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광주 이씨 가족들
 
 
 
카페 게시글
역사 공부해요 스크랩 과학 혁명의 주창자 장영실
이미화 추천 0 조회 11 08.07.12 14: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종 시대의 과학 혁명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주도한 사람은 단연 장영실이었다. 세종의

과학적 열정이 아무리 대단했다 하더라도 장영실 같은 인물이 없이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장영실의 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가 사대부 중심의

사회였던 만큼 천민 출신인 장영실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설에는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는데,

동래현에서 관노 생활을 하던 중에 재주가 출중하여 천거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이 짤막한 내용을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그의 어머니는 관기였을 가능성이 높고, 아버지는

중국과 조선을 넘나들던 중국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장영실은 가끔씩 조선을

찾는 아버지를 통해 중국 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관기인 탓에 관노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관노였던 장영실의 기술적인 능력은 탁월했던 모양이다. 당시

세종은 과학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신분에 상관없이 기술적인 능력이 있는 인재들을 찾고

있던 중이었고, 이때 마침 동래현의 재주있는 관노로 이름이 나 있던 장영실이 인재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장영실은 발탁된 뒤 곧장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아마 세종의 정책에 따른

기술 학도들의 견문 유학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유학 중 장영실은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본격적인 기술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 덕분으로 이미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었으며, 상의원별좌라는 직책도

부여받았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그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은 물시계였다. 이는 중국 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완전한 자동 물시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물시계의 개발로 그는 정5품 벼슬에

올랐고 이후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장영실은 세종 14년에 시작된 천문관측기인 간의대 조성 작업을 이끌었다. 그는 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그리고 별자리표와 방위지정표로 구성된 정방안 등을 설치하였다.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우주관 중의 하나인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천설의 골자는 우주는 새알처럼 둥글게 이 땅을 둘러싸고 있는데, 땅은 마치

새알 껍질 같은 우주 속에 있는 노른자위처럼 생겼다는 학설이다. 쉽게 말하면 우주는 둥근

원으로 얽혀 있고 지구는 그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둥근 원이라는 뜻으로, 곧 지구 구형설인

셈이다. 또 혼상이란 일종의 우주본으로 지구본처럼 둥글게 되어 있으며, 둥글게 만든 씨줄과

날줄을 종이로 감싼 것이다. 어설프게 보이는 이 천문관측기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과학적

결정체였다. 이러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장영실과 일군의 학자들이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영실의 과학적 업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였다.

  해시계를 일구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앙부일구란 말 그대로 '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의 해시계'란 뜻으로, 마치 그 모양이

가마솥에 다리가 세 개 붙어 있는 것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앙부일구의 재료는 청동으로, 솥같이 생긴 반구 속에 그림자침이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반구의 바닥에는 그림자의 위치를 나타내는 선이 세로로, 절기를 표시하는 선이 가로로

그어져 있고, 이들 선은 서로 수직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절기를 재고,

그림자 끝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앙부일구의 위대성은 그것이 반구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는 곧 당시의 학자들이 태양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태양이 반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를 뒤집어서 이해하면 현재의 과학에서처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낮 동안에 반원을 그리며 돈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지동설의 논리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해시계의 발달은 물시계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왜냐하면 해시계는 낮의 시간만 알

수 있는 것이었고, 또한 그것도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아주 흐리면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물시계였다. 물론 당시까지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가 있긴 했지만, 이것은

완전한 자동도 아니었고 시간도 정확하지 않았다. 장영실은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른바 '스스로 종을 치는 물방울' 시계를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자격루였다.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종, 북, 징을 자동으로 울리는 동시에 시간을 알리는 목각

인형이 솟아올라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자명종 시계였던 셈인데, 이는 4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호, 12개의 살대 그리고 동력 전달 장치와 시보 장치에 의해 가능했다. 즉

파수호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띄워올리면 동시에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달되고, 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간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 자격루는 장영실이 김빈과 함께 만든 것으로 중국과 아라비아의 것을 비교 연구하여

새로이 고안한 것이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태양 모양을 본떠 만든 천상시계와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궁중에

바쳤다. 이 옥루 역시 완전한 자동시계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발명품이었다.

  장영실은 해시계, 물시계의 제작 이외에도 금속활자 주조 사업에도 참여해 조선시대의

활판인쇄술의 대명사인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했다.

  이처럼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일생을 바친 조선시대 최고의 기술과학자였다. 천체의 원리뿐

아니라 자연 동력의 원리에도 밝았으며,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면모를 과시하며 세종 시대의

찬란한 과학 혁명을 이끌어낸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의 노후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아산의 명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

보내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