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소유권 개념“ / 甲斐道太郞, 강금실 역, 『소유권 사상의 역사』, 돌베개, 1984.
2장. 프랑스에서 본 근대적 소유권의 성립과정
◎ 소유권 사상
소유권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관계를 구성원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이고 개별적 집단적 관계가 아니라 사람(人)과 물(物)과의 직접적인 관계, 즉 사람에 의한 물의 지배 관계로 이해하고 표현하고 정당화하며 그 관계에 다양한 제도적 편성을 부여하는 법 이데올로기”로 간주된다. 여기서 소유는 물의 지배 자체인 동시에 물의 지배 관계로 이해되는 사람의 지배라는 사회적 관계이다.
사람이 물을 지배하고 자기 생각대로 처분할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그 대물적 지배가 소유이고 그 이익보호를 위한 법적 관념이 소유권이라고 사고하는 것은 소유 및 소유권의 특정 측면만을 한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소유는 단순한 대물관계만은 아니며, 어떤 물을 지배하는 특정인과 그 물을 지배하지 않는 타인과의 인적 관계를 포함하는 대물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소유가 사람의 물에 대한 지배인 동시에 사회관계의 집약적 표현인 까닭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방식이 생산관계를 결정하고 사회적인 관계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 봉건적 소유와 소유권
- 봉건사회에서는 영주가 모든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독점하고 양여하는 방식에 의하여 중첩적인 물적 지배관계가 형성되었다. 한편, 영주와 농민의 공납관계는 농민에게 토지의 실질상의 보유자(경작자)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영주소유권(상급소유권)과 농민보유권(하급소유권)으로 나뉘어 귀속되는 중층적인 권리관계가 나타내게 되었다(분할소유 또는 이중소유). 이와 같은 중층적 구조로 말미암아 영주․농민 사이에 해결하기 힘든 잦은 분쟁이 발생했다. 14세기에는 공납지에 관한 한, 농민을 유일한 소유권자로, 영주를 공납징수권자(타물권자)로 이해하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18세기에 이르면 농민이 유일한 소유권자라는 생각이 더욱 보급되었으나 여전히 봉건제 하의 현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 앙시엥 레짐(구체제) 말기의 소유권사상
1) 중농주의학파: 부의 모든 원천을 토지에서 구했으며, 시민혁명 초기의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와 께네는 차지농의 경작의 자유와 생산물유통의 자유를 주장하는 한편, 토지소유만이 조세를 부담하여야 한다(조세를 지불하는 것은 토지소유자가 아니라 토지 바로 그것이며, 따라서 토지는 개별소유자만의 소유물일 뿐 아니라 국가, 교회, 개인의 공동 소유이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부유한 대차지농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그들에 대항하는 토지소유자의 이익을 억누르며(자본주의적 농업의 길 확장) 국가의 과세권을 정당화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지만, 토지소유론에 대해서는 전근대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 계몽주의사상에서의 소유권
근세 자연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로티우스(17c)는 소유권은 자연권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던 반면, 이들의 이론을 프랑스에 소개한 바르베이라크는 “소유의 정당한 권원(權原)은 선점(先占)이고 선점은 자연법에 속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사상은 거의 대부분 소유권=자연권이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는 존 로크의 소유권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 아베 시이에스의 소유권론
국민의회에서 의원으로 활약했던 시이에스는 1789년 7월 의회에 제출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승인과 이론적 선언」에서 그의 소유권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소유’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풀이한 후, 사람의 ①인신의 소유는 모든 권리 중 첫 번째 것이며, 이 권리로부터 ②행동의 소유와 ③노동의 소유가 파행되며, 따라서 ④외래적 사물의 소유 혹은 물적 소유는 노동을 통한 선점이라는 면에서 인신적 소유의 연장이며 확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토지소유는 물적 소유(노동수단의 소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토지소유는 개인적 필요보다도 사회적 필요와 더 큰 관계를 맺고 있다(토지소유를 기본틀로 삼는 소유론을 부정)고 주장했다.(인신-노동-물의 소유를 삼위일체로 위치!) 시이에스는 1789 권리선언의 초안을 통해 모든 시민의 노동․자본의 자유로운 이용 및 처분권, 즉 노동의 자유와 물적 소유의 자유를 밀접하게 연관시켜 규정하였다. 이들 규정은 노동력을 타인에게 매각할 자유(노동력 상품화의 자유), 자본 사용의 자유, 재산 처분의 자유를 선엄함으로써 인신․노동․물의 삼위일체적 소유자가 노동만의 소유자와 물=자본의 소유자로 분열하여 가는 사실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 프랑스혁명과 근대적 소유권의 성립
- 8월 4일밤의 선언을 통해 봉건제 폐기를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납이나 강제사용료 등 물적 부과조에 대해서는 되사기(유상폐지) 방법을 채택하였다. 권리선언의 채택 과정에서도 소유권을 규정한 17조1)가 많은 찬성을 얻어 가결되었다. 이미 권리선언 2조에서 소유권을 하나의 자연권으로 확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조가 부가적으로 삽입된 이유는 봉건제 폐기 과정에서 자신들의 기존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권리선언 17조의 소유는 갖가지 봉건제세나 관직주 등 물적 소유에 의제(擬制)된 특권적 이익을 포섭하는 관념이었으므로, 그 이익을 ‘정당한 사전보상’(되사기)없이 빼앗기지(무상폐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17조를 추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소유권=자연권이라는 설정은 절대왕정이 소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저항, 곧 혁명은 적법한 것(16조1)에 의해 지지)이라는 논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1791년 헌법과 소유권
봉건제 폐지를 통해 농민이 봉건제세를 되사서 자유소유권자가 된다고 할 때, 토지소유는 그 소유자의 사적 지배를 받고 소유자에게 경제적 이익을 줄 따름인 존재로 변화되며, 어떠한 정치적 지배의 계기도 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제한선거제의 도입을 통해 선거권이 능동적 시민에게만 부여됨으로써, 소유와 정치권력은 또다시 특별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공공의 조세는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분담되어야 한다(권리선언 13조)고 했을 때 능력이란 노동의 대가인 임금이 아니라, 일정한 재산(恒産), 특히 부동산에서 얻는 수입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며 공공시설을 위한 조세를 납부하는 자만이 참된 시민이라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결국 부르주아만이 참된 정치의 담당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 및 수단은 본디 불평등하다. 인간이란 권리면에서 평등하면 족하다. 사실상의 불평등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시이에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혁명 초기 진행된 법률혁명 역시 소유권자를 귀족에서 시민으로, 중층적 토지소유에서 일원적․배타적 자유 토지소유로의 전환을 통해 혁명을 회피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법률혁명에 따라 수립된 근대적 법원칙은 예전의 수익자(영주와 법복귀족과 같은 봉건특권계층)가 입게 될 불이익을 모두 구제(유상폐지)하고자 했으며, 현실적 조건을 사상한 채 새로운 수익자(농민, 부르주아)의 의사=자유(사적 자치)에 위임(법규의 추상화)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농민을 혁명 또는 혁명의 성과로부터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위와 같은 논리를 통해 봉건적 토지소유는 근대적 소유 일반으로 전환되었지만, 영주․농민의 현실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 이러한 유상폐기에 대한 농민들의 실질적 거부가 계속되면서 1792년 6-8월의 의회는 지불의무가 영주와 농민 사이의 합의에 따라 성립하였음을 증서에 의하여 입증하지 않는 한 농민에게 청구할 수 없다(거증책임의 원칙)고 선언하였으며, 1793년 7월 국민공회(국민공회는 소유야말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보루라고 생각했다)에 의해 무상폐지가 선언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봉건제의 페기와 신성불가침한 소유권이라는 추상적 명제는 농민의 이익으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고, 사회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토지소유자가 불가침의 소유권을 보장받은 이 사실에서 프랑스혁명은 불가역적인 역사적 변혁으로 이르게 된 것이다.
⇒ 프랑스혁명을 통해 △모든 물에 대한 일원적․배타적인 소유권 관념이 정립(토지의 상품화가 자본주의의 불가결한 조건)되었고 △토지소유로부터 정치적 지배의 계기가 제거(공․사법의 분리)되었으며 △
토지소유 역시 다른 노동생산물에 대한 물적 지배권과 마찬가지로 소유권 일반의 관념에 따르게 되었다.(토지는 노동생산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신-노동-물이라는 삼위일체적 가설과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토지의 상품화는 이용과 소유권을 합치시키는 데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 나폴레옹 법전의 소유권
- 혁명기 민법전의 편찬과정에서 제출된 초안을 살펴보면, △소유권을 물건을 수익하는 권리로 파악하고(이용권) △이용권으로서의 이전․처분의 자유를 승인하고 있으며 △그러한 권리를 일물일권적 배타적 권리로 파악하는 관점에 기초해있었다.
- 민법전은 “소유(권)는 법률 또는 규칙에 의하여 금지된 사용을 하지 않는 한, 절대적인 방법으로 물건을 수익, 처분하는 권리이다”(544조)라고 소유권을 정의하였다. 초안과는 달리, 소유권을 이용권으로 특기하는 규정이 없어졌으며, 그 절대성을 강조(배타성, 타물권의 비영구성, 공유의 일시성 등이 중요한 새로운 원리로 부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민법전은 부동산과 동산을 구별하고 순수하게 민법적 물건과 상법적 물건이라는 관념을 부여(“부동산은 특히 민법의 영역에 속한다”)하고 있다. 이는 토지가 여러 이유에서 그 자체로 상품이 될 수 없고 법률상 많은 조건과 제한을 부여받음으로써만 비로소 상품이 되고 동산에 준하여 거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률상 조치로서 민법의 영역을 규정(토지소유권도 소유권 일반에 포섭되도록 한 조치)했던 것이다. 나폴레옹 민법전은 상속재산 분할청구권을 인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였다(ex. 농민층의 분해)
이처럼 나폴레옹 법전은 소유권 규정에서 소유물을 지배하는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만을 추출해냄으로써, 모든 소유가 직․간접적인 인간관계를 배훙 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지배되어야 할 객체로서만 상정하고, 모든 사회관계를 물적 이해관계로만 설명하고 있다.
◎ 19세기의 소유권 관념
- 프루동의 소유 비판: [소유란 무엇인가](1840)를 통해 △공화국 법률은 소유권=자연권을 통해 지위, 부, 권리의 불평등을 만들어냈으며 △선점과 노동 어느 것도 노동생산물이 아닌 노동수단(토지) 소우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인간이 자유, 평등, 안전, 노동하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노동수단의 평등한 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부르주아적 소유권론: 1793년 권리선언은 “평등, 자유, 안전, 소유”를 자연적 권리로 열거하고(2조), “소유권은 그 재산, 소득, 노동 및 근로의 과실을 그 의사에 따라 수익하고 처분하는 모든 시민에게 속하는 권리이다”(16조)라고 규정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부르주아적 소유권론은 자연권+사회적 승인론을 채용하고, ①사람의 제1소유권은 능력이다. 이 능력은 본디 불평등하다. ②능력의 행사에서 노동을 기원으로 하는 제2소유권이 생긴다(물적 소유). 재산의 불평등은 능력의 불평등에서 생긴다. ③소유는 증여 및 상속에 의하여 이전할 수 있어야 한다. 증여는 소유권 행사의 한 방법이다. ④재산의 집적인 부는 사회에서 여러 가지 불가결한 역할을 완수한다는 논리(띠에르의 논리)를 일반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후 19세기 말까지는 소유 일반의 법리가 완벽하게 관철되는 시대였다. 농업이익을 고려한 특별규정을 두고자했던 시도가 부르주아법의 전통에 반한다는 이유로 입법되지 못한 것이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순수 사적 소유라는 개념을 최고조로 추상화한 법률제도가 완비되게 되었다.
소유관계 : 역사적으로 규정된 물질적 생산관계의 총체. 물질저인 사회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경제적 의미에서의 소유 관계와 이 관계의 법률적 표현인 법적 소유관계는 구별되어야 한다. 경제적 의미에서 ‘소유’는 경제적인 전유과정(專有過程)과의 연관 하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생산-재생산 과정에서 맺는 관계이자 바로 이 전유가 이루어지는 장이기도 한 물질적인 사회관계와의 연관 하에서 고찰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소유관계라는 개념은 그 내용상 ‘생산관계’ 개념과 마찬가지로, 계급간의 관계까지 일정하게 포함하는 사람들간의 전체적인 물질적 경제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전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이처럼 ‘생산관계의 총체’와 같은 개념이어서 일정한 생산관계의 체계 내에 존재하는 어떤 특수한 관계, 독립적인 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유관계는 생산자와 생산수단 간의 특수한 사회적 결합, 제 생산 활동상의 교류, 물질적 재화의 분배-교환 관계를 포괄하는 사회의 경제구조, 즉 생산관계의 총체이다. 마르크스는 사회 경제적 제 관계의 총체를 배제한 자본주의적 소유란 “형이상학적, 법률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소유주의적 소유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 전체가 사회주의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만일 소유의 정치경제학적 본질을 사상(捨象)하고 그 소유의 실현에 관계되는 경제적인 전체 연관을 사상할 경우, 소유관계는 개인이나 계급에 의한 생산수단 및 생산 성과의 점유, 개인이나 계급이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즉 법률적 관계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인 실상을 놓고 볼 때 소유관계는 그때그때의 살아있는 생산관계 전체 속에 존재한다.
● 한상범외,『법률용어사전』(법전출판사) 중에서
소유권(property, ownership) : 어떤 물건을 자기가 사용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타인에게 임대하든(수익), 매각하든, 또는 파괴(처분)하든 간에 전혀 자기의 자유의사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리이며, 물권의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것이다. 소유권은 재산권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법은 이것을 기초로 하여 존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으며, 그 침해에 대하여는 민법상 및 형법상의 보호가 주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소유권의 행사가 소유자의 자유의사에 맡겨져 있는 것을 소유권절대의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유권을 제한하게 되었고, 이것을 사회일반의 복지요구에 따르게 하려는 사상이 고조되어 권리의 남용이나 공공의 복지에 의한 제한이라는 사고방식이 강조되었다. 예컨대 부동산의 소유권은 건축법이나 도시계획법 등에 의하여 한층 제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소유권은 현 사회를 전제로 하는 한 소유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법률에 의한 소유권의 제한>
사법적 제한
민법상의 제한
상린관계에 의한 제한(민216-244), 정당방위 또는 긴급피난에 의한 제한(민761)
특별법상의 제한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신탁법, 주택임대차보호법 등에 의한 제한
공법적 제한
문화․산업․국민의 복지 등 사회정책 내지 경제정책적인 견지에서 제정되는 특별법(예컨대, 토지수용법)에 의한 제한
점유(possession) : 물건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를 말한다. 몇 가지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물권의 지배를 일시적으로 보호하고 사인이 함부로 그것을 교란시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며, 현실의 지배에 수반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분재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법률은 현존하는 지배관계가 어떠한 이유에서 발생했는가에 대하여 일체불문하고 어쨌든 일단 그 사실상의 지배관계를 보호하고 여러 가지 법적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이 점유의 제도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소유에 대하여”, [알뛰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0. 들어가며
이 글은 서론과 정세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한계들, 소유란 무엇인가, 정치의 위험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는 자신에게 부과된 과제를 전화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정세에 대하여와 민주주의의 한계들은 인권의 정치에 대한 총론적인 내용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소유란 무엇인가는 그것의 예시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번 세미나의 주된 내용이 소유론이니까 “소유란 무엇인가”에 중점을 맞추어서 발제하도록 하겠다.
1. 인권의 정치란
들어가기 전에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명확히 하자. 내가 파악한 바로는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발리바르가 지적한 것은 이 선언에서 “인간의 권리”(평등)와 “시민의 권리”(자유)가 통일이 된 것이 아니라 서로 갈등관계에 있으며, 근대에서 이 두 권리가 변증법적으로 충돌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인권의 정치란 바로 이 “인간의 권리의 정치”가 되겠다. 이점을 명확히 한다면 그의 말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는 근대를 쟁취하는 혁명의 과정을 “평등․자유 명제“를 통해 얘기해 나간다. 즉 평등과 자유가 동시에 통일적으로 쟁취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의 선언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러한 인권 선언은 기본적으로 무제한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서 민주주의의 제한들을 파괴하는 급진적이고 변혁적인 명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의 무제한적 요구의 과정을 그는 인권의 정치라는 말로 표현한다.
2. 소유의 외재적 변증법: 사적 소유와 집단적 소유의 변증법
제2조와 제17조에서는 소유를 “인간의 자연적이며 시효없는”,“신성불가침의”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 소유를 지금과 같은 의미로 새기지 않는다. 선언에서 소유는 사적 소유나 공적 소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가 공허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소유형태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소유가 소유이기 위해서는 가져야 할, 즉 소유가 권리로써 인정받기 위한 조건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언에 소유의 형태, 한계, 귀속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빠진 체, 소유의 전제조건만이 규정됨으로써, 이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어 왔고, 이는 매우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소유의 문제는 곧 생존권의 문제와 충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존권의 문제는 소유의 분배 문제로 제기되었다. 즉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사적 소유로 할 것인가 아니면 집단적 소유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들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생존권의 문제가 노동권의 문제로 교대되었다. 푸리에주의자들은 소유권을 노동을 인정하는 권리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고 자본의 소유자들은 모든 사람들의 소유에 봉사해야 한다는 귀결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귀결은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소유는 사적 소유로 개념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인권이라는 것은 이러한 배타적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은 하나의 부르주아적 통념이 되어 버렸다.1)
비록 노동에 대한 권리가 부르주아적 테제의 승리에 의해서 폐기되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시 노동의 권리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근대적 민족국가들이 집단적 협상 및 정치․경제적 논쟁의 공간을 열어 놓음으로써 사회적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들 또한 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절대적으로 지배받는 것은 노동자의 시민성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유의 행사의 조건들에 대한 규제가 필수적으로 요청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배타적인 사적 소유(자본가의 입장)와 집단적 소유(노동자의 입장)는 서로를 완벽하게 배척하지 못하게 되었다.
3. 소유의 내재적 변증법
집단적 소유나 사적 소유나 소유를 재화의 무제한적인 처분과 동일시하는 공통의 전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1789년 선언의 문자 자체 속에는 결코 함축되어 있지 않다. 선언은 유적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시작하는데, 그 소유는 자유, 평등, 압제에 대한 저항이 구체적으로 법으로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인간은 사물을 영유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우선 우리는 사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를 동일시하는 것을 문제삼을 수 있다. 개인들이 소유자라서 모든 배타적 처분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사적 소유자”라는 배타적이며 제한적인 범주 속에 들어와서 이러한 조건으로 대상을 배타적으로 처분하며, 권리를 배타적으로 영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국가적 소유(국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타적인 소유가 갈등을 일으킬 때, 수탈이 나타난다.
주체가 문화적인 또는 자연적인 대상들을 사용․전화․향유함으로써 사물의 소유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연관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가 사적 소유에 의해 은폐되었거나 개인들이 조정할 수 없을 때, 수탈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형식적인 집단화 속에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였는데, 우리는 소비나 향유 속에서의 소외에 대해서도 인식하였다. 따라서 소비 또는 향유의 대상에 대한 개인들의 영유 개념을 도출해야 하고, 이는 생활양식의 제도화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
또한 그 동안 소유는 총체적 점유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식으로 자연을 점유하다보니 공해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어떤 자원들 또는 어떤 보편적 재화들의 사용에 대한 통제를 제도화하고 “인류의 공동유산”이라는 통념을 법적으로 기초지울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통념은 통일된 인류라는 허구적 주체에 의한 보편적 소유이다. 이것은 기존의 소유 개념을 폐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물의 소유이고 영유의 한 계기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활동의 조절을 가능케 하며,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집단적 활동의 상호 통제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지적 활동의 소재는 그 자체로 사회공동체적인 것이다. 물론 수단이나 생산물이 점유될 수는 있으나, 사실 그것도 쉽지 않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대규모의 집단적 소유자에 의해서는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결국 소유는 지배로 되돌아간다. 요컨대, 소유법칙이 항상 권력의 일정한 분배에 의해 지지된다. 차별적 소유형태들의 분배 또는 매개 속에는 항상 이미 정치가 있다.
4. 소유의 정치화에 대하여
이 논문은 배타적 사적 소유권이 생존권을 억압하는 현실의 상황에서 1789년 인권 선언의 소유를 다시 해석함으로써, 소유의 정치화를 주장하였다. 소유의 정치화라 함은, 배타적 사적 소유의 보편적 소유로의 개념 전화, 그리고 이를 통한 소유의 제한과 통제를 의미하며, 소유의 정치화의 과정은 인권의 정치의 일반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권력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즉 소유라는 것은 시효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보편적 소유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고 현실의 소유법칙이라는 것은 정치화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법칙이 정치화될 수 있을 때만이 소유라는 것이 인권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