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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1641~1674)
현종 시대는 밖으로부터 외침이 일체 없었고 내적으로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현종은 집권 15년 동안 예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 속에서 지내야 했다. 따라서 현종 시대는 한마디로 예론 정쟁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이며 인선왕후 장씨의 소생이다. 1641년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 심관에서 심관에서 태어났으며, 1649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 즉위 후 1651년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659년 효종이 죽자 조선 제 18대 왕에 즉위하였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복제 문제로 인한 남인과 서인의 예론 정쟁에 휩싸였다.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 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된 것이다. 이 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도화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 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 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지으며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 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세웠다. 현종은 이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1674년 8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후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의 파장은 <현종실록>에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 대의 경신대출척(1680년) 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현종은 재위 15년 동안 끊임없이 이 예론 정쟁에 휘말리면서도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펼쳐나갔다. 군사적으로는 효종 대에 비밀리에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북벌계획이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를 중단하는 대신, 군비 증강을 위해 훈련별대를 창설하였으며, 민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 이후 꾸준히 실시해오던 대동법을 호남 지방 전역에 확대 실시했다. 문화적으로는 인쇄 사업 육성을 위해 동철활자 10여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관측법과 역법 연구를 위해 혼천의를 다시 제작케 했다. 그리고 예론 정쟁이 활발히 일어나 사회 예절이 강조됨에 따라 동성 통혼을 완전히 금지시켰으며, 또한 정실이 개입될 요인을 없애기 위해 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있거나 송사를 맡거나 시험관을 맡는 것을 금지시키는 상피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제주도에 표루해 압류되어 잇던 하멜 등 8명의 네덜란드인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14년간의 억류 생활을 서술한 <하멜표류기>와 부록인 <조선국기>를 발간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종 새대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사회적 발전은 없었다. 다만 외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시대에 비해 비교적 평화롭고 한가로운 시절이었다. 예론 정쟁은 비록 학문적 사상이 정쟁으로 비화된 대표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론이 이 같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됐다는 것은 현종 당시가 그만큼 별다른 변란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종은 남인과 서인의 극단적인 예론 정쟁에 시달리다가 167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부인을 명성왕후 김씨 한 명만 두었으며, 그녀에게서 숙종과 세 명의 공주를 얻었다. 능은 숭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숙종(1661~1720)
숙종은 현종의 외동아들로 명성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순, 자는 명보였다. 이후 1667년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숙종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 되어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붕당 내부의 파행적 운영이 심화되어 자체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러한 붕당의 자체 파탄을 심화시킨 사건이 현종 이후 숙종 대까지 계속 이어진 예송 논쟁이었다. 숙종은 즉위하자 곧바로 현종 시대 정쟁의 핵심 사안이었던 이 예론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1674년 정월,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그리고 인선왕후를 차자비로 다루어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9개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대공설을 주장했다. 반면 남인측은 여전히 효종이 왕위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1년 장자부 기년설을 내세우며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인 바 있었는데, 현종이 그 해 8월에 죽자 그때까지도 인선왕후의 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서인에 의해 다시 복사 문제가 거론되었던 것이다.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 세력이 다시 복상 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 해 9월에 남인의 지지 세력인 영남학파의 진주 유생들은 송시열의 예론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기호학파를 지지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며 진주 유생들을 공격했고, 이 때문에 전국 유생들은 모두 예론시비에 휩싸이고 말았다. 숙종은 예론 정쟁이 발발하자 즉각적으로 부왕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시켜버렸다. 그것을 기화로 서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조정은 남인에 의해 장악된다. 그러나 기호세력의 유생들이 집결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재야 선비 사회의 이 같은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해나갔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제 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응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을 제거하자 많은 서인들이 함께 제거되었고 그 때문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서인 세력의 발언권이 정계에서 완전히 상실될 지경에 이르자 김석주는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 했다.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락은 이른바 '삼복의 변'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남인 세력 축출 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경신 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정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 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되기에 이른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권을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 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은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기간은 5년밖에 가지 못한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은 남구만 등의 소론 세력이 장악했으나 이들은 7년 뒤에 발생한 '무고의 옥'으로 노론계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 대신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을 생각하야 한다고 간언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시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 사실을 안 숙종은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ㅇ르 내렸다. 또한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궁녀 및 무속인들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때에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용서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원, 최석정 등의 소론 세력까지 귀양보내거나 파직시켜 정치 일선에서 제거해버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촉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불안한 연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1711년 윤서거와 유계가 공동 집필한 <가례원류>에 대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의 저자 논쟁으로 소론측이 위축되자 1716년부터 노론측이 노골적으로 소론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래 윤씨와 유씨의 집안 싸움이었는데 각자 몸담고 있던 정파가 달랐기 때문에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가례원류>는 원래<가례>를 본문으로 삼아 의례, 주례,예기 등 삼례에 관계되는 사항을 뽑아 '원'이라 하고, 주회 이후 여러 학자들의 사례에 관한 예절을 나누어 모아 '류'라 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서인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집필하고 윤증이 증보한 것이었는데,유상기가 저자를 유계 단독으로 표시하여 숙종에게 품신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윤증은 유상기를 비방하게 되었고, 유상기 또한 반론을 제기하며 윤증을 비난했다. 당시는 서인 사이에서 노론, 소론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집안 싸움이 확대되어 소론과 노론의 정쟁으로 번졌고, 결국 윤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으로써 소론측이 위축되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유생들의 공격에서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와 왕자(영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정쟁은 당대의 숱한 명사들을 죽음으로 몰고갔으며, 붕당 정치의 폐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정쟁의 격화는 붕당 정치의 갖은 폐단들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보면 숙종이 왕권의 강화하기 위해 벌인 환국 정치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은 현종 대의 예송논쟁으로 손상을 입은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환국정치를 감행했다. 즉,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행사하여 정치 국면의 전환을 꾀함과 동시에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렇듯 숙종 대는 대신들 사이의 정쟁이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던 사회 체제 전반의 정비 및 복구작업이 거의 종료되었다고 할 만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우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김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 같은 경제 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 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 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정 1인의 군포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총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숙종은 1720년 약 46년 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6명의 아내에게서 9명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의 시오능에 있다.
경종(1688~1724)
정계 일선에서 남인 세력의 힘이 극도로 약해지고 조정이 서인 일색으로 되자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것을 목격한 비운의 왕 경종이 즉위한다.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의 등극은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예고하고 있었다. 경종은 1688년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 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 자는 휘서이며 태어난 지 두 달 만인 1689년 원자로 정호되었다. 그가 원자로 정호되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젊기 때문에 후궁의 아들 균을 원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죽었으며, 이때 많은 서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했다. 원자로 정호된 균은 1690년 3세 때에 다시 세자에 책봉되고, 그의 어머니 장씨도 빈으로 승격하였다가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장씨는 갑술환국으로 폐비 민씨가 복위하자 1694년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1701년 '무고의 옥'으로 사사되었다.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사될 때 세자 균의 나이는 14세였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줄곧 병환에 시달렸으며, 후사도 얻지 못했다. 일설에는 그가 아이를 얻지 못한 것이 희빈 장씨 때문이라고 한다.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숙종은 1716년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중용한 후, 1717년 세자가 병약한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 또한 그 해에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대리청정을 명했다. 연잉군의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소론측이 '흠을 잡아 세자를 바꾸려 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그래서 이때부터 세자 균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 같은 논란 속에서 세자 균은 1720년 숙종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제 20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측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런데 노론측은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측이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아들였다가, 소론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 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락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 3개월 뒤인 1722년 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다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축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반하여 이 같은 음모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ㅅ되었다. 국청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은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신임사화 후 정권은 소론에 의해 독점된다. 하지만 경종이 병이 악화되어 1724년에 죽고 영조가 들어서면서 소론의 짧은 정권 독점기는 끝나고 만다. 생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생모에 의해서 생산 능력을 상실한 채로 어렵게 왕위에 올라 병석에서 4년을 보내다 죽은 경종 시대는 이처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때문에 경종은 재위 4년 동안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경종은 1724년 8월 재위 4년 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는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정비는 심호의 딸 단의왕후였고, 계비는 어유구의 딸 선의왕후였다. 능은 의릉으로 서울 성복구 석관동에 있다.
영조(1694~1776)
영조는 1694년 숙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무수리 출신 화경숙빈 소생으로 이름은 금이다. 이후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17년에는 숙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한 바 있으며, 1721년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24년 8월 이복형 경종이 죽음에 따라 조선 제 21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자 가장 먼저 자신을 곤경으로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이에 노론측의 이의연이 경종 집권 당시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장하다 처벌된 대신들을 신원해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을 펴다가 소론측의 탄핵을 받아 오히려 유배되고 말았다. 또한 노론의 송재후는 김일경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임인옥사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기록한 교문의 초고 중에서 3건의 문건을 들어 세제 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했다. 3건의 문건이란 종무(노환공자가 자신의 형을 죽인 것), 사구(진시황제가 맏아들 부소를 죽이고 작은 아들 호해를 세운 것) , 접혈(당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것) 등으로 모두 영조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김일경의 이 같은 문건은 사실 세제 연잉군이 경종을 죽이려 한 극악무도한 인간으로 몰고가는 것이어서 김동필 같은 소론 내부의 인물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송재후의 상소가 있자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처에서 빗발쳤다. 그래서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하였으며, 김일경은 끝가지 불복하여 사형되었다. 또한 고변으로 임인옥사를 유발하여 공신이 된 목호룡의 문건 중에도 영조에 저촉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국문당하였고, 끝까지 불복하다가 처형되었다.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정미환국으로 정권을 잡게 된 소론측은 다시 임인년 사건을 들고 나와 4대신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이에 영조는 그들 4대신의 죄명은 씻어주고 관작만 삭탈하는 선에서 소론측과 타협을 보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1728년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급진 세력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 교체를 기도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사건은 경종이 갑자기 죽자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들이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한 모반이다. 군사 동원 계획까지 마련되었던 이 역모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밀려나고 온건 소론 세력이 기용되자 동조자가 줄어들고 모의가 노출되어 최규서, 양성인, 김중만 등의 고변으로 탄로나고 말았다. 모반 계획이 탄로나자 이인좌를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반군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각 읍에 격문을 띄워 병마를 모집하고,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앞세우고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안성, 죽산, 청주, 상당성 등에서 대패하여 궤멸되고 말았다. 이인좌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영남의 정희량, 호남의 박필몽 등이 이에 호응하여 반군을 일으켰으나 안성, 죽산 싸움에서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됨에 따라 타격을 입어 관군에게 패하여 궤멸되었다. 이 난의 평정에는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측 인사였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에서 소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반면에 영조는 이 사건으로 탕평책의 명분을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 왕권의 강화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729년에는 기유처분으로 노.소론 내의 탕평 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영조가 취한 정책은 쌍거호대였다. 즉,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라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 뒤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자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 즉 인재 중심으로 인사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 궤도에 오르자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 시키게 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시켜나갔다. 그런데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도세자 사건'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 때문에 둘째아들 사도세자 선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여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1761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불신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화,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사도'하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아들을 죽인 자신의 행동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한편 사도세자 사건으로 조정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한 벽파와 동정한 시파로 분리되어 새로운 당파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영조는 정치적 신념으로 이끌던 탕평 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또 1772년에는 과거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해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이른바 '동색금혼패'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영조의이 같은 철저한 탕평정책으로 왕권은 강화되고 정국은 안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죄수의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우선 1725년에 주리를 틀어서 국문하는 압슬형을 폐지했으며,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을 금지하였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해서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기했다. 또한 1774년에는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남성의 포경을 자르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 하였다. 영조 시대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민들이 국방의의무를 대신해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들의 의무인 양역의 불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1725년부터 각 도의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에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했을 경우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 점이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 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맹위를 떨쳤던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이 같은 국방 정책을 변방에도 적용돼 요새 구촉을 늘리는 한편, 1727년에는 북관군병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훈련시켰으며,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 개축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했다.
여러 분야에서 시도된 이 같은 변화 이외에도 영조 시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도 많았다.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 세계를 담은 <퇴도언행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1736년에는 <경국대전>을 보강했으며, 여성들을 위해 네 권의 책을 묶은 <여사서>를 언역하고, 1742년에는 <천문도>, <오층륜도>를, 이듬해에는 균역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인쇄하여 각 도에 배포했다. 이 외에 <경국대전> 을 보수한 뒤 새롭게 제도적으로 바뀐 것들을 반영한 <속대전>, 1747년의 <황단의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에 만들어진 <속병장도설>, 1753년에 편찬된<누주통의>,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1754년의<천의소감>, 1747년의 <삼국기지도>,<팔도분도첩>, <계주윤음>등과 1765년의<해동악장>, <여지도서>, 우리나 최초의 백과 사전인 1770년의<동국문헌비고>등이 있다. 영조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해 쓴 <위장필람>, 그리고 <어제경세문답>, <어제경세편>, <백행원>등 십여 권의 책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신학문에 조예에 깊었던 영조의 후원을 받아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신경준의 <도로고> 등이 편찬되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했으며, 1776년3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51년 7개월),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그는 83세를 사는 동안 정성왕후 서씨를 비롯한 6명의 아내에게서 2남 7녀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정조(1752~1800)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으로 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갔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설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래서 '개유와 '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 문화에 열중하면서 전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11세 이후 줄곧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 친위 세력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다. 또한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홍국영의 세도 정치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 정치 기간 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고의로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지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단순한 왕실 도서관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 정치를 펼치려 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정조의 근위 세력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사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열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의 소장 관원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여 상벌을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각 신하들은 초계문신의 시험관이 되게 했으므로 규장각은 실질적인 경연관으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1780년 홍국영이 제거될 무렵, 규장각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고 있었고 규장각에 모여든 인재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정조는 친정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홍국영을 방출시킨다. 홍국영을 방출 시키면서 친정 분위기를 정착시킨 정조는 그 동안 시험 가동한 결과를 바탕으로 17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규장각 확대 작업에 돌입했다. 그가 후에 규장각 설립 취지에서 밝힌 바대로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그 선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에 젖어 있으므로 왕이 의도하는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의 규장각'이 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와'작성지화'라는 규장각의 2대명분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의 이 같은 규장각 중심의 정치는 영조의 탕평택을 계승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당쟁은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영조 때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시파는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고 벽파는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육경 중심의 남인 학파와 친숙하였고, 예론에서도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남인 학파 내지 남인 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리고 신권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젊은 자제들이 북학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학자적 소양에도 호응하고 있었다. 정조가 중용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은 남인 계열의 채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 등과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가자 조정은 당연히 정조의 통치 이념에 찬성하던 시파 중심으로 운영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벽파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을 실감하고 종전보다 훨씬 더 똘똘 뭉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벽파는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는 천주교 수용 여부에 대한 논란 끝에 결국 수용불가 결정이 나면서 일어났다.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ㅇ르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총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 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 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24년 만에 정조의 문화 정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겨 놓은 크나큰 업적들이 있었다. 우선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오던 문물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 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향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문예 부흥의 선봉에 서 있었던 정조는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종기가 도져 세상을 떠났다. 그는 효의왕후를 비롯한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에 있다. 대한제국 성립 후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순조( 1790~1834 )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이며,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였다. 정조와 선빈 성씨 사이에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년(정조24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하였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순조 1년에 들어서자마자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썼다.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 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악명 높은 오가작통법을 써서 전국을 피바다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에는 진짜 천주교 신자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연루돼 죽은 이도 많았다. 당시 잡혀 죽거나 귀양을 간 시파나 남인계 인물로는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있다.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가리켜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완전한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 일이었다. 1800년 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의 6촌 오라비인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결국 1802년 순조 2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 을해년에는 경상, 충청, 강원도의 신자들을 죽이고, 1827년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정조의 유탁을 받은 영안부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 편에서 있던 시파계 일문이었으나, 규장각대교 당시 탕평을 건의하는 등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으로 벽파 세상이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 장을 열게 된다. 후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안동 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탐관오리 등이 횡행하고 농민층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자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도 정권의 성립 초기부터 시작된 농민들의 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5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으며, 마침내 1811년(순조11년)홍경래의 난으로 발전했다.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혁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년 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됐다.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기치로 내걸었던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큰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민란과 역모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며, 1821년에는 서부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순조의 34년 재위 기간 중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는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 리 없었기에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 일문의 세도 정권을 만들어냈을 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 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재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 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한 순조는 20권 20책에 달하는 개인문집인 <순재고>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학문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양현전심록>, <대학유의>, <정조어정홍재전서>, <서운관지>, <동문휘고>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순조는 34년간의 치적을 남기고 1834년 11월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순원왕후 김씨에게서 1남 4녀를 두었으나 효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손자인 환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한다. 그의 능은 인릉으로 경기도 광주에 있다.
헌종(1827~1849)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인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다.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18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어린나이로 경희궁 수정문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인 1841년에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된다. 헌종 대에는 17,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던 신분질서와 봉건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화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헌종 1년, 수렴청정을 시작한 순원왕후 김씨는 홍경래 난의 사후 수습 겸 민심 안정책으로 서북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관리로 등용할 것을 교시한다. 헌종이 열 살이 되던 1837년 3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왕비가 병에 걸려 돌연히 죽자 1844년 10월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이한다. 한편 순조 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헌종 대에서도 계속 이어져 1838년 헌종 4년 봄부터 다시 천주교 탄압을 강화한다. 기해년에 일어난 박해라 하여 '기해박해'라 부르는 이 박해에서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앙베르, 샤스탕, 모바 등 프랑스 신부와 유진길, 정하상 등 천주교 신자가 다수 처형된다. 헌종은 이해 11월에 천주교를 금한다는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내린다. 1840년 헌종 6년 12월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다소 위축되면서 풍양 조씨의 세력이 우세해진다.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이 조만영이 그 거두이다. 조만영은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돌르 확립한다. 그 후 5,6년 동안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 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켰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헌종 대에는 사회가 불안하고 민심이 이반되는 틈을 타서 두 번의 모반 사건이 일어난다. 헌종 2년에 있었던 남응중의 모반과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옥이 그것이다. 1836년 헌종 2년에 충청도로 내려가 있던 남응중은 남경중, 남공언 등과 모의하여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도총집, 남경중을 좌충집으로 하여 청주선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방 이속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도어 남응중 등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1844년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역모는 안동 김씨의 세도가 풍양 조씨 일문으로 넘어가는 권력의 공백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왕조의 위엄과 권위가 어느 정도 실추되었나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의원 출신인 민진용은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해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그들은 특히 하급 무관들을 동지로 규합한 뒤 자신들을 계획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 주모자는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은언군의 손자 원경은 사사된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이나 몰락 양반이 일으킨 이두 모반 사건은 당시의 사황이 누구나 왕권을 넘볼 만큼 왕권이나 정치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헌종 11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 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헌종 12년 6월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 상태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해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 문서가 되었다. 헌종 14년에는 이양선들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등 국내외적인 위기가 조성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이양선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각각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던 헌종은 재위 기간에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삼조보감> 등을 찬수하게 하는 등 학문적 치적을 쌓기도 했다. 14년의 재위 기간 중 6년의 수렴청정 기간을 제하면 9년여의 짧은 친정기간을 갖게 되는 헌종은 그나마 이 기간중에도 세도 정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권을 잡기 위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문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다가 적절한 민생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스물셋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급변하는 국내의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거나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두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1849년 6월 6일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죽었다. 능은 경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철종(1831~1863)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였다. 철종은 즉위 3년 후인 185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지만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도 민생을 돌보는 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보였으며, 철종 말기에 일어난 민란의 수습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친정을 시작한 다음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주도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업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요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민빈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의 실권이 안동 김씨 일파에 있었고 그들의 전횡으로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고 삼정이 문란해져서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1862년에 드디어 진주에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하여 민란이 일어나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리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세도 정치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안동 김씨의 강고한 세도 앞에 그 뜻을 펴지 못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에 달해 있던 철종 대는 그들에 도전할 만한 다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안동 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12월 8일 재위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하나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시켰다. 철종은 죽은 뒤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에 예장되었으며 능호를 예능이라 하였다.
고종(1852~1919)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점차 조선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모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만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성군 이하은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 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 같은 권력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입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성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은 흥선대원군은 가장 먼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분쇄하여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 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으며 경제, 행정개혁 등으로 세도 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한 정책과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 정책을 편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북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우는 사건이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이 같은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보다 2개월 먼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5년 뒤인 1871년에 '신미양요'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셔먼 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 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 '손돌목 포격 사건'으로 조.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과 통상 무역을 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이었다. 이는 오히려 조선민들의 감정만 자극시켜 척화비를 세우는 등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고종비 민씨가 노대신들과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공세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 정책과는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 여론과, 밖으로는 운요 호 사건 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신미양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일본과 수교 이후 고종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는 개항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개화 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형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단을 일본에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게 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수구를 주장하던 위장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한다. 이 때 안기영 등의 대원군 주변 세력은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국왕 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의 고변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었고,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하지만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사건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가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갑오경장이다.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 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군이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다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전락시키는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을미만행은 국제 사회에 알려져 지탄을 받게 되었고, 일본은 이 사건을 사죄하고 형식적인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인으로 폐위되었던 명성황후는 다시 신원될 수 있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반 민간에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전국 각처로 주력 부대를 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지만 의병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고종의 신변 위협은 더욱 심화된다.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어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에 이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기 위해 1905년 11월 미국 공사로 있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은 그 당시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을 체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고종의 밀서에 호응할 까닭이 없었다.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 조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호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한 후 태황제로 물러났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에 전국 각지에 그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상이 거행될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한 7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6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미금시에 있다.
순종(1874~1926)
일본이 을사조약을 비준할 것을 고종에게 강요하였지만,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여왔다. 헤이그 밀사 파견도 자신이 비준하지 않은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거듭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기회로 식민지화정책에 최대 걸림돌인 고종을 제위에서 축출하고자 하였다. 먼저 을사조약체제를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그의 비준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은 밀사파견의 책임을 들먹여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때때로 외교적 대응을 하여 일본정부의 대한제국 병탄 작업에 제동을 걸었던 고종을 끝내 제거해 버린 셈이다. 고종의 양위식은 1907년 7월20일 오전8시 경운궁의 중화전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고종도 황태장도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형식으로 즉위한 것이 제2대 대한제국의 황제인 순종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고종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척.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1874년2월 창덕궁의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해 2월 사제로 책봉되었고, 9살 때인 1882년 여흥민가에서 규수를 맞이하였는데 그 비가 곧 순명효황후이다. 을미사변 당시 민왕후의 시해현장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옷에 잔뜩 뒤집어쓰고 혼비백산한 적이 있는데 그런 놀라움 때문인지 장수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떴다. 그녀의 죽음이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순종은 같은 해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맞아 황태자비로 삼았다. 그러나 말이 황제요, 황후이지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순종이 즉위하자 숨돌릴 사이 없이 일본의 압박이 가해졌다. 일본이 한국 정부에 새로 강요한 것은 이완용과 이토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한일신협약'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지 5일 뒤였다. 거기에는 한국 정부가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은 것과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얻을 것 등을 규정하여, 통감이 한국 내정에 간섭할 권한을 규정하였다. 이제 각부의 차관에 일본인이 임명되어 차관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의 부속 각서에는 군대해산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8월 1일 서울 시위대의 해산을 시작으로 전국 각 지방의 진위대와 분견대의 해산이 확산되어 갔다. 서울에서는 군대해산식이 있던 날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 박승환이 분을 못 이겨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을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대장의 죽음에 격분한 사병들이 일본인 교관을 난사한 후 시가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기관포를 앞세워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에 대응하던 시위대 병사들의 실탄이 떨어졌다. 그러자 이들은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빗발치는 듯한 일본군의 총탄 속에서 한국군 6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일본군도 가지와라 대위 이하 3명이 죽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서울 시위대의 항전에 전국 각지에서는 진위대원의 향전이 뒤따랐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이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기는 높았지만, 무기와 숫자가 너무나 열세였다. 일본군과 교전을 치른 뒤 이들은 의병부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일제와의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러시아의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장교단을 사열하고 막 환영군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때 군중 속에서 뛰어나온 한 청년이 이토에게 권총을 발사하였다. 3발의 탄환이 이토의 몸에 명중하였다.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토는 곧 숨을 거두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확인한 결과 청년은 한국의 용병 참모중장으로 나이 31세의 안중근이었다. 거사의 동기는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그를 총살하여 응징한 것이라 했다. 재판과정에서도 그는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을 펼쳤다.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재판은 공개리에 열리지 않고 비밀재판으로 마감되었다. 이토와 일본제국의 만행을 성토하는 그의 예리하고도 조리정연한 논술을 공개하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사형집행은 3월 26일 오전 10시. 장소는 여순 감옥 형장. 사형을 언도받고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과 공근 두 아우의 면회가 있었다. 안중근은 두 아우에게 이렇게 유언하였다.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국내로 옮겨서 장사지내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일본이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한 것은 이미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남은 것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차지하는 형식상의 최종 절차뿐. 그래서 취한 조치가 '한일합병조약', 경술국치라하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국권을 다른 민족이 강탈해 간 사건이다. 이토가 한국의 청년에게 저격당하여 죽자 일본은 이 기회에 한국을 병합하고자 했다. 1910년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가 3대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에 부임한 그는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이미 1907년10월 한국경찰을 일본경찰에 통합시킨데다 종래의 사법권, 경찰권 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확보한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데라우치가 이완용을 앞세워 8월 22일 마침내 한일합병조약을 조인하였다. 전문 8개 조의 제1조에서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군 황제폐하에게 양여함'이라 하였다. 그러나 당분간 발표를 유보하였다. 한국민의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8월 25일 정치단체의 집회를 일절 금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후에 순종으로 하여금 나라를 일본에 이양한다는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29일의 관보와 신문지상에 합병의 소식이 발표되었다. 8월 초부터 통감부와 일본 정부사이에는 수백 통의 비밀전문이 오고갔는데, 합병 후의 국호와 황실의 호칭, 합병 협력자의 매수 등에 관한 것이 내용의 대부분이었다. 8월 18일자로 일본의 카스라 총리가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낸 전문에는 '현 황제를 창덕궁 이왕전하로 하고 한국의 국호는 이제부터 조선이라고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고종태황제가 이태황전하로, 순종황제가 이왕전하로 불리게 된 것도 그에 따른 것이다. 순종이 퇴위당한 직후 창덕궁 선정전에도 일월도 대신 봉황도가 내걸렸다. 이 모두 대일본제국 지배하의 속국인 조선이요, 일본천황 아래의 이왕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주권이 상실되면서 백성과 땅은 이후 한 세대가 넘도록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