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릉을 지나면 남쪽으로 이어지는 농로가 끝없이 이어지고 들판에는 누렇게 자란 벼이삭이 황금빛 단풍으로 빛나고 있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일조량이 많아 그 색조가 황홀하다. 특히 저녁 나절 땅거미가 지려하는 순간의 들판은 너무나 아름답다.
*당간지주가 둘 있는 보문사터*
삼한시대에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다. 천군(天君)의 지배를 받는 소도는 이곳에 솟대를 세우고 설사 죄를 지은 자라 하더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정치권력자들이 잡아갈 수 없는 신성한 곳을 의미하는 곳이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도 신성한 사찰의 상징을 나타내는 표시인 당(幢)을 매달던 당간(幢竿)을 고정시키기 위한 지주를 말하는데 당은 천으로 당간은 보통 철로 만들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화되어 자취를 감추고 돌로 만드는 지주만이 옛 시절에 절이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보문사의 연화문 당간지주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단판의 연꽃무늬가 새겨진 당간지주이다. 연화문은 보통 수막새 기와에 나타나는 문양인데 이곳의 연화문은 대체로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절터는 남쪽에 있는 보문사터의 사역에 속하였는지 아니면 별도의 사찰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보문사(普門寺)라는 사명은 불교경전의 '보문품(普門品)'에 의거하여 붙여진 것이다. 금당터에 남아있는 석조물이나 금당 북쪽의 석조(石槽)로 보아 규모가 상당히 큰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절터는 일제시대부터 조사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보문사(普門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瓦片)이 발견되어 보문사임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보문사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고 다만 3가지 간접 자료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첫째, 황룡사 구층목탑의 사리함기에 중화3년(883·헌강왕 9년)에 보문사의 현여대덕(玄如大德)이 김유신 장군을 위하여 보문사의 석탑을 중수하면서 무구정광다리나경에 의거하여 소탑 77기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보문사터에는 동서로 목탑의 기단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만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 석탑의 유구가 남아있어 그곳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는 곳도 보문사 사역이라는 설이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다.
둘째, 경문왕 11년(871)에 황룡사 구층목탑을 해체 복원하였는데 그때 보문사의 스님인 '은전(隱田)'이 대탑불사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셋째, 인각사의 일연 스님의 비문을 세울 때 보문사와 천룡사의 스님이 참여하였는데 비문의 음기에 보문사 명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보문사는 871년에는 사세가 번창하였고 고려시대까지도 법등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절의 규모로 보아 왕실에서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에는 목탑이 유행하였고 통일 후에는 석탑만을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9세기에 창건된 이 절터에 동서 쌍탑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목탑의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탑의 연화문 대석 아래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목탑터에 사리장치의 덮개돌이 발견된 것은 황룡사터와 보문사에 남아있는 것이 유일하다. 특히 보문사의 덮개돌은 연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보문사터에서 바라보면 낭산과 남산이 중첩되어 보인다. 남산은 어머니요, 낭산은 아기의 모습이다.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그 모습을 바라다보며 낮은 언덕길을 넘어서면 산기슭의 노송 숲 속에 오롯이 자리잡은 고분이 보인다.
효공왕릉이다. 경주에는 왕릉이나 절터의 위치가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왕릉의 위치를 기록하면서 사찰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후대에 왕릉의 위치가 뒤바뀌면서 역으로 사찰의 위치도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효공왕릉은 사자사도 찾아내고*
이 능은 1730년대에 지정된 11기의 김씨 왕릉 가운데 하나인데 효공왕릉이라는 증거는 없는 실정이다. 양식으로 볼 때 9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능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효공왕릉이 「사자사의 북쪽에 장사지냈다」(葬于獅子寺北)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이 효공왕릉으로 지정되면서 역으로 마을의 동쪽에 있는 절터가 사자사터가 된 것이다.
이 절터에는 9세기 중엽의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었는데 현재는 경주역 광장에 옮겨졌다. 이 탑은 황오동 삼층석탑 또는 배반동 사자사터 삼층석탑으로 불려지는데 대체로 신라 말기의 탑으로 보인다. 도심의 매연에 시달려서 인지 검게 그을린 채로 찾는 이 없는 모습이 퍽 안타깝게 느껴진다.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 같다. 유물은 제자리에 두고 그곳에 그 유물을 세운 그 시대 사람들의 심리와 역사성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경주는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왕의 잘못된 자료를 통하여 또 다른 잘못된 이해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유물의 보존상 박물관으로 옮기는 경우가 가끔 있으나 현장에 두고도 얼마든지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이미 제자리를 떠난 유물이라 할지라도 지역민들이 보존할 수 있는 능력과 관리의지가 있으면 제자리로 반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