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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께서 사바띠 인근 제타 숲에 있는 아나싸삥디까 동산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당시 부처님께서는 온당한 대우... 즉 존숭 받았으며,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적절한 보살핌이 제공되었다. 승단 역시 그랬다.
반면 다른 교파 유행자들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마을과 숲에서 비구를 보면 거칠고 무례한 말로 괴롭혔다.
여러 비구들이 이와 같은 상황을 부처님께 하소연하자,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홀로 혹은 여러 사람 사이에서 유쾌하거나 불쾌할 때,
직접적 원인은 자신 혹은 다른 이에게서 찾지 못한다.
내부결정을 조건으로, 드러난 접촉에 다시 접촉하니,
내부결정을 여의면 접촉에 접촉할 그 무엇도 여읜다.
* 제목 : sakkara : '존중에 따른 환대'를 의미한다.
*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적절한 보살핌 : 빨리어본 구절에서는 의복과 음식, 의약품등 여러가지가 구체적으로 거론되는데, [Udana 01-10]에서와 같이 간단히 표현하였다. 특별한 필요가 있지 않으면, 읽는 이를 고려하여 계속 이와 같이 번역할 생각이다.
* 승단 : 출가한 부처님 제자를 총칭한 표현이다. 즉 사문인 부처님 제자를 총칭한다.
* 유행자 : 여기서의 유행자는 '일시적으로 가정을 떠나 수행하는 사람'과 '(출가한) 사문'을 총칭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특히 히말라야 인근 인도 지역에서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 숲에서 생활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 비구 : 사문 중 부처님의 제자를 칭하는 표현이다.
* 하소연하자 : 빨리어본을 보면 앞에, 서술된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여 부처님께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단순히 '사실의 고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소연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경>의 내용은 게송을 포함하여 번역에서의 어려움은 없다. 본문의 이해에도 어려운 점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게송의 이해가 좀 어려운 편이다.
게송의 구절을 살펴 보고, 게송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게송의 빨리어 구절은 다음과 같다. 특히 <접촉>이라는 표현에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첫째 구절 : game aranne sukhadukkhaphuttho : 홀로 혹은 여러 사람 사이에서 유쾌하거나 불쾌할 때
직역하면... [마을이나 숲에서 행복과 괴로움에 접촉될 때]이다. sukha_dukkha_phuttho에서 phuttho는 phusati의 과거분사로 '접촉된, 이르른, 획득한'이라는 뜻이다.
행복과 괴로움에 <접촉>된다... 상당히 재밌는 표현이다. 게송의 이해에 필요한 표현이니 기억해 두자.
번역에서는... 읽는 이가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마을'은 '타인과 함께 하는 상태', '숲'은 '홀로 있는 상태'로 해석하였다. '행복과 괴로움에 접촉' 역시 일단 읽는 이에게 바로 와닿도록 단순히 '유쾌하거나 불쾌할 때'라고 하였다.
둘째 구절 : nevattato no parato dahetha : 직접적 원인은 자신 혹은 다른 이에게서 찾지 못한다
직역하면... [자신이나 타인이 주어진 원인은 아니다]는 뜻으로 별 어려움이 없다. '직접적'이라는 표현은, 'da'의 어감도 살리면서, 게송 이해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셋째 구절 : phusanti phassa upadhim paticca : 내부결정을 조건으로 드러난 접촉에, 다시 접촉하니
직역하면... [내부결정(12연기의 '취')을 조건으로(연하여) 접촉에 접촉한다]이다. upadhi는 '내부결정(취)'으로 재생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위에서 '<접촉>을 <접촉>한다'는 표현이 좀 이상할 수 있다. 물론 phusati는 '접촉한다'는 뜻 이외에 '획득한다, 이른다(도달한다)'는 뜻도 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뜻은 '접촉'이다. '접촉'한다는 것이 도달했다는 것이고, 도달했다는 것은 획득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획득하다' 혹은 '도달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이 여럿 있다. 그런데 굳이 'phusanti phassa'라고 하여, 사실상 동일한 뜻을 가진 말을 두번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네번째 구절 'phuseyyum phassa'에서도 반복된다. 이러한 점은 (하이브리드)산스크리트어본도 동일하다.
만약 '<접촉>을 <접촉>한다'라는 뜻이 아니라면, 굳이 이와 같이 표현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드러난 접촉'에 다시 '접촉'하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여기서도 일단 <접촉>이란 표현이 나왔음을 기억해 두고, 마지막 구절을 보자.
넷째 구절 : nirupadhim kena phuseyyum phassa : 내부결정을 여의면 접촉에 접촉할 그 무엇도 여읜다.
직역하면... [내부결정이 없다면 접촉에 접촉할 무엇이 있겠는가?]이다. 즉 [내부결정이 없다면 접촉에 접촉할 무엇도 없다]는 뜻이다. nir_upadhi(m)은 ['내부결정(12연기의 취)'이 없다]는 뜻인데, 여러 차례 밝혔듯 '여의다'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여의다'는 '무애'라는 뜻에 가깝다. 'phuseyyum'는 '접촉이 허용되다(접촉할 수 있다)'이다.
이제 이해를 위해 게송의 내용을 살펴 볼텐데, 먼저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경>의 본문을 보면... 다른 교파의 유행자들이 비구에게 거칠고 무례한 말로 괴롭혔지만, 동시에 비구들 역시 부처님께 고자질을 하고 있다. 좋은 말로는 하소연을 하고 있다. 하소연을 하는 비구들 역시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다.
부처님께서는 게송에서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 언급함으로써, 비구들에게 위와 같은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즉 다른 교파 유행자의 원망과 비구들의 원망 모두 다른 교파 유행자나 비구들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밝히고 계시다. 이러한 점은 불교의 특징이다. 불교는 넘 탓만 하지도 않지만, 자기 탓만 하지도 않는다. '무아'이기 때문이다. 자기 탓만 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불교는 어설픈 도덕이 아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이쁘다'는 말이 있다. 나도 불자를 보면, 없던 애정도 솟아난다. 이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다른 교파의 유행자만 비난하지 않으신다. 비구와 다른 교파의 유행자를 동등하게 보고 계시며, 비구와 다른 교파 유행자 모두에게 유익한 법을 말씀하신다.
누군가 비난을 받을 때... '이름'을 떠나 전후과정을 모두 살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 자식이냐, 자신과 동일한 신념을 가진 자인가]를 분별하더라도, 그 이름은 그만큼의 알아차림과 함께 할 뿐이라는 점, 상황은 또 다른 알아차림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자세, 즉 <'법(드러난 상태)'을 보는 자세>를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억하려면 보고 있어야 한다. 보고 있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다. 보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며, 기억하는 것이 보는 것이다.
게송은 첫번째 구절에서 <행복한 상태와 괴로운 상태에의 접촉>을 언급하고 있다. 대단히 불교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당연히 접촉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접촉이 없으면 행복한 줄도 모르고 괴로운 줄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의 산냐에서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음'은 여섯가지 감각기관 중 하나이다. 행복함과 괴로움은 내적 상태이다. 그러한 내적 상태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의 알아차림과 함께 하기에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알아차림 즉 감지작용인 식온은 대상과 감각기관의 접촉을 조건으로 있다.
법을 보면 법을 기억하며, 법을 기억하면 법을 본다. 법을 볼 수 없으면 법을 기억할 수 없으며, 법을 기억할 수 없으면 법을 볼 수가 없다. 산냐는 대단히 미세하여... 제대로 감지하기가 어렵다. 가장 거친 감지작용 중 하나가 바로 느낌(수온)을 감지하는 것이다. 느낌은 감지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수행에서는 느낌을 감지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한 상태와 괴로운 상태에의 접촉'은 일차적으로 느낌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유쾌한 느낌이 일어날 때 행복하고,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 괴롭고, 유쾌한 것도 아니고 유쾌하지 않은 것도 아닌 느낌이 일어날 때 행복하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다. 원론적으로 이러한 느낌은 바로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의 대상이다. 그리고 대상과 감각기관의 접촉이 있으면 그에 상응한 식온이 있다. 그리하여 행복한 상태와 괴로운 상태가 드러난다.
연기는 동시에 성립하고 동시에 해체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이름한다.
우리가 과거라고 이름하는 것은 우리가 보지 않는 것을 이름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라고 이름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보는 것을 과거라 이름할 때를 이름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접촉이 없다면 그에 상응한 식온이 없다. 행복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면 접촉은 과거인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주제이지만, 현재라는 이름은 과거라는 이름과 미래라는 이름이 함께 하여 있는 것이다. 예로... 망막을 때리는 빛은 현재이지만, 그 빛이 담은 정보는 과거이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가 없다. 함께 하기에 있다.
이름은 대단히 미묘한 작용이다. 시간도 이름이다. 뭐... 이런 것을 굳이 여기서 알 필요는 없다... 관심이 있으면 화엄을 공부해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엄의 논의는 이곳의 주제는 아니다.
논지로 돌아 가서... 예로... 매력적인 아가씨 혹은 사나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해 보자. 자꾸 보고 싶다. 유쾌한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력적인 아가씨(사나이)'라는 형상은 어떻게 있는가? 눈으로 쏟아지는 빛무리들 속에서 형상을 발견하기에 있다. 빛의 폭포에 산냐가 개입하여 형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산냐는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빛무리와 눈의 접촉 그리고 안식이 있고, 그에 터잡아 산냐와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의 접촉으로 의식이 있기에 형상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산냐로 드러난 '섹시한 아가씨(사나이)'라는 형상이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다시 <접촉>하여 안식이라는 감지작용이 있다.
이처럼 <접촉의 접촉>으로 '또 다시' 느낌이 일어난다. [또 다시]라고 함은... <접촉의 접촉>은 물론 <접촉>에서도 일어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접촉>에서는 '유쾌하지도 않고 유쾌하지 않은 것도 아닌 느낌'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쾌하지도 않고 유쾌하지 않은 것도 아닌 느낌'도 느낌이지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밝은 빛은 '유쾌하지 않은 느낌'을 일으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접촉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는 느낌은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의 대상이다. 대상인 느낌과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이 <접촉>하여 드러나게 된다.
위에서 안식이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안식이 의식이 되지는 않지만, 안식은 의식등의 영향을 받는다. 바로 연기에 따라 드러나기 때문이다. 연하여 함께 일어난다. 그것은 괴로움이라는 거대한 덩어리의 형성이다. 바로 고성제다.
대승의 교학은 < [매력적 형상-눈-안식]에 <접촉>하여 [느낌-마음-의식]이 있다 >고 이름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대승의 교학은 연기가 연기하는 것을 연기와 연기의 접촉으로 본다. 접촉을 감각기관에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과 저것이 접촉하기에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덩어리로만 드러나기에 접촉은 무조건 따른다. 그래서 대승의 교학은 '접촉'을 별도로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연기'라는 언명으로만 곧잘 전개된다.
대승의 교학이 헐렁하지 않다. 대단히 정밀하다. 대승 교학에서 위와 같이 아는 것은 기본이다. 상좌를 함유하지 않고 화엄을 설명할 수 없다. 상좌의 교학을 모르면 대승의 교학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승의 교학을 공부하다 보면, 상좌의 교학은 저절로 알게 된다. 상좌불교 공부 좀 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위와 같이 분별하지 못한다. 지식으로만 채워서 그렇다. 지식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볼 수 없으면 모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불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학을 공부할 때, 머리로 이해하려고만 하면 틀리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교학에 따라 마음을 내어야 볼 수 있고, 봐야 이해를 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신비하고 대단한 '견성'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본다는 것이다. 화엄의 이치에 따라 부분이 일체를 담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제한적으로나마 보면, 견성이 아니라 견성 할애비라도 이치는 다르지 않다. 아라한이 아니라 우아라한이라도 이치는 다르지 않다. 바로 [한 맛]이라는 말이며 [sam : 평등함]이라는 뜻이다.
누차 강조했지만... 성취 같은 것에 집착해서는 실제로 아는 것 하나도 없는 상태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을 보면 그만큼의 어리석음은 알고 죽을 것이다.
이제 게송에서 사용된 '접촉의 접촉'이라는 표현의 일차적 의미는 이해할 수 있다. 접촉은 하나가 아니다. 접촉은 크게 여섯가지 카테고리가 있다. 감각기관이 여섯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가테고리 안에는 접촉이라 이름할 것이 한량 없다.
<'접촉의 접촉'이라는 표현 즉 이름>이... '접촉'이라는 이름을 자성적으로 파악할 때는... 기괴해 보인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면, 즉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보면, 당연한 이름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보는 무엇'과 함께 한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무엇'과 함께 한다. 신심을 일으킨 무엇만이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할 수 있다. 마음을 내어야 한다. 교학을 공부하는 것도 교학에 따라 마음을 내어야 이해할 수 있다.
유쾌하거나 불쾌할 때... 유쾌함과 불쾌함은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이 개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는 감각기관과 함께 한 식온은 딱 그만큼의 식온일 뿐이다. 유쾌함과 불쾌함의 직접적 원인을 형상에서 찾을 것인가?
형상이 있어서 접촉의 접촉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과의 접촉에서 형상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다시 '형상과 눈 그리고 안식'에서 그 형상에 따른 느낌이 일어난 것이다. 직접적 원인은 바로 형상을 찾아 내고 찾아 낸 형상에 따른 느낌과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의 접촉을 감지하는 알아차림(의식이라는 범주의 식온)에 있다. 예로... 매력적인 아가씨(사나이)에 대한 느낌은 형상과 눈의 접촉에 따른 안식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게송의 첫번째 구절과 두번째 구절은 위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접촉의 접촉은 어떻게 있게 되는가? 더 나아가 '접촉의 접촉'인 '형상과 눈의 접촉에 따른 안식이라는 연기'에 다시 접촉하는 일은 어떻게 있게 되는가?
바로 '내부결정(12연기의 취)'에 있다. 내부결정을 조건으로 '수용적 간주(12연기의 유)'가 있기 때문이다. 예로... 타인의 느낌을 중시하는가? 타인의 느낌에서 행복과 불행을 직접적으로 느끼는가? 아니지 않은가? 느낌에 대한 수용적 간주가 있기에 그것이 느낌(내적 반응)일 수가 있는 것이다. 수용적 간주는 내부결정을 조건으로 있다. 그러니 내부결정이 직접적 원인인 것이다. 즉 내부결정이 함께 하고 있기에 수용적 간주를 한다.
이것이 게송의 세번째 구절이 의미하는 바이다. 바로 집성제이다.
게송의 세번째 구절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12연기를 순서대로만 생각하면 내부결정(취)은 접촉(촉)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해당 게송에서는 내부결정(취)을 조건으로 접촉(촉)이 있다. 이전의 일이다. 즉 12연기라는 것은 시간적 순서인 것만은 아니다. 단지 연기가 시간을 함유할 뿐이다. 그것은 함께 함이다. 바로 [sam : 함께 함, 평등함]이다. 그리고 [sam]이기에... 시간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면... 시간에 따라 이해하면 된다.
또한 12연기는 고성제이다. 다만 고성제를 논할 때, 일일이 12연기의 정형구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너무 길어지고 논점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12연기의 정형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에 그렇게 설명할 수는 있다.
자... 어쨌든... 유쾌한 느낌과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있을 때... 그 직접적 원인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긴다. 그럼 해결책은 없는가? 있다. 그래서 네번째 구절이 제시된다. 바로 멸성제이다.
그리고 해결책은 간단하다. 게송의 네번째 구절의 내용 대로 직접적 원인인 내부결정을 여의면 된다. 바로 도성제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위의 게송은 사성제를 정형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렵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단지 <마음을 내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영어본의 상당수는 '접촉의 접촉'을 무시하고 있다. 단순히 '접촉이 일어난다, 접촉이 영향을 미친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렇게 번역을 해도 부처님 말씀이며, 부처님 말씀이기에 유익한 점이 있다. 언어라는 것 자체가 기호 체계라기 보다는 상징 체계이며, 부처님 말씀은 원음인데가가, '접촉의 접촉'이란 이름은 '접촉의 일어남' 혹은 '접촉의 영향력'이라 이름할 것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바로 [sam : 평등함]이다.
비판도 하고, 시시비비도 가리고... 뭐도 하고 뭐도 하지만... 부처님 말씀은 원음이라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면 분명히 나름의 유익함이 있다. 어차피... '정정진' 즉 '머무르지 않음'은 옳고 그름을 넘어 간다... 그 무엇에게든 그러하다...
첫댓글 별☆님께서...(위가 아닌 아래 있는) [나의 견해] 게시판에, [Udana 02-05]까지 올리셨는데...건너뛰기도 뭐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 . 사바띠가 자주 나오는데요. 사바띠는, 코살라국의 수도입니다. [Udana 02-02]에서...코살라국의 왕, '빠세나디'라는 이름이 언급된 바도 있습니다. 코살라국은 빠세나디왕이 통치하던 시절, 북인도의 최강국이었습니다. . . 비구들이 받은 환대...솔직히 해당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비구들은, 그들이 제공 받는 보살핌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이었을까... 사실 저는, 부처님 덕분에, 과분한 환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는 것들 말이죠.
주어지는 것들... 주어지면, 누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주어지고, 누린다고 하여...그것이 당연하지만은 않아요.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다...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비구 즉 거지일 수 밖에 없습니다. 뭐...오십보 백보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죠... 그런데 거지로 살다가, 도둑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는 순간...'거지'라는 이름에서 '도둑'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하는 수가 많아요. 스스로에게 당연하기만 한 것은, 더 이상 스스로 누릴 수도 없구요... 환대를 당연시하면, 그 환대를 시기하는 이들조차 원망하게 되죠. 이러한 이치로, '내부결정(취)'을 언급하셨을 거예요.
당연한 것은, 이미 '내부결정(취)'이 있다는 것이고...그러한 조건은, 이내 망각을 부릅니다. 주어진 것을 기억하지 못해요. 기억하지 못하니, 주어진 것을 일차적이나마 온전하게 누릴 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취'와 함께 하는 '유'라는 것은, 스스로가 당연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당연시가, 바로 '나'라고 이름하는 무엇입니다. 바로 그 당연시가, 재생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글에서도 12연기를 언급했지만, 12연기는 그러한 점을 선명히 알려줍니다. 물론 '보는가, 즉 기억하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알려준다고, '당연히' 아는 것은 아니거든요. 당연시, 습관, 기억...증득이 앎이기에, 앎조차 증득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