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靜謐), 쪽빛 회상
방안 창가의 조그만 책상 앞에 좌정하고서,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본다. 정오를 넘긴 햇살은 그 투명한 빛의 전진을 내 무릎에 잔잔히 머물게 하고 있다. 가만히 빛의 직진을 따라서 창틀 새로 보이는 눈부신 하늘을 본다. 창문 틈 가느다란 수직의 틈새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짙은 남색의 헝겊 마냥 깊은 여운을 풍겨 주고 있다.
쪽빛 하늘이다. 이 땅의 산하에 뚜렷이 전해 내려온 우리의 색상이 쪽빛이라 했지 ...
백색 프라스틱 창문 틈새로 보이는 쪽빛은 햇살의 눈부심에 의하여 잠시 눈을 어둡게 하더니, 그 심연 같은 한없는 깊이를 묵묵히 보내오고 있다. 고개를 약간 틀어 햇빛을 옆으로 돌리며 창틀 틈새의 좌측공간을 올려다본다. 무릎에 머물러 있는 햇살의 정지를 흐트러지지 않게 어깨만 틀어 묘한 자세로 틈새를 본다.
치켜 뜬 두 눈의 눈썹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라도 묻어올까? 어림없는 기대에 입술을 가늘게 쭈빗거려 본다. 순간, 약간은 이지러진 내 입술의 모양이 어깨를 비틀어서 바라보는 창틈의 창공과 일치되고 있다고 느끼며 마음속으로만 싱겁게 웃어 본다.
치밀어 오르는 마음속의 웃음이 현재 내 몸의 묘한 자세와 합치되어 불일치(不一致)에 대한 어이없는 안정을 맛보게 하고 있다. 방안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주위의 정밀에 동화되어 앉아 있노라면, 집밖의 소음은 점차 사라지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와 서서히 만나게 된다.
무수한 공간의 층층마다 정지되어 있는 수많은 대기의 인자(因子)들이 방안의 갖가지 물건에서 희미하게 내뿜는 미세한 빛의 파동을 타고 각자의 현란한 날개를 서서히 너풀거린다. 창틈에서 무릎까지 일직선으로 정지되어 있는 햇빛은 방안의 정밀을 감시하는 로마병정의 붉은 망또와 같다.
붉은 감시자의 둔감한 경계를 무시하면서, 준동하기 시작하는 대기의 현란한 날갯짓을 그윽이 응시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동공을 고정시킨 채 무수한 공간을 헤아려 보면, 가느다란 먼지와 같은 형상이 꿈틀거리면서 눈썹에 와 닿는다.
희미하게 발하던 사물의 빛이 커졌다가 작아지면서 머리 주위에 집적되어 맴돌기 시작하고, 어느덧 정적은 햇빛에 부딪혀 수많은 스펙트럼을 조합하면서 은은한 아우성으로 화하고 있다.
무엇일까?
스믈스믈거리며 동공 앞에서 맴도는 현묘(玄妙)한 하나의 미세함이 있다. 무상한 마음 속내에 어슴프레한 의아함을 일게 한다. 굴절과 반사를 모를 것 같은 무릎 위의 빛살이 프리즘을 통해 은밀히 보낸 밀사일까?
음영과 한줄기 햇빛이 조화되어 천변만화의 정밀과 소리 없는 소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위에 흐릿한 영상이 떠오르더니, 차르륵 거리는 환등기 소리가 들려온다. 낡은 화면에 투사되고 있는 주변의 풍경은 내 의식 속의 퀘퀘 묵은 창고에 자리한 소년시절의 광경이다.
짙은 골안개가 새벽의 계곡 오솔길을 에워싸고 있다.
여명을 받으며 정적에 묻혀있는 산길은, 멀리 손바닥 만하게 보이는 저수지 까지 구불구불 거대한 이무기와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다. 소년은 큰 눈을 꿈벅거리면서 가뿐숨을 몰아쉬며 주저하고 있었다. 어깨에 비스듬히 매어 왼쪽가슴에 투박스럽게 달려있는, 책보따리의 매듭을 웅켜 쥔 손바닥에 촉촉히 땀이 배어 나오고 있다.
새벽의 상큼한 공기가 거친 숨을 달래주며 폐부를 시원스럽게 적셔주고 있다. 방금 달려온 밤나무 숲을 향하여 돌아서서 아쉬움을 가져 보지만, 여느 때처럼 사촌형과 같이 왔더라면 까짓 것 용기를 내어 되돌아가, 새벽 산길에 여기저기 탐스럽게 떨어져 있는 주먹만한 알밤들을 보물 찾는 기분으로 주워 책보따리에 갈무리했을 것이다.
일요일을 강 건너 할아버지댁에서 보내고 학교에 가기 위하여 새벽밥을 먹고는, 이십 리 강변을 풀이슬에 바지를 적시면서 달려온 터였지만, 항상 단짝이 되어 동행하였던 사촌형은 몸살로 운신을 못하여 홀로 다녀오는 길이었다. 밤나무 숲 초입에서 길가에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옻칠을 한 것 같은 윤기 나는 틈실한 알밤을 서너 알 줍던 소년은, 소스라치면서 "앗!"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새벽안개가 짚단 태우는 들불 연기처럼 몽글거리는 길가 커다란 밤나무의 그루터기에 걸터 앉아있는, 쪽빛 치마저고리의 긴 머리 여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가끔 보는 약간은 정신이 이상한 여자로 소문난 당(堂)집 여자가 분명하였지만, 모골이 송연하여 얼어붙듯이 서 있다가 도망치듯 고개를 숙이고 달려오고 말았다.
혼인한지 석 달 만에 남편이 강에서 고기를 잡다 익사하여 정신이 이상해져 버렸다는 여자는 자태가 고와, 마을 청년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소년에게는 알지 못할 두려움으로 연상되면서 무언가 그 여자가 신비한 주술(呪術) 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 오던 바였다.
여인이 걸터앉아 있는 곳을 도망치듯이 스쳐 지나면서, 갑자기 갈고리 같은 손이라도 뻗을 것 같아 뻣뻣한 고개를 돌려 얼핏 바라본 여인의 얼굴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여인의 단정하고 맵시 있는 쪽빛 옷차림새가 도무지 미친 사람 같지 않았다.
소년은 멈춰 선 채로 지나온 밤나무 숲길을 응시하면서, 가슴속의 놀람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밝아 오는 아침하늘을 바라보면서 산 밑으로 몸을 돌리려다 순간 눈을 크게 떳다.
저만큼 밤나무 숲에서 짙은 쪽빛의 옷자락이 서서히 이쪽을 향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뭇잎 사이로 드러낸 흰 얼굴은 왠일인지 각시탈 같이 함지박의 웃음을 띠고 있었는데, 치켜 올라 간 붉은 입술이 이쪽을 향해 들썩이고 있다.
그 귀기 서린 모습에 소년은 몸을 돌려 공중으로 발을 내 뻗고는 비탈길을 내 딛으면서, 일순간 저만큼 발밑으로 보이는 저수지를 보았다. 마치 그 깊은 물 속으로 잠수라도 하려는 듯이, 혼비백산하여 허공을 날아갔던 것이다.
무릎 위에 정지되어 있던 수직의 빛살이 자신도 모르게 토해 낸 한숨에 일순 굴절되고 말았다. 주위를 빼곡히 감싸면서 유영하고 있던 대기의 인자들이 삽시간에 소멸되고 있었고, 눈꺼풀에 앉아 있던 현묘한 기운은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멀어져 갔다. 흑백 화면의 활동사진은 쪽빛 옷자락과 그로데스크한 여인의 웃음 띤 흰 얼굴이 크로즈업된 채로 정지되어 있다.
스믈거리면서 온 몸을 감싸고 있던 정밀은, 좌정한 자의 일탈된 내면(內面)의 반란과 그 환영과도 같은 몽환적인 회상으로 인하여 깨어지고, 비로소 창문 밖 채소장수의 고성으로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1998 . 11 . 15 )
1 [金天雨] 우리의 호프이신 한기홍 선생님 이렇게 늘, 함께 문학넷과 인연을 맺으니 아마도 큰 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한기홍 선생님의 깊고 넓은 작품세계가 날로 천지간에 향기를 뿌려주시길 기원합니다. 연재를 수락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건필하십시오.
<2002.02.28>
2 [한기홍] 김발행인님! 천금같으신 금언을 들고 이렇게 누추한 서재를 방문해 주시다니... 생광이올시다. 배려하여 주신 방 한칸~ 제겐 고루거각입니다. 걱정이 태산입니다. 고귀한 문학넷에 혼이 깃든 '정신의 고루거각'을 지어야 할텐데... 가진 능력은 오두막이니 말입니다. 망양지탄하며 김시인님의 하회를 기다릴뿐~ <2002.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