손잡고 해서 난리가 나고, 이 얼마나 믿음이 없느냐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믿음이 없음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행동을 하고,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다 !!
* 인간은 이렇게 자기에게 믿음이 없음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행동을 하고,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으로 제가 이렇게 이렇게 행동을 고치면 보다 발전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기 이름이지 하나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 선한 문화, 선한 문명은 일종의 '국가 이기주의' 인데, 사실 앞으로 우리가 이런 공부를 좀 해야만 되는데, 워낙 방대하기에 힘이 들고 책값도 많이 들어서 엄두가 안 나지만, 그러나 해야 하는 것이다. 철학, 경영학, 교육학, 사회 인문과학 등을 공부를 해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윤리라는 것은 그 집단의 현장에서의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 인간의 윤리라는 것은, 그 집단의 현장에서의 이기주의이다 !!
* 회사에서 왜 술을 안 마시는가? 상사가 못하게 하기에 안 마신다는 것이다. 마시고 싶지만 꾹 참는다는 것이다. 담배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것을 가지고 사라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한 집단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서 군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善)' 이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상한 심령' 이라는 것이다. 자반 고등어가 아니고 상한 고등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기다려야지, 자기가 알아서 뒹굴고 소금을 넣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만약에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는다면 유대인들이 왜 탈락을 했겠는가? 그들이 기도를 적게 했는가? 아니면 구제를 등한시했는가? 그들이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안 되었기에, 메시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메시야가 왜 오는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라고 하지를 아니했는가? 이처럼 인간의 윤리를 공격하는 말이 어디에 있는가?
◈ 로이드 존스 - 가장 십자가의 원수는 가장 윤리적인 사람이다 !!
* 여기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공격을 하면서, '가장 십자가의 원수는 가장 윤리적인 사람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동의하는 것이다.
* 다시 여호수아서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맞추어서 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월절 행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이것은 요단강과 유월절을 매치 시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 강물이 갈라지는 것은 누구 덕분인가? ① 용기가 있었다. ② 믿음이 있었다.
* 여기서 믿음이란 말이 나오면, '뿅!' 가는데, 한국교회에서 대부분이 믿음이라고 강조를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믿음이라고 한다면, 왜 구태여 유월절이라는 절기에 맞추어서 요단강을 건너가느냐는 것이다. 그냥 아무 날에나 건너가면 되지 말이다. 그냥 자기 믿음으로 건너가면 되지 말이다.
*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은 외부인의 개입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여호와' 라는 이름의 개입에 의해서 말이다. 이것을 출애굽기 15장에서 두 글자로 무엇이라고 말하는고 하니, '용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싸움 하나는 끝내준다' 라는 것이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요단강을 건너고 갈라지는 것을 싸움에다가 비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싸움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개입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이 이름이 개입하는가?
* 출애굽기 20장을 한번 보자.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출 20: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데, 토단을 쌓고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을 가지고 이름을 기린다고 하는 것이다. 엠프를 가지고 와서 '이름', '이름' 이라고 크게 외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흠 없는 양과 소를 잡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이름을 기념하는 것인데, 이것은 장차 올 보이지 않는 실체가 나타날 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 인물인데, 그 기능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한다' 라는 것이다.
* 다시 반복하면, 지금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양과 소를 잡으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기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은 눈에 안 보이지만 장차 오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의 모습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지금 여기서 이것을 왜 강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고 만약에 하나님 이름이 사라지면, 요단강도 갈라지지를 않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지고, 결국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의 정복은 자기의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이름으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흠 없는 양과 소가 보여주는, 즉, 어린양과 같은 그 이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용사가 되어서 하신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자기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넌다고 해버리면, 용사이신 그분은 뭐가 되는가? 자기 믿음으로 건너면, 당연히 믿는 주체가 자기이기에 자기 이름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나안은 주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들의 믿음으로 승리한 곳이라는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가나안 땅은 믿음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땅이다 !!
* 다시 정리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강의 한 가운데 있는 돌을 옮겨다가 어디로 가지고 가는고 하니, 에발산과 그리심산으로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을 저주산인 에발산에 세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축복을 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가나안 땅에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단강의 돌을 가져다가 에발산으로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 만약에 그 돌을 가지고 제단을 축복산인 그리심산에 세운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은 없다는 것이다. 축복산이란 맞은 편에 있는 산을 향해서 축복을 한다고 해서 축복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주산이란 맞은 편을 향해서 저주한다고 저주산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축복을 좋아해서 축복산으로 올라가다가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거꾸로 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축복을 받는다고 설치다가 얼마나 저주를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오직 상한 심령으로 !!
* '주여, 저는 상한 심령입니다' 라고 해야 복을 받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도 이 정도 했으니 복을 받을 자격이 있죠' 라고 하다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떤 저주인가? 돈의 노예라는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되니까 성경말씀을 완전히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8장인 것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과 같은 것들이 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감사해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야 하는데,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렇지 않고 저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떠한 환난 중에서도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설교를 하면 어떤 놈이 오겠느냐고 반문을 할지 모르지만, 물론 어떤 놈은 오지 않고 어떤 분은 가끔 온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면 그 대가를 바라는데, 이렇게 힘들게 교회에 나왔는데 복은 안 주고, '환난이 축복입니다' 라고 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 그러나 교회는, '당신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는 것을 확인 작업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우리의 믿음이 주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C.C.C 이고, 주님의 믿음만이 우리를 붙든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약속을 이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믿음이 믿음을 이끌고, 주님의 소망이 소망을 이끌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 인간교 -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이 있으니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주체를 자기 자신으로만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만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들의 종교적인 테크닉을 자랑하는 '인간교' 라는 것이다.
* 그러면 이렇지 않는 교회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날마다 죽어야 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찬양을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찬양을 얼마나 잘 하는가?' 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이런 모든 순서를 진행해야 하기에 찬양도 안 되고, 사실 예배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피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뭘 한다고 설칠 것이 아니라, '아이쿠, 이것도 죄이구나!'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가 날마다 내 앞에 쌓여있음을 알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충만히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조그마한 것이라도 시킬 수가 없는 것이, 만약에 무엇을 하나 시키면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고 하니, 당장에 내신등급이 나온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성경을 몇 장 외어오세요' 라고 하면,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그것이 식은 죽 먹기지만, 그러나 시골 할머니들에게는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다. 한 장을 읽는데 한 시간씩이나 걸리니 말이다. 이렇게 순서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성경암송대회를 하면, 젊은 사람들이 나이든 할머니보다 더 못 외우지만 말이다.
* 만약에 목사가 강단에서, '음란 비디오를 보지 마세요' 라고 했다면, 그렇다면 무슨 질문이 나오는고 하니, '목사님, 애마부인은 됩니까? - 안 됩니다', '그러면 젖소부인은 됩니까? - 안 됩니다', '그러면 쉰들러리스트는 됩니까? - 됩니다', '차타례 부인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 ???' 라고 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젖소부인을 안 본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만약에 본 사람은 아니라는 말인가? 과연 그러한가? 그러니 뭔가 '하라', '하지 말라' 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강조를 해버리면, 교회에 그만 계급이 생긴다는 것이다.
* '술을 먹지 마세요' 라고 하면, 안 마시는 사람, 1병 마시는 사람, 2병 마시는 사람, 이렇게 줄을 좍 하고 선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세요' 라고 하면, '본봉에서 합니까?', '수당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너스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주를 하루에 한 병을 마시다가 그만 둔 사람이나, 두 병을 마시다가 한 병으로 줄인 사람이나, 다 주님의 은혜를 아니까 똑같다는 것이다. 계급이 없다는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술을 끊은 사람은 항상 기가 살지만, 한 병을 마시는 사람은 언제나 기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란 오직 주의 이름만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으니까 말이다.
* 이렇게 되면 모든 죄의 개념이 다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교육을 받은 집에서 죄라는 것은 신발을 나란히 놓지 않는 것이 죄이고, 문을 엉덩이로 조용하게 밀어서 열고 들어가지 않는 것이 죄이지만, 그러나 남루하고 못 배운 집에서는 식사시간에 밥을 흘리면서 마구 먹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 이렇게 사람은 타고난 환경이 다르기에 그 느낌이 다 다른데, 그런데 죄를 이렇게 일률적으로 정해놓으면, 밥을 안 흘리고 먹는 사람은 회개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러한 수준은 넘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고 자기는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 집안이 돈이 없고 무식해서, 배우지를 못해서 예의가 없고, 행동이 어설프다고 해서 함부로 정죄를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 제공을 목사가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이 목사가 할 짓인가?
* 예를 들어서, '바람을 피우지 마세요' 라고 하면 누가 제일 좋아하겠는가? 한 평생을 바람을 피우고 싶지만 꾹 참고 살아온 장로가 얼마나 입이 찢어지겠느냐는 것이다. '어허, 못난 집사들, 빛과 소금이 되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 설교에서 적어도 그 장로는 회개할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그냥 의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냐는 것이다. - 바람을 피우지 마세요 !!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인간이 도저히 흉내를 내지 못할 고도의(?) 윤리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여자를 탐한 것도 간음을 했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바람을 피운 사람도, 바람을 안 피운 사람도,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은혜를 받게 되고, 또한 남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가 비로소 천국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돌아서면 원위치가 되어버리지만 말이다. 이러한 것을 구약성경을 통해 계속해서 증명해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구약성경은 모든 흐름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죽은데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 군데군데에 이방인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갈렙, 룻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방인의 자리에 '갈렙이 했다', '룻이 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주의 이름은, 출애굽기 20장 24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흠 없는 어린양' 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설교는 오늘날에도 계속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십자가가 나오기에 말이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여도 말이다. 갈렙이나 전쟁에서 죽은 우리야와 같은 이방인들이 등장하기에 말이다. 그러나 잘나고 똑똑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서 너희들을 구원을 한 것은 그 누구도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해서, 절름발이라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모습도 주의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오직 외부에서 날아온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을 시키는데, 그런데 이들은 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미천한 이방여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패역해서 주의 이름을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산골짜기와 봉우리가 서로 어루러지면서 성경의 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기존의 오래 동안 믿은 장로들이 아니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와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초신자들' 이라는 것이다. 장로들은 '어디에서 베겼지?' 라고 하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얼마 못 가지만 말이다. 그러면 또 새로운 자들이 나타나고 말이다.
*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그러한 법칙이 항상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 된 자가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만이 그렇게 하신다' 라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이고, 이것이 신약의 십자가와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 흔히 구약성경과 십자가를 연관시킨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자신도 정리를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유월절은 예수님의 초림, 맥추절은 오순절 강림, 수장절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인데, 그런데 총신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교수가 있다는 것이다.
* 요즘 성막이 부흥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데, [성막에 담긴 그리스도의 비밀] 이라는 책도 있는데,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호기심을 동원해서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것은 분명하게 잘못된 구약성경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 성막 - 성막은 항상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보여주는 '심판' 과 '긍휼'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 드리는 제물을 통해서, 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제사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 이 심판과 긍휼이, ①장소와 ②제물과 ③제사장을 통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성전인데, 그래서 지금 새언약의 시대에는 성전이 무너졌기에, 이 세 가지도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제사를 드리는 제물이 없다는 것이다. 제사장도 없고 말이다. 물론 거룩한 장소도 없는 것이다.
◈ 성막은? -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을 보여준다 !!
* 그러면 오늘날은 율법이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성도의 몸이 성전인데, 이 말은 항상 ①장소와 ②제물과 ③제사장의 세 가지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를 심판해서 죽이고, 날마다 우리를 사랑으로 살린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날마다 일어나야 움직이는 성전이라는 것이다.
* 이런 마음가짐으로 구약의 레위기와 민수기를 보면 다 뚫린다는 것이다. 촛대를 앞으로 향하는 것, 물두멍과 12 진설병, 그리고 제사장에게 방울을 다는 것 등이, 여기에 모두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이라는 것이다.
* 처음에 이스라엘이 발생될 때, 어린양이 죽었는데, 이 말은 어린양의 정신이 사라지면 이스라엘도 끝장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양이 희생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데, 이 하나님 아름의 하는 일은 이스라엘을 팍팍 도와주면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체에는 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높일 때, 주의 이름이 도와준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고아를 도와주자', '과부를 도와주자', '나그네를 도와주자' 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까, 고아와 과부를 도와준 그런 사랑은 그냥 이웃 사랑이 아니고, 어린양의 희생으로 우리를 도와주는 그 사랑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런 고와와 과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망했다' 라고 외쳤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 성전제사를 인격화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이다 !!
* 그래서 유월절이란 어린양 희생의 반복이고, 이 유월절을 보다 상세화한 것이 맥추절이고, 그리고 이 맥추절을 보다 상세화한 것이 수장절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고정화시킨 것이 바로 '성전제사'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전제사를 인격화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라는 것이다.
* 외부에서 들어온 어린양의 희생정신이 들어있어야 성도라는 것이다. 자기 말로 성도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심판과 긍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정신이 성도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 유월절이란,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은 양을 잡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잡는다는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 이름의 소유라는 것이다.
* 얼만 전에 서울에 갔다가, 신도림동 역에서 상가건물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뭐라고 적어놓았는고 하니, '독도는 하나님 땅' 이라고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무엇 때문에 적어놓았는지? 독도만 하나님 땅인가? 일본 본토는 아닌가? 출애굽기 19장에 무엇이라 되어 있는가? 이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 유월절은 이 모든 땅은 하나님 땅이고, 우리는 품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맥추절을 언제 지키는가? 이삭이 펼 때 지킨다는 것이다. 이삭이 편다는 것은 무사히 추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야, 이것 봐라. 이삭이 펴지려고 한다. 우리가 먹을 수 있겠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한다는 것이다. 즉, 수장절이라는 것은, 추수를 하면서 '이 추수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것이다.
◈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 보여주는 것은? - 땅, 이삭, 열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
* 다시 말해서,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 보여주는 것은, '땅, 이삭, 열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 땅에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니 그분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이 수장절이 민수기를 보면, '대 속죄일'로 바뀐다는 것이다. 즉, 추수 감사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더욱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이다.
* 이것은 마치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왜 지키는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해방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구원해 내신 날을 기념을 해서 안식일로 지킨다는 것이다.
* 물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도 맞지만, 세월이 지나서 하나님이 좀더 가까이 나타나시는 모습으로, 천지를 창조했던 그 하나님이 애굽에서 너희들을 이끌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이 창조기념일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날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이 일주일에 한번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릴 때마다 반복된다는 것이다.
◈ 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
* 안식일에 주체는 일주일의 한번 있는 일곱 째의 날짜가 아니라, 제사 드림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날짜 계산은 그만 하라는 것이다. 예수인 나를 쳐다보라는 것이다. 내가 제사의 제물이고,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나아가서 모든 계명을 다 지킨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 5장을 한번 보자.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10)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냥 주면 되는데, 왜 이러한 유월절 행사를 지키게 하는가? 약속의 땅은 반드시 약속의 씨(후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땅을 기업, 상속, 유업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에게만 준다는 것이다.
*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해를 해서, 자기들이 약속의 후손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의 자손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믿으면 되겠네'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강조하듯이, 믿음의 자손이라는 것은 행함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언약의 시대이기에, 믿음에서 믿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오직 약속의 씨에게만 주어지는데, 그렇다면 이 약속의 땅은 어떻게 얻는가?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세우는데, 마지막 정복 장소인 여부스의 수도인 '시온' 에다가 세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온은 시편에서 어떠한 지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으로 불려진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려고 하면, 이 씨가 누구 앞에 있어도 죽지 않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는 죽지를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번 저주를 받아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단은 저주를 받아서 두 번째는 저주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치 애굽에서 열 번째 재앙 때에, 다른 집에는 죽음의 천사가 쓸고 지나가는데,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에는 넘어가 준다는 것이다. '너는 이미 죽었다. 그런데 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양과 같은 분이 죽었다' 라는 것이다. 네 대신 흠 없는 분이 죽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대신 돌아가신 분이 있어야,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자가 씨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약속의 씨라는 것이다. 이렇게 약속의 땅과 약속의 씨, 이렇게 한 세트가 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이 씨를 어떻게 만드는가? 수치가 없어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수치를 가려주는 사건이 어디에 있는가?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서 가죽옷을 입혀주시는데, 이것은 '이제는 너와 함께 살아도 괜찮다' 라는 것이다.
(창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노아의 경우에도, 노아가 술을 마시고 하체를 드러내었는데, 이것을 셈과 야벳이 그 수치를 덮어주었는데, 이것은 이 덮어줌으로 말미암아서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과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 '얼러리 꼴러리' 라고 했으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법궤의 경우에도, 법궤 안에 들어있는 인간의 그 수치스러움을 덮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파르(덮어줌)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덮는가? 7월 10일 대속죄일에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와 함께 있어도 죽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 그처럼 하나님은 수치를 덮어주는데, 그러면 어떻게 덮어주시는가? ①양털 ②모포 ③죽여버린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장본인을 죽여버리는 것인데,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생식 기능을 없애버리는, 할례라는 것이다. 완전히 경부선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 이제는 수치의 노선이 끝났으니 '붕!' 하고 날라서, 새로운 노선, 즉, 없는데서 새로 생가는 새로운 핏줄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이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의 씨라는 것이다.
* 할례 - 그래서 생식기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고추 끝을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혈통과 기능을 다 잘라버리는 것이 바로 할례의 의미라는 것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이렇게 하고 나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다. 이 할례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하이 코메디인가?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표시인데 말이다. 자기 못남의 표시라는 것이다. '나는 늘 죽어야 되!' 라는 것이다.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되는데, 육체의 할례를 행해놓고 폼을 잡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롬 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할례시가 아니라 무 할례시라는 것이다. 즉, 의인이 되는 것은 할례를 받고 난 이후가 아니라, 할례를 받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가? 할례라고 하는 것은 '나는 이미 죽은 몸입니다' 라는 것이다. 이 할례를 행한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할례 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이름을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 교회에서 봉사와 헌금을 그렇게 강조하는데, 봉사를 열심히 하고 헌금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가는가? 그것이 아니라, 이미 봉사와 헌금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상관없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별로 없다는 것이다. 전부가 다 교회가 없으면 구원을 못 받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 교회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는 믿는 자들의 결과이다 !!
* 이 말은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없이 영생을 얻은 사람의 현상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구별하지를 못하는지? 교회가 구원이 아니라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멸망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교회를 붙들면 종교단체이고, 주님을 붙들면 교회이다 !!
* 성경에 아마추어인 장로들이 이것도 모르고, 자기가 돈을 댄 교회에게 미련을 버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온 목사를 얼마나 키워줄까?', '저렇게 새벽기도에 늦으니까, 설교를 못하니까, 교회가 부흥을 안 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와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라고 믿는 사람을 교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러니까 땅을 차지하기 이전에 새로운 씨가 있는데, 이 씨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없는데서 있어진다는 것이다.
* A: 아저씨,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 B: 그냥 믿게 되었습니다.
* A: 에이, 그래도 뭔가 있지를 않습니까?
* B: 없습니다. 성령이 바라같이 불어서 믿게 되었습니다.
* A: 그러면 저에게는 왜 성령이 안 옵니까?
* B: 성령이 임의로 분답니다.
* A: 임의로 분다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 B: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인간이 자꾸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인간의 종교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하는데, 종교가 시작되면 윤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 종교와 윤리의 특징 - 인간을 할 수 있다( I CAD DO ) !!
* 꿈을 키워라, 그러면 키운 만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은 기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가능성은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믿음으로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말이다. 왜 이상스럽게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느냐는 것이다.
◈ 믿음은 용기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다 !!
*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제는 거듭난 이성과 감정으로 선한 문화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것이, 그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습인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가 알아서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신념이고, 처세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처세술을 누가 잘 가르치는고 하니, C.C.C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식으로 하면 대인 관계가 원만해진다', '당신의 주위에다 원수를 두지 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홍정길 목사도 이런 것을 잘 가르치는데,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것으로 때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와 민족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요즘은 조금 변했다는 말도 있지만 말이다.
*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완전히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완전히 초를 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금이든, 은이든, 놋이든, 철이든, 모두가 다 한 통속이라는 것이다.
* 이 세상 나라는 전부가 다 하나님 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늘나라가 너무나 황홀하고 멋있어서 그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나 초라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그들이 박해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조직에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외면을 당한다는 것이다.
* 거지 나사로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한편의 강도를 보라. 이들이 얼마나 한국교회에서 무시를 당하는지 말이다. 이들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기에 말이다. 십일조를 한번 했는가? 전도를 한번 했는가? 이들은 하늘나라에 팬티바람으로 간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웬 팬티바람? 모두가 벌거벗고 있는데 말이다.
◈ 기독교란? - 거지도, 강도도 구원을 받는다 !!
* 그러나 기독교는 무엇인가? '거지도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이것이 바로 우리들 신학의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것이다.
* 십자가의 한 편에 달린 강도가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한평생을 나쁜 짓만 해놓고서 천당에 가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강도에게는 무엇인가? 천당이 원래 그러한 곳이라는 것이다. 한 평생 동안을 아무 것도 안 해도 가뿐하게 들어가는 곳이 천당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도의 신학인 것이다.
◈ 의인이란? - 오직 예수 안에서 의인이다 !!
* 이 얼마나 놀라운 신학인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흠 없는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만을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 거듭난 중생과 이성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 안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나의 이름은 죽고 주의 이름은 산다' 라는 것이다. 오직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고린도후서 4장을 한번 보자. 이와 같은 현상을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눈을 감고 성경구절 몇 개만 묵상을 해도 한국교회가 얼마나 성경과 거리가 먼가를 잘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성경에 대한 무지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보면서, 명령법이 아오니까, 이 명령법을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전도를 하라' 라고 하니까, '전도를 하면 되겠구나. 얼른 전도해야지' 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이미 실패했는데도 말이다. 또 다시 유대인들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구약성경이 왜 필요한가? 바보인가?
* 직설법과 명령법 - 그래서 신약학자들이 신약성경에서 법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바로 직설법과 명령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직설법은 '이것은 무엇이다' 라는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리고 명령법은 '무엇을 하라' 라는 실천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을 못 받는가? 만약에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피는 헛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 이룬 것이 아니라,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 이것은 구약에서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모르고,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실패를 했는지도 모르고, 신약시대에서 구약시대처럼 문자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 전도하라고 하면, 사실은 전도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도(道)를 전하라' 라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전도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전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전도한 간증이나 하면서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접어놓고 말이다. 이렇게 자기 간증을 전도하니, 무슨 구원의 능력이 되겠는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능력이지 말이다.
◈ 전도란? - 전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도(道)를 전하라' 라는 것이다 !!
* 그렇다면 '도를 전한다' 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령께서 간섭하사 그 마음에 불일듯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도를 전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왜 그런가? 인간의 마음은 때가 적당하면 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하지 않기에 말이다. 그럴 때에 성령께서 귀때기를 때리면서 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회개' 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옆에 있는 집사가 자기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본인은 아는 것이다. 성령께서 자기 귀때기를 때려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자꾸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라고 한다면, 어지간해서 술에 안 취하는 사람들은 괜찮다는 것이다. 술에 안 취하면 되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았던 유대인들의 오류였다는 것이다.
◈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구약성경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된다 !!
* 그러나 새 언약의 시대가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제는 에스겔서에 보면, 아예 그 마음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마음인가? 무엇을 지키는 마음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즉, 회개의 영이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말씀을, 구약성경을 제대로 이루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을 설교에 그대로 인용하면, 예를 들어서 십계명을 설교하면서, '살인하지 말라' 라고 했을 때, '여러분, 오늘날 신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엉망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말입니다. 1200만의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가 1200만 명이 아니라, 1억 2000만이 되어도 나쁜 짓을 항 놈들은 여전히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된다고 하면, 역시 구약시대와 똑같아 지는 것이다. '그래, 살인을 안 해야지!' 라고 말이다. 마누라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안돼, 죽이면 안 되지. 목사님이 살인을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라고 하면서 참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렇게 하면 왜 안 되는고 하니, '살인하지 말라' 라는 뜻은, 이것의 기준은 항상 하나님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을 미워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남을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미흡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를 하게 되는데,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마누라를 때려죽이려고 하던 바로 그 인간이, 그것을 참는 차원이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말씀의 완성형이라는 것이다. 물론 돌아서면 원위치가 되지만 말이다.
◈ 설교를 하면서, 어떤 본문이 나와도 항상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피로 마쳐야 한다 !!
* 그래서 설교를 하면서,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고 하니까, 어떤 본문이 나와도 항상 그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피로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도 나오고 말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구약성경의 올바른 본문설교가 된다는 것이다. - 너무나 피곤해 보여서 오늘은 여기까지 !!
* 여호수아 6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수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수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수 6: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수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수 6: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 보통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여리고를 쳤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여리고 성을 둘 다 쳤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을 방해한 마귀를 쳤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가? 마귀가 벌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인가?
◈ 여리고 성 - 너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했고, 나는 긍휼을 입었다 !!
* 여리고 성을 쳤는데, 그것은 첫 번째 타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번 타자가 있다는 말인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즉 이렇게 되면, '너는 나쁘고, 나는 선하다' 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똑같은데, 단지 '너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했고, 나는 긍휼을 입었다' 라는 것이다. 여리고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차이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여호수아 6장을 설교할 때,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함께 돌아야 합니다. 왜 목사 혼자만 돌립니까?' 라고 하지를 않는가? '장로들이여, 벧스메스로 가는 소처럼 다 함께 법궤를 메고 갑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잇다는 것이다.
* 사실은 여리고 성 전투뿐만 아니라, 성경전체가 다 그러한데, 하나님은 양쪽을 다 친다는 것이다. 둘 다 똑같은 놈인데, 단지 '한쪽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다른 쪽은 긍휼을 입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긍휼을 입었다는 것은, 이 속에 뭔가가 심겨져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하기는 구원을 하는데, 낚시바늘과 같은 것이 그 속에 심겨져서 딸려 나온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양발차기 선수이다 !! - 이왕표 인가?
* 이렇게 되면, 기존 선교단체에서 주장하는 구원론이 모두 다 박살이 나는데, '너 여리고 성이 박살나는 것을 보았지. 까불지 말고 따라와' 라는 것이 아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지. 너도 그렇게 무너지는 거야. 알았어? - 예!' 라고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너도 이렇게 박살이 날 수밖에 없는데, 너희들 속에 뭔가 심겨진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살아난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잘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 심겨진 것이 바로 하나님의 '희생'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딸려 나온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치는 방법은?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같이 적용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여호와 전쟁' 이라는 것이다.
◈ 여호와 전쟁의 특징은? ① 인간술수 배제
② 전멸
③ 전리품 확보
④ 전리품은 여호와의 창고에 !!
* 이것이 구약에서 신약의 요한 계시록의 미카엘 전쟁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전혀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 말라기 3장에 십일조가 나오는데, 적용을 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인간술수 배제 - 모든 소득은 하나님의 것이다.
* ② 전멸 - 인간의 몫을 챙기면 죽는다.
* ③ 전리품 확보 - 1/10을 드림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나머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 ④ 전리품은 여호와의 창고에 !! -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
* 여리고 성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① 인간술수 배제 - 하루에 한 바퀴씩 돌린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일곱 바퀴를 돌리는데, 성경에서 흔히 7이라는 숫자를 '완전수' 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그러한 헬라적인 개념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는 일' 이라는 것을 가지고 7로 표시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 때, 하나님께서 손으로 뒤에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일곱 바퀴를 돈다는 것이다.
* ② 전멸 - 이렇게 일곱 바퀴를 돌고 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전멸이 된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 백성들이 다 죽는다는 것이다.
(수 6: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 ③ 전리품 확보
* ④ 전리품은 여호와의 창고에 - 여리고 성을 차지하고 나서 그 전리품은 다 여호와의 창고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전쟁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기에 전리품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창고에 넣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거역하고서 빼돌린 사람이 있으니 '아간' 이라는 것이다.
*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사실을 몰랐는데, 조그마한 아이 성 전투를 치르면서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전쟁을 하면서, 위의 그러한 원칙에 따르지를 않았기에 이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 전쟁을 치르면서 성이 조그마하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우리끼리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다고 하면서 덤벼들었으니, 여호와의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전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전쟁으로 바뀌면 아이 성 사람들은 고사하고,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이렇게 하나님은 양쪽을 다 친다는 것이다. 항상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이런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여호와 전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전리품이기에 말이다.
* 이스라엘이 전쟁의 주체가 아니라,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전쟁해서 얻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옴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 출애굽기 15장을 한번 보자.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하나님은 싸움 하나는 끝내주는 용사라는 것이다. 싸움에는 질 줄을 모르는 분이라는 것이다. 시편 43편에 보면, 하나님은 항상 승리하시는 분이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 하나님이 이러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리품으로 얻은 기업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주의 처소' 라고 하는데, 즉, 주님은 자기가 용사가 되어서 얻은 그 가운데 주님은 항상 계신다는 것이다.
* 신약성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예를 들어보면, 마태복음 18장에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15장에서 하나님은 그 이름이 용사인데, 여호와 이름으로 획득한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이 본문과 딱 맞는다는 것이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그러니 이런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해석하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주여!' 라고 이름만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는 곳은, '나는 하나님이 전쟁하셔서 획득한 전리품이다' 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만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투캅스' 에 보면, 안성기가 마누라를 따라가서 모 교회 집사로 나오는데, 얼마나 '주여!' 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의 이름을 잘 부르는지, 돈만 밝히는 경찰이면서 말이다. 이것을 보고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 말이다.
* 성전개념 - 주님의 성전이라는 개념은, '너희들 나를 불렀나? 내가 가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용사가 되셔서 그 획득물 속에 눌러 앉는 것, 이것이 바로 성전개념이라는 것이다.
* 주님은 이렇게 자기 전리품을 모아놓고 스스로 좋다고 흐뭇해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에는 24장로들이 주께 엎드려 경배하고 면류관을 반납하며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성전개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계 4: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려고 하시는데, 그런데 병신 같은 아간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전쟁해서 얻은 전리품이기에 자기들이 차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성전이 되겠는가, 아니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 아이 성 전투 -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적으로 보시고 그들을 공격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이 성 전투라는 것이다. 아이 성을 칠 때 그들을 숫자가 작다고 아무렇게나 여기다가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칠 때에는 군대 숫자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숫자가 많아서 여리고 성을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 성을 칠 때는 숫자가 많아도 실패한 것을 통해서 말이다.
* 그렇다면 이런 전쟁에서 과연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에게 의(義)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가 있어야만 악을 징벌하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 이라는 것이다. 의로운 분은 하나님밖에 없기에 하나님이 동행할 때만, 여리고 성도, 아이 성도 무너진다는 것이다. - 동행 !!
◈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상처 내는 구원방법이다 !!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달랑 들어서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우리들이 예수님을 칼로 찌른 모습을 유지한 채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이 우리들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때문에 죽었다' 라는 것을, 그 틀을 그대로 고정한 채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 그러니 성도는 십자가를 경험한 이후에 비로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늘 십자가라는 것이다.
* 교회 청년회에서 고아원을 방문한다고 할 때, 선물 봉투나 돈 봉투를 들고 가지만 그러나 인간은 이런 구제와 봉사를 할 줄 아는 자기 자신에게 그만 매료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러한 착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제를 하면서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되는데, 그러나 알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만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는 것을 고정시킨 채, 고아원에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이러한 구제와 착함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은 여리고도 치고 이스라엘도 치면서, 여리고 성은 그냥 박살내어 버리지만, 이스라엘 속에는 '너희들이나 여리고 사람들이나 똑같지만 너희들 때문에 누군가 희생을 당했다' 라는 남겨서 구원을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희생의 흔적이 누구인고 하니까, '기생 라합' 이라는 것이다. 라합도 그냥 라합이 아니고, 기생 라합이라는 것이다.
* 젖먹이의 힘으로 주님의 이름의 권능을 높이는데, 사창가의 매춘부인 라합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는 대표적인 표상으로 등장을 시킨다는 것이다. '세상에 기생도 다 구원을 받는가?' 라고 하도록 말이다.
* 예수님에게 누구들이 따랐는가?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세리와 창기와 절름발이와 병신들이었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십자가의 피로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높이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이스라엘다움' 이라는 것이다.
*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게 되는데, 이렇게 본다면, 여리고 성의 설교를 가장 잘못한 것이 어떤 경우인고 하니, '믿음으로 하면 무너진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찌른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찔러서 나온 기생 라합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이 기생 라합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이 기생 라합이 사라지고 없으니 무슨 '이스라엘다움' 인가?
* 그래서 마태복음 1장 족보를 보면, '라합에게서'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라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긍휼을 보려면, 기생 라합을 보라는 것이다.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을 살렸다는 것이다.
* 다말 - 창세기 38장을 보면, 다말이 자기 시아버지 유다와 성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유다지파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요셉지파만큼이나 축복을 받는데, 사실은 이런 축복은 유다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 집안에 며느리 하나를 잘 봐서 그렇다는 것인데, 다말의 시할아버지인 야곱이 축복을 받게 되는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이 다말이라는 것이다.
* 다말과 유다가 관계를 맺어서 누가 나오는고 하니, 누군가 제치고 나온다는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치고 나온 사람이 바로 '베레스' 인데, 며느리인 다말과 유다 사이는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의 그 내막을 누가 완전히 제대로 보여주었는고 하니,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가 드라마틱하게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 야곱은 하나님의 원수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
* 다시 말해서, 야곱은 하나님의 원수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옛 야곱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이 이미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피조세계에서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뀜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3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옛 이름은 버리고 새 이름을 얻어서 이스라엘이 되었는데, 이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생 라합이라는 것이다. 원래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전담기생이었는데, 이제 이것이 이스라엘로 옮겨져서,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중부전선으로 갔다가, 그 다음이 북부전선, 그리고 남부전선의 순서로 정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갈렙의 땅을 차지함으로 전쟁이 끝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땅의 정복은 중부전선, 북부전선, 남부전선의 순서대로 진행이 되지만, 그러나 사실은 땅을 다 차지한 것은 아니고 산지만 차지한다는 것이다. 평지는 그대로 두고 말이다. 이렇게 되니까 나중에 사사시대에 가면, 평지에 있는 사람들이 산지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지는 이미 정복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 가나안의 이방민족들은 사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전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그래서 점점 공포심이 조성이 되는데, 그래서 기가 죽을 놈은 미리 기가 죽어서 화친하고 항복을 하면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 여기서 여호수아 10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수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수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수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수 10:19) 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 붙이시매 전쟁 -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족속과 싸울 때, 태양이 머무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붙이시매 전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가나안 족속을 칠 수가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의(義)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것과 기생 라합과 같은 자가 이스라엘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은 다 같은 말인데,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쪽은 의가 없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쪽이 되고, 이쪽은 의가 있기에 공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붙이시매 전쟁이라는 것이다.
* 다시 한번 반복하면, 처음에 유월절을 생각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비석을 세우고,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그리고 마지막에 갈렙의 땅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누가 하는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산봉우리와 골짜기처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올라갈 때는 여호와의 이름이 개입되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기생 라합이라든지, 아간을 쳐서 돌무덤을 만드는 경우라든지, 자꾸만 이렇게 가시로 찌르는 듯한, 그러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올라가고, 또 내려오고 한다는 것이다.
* 결국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나름대로 일을 해 가신다는 것이다.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든지, 아니면 온갖 미친 짓거리를 다 해도 주의 일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욕심으로 부부싸움을 해도 주께 감사하라는 것이지, 부부싸움을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 여호수아 10장에서, 태양이 중천에 떠서 머무른 사건을 한번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태양은 과거에는 창조된 아담 중심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중심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태양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니까, 지금 그 이름이 이스라엘 안에 있으니 당연하다는 것이다.
* 우리가 부부싸움을 해도 주의 일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주님은 주의 이름 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과 더불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중심이 우리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라는 것이다.
*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상담을 하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 아주머니 : 목사님, 남편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매일같이 두드려 팹니다. 이혼을 할까요, 말까요?
* 목사 : 그래요. 그래도 주님의 일은 변함없이 진행됩니다.
* 아주머니 : 그래도 목사님, 제 남편이 너무합니다.
* 목사 : '그래도'가 아니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면 됩니다.
* 너무했나? 다시 여호수아서로 되돌아와서, 지금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있는데, 이스라엘은 싸움을 계속해서 하고 싶은가, 아닌가? 'NO'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무 시간이 끝났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이 여호수아의 일이 아니고,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하나님 이름의 일이니까, 즉, 태양은 하나님 이름 편이니까, 계속 태양은 중천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말이다. 하나님이 붙여주셨으니까 박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사건을 그대로 조금 전의 한 아주머니의 사건에 그대로 집어넣어서, 이런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하면 주무실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모두다 얻어맞으면서 살아가니까 말이다. 그 아주머니는 얻어맞으면서도 눈은 주님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얻어맞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차라리 더 맞자!'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제대로 된 상담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지 않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질문 - 주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주님의 삶의 본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까?
* 답변 - 아닙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의 이름만이 하실 수가 있는 일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들은 '얻어맞아도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담을 받으면 한가지 더 첨가하는데, '같이 때려 패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드려 패도 구원을 받기에 말이다. 이 말은 남편이 술을 먹고 와서 두들겨 패면 경찰에 신고해서 감옥에 집어넣으면 되는데, 그러면 왜 그렇게 못하는가? 남편이 없으면 자기 손해이니까 말이다.
* 그러니 이런 상담을 해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중심으로 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을 신고해서 감옥에 넣어서, 비록 독한 여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자기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영생을 얻으면 된다는 것이다.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주머니들이 너무나도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안이 저절로 잘 된다는 것이다. 여자가 스트레스를 안 받고 할 말을 다 하니, 가정에 저절로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 스트레스여 안녕 !!
* 다시 말해서, 태양이 중천에 머무른 것은, 흔히 목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 이름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데, 사실 기브온 족속의 고통도 엄청나지만 이스라엘도 역시 피곤하다는 것이다. 이제 싸움을 그만하고 쉬어야 하는데, 낮이 훤하니까 싸우고 또 싸워야 하니까 말이다.
* 이런 본문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는고 하니, '여러분 가정에 어떤 일이 있을 때, 내 중심으로 보지를 말고 주님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꾸 주님은 내 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 10장을 한번 보자.
(수 10:24)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수 10:25)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 여호수아가 자기의 군장들에게 적의 왕들을 죽이고 매달고 목을 밟으라고 하는데, 그러면 과거에는 왜 그렇게 못하였는가? 왜 이렇게 왕들을 짓밟고 죽이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자기 자신을 짓밟고 죽이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적의 왕들의 목을 짓밟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을 짓밟는 것이다 !!
*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왜 술 먹고 때리는 남편을 고발하지 못하는가? 여자가 자기가 자기의 목을 밟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과 자기 용기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 전도를 하는데, 부끄러워서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밟음이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의 자존심을 버린다면 용기가 생기는데, 즉, 어떤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기면 모든 것을 다 이긴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밟고 난 뒤에 일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 복종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사무엘상 15장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사울 왕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얻은 살찐 양과 소들을 살려두는데, 그것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노획물들을 이용해서 전쟁을 잘하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왜 사무엘을 통해서 책망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은 사울이 가지고 있는 노획물이나 장비들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없애버리라고 했던 것이다.
* 그런데 이 사실을 누가 믿지를 않는가? 사울 왕이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사울 왕이여, 왜 양과 소를 다 죽이지 않았습니까?' 라는 사무엘의 말은 바꾸어 보면, '사울 왕이여, 당신은 왜 당신 자신의 목을 밟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사무엘이 말하는 것은, '사울 당신은 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당신 자신만을 앞세우고, 자신만을 의지하는가? 왜 자기 자신에게 자꾸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 사무엘상 14장에서,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친구가 블레셋에게 달려들어서 싸움이 붙자, 요나단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수(數)에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요나단은 자기자신이 먼저 하나님에게 완전히 밟혔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를 따라오되, 그냥 오지를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에 자기를 매어 달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여기서 십자가를 진디는 것을, '내가 알아서 진다' 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공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러한 뜻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조차도 말이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그런 존재가 못됩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라는 것을 입에 달고서 주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 마태복음 19장에서, 한 부자청년이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 과연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모든 재산을 팔고서 자기를 따르라고 했는데, 그래서 부자청년이 근심하고서 돌아가는데, 사실 정작 놀란 것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 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누가 과연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 목사들이 대부분이 오해를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구원이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 교인 :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 목사 :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교인 : 아는데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 목사 :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교인 : 그것은 아는데요, 예수님께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 목사 :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교인 : 아는데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 목사 :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이러한 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음이 없어서 믿지를 않고, 그런 조건을 자기 쪽에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모독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바보이지만, 인간은 똑똑하다' 라는 것이다.
* 그래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시키고, 명령을 해서 교회가 유지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하는가? ① 인간 ② 하나님
*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죄인이 한다고 하면, 그 죄인이 주체가 되기에 안 되고, 죄인을 통해서 한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 자꾸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은 못합니다' 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목사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에, 교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으니까,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말이다.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그러나 과연 야고보서의 내용이 그런 의미인가? 이 5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야가 기도를 하는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까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이 신명기에 기록이 된 말씀에 어긋나니까 '주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이다. 벌을 받을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이 오도록 기도하니까,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목사의 모친이 병에서 낫는다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데 뭘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갖다 붙이느냐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아프든지, 죽든지, 살든지, 주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이 목사의 모친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지 않는가? 그런데 왜 안 믿는지, 믿음이 없어서 인가?
◈ 오늘날 한국교회 특징은? -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반드시 인간이 들어가야 된다 !!
*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는가? 교회의 지성소 뒤 구석에 계시는데, 그곳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나주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마치 뒷방 늙은이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한국교회 교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한번 도청해보자.
* 교인들 : 하나님, 저희들이 왔습니다.
* 하나님 : 야야, 너그들 왔나? 안 와도 되는데, 바쁜데 온다고 수고했데이.
* 교인들 :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십일조를 가지고 왔습니다.
* 하나님 : 그래, 돈을 고 수고를 많이 했데이. 쓸데도 많을 건데, 고맙데이.
* 교인들 : 아닙니다. 그런데 방이 왜 이렇게 차갑습니까? 여보, 여기 보일러 한대 넣어드려야겠어요.
* 하나님 : 아이다. 견딜만하데이. 콜록 콜록...
* 교인들 : 하나님, 계셔요. 일주일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 함께 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그냥 방 뒤 구석에 갇혀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결코 주의 일이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일종의 '스폰서' 라는 것이다. 내가 일을 알아서 하는데, 하나님이 조금만 뒤에서 밀어주면, 일을 잘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만 시원하게 잘 되면, 그때에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교회에 바치겠다는 것이다. 더 잘되면 교회당 하나도 얼마든지 지어주겠다는 것이다. - 아낌이 바치련다 !!
* 이것을 뭐라고 부를 수가 있는고 하니까, 하나의 '흥정' 이고, '거래'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능을 전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 21장을 한번 보자.
(수 21: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이 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함부로 일을 하지 않으시고, '때가 되매'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때가 되매'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 동생들 : 형님, 이 촌구석에 계시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요?
* 예수님 : 아직, 때가 안 되었다.
* 동생들 : 때는 무슨 때입니까? 그냥 가서 얼굴이나 한번 보이면 되지요.
* 예수님 : 아니다. 아직, 내 때가 안 되었다.
* 이 '때'를 강조하는 것은, 모든 것은 말씀 자체가 손에 쥐고서, 말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라, 말씀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로버트 오툴의 [루가복음의 통일성] 참고
* 열왕기상 17장도 보면, 그 당시 엘리야 시대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엘리야가 한 과부에게만 갔다고 되어 있는데,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어떤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 여호수아서 총정리 !!
* 지금까지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여리고 성 사건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여리고를 친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함께 치셨다는 것이다. 둘 다 버림을 받아야만 되지만, 하나는 긍휼을 입고 다른 하나는 입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이 긍휼을 입은 증거가 바로 기생 라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간은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 전쟁에서 모든 전리품은 하나님의 것인데, 아간은 그만 자기 몫으로 챙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리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가 했다는 것이다.
* 십일조가 바로 이런 것을 보여주는데, 이 십일조를 해석할 때는 반드시 멜기세덱과 소돔 왕을 언급해야 되는데, 소돔 왕은 아브라함이 이겼다고 하는데 비해,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주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받는 쪽이 드리는 쪽을 축복해준다' 라는 것이다.
* 처음에 멜기세덱은 누구에게 축복을 했는가? 아브라함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복을 레위지파에게 주고 말이다. 그리고 레위지파는 백성들에게 복을 주고 말이다. 그러니 십일조는 복이 어떤 계통으로 내려오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계통에 십일조가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식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누가 받는가? 십일조란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것인데,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맏물의 개념인데, 맏물과 다른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100%중에서 10%가 맏물이 아니고, 맏물은 서열상 장자개념인데, 이 맏물을 드림으로 다른 것이 복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받는 분은 하나님이고, 그 내용물은 맏물인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십일조의 완성이고, 그 복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받는 쪽이 내는 쪽을 축복하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십일조이기에, 십일조를 받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만 복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십일조를 해야 됩니까?' 라고 하면, 십일조가 미완성되는 것이고, 만약에 '안 해도 됩니다' 라고 하면, 십일조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복을 안 받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십일조 안에 계셔요'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십일조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더 이상 무엇을 바치고, 안 바치고 할 문제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잠잘 침대를 하나를 사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는 것이다. 극동방송에서 이러한 소리를 했더니만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자기 집에 침대를 넣는 것이 어떻게 주의 일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지, 어떻게 자기의 것이 되는가? 아니 그런가?
◈ 복의 통로 : 멜기세덱 → 아브라함 → 레위지파 → 이스라엘 백성들
* 이 복의 계통이 하나하나 내려올 때마다 십일조를 주고받고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십일조가 예수 안에 있는데, 예수님이 십일조이고, 예수님으로 십일조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십일조를 안 내겠다고 하는 것은, 십일조 밖에 있으면서 복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기에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십일조를 미완성으로 보기에 역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으면 복을 받게 되어있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침대 하나를 구입해도 주님의 것이기에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다. 무익한 종이 이렇게 사용하게 되니까 말이다.
* 이 문제는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해결이 되는데, 한번 보자.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 사도바울의 말이라는 것이다. 이단 같은 이근호의 말이 아니고 말이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진짜 하나님은 무엇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일조가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은 것이다.
* 하나님 : 너는 내가 준 것 인에 들어있는가?
* 성도 : 예, 들어있습니다.
* 하나님 : 그렇다면, 내가 복 주께, 복 주께, 복 주께 !!
* 성도 : 감사합니다.
* 하나님 : 네가 쓰고 있는 침대는 누구 것인고?
* 성도 : 예, 주님의 것입니다.
* 하나님 : 그렇다면, 내가 복 주께! 아이쿠, 귀여운 내 새끼야 !!
* 성도 : 감사합니다.
* 그러니 성도는 십일조 안에 늘 들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화장실에 가든지, 일하러 가든지, 테니스를 치러가든지 말이다. 항상 주님이 주신 십일조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무엇을 바친다고 해서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마지막에 구원받을 때에 주님이 물으시는 것은, '네가 무엇을 바쳤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직도 내가 준 것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사랑이 있다면, 그분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뽑힌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들이 심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으면 열매를 맺지만, 그러나 떨어지면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해서 세우신다는 것이다.
◈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점은? ① 받으신다 ② 주신다
* 유치원생도 다 아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면 이단시하니까, 이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이다.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이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를 않는다고 해도, 그런데 소위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성경말씀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성령인가? 악령이면 몰라도 말이다.
* 정말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 같으면, 말씀과 맞아야 하지를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맞지도 않으면서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 쪽에서는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누구 말이 맞는가?
* 사실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하지 않으면 목회가 안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과 맞지 않다면 말이다. 무엇이든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지를 말고, '무엇이 옳은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만이 제대로 된 현실이다 !!
* 이런 주장을 하면, '말은 쉽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현실인가, 아니면 이상인가? 성경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서만 제대로 현실을 볼 수가 있지를 않는가? 한 마디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의 이야기를 하니까, 이런 현상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 이것이 여호수아서에도 나오는데, 23장을 한번 보자.
(수 23: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 이것은 너희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제 아무리 개판을 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밀어 부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사사기 2장에도 그대로 있는데, 다시 말해서, 성경은 순전히 하나님 입장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자기편이라는 것이다. 자기 이름 편이라는 것이다.
* 시편 23편을 한번 보자.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구원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를 해주셔서 좋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기 이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개판을 치면 칠수록 너희들만 손해라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너희들 하나님을 안 믿지?' 라고 하니까, '아닙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한 장만 넘겨보면 당장 들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미리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계속해서 우기는가? 그것은 여호수아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반복을 해야 하는데, 반복도 하지 않고 말이다. 홍해가 갈라진 것을 부모들이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다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냥 출렁이는 파도만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들이 아무리 말해도, 지금 바다가 그대로 있으니 어떻게 그 사실을 믿느냐는 것이다. 한번 갈라지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기적을 통해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기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반복하라는 것이다. 이 유월절 사건을 반복하면서, 그래서 후손들이 이것을 물을 때, '야야,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단다' 라고 하는 것이다. 유월절을 반복하면, 홍해사건이 반복이 안 되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었는데, 이것을 다시 반복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반복하셨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위를 걷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가 기적이다' 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반복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유월절 사건의 반복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다 !!
* 미친갱이 전가화가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는 죽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초대교회는 성령을 받아서 기적과 방언과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안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전가화를 불러서 뭐라고 해야 하는가? '전가화씨, 이리와 보이소. 예수님께서 무엇을 표적이라고 했습니까?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서, 그 표적은 바로 십자가임을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지, 병 고치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 병 고침을 받고 안 믿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10명의 소경이 고침을 받았지만, 몇 명이 돌아왔는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자가 한 명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가? 또 고쳐달라고 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여, 믿나이다' 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과거에는 기도를 하니까 좋은 것이 나왔는데, 그런데 지금은 왜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십자가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인 것이다.
* 그런데 전가화와 같은 무식한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초대교회에는 병을 고쳤는데, 왜 지금은 못하느냐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해서 이들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그렇다면 병을 고친다고 하면서 왜 물위로는 걷지를 않는가? 당연히 물위로도 걸어야 하지 않는가?
* 그러니 이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비겁한가? 뭔가 골라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사기' 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유월절의 반복이고, 십자가의 반복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사기에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