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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 파도치는 부둣가에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아있네, 부산갈매기, 부산갈매기, 그댄 정녕 나를 잊었는가..’. 구도(求都)라 불리는 부산 야구팬들의 공식 응원가가 되어버린 ‘부산 갈매기’의 노랫말이다. 하지만 정작 부산 야구열풍의 주역이었던 원조 갈매기 최동원의 흔적은 지금 부산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바로 그 최동원이다.
1. 국보급 투수 최동원,,
지난 6월 24일 김해시 상동 롯데 부산구장에서는 한화 이글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최동원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은 그곳에서 바로 자신이 몸담았던 롯데를 상대로 2군 경기를 지휘하고 있었다. 편견이었을까. 그를 만난 첫 인상은 ‘많이 약해졌다’ 혹은 ‘순치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그를 만나 우선 파란만장했던 야구인생에 대해 물어 보았다..
- 고교시절 4 연속 완투 우승, 17이닝 노히트 노런, 연세대학교 23연승, 대륙간컵 야구대회 MVP. 84년 정규시즌 27승, 한국시리즈 5회 연속 등판 우승 등 선수시절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세웠습니다. 요즘 기준으로보면 선수생명에는 거의 자해행위에 가까운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리한 피칭을 했나요? 승부욕 때문이었나요?
“일정 부분 그런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해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야구는 팀 운동입니다.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다 해야했죠, 팀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데, ‘내가 힘들어서..’라고 빠진다는게 통할 수 없었어요. 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만 해도 전력상 6차전까지 3:3으로 간 것만으로도 우리팀으로서는 능력 이상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욕심을 안낼 수 있겠습니까?. 당시 강병철 감독님이 농반진반으로 ‘네가 1,3,5,7 차전을 맡아라’ 라고 하셨는데, 실제로는 5게임이나 나서게 되었죠, 내가 나서서 가능하다면 했어야죠.. 고교시절부터 프로시절까지 늘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죠 ”
- 프로 시절은 댓가가 주어지는 일이니 그렇다치고, 아마시절의 혹사 때문에 너무 빨리 지고 말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스스로도 프로진출 때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다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긴 침묵 끝에 일을 열었다) ‘맞는 말이지만,, 이제는 아쉬운 것도 원망도 없어요. 단지 흘러간 과거 일 뿐 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시대적으로 볼 때 하지 않으면 안되었죠. 원래 지도자는 성적 지상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면 자리보전이 안되거던요,, 그 시대에는 또 그 시대의 논리가 있는 것이죠. 저는 그 시대의 선수였고요,, 이제는 흘러간 과거고 원망도 후회도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후회는 있겠지만 빨리 털어야죠, 그래야 앞으로 가죠, 아니면 옆으로 가잖아요,,오늘을 소화해야 내일이 있을 뿐입니다..
- 선동열과의 세기의 대결은 결국 1 승 1 무 1패로 끝나고 말았죠. 후배 선동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좋은 선수죠. 나는 타자가 아니라 타석에 서본 일이 없으니 선동열의 볼이 홈 플레이트를 파고들 때 타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알지는 못하죠. 때로는 내 공도 어땠을까 궁금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제대로 된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볼이 무거워서 공략이 쉽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선수시절 팀과 불화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선수협 사건이 결정적 이었을것 같아요. 롯데시절에 어느날 70대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당신도 선수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할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면서 우리 선수들도 노후를 준비 할 수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만해도 당장 밥 값도 안되는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그 선수들도 프로의 뿌리를 내리는데 공헌한 사람들 아닙니까.., 더구나 야구란 혼자하는게 아니죠, 당시에 내가 잘 나가는 것도 결국은 다른 선수들의 공이라 싶더군요, 그래서 선수협을 만드는데 앞장 섰어요,
2, 태생적 반골기질..
- 그래도 혹시 본인이 가진 반골기질이 작동하거나 팀에 대한 불만이 작용한 탓은 없을까요?
반골기질... 제게 그런게 있죠,, 구단에 대한 불만,,, 아마 그것도 있었겠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동료의식 이었어요, 잘나가는 선수가 주도하지 않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지금도 그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 한미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 나서서 맞았던 코스에 다시 같은 공을 던진다던지. 아니면 일부러 한가운데 직구로 승부해서 홈런을 맞는다던지 하는 고집도 일면 그런점과 상통하지 않나요?
그런건 객기로 보였을테죠,, 실제 그런 비난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건 객기가 아닌 준비된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이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승부를 피해가지 않고 정면 승부를 하게 만들었죠, (그는 이 부분에서 답답하다는 듯 여러 번 가슴을 두드렸다). 이해가 안되세요? 나는 늘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몸을 만들었어요, 그런 큰 경기는 나를 평가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왜 비겁하게 그걸 피해갑니까?. 저는 지금 선수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 그렇군요, 그런데 그 반골기질 말입니다. 늘 ‘최동원은 반골기질이 강하다’라는 평을 들었는데, 당시 최고의 선수였는데 굳이 왜 그랬을까요?
원래 있었던 것 같아요,, 천성이죠,, 나는 아니다 싶으면 항상 그렇게 해요,, 지금은 다들 부정적이지만 언젠가는 내 진심을 알아 주겠지.. 나중에 이해하겠지,,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걸애써 감추지 않았던 거죠,
- 일부 폄훼하는 사람들은 튀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다고들 하는데요?
‘튀고 싶다는 둥’ 남을 폄훼하는 사람들,, 자기가 그런 말을 기분이 들으면 어떨까요? 스스로 남의 이야기 그렇게 하지 말아야, 자기도 그런 평가를 안받는 겁니다. 내가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해요.. 저는 내내 말에 시달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입니다..,,(그는 이 부분에서 눈에 띄게 목소리가 높아지며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슴에 맺힌 것들이 커 보였다. )
3, 놓쳐버린 기회들,,
- 81 년 캐나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계약이 무산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인 최초의 메이져 리그가 될 수 있었는데요, 일부에서는 연봉에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연봉요?.. 그런 소리들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사실은 아니었어요, 연봉은 61만불에 계약이 되었었죠, 하지만 병역 문제가 걸린거죠, 당신 차범근 선수가 공군에서 병역을 마치고 독일로 갔죠, 그러니 저도 마찬가지로 병역 문제가 걸림돌이 된 거죠, 81년도에 캐나다 수상이 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 교민들의 사기를 위해 전향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청와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었죠, 하지만 결국 병역문제가 걸림돌이 되더군요,’
- 그럼 아마시절 일본 롯데 오리온즈 가네다 감독의 양자로 입적해서 일본 프로로 진출하는 문제도 역시 같은 이유였나요?. 그때는 귀화 아니냐는 식으로 여론이 안좋았었는데요,.,
‘그때는 아니었어요, 당시 일본에는 외국인 선수 제한이 있었고, 롯데에는 외국인 티오가 꽉 차 있었어요, 그래서 가네다 감독의 양자로 입적하자는 제안이 오간거죠, 하지만 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어요, 완강하셨죠, 아무리 서류상이지만 일본 사람의 양자로 입적하는게 말이 되느냐고요, 저는 그때 고 3 이었는데, 아무것도 몰랐어요, 욕심도 없었고요, 어른들 사이에서만 이야기가 오간거죠,,’
- 그럼 다시 프로 시절로 돌아가보죠, 연봉문제로 구단과 매년 충돌했었죠, 어차피 연봉은 국내 최고였는데, 몸값에 대해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할 이유가 있었나요?
그건 구단의 언론 플레이가 많이 작용 한 겁니다. 스타 선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선ㅅ는 개인입니다, 구단은 힘이 있고요, 특히 그 시절은 말할 것도 없죠, 아무리 스타 선수라도 구단을 이길 수는 없어요, 그 점은 언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구단 이야기를 듣겠어요? 선수편을 들겠어요?. 프로선수가 구단과 몸값을 협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구단에서 처음에는 저하고 협상을 하다가, 나중에 아버지 오셔서 조율해달라고 부탁을 하고서는 나중에는 아버지가 개입해서 협상이 깨졌다고 흘리는거죠. 그럼 언론은 그렇게 써요.,,
- 대부분 선수들은 나중을 생각해서 구단 프론트에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잖습니까? 나중에 지도자의 길을 걸을 때를 대비해서요,, 그런데 최 감독은 어땠습니까?
안했습니다.. 왜 그래야 하죠.?. .그때그때 무리가 되어도 그냥 선수로서 최선을 다했어요, 내게 충실했죠, 나는 게을리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경기에 나가라면 나가고 던지라면 던졌습니다, 어깨나 몸을 생각했다면 그럴 수 없었죠, 그냥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선수로서 할 일은 그것 뿐 입니다, 나중 일은 그때 또 최선을 다하는거라 생각했어요,, 물론 결과적으로는,,, 어쨌건,, 지금은 행복합니다.. 그럼 됐잖아요,,
(그는 당시 롯데구단에 대해 여전히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제 최동원도 과거의 최동원이 아니었다. 과거 150 킬로 광속구처럼 쏟아지던 직설적인 말들이 아제는 완곡한 표현으로 충분히 다듬어져 있었다.)
4. 아버지의 이름으로,,,
- 최 감독님을 이야기 하려면 선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죠,, 선친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많이 존경하시나요?
동시대에 느끼지 못하던 것을 앞서가신 분입니다. 아버지는 6.25 전쟁때 다리를 다치셨어요. 그래서 의족을 하고 다니셨죠, 그런데 야구선수 뒷바라지란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밤에 집에 돌아오셔서 의족을 벗으시면 다리에 절단된 부분이 벌겋게 퉁퉁 부어있었죠,, 그 다리를 뜨거운 물로 마사지를 하시면서 혼자서 우셨어요,, 그 장면을 보고 자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졌겠습니까?....
- 하지만 밖에서는 부친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밖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돌죠,, 최동원은 아버지가 망쳤다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대로 하신일은 하나도 없어요, 항상 아버지는 저하고 집에서 먼저 상의하시고 저하고 의견이 일치 된 일만 밖에서 말씀하셨죠,, 그렇게 하면서도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셨죠,, ‘너는 당사자다, 당사자가 욕을 먹으면 치명적이다, 욕먹을 일은 모두 내가 맡겠다,, 너는 내뒤에 숨어라..’, 그걸 두고 세상사람들은 아버지가 마음대로 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철두철미하게 제 뜻을 존중하신 분입니다...아버지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아들을 위해 살다가 가신 분인데,, 정작 아들은 아직도 그걸 못해드리고 있습니다..
- 선친께서 조기 은퇴를 제안하신 것으로 압니다, 선수협 파동이 원인이었나요?
조기은퇴..글쎄요, 저는 적절한 은퇴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부족한 부분을 보이지 말고 밀려서 나오지 말라’고 하셨죠, 그리고 아버지는 제가 야구선수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바라셨어요,, 단순히 야구만 하는 ‘쟁이’가 되지 말라고 하셨죠,, 제 생각도 그랬고요. 삼성의 김시진 선수와 제가 선수협 사건으로 서로 트레이드가 되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죠., 절벽에 선 느낌이었어요. 나의 전부가 무너진거죠,, 롯데가 아닌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선수생활을 중단 할 이유는 아니었죠, 구단은 구단이고 선수는 선수니까요, 더구나 트레이드는 감정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 년을 더 뛰었어요, 그리고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여긴거죠., 일부러 조기은퇴한 것은 아니었어요,, 당시 김성근 감독께서 일 년 더 뛰라고 하셨는데, 그때가 물러날 때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새 삶을 시작했죠..
-그럼 은퇴 후 그린 첫 번째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공부였어요, 미국에 갔죠, 처음에는 6,7년 계획으로 갔는데, SBS에서 해설위원 제안이 왔어요, 그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미국만 공부인가 생각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죠, 그래서 귀국해서 야구 해설을 맡았어요,
- 선친이 그린 아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였을까요? 지방의회 선거 출마도 그래서 이루어진 것인가요? 그것도 부산에서 민주당 후보로요.. 당선된다고 생각했습니까?
선수협등을 거치면서 사회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그래서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시에 민자당에서도 제안이 있었지만 민주당을 택했어요, 그것도 일종의 반골기질 이었는지 모르죠, 하지만 그래야 진정성을 이해받을 것 같았어요, 유세장가서 야구선수가 아닌 인간 최동원으로 사람들에게 주장 할 수 있었어요.. 공개적으로 ‘이런건 아니다’,,하고,, 말하고 싶은게 있었던거죠,, 그점에서 아버지가 그린 꿈은 늘 제 꿈과 같은 것이었어요,,
(최동원은 그전부터 정치적 행보를 보였었다. 파업 중이던 부산일보 노조에 성금을 전달한다거나, 초대 선수협회장을 맡은 일 등은 충분히 정치를 위한 사전포석으로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당시 최동원의 선구구호는 ‘민주자치의 선발투수,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였다.)
5. 이루지 못한 꿈..
- 그 말하고 싶었던 것,, 그게 뭘까요?
제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있어요,, 가슴을 태우는 그런 불덩어리요,, 아직도 그게 남아 있습니다.. 그건 아버지와 제가 꾼 꿈입니다.. 그 불덩어리를 토해내는 과정이었지요,, (그는 그 불덩어리의 실체에 대해서는 애써 말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것을 토해내지 못해 답답해 하고 있는 듯 했다, 한국 야구의 최고스타 자리에 있었던 그의 가슴속을 태우는 불덩어리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 그럼 안티구아 의류사업도 같은 맥락인가요? 단순한 ‘쟁이’가 아닌 선친과 최 감독이 함께 이루려고 했던 꿈에 도달하는 과정 같은 것 말입니다...
맞아요,,나는 내가 부딪히고 경험하려고 했습니다. 안티구아도 미국까지 가서 어렵게 국내 판권을 따고 직접 뛰어 다녔죠,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어요, 그런데 광고가 나가고 난리가 났죠, 전화가 불통이 되고, 직원들이 도망을 가고,, 지금 생각하면 평범한 광고인데,, 당시는 그랬어요,, 왜 그랬느냐고요?. 당시로서는 빨랐던 거죠, 하지만 누군가는 선두에 서야 하잖아요, 죽을 줄 알면서도 왜 선두에 섭니까.. 도망가 버리지,,.하지만 누군가는 선두에서 총을 맞아 쓰러지는 이가 있어야 되잖아요,,
(당시 의료업체 안티구아 광고는 요즘 베네통의 광고처럼 백인여자와 흑인남자, 그리고 백인 아이의 뒷모습을 누드로 처리한 것이었고, 그 여파는 엄청났다. 비난이 빗발쳤다, 더구나 광고모델이었던 골프선수 페인 스튜어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불운까지 겹치면서, 그의 사업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렸다. 그 점에서 보면 최동원은 늘 반발이 아닌 한 발을 앞섬으로서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 그 일로 인해 경제적 위기를 겪지는 않았나요?
아,,그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아주세요,, 손해야 있었지만, 그것 역시 인생의 한 부분이죠. 성공이나 결과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과정이 중요한 거죠, 그러니 꼭 손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 일로 인해 많이 배웠어요,
(하지만 최동원의 외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후 방송으로 진출하고, 시트콤에도 출연하는 등 그의 좌충우돌식 행적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의 눈에 그렇게 비친 것일 뿐, 그는 선친의 유지대로 많은 것을 경함하고 배우는 과정으로 여겼다고 했다)
- 결혼마져도 최동원다웠다고들 하는데 정말 전격적인 결혼이었죠?
선수협 파동 이후 미국으로 갈 때 였지요, 이종사촌집에서 한번 만났는데, 두어번 만난 후에 공항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서 느낌이 좋다고 말씀 드렸더니 일주일후에 함들어 간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7번째 만난게 결혼식장에서 였습니다., 그때도 다들 말이 많았는데, 보세요,,지금 잘살고 있잖아요,, 선구안이 좋았던거죠,,
- 아들은 야구를 안시킨다고 하던데 왜 그렇죠?
아니,, 지금 야구를 하고 있어요, 큰 재능은 없어 보이는데, 자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야구선수가 되는 길이 너무 힘들어요, 정말 시키고 싶지 않아서, 집에서는 야구 얘기를 일체 하지 않았죠,,그런데 어느 날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하길래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하면 시킨다, 하지만 나중에 원망하지마라, 후회도 하지마라, 하지만 나는 원한게 아니다, 우리 그점은 분명히 하자’. 그랬는데도 하겠다는데 시켜야죠,, 어쩌겠습니까..
6. 지도자의 길...
- 어느 야구팬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부산은 최동원을 낳았고, 최동원은 부산팬을 낳았다’ 심경이 어떻습니까? 요즘 부산의 야구 열풍을 보면...
부산은 내 고향이고 뿌리입니다, 어머님이 계시고, 나를 만들어 준 곳이죠,, 늘 훈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 자리에 없다고 해서 섭섭하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 김인식 사단의 일원으로 한화 1군 투수코치, 이제 2군 감독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최고의 선수였다고 최고의 지도자는 아닙니다. 선수시절의 생각을 가지고 가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지금은 김감독님에게 지도자의 길을 배우고 있습니다, 연습생인 셈입니다. 선수 때는 잘던지면 그만이지만, 지도자로는 운영이나,선수특성파악, 지도방법등을 공부해야하죠, 그러니 만족하죠.. 지난날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허상 일 뿐입니다.,.
- 그래도 선동열 감독이나 김재박 감독 같이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성공한 분들을 보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나요?
자존심 같은 것은 버린지 오랩니다.. 자존심은 한 순간만 버리면 됩니다. 자리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선수들은 누구나 감독 목표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본인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죠,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묵묵하게 내실을 다지고 내공을 쌓으면 저절로 기회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 점에서 저는 아직 부족한 것이고요,,
(야구계를 떠나 10년동안 야인으로 떠돌던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다, 김 감독은 그에게 1군 투수코치로 조성민의 부활을 전담시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 대해 이미 시기적으로 늦은 일이었다고 평했다)
- 당시 최동원,선동열 같은 불세출이라는 별명을 붙일만한 선수가 요즘은 잘 안나옵니다. 이제 지도자 입장에서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아,,그건 식습관부터 차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들 어릴때부터 고기나 패스트푸드 같은 것을 잘먹고 해서 예전보다 체격조건은 좋아요, 하지만 과연 내부의 힘이 강한가하면 그건 아닙니다, 툭하면 부상이고, 고장이죠, 연습강도가 높아지면 그 자체를 못버티고 이기지 못해요,. 연습하지 않는 좋은 선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무리한 연습을 하면 어디가 안좋다. 어디가 아프다고 하죠, 정신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결국 지도자도 이런 선수들과 타협 할 수 밖에 없지요,,
-마지막으로 이제 세상에 길들여 진건가요? 아니면 아직도 마음속에 무엇인가 엄청난 포부와 음모(?)를 숨기고 있나요?
(순간 그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포부,,, 뭔가는 있겠죠,.,하지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그 뭔가를 안고 살아갈 겁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롯데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꼽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짜릿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고향 부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느냐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한화 2군 감독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 유니폼을 입고 있는 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쓸쓸했다. 지금 그의 처지는 지도자 수업을 받는 초년병 지도자일 뿐이다. 그는 저간의 사정에 대해 이제는 기다릴 줄 알고 담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고, 또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익혔다고도 했다. 그리고 다른 모습을 기대해 달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간곡히 부탁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선친 최윤식씨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한 평생 아들을 위해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이 그의 가슴에 엉어리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는 지금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자기를 던져 인터뷰어와 거래를 한 것일지도 몰랐다...
첫댓글 흠.. 지금은 야구에 별 관심이 없지만 한때 부산이라고 응원했던적도 있었는데 대단했었지요.. 최동원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