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섬진강을 다녀왔는가. 섬진강 하면 왠지 아름다운 고향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가보지 않아도 뇌리에 그렇게 새겨진다. 왜 그럴까. 《그리운 것은 산 뒤에 있다》고 말하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그 때문일까. 그는 시와 산문으로 섬진강의 아름다운 어제를 무척이나 아련하게 노래한다. 그가 쓴 <뒤를 보며> 라는 시는 읽는 이를 어느새 섬진강으로 이끈다. 고향의 푸근함에 감싸이게 한다.
문학적 소양이 남달리 둔감해 그 정겨운 구절은 거의 잊었지만 내용인즉, 이렇다. 저녁 잘 먹은 김용택 시인이 휴지를 꾸깃꾸깃 말아쥐고 터덜터덜 집을 나선다. 섬진강 가장자리의 한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소쩍새 소리 들으며, 앞산 이랑과 달빛에 반사되는 강물을 바라보며 뒤를 보는데, 아니 누가 엉덩이를 살살 간질이는 게 아닌가. 엉? 누구지? 돌아보니, 글쎄, 하얀 보름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더라는 내용이다. 아! 삭막한 콘크리트 더미와 아스팔트에서 속도에 지쳐 살아가는 도시인의 긴장은 어느새 풀어지고, 비록 詩盲일지라도, 나도 언제 그런 데 가서 똥 한번 눠봤으면! 눈을 감게 된다.
그대는 공장지대의 시커먼 배수구를 한번이라도 눈여겨보았는가. 유리섬유공장 폐기물이 스며든 우물물을 모르고 마신 인천 고잔동의 주민들이 흔치도 않은 식도암에 한꺼번에 걸렸다는데, 그들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이렇게 시작되는 최승호 시인의 <공장지대>를 들여다보자.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 … 저 굴뚝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 저 굴뚝이 나를 범했나, 혹시, 내가 공장과 통음해온 것은 아닐까. 아홉 줄의 짧은 시를 읽은 순간, 섬뜩해진 독자의 가슴은 이내 방망이 칠 것이다.
따사로운 고향의 정취를 노래한 김용택 시인과 자신이 동조한 개발의 뒤꼍을 혐오스럽게 고발한 최승호 시인, 보전된 자연을 향수처럼 음미하는 시, 그리고 몸으로 스며든 공장 오폐수 때문에 구토를 유발하는 시, 이런 두 모습은 서로 상극인 듯하지만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다. 이와 같은 시를 읽은 독자는 시인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받는다. 섬진강을 가보지 않아도, 공장지대의 이면을 눈과 코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깨닫는다. 감동하고 분노하며, 비로소 행동할 용기를 얻는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썩은 천에 죽어 올라온 물고기 사진만 보면 지쳐버리지만, 두 가지 사진들을 잘 배치하면 환경에 대한 의식의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나 소설로 우리의 환경을 아름답게 또는 안타깝게 이야기하는 문학인, 사진이라는 직설화법을 적나라하게 구사하는 사진작가, 구상 또는 비구상으로 환경의 메시지를 던지는 동양화와 서양화가, 연극인, 영화인, 그리고 음악인들…. 그들의 감성적 행동은 시민들의 가슴을, 머리를, 손과 다리를 강렬하게 움직이게 한다. 조국의 독립이 절실했던 시기와 민주화에 목말랐던 암울한 시기에 민중을 움직이는 빛을 창조해왔던 문화인들은 환경이 풍전등화인 지금, 그렇게 일어서야 한다.
물 건너간 동강의 영월댐은 환경전문가나 시민단체의 노력만으로 막은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주민도 대단히 중요했지만, 이해관계가 작은 다른 지역의 시민들이 같은 마음으로 나서주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문화인들이 무심했던 시민들을 흔들어 깨워 움직이게 이끌었던 것이다. 시로, 소설로, 논설로, 사진과 그림과 음악으로 동강의 아름다움을 각인시키고, 댐으로 막힌 동강의 아픔과 후손들의 상실을 시민들에게 감성적으로 보여주자, 자식 키우는 시민들은 각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강의 영월댐만이 아니다. 새만금을 비롯하여 갯벌 매립의 부당성을 알리는데 문화인들이 앞장섰고 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관심영역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최악의 방사능을 수백만 년 배출할 핵 관련 산업이나 유전자조작과 방사선조사 식품으로 후손의 생명안전을 위협하는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그를 옹호 또는 방관하는 당국의 부당성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20분 앞당기려는 고속전철을 위한 터널로 정수리부터 뚫으려는 개발세력에 맞서 가녀린 비구니 스님이 단식수행을 멈추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그 속 뜻을 잘 모른다. 문학인들의 역할이 여전히 절박한 순간이다. 현재 거대한 물(피)을 흘리면서 산에 터널이 뚫리고 있지 않은가. 정화시설 가동하지 않는 공장지대나 하다못해 꽁무니로 시커먼 매연 내뿜는 운전자에 이르기까지, 문화인들이 앞장서 행동하면 해결의 실마리 찾기가 쉬워질 것이다. 차가운 이성보다 뜨거운 감성으로 시민들에게 호소하기 때문이리라.
“깊은 산골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고운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여보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백두대간은 도로와 광산들로 갈가리 찢기고, 삼천리강산은 오염천지가 된지 오래되었는데, 눈비비고 일어난 토끼가 새벽에 물을 마시다니. 멧토끼는커녕 다람쥐도 보기 힘든데, 오염된 산하에 토끼가 마실 물이 남아 있다니요. 있다면 어디 한번 보여주슈!” 지금은 태평성대를 노래할 때가 아니라고, 내 고향 남쪽 바다는 이미 시커멓게 썩었다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고, 작금의 환경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고, 돈을 위해, 일부 계층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풍전등화인 환경을 이렇듯 무자비하게 파괴한다면 내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문학평론가는 느슨했던 문학인들의 긴장감을 환기시킨다,
녹색평론을 발행하지 않았다면 미쳐버렸거나 깊은 병에 걸렸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문학평론가, 김종철 전 영남대학교 교수는 시인들에게 죽창을 잡으라고 설파한다. 환경 위기상황인 지금, 현장에 나가보지 않고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의 직무유기라고 일갈한다. ‘임진왜란이 나자 속세를 떠난 스님들도 목탁대신 죽창을 들고 산문을 박찼거늘, 내일을 위협하는 물질사회를 안주하는 시인들이여, 정신 차리소서’ 현실을 호도하는 노회한 문학인들을 매섭게 질타한다.
학문의 전당이라던 대학들이 상아탑에서 벤처기업 양성소로 화려하게 변신한 오늘, 문화의 주류 역시 상업주의에서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소비를 부추기는 말초적 할리우드식 저질 문화산업에 맥도 못 추는 현실을 개탄하는 문화인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갖는 문화인이 있기에 우리의 문화는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비록 소수일지언정, 상업주의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심지 같은 문화인들이 이 땅에서 아직 제 목소리를 내고 있기에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지만 가지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므로, 살아있는 문화인들이여! 현실에 안주하지 맙시다. 일어서 함께 나섭시다. 더는 아름다움을 더는 노래 부를 수 없을 지경으로 막무가내로 파괴되는 자연은 문화인들의 행동으로 회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소! 무소불위의 개발세력과 맞서 시인과 소설가들은 펜을 들고, 사진작가들은 카메라를 매고, 화가들은 화구를 챙기고, 음악인들은 악상을 떠올리고 연주해서 자식 키우는 시민들을 참여의 공간으로 유도해야 하지 않겠소. 환경은 생명이라는데, 시방, 우리의 환경이 풍전등화입니다. 사바세계를 등진 승려들이 풍전등화 같던 조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산문을 박차고 나선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첫댓글 재작년 말에 출간될 예정이었던 책에 나갈 글입니다. 현재 시재에 맞게 조금 수정했습니다. 문화와 문학인에게 환경운동의 절방성을 호소하고, 동참을 권유하는 글입니다. 여기 게시판 성격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유하고 싶어 올립니다.
좋은 글입니다. 이 집 식구들은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저도 무딘 펜을 죽창으로 갈고 싶어 이 대장간에 머물고 있으니까요.
구구절절 새겨지는 글들입니다.
선생님 저는 생태계를 읽으면서 어느순간 혼란이 옵니다.제가 살고 있는 삶이 다 생태계와 반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우리의 발은 현실에 있습니다. 현실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한계 안에서 생태적 이상을 생각하며 되도록 자연스러운 삶을 모색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생태근본주의에 빠지면 자칫 우울증이나 자포자기로 그칠까 두렵습니다. 혼란해하지 마십시오. 남들이 뭐라든, 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네 선생님 실은 무기력해지려 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보니 과민반응을 하였나봅니다 작은것 부터 하나씩 실천해나가겠습니다^^
환경오염으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기감을 각성할 수힜는 아주 훌륭한 글이군요. 느슨한 저의 생활태도를 되돌아봅니다.
미래를 향한 꿈은 지금, 바로 여기 현실의 내가 만드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현실을 포용하며 살아야할 것 같습니다. 포용하기 위해선 우선 긍정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그 자세는 시정되어야할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대책강구를 해나갈 수 있는 힘에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의 과제들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겠지요.꾸준히 한걸음씩 나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현실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선 막연해집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몸짓으로 동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알려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관련한 글을 찾아보겠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자신이 처해있는 처지의 한계에서 실천방안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조금씩 자연스럽게 생태적인 삶으로 하나 하나 바꾸어보는 것이겠지요. 차 크기를 줄였다 없애거나, 텔레비전 수를 줄이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이거나, 모피나 지나친 난방 대신 내복을 입는다고나, 유기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이용한다거나, 좀 불편하지만 기꺼운 행동에 나서는 일이 있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찾아보겠습니다.
종이 아껴쓰기(시집 안 내기??), 자동차 덜 타기, 육식 줄이기(콩으로 단백질 보충이 된다고 아예 채식으로 살기- 소 한마리 키우는데 사료로 들어가는 곡물은 아프리카 난민 30?명을 살릴 수 있다는 카더라 통신), 음식쓰레기 덜 버리기, 일회용품 안쓰기, 아이들에게 아껴쓰는 습관 들여주기, 등 쉬운 것부터 실천하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