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과 미술의 만남
마네의 그림과 강인한·이윤설의 시
강 경 호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묘지를 떠나며 그의 절친이었던 드가는 “그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위대했다”고 중얼거렸다. 드가의 이 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마네의 등장은 신화나 역사의 일화를 그려왔던 미술의 전통과 관례로부터 해방된 근대회화의 모험의 시작이었다. 마네는 “자기가 느낀 심상을 좇은 최초의 미술가였으며, 오직 감각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것을 표현하여 화가의 임무를 단순하게 만들었다.”고 마네를 말한 마티스의 지적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미술사를 썼던 마네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지만 언제나 ‘인상주의 주창자’ ‘저급한 화파의 우두머리’라는 비난을 받았고, ‘회화의 코뮌 지지자’라는 중상모략을 당했다. 그러나 점잖은 부르주아 출신답게 신사처럼 우아하고 사교적이었고, 사회명사들처럼 콧대높은 자존심을 갖추었던 그는 전통을 숭배했고, 과거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그래서 화가로서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화가가 되길 원했고, 살롱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명예를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네는 살롱에는 대부분 낙선하기 일쑤였고, 발표하는 그림마다 혹독한 비평이 가해졌다.
에두아르 마네
산업혁명 이후 출현한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으로 지성은 힘을 잃고 고결함은 사라졌으며 예술은 질식해갔다. 그들은 거만하고 완고했으며 ‘매일 돼지곱창 쏘시지를 먹고 허세를 떨려고 마차를 타는 족속’들이었다.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의 세태에 마네는 “화가는 단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이고자 하면서 인상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지만, 성실하게 작품에 부여한 효과는 항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며 고급미술의 전통이나 규범에 단절하면서 자조적인 적의가 일군의 지지자이며 동료인 젊은 인상주의 작가들을 결집시켰다.
그러한 그이지만 인상파 전시회에는 참여하지 않고 인상주의의 혁신성과 근대성과는 반대편에 섰던 낡고 진부한 살롱전에 끝까지 도전해 번번히 낙선한 작가였다. 그러나 그의 회화세계는 처음부터 혁신적인 인상주의에서 출발하여 끝까지 인상주의를 고수하다 세상을 떠난 참으로 아이러니한 작가였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가 「풀밭 위의 식사」, 「올랭피아」 등으로 서양미술사상 가장 충격적인 스캔들을 일으켰을 때 그림 속의 실제 주인공이 매춘부였는데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매독이었다니, 그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난망하다.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퀴스트 마네는 법무성의 고급관리였고, 어머니 우제느 데질레 풀니에는 스웨덴 주재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는데 마네가는 상당히 유복한 중산계급에 속해 루이 필립의 왕정 아래서 전형적인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휴식-베르트 모리조의 초상(1870년)
마네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려 하였다. 그렇지만 마네는 공부가 싫어 싫증을 내곤 했다. 이럴 때 포병장교이면서도 그림을 좋아하는 마네의 외삼촌이 그를 찾아와 그림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마네의 외삼촌은 조카를 데리고 루브르박물관을 찾아가곤 하였다. 그곳에서 마네는 스페인 회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스페인 회화에 매료되어 연필로 스케치를 하곤 했다.
1949년 2월, 마네는 견습 수병이 되어 남아메리카의 리오데자 네이로에 닿아 원색적인 남국풍경에 빠져 강한 충격을 받는다. 이 때의 심리적 충격을 사생첩에 담아 파리로 돌아온다. 이렇듯 소년기에 스페인 회화에 대한 깊은 감명, 그리고 낯선 브라질 풍경의 정서적 충격 등이 화가 마네를 만드는데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1863년)
법률가나 해군사관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소망을 모두 접게 한 마네의 불경스러움과 일탈한 행동들은 어쩌면 마네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즉 자신의 신념의 발현이며 정직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네의 성격은 훗날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를 그려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살롱전에서 번번히 낙선하면서도 자신만의 그림을 고집하게 한다.
자신의 감정에 정직했던 마네는 쿠퇴르라는 화가에게 공부를 하게 된다. 쿠퇴르는 그에게 끊임없이 뎃생을 하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러나 쿠퇴르는 역사화가였을 뿐이었다. 그는 위대한 그림이란 과거를 반영하고 이야기와 풍유가 담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마네는 자신이 스승 쿠퇴르에게 공부하는 것에 대해 “어째서 내가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어. 눈에 띄는 것이 모두 우스꽝스럽단 말이야. 빛도 가짜고 그들도 가짜거든 아틀리에에 가면 무덤 속에 들어선 기분이 든단 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마네는 쿠퇴르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마네는 모델들과도 자주 다투었는데, 모델들이 로마풍의 옷을 입고 로마풍의 포즈를 취하는 것에 마네는 화가 났다. 그래서 모델을 구해 옷도 그냥 입힌 채로,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하였다. 철저하게 관념을 배제한 마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자신의 감정을 좇아갔다.
마네는 위대한 화가들이 그랬듯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작품들을 공부했다. 루브르에서 틴토레토의 자화상, 티치아노의 「성모와 예수」 「주피터와 안티오페」를 베꼈다. 부셰의 「목욕하는 다이아나」, 루벤스의 「헬렌과 아이들」, 벨라스케스의 「작은 기사들」에 대한 강한 인상이 훗날 마네의 그림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1858년 마네는 시인 보들레르를 알게 된다. 26살의 청년과 37살의 시인이었지만 나이를 뛰어 넘어 교분이 두터워진다. 이 두 사람의 친교는 ‘근대’의 도래를 느끼게 한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영감을 얻어 「입생트를 마시는 사나이」라는 작품을 제작한다. 살롱 출품을 염두에 두고 그렸지만 최초의 살롱전 출품에서 낙선하고 만다. 사실주의자로서의 면모와 과감한 필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스승 쿠튀르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올랭피아(1863년)
1863년 살롱전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작품은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아카데미풍의 작품으로 낙선작인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보다 훨씬 음란하고 외설적이다. 그런데 마네의 작품은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다시말해 보다 음란하고 퇴폐적인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당시 부르주아들의 성적 취향과 음란함을 표현했지만, 비너스라는 신적 존재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현실 속의 실제인물이라는 이유로 문제 삼았다. 그림의 배경은 실제로 퐁텐블로 숲속의 야외이며, 벌거벗은 여자는 마네의 그림속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 빅토린 뫼랑으로 유명모델이자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리고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친구이다.
당시로서는 현실 속의 인물을 등장시켜 상식 밖의 장면을 연출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신화나 역사를 재현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네는 신화나 역사의 모방보다도 작가는 자신만의 창조적인 세계를 담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마네의 정직한 생각, 새로운 생각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년)
자신만의 눈에 비친 현실과 감정을 그대로 그리고자 했던 마네의 그림은 또다시 살롱전에서 낙선하고 만다. 이번에도 「풀밭 위의 식사」처럼 마네는 또다시 대형스캔들에 시달린다. 그래서 아예 잠시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으로 가버린다.
1863년에 그렸다가 2년 후에 전시된 「올랭피아」는 「풀밭 위의 식사」와 함께 인상주의의 첫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올랭피아」는 16세기에 베첼리오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작품과 구도가 비슷하다. 한때 마네는 이 작품을 모사하였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비너스라는 신적인 존재를 빙자하여 인간의 성적 욕구를 그린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티치아노의 제작의도를 간파한 마네는 보다 솔직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현실 속의 살아있는 인물을 모델로 세워 그려냄으로써 티치아노의 비너스를 인간으로 끌어 내려버렸다. 즉 신화 속 인물 대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현실 속 여인의 알몸을 「올랭피아」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올랭피아」의 실제 모델인 빅토린 워랑은 모델이자 매춘부였다. 그러므로 매춘 전성시대였던 당시 사회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신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매춘부를 데려다 놓은 셈이다.
이 그림은 여인의 숨결, 체취, 앞을 바라보는 에로틱한 눈길 등 생생한 매춘부의 분위기와 침실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머리에는 최음제로 알려진 난초 꽃을 그려넣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파리시내는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비평가들은 「올랭피아」를 ‘시체’ ‘암놈’ ‘인도 괴물’이라고 부르는 악평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렇듯 기성화단의 혹평과 맹렬한 공격은 실상은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 새로운 예술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증상들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1863년)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 충격 이후 마네는 다양한 실험을 감행한다. 「롱샹의 경주」「투우」에서는 색채와 움직임에 형태를 부여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키어사직호와 앨라배마호의 전투」에서는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여론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 작품은 ‘근대성’을 추구한 작품이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전시가 금해졌다. 예민한 사회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실제 인간의 삶을 다루지 않았던 것을 다루기 시작한 마네의 회화세계는 철저하게 관념을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빛을 그대로 그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각도와 빛의 양에 따라 색깔이 다를 수밖에 없는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근대회화의 진정한 출발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를 추종하는 젊은 화가들이 늘어, 점차 그들은 미술사의 주역이며 주인이 되었다. 이른바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 한 가운데 마네가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가 세상을 떠난 지 130년이 지났다. 그에 대한 문화적 기억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인상주의를 창시한 화가’, 또는 ‘미술사의 대단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그동안 여러 시인들이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인 「풀밭 위의 식사」라는 작품과 같은 제목으로 시를 썼다. 강인한·이윤설·박남권·조동범 등이 그들이다.
비너스나 요정 또는 신화적인 인물 대신 현실 속의 여성을 등장시킨 마네의 도발적이고 혁명성이 깃든 이 작품을 본 시인들은 마네의 삶이나 작품세계에 대해서 시를 쓰지 않았다. 강인한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욕망으로 가득찬 현대인의 모순을 보여주고, 이윤설은 「풀밭 위의 식사」에서는 불편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남권은 「풀밭 위의 식사」에서 지상을 녹음으로 점령해가는 생태학적 상상력과 인간의 삶을 오버랩시키고 있다. 조동범은 「풀밭 위의 식사」에서 가족에게 소풍이나 휴식을 제공하는 현대 가장의 불편한 의무를 보여준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라는 그림이 주로 현대사회의 모순과 불편한 사람과 사람의 사이로 전이되어 있다. 이는 시인들이 마네의 그림에서 느끼는 주된 이미지가 ‘소풍’ 또는 ‘점심식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풍’과 ‘점식식사’는 ‘즐거움’ ‘휴식’의 의미를 던져준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소풍을 갈 만큼 한가한 것이 아니다. 그림 속의 풍경처럼 즐겁게 어울리는 행복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불화를 늘 들여다보고 있는 시인들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현실문제로 전이시킬 수 있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시로 전이시킨 작품 중 강인한과 이윤설의 작품을 살펴본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두 작품 모두 우리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강인한의 작품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에 이윤설의 작품은 사람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그리고 있다.
베네치아의 대운하(1875년)
여러분의 자랑스런 후일담이 되어드리려고
벌거벗고 앉아 있어요,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의 고양이가 되어
땅 속으로 땅 속으로 두더지가 한사코 땅을 파듯
저 멀리 흐르는 강물 소리엔
꿈의 운하를 파는 삽질 소리가 암암리에 섞여 있지요
내 곁에 한쪽 다리를 뻗고 느긋한 파트너는
토요일까지 죄를 짓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사함을 받지요, 그리고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깨끗해지지요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물려받을 주식에 대한 생각들을 인화하기 위해서
내 얼굴의 턱을 괴고 있어요
거리에서 떼쓰다가 불타 죽은
못된 불량배들에 대한 헛소문은 믿지 마세요
감춰진 샅 사이로 향긋한 바람이 들락거리는 숲속
이 그늘이 참 좋아요
굴참나무 속에 섞인 한 그루 자작나무처럼
알몸으로 앉아 있어요, 강가에서 뒷물을 마친 친구가
건너편 남자의 짝이 되기 위해 돌아오고 있네요
방부제가 섞인 이 식빵과
농약이 스며 색깔 고운 과일들, 주기도문과 함께
벌거벗은 내 몸을 함께 들어보셔요
죽어도 우리들은 썩지 않을 거예요
썩지 않는 우리들의 사랑 먹고 마시어요
이 신선한 공기는 십년 만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런데, 우리들의 풍경 밖에서
우리를 엿보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내 허벅지 사이로 기어 들어와
배꼽 아래까지 깊숙이 치밀어 올리는 뜨거운 시선
도대체 도대체 보이지 않는 당신은 누구지요?
-강인한, 「풀밭 위의 점심식사」 전문
아르장퇴유(1874년)
강인한 시인은 광주에서 우리나라 최장수 동인지 《원탁시》의 동인으로 나와 함께 활동한 적이 있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지 부정이 발견되면 강인한 시인은 가만두지 않는다. 정직한 정신세계를 지녀야 할 시인에게서 잘못된 욕망의 세계를 발견하면 끝까지 추적하여 만천하에 폭로한다. 이러한 그의 정의롭고 진정한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작품 세계에도 반영이 되고 있다.
그림 솜씨가 남다르게 좋은 강인한 시인은 많은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시작품으로 전이시켜 형상화시켰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마네의 같은 제목 「풀밭 위의 식사」를 보고 우리 사회의 부정과 모순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전이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마네의 그림 속 인물들의 포즈와 풍경들을 들여다보며 오늘 자신이 느끼는 현실을 풍자하는데 활용한다.
“여러분의 자랑스런/후일담이 되어 드리려고/벌거벗고 앉아있”다는 도입부의 고백은, 마네가 「풀밭 위의 식사」를 발표한 후 ‘윤리적으로 저속하다’는 혹평을 받은 스캔들을 떠올리며 시 속에 끌어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화자는 이명박 정권의 가장 핵심사업이었으며,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는 ‘4대강사업’을 “꿈의 운하를 파는 삽질소리”라고 풍자한다.
화자는 그림 속 풍경들을 안내한다. 이는 실제로 마네의 그림을 바라보는 순서로 시선을 이동하는데 먼저 화자 자신인 벌거벗은 여인을 바라본다. 그리고나서 “내 곁에 한쪽 다리를 뻗고” 있는 “느긋한 파트너”를 바라본다. 이 사람은 실제 마네의 동생이거나 친구이다. 하지만 강인한 시인의 작품 속에서는 “토요일까지 죄를 짓고/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사함을 받”는 그래서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깨끗해지”는, 또는 그럴 것이라고 믿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진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삶의 태도를 비판한다.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내 얼굴에 턱을 괴고” “물려받을 주식에 대한 생각들을 인화하”고자 한다. 화자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열심히 일하지 않고 물질적 욕망을 꿈꾸는 사람들을 들여다본다. 이어서 “거리에서 떼쓰다가 불타 죽은/못된 불량배들에 대한 헛소문을 믿지” 말라고 한다. 재개발 시 자본과 국가폭력에 의해 자행되는 살인의 대표적인 사건,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시행은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 또는 불량배가 되어 불타 죽은 우리 사회 약자들의 소외와 상처를 보여준다.
화자는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이동한다. 마네의 그림 속 계절이 여름철인 것에 알맞게 “향긋한 바람이 들락거리는 숲속” 배경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한가한 점심 때를 보내고 있는 화자 자신이 “감춰진 샅 사이로 향긋한 바람이 들락”거린다고 고백한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에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전경에 알몸의 여성 한 사람과 남성 둘이 앉아있고, 뒤편 물 속에 여성 한 사람이 물 속에 손을 담그고 있다. 그러니까 남녀 두 명씩 짝을 지어 소풍 나온 것이다. 강인한 시인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이 그림 속의 인물들과 풍경 속을 바라보며 그림 속의 벌거벗은 여성이 그림 밖으로 나와 그림을 보듯이 그림 속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형식의 작품이다.
화자가 바라보는 뒤편 여성을 “뒷물을 마친 친구”라고 소개하고 있다. ‘뒷물’이 암시하듯 이 여성은 “건너편 남자의 짝이 되기 위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인한 시인은 자신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성(性)을 일회용 커피믹서처럼 쉽게 여기는 오늘날의 풍조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독서(1865~1873년(?))
화자는 시선을 맨 앞으로 이동한다. 풀밭 위 광주리에는 과일과 빵 등 먹을 것들이 놓여있다. “방부제가 섞인 이 식빵과/농약이 스며 색깔 고운 과일들”을 “벌거벗은 내 몸”과 “함께 들어보”라고 한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말씀처럼 ‘일용할 양식’이라고 진술한다. 다시말해 화자는 남녀의 사랑조차 과일과 식빵처럼 먹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과일과 식빵,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어서 영원한 것이 아니라, 썩고 싶어도 방부제 때문에 썩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질에 눈이 먼 현대인의 욕망을 비판하고 있다. “죽어도 우리들은 썩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화자의 섬뜩한 말은 차라리 비명으로 들린다.
벌거벗은 여성이 있는 이 불온한 풍경을 훔쳐보는 사람이 있다. 화자는 풍경 밖의 시선을 느낀다. 그 시선은 “허벅지 사이로 기어 들어와/배꼽 아래까지 깊숙이 치밀어 올리는”데 그 시선이 뜨겁다. 화자는 말한다. “도대체 도대체 보이지 않는 당신은 누구지요?” 길을 가다가 수캐가 암캐를 좇아가는, 쫓아가는 그런 눈길, 그런 뜨거운 마음의 세상을 화자는 벌거벗은 채로 수컷들을 유인한다. 유혹한다. 그렇게 변하는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발코니(1868~1869년)
런닝셔츠 목살이 싯붉은 사장이 삼겹살을
올렸다 불판은 비좁고 우리는 잔디에 엉덩이를 찔려
움찔움찔 젓가락을 들었다 놓는 동안
노을에 잔뜩 들러붙은 겹겹의 구름이
유원지 놀이터 너머로 지글지글 타오르고 있었다.
자 많이들 들자구, 고기는 충분하니까, 아버지처럼 자상한 목소리의
한쪽으로 너무 기울은 시소 그림자
양갈래 머리를 쫑쫑 땋은 계집애 하나가
반달타이어에 시소를 쿵쿵 찧다 말다
우리쪽을 빤히 보다 말다
피습피습 습기 먹은 탄이 바람 빠지는 소리
불이 약한가 불구멍을 좀 열어놓지
종이컵에 따라놓은 첫잔의 건배는 거품이 꺼져가고
불완전 연소된 연기 속에서 매캐하게 상을 찌푸리며
고깃점을 뒤집다, 이렇게 모이니 한가족 같지 않아?
자꾸자꾸 불 밑을 살피는
이마에 땀이 흐르는 사장의 벌건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며 둘러앉은
우리는 한가족같이
말이 없었다
퇴근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윤설 시인의 「풀밭 위의 식사」 전문
이윤설 시인의 「풀밭 위의 식사」라는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와 제목만 같을 뿐 전혀 닮은 곳이 없다. 심지어 마네의 그림과 조금이라도 연관지을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라는 그림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그림 제목만 차용하여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이윤설 시인이 마네의 그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시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의 내용과 그림 제목이 시인에게 어떤 생각을 떠오르게 하였을 것이고 마네의 그림이 결국은 이윤설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즉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마네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로써 당대 미술인들의 이중적인 태도, 또는 위선적인 태도를 고발하고 비판한 역할을 하였다. 그렇듯이 오늘 우리 사회에도 많은 모순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강인한 시인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윤설 시인은 시를 통해 부정하고 모순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회사의 회식 자리로 여겨지는 시적 배경은 시의 제목이 말하듯 “풀밭”이다. 즉 회사 직원들이 유원지에 와서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다. “런닝셔츠 목살이 싯붉은 사장이 삼겹살”을 굽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런닝셔츠만 입은 사장의 목살이 싯붉은 것과 그 사장이 굽는 삼겹살이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식탐이 좋은 사장은 아마 살이 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사장은 평상시에도 삼겹살을 자주 구워본 듯하다. “사장이 삼겹살을/올렸다 불판은 비좁고 우리는 잔디에 엉덩이를 찔려/움찔움찔 젓가락을 들었다 놓”는다. 엉거주춤한, 불편한 자리, 불편한 시간이다. 불편한 자리이지만 사장이 직접 고기를 굽기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는 직원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일 것이다. 화자가 즐거워야 할 회식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해 하는 것은 이 작품 속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평소 사장의 여러 가지 태도가 화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흔히 작은 회사의 사장들 중에는 직원들을 몹시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인권을 무시 당해도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 많은 것이다. 이렇듯 열악한 기업환경과 폭군 같은 기업주의 횡포와 폭력에 시달리는 모습이 이윤설의 작품에서 보여지고 있다.
빨리 귀가하고 싶지만, 눈치없는 사장은 “자 많이들 들자구, 고기는 충분하니까”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말한다. 시간은 흘러 퇴근할 무렵이 되었다. 유원지에 붉은 “노을”이 일고 있다. 그 노을을 바라보는 화자는 노을이 마치 삼겹살처럼 지글지글 타오르는 듯하게 느껴진다. 같이 따라온 아이일까, 유원지에서 “양갈래 머리를 쫑쫑 땋은 계집애 하나가” 시소를 타다가 “한쪽으로 너무 기”운다. 그리고는 “반달타이어에 시소를 쿵쿵 찧”는다. 계집애는 지루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가, 그래서 ‘언제 집으로 가려나’ 하듯한 마음으로 “우리쪽을 빤히 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피습피습 습기 먹은 탄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재미없고 불편한 풀밭 위의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싶은데 발목을 불잡듯 “불이 약한가 불구멍을 좀 열어놓지” 사장의 말소리가 더욱 불편스럽게 들린다. “종이컵에 따라놓은 첫잔의 건배는 거품이 꺼져가고/불완전 연소된 연기 속에서 매캐하게 상을 찌푸리”는 매우 불편한 상황은 계속된다. 그런데 눈치없는, 폭력적인 사장은 “이렇게 모이니 한가족 같지 않아?” 속없는 소리만 해댄다. 그러면서 더욱 불편한 상황은 이어진다. “자꾸자꾸 불 밑을 살피”는 것이다. 사장은 자신이 진정으로 직원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제대로 연소되지 않은 숯불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속에서 불판 위의 삼겹살을 뒤집는 사장은 “이마에 땀이 흐르는” 수고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한가족으로 보이지만 “멀거니 바라보며 둘러앉은/우리는” “말이 없었다” 진정 따스한 정이 흐르는 가족이라면 노을이 지는 저녁이 깊어간다 해도, 그래서 귀가가 늦어진다 해도, 유원지 풀밭 위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것조차 근무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퇴근이 늦어지고 있었다”는 지루하고 불편한 시간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와사람, 2013. 봄(6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