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보화스님
보화스님은 반산 보적 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였읍니다. 그 당시 그런 기행을 하는 스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오직 임제스님만이 심중을 알고 흉허물 없이 잘 지냈읍니다.
하루는 진주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에게 장삼 한 벌을 해달라."
하며 졸랐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화스님에게 장산을 지어드렸읍니다. 그러나 스님은
"이것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다."
하며 받지를 않는 것이었읍니다.
사람들이 더욱 이상히 여기며 미친 중이라고 수군댔읍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장삼 대신에 관을 하나 보내니, 보화스님이 웃으며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 하고는 그 관을 짊어지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동문 밖에서 떠나겠다."
고 하였읍니다.
다음 날 돔문 밖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는데 보화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죽지 않겠다. 내일 서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욕을 하고는 흩어졌읍니다. 다음 날 서문 밖에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남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읍니다.
다음 날 남문 밖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않고 내일 북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미친 중이 거짓말을 하여 사람을 속인다고 삿대질을 하며 분위기가 살벌하였읍니다.
다음 날 북문 밖에는 과연 보화스님이 관을 메고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읍니다. 보화스님은 관 위에 묵묵히 앉아 있는데 마침 한 길손이 지나가므로 그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관 안에 들어가 눕거든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달라." 고 하고는, 그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므로 그 길손이 못직을 하고 떠나갔읍니다.
길손이 성중에 들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진주성 사람들이 놀래며 북문 밖으로 보화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읍니다. 가서 못질한 관 뚜껑을 열어보니 그 속에 있어야 할 보화스님은 온데 간데 없었읍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때 마침 공중에서 은은히 요령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사람들으 그 요령 소리가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절을 하며 보화스님의 법력을 알아보지 못한 데에 대해 통탄하였읍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화스님이 보인 전신탈거의 이적입니다. 이 사실은 선종 어록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임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읍니다.
왕가는 후진 때 숨어사는 사람으로 유명한 도안스님과 친하였읍니다. 도안스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어 왕가가 찾아가니 도안스님이 말씀하셨읍니다.
"나와 같이 가지 않으려는가?"
왕가가 대답하였읍니다.
"나는 아직 빚이 좀 있어서 빚을 갚고 가겠읍니다."
그 뒤에 요장이 장안을 빼앗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 안에 있었는데, 요장이 물었읍니다.
"내가 곧 천하를 얻겠는가?"
"조금 얻겠다(略得)."
요장이 그말을 듣고 왕가를 죽여버렸으니 왕가가 말한 빚이란 바로 이를 말한 것이었읍니다.
그 뒤에 요장의 아들 요흥이 천하를 얻었는데 요흥의 자가 자략(子略)이었읍니다. 그러니 '조금 얻겠다(略得)'란 말은 자략이가 요장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왕가가 죽던 날, 어떤 사람이 농사에서 왕가를 만나니, 왕가가 자기를 죽인 요장에게 편지를 보내자 요장은 그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래며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동빈거사 이순양은 당나라의 현종 천보(742-755) 때 하양에서 났읍니다. 그 무렵 신선도를 닦아 크게 유명해진 종리권이 동빈을 보고 "세상의 영화는 잠깐 동안이니 장생불사하는 신선도를 배우라"고 권하였읍니다.
동빈은 그 말을 좇아 종리를 따라 공부 길을 떠났읍니다. 한 곳을 지나다가 종리는 큰 금덩어리를 하나 주어 가지고 대단히 기뻐하며 말하였읍니다.
"자네가 도를 닦으러 가니 하늘이 그것을 알고 도닦는 밑천을 하라고 주는 것이니 이것을 팔아서 보든 비용에 쓰자."
그러면서 동빈에게 금덩어리를 주자, 동빈은 크게 성내며 그 금덩어리를 집어던지며 말하였읍니다.
"내 들으니 도(道)하는 사람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던데 금덩어리 하나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무슨 도닦는 놈이냐? 너는 도인이 아니라 분명코 도적놈이니 너 같은 놈은 따라갈 수 없다,"
그러고는 뿌리치고 돌아가려 하였읍니다. 그러자 종리는 크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금덩어리를 자세히 보라."
동빈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이 아니라 썩은 돌이었읍니다. 그제서야 종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았읍니다.
그리하여 깊은 산골에 가서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종리가 어디 갔다 온다 하며 더 깊은 골짜기에 가서 무슨 약초를 캐어오라 하므로, 동빈은 지시한 곳에 가서 보니 아주 잘 지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읍니다. '이런 깊은 산골에 어찌 이런 집이 있는가?' 하는 의아심이 나서 그 집 마당에 가서 보니, 방안에서 세상에 보기드문 예쁜 여자가 반기며 나오더니, "우리 남편이 먼 길을 떠난 지 오래 되어서 대단히 적적하더니 마침 잘 오셨읍니다" 하며 동빈의 손을 잡아 당기려 하는 것이었읍니다.
이에 동빈이 번개같이 발로 차며 꾸짖기를, "이 요망한 년 이것이 무슨 짓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읍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과 그 여자는 간 곳이 없이 사라지고 자기 스승인 종리가 허허 하고 손뼉치며 웃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이리하여 동빈은 또다시 시험당한 줄 알았읍니다.
종리가 하는 말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제물과 여자인데 네가 그만큼 뜻이 굳으니 이제는 너의 집에 가서 부모를 아주 하직하고 참으로 공부 길을 떠나자."고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종리와 같이 자기 고향에 가서 집으로 갔는데 대문이 잠겨있고 아무리 소리쳐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담을 넘어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기의 부모, 형제, 처자가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온 마당에 가득 널려 있었읍니다. 종리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벌벌 떨며 동빈더러 '그 시체를 전부 주어 모으라' 하였읍니다.
동빈은 처음부터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읍니다. 시체를 주워 모으면서 얼굴을 조금도 찌푸리지 않고 마치 나무 막대를 주워 모으듯 아주 태연하였읍니다. 종리가 그것을 보고 또 한번 크게 웃으니 모든 시체는 간 곳 없고 집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반기며 쫓아나왔읍니다. 그때야 비로소 종리에게 시험당한 줄 알고 동빈은 크게 탄복하며 수없이 절하였읍니다.
그 뒤로 동빈은 신선도를 닦아 세상에 으뜸가는 신선이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 비롯하여 기묘한 재주를 많이 가졌읍니다. 그리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황룡산에서 회기 선사의 도력에 항복하고 그 밑에서 크게 깨쳐 불법으로 돌아왔읍니다. 그후 천여 년 동안 그 몸 그대로 돌아다니며 많은 불사(佛事)를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들입니다.
일례를 들면, 송나라의 휘종 선화 원년(1119)에 휘종 황제가 임영소라는 사람에게 속아서 그의 모든 그와 모든 것을 의논하는데, 문득 동빈이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임가를 꾸짓고 황제에게 속지 말라고 타이른 것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읍니다.
유안은 당나라의 대종(763-779) 때의 유명한 재상인데, 어릴 적부터 이인(異人) 만나기를 소원하여 많은 애를 써 왔읍니다. 한 번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왠 이상한 사람들이 서너명이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왕십팔이 있자 않은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 깊이 간직하였읍니다.
그후 자사가 되어 남중으로 가서 형산현을 지날 때 그 현청에서 쉬었읍니다. 때는 붐철인데 좋은 채소들을 내어오는데, 하도 이상한 것들이 많기에 물었읍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것들을 구하여 왔느냐?"
"여기 왕십팔이라는 채소 가꾸는 사람이 있는데 솜씨가 참으로 묘합니다."
그 말에 문득 이전에 이름을 들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한 번 가서 만나보자' 하였읍니다. 관인들이 그를 불러오려는 것을 마리리고 자기가 직접 가서 보았읍니다.
왕십팔은 떨어진 의복에 그 모양이 대단히 흉하였는데, 유안을 보더니 겁을 내면서 벌벌 떨면서 절하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그를 데리고 가서 술을 권하니 겨우 조금만 먹었읍니다. 무엇을 물어도 도무지 '모른다' 고만 하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같이 가자' 하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못 이겨 같이 갔읍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배 안에서 유안은 자기 가족에게 왕십팔은 참으로 휼륭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모두 예배하도록 하였읍니다.
며칠을 가다가 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더니 계속하여 똥을 싸서 배 안의 사람들이 크게 곤란해하였읍니다. 모두가 그를 원망하는데 유안만은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읍니다. 그러나 며칠 앓더니 그만 죽어버렸읍니다. 유안은 크게 슬퍼하며 정성을 다하여 장사지내 주었읍니다.
뒤에 유안이 벼슬이 바뀌어 딴 곳으로 갈 때 형산현에 들렸더니, 군수가 나와 반겨 맞으며 그때에 데라고 갔던 왕십팔이 얼마 후 돌아와서 '도로 가라' 하기에 '그만 돌아왔다'고 말하더라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크게 놀라 '지금도 있는가?' 하고 확인한 뒤에 그 처소에 가 보니, 빈 집뿐이었읍니다. 이웃 사람 말이 '어제 저녁에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울며 여러 번 절하고 나서 사람을 보내어 옛날에 그를 장자지낸 묘를 파보니 과연 의복 뿐이요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그 때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몇 해 뒤에 유안이 큰 병이 들어 정신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였읍니다. 왕십팔이 찾아와서 유안에게 약 세 알을 먹이자 배 안에서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유안이 일어나 앉는데 병이 씻은듯이 나았읍니다. 가족들로부터 왕십팔이 병을 낫게 하였다는 말들 듣고서 유안이 일어나 울며 절하자, 왕십팔이 말하였읍니다.
"옛정을 생각하여 와서 구하였는데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살 것이다. 삼십 년 뒤에 만자나."
그리고는 나가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없고 많은 보물을 주어도 허허 크게 웃기만하고는 받지 않고 가버렸읍니다.
그 후 유안이 재상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잘 다스리다가 못된 사람의 중상으로 대종 황제의 미움을 받아 충주 땅에 귀양을 갔읍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왕십팔이 또 찾아와서는 왠 약을 주어 받아먹으니, 삼십 년 전에 먹은 약이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읍니다. 왕십팔은 그것을 물에 씻어 지니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읍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유안이 죽자, 이 신기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전하여졌읍니다.
법수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가 현종 개원 26년에 꿈에 이상한 스님을 만났는데 가사 오백벌만 지어 회향사에 보내라 한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법수가 곧 가사를 만들어 회향사를 찾아가려 하였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읍니다. 하루는 길에서 꿈에 본 그 스님을 만나게 되었읍니다.
"부탁한 가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스님은 대뜸 이렇게 물었읍니다.
"가사는 다 되었으나 회향사를 찾지 못하겠읍니다."
법수가 대답하자 그 스님이
"따라오라."
하기에, 며칠 동안 따라가다 종남산으로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아주 궁벽한 곳으로 가서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단이 나왔읍니다.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스님과 함께 오래도록 예배드리자, 어느 사이엔가 층암절벽 위에 있는 많은 기와집들이 보이는 것이었읍니다.
스님과 같이 올라가 보니 그곳에 과연 회향사라는 현판이 보였읍니다. 건물과 경치가 모두 인간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던 휼륭한 것들이었는며, 대중스님들도 많은데 다 성인들 같이 보였읍니다. 그 스님은 가사를 전부 나누어주고 나서 한 빈 방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 방은 본래 지금의 당나라 천자의 방인데, 여기 있으면서 항상 음악을 좋아하던 탓에 인간으로 귀양가서 임금이 되었다."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더니 옥통수를 하나 주며,
"이것이 당나라 임금이 불던 것이니 가져다 주라."
하였읍니다. 하룻밤도 더 못자게 해서, 그 이튼날 산을 내려와 쳐다보니 절은 간 곳 없고 오직 바위만 보일 뿐이였읍니다.
법수가 여러 차례 예배를 한 뒤에, 대궐로 가서 옥통소를 올리고 그 연유를 말하니, 현종 황제가 받아 불어보는데 정말로 많이 불던 사람같이 소리가 잘 났읍니다. 그래서 현종은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문장가인 이태백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자신은 옥통소를 불며 노래하고 양귀비를 시켜 춤추게 하니 마치 인간을 떠난 신선놀음과 같았읍니다.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지자 기이하다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포대화상이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읍니다. 남에게 얻어 먹고 다니는 거지 스니인데 살림살이라고는 큰 포대 하나 뿐이었읍니다. 포대 하나만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뒷꼭지를 똑똑 치면서 돈 한닢 달라고 하곤 하였읍니다.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었읍니다.
또, 예를 들어, 생선 장수를 보면 생선 한 마리만 달라고 하여 한 입만 베어 먹고 포대에 넣고 다녔읍니다. 그렇게 무엇이든 눈에 뛰기만 하면 달라고 했읍니다.
그리고 장차 가뭄이 계속될 것 같으면 흐린 날에도 삿갓을 쓰고 다니고, 장마가 계속될 것 같으면 맑은 날인데도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읍니다. 이런 식으로 앞일을 예견하는 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읍니다.
포대화상이 돌아가실 때(916)에는 명주 악림사 동쪽 행랑 밑에서 법문을 하면서 앉은 채로 입적했읍니다. 그 때 이런 계송을 남겼읍니다.
미륵, 참 미륵이여
천만의 몸을 나투는구나.
때때로 사람에게 보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구나.
포대화상의 죽은 시체는 전신을 그대로 절 동당에 모셔 두었읍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 곳곳에서 포대화상이 돌아다니는 것이었읍니다.
배도스님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나면 지고 다니던 걸망에서 조그마한 접시를 꺼내서 강물 위에 뛰우고는 그것을 타고 강을 건너곤 하여, 사람들이 '접시를 타고 다닌다'는 뜻의 배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접시를 타고 물을 건너는 스님이 접시가 없다고 강을 못 건널 까닭이 있겠읍니까? 그런 것은 모두 장난입니다.
배도스님은 그렇게 하며 여러 곳을 다니며 중생을 교화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죽은 뒤에도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곤 하였읍니다.
지공 화상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읍니다. 그래서 양나라 무제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하여, 스님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 있었읍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가 하고 옥에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받고서 무제는 크게 놀랐읍니다. 무제는 지공 화상을 궁중에 모셔놓고, 잔치를 베풀어 참회를 올리며, "스님, 몰랐읍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니라 대궐로 모시겠읍니다. 궁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법문을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읍니다.
지공 화상은 그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머물기로 하였읍니다. 그런데 스님이 계시던 절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다 하여 가서 알아보니 과연 사실이었읍니다. 이에 양나라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천자 자리에 있던 40여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시켰읍니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무제가 물었읍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읍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때까지..."
지공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제가 몸소 종산 정림사에 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읍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공 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장사 지내러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읍니다. 그 많은 사람이 멀마나 환희심을 내었겠읍니까?
그 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라는 절을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탑을 세우게 하였읍니다. 더디어 나무로 지은 그 탑이 다 만들어지자, 무제는 비로소 '아차! 잘못했구나. 지공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목조탑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탑을 헐고 새로이 석조탑을 짓기로 결심하고는, 사람들에게 시켜 그 목조탑을 헐기 시작하였읍니다. 바로 그때 후경이 쳐들어와서 양 무제는 망하고 말았읍니다.
양 무제가 어느 때인가 지공 화상께 이렇게 물은 적이 있읍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읍니까?"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목의 두 곳을 가리켰읍니다. 그 때에 무제는 '무슨 말씀인가,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가?' 하고 의아해 하였읍니다.
나중에 후경이 쳐들어오자 그제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었읍니다. 지공스님이 목을 두번 가리킨 것은 바로 목 후(喉) 자, 목 경 자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는 옛날 이야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보기로 사명대사의 비석을 들 수 있읍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와란 때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유명한 스님입니다. 스님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밀양의 무안입니다. 나라에서는 그곳에 스님이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읍니다.
그러데 그 비석에서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에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 생기려 하거나, 아니면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면, 이 비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이 나오는데, 조금 흐르다 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양이 나온다고 합니다.
많이 나올 때는 대두 일곱 말에서 여덟 말까지도 나왔는데, 그동안 동학혁명,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그리고 8.15해방, 6.25사변, 여순반란사건, 4.19의거, 5,16혁명 때 그 돌에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5.16 때에는 다섯 말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 각 신문에서 이 사실을 많이 보도하였는데 특히 동아일보에서 자세히 소개하였읍니다.
나는 이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도 보고, 또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밑기는 어려워 직접 가 보았읍니다. 비석은 무안 지서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읍니다. 흙으로 대를 모아 놓고 여러 층층대를 올라가서 큰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새까만 돌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마치 방금 만든 비석 같았읍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지붕을 씌워 놓고 비각을 만들어 놓았읍니다. 주의를 살펴보니 습기 같은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읍니다.
비각 주의에는 비각을 지키는 집이 서너 채 있고 구언이라는 노스님이 계시는데, 표충사 주지스님을 오래 한 분이었읍니다. 그 노장스님이 말씀하기를, 비석에서 물이 나오는데 샘처럼 펑펑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글자 사이사이의 매끄러운 데에서만 마치 구슬 맺히듯 땀 나듯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비석 천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석 밑에는 물이 고이게 되어 있어서 그 양을 알 수 있게 해 놓았읍니다.
그래서 그 노장스님에게 "세사의 어느 돌에거도 물이 안 나오는데 이 산중의 비석에서만 물이 나온다는 것은 거짓말 아닙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은 딱하다는 듯이 설명을 덧붙였읍니다. 비석에서 물이 나오면 수백명의 사람이 몰려오고 순경들이 와서 밤새 지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물 한 방울을 더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과 순경이 지켜보고 있으니 거짓말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석의 물빛은 보통 물빛과 같고, 또 물맛도 보통 물맛과 같다고 합니다. 내가 갔을 때는 물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서 그냥 사진을 몇장 찍고 내려 왔읍니다. 가는 길이 무안 장날이었는데, 사람들을 잡고 사명대사 비석 이야기를 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비석에서 땀이 난다는 것입니다. 모두듣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했읍니다. 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글자에는 전혀 물이 흐르거나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사를 끝내고 표충사를 들러서 부산으로 왔는데 당시에 동아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분이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물었읍니다. 그래서 사실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더니 "스님께서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당신은 삼시년 검사 생활을 했다던데, 그렇다면 그 때에 증인들 말을 안 믿고 또 보지 않은 것은 재판 안 하고 직접 본 것만 재판합니까?" 하고 되물었읍니다. 수백명의 증인이 있으면 확실한 것입니다.
사명대사가 그 비석을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도 그것은 사명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법당의 부처님도 부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도 하고 기도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 사명대사는 사백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물을 흐르게 해서 나라의 중대사를 예시하는 신기한 힘을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대사의 무애자재한 능력이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보기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의 무한한 능혁을 개발한다면, 귀종 선사도 될 수 있고 또 원효스님의 스승인 혜공스닙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큰스님들 처럼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되는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영겁불망이니, 곧 영원토록 다시 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의 경계입니다.
이때 대중들 가운데 한 스님이 이어서며 말했다.
"스님의 너무나도 넓고 박학다식한 법문에 저희들 무지몽매한 중생들이 불같은 의심을 금할 수
없어서 몇가지 여쭈어 보아야겠읍니다."
"몇 가지 물어보겠으면, 천천히, 날씨도 시원할 때, 그 때 며칠이고 이야기해 보자. 이리 더운
데, 대중이 모두 네 이야기 때문에, 그래 네 이야기 들므며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쌍놈아."
"그러면 스님은 어떤 분인지, 이것 하나만은 꼭 어쭙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냐고! 내가 성철이지. 해인사 방장 성철, 나이는 칠십이고...(웃음)"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하겠읍니다. 종교의 목표는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는 것이라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초월신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ㅂ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읍니다. 따라서 초월신을 전제로 한 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면을 장식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읍니다.
현실 이대로가 불생물멸이며, 중도세계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에서도 현실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읍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없는 절대의 세계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읍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 삼천대천세계, 미진수법계 이대로가 불국토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님이 없읍니다.
그런데 중새은 번뇌 망상의 구릉에 가려서 눈 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명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을 뜬 사람이 볼 때는 광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 동시에 사람 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체(眞金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읍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원불멸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읍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과 같아서 그 옥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의 업력에 따라 생사로상(生死路上)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듭하는 업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없는, 고(苦)가 연속하는 생사의 불멸입니다.
공부를 성취한 사람은 진흙을 다 씻어 버린 깨끗한 옥과 같아서 업력에 끄달이지 않아 생사로상에서 해메이지 아니하고 모든 고(苦)를 벗어나 영원히 자유자재한 대활동을 하게 되는 해탈의 불멸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 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해서 삼매를 얻어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읍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라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면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중도에 두고 있읍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이 서로 합해서 원융무애한 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자재한 생활을 하셨읍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새에게 '자기의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을 절대 성취할 수 없읍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생활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절대적인 자유세계임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다닌다면 절대 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 앉아 있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 자기 자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덩어리입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무심삼매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읍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생하시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금덩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리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을 합니다.
만일 어느 집에 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보배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 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읍니다.
첫댓글 정말 감명 받았읍니다 ,사람은 욕심 없이.지혜롭게 살아라로 듣겠읍니다,감사합니다 ,성불합시다,,()()(),,,,,,,,,,,,,,,?
큰지혜받고갑니다~~감사합니다~~성불합시다~()()()
옴아비라훔캄스바하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WvxyCWOrwsAyWAcssErgjibZYIY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