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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도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성경을 알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간단한 성경 역사를 말하고자 합니다.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년)는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였는데, 당시에 카톨릭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던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성경”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이 영어 성경을 보지 못하도록 영국의 아룬델 대주교는 교황에게 ‘저 사악한 위클리프’를 처치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뒤 1408년에 그의 지휘 하에 옥스퍼드 회의가 열려 “어떤 형식으로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는 안되며 어느 누구도 그런 책을 읽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결정했고, 이 결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많은 크리스천들이 위클리프 성경을 보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 성경을 목에 매단 채 화형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요한 구스플레쉬(John Goosefiesh)가 인쇄기를 만든 것이 쿠텐베르크 인쇄기이고, 이 인쇄기로 1450-1455년에 세상에서 처음으로 인쇄를 한 것이 다름 아닌 라틴어 성경이었는데 이 책이 바로 ‘쿠텐베르크 성경’이다.
틴데일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어학과 문학 지식을 습득하고, 1521년에 켐브리지 대학으로 옮겨가 강사로 몇 년간 머물렀다. 그는 고향으로 가 기사 마스터 웰치의 집에 거하며 대수도원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성경 내용 중 논쟁거리와 질문 등에 대해서 서로의 견해를 나누었다. 그 후 그는 성경을 번역해 카톨릭을 피해 마틴 루터가 살고 있던 보름스로 도망가 1524-1525년경 자신의 영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성경은 영국으로 비밀리에 옮기게 되었고, 영국 런던의 주교 톤스탈과 토마스 모어 경은 틴데일의 영어 성경을 “거짓되고 실수투성이 번역”이라고 깎아 내렸다. 톤스탈 주교는 틴데일 성경을 없애기 위해 포목상 패킹턴의 제안을 받아들여 틴데일 성경을 다 사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틴데일은 다시 한 번 더 수정하여 세 배나 많은 신약 성경을 인쇄하게 되었다. 1531년에 모세 오경이 번역되었고, 커버데일은 틴데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1535년 신구약 성경을 인쇄하게 되었다.
마일즈 커버데일(Miles Coverdale, 1488-1569년)은 캠브리지에서 수학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있는 어거스티니안 수도회의 수사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개심을 경험한 후 그 수도원을 떠났다. 그는 성경에 대한 사랑에 빠져 기록하기를 “성경이 깨달아진 모든 곳에서 성경은 모든 것을 개혁시킨다. 왜?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 올리베땅(1506-1538년)은 칼빈의 사촌으로 파리 대학과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카톨릭을 피해 1528년에 스트라스부르그로 도피하여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였다. 그는 왈덴시스들을 만나게 되었고, 왈덴시스들은 초대 교회 때부터 전해져 왔던 원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1532년 10월 챔포란스에서 종교개혁가들에게 이 성경을 넘겨주었다. 그들은 무척 가난했지만 가난한 중에서도 이 번역본 출판을 위해 1,500크라운을 모금하였다. 1533년에 올리베땅은 제네바로가서 레페브레 역본의 도움을 받아 불어로 번역하여 1535년 6월에 인쇄하였다.
존 로저스(John Roger, 1500-1555년)는 틴데일이 마무리 하지 못한 구약 부분을 완성하여, 최초의 완전한 틴데일 성경을 출판하였다. 틴데일은 순교하기 전까지 모세오경과 요나서를 출판하였다. 틴데일은 또한 여호수아에서부터 역대하까지 번역을 마쳤으며, 존 로저스가 이 사본들을 입수하여, 커버데일의 구약 성경 부분을 사용하여, 구약 성경을 완성하였다고 신뢰할 수 있는 전거들이 전해준다. 로저스는 1537년에 매튜 성경이라고 알려진 성경을 발표하였다. 1555년 2월에 틴데일에 이어 화형 당한다.
영국의 핍박을 피해 제네바로 이주한 몇몇 사람들이 올리베땅 불어 성경과 이탈라 성경 즉 왈도파 성경과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성경과 다른 여러 성경을 가지고 영어로 번역하는데 신약은 1557년에 신구약은 1560년에 출판되었다. 제네바 성경은 인기 있는 성경이 되었고, 인기가 킹 제임스 성경으로 옮기기까지 약 100년 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랭스-듀웨이(Rheims-Douay) 버전인데 이 역본이 만들어 지도록 후원해 주었던 대학 소재지의 지명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 신학교는 ‘카톨릭 신앙으로 영국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사제들의 훈련을 위해서’ 1568년에 스페인 듀웨이에 세워졌다. 1578년에 그 학교는 프랑스 랭스로 옮겨졌고, 여기서 1582년에 신약 성경이 완성되었다. 학교는 다시 1593년에 듀웨이로 이전되었고, 그곳에서 약 15년 후인 1609-10년에 구약이 완성되었다. 이 성경은 자기들의 주석을 삽입시켜 명백한 성경의 진리를 애매모호하게 만들 수 있었다.
1604년 1월 14일. 저 유명한 햄튼 코트 협의회(Hampton Court Conference)에서 유명한 청교도 존 래이놀즈 박사(Dr. John Rainolds)- 옥스퍼드 대학의 크퍼스 크리스티 대학의 박학다식한 총장-가 “대왕에게 성경의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