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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집 그리고 추억 스크랩 [이사람] 열네 살에 상경한 소년… 평양냉면의 匠人이 되다 ... 김태원
ginasa 추천 0 조회 93 14.04.26 22: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홍렬(주말뉴스부 차장) / 조선일보 2014.04.26.토

[이사람] - 최홍렬 기자의 진심

평양냉면 '미다스의 손'

김태원

열네 살에 상경한 충청도 소년… 평양냉면의 匠人이 되다




호랑이 주방장 밑에서 어깨 너머로 냉면 만드는 법 배워
우래옥·대원각·봉피양…그의 손 거친 냉면 인기 끌어
새벽에 출근해 육수 끓이기 60여년간 하루도 쉰 적 없어


김태원 평양냉면 장인이 지난 15일 갓 뽑아낸 냉면을 그릇에 담고 있다. 그는 “입맛이 변해도 냉면 본래의 맛을 내기 위해 기본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윤동진 객원기자
▲ 김태원 평양냉면 장인이 지난 15일 갓 뽑아낸 냉면을 그릇에 담고 있다. 그는 “입맛이 변해도 냉면 본래의 맛을 내기 위해 기본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윤동진 객원기자
전쟁은 충북 청원 옥산면사무소 사환으로 일하던 열네 살 소년의 운명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징집된 두 형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1952년 여름 어느 날 밤 부면장이 징집 영장이 나왔다며 소년을 찾아왔다. 부면장의 '도망가라'는 말에 소년은 야반도주를 했다. 무작정 조치원역까지 걸어갔다. 먹고살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소년은 전봇대를 실어나르는 짐차에 몸을 실었다.

무작정 상경한 소년은 서울 거리를 떠돌았다. 수중엔 돈 한 푼 없었다. 을지로를 지나는데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를 피하려고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집 아주머니가 오갈 데 없는 소년에게 찬밥을 내주었다. 아주머니는 징집을 피해 도망 중인 소년을 딱하게 여겼다. 신분을 증명할 거라곤 주머니에 있던 사환증뿐이었다. 그는 사환증 덕에 아주머니의 소개를 받아 냉면집 우래옥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충청도 소년의 '냉면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징집 피하기 위해 야반도주

그로부터 60여년, 소년 김태원(金泰元·76)은 평양냉면 장인이 됐다. 장안에서 냉면으로 최고의 명성을 떨친 우래옥을 비롯, 대원각, 봉피양 등 그의 손을 거쳐간 평양냉면집은 거의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평양냉면 전파자이자 냉면계의 '미다스의 손'인 셈이다. 황교익 맛칼럼니스트는 "냉면을 만들다보면 물을 많이 만지는데, 항상 물에 불어있는 것 같은 그의 손을 보면 진정한 장인 정신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서울에 평양냉면이 대중화한 것은 6·25전쟁 전후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을지로·동대문 일대에 많이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삶의 터전에 자신들이 즐기던 고향 음식인 냉면 파는 집을 열면서부터다. 우래옥이 성공한 이후 1970년대부터 냉면 전문점들이 속속 생겨났다.

지난 15일 서울 방이동 봉피양에서 김태원을 만났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해 육수를 끓인다. 60여년째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어린 시절 충청도에서 청국장만 먹고 컸던 그는 평양냉면은커녕 냉면이 뭔지도 몰랐다. 충청도 사투리로 평양냉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어색해 보여 "충청도 출신이 평양냉면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10대 때부터 아침저녁으로 먹은 옛날 평양냉면에 대한 기억이 몸속에 남아 있다. 이젠 이북 사람 다 됐다"고 했다. 그가 처음 냉면 일을 접한 우래옥은 평양에서 명월관을 운영하던 장원일씨가 평양냉면 기술자인 주병인 주방장을 만나 1946년 개업한 식당이다.

60여년동안 메밀면 반죽을 해온 김태원의 손.
▲ 60여년동안 메밀면 반죽을 해온 김태원의 손. 냉면 만드느라 매일 손에 물을 묻혀 그의 손은 항상 물에 불어있는 것 같다.

―주방에서 심부름하다가 냉면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인가.

"주병인 주방장에게 맞아가며 배웠다. 평양 출신의 스승은 어마어마하게 덩치 큰 사나이였다. 호통 한번 치면 주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호랑이 주방장'의 가르침은 혹독했다. 스승의 발치에서 쪽잠을 자다가 불호령에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장작에 불을 붙여 육수를 끓였다. 자욱한 연기에 하루 종일 눈물을 찔끔거렸다. 육수를 끓일 때는 수시로 기름 등 불순물을 걷어내야 누린내가 나지 않기 때문에 한시도 무쇠솥을 떠날 수 없었다. 육수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욕부터 날아왔다. 스승의 매질에 머리에 혹이 없어질 날이 없었다. 한번은 국수틀을 밟는 속도가 느리다고 국수 말릴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이마를 맞아 세 바늘이나 꿰맸는데, 그 상처가 아직 남아있다."

―그렇게 맞고도 뛰쳐나갈 생각이 안 들었나.

"무수히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징집을 피해 도피 중인 신세라 어디 갈 데도, 기댈 데도 없었다. 남몰래 주방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불어터진 냉면을 먹곤 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냉면이었다."

―열네 살 소년이 주방 잔심부름하며 냉면 만들기까지 배우려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청소와 설거지, 서빙까지 밤낮으로 일에 쫓겨 늘 잠이 모자랐다. 전쟁 직후라 변변한 세제도 없어 빨랫비누로 냉면 그릇을 닦았다. 수세미도 없어 말린 풀뿌리로 그릇에 남아있는 기름때를 박박 문질렀다."

―혼자 그 일을 다 했나.

"동료가 세 명 있었다. 거제도에서 풀려난 반공포로 출신들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가 석방된 반공포로들에게 사회 적응 기회를 주기 위해 식당에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식당에서 일하던 한 아가씨를 두고 싸움을 벌이다 칼부림까지 벌인 뒤 식당을 나갔다. 이후 동대문 지게꾼과 주차장 관리인 등이 새 동료로 들어왔다."

김태원은 주인 내외를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불렀다. 주인 내외는 일할 때는 엄격했지만 소년을 아껴주었다. 고생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래도 주인 할아버지의 사랑과 배려 덕이었다.

―전쟁통이라지만 부모 형제를 떠나 남의 집살이 하는 게 서러웠을 텐데.

"주인 할아버지와 함께 동대문 진흙탕 바닥을 장화를 신고 다니며 음식 재료를 골랐다. 주인 내외는 성질이 깐깐하고 괴팍했다. 어렵사리 구한 좋은 무로 김치를 담가 놓아도 맛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쏟아버렸다. 한번은 견디다 못해 장화를 신은 채 한탄강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주인 할아버지가 찾아와 달랬다. 한탄강에서 잡은 모래무지로 매운탕을 끓여 할아버지와 소주를 마시던 생각이 난다."

주인 내외는 맛없는 음식은 손님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이런 정성 때문에 우래옥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손님이 많아 하루 종일 육수를 끓였다. 장사가 잘되니 경쟁 식당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와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엔 경무대에서 우래옥에 냉면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구하기 힘든 꿩을 경무대에서 여러 마리 구해주었고 그걸로 육수를 만들어 수십 그릇 가져갔다"고 했다.

◇창경원 나들이객 냉면집 몰려

―당시 냉면이 한 그릇에 얼마였는지 기억나나.

"1962년 화폐개혁 직후 우래옥 냉면이 35원이었다. 당시 불고기가 60원, 소주 한 병이 10원, 전차 탑승료가 2원 50전 정도였으니 냉면이 진짜 비싼 음식이었다."

―냉면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언제 제일 많았나.

"마땅한 외식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불고기와 냉면이 인기를 끌었다. 4월 말 벚꽃 놀이가 한창일 때는 창경원에서 꽃 구경을 하고 전차를 타고 와 불고기와 냉면 식사를 하는 게 최고의 봄나들이 코스였다. 돈암동에서 창경원을 거쳐 을지로까지 오는 전차 종점이 음식점 인근에 있었다."

1950년대 말 누군가 김태원이 병역 기피자라는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월급날만 되면 경찰이 찾아와 그의 월급을 뜯어갔다. 3~4년 넘게 계속 당하다보니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1년 자수를 하면 정상참작을 해준다기에 그는 1962년 뒤늦게 입대했다. 그는 군대에서 스승의 부고(訃告)를 들었다. 주병인 주방장이 냉면에 고명을 얹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제대 후 그는 우래옥 주방을 책임지게 됐다. 그는 "스승은 한 번도 육수 만드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지만 어깨 너머로 배운 게 몸에 익었다.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몸으로 배운 것이다"고 했다.

―주방장이 되면서 무엇이 달라졌나.

"책임이 커지니 일도 고민도 많아졌다.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 여름철 육수와 면을 시원하게 만들려면 지극 정성을 들여야 했다. 고기 육수가 쉽게 부패되는 것도 큰 골칫거리였다. 여름이 되면 서빙고에서 얼음을 구해왔다. 편육도 종이에 말아 얼음 위에 보관했다. 그래야 잘 썰린다. 이렇게 만든 냉면을 하루 2000그릇 이상 판 적도 있다."

―요즘과 달리 기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냉면을 만들었나.

"당시 주방에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주방 기술자들이 있었다. 반죽을 담당하는 반죽꾼, 면을 익히는 발대꾼, 면을 찬물에 헹구는 앞잡이, 냉면을 배달하는 중머리 등이다. 이들의 손이 딱딱 맞았다."

―용어가 생소하다. 하는 일에 따라 각자 요령이 있었을 텐데.

"반죽꾼은 손바닥을 펴서 메밀가루를 살살 돌려 뭉치기를 시작한 뒤 메밀가루에 물기가 골고루 배면 반죽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데, 메밀향을 보존하는 비법이 따로 있다. 순메밀 가루를 따뜻한 물로 익반죽을 하면 빨리 삭고 고유의 향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손에 메밀 반죽이 들러붙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차가운 물로 냉반죽을 한다.

발대꾼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공기 중 수분을 감안해 삶는 시간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면은 원래 1분 30초 정도 삶는데, 공기 중 수분이 적은 겨울에는 여름보다 20초 정도 더 삶아야 한다. 앞잡이는 모양 낼 생각 말고 최대한 빨리 면을 둘둘 말아 그릇에 담아야 한다. 정성껏 만든다고 오래 잡고 있으면 손 열 때문에 맛이 변한다. 배달을 맡은 중머리는 냉면 20~30그릇을 한 손에 들고 마치 곡예하듯 자전거로 배달을 나가곤 했다. 냉면 배달 자전거는 서울의 대표적 풍경 중 하나였다."

[최홍렬 기자의 진심] 열네 살에 상경한 충청도 소년… 평양냉면의 匠人이 되다 ◇새로 생기는 평양냉면집에 조언

―지금은 없어진 냉면 메뉴도 있나.

"당시에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메뉴들도 많았다. 고기를 뺀 대신 사리를 더 넣은 '민자', 스님이 먹는 것처럼 육수 대신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전소', 고기는 얹되 육수 대신 동치미를 넣은 '전동치미', 미지근한 국수 '거냉', 뜨거운 국수 '온면' 등이 있었다. 지금보다 냉면을 더 다양하게 즐긴 셈이다."

우래옥이 성공을 거두자 곳곳에서 김태원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을지면옥, 평양면옥 등 당시 새로 개업하는 평양냉면집에 가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장안의 최고급 요정이었던 성북동 대원각에서 10여년간 근무했다. 정치인 민관식씨의 부인 김영호 여사가 운영하는 담소원에서도 5년 정도 일했다.

―직접 냉면집을 차릴 생각은 안 했나.

"마누라가 장사는 하지 말래요. 돈도 없고."

김태원은 2002년 벽제갈비가 운영하는 평양냉면 전문점 봉피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뷰 도중 점심때가 되어 그와 평양냉면을 먹었다. 냉면이 나와 식초와 겨자로 간을 하려고 하자 그는 "평양냉면의 진수를 맛보려면 먼저 육수부터 마시라"며 "냉면에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다"고 했다.

―취향대로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냉면 먹는 데도 순서가 있나.

"간을 하기 전 생육수를 먼저 마셔보라.〈기·起〉 처음 입술에 닿을 때는 밍밍하지만, 세 모금 정도 마시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다음에 취향에 맞게 간을 한다.〈승·承〉 면을 젓가락으로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식초를 면 사이에 뿌리고 겨자를 육수에 푼다. 식초를 육수에 뿌리면 육수 맛이 변한다. 이후 고명과 함께 면을 먹는다.〈전·轉〉 '평양냉면은 그릇째 들고 훌훌 들이켜듯 먹어야 맛도 있고 복도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 시원하고 깊은 맛의 육수가 고소한 면발과 어우러지는 것을 느끼면서 먹는 게 중요하다. 고명으로 얹은 편육은 마지막에 먹는다.〈결·結〉 그래야 식초와 겨자로 간을 한 육수의 맛이 배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평양냉면 맛의 핵심은 뭔가.

"평양냉면의 생명은 육수다. 그다음이 면이고, 여기에 고명,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평양냉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한다. 육수는 왜 밍밍할 정도로 심심한가.

"면을 말아먹었던 북한식 김치와 관련이 있다. 북한 김치는 간을 약하게 한 배추와 무에 육수를 넉넉히 붓는데, 그러면 김치 맛이 심심하고 김치국물이 넉넉해진다. 여유 있는 집은 쇠고기 육수를, 가난한 집은 명태 육수를 사용했다. 이 김치가 적당히 익으면 그 국물에 면을 말아 먹거나 육수를 섞어 먹기도 했다. 만약 육수가 맵고 짜고 단맛이 났다면 메밀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차가운 국물에서 깊은 맛을 우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재료 넣고 끓이면 되는 게 아닌가.

"평양냉면은 메밀과 육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세심한 기술이 있어야 맛을 낼 수 있다. 일반 고깃집이나 음식점에서 내는 냉면이 제맛이 나지 않는 것은 이런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육수 끓일 때는 들어가는 것도 많고, 오랜 시간 곁을 지키며 정성을 들여야 한다. 육수에는 양지와 사태, 한우 잡뼈, 돼지 등뼈와 삼겹살, 늙은 닭 등을 넣는다. 혼합 비율은 영업비밀이다. 여기에 무·마늘·생강·감초 등을 넣어 4시간 정도 끓인다. 강한 불로 끓이다 서서히 약한 불로 바꾼다. 한소끔 끓어 넘친 후 각종 불순물들을 걷어낸다. 1시간 정도 지나면 야채를 먼저 건져낸다. 오래 끓이면 야채의 쓴맛이 강해져 육수 맛을 버린다. 한우 잡뼈와 돼지 등뼈도 늦기 전에 빼낸다. 뼈를 너무 오래 삶으면 사골 국물이 나와 육수 맛을 망친다. 육수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냉면 전문점을 새로 내는 게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육수 만드는 비결이 있나.

"육수를 끓이다 보면 물이 증발하는데, 중간에 육수를 퍼내고 물을 다시 넣어 우린다. 그리고 처음 우린 육수와 두 번째 우린 육수를 적절히 섞는다. 육수의 맛을 똑같게 하기 위해서다. 이 비율 맞추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이건 비밀이다."

◇"손님과의 의리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 견뎌"

평양냉면이 유래한 평안도에서는 집집마다 부엌에 면을 뽑는 국수틀을 놓고 항상 국수 만들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로 즐겨 먹었다. 겨울엔 해가 짧아져 저녁을 일찍 먹으니 한밤중에 출출해진다. 이때쯤이면 아궁이 군불을 다시 지필 시간이라 부엌에 나간 김에 밤참으로 국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메밀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한몫했다.

―많은 사람이 편육 또는 불고기를 먹고 냉면을 먹는 이유는.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전통이다. 먼저 술을 마시고 면으로 마무리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關西)지방에서 손님이 오면 술을 대접하고 메밀국수를 대접하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장년 남자 손님들은 대개 편육이나 불고기에 소주 한잔 하고 냉면을 먹는다. 실향민들의 경우 고기에 소주를 반주 삼아 추억을 곱씹다보면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곤 하는데,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시원한 냉면 한 그릇으로 다스린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선육후면(先肉後麵)'이 되겠다."

―동치미 국물과 고기 육수를 섞어 쓰는 집도 있고, 고기 육수만 넣는 집도 있다. 어떤 게 원조 평양냉면인가.

"평양냉면에는 원래 동치미 국물이 들어갔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냉면 육수에서 허용치 이상의 대장균이 발견되면서 문제가 되자 이후 동치미 국물을 쓰는 집이 줄어들었다. 고기 국물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치미 국물이 사라진 측면도 있다."

―평양냉면에 고명으로 무를 얹고 무김치도 곁들여 먹는 이유가 있나.

"메밀에는 찬 성분과 함께 약간의 아미노산 독소가 있다.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 무에는 이런 해로운 요소를 분해하는 성분들이 들어 있다. 메밀가루로 만든 일본식 소바를 찍어 먹는 국물에 무를 많이 넣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면을 가위로 자르면 맛이 떨어진다는데, 근거가 있나.

"메밀은 입으로 끊어 먹으며 입안에 침이 고일 때까지 씹고 또 씹어야 메밀의 진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가위로 자르면 면발의 쫄깃함이 줄어든다. 또 면발에 물기가 급속히 흡수돼 찰기도 떨어진다. 쇠붙이인 가위에 있는 금속성분은 산화되면서 냉면 맛을 떨어뜨린다. 냉면 고수는 가능하면 쇠젓가락을 쓰지 않는다. 냉면 먹을 때 나무젓가락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져 밍밍한 평양냉면 맛을 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세대가 변하면 맛도 변해야 하지 않나.

"그때그때 입맛에 맞추다가는 본래의 맛은 온데간데없어질 것이다. 나는 내가 보고 배운 대로 냉면을 만든다. 평양냉면은 세 번 이상 먹어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밍밍하고 싱겁고 아무런 맛이 없다. 하지만 한번 맛들이면 인이 박여 겨울에도 찾게 된다."

김태원은 자신의 평양냉면 맛을 이어갈 제자들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새벽부터 육수 끓이는 일이 힘들다 보니 오래 버티는 젊은이가 드물다"고 했다. 힘든 주방일에 제자들이 떠나가도 그는 쉬지 않는다. 3년 전에는 면을 삶다 뜨거운 물이 튀어 오른쪽 눈이 실명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는 10여년간 후계자 교육을 받은 탁중원(39)씨의 도움말도 들었다.

―냉면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입맛이 변하고 세태가 변해도 제대로 된 냉면 맛을 내는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60년 냉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맛을 알아주는 손님이 일부러 찾아주는 것이다. 그런 손님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 오랜 세월을 견딘 것 같다."

최홍렬(주말뉴스부 차장)
E-mail : hrchoi@chosun.com

1991년 입사해 사회 부문과 문화 부문에서 대충 10여년씩 근무했습니다. 사회부때 IMF 현대자동차 파업, 인천공항 개항 등을 취재했고, 가장 오래 출입한 서울시청에서는 고건, 이명박, 오세훈 시장을 거쳤습니다. 문화부에서 문학·출판기자로 근무한게 기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대중문화부에서는 여행·레저 섹션 ‘주말매거진’팀장을 맡고 있고, ‘무비: 아저씨와 아가씨’ 코너에 영화 기사도 쓰고 있습니다.

서울대 독문과, 철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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