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崔簿)와 송흠(宋欽)은 모두 연산군 때 사람이다. 송흠은 전남 영광 출신이며 성종 12년 사마시(진사(進士)를 뽑는 과거의 한 종류. 진사시라고도 하였음)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왕명을 전달하고 이행여부를 보고하던 기관)에 들어갔다. 하지만 연산군의 학정을 옳지 않게 여겨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최부는 단종 2년(1454)에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나 처가인 해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뛰어난 학자이자 문과에 급제하여 상당한 지위의 벼슬살이도 했던 관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24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29세에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정6품), 홍문관 부수찬, 수찬(정6품)을 지내고 부교리(종5품)에 올라 제주도 경차관(敬差官, 지방에 변란등이 일어난 경우 임시로 파견하던 관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때 그는 조선시대 사람으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급히 귀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까지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는 동중국해를 14일 동안 표류하면서 해적을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하며 간신히 지금의 중국 영파 부근의 해변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그를 왜구나 해적으로 오인하여 억류되었고 나중에야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되어 중국을 유람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최부는 성종의 명으로 유명한 『표해록(漂海錄)』이라는 기행문을 지어 왕에게 바쳤으니, 조선의 마르코 폴로였던 셈이다. 최부는 중국을 떠도는 상황에서도 조선에 돌아올 때까지 자신은 부친의 상을 당한 죄인이라 하여 상복 입는 것을 끝까지 고집했다고 한다.
최부와 송흠이 함께 홍문관에서 일했을 때다. 정4품 응교(應敎)인 최부는 나주, 정9품 정자(正子)인 송흠은 영광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벼슬의 차이는 있었으나 고향길이 가까웠으므로 둘이 사이좋게 휴가를 함께 가게 되었다. 하루는 송흠이 4, 5리 길인 최부의 집을 찾아갔다. 점심까지 잘 얻어먹었는데 최부가 뜬금없이 물었다.
“자네,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역마(驛馬)를 타고 왔지요.” “역마는 자네가 서울서 내려올 때 집까지만 타라고 나라에서 내준 말이 아니던가?” “…….” “내 집까지는 분명 자네의 개인적인 사행(私行)길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올 수 있단 말인가?”
점심밥까지 잘 얻어먹고 느닷없이 힐책을 받자 송흠은 화로라도 뒤집어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마 역마를 타지는 못하고‘끌고’자기 집까지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갔다.
휴가가 끝나고 며칠 안 돼서 송흠은 홍문관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면서 최부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였다. 최부가 송흠에게 타일렀다.
“자네는 나이가 젊네. 후에는 조심해야 할 것일세.”
한편 일설에 따르면 최부가 나라의 물건을 사적으로 사용한 송흠을 용서하지 않고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 조정에 알리고 송흠을 파직시키라 주청했다고도 한다. 어느 이야기가 맞는 것인지는 확인된 바 없으나 깊이 새겨볼만한 일화이다.
이러한 일을 겪고 마음속에 깨달은 바가 커서인지 송흠은 일생을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연산군이 중종반정에 의해 쫓겨나고 새로운 왕이 등극하자 다시 출사하여 관료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보성, 순천, 여산 등 전라도의 여러 수령을 역임하고 나주, 광주 등의 목사나 부사도 지냈으며 담양부사, 전라감사, 한성부좌윤(조선 때 한성부의 종 2품의 벼슬), 이조와 병조의 판서자리에 오르고 우참찬과 판중추부사(중추부의 종 1품 벼슬) 등의 고관대작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누렸던 지위에 비하여 그의 삶은 청빈하기가‘가난한 선비’와 같았다고 『해동잡록』은 전한다. 송흠이 매번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거느린 말(馬)이 겨우 세 필 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공이 타는 말이 한 필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 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의 검소한 행차를 일컬어‘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또한 노모를 봉양하는 것 외에 처자와 얼마 안되는 노복들은 겨우 굶주리고 추운 것을 면하는 정도였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집안에 곡식이 한 톨도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청빈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훗날 그는 인종에 의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