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세태에 돈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주일을 돈이 없이, 카드도 없이 산 적이 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돈이 있을 때는 자주 들락거리던 백화점이 돈이 없으니 나에게 딴 세상이 되었다. 시장도 볼 수가 없었다. 백화점과 시장에서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돈이었다.
과천품앗이에서는 돈, 즉 현금이 없이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내 아이의 학습지도를 받을 수도 있고, 옷 수선도 받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필요 없지만 나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지역화폐 '아리'를 지불한다. 하지만 현금을 지불하지 않고 무언가를 받을 수 있다면, 예를 들어 현금없이 내 아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다면 누구나 신나지 않을까. 그렇다고 선생님한테 결코 신세를 지는 것은 아니다. '아리'를 지불하니 말이다. 돈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제한적이나마 돈 없이 살 수 있는 곳, 그래서 과천 품앗이는 회원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그러면 과천품앗이 화폐 '아리'를 벌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과천품앗이에 가입하고 싶어도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하면서 망설이는 분이 많다. 하지만 과천품앗이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꼭 전문적인 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앞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심부름, 반찬 만들기, 아기 돌보기, 청소하기, 큰 세탁기가 있다면 이불빨래 해주기, 하다못해 못 박는 일, 간단한 수리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사소한 일도 모두 품이 된다. 이 점이 과천품앗이의 또 하나의 큰 매력이다.
사회에서는 인정을 해주지 않는 가사노동이나 돌봄 노동, 비전문 노동이 품앗이에서는 당당히 인정 받고, '아리'를 벌 수 있는 품이 된다. 그래서 과천품앗이에서는 능력 없는 사람이 없다. 누구나 제 나름의 능력이 있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처음에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던 회원이 이것저것 품을 바꾸어도 보고, 반응이 좋으면 자꾸만 품을 내는 과정에서 전문가가 된 분도 있다. 반찬을 만들어 인기를 끌다가 반찬가게를 낸 회원이 있는가 하면 천연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회원도 있다. 또 꼭 전문가까지 되지 않더라도 자칫하면 사장될 뻔한 다양한 능력이 과천품앗이 활동을 계기로 발휘되고 하나하나 소중한 품이 되고 있다.
'평생 주부로 살아 온 나는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과천품앗이에 들어와서 내가 경제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어느 품앗이 회원의 말이 내게는 잊히지 않는다. 그 회원은 손재주가 좋아서 가방이나 모자를 만들기도 하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번번히 인기 만점이었다.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아리'를 벌어서 쓸 수 있으니 품앗이 내에서는 누구나 경제력을 발휘하는 경제주체가 되는 셈이다.
물론 품앗이 내에는 직장인과 여러 분야의 전문직 회원도 많다. 피아노 교사, 화가, 논술교사, 영어 강사, 생태교사, 사진작가... 그런가 하면 우리가 '주부'로 분류하는 비전문직 회원도 많다. 중요한 것은 과천품앗이에서는 전문직의 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보다 비싸게 쳐주는 품도 1시간에 1만 아리이고 가사노동이나 단순노동도 1시간에 1만아리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 했지만 과천품앗이에서는 모든 노동을 다 같이 귀중하게 여기고 차별을 하지 않는다.
과천품앗이에서 아리로 품을 나누는 일은 수퍼마켓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수퍼마켓에서 김치를 살 때는 그저 돈만 지불하면 된다. 그러나 과천품앗이에서는 김치를 받고 싶은 회원과 김치담기를 제공하는 회원이 서로 연락을 하고, 직접 만나서 김치를 주고받은 후 서로의 통장에 아리를 기재해야만 거래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보면 달랑 돈 주고 사오는 것 보다 번거로운 절차다.
하지만 품앗이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절차, 즉 회원들이 직접 만나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만나면서 이웃사촌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과천에 살지만 과천품앗이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칠 이웃을 알게 되고 함께 지내는 재미가 더 크다고 말하는 회원이 많다.
또 회원이 직접 만나서 품을 주고받기 때문에 품앗이 거래는 이른바 '얼굴 있는 거래'가 된다. 예를 들어 수퍼마켓에서 김치를 살 때는 누가 담갔는지 알 필요 없이 돈만 지불하면 된다. '얼굴 없는 거래'다.
그러나 과천품앗이에서는 예를 들어 김치를 주고받을 때 서로 얼굴을 맞대야 한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아닌, 과천품앗이 내에서 얼굴을 빤히 아는 회원에게 담아주는 김치에 내가 먹지 않는 재료를 차마 넣을 수 없고 조금이라도 정성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러한 김치를 받는 편에서는 저절로 고마운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그 정성에 감사를 느끼는 것이 우리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서로의 품이나 자원을 거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지역화폐 '아리'를 지불하는 품앗이형식은 다자간의 유통을 원활히 할 뿐 아니라 모든 회원을 대등한 관계로 만들어 준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자선이나 봉사에서는 쌍방이 대등한 관계가 되기 어렵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있고 자선을 받는 사람이 있다. 봉사 역시 그렇다. 반면 과천품앗이에서는 '아리'를 매개로 서로가 인격적으로 대등하게 된다.
또 품앗이 거래에서는 필요한 만큼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학습이나 반찬 등 어떤 품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받을 이유가 없다. 제공하는 측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제공을 하게 된다.(생산) 제공받는 측에서도 자신의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받을 이유가 전연 없다. 즉 과다생산, 과소비, 에너지 낭비, 자원의 낭비가 없는 경제시스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