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사 연구의 유익
1)기독교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게 한다.
2)과거의 이리을 통해 내일의 거울이 되게 한다.
3)신앙 영웅들의 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4)기독교가 세계 문명 발달의 대원천력 세력임을 알게 된다.
5)고상한 영적 힘을 얻게 한다.
3. 교회사의 학문적 위치
1)신학 분야 가운데 역사신학에 해당한다.
2)교회사에는 교리사, 사상사, 교회사, 교회정치사, 기독교 문화사 등이 포함된다.
3)연구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다.
4. 교회사의 시대 구분.
1)고대사(A,D, 1-590)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까지.
(1)사도시대(1-100)...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사도후 시대(100-313)...콘스탄틴누수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니케야 회의 시대...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별칭 :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종교
서방 4대 교부(敎父)의 한 사람으로 교회박사이기도 하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라 한다. 아버지는 원로원 의원. 로마 시장(572~573)을 거쳐 수도사로서 로마 ·시칠리아 등 7개소에 사재로 수도원을 설립하고 스스로 수도사가 되었다. 교황 펠라기우스 2세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장기간 체재하였으며, 590년 교황이 되었다. 최초의 수도사 출신 교황이다.
탁월한 정치력으로 이탈리아에서 로마 교회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하였으며, 비잔틴 제국과 랑고바르드족(族)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등 외교 역량도 돋보였다. 성직의 매매를 금하고 복음화사업 ·사회사업을 장려하였으며, 특히 빈민 ·난민 ·포로 ·노예를 보호하하면서, 로마 ·시칠리아 등의 교황령(敎皇領)을 확보, 교황권을 확장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멀리 앵글로색슨에게까지 전도하고, 특히 프랑크족(族)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욥기》와 복음서를 비롯하여 많은 성서해설과 서간문 ·사목규칙(司牧規則) 등의 저술을 통하여 종교 ·문학 방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성가집 《그레고리오성가(聖歌)》를 편찬하게 하여 교회음악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3)근세사(1517-현재)
종교 개혁부터 현재까지
(1)종교 개혁시대(1517-1648)...종교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 조 약까지
(2)근세 시대(1648-1800)...프랑스 혁명까지
(3)최근세 시대(1800-현재)
제2강 천주교 전래
1. 카토릭의 전래와 박해
1). 천주교 전래 과정
①임진왜란 때 포르투칼 신부가 종군 신부로서 일본군과 함께 입국하였다. 1594년 12월 28일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교직자인 포르투칼 신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가 입국하여 일본의 고메즈 교구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②실학의 박달로 마테오 릿치의 천주실의등이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들어옴.
③정묘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북경에 와 있던 신부 아담 샬과 친분을 맺고 천주교와 서양 의 과학기술을 배운 것이 두 번째 만남이다. 새로운 서양문물을 가져온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노론들에게 미움을 샀고, 그러다가 귀국한 지 두 달 남짓해서 의문의 죽음을 맞고 말았다.
④1783년 이승훈이 빼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옴.
2). 초기 천주교 박해와 그 원인
천주교는 계속 보급되어 영조 때는 해서·관동지방에 널리 퍼졌다. 제사는 우상숭배라 하여 제사를 없애는 사람도 생겨났다. 조상에 대한 효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에서 정부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왕은 천주교를 엄금시켰다. 1758년의 일이다 그때 천주교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자였던 이승훈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 모임을 가지고 있을 때 순라꾼들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중인인 김범우가 잡혀 고문받고 귀양가서 죽으니,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나머지는 양반이라 하여 훈방해 돌려보내고 천주교 전교를 금했다.
그로부터 약 6년 후인 1791년(신해박해) 전라도 진산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어머니 상을 당해서 위패도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윤지충은 정약전의 외종동생이다. 윤지충과 그를 옹호한 사촌 권상연 두 사람은 패륜아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서양서적들이 불태워지고 민간에서도 서양서적을 갖는 일이 금지되었다.
천주교, 즉 서학은 지배층에게는 체제와 정통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유교윤리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이요,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교이념으로 유지해온 조선에 대한 부정이요 도전으로 보였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 하며 세상을 뒤바꾸고자 하는 무리들'로 규탄 받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초기에 천주교를 믿은 사람은 주로 양반, 그 중에서도 당쟁에서 밀려난 남인들이었다. 실학자의 대부분이 이 남인에서 나왔으며, 실학자 중 서학과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천주교가 주로 권좌에 서 밀려난 양반들 사이에서 믿어진 탓에 양반들의 권력다툼이 천주교 탄압으로 표면화된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초기의 천주교는 박해와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해의 원인은,
첫째, 사상적으로 유교사상(충, 신분중시)과 그리스도교 평등 사상의 충돌
둘째, 사회적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의 제사(효)를 거부했다는 것
셋째, 정치적으로 당파 싸움의 방편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2)기해박해 [ 己亥迫害 ]
1839년의 기해박해 - 헌종 -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프랑스 선교사 순교 200명 순교
요약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주교 앵베르는 교인이 고초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과 샤스탕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3)병오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 헌종 - 김대건 신부 순교
요약 -- 1846년 6월 5일(음 5월 12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어 9월 20일(음 7월 30일)에 종결된 천주교 박해.
언제 : 1846년 6월 5일∼1846년 9월 20일
어디서 : 백령도 부근 순위도 등산진에서
누가 : 김대건 신부가
무엇을 : 외국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입국할 비밀항로를 개척하다가
어떻게 : 체포되어 효수 경중의 판결을 받아 김대건과 관련된 천주교인 9명이 사형당함
본문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하였으나 기해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는 박해의 근거는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ol) 주교의 지시로 외국의 선교사가 입국하기 쉬운 새로운 해로를 개척에 나서야만 했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서해안 등을 항해하다가 6월 5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김대건 신부와 관계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형벌을 받고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Ccille)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기해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3명의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조정에 전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세실의 조선 원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어 효수 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그로부터 3일 후에는 현석문도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에 남아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은 매를 맞고 죽어 순교하였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해온 신자들의 대응이 재빨랐고 조정에서도 새로운 척사령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을 순방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어 1846년 11월자의 서한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고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1847년에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어 1925년 7월 5일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베드로 성전)에서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시복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4)병인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 고종 - 최대 규모의 박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명 순교. =>병인양요의
요약 --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본문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롤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좇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2. 신교의 전래
제3강 신교의 전래
1)선교사 전시대
① 1832년 화란선교사 구쯜라프가 금강입구와 만주에서 한인에게 선교.
② 1865년 토마스 선교사의 대동강변에서 순교---개신교의 첫 순교사.
③ 1872년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만주에서 개척 전도를 하며 한인에게 전도.
④ 1876년 외국에서 한국인 첫 세례받음---백홍준, 이웅찬, 이성하, 김진기
⑤ 1882년 로스역 성경(누가, 요한복음)의 발행 반포.
⑥ 1883년 송천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⑦ 1882년 12월 신사 유람단으로 이수정이 일본에 가서 입신, 성경 번역.
2) 선교사의 입국.
① 1884년 알렌의사 부부가 입국하여 의료 선교 실시.
광혜원 [ 廣惠院 , Widespread Relief House ]
요약
1885년(고종 22)에 고종의 허락과 미국인 선교사 H.G.앨런의 주관 아래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본문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1885년(고종 22년) 2월 29일 미국 선교의사인 H.N.앨런(한국명:安蓮)이 서울 재동(齋洞)에 왕립 광혜원(王立廣惠院)을 설립했다. 앨런은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王室附)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병원 설립을 건의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았다.
정부는 광혜원 규칙을 제정해 국립병원으로서 원장 격인 광혜원당랑(廣惠院堂郞)을 두었으며, 의료진으로는 미국인 의사인 알렌을 초빙해 환자 진료를 실시했다. 이외에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와 사무를 맡아보는 직원을 두는 등 의사 앨런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 관리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광혜원은 개원 12일만인 3월 12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꿨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수와 업무량이 많아지자, 선교사 J.H.헤론이 가세하여 의료활동에 종사하였다. 1886년 여의사 A.J.앨러스가 오면서 부인부(婦人部)가 설치되고, 이듬해 정부의 후원으로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을지로 입구 한국외환은행 본점)으로 옮겼다. 고종은 제중원의 의료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앨런과 엘러스에게 당상관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②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정식으로 입국하여 선교사업시작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언더우드(1859,7,19~1919,10,12)
출생:영국의 런던에서 존, 언더우드의 4남으로 태어남
활동분야:선교활동
서훈:고종황제로부터 태극훈장을 받음
1963년 국가공로 대통령장
저서:(한국교회 초기 선교역사ㅡ와서 우릴도우라)
활동사황: 1885년에 제물포(지금의 인천)항으로 도착한 장로교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라 부부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한국에 입국한것이다
1884년 12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한 언더우드선교사는 다음해인 1885년 1월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서 먼저 일본에 도착하여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에게 환영을 받고 잠시 쉬었다가 최후의 보류지인 한국으로 출발하여 1885년 4월5일 역사적인 한국에 상륙하게 된것이다
(언더우드)가 한국에와서 처음으로 한것은 알렌이 개설한 제중원 의학교에서 화학과 물리학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1886년에 고아원을 겸한 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경신학교의 전신이다
언더우드의 공로중 가장 큰 업적중의 하나는 자기가 설립한 경신학교대학부에서 출발시킨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이었다
후에 연희전문학교는 한국 교육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한 연세대학교로 성장하게 된것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선교 활동이 어느정도 허용되자 자신의 집으로 14명의 신자들을 초청해서 1887년 9월 14일 정동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 교회는 점차 발전하여서 정동에서 신문내로 옮겨 새문안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열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최초의 조직교회인것이다
낮선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그는 같은 목적을 갖인 (호튼)을만나 결혼을 하게된다
그는 비록 영국에서 태어 났으나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서 잠들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위해 온힘을 쏟아 노력하든 그는 과로로 인해 1916년 10월 어느날(12) 고요히 잠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잠들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고 그는 그의 소망대로 한국에서 잠들고 있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한국사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호튼과의 결혼생활에서 2세를 남겼다 그의 아들 언더우드H.H.Underdwood는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서 아버지의 모교인 뉴욕대학을 마치고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후에 귀국하여 아버지의 하든일을 이어받아 경신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제3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기도 했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일제의 만행을 온세계에 알리기도 하며 아버지 언더우드의 못이룬 한국사랑을 실천해 가면서 살아간다
한국을 사랑해서 한국인이된 언더우드 그는 그래서 한국을 버리지 못하고 죽어서도 한국에 잠들고 있으며 영원한 한국인이길 바라는 것이다
그는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한국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며 진정한 나라사랑법을 보여주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③ 계속하여 각교파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전도에 열심을 다하였다
3, 네비우스 방법
네비우스 선교정책 [ Nevius Mission Plan ]
요약 -- 초기 미국 북장로교회가 한국에서 채택하였던 선교 정책.
본문
19세기 말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을 위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네비우스 선교사의 제안에 따라 채택한 선교정책이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1890년까지 H.N.앨런, H.G.언더우드 등 10여 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갓 신학교를 졸업한 2,30대의 청년들이었다. 해외 선교 경험이 없던 이들은 한국에 와서 선교부와의 관계, 한국인과의 관계, 선교사들 간의 원활한 관계 등을 정립하지 못하고 많은 시행 착오와 갈등을 겪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도움을 청하였고, 선교부는 당시 중국 체푸에서 활동 중이던 네비우스(John L. Nevius)를 서울로 보냈다. 그는 이미 1855년에 중국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논문집 〈선교 방법론(Methods of Mission Work)〉을 발표하여 선교부로부터 큰 평가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내한하여 서울에 2주간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회합을 갖고 강연을 하였는데, 그의 논문과 강연은 당시 선교정책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던 선교사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네비우스는 선교사업의 궁극 목적을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교회 형성’에 두고, 선교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治理)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이들 이념은 이미 각국 선교회에서 제기되었던 것으로 19세기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과 함께 추진했던 토착교회 육성 방안이었다. 그는 특히 토착교회의 자립 능력을 강조하여, 토착인 전도사도 선교부의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토착교인들의 헌금으로 활동하게 하였고, 학교나 병원 등 시설비가 많이 드는 기관을 제외한 교회 건축비는 토착교인들이 부담하도록 유도하였다.
장로회 선교사들은 각기 네비우스의 선교 원칙을 한국 상황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하여 여러 가지 방법론을 마련하였으며, 이런 방법론은 1891년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에 정리되었고, 1893년에는 한국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에서 10개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확정되었다. 10개 정책은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인 ‘3자(三自)’ 이념을 그대로 반영한 외에, 선교 대상을 근로자와 부녀자 중심, 청소년 중심으로 잡고, 성서를 번역, 보급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이후 미국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에게 그대로 채택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의 보편적 선교정책이 되었으며,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침례교 등의 타 교파 선교부도 이 정책의 실질적인 영향을 받음으로써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정책이 되었다
(1) 발단.
1890년 6월경 중국 산동성 주제 네비우스 선교사를 초청하여 선 교 방법을 듣고 한국교회 선교의 기본 원칙을 정하였다.
(2)방법
1. 개인 전도
2. 교회 자치
3. 학교 설립(교육 강조)
4. 교회의 자급운영
5. 기독교 윤리 엄수
6. 의료 전도
7. 사경회 실시
8. 여자 전도
9. 모든 기독교 서적을 한글로 출판
10.기도 생활
(3) 결과--(자립전도, 자치, 자급)
1. 한국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됨.
2. 성경 중심의 교회.
3. 기도하는 교회
4. 전도하는 교회
5. 교육하는 교회
4. 장로교 총회조직
1) 선교사 공의회
① 1885년 이미 내한한 북장로교 선교사 5명이 북장로교 선교사회 조직
② 1889년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와 연합공의회 조직(이듬 해 데이비스 목사의 사망으로 자연히 폐지)
③ 1892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1893년 (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미션회>가 조직됨.
④ 1898년 케나다 장로교 선교사,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의 내한으로 계속 합류.
⑤ 이때까지는 친목 단체 구실을 했다.
2).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
① 1901년 선교사와 한국인 총대가 참석하여 공의회 조직.
② 회원...장로 3인, 조사6인, 선교사 25인.
③ 결의
a, 평양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설립.
b, 한국 자유 장로회 설립을 위한 위원 선출.
3) 독노회
①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 조직.
② 신학 졸업생 7명에게 첫 목사안수---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김선주, 이기풍, 송인서
③ 제주도 선교사 파송---이기풍 목사
1)노회창립 이후 이기풍 제주도에 파송후 러시아에 최관훈 목사를 일본 동경에 한석진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했다.
2)독림노회 창립당시 교세는
목사=(선교사포함)49명
조사= 160명, 장로=47명, 세례교인=18,061명, 교인총수=72,968명
지교회=785교회, 소학교=405개, 학생=8,615명, 연보총액=94,022원
④ 의사봉 제정.- 고퇴-두드리는 맛치
4). 예수교 장로회 조선 총회
① 1907년 독노회 조직 이후 교회가 계속 발전하여 7개노회로 분활하는 동 시에 총회 조직.
② 1912년 9월 1일 평양서 조직
③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뚱성에 선교사 파송---<역대 선교사> 김영 훈, 박봉호, 사병순(1913), 박상순, 홍숭한, 방효원, 이대영, 방지일, 김호순(여).
5. 기독교 조선 감리회 창설
1) 선교사의 내한.
① 1885년 아펜셀러 입국후에 감리교회에서 선교사 계속 파송.
② 1927년도부터 합동 운동이 일어나 미국, 남북 감리회 총회의 승인을 받 아 조선 감리교회를 조직토록 하였다.
2> 조직.
① 1930년 12일 2일 제1회 총회가 서울 협성 신학교에서 개최하여 제1대 총리사로 양주삼목사 피선.
②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식 거행.
6. 1907년 부흥 운동
1) 발단.
① 네비우스 방법으로 사경회와 성경 연구열이 고조되었다.
②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들의 수양회에서 성령의 역사 체험.
③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운동 일어남.
④ 길선주 목사 인도의 부흥회로 새로운 영적 각성운동 전개.
2) 결과
① 남녀 노소, 유무식자, 선교사, 국내교역자, 신구신자를 막론하고 성령 의 감화를 받음.
② 각자의 죄를 통해 자복하므로 화해와 사랑의 분위기 조성
③ 새로운 사랑과 봉사의 능력 받음.
④ 학교는 2주간 휴학하고, 일반은 사무중지, 상가는 철시하여 기도에만 말씀.
7, 백만명 구령운동과 전진운동.
1) 백만명 구령운동
1)발단(1910-1911)
① 1910년의 한일 합방으로 좌절감에 잠긴 백성들에게 영적 각성을 줌.
② 민족의 활로로서의 교회 사명 자각.
2) 결과
① 전도헌신 일수가 연10만일이 되었고 70만권의 마가복음을 배포
② 일본 총독부의 교회 탄압의 기회가 되었다.--105인 사건.
2) 전진운동
1) 발단
① 1910년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 교인이 었고, 조직, 동원의 모체가 교회였다.
② 3.1운동으로 교회 피해는 극심하였다. 장로교만 해도 목사와 장로 체포 134명 교인 3,804, 사살 교인47명, 재산 피해 약 3만 달러.
2) 결과
① 장로 교회의<전진운동). 감리교회,<백년 전진>등을 조직적으로 전개.
② 주일 학교 운동이 활기 띄다. 1920년 <주일학계>잡지 발행, 1921년 전 국 주일학교 대회 계최.
③ 김익두 목사의 신유부흥 운동으로 새로운 영적 감화를 끼침.
8, 신사참배 강요와 수난.
1) 강요
① 1934년 선교 50주년 희년행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② 1935년 가을 숭실 전문학교장 맥큔이(윤산온) 평남 지사에게서 신사참 배 강요를 받았다.
③ 1938년 9월 10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식이라 하여 참배키로 결의하였다.(1954년 제39회 총회가 안동에서 모여 27회 결의를 취소)
2) 수난
① 1943년 장로회 총회가 해산되고 일본 기독교단 조선 교단으로 변함.
② 1943년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를 폐쇄
③ 주기철, 최봉석 등 수 많은 순교자와 진리 파수 위해 옥고를 당한 많은 산 순교자를 내었고 한국교회의 대수난기가 되었다
9. 교회의 분열과 합동
1)장로교의 제1차 분열.
① 1946년 9월 고려 신학교 개교.
② 출옥 성도들이 교회 재건안과 일제시 일본 신도에 귀의했던 교직자 사 이의 알력.
③ 장로교 총회의 고려파 단절.
④ 1952년 9월 11일 고려파 총회를 따로 세움.
2)장로교회 제2차 분열.
① 1938년 9월 30일 평양 신학교가 신사 참배문제로 무기 휴학.
② 1939년 가을, 서울에서 조선 신학교 개교.
③ 해방후(1947년) 조선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불만을 품은 조선 신학 생 51명의 진정서가 총회에 제출되다.
④ 자유주의 신학(김재준교수 주도) 문제로 1953년에 기독교 장로회가 설 립되다.
3) 장로교의 제3차 분립.
① 1959년 9월 대전서 모인 제44회 총회에서 WCC 문제와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 등으로 분열.
② 교권과 선교사의 작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세칭 승독측(합동)과 연동 측으로 분열 되었다.
4) 감리교회의 분열과 합동
① 1945년 가을, 감리교 재건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재건을 논의 하였으 나 소위 부흥파와 유지파로 분열되었으나 1949년 3월 <기독교 대한 감 리회>로 합동하였다.
② 1954년 3월 감독 선거로 호헌파가 생겼으나 1959년3월 재합동
③ 1975년 총리원측과 총회측으로 분열 되었으나 재합동 운동이 계속 일나 고 있다(1978,5 현재)
5) 성결 교회의 분열과 합동.
① 1943년 12월 29일 총회 해산.
② 1945년 11월 9일 재건 총회
③ 1960년에 연합 기관 문제로 분열하여 기독교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 (O.M.S)와 관계를 밎고 예수교 성결교회는 I.C.C.C.와 관계를 맺고 있다.
6)장로교의 합동 운동
①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a, 신학, 주장, 대외 관계가 같으므로 1960년 12월에 합동하여 이른바 합동측을 형성.
b, 1962년 고신측 인사들 가운데 환원하여 고신측을 다시 형성
② 합동측과 통합측의 합동 모색.
a, 1965년 지방에서 일어남.
b, 1967년에 급진되었고 쌍방 총회가 위원을 선출하고 합동 원칙, 세칙 까지 작성하고 1968년 3월 1일 오후2시에 대전에서 합동 총회를 개최 키로 하였으니 통합측이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않아 백지화 되 었다.
10. 교회 성장 운동
1)운동의 의의
민족 복음과 운동, 전군신자화 운동, 빌리그레함 전도 대회, 엑스 폴로74, 선교 100주년 향한 교회 성장운동, 77민족 성회등 일련의 전도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자원 집중과 민족 복음화에 새로운 역사를 이룸.
2)운동의 확산
각교단, 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새로운 개척 운동과 전도 운동은 안으로는 민족 복음화, 밖으로는 해외 선교운동에 새로운 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