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국어교사 연구회의 기관지 "글누리"에 발표한 뒷부분입니다.
양사언과 봉평
영국의 Stradford upon-avon은 인구 2만명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생가가 있기 때문에 1년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8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 든다. 문학의 또 다른 힘이다. 세익스피어의 문학은 세계적인 생명력을 발휘한다. 봉평도 공간을 초원한 세계적 명소로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봉평은 문인이나 환경적 조건으로 보아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다. 하나의 주제만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것도 좋지만 있는 자료를 살려내지 못하는 것은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각 지자체별로 옛 문인이나 역사적 인물을 통하여 격이 높은 문화관광을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봉평이 보다 더 역사와 깊이가 있는 문학의 고장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봉평에 인연이 있는 옛 문인이나 정치인을 동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 문학의 명소로 올려놓기 위한 포석은 문학의 장르가 다양할 수록 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봉평에는 바로 그런 재목이 있다. 이효석과의 만남보다 더 쉽고 많이 알려진 사람, 바로 양사언이다. 이율곡은 강릉과 파주의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봉평에서 주제로 택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양사언을 주제로 한 축제나 공원은 아직 아무 데도 없다. 심지어 그가 탄생한 포천(출생 당시에는 양평이었음)에서조차 양사언을 잊고 있다. 양사언의 탄생에 얽힌 설화 같은 이야기나 서출 자식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은 양사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이 있는데도 이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효석보다 더 멋진 삶을 살다간 양사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거의 외우다시피 알고 있는 봉래 양사언의 시조다. 그러나 그 양사언이 봉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정작 봉평에 가서도 이효석과 메밀꽃만 찾는다. 봉래 양사언은 1517년에 태어나 1568년까지 살다간 정치인이자 문학인이다. 1546년 (명종1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출생의 한계 때문에 중앙무대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항상 변방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복이었다. 강원도 금강산 주변의 삼등, 함흥, 평창, 강릉 등의 지방관을 역임한 후 회양, 철원, 안변군수를 지내면서 금강산을 안식처로 삼아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특히 안변 군수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정3품의 당상관에 해당하는 통정대부에 오르기도 했는데 관내의 지릉(智陵) 화재사건으로 귀양살이를 해야 하는 영욕(榮辱)을 동시에 누리기도 했다. 2년 후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객사하는 불운을 당했지만 그는 금강산 주변의 변방을 전전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참다운 금강산인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금강산과 더불어 호흡하고 금강산에서 심신을 수양하며 살던 봉래 양사언. 그는 만폭동 폭포의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명필을 남기고 금강산의 신선이 되었다.
양사언의 출생은 청구야담을 비롯한 계서야담, 해동야서, 동야휘집 등에 여러 설화집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극적인 부분이 있다. 청구야담이나 해동야서 등 다른 책에는 양사언과 동생 양사기가 성종에 발탁되어 출세하는 고대소설과 같은 해피엔딩의 구성을 보이지만 동야휘집과 계서야담에 실린 이야기는 현대 소설과 같은 극적인 면이 있어 더 흥미를 끈다. 서출이라는 양사언의 신분을 감춰주기 위해 어머니는 남편의 성복날에 본처의 아들 양사준에게 두 아들을 서출취급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우연히 열 여섯의 나이에 주부 양희수를 대접한 것이 인연이 되어 사언과 사기 형제를 낳았던 처녀는 그렇게 두 아들의 삶을 위해 죽음으로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항거하는 초인적인 사랑을 보여 주었다. 안평대군, 한석봉, 김구 등과 더불어 조선전기 4대 명필로 필명을 날린 양사언은 그런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유유자적하는 금강산인으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호(號)도 금강산의 이명(異名)인 봉래(蓬萊)라 하였다.
그 양사언이 강릉군수로 부임하던 중 봉평(당시에는 봉평이 강릉에 속했음)에 들러 평촌리의 물가에 있는 명승지를 보았다. 그 경치에 반해버린 봉래는 8일동안 머물며 선경을 즐기다가 八日亭이라는 정자를 짓게 했다. 그리고 시절이 좋은 봄, 여름, 가을에 들러 시와 바른 정치를 위해 사색하곤 하다가 여덟 개의 바위에 저마다 생긴 대로의 특징을 살려 이름을 짓듯 글씨를 새겼다. 봉래(蓬萊 : 삼신산 중의 하나로 금강산을 말함) 방장(方丈 : 삼신산 중의 하나로 지리산을 말함) 영주(瀛洲 : 삼신산 중의 하나로 한라산을 말함) 석대투간(石臺投竿 : 낚시하기 좋은 바위) 석지청련(石池淸蓮 : 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돌로 만든 연못) 석실한수(石室閑睡 : 방처럼 둘러쌓여 낮잠 자기에 좋은 곳) 석요도약(石搖跳躍 : 뛰어오르기 좋은 흔들바위) 석평위기(石坪圍碁 : 바위가 평평하여 장기 두던 곳)가 그것이다. 봉래는 전설 속의 삼신산을 이곳에 모아 놓고 신선다운 삶의 여유를 모조리 연출해 낸 것이다. 부임지를 옮기는 사람으로서의 긴장감이나 서두르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야말로 신선다운 여유뿐이다. 그 후로 사람들 이 이곳을 팔석정이라 했는데 지금도 맑은 계곡에 흐르는 물은 봉평 시가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승을 이룬다. 봉평을 찾으면 반드시 팔석정 앞에 있는 민박집에서 묵기를 권한다. 양사언의 호연지기를 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맛을 보너스로 느낄 수 있이 때문이다.
한정된 지면 때문에 이효석과 양사언의 작품을 낱낱이 살펴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인간적인 삶을 통해 봉평에 얽힌 문학과 인물을 연계하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