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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타의 제자인 아난다(阿難陀)가 마등가 여인의 주술에 의해 마귀도에 떨어지려는 것을 부처(석가)의 신통력으로 구해낸다. 그리고 나서 선정의 힘과 백산개다라니의 공덕력을 찬양하고, 이 다라니에 의해 모든 마귀장을 물리치고 선정에 전념하여 여래의 진실한 경지를 얻어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후의 목적임을 밝혔다. 따라서 이 경은 밀교사상이 가미되기는 하였지만 선정이 역설되고 있기 때문에 밀교 쪽보다는 선가에서 환영을 받아 중국에서의 주석가들은 모두 선문의 비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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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각기관과 마음<능엄경>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본래 이름은 <대불정여래밀인 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이다. 아주 긴 이름이다. 대충 경 제목의 뜻을 짚어 보면 '부처님의 이마처럼 높은 비밀의 가르침으로 닦아 증득해서 체달하기 위해 모든 보살들이 만행(萬行)을 닦을 경우 모든 일이 마침내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경'이라는 뜻 정도가 된다. <능엄경>은 우리 중생들이 윤회의 길로 빠져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 그 감각기관의 대상경계, 감각기관이 대상경계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인식(認識) 그리고 지 (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견(見). 식(識)의 7대 원소 등에 잘못 마음을 빼앗긴 데 있다고 한다. 그래서 <능엄경 > 전체에 걸친 주안점은 감각기관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흐름 을 자세히 관찰하고 잡아서 내적으로 해탈을 얻는데 있다. 이 경의 본래 제목에 있는 은밀할 밀(密)자에서 보듯이 <능엄경 >은 밀교에 가까운 경전이지만 감각기관이나 마음을 점검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선가에서도 이 <능엄경>을 중요시 한다. 그래서 이 경의 주석가들은 대부분 선종에 속한 이들이다. 우리 나라의 불교는 전통적으로 선종이 주류를 이루기도 하고 또 선. 정토. 진언. 화엄. 천태 등을 다 포함하는 통불교이기 때문에 <능엄경>을 중요시했다. 이 경이 스님들이 공부하는 정규 교과 과목에도 들어 있다. 조선시대의 세조 대왕은 이 경을 친히 우리말로 번역해서 <능엄경언해> 10권을 간행하기도 했다. <능엄경>이 일본에서는 널리 유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왕이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고 스님들의 기본 이 수과목에 넣은 것이 특이하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능엄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능엄경>을 보려고 하는 이유는 이 경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루어졌든 지에 상관없 이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 영을 중요시해 왔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봉선사 조실로 계시면서 동국대학교 역경원장 일 을 오랫동안 맡으셨던 운허 큰스님께서 <능엄경>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운허 큰스님을 따라서 그 제자인 월운스님 께서도<능엄경>을 자주 설하신다. 또 <능엄경>에 있는 427구의 다라니를 외우면서 능엄주력 수행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 다. <능엄경>의 내용이 좋기는 한데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되어 있지 않고 부처님과 제자간의 대화 내용이 논리적인 생각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엄경>의 내용이 대충 어떤가를 맛보 게 하는 데 그치려고 한다. 내용이 좋다고 생각되는 분은 서점에 서 한글번역본을 구해 읽어보면 되겠다. 아난존자가 공양초청을 받고 돌아오다가 강가에서 마등가라는 처녀에게 물 한 잔을 얻어 마신다. 마등가는 아난존자의 미모와 목소리에 반했다. 집에 돌아와서 주술을 잘 쓰는 어머니에게 부 탁해서 아난존자를 유혹해 가지고 방으로 불러들인다. 그때에 부 처님은 천안으로 아난존자의 위기를 관하시고 능엄주를 외워서 아난을 구해 온다. 아난존자는 마등가의 유혹과 주문에 흘린 것이 자기의 수행력과 도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도를 닦는 방 편을 여쭌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난존자와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법문을 펼친다. 먼저 출가한 이유를 묻자,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뵙고 마음으로 사모해서 출가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네 말은 좋으니라. 그러나 너의 눈과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는 잘못된 생각을 물리칠 수가 없느니라. 마치 어떤 임 금이 적병의 침략을 받았을 때, 군대를 보내어 적병을 토벌하려면 먼저 적병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너로 하여금 생 사에 윤회하게 하는 것은 바로 너의 눈과 마음의 허물이니라. 그 마음과 눈이 어디 있느냐? 부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 아난이 대답하지만 번번이 부처님에 의해서 그 대답이 틀린 것으로 드러난다. 아난은 첫째 마음이 몸 안에 있다. 둘째 몸밖에 있다. 셋째 감각기관 내에 스며 있다. 넷째 내장의 어둔 곳에 있다. 다섯째 생각이 미치는 곳에 있다. 여섯째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 대상경계의 중간에 있다. 일곱째 마음은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차례 대로 대답하지만 그 답변들은 차례대로 부처님에 의해서 논리의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고 만다. 부처님은 보는 성품과 감각기관을 갈라놓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 장님에게 무엇이 보이느냐로 물으면 장님은 새까맣고 어두운 것만 보이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보통 사람은 깜깜한 방에 있으면 어두워 장님처럼 새까만 것만 볼 뿐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때에 등불이 커지고 빛을 얻으면 방안에 있는 것을 모두 보게 된다. 장님도 안구를 이식 받는다면 볼수가 있다. 계속해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깜깜한 곳에 있던 사람이 등불이 켜져서 방에 있는 것을 다 보 게 된다면 등불이 물건을 본다고 하리라. 그러나 만일 등이 보는 것이라면 등이 보는 성품이 있으므로 등이라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등이 보는 것인즉 아난, 너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 러므로 알아라. 등은 능히 빛을 낼지언정 보는 것은 눈이요 등 이 아니며, 눈은 능히 색을 나타낼지언정 보는 성품은 마음이요 눈이 아니리라. 여기서 사람이 밤에 물건을 볼 때 등이 빛을 낸다고 해서보는 것이 아니요, 눈알이 색을 드러낸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요, 보는 것은 마음의 성품이라는 것이다. 감각기관과 마음의 성품 을 분리해 놓는다. 사물을 보는 데 등불의 빛이나 안경이나 감각 기관이 도움을 줄지언정 결정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마음의 성 품뿐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보는 성품과 감각기관을 갈라놓기 위해서 다른 비유 를 드신다. 부처님은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한 후 아난에게 물 으신다. "너는 내 손이 폈다 구부렸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너의 보는 성품이 폈다 구부렸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난은 물론 부처님의 손가락이라고 대답하고 반문한다. "부처님의 손이 움직였을지언정 저는 보는 성품은 고요하다고 말할 것도 없는데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십니 까?' 부처님은 감각기관과 보는 성품을 갈라놓기 위해서 또 다른 비 유를 드셨지만 앞의 두 가지 비유로 충분할 것 같다.비유의 문답 을 끝낸 부처님은 마침내 전하려고 하는 가르침을 말씀하신다. 모든 중생들은 번뇌의 그르친 바 되었나니 번뇌는 항상 흔들리 고 가만 잇지 못하는 것이 마치 손님과 같고 먼지 티끌과 같으니 라. 너희들은 보라. 깜깜한 방에 들불이 켜져서 사람이 물건들 을 보았을 때 등불이 본 것이 아니라 밝은 빛을 냈을 뿐이니라. 눈이 본 것이 아니라 색을 냈을 뿐이니라. 물건을 본 것은 보는 성품이니라. 또 내 손이 움직이었을지언정 아난의 보는 성품이 흔들리지는 아니한 것이니라. 그런데 너희들은 무슨 까닭으로 흔들리는 것을 몸이라 하고 흔들리지 않는 근본 성품을 잃어버리고 바깥 물건을 잘못 알아 내 몸이라 하여 경계에 매달려서 윤회하느냐? 이 말씀을 듣고 아난과 대중들은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 마치 젖을 잃었던 아기가 뜻밖에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되었다고 경 은 전하고 있다. 아난을 마등가의 방에서 구해낸 부처님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기관이나 그 대상을 마음의 성품으로부터 분리시키려 고 노력하였다. 등불 아래 물건을 본다고 해서 등불이나 눈이 보 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보는 성품이 본다고 한다. 부처님의 손 이 움직여도 아난존자 마음의 보는 성품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다. 이렇게 감각기관과 마음의 성품을 갈라놓는 이유는 우리에 게 두 가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첫째는 우리가 윤회의 세계 에서 헤매는 이유가 감각기간이나 그 대상경계 같은, 내 것이 아 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한 데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밖으로부 터 궁극적인 행복이나 평화를 얻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 감각기관의 본능에 맞춰지는 것을 좋아한 다. 감각기관이 좋아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학교에 들 어가려고 하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 하고 좋은 혼인상대를 얻으 려 하고 많은 돈을 벌려고 한다. 그러나 이 <능엄경>에서의 부 처님은 그 감각기간들이 저 등불과 같이 내 마음의 성품이 아니 라고 하셨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유혹경계들은 여섯 도둑이라고 하는데 그것의 비위를 맞추는 데다 행복을 걸면 도적 을 아들로 잘 못 알고 그 도적에게 일생을 맡기는 것과 같게 된 다는 것이다.
2. 변하지 않는 성품우리의 현실생활아 파도처럼 움직일 때 아무리 바람이 불고 파 도가 치더라도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참마음에 대해서 <능 엄경>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우리는 큰스님네의 상단법문 자리 에 참석할 때마다 참마음에 대해서 듣곤 한다. 그런데 그 참마음 이 보통의 것이 아니라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까지 묘사될 때 당 황하게 된다. 우리는 구름으로 생사를 비유하는 조사스님네의 글 귀를 다비식을 할 때마다 듣는다. 난다고 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모이는 것이요. 죽는다고 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 뜬구름 자체에는 실다움이 없으니 생사의 오고감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물건이 항상 스스로 드러나 있으니 그것은 생사를 뛰어넘는 것이다. 여기서 생사를 뛰어넘는 한 물건은 무상. 무아. 공의 원칙을 벗 어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어떤 말씀이나 사상도 공사상과 일치할 수 없으면 그것은 불교적인 사상이 아니 다. <능엄경>의 참마음이 큰스님네의 상단법문에 나오는 참마음 그리고 위의 글귀에 나오는 생사를 뛰어넘는 한 물건이 공사상 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파사익왕이 부처님을 만나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길을 여 쭌다. 그러자 부처님은 죽어 본 적도 없는데 왜 죽는 길을 걱정 하느냐고 물음으로써 파사익왕의 마음을 떠본다. 그러자 왕이 대 답한다. 부처님이시여, 무상하게 변천하는 몸이 비록 없어져 보지는 않 았으나 불이 스러져 재가되듯이 점점 늙어 감을 봅니다. 스무 살 때를 젊었다고 하지마는 열 살보다는 늙었고 서른 살 때는 또 스무 살보다 늙었습니다. 지금은 예순 두 살입니다만 십 년 전은 훨씬 건강했습니다. 그 동안 변하는 것을 우선 십 년씩 잡 아 말하였지만 자세하게 생각하오면 어찌 십 년 이십 년뿐이오리 까. 실로는 해마다 늙었으며 또 어찌 해마다 뿐이오리까. 달마 다 날마다 달라졌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잠깐이라도 머물러 있 지 아니했사오니 이 몸이 필경에 없어질 줄 아옵니다. 파사익왕이 정말 진지하게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하자 부처님 은 없어지는 몸 가운데에 없어지지 않는 성품을 보여 주겠다고 하신다. 세 살 때 보던 강과 예순 두 살 때 보던 강이 차이가 없 다는 말을 이끌어 낸 부처님은 변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다. 대왕은 늙었지만 강을 보는 정기는 늙지 않았으니 늙지 않는 것 은 변치 아니할 것이며 변하는 것은 없어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 은 오고감이 없을 것이다. 이 몸은 죽더라도 그 보는 정기는 없 어질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외도들이 말하는바, 죽은 뒤에는 아 주 없어진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까? 그 대회를 듣고 있던 아난존자가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보고 듣는 성품이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저희들 에게는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감각기관에게 희롱 당한다고 말씀 하시나이까? 아난존자의 질문은 보는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변하지 않 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한데 그것이 어떻게 버려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세상의 인연법에 의해서 나타 나는 무상한 것들이 모두 참마음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몸. 마 음. 허공. 강산 등이 모두 묘하고 밝은 참마음 가운데 잇는 것이 라고 한다. 그러나 아난존자의 머리는 아직도 확연하지 않다. 항 상 한 참마음이 있고 그 참마음에 의해서 일체만물이 생겨난다 는 말은 알아듣겠다고 한다. 참마음에 의해서 일체만물이 생겨난 다는 말은 마음이 백지상태의 자연에 개념과 이름과 가치 등을 붙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참마음이 우리들 각자의 것이라는 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마음은 다 거짓의 것, 없어져 야 할 것이데 어째서 그 참마음은 나에게 항상 있는 나의 것이냐 는 의문이다. 부처님이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대답하신다. 아난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나타난 인연이 있느니라. 햇빛은 해의 인연, 어둠은 구름의 인연, 통하는 것은 틈의 인연을 가지 고 있느니라. 그러나 이러한 모양을 보는 ,이 참마음의 성품은 아무런 인연이 없느니라. 밝고 어두운 것, 통하는 것과 막힌 것 은 각자 차별이 있지만 참마음은 차별이 없느니라. 파별 있는 것 은 대상경계이거니와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모난 그릇 속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것과 같나니 모난 그릇 속에 서 보는 모난 허공은 결정적으로 모난 허공이 아니니라. 똑같은 허공을 둥근 그릇에서는 둥글게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릇이 모나고 둥글지언정 허공은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모든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저의 본 성품을 잘못 알아서 물건인 양 여기면서 본마음을 잃어버리고 물건의 지배를 받는 탓으로 그 가운데서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거니와 만 일 물건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여래와 같이 마음이 뚜렷하고 밝 아서 바로 이 자리에 시방세계를 다 넣을 수 있을 것이니라. 아난아, 여기서 밥을 지을 때에 손에 돋보기를 들고 햇빛에 비 치어 불을 내나니, 이 불이 돋보기에서 나느냐, 쑥에서 생기느 냐, 해에서 오느냐. 돋보기는 손에 들렸고 해는 하늘에 떴고 쑥 은 땅에 난 것인데 불은 어디서 온 것이냐? 해와 돋보기는 멀어 서 화합할 수 없고 불이 난데없이 저절로 생기지도 아니할 것이 니라. 아난아, 여래장 가운데 불의성품을 가진 참된 공과 공의 성품 을 가진 참된 불이 맑고 깨끗하고 본래 그러하여 법계에 가득하 여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다르고 아는바, 그 격에 맞추어서 나 타나는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한 곳에 돋보기를 들면 한 곳 에 불이 나고 온 법계에서 돋보기를 들면 온 볍계에 불이 났느니 라. 불은 세상에 가득한 것이니 어찌 나는 곳이 따로 있겠느냐? 부처님은 생멸과 차별이 없는 참마음을 허공과 불에 비유한다. 허공을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보이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 면 네모나게 보이지만 실제로 허공이 둥글거나 네모나지 않듯이 참성품이 중생의 그릇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생기지도 없어지지 도 않고 항상 그대로 있다고 한다. 허공의 비유에서는 참마음이 중생의 미혹 때문에 차별 있게 보인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부처님은 또 참마음이 이 세상에 항상 꽉 차 있는 것을 불로 비 유한다. 불이 어는 곳으로부터 와야만 잇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 피기만 하면 불이 나타나므로 불은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에 상관 없이 세상에 항상 하고 꽉 차 있다. 참마음의 서품도 불과 마찬 가지라고 한다. 참마음은 이 세상에 꽉 차 있어서 누구든지 그것 을 개발하기만 하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앞에서 아난존자는 참마음이 있는 것까지는 인정했지만 참마음 이 바로 내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 처님이 말하는 이 참마음은 누가 특별히 소유하고 안하고를 말 할 것이 없다. 불을 피우면 불이 나오듯이, 참성품을 보는 사람 에게는 누구에게나 참성품은 그의 것이다. 참성품은 떨어지거나 파별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고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부 나 의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의 차별을 떠나서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참모습의 견본이 된 다. 우리는 서두에서 부처님이 말씀하는 변함없는 참마음에 대해서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생각이 불교적인 것이 되려 면 공사상과 일치해야 한다. 공사상은 영원히 변함없는 것을 인 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하는 참마음의 내용을 들어보 면 어떤 개인적인 나를 내세우는 참음이 아니라 감각기관에 놀아 나서 참마음을 못 보는 나를 보린 다음에야 얻어지는 그런 것이 다. 여기서의 참마음은 허공과 같고 불의성질과 같은, 온 세계 에 특정하게 없으면서도 온 세계에 항상 꽉 차 있는 그러한 것이 다. 개인적인 소아로서의 참나가 아니라 우주저긴 대아로서의 참 나이기 때문에 공사상과 상충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공한 가운 데 꽉 차 있는 공사상 그 자체이다. <능엄경>의 서두에서 파사익왕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이 무엇이냐를 물었다. 파사익왕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온 우주에 꽉 차 있는 참성품, 항상 내 것인 참성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능엄경>에서 부처님이 답변하는 특이한 점은 인연법이 니, 무자성이니, 공사상이니, 이런 것들을 들먹이지 않고 변하 지 않는 참마음을 일관성 있게 내세우면서 결과적으로 인연법과 무자성법. 공사상을 다 드러내 보였다. 눈이나 귀나 코 등의 감각기관과 그 감각기관의 대상인 형색이 나 소리 등에 속지 않고 그것들을 오히려 지배할 때 참마음이 나 타난다고 한다. 긴 끝에 달린 추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가 움직 일 때 눈동자도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이때에 보는 성품까지도 움직이면 참마음을 등지고 감각기관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보는 성품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그 성품에 의해 살 때 참마 음을 찾는 것이 된다. 실에 달린 추에 끄달리지 않기는 쉽다. 그러나 재물과 명예와 색에 끄달리지 않기는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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