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쓰라 다로(桂太郞)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이 나거나 자란 곳 ⊙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쇼가손주쿠(松下村塾) 열어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기도 다카요시
(木戶孝允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들 배출 ⊙ 아베 신조, 2015년 쇼가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 조슈(<ruby>長州 출신 메
이지 지사들의 후예 자임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요시다 쇼인이 메이지유신의 인재들을 길러낸 쇼가손주쿠(松下村塾) .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따사롭다. 마을길을 따라 난 수로(水路)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노닌다. 일행도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에 찬탄을 연발한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시. 인구 15만명 남짓한 혼슈(本州) 서남단의 작은 도시. 자유경제원에서 주최한 모임들에서 만났던 이들이 ‘일본 경제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관련 역사탐방단을 조직한다고 했을 때, 일정에 하기를 꼭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처음에는 이름도 생소한 시골 도시를 왜 일정에 넣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던 기획담당자에게 나는 몇 사람의 이름을 읊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야마가타 아리토모(山顯有朋·1838~1922),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 가쓰라 다로(桂太郞·1848~1913),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7~1926
) …. 국사 교과서에서 이름을 한 번은 접했던, 100여 년 전 일제(日帝)의 조선침략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이들 - 하기는 바로 그들이 태어나거나 성장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길러낸 것은 초야에 묻혀 살다가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
9)이라는 사내였다. 이들이 있었기에 조슈(長州·야마구치현의 옛 이름)는 메이지유신에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일본의 군부와 정계를 좌우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 주자, 기획담당자는 두말없이 하기를 일정에 포함시켰다. 가쓰라 다로의 생가에서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유명한 가쓰라 다로 전 일본 총리의 생가
첫 번째 방문지는 가쓰라 다로의 생가. 을사늑약에 앞서 맺어졌던 가쓰라-태프트밀약의 그 가쓰라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끌었던 조슈 군벌의 핵심인물인 가쓰라는 3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내면서 영일동맹 체결, 러일전쟁 승리, 한일합방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구미(歐美)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이 되겠다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의 꿈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가쓰라 다로다. 물론 일본의 그러한 성취는 우리에겐 재앙이었다. 가쓰라 다로의 집 앞에 서니 집 안이 들여다보였다.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우리에겐 기분 나쁜 사람인데, 입장료까지 내면서 들어갈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그때 관리인 할머니가 나왔다.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간코쿠진?”이라며 반가워했다. 입장료는 안 내도 되니 그냥 들어오란다. 아마 29명이나 되는 한국인이 몰려온 것이 신기했나 보다. 마당에는 가쓰라 다로의 동상이 서 있다. 무엇인가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모습이다. ‘가쓰라가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러일전쟁의 개전조서(開戰詔書)?’ 동상 옆에는 ‘영일동맹 100주년 식수’ 기념 표식이 있다. 신이 나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던 할머니는 쇼가손주쿠(松下村塾)와 하기 성하마을(城下町) 등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을 듣자 “그럼 문 닫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면서 우리들의 등을 떠밀었다. 할머니는 가쓰라와 한국, 아니 하기로 대표되는 조슈와 한국의 악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했다. 쇼가손주쿠(松下村塾)
쇼가손주쿠 입구에 있는'메이지 유신 태동지지' 휘호석
아베신조 일본 총리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의 글씨다
인근에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생가터를 거쳐 마쓰모토천(松本川) 동쪽에 있는 쇼가손주쿠를 찾아갔다. 쇼가손주쿠는 조슈번의 병학(兵學)사범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열었던 시골 학당이다. 여기서 한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元兇)’으로 꼽는 이토 히로부미, 조슈군벌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도쿠가와막부 타도와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목에서 큰 역할을 했던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등이 배출되었다. 쇼가손주쿠 입구에는 ‘축 메이지일본의 산업혁명유산-쇼가손주쿠 세계문화유산등록’이라는 깃발이 서 있다. 2015년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나가사키, 가고시마, 야마구치 등지에 산재한 23개의 메이지 시대 산업 유산과 함께 쇼가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두 개의 커다란 휘호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에는 ‘메이지유신태동지지(明治維新胎動之地)’라는 글씨가, 다른 하나에는 ‘살장토연합밀의지처(薩長土聯合密議之處)’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의 것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일본 총리, 뒤의 것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의 글씨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 사토 에이사쿠는 작은 외할아버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깃발과 두 개의 휘호석은 마치 아베 총리의 집안이 요시다 쇼인에게 바치는 봉헌물 같아 보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메이지 지사들의 멘토’ 요시다 쇼인
쇼가손주쿠의 강의실 다다미 10장 반 크기의 이 강의실에서 요시다 쇼인은 90명의 제자를길러냈다
요시다 쇼인은 10살 때 번교(藩校·번의 공립학교)인 명륜관(明倫館)의 교단에 섰고, 11살 때에는 번주(藩主·번의 영주=다이묘) 앞에서 병학을 강론해 천재 소리를 들었다. 일찍부터 아이자와 세이이사이(會澤正志齋)의 국수주의적 자강론(自彊論)의 영향을 받았고, 사쿠마 쇼잔(座久間像山)과 교유하면서 국제정세의 흐름에 눈을 떴다. 1853년 6월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구로후네(黑船)가 개국을 요구하러 에도 앞바다 우라가(浦賀)에 나타났을 때, 요시다 쇼인도 그 현장에 있었다. 서양의 힘을 두 눈으로 확인한 쇼인은 서양을 배우기 위해 밀항을 시도했다.
이듬해 3월, 페리 제독이 수교(修交)를 위해 다시 일본에 왔을 때 친구 가네코 주스케와 함께 쪽배를 타고 페리 제독의 기함 포헤탄호를 찾아가 미국으로 가게 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페리 제독은 막 수교한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 일로 요시다 쇼인은 그해 9월부터 조슈의 노야마옥(野山獄)에서 감옥 생활을 했다. 여기서 쇼인은 수감자들을 상대로 자신이 읽은 《맹자》 등에 대해 강론했는데, 이것이 재미있다고 소문이 났다. 1855년 12월 쇼인은 마쓰모토촌에 있는 자기 집에 머문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이곳으로도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연금에서 해제된 후인 1857년 11월 쇼인은 본가 마당에 있던 다다미 8장짜리 1칸 방의 작은 건물을 수리해 정식으로 쇼가손주쿠를 열었다. 제자들이 늘어나자 쇼인은 1858년 2월 강의실을 다다미 10장 반 크기로 증축했다. 요시다 쇼인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덕분에 천민에 가까운 신분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천황절대주의자였던 요시다 쇼인은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원용해 막부 타도를 주장했다. 그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막부 정권 최고통치자의 정식 칭호. 줄여서 ‘쇼군’이라고 함)이라는 것은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조정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직책인데, (서양 오랑캐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무력(無力)한 쇼군과 막부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쇼인은 막부를 타도하는 동력을 초망(草莽), 즉 민초(民草)들로부터 구했다. 쇼군이나 다이묘(大名·제후), 상급 사무라이들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되니, 초망, 즉 민중을 각성시켜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쇼가손주쿠는 쇼인이 막부의 공안책임자였던 마나베 아키카쓰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1858년 12월 노야마옥에 갇히면서 문을 닫았다. 쇼인은 에도로 이송되었다가 이듬해 10월 26일 처형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도 50년 후 같은 날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송문의 쌍벽
쇼가손주쿠에 걸려 있는 쇼인과 그의제자들
맨 윗줄 왼쪽부터 구사마 게즈이, 다마스기 신사쿠, 요시다 요인 ,둘째줄 냄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 그 왼쪽아 야마가타 아리토모다
구사마 겐즈이(<b>久坂玄瑞</b>), 다마스기 신사쿠(高杉 晋作), 요시다 쇼인 (<b>吉田 松陰 )</b>
기도 다카요시(木戸 孝允 ) 마에바라 잇세이(前源一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河北義次郞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境二朗 品川彌二郞
다다미 10장 반 크기의 강의실에는 요시다 쇼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고집 세고 강퍅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사내가,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까지도 바꾸었다’고 생각하니 착잡했다. 강의실 측면에는 요시다 쇼인과 12제자의 초상이 걸려 있다. 문득 예수와 12사도가 생각난다. 쇼인의 베드로는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1840~1864)였다. 존왕양이 운동의 선봉에 섰던 구사카 겐즈이는 1864년 8월 조슈번 군대가 교토 황궁을 점거하려다가 사쓰마-아이즈번 군사들에 패해 실패한 ‘하마구리문의 변(變)’ 때 자결했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구사카 겐즈이와 함께 ‘송문(松門)의 쌍벽’ 소리를 듣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1839~1867)는 1864년 12월 시모노세키 고잔지(功山寺)에서 기병대(奇兵隊)라는 민병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조슈번의 친막부파 정권을 타도했다.
이를 계기로 하마터면 유신의 대오에서 탈락할 뻔했던 조슈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을미사변의 주역 미우라 고로 등이 이때 두각을 나타냈다.
쇼가손주쿠 뒤에 있는 쇼인 신사메이지 유신의 멘토였던 소인은 주어서 신격화되었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서양식 소총으로 무장했던 기병대는 사무라이뿐 아니라 일반 농민이나 상인들까지도 부대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기병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기병대는 요시다 쇼인이 말했던 초망굴기론(草莽崛起論)를 실천에 옮긴 부대였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6년 막부가 15만 대군을 일으켜 조슈로 쳐들어오자 도사(土佐)번 출신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1835~1867) 등과 힘을 합쳐 이를 막아 냈다. 하지만 그는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보지는 못했다. 1867년 4월 폐결핵으로 시모노세키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신(晉)’ 자는 바로 다카스기 신사쿠에게서 따온 것이다.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는 다카스기 신사쿠를 존경해 이 글자를 넣어 아들(아베 신타로 전 일본 외무장관)과 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아마도 아베 총리는 자신을 ‘메이지 지사들의 후예’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활동했던 시모노세키가 아베의 지역구다. 요시다 쇼인이 정식으로 쇼가손주쿠를 열었던 기간은 1년2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그동안 그가 길러낸 제자는 90명. 하지만 그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메이지유신의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구사카 겐즈이는 24세, 다카스기 신사쿠는 28세에 세상을 떠났다. 쇼인의 제자이자 조카인 요시다 도시마로는 23세의 나이로 신센구미(新選組)의 칼에 죽었다. 요시다 쇼인은 29년을 살았다. ‘치열하게 살았던 소수(少數)의 선각자(先覺者)들이 메이지 일본을, 아니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시려 왔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 이토의아버지는 원래 부사관급인 주겐의 시중을 들던 천한 신분이었다
쇼가손주쿠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가 있다. 생가 옆 공터에는 색을 입힌 동상이, 생가 옆에는 후일 이토 히로부미가 증축한 별장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는 원래 사무라이 아래의 부사관급인 주겐(中間)의 시중을 들던 천민이었다. 아버지 하야시 주조가 자기가 모시던 이토 가문의 양자가 되면서 이토 히로부미도 주겐으로 올라서고, ‘이토’라는 성(姓)을 쓰게 되었다. 그래도 사무라이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운명은 이웃에 사는 친구 요시다 도시마로 덕분에 쇼가손주쿠에 들어가게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주선가’로 평한 걸로 보아 요시다 쇼인은 그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말단에 서서 칼에 피를 묻히면서 싸웠고, 서구 문물을 배우겠다고 영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영국 유학을 갔던 사람 중 하나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강화도조약 때 일본 측 부사(副使)였고, 주한 일본공사를 지내면서 미우라 고로를 불러들여 을미사변을 기획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메이지유신은 사무라이와 다른 계급 간의 차별을 철폐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71~1873년 이와쿠라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를 순방하면서 메이지 정권의 실세였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 등의 눈에 들었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8~1877)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을 때에는 대외침략보다 부국강병이 우선이라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의 편에 서서 정한론을 좌절시키는 데 일조했다. 1877~1878년 ‘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이토 히로부미의 시대가 열렸다.
실무능 력을 바탕으로 일본 정치의 중심인물로 부상(浮上)한 그는 이후 초대 총리대신 등을 지내면서 내각제도 설립, 국회 개설, 일본 제국헌법 제정 등의 업적을 남겼다. 우리에게는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유신의 원훈(元勳)이다. 일본 총리 4명 배출
하기의 성하마을 , 에도 막부 시대에는 조슈의 상급 사무라이들이 살던 곳이다
하기는 모리(毛利)씨가 다스리던 조슈번의 수도였다. 일본의 5분의 1을 장악하고 있던 서일본의 패자(覇者) 모리씨의 근거지는 원래 히로시마였다. 그런 모리씨가 궁벽진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도요토미파)에 가담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씨의 영토 가운데 3분의 2를 빼앗은 후 시골 구석인 하기로 추방했다. 모리씨의 거성(居城)이었던 하기성은 메이지유신 후 헐려 버렸지만, 성하마을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얀 색으로 칠한 담장이 이어지는 예쁜 마을이다. 성하마을에는 다카스기 신사쿠나 기도 다카요시의 생가가 남아 있다. 그들은 조슈에서 손꼽히는 상급 사무라이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의 생가와 하기시 동쪽 끝자락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 간의 거리는 그들의 신분상의 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메이지유신 3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의 집도 인근에 있다.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그는 조슈와 사쓰마 간의 동맹을 성사시키고, 메이지유신 후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영주들이 다스리던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중앙집권정책) 등 굵직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근처에는 조슈군벌의 마지막 세대로 1920년대에 총리를 지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1864~1929)의 생가 터가 있다. 지금도 인구 15만명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도시에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다나카 기이치 등 4명의 총리를 배출한 것이다. 명륜당과 명륜관
기병대를 이끌고 조슈의친막부파 정권을 타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동상(외쪽)과 그의 생가
조카마치 근처 중앙공원에는 구사카 겐즈이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이 서 있다. 다카스기 신사쿠나 구사카 겐즈이의 동상이 젊은 사무라이의 모습이라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은 서양식 군복을 입고 말을 탄 노년의 모습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은 1868년 이후 반세기 동안 메이지 일본이 이룩한 근대화 노선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유신 이후 문민정치인·관료그룹을 대표한다면, ‘육군의 교황’ 소리를 들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슈군벌을 대표한다. 가쓰라 다로(육군대신, 총리 역임), 데라우치 마사다케(조선총독, 총리 역임), 하세가와 요시미치(조선군사령관, 조선총독 역임) 등 조선과 악연을 맺은 이들이 모두 그의 슬하에서 나왔다.
야미구치 유다온센역 앞 거리에는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기념하는 깃발들이 있다
중앙공원 옆에는 명륜소학교가 있다. 요시다 쇼인이 강단에 섰던 조슈의 옛 번교 명륜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에도 비슷한 이름의 건물이 있었다. 성균관의 명륜당이 그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건물이지만, 조선의 명륜당에서는 망국(亡國)의 썩은 선비들이 나왔고, 조슈의 명륜당에서는 근대화의 기수들이 나왔다. 하기를 돌아본 후 야마구치시 유다(湯田)로 향했다. 거리 곳곳에는 빨갛고 하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야마구치시에서 내건, 내년이 메이지유신 150주년임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그 깃발 위로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150여 년 전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를 본받아 다시 한 번 회천(回天)과 유신을 꿈꾸는 아베 신조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출처]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일본기생-메이지 유신의 고향 하기(萩)> / 월간조선
2. 나가노시 마쓰시로 - 징용의 한(恨), 유신의 뿌리
⊙ 마쓰시로대본영, 태평양전쟁 말기 건설한 지하벙커…, 조선인 징용자 6000명 동원 ⊙ 마쓰시로 출신의 국학자 사쿠마 쇼잔,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개국’ 주장
…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등의 스승
⊙ 가와나카지마 옛 전쟁터, 전국시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5차례 맞붙었던 곳
일본 나가노시 마쓰시로에 있는 쇼잔신사. 메이지유신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사쿠마 쇼잔의 생가 자리에 지었다
일본 나가노(長野)역 인포메이션 센터. 안내하는 아가씨가 가져온 마쓰시로(松代) 안내 책자를 보던 나는 한순간 ‘앗!’하고 탄성을 질렀다. 책자 속 인물이 낯이 익었다. 작은 사진이지만 형형한 눈빛의 그 사내가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1811~1864)! 메이지(明治)유신 주역들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스승. 그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사실 나가노에서 마쓰시로에 숙소를 잡은 것은 마쓰시로대본영(松代大本營)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사쿠마 쇼잔의 이름은 숱하게 접했지만, 그가 마쓰시로 태생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내가 관심을 가져온 역사 속 인물을 만났다. 이런 게 여행의 즐거움이리라. 마쓰시로대본영
미쓰시로 대본영 조잔지하호 입구, 조신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주모비가 서 있다
조선인 징용자들이 다수 희생됐다는 마쓰시로대본영 조잔지하호(象山地下壕・‘象山’은 산 이름일 때는 ‘조잔’, ‘사쿠마 쇼잔’ ‘야마데라 쇼잔’ 같은 사람의 경우는 ‘쇼잔’으로 읽는다)로 가는 길은 한가로웠다. 지금은 운행되지 않는 마쓰시로역과 흰 담장이 이어지는 옛 조카마치(城下町)를 지나 한적한 시골길을 20분가량 걷다 보니, ‘조잔지하호’라는 푯말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 그런 거대한 지하벙커가 있을까’ 싶었다. 푯말을 따라 돌아서니 조잔지하호와 안내소, 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 등이 눈에 들어왔다. 마쓰시로대본영은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군부는 소위 본토결전(本土決戰)에 대비해 황실과 황족, 정부・군부의 요인들, 국가 주요 기관들을 나가노의 산악 지역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다. 마이즈루야마(舞鶴山), 미나카미야마(皆神山), 조잔(象山) 등 세 개의 산에 거대한 지하벙커를 구축(構築)하기로 한 것이다.
마이즈루야마에는 천황과 대본영(일본의 전시 최고지휘부)이, 미나카미야마에는 황족들이, 쇼잔에는 정부기관 및 NHK, 중앙전화국 등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 길이 5900m에 달하는 조잔지하호였다(마이즈루야마지하호는 2600m, 미나카미야마지하호는 1500m).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전체 공정의 80% 정도가 이루어졌다. 공사 당시 일본 군부는 ‘창고공사’로 위장했으며, 현지 경찰조차 공사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1944년 11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이듬해 8월 15일 일제가 패전(敗戰)할 때까지 밤낮없이 진행되었다. 공사에는 일본 군인 및 징용자들, 초·중등학생들도 동원됐지만, 조선인 징용자도 6000명이 동원됐다. 한국 측에서는 이들 모두가 ‘강제연행’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들 가운데는 공사업체와 근로계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참가한 이들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갱도 500m 개방
마쓰시로 대본영 조잔지하호 내부 -5900m에 이르는 지하오 가운데 500m가 공개되었다
조선인들은 공사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갱도 작업에 집중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실조, 발파 및 암반사고, 자살 등으로 숱한 희생자들이 나왔다. 강제노동에 항의하다가 사살된 사람도 있었다. 지하호 입구에 설치된 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 안내판에는 “희생자 수는 300명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나, 1000명이라고 추정하는 설도 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안내판이 이름을 적시한 희생자는 네 명에 불과했다. 조잔지하호 전체 구간 중 현재 개방되어 있는 구간은 500m 정도다. 헬멧을 쓰고 지하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주황색 페인트로 칠한 철제 지지대들이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1000개 가까운 주황색 도리이(鳥居)들이 이어지는 교토(京都)의 후시미이나리신사가 연상됐다.
고랑포에 있는 남침 땅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폭이 넓고 높이도 높았다.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파내다 만 방(房)들이 보였다. 북한은 남침 땅굴을 팔 때 스웨덴제 착암기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 지하호는 인력으로 파낸 것이다. 이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고생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왜 조선인들이 일본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나?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왜 조선은 나라를 잃었나? 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나라가 힘이 없었나?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왜 나라가 가난했나? 위정자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위정자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관심이 없었나? 그런 데 관심을 두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공리공론
(空理空論)의 이데올로기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전신기를 만든 유학자
쇼진기념과에 있는 사쿠마 쇼잔의 상, 마쓰시다 전기 화장 마쓰시다 고노스케 등이 기증한 한것이다
이 글 앞머리에서 언급했던 사쿠마 쇼잔은 그런 조선의 유학자들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주자학자이자 사무라이였고, 사상가이자 과학기술자였다. 그 사쿠마 쇼잔을 기리는 기념관이 조잔지하호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다. 기념관은 2층짜리 단출한 건물이다. 조잔지하호에서 쇼잔기념관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사쿠마 쇼잔의 친구였던 야마데라 쇼잔(山寺象山)의 저택이 있다. 연못이 있는 정원이 아름답다. 쇼잔기념관에 들어서면 사쿠마 쇼잔의 소상(塑像)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형형한 눈빛과 강렬한 자의식이 느껴진다. 그렇게 크지 않은 기념관이지만, 전시물들을 보면 사쿠마 쇼잔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초서체나 예서체로 쓴 글씨들, 산수화, 다양한 아호(雅號)를 새긴 도장 같은 것은 그리 신기할 것이 없다.
사쿠마 쇼진이 서양서적을 보고 만든 전신기
그가 서양 책을 보고 만들었다는 전신기(電信機), 전기치료기, 지진탐지기 같은 것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물론 당대 서양의 기준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지역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통치 엘리트가, 서양에 문호를 열기 이전에 책을 보고 이러한 기기(器機)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르네상스맨’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쿠마는 일본 유학(儒學)을 집대성한 사토 잇사이(佐藤一齊) 밑에서 주자학과 시문(詩文)을 배웠다. 에도(江戶・도쿄)에서 쇼잔서원을 열어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주자학을 공부하기는 했어도, 사쿠마 쇼잔은 사무라이였다. 1842년 마쓰시로의 번주(藩主) 사나다 유키쓰라(眞田幸貫)가 막부의 해방(海防・해안방위) 담당 로주(老中・장관)로 임명됐다. 사쿠마 쇼잔은 사나다 유키쓰라를 수행해 에도로 올라갔다. 여기서 사쿠마는 사나다 유키쓰라를 보좌하기 위해 당대의 양학자(洋學者)이던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 밑에서 서양식 포술(砲術)과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몇 달 후 그는 서양의 군사・과학서적을 원서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쿠마 쇼잔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에가와 등의 기술을 전수받아서 직접 대포를 주조했다. 1849년에는 서양 책에서 읽은 바를 바탕으로 일본 최초의 전신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전신기를 시험한 종루(鐘樓) 옆에는 ‘일본 전신의 발상지’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사쿠마는 지진탐지기도 만들었고, 천연두 예방을 위한 우두종 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일본 내셔널리즘’과 ‘개국’ 주장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쿠마 쇼잔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일본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본 내셔널리즘’과 ‘개국(開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쿠마는 1842년 해안 방위와 관련해서 사나다 유키쓰라에게 ‘해방팔책(海防八策)’이라는 건의서를 올렸다. 이 건의서에서 그는 “지금의 대외적 위기는 단순히 도쿠가와 가문의 영욕뿐 아니라 황통(皇統)의 안위와도 관계가 있는 심각한 위기”라면서 “일본이 살기 위해서는 귀천존비(貴賤尊卑)를 불문하고 어떻게든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는 막부는 교토의 황실을 허수아비 취급하고, 대부분의 사무라이나 백성들은 자기가 속한 번(藩)을 ‘나라’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여러 번 중에서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번들만이 이따금 출몰하는 서양 선박들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사쿠마 쇼잔은 서양 세력이 침략해 오면 그건 일부 번이나 도쿠가와 막부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민족 전체의 문제라면서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질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여기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 사쿠마 쇼잔은 일본이 서양 세력의 침략에 맞서 제대로 된 해안방위체제를 구축하려면 군사기술뿐 아니라 서양의 다른 학문도 폭넓게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의 좋은 책을 번역해서 널리 배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쿠마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나아갈 길을 고민하던 많은 이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메이지유신의 인걸들을 키워낸 조슈(長州)의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등 길러내
소잔신사 안에 있는 고의정(高義亭)
사쿠구 쇼잔이 죠슈의 다카스기 신사쿠, 도사의 나카오카 신타로 등을 접견한 곳이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에 있는 쇼잔서원에서 사쿠마 쇼잔으로부터 양학을 공부했다. 1854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왔을 때, 요시다 쇼인은 미국 군함에 올라 미국으로의 밀항(密航)을 시도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서양의 문물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요시다는 밀항 시도 전에 자신의 뜻을 담은 편지를 사쿠마 쇼잔에게 보냈다.
사쿠마는 요시다를 격려하는 답장을 보냈다. 나중에 이 편지가 발견됐다. 사쿠마는 국법을 어기고 밀항하려는 요시다를 방조・고무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마쓰시로로 송환됐다. 이후 1862년까지 사쿠마 쇼잔은 마쓰시로에서 칩거했다. 당시 사쓰마, 도사 등 서남의 웅번(雄藩)들에서는 번의 실력 양성을 위해 당대 최고의 양학자이던 사쿠마 쇼잔을 초빙하려 했다. 조슈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가, 도사에서는 사카모토 료마의 동지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 등이 다녀갔다. 요시다 쇼인 외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장관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멘토였던 가쓰 가이슈(勝海舟), 조슈-사쓰마-도사연합을 결성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이 그의 제자였다. 이들은 모두 사쿠마 쇼잔을 통해 무조건적인 양이(攘夷)만이 능사는 아니며, 진정한 양이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개국을 통해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사쿠마 쇼잔은 1864년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초청을 받아 교토로 갔다. 당시 교토는 막부파와 반막부파, 양이파와 개국파가 얽히고설켜 혼돈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제자들은 사쿠마 쇼잔을 말렸다. 사쿠마는 “나 이외에는 난국을 구할 인물도, 나라를 이끌 책무를 감당해 낼 자도 없으며, 지금은 일신의 안전을 돌볼 때가 아니다”라면서 교토행을 강행했다. 사쿠마 쇼잔은 자신의 능력에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적(敵)도 많았다. 그는 교토 시내에서 서양식 말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다닐 정도로 겁 없이 행동했다. 천황을 히코네로 옮기려는 공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사쿠마 쇼잔은 공무합체(公武合體), 즉 천황세력(公)과 도쿠가와 막부세력(武)이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방향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를 자극했다. 1864년 7월 그는 교토에서 존왕양이파인 가와카미 겐사이(河上彦齊·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주인공 히무라 겐신의 실제 모델) 등에게 암살됐다.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 쇼잔신사(神社)는 쇼잔기념관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었다. 일본에서 누군가를 기리는 신사가 있다는 것은 그가 ‘신(神)’으로 추앙받는다는 얘기다. 쇼잔신사 입구 간판에는 ‘지혜의 신, 학문의 신’이라고 적혀 있다. 신사 안에는 사쿠마 쇼잔의 생가터, 사쿠마가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나카오카 신타로 등을 만났던 고의정(高義亭) 등이 남아 있다. 번주, 자기 저택 부지에 학교 세워
마스시로에 있는 분부학교, 번주 사나다 가문이 자신의 저택 부지 일부를 제공해 세운 학교이다
쇼잔신사에서 5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사나다 번주의 저택이 있다. 마쓰시로의 번주였던 사나다 가문은 전국(戰國)시대 이 지역의 패권(覇權)을 장악했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하였다. 사나다 가문은 여섯 개의 엽전을 문장(紋章)으로 삼았다. 엽전 여섯 냥은 망자(亡者)가 저승으로 가는 노잣돈을 의미했다. 전쟁에 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마쓰시로 곳곳에는 지금도 이 문장의 깃발이 걸려 있다. 사나다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절을 거쳐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NHK는 작년에 전국시대 말기~도쿠가와 막부 초기 사나다 가문의 영욕을 다룬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眞田丸)〉를 방송했다. 사나다 번주의 저택 옆에는 번교(藩校)인 분부(文武)학교가 있다. 번교란 도쿠가와 막부 말기 일본의 각 번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를 말한다. 번교 중에서는 주자학, 국학(國學·일본 중심주의적 국수주의 학문), 병학(兵學) 등 전통 학문 외에 양학을 가르치는 곳도 많았다.
마쓰시로의 번주였던 사나다 가문은 1855년 분부학교를 설립하면서 자기 저택의 일부를 내주었다. 분부학교는 아직도 남아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분부학교 부지 대부분은 마쓰시로소학교가 차지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보통교육이 도입되면서 대개 옛 번교 자리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소학교가 들어섰다. 분부학교에서 5분 거리에는 마쓰시로성의 유적이 있다. 다케다 신겐과 사나다 가문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성을 헐어버리는 바람에 일본 성의 상징인 천수각(天守閣)은 없지만, 성벽과 해자 등이 복원되어 있다. 봄에는 벚꽃이 아름답다고 한다. 마쓰시로대본영(조잔지하호)에서 쇼잔기념관, 쇼잔신사, 분부학교 등은 걸어서 20분 안팎의 거리에 몰려 있다. 많은 한국인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마쓰시로대본영은 알아도, 일본제국을 만든 메이지유신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사쿠마 쇼잔은 모른다. 오로지 ‘일제침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일본을 바라보면서, 일본이 부강하게 된 이유는 살피지 않는 한국인들의 대일(對日)인식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가와나카지마의 옛 전장에서
가와나카지마 옛 전당
전국시대에 우에스기 겐신(오른쪽)과 다케다 신겐(왼쪽)이 격돌했던 곳
마쓰시로성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가와나카지마고전장(川中島古戰場)이 있다. 전국시대 말기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 격돌했던 곳이다.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 8월~1564년 8월 다섯 차례나 벌어졌다. 1561년에 벌어진 제4차 전투가 가장 격렬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곳에는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다케다의 군진을 기습한 우에스기가 휘두르는 칼을 다케다가 지휘용 부채로 막아내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일본제국 시절 황족들이 심은 나무들이었다. 황태자 시절의 다이쇼(大正) 천황,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제43대 총리), 후시미노미야(伏見宮・해군군령부 총장) 등 일본 현대사 책에서 접했던 적이 있는 황족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왜 이곳을 찾았을까? 군국주의 캠페인의 일환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엘리트라면 군사(軍事)와 역사(歷史)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출처]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일본역사기행> / 월간조선
3.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고향 나카쓰(中津)
- 후쿠자와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주장,
아베신조의 ‘친미반중(親美反中)’ 외교노선 연상케 해
⊙ 담장마다 후쿠자와 유키치 어록이나 지역 출신 위인들을 소개하는 패널 걸려 있어 ⊙ 나카쓰성 내 천수각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갑주, 충신 도리이 스네에몬의 초상 등 전시
갑주, 충신 도리이 스네에몬의 초상 등 전시
마카쓰역 앞에 서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동상
그가 1만엔권 지페 초상 인물이된 지 30주년임을 알리는 선간판이 서 있다
일본 규슈(九州) 오이타(大分)현 나카쓰(中津). 역사(驛舍)를 나서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파란 하늘 아래 팔짱을 끼고 하늘을 응시하는 사내의 동상이 서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온천 도시 벳푸(別府)에서 특급열차 소닉으로 45분 거리에 있는 이 작은 도시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 사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 메이지(明治)시대의 교육가이자 사상가・저술가, 게이오(慶應)대학의 설립자…. 나카쓰는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고향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일본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은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일본 돈 1만 엔권에 그의 얼굴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동상 옆에는 ‘축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 1만 엔권 발행 30주년 기념’이라고 적힌 커다란 선간판이 서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나카쓰섬의 모습을 담은 맨홀 두겅
맨홀 뚜껑에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나카쓰역에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고택(古宅)으로 가는 길. 발 아래 맨홀 뚜껑이 눈에 들어온다. 나카쓰성 아래 강을 오가는 작은 배들이 새겨져 있다. 파란 하늘, 파란 강, 석축과 소나무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실 나카쓰의 맨홀 뚜껑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일본의 맨홀 뚜껑들은 그 자체가 ‘작품’이다. 3년 전 여행했던 야마구치(山口)시 유다(湯田)에서는 유다의 상징인 흰 여우, 조총을 쏘는 병사들, 열차의 그림이 새겨진 맨홀 뚜껑들을 보았다. 벳푸의 맨홀 뚜껑들에는 색색의 꽃이 새겨져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 맨홀 뚜껑 마니아까지 형성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 담장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어록(語錄)과 사진을 담은 액자들이 걸려 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 말이 변용된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옛집 뒤에 있는 아나리신사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은 단출하다. 본채와 창고로 썼음 직한 작은 부속 건물이 전부다. 마당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흉상, 쇼와(昭和) 천황이 심은 나무 등이 있다. 본채 뒤로 돌아가면 주홍빛 도리이(鳥居)가 있는 아주 작은 신사(神社)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이나리(稻荷)신사가 바로 이 신사일 것이다. 어린 시절 유키치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이나리신사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열어보았다. 돌이 들어 있었다. 유키치는 그 돌을 꺼내고 다른 돌을 넣어두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유키치가 바꿔치기 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숭배했다. 유키치는 그것을 보고 우스웠다고 회고록에서 회상했다. 어려서부터 기성의 권위를 무조건 추종하지 않고 그에 도전했음을 알 수 있다. 메이지시대의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의 옛집,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곳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생가는 아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사카(大阪)의 도지마(堂島)였다. 나카쓰번(藩)의 하급 무사였던 그의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福澤百助)는 유키치가 태어났을 때 당시 상업 중심지였던 오사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키치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키치는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14세 때부터는 시라이시 쇼잔(白石照山)에게서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까지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봉건제도 아래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 사무라이의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은 이 시절 뼈저린 경험의 소산일 것이다. 후쿠자와의 고택 옆에 있는 기념관에 들어가 본다. 후쿠자와의 가계도, 인맥도, 어린 시절 공부했던 책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혼자서 기념관 안을 돌아보았다. 후쿠자와가 태어난 오사카의 고지도(古地圖), 그가 공부했던 한학 및 난학(蘭學) 서적들…. 1860년 유키치를 비롯한 막부의 외교사절단을 태우고 미국으로 갔던 간린마루(咸臨丸)의 모형도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군함이다. 일본 사절단은 선장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지휘 아래 일본인 선원들이 모는 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후쿠자와 유키치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서양사정』
이 책 등으로 번 돈을 가지고 후쿠자와는 난학숙을 확장, 게이오대학을 세웠다
‘사무라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긴 칼과 작은 칼을 차고 한껏 폼을 잡은 사진, 역시 사무라이 차림으로 미국인 소녀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미소를 짓게 한다. 나름 패기가 엿보이지만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는 얼굴….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상투(존마게)를 자르고 양복 차림을 한 ‘개명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시사신보(時事新報)》의 발행인, 게이오의숙의 창립자이자 총장…. 시간으로 놓고 보면 메이지유신 이후 5~6년 사이에 확 달라지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모습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변한 일본의 모습 그 자체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서양사정》도 보인다. 1863년부터 펴낸 이 책에서 그는 ‘Civilization’을 ‘문명(文明)개화’로, ‘Culture’를 ‘문화(文化)’, ‘Liberty’를 ‘자유(自由)’로 번역했다. 또 다른 베스트셀러 《학문의 권장》은 각국에서 나온 판본의 표지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한국어판 《학문의 권장》 표지도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저작 활동 덕분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대 최고의 서양전문가로 꼽혔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여러 차례 입각(入閣) 권유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저술과 언론, 교육을 통해 일본인들을 일깨우는 것을 자신의 업(業)으로 삼았다. 그는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의 스승이었다. 그가 일본 돈 가운데 최고액권인 1만 엔권의 초상 인물이 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시아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라”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담백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마냥 현창(顯彰)하기에는 찜찜한 인물이다. 그를 제국주의 일본의 이데올로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초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개화시키고 동양 3국이 힘을 합쳐 서양 세력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1년 이후 일본을 찾은 김옥균・박영효・유길준・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도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에게 ‘조선판 메이지유신’을 기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방성통곡했다. 특히 그는 조선 정부가 전(前)근대적인 연좌제(連坐制)를 적용해 개화파 인사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처형한 데 대해 격분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1885년 3월 자신이 발간하는 《시사신보》에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한 것도 갑신정변 실패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다. 이 사설에서 후쿠자와는 이렇게 주장했다. 〈오늘날 (국제 관계를) 도모함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더불어 아시아를 흥하게 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탈피하여 서양의 문명국들과 진퇴를 같이하여 저 지나(支那·청)와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이좋게 대우해 줄 것도 없고, 바로 서양인이 저들을 대하듯이 처분을 하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자는 더불어 오명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다. 문득 당시의 사정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2013~2014년에는 한국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라고 말했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서도 한국을 그렇게 표현했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종군위안부 문제 등으로 일본과 계속 날을 세우면서 그런 표현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일본에서는 과거 전전(戰前) 출생세대나 단카이(團塊)세대가 주류이던 시절과는 달리 교과서 문제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나 중국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일본 정부나 워싱턴 로비스트들은 미국에 대고 “한국은 결국 중국과 함께 갈 나라이며,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맹방은 일본뿐”이라는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중국·한국을 멀리하면서 스스로 구미국가들의 품에 안기려 한다는 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와 아베 신조는 일맥상통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130여 년 전의 ‘유럽’이 지금은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정도일까?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그 나라의 멸망을 기원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논설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실상을 생각하면, 후쿠자와만 고약하다고 탓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후 조선에서 동학란이 발생하자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며 동학군을 비난했다. 청일전쟁이 났을 때에는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라고 매도했다.
하지만 청일전쟁 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냈을 때에는 “일본이 중국에 요구해야 할 것은 영토가 아니라 무역”이라고 주장, 자유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일본의 밝음과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메이지시대 기업인을 기념하는 공원
나카쓰 거리의 담장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어록이나 지역 출신윈들을 소개하는 패널들이 붙어 있다
기념관을 나와 기념품점에 잠깐 들렀다. 기념품점을 관리하는 60대 여성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나도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며 반긴다. 세계 지도를 가져와 그 속의 한반도를 가리키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한국인이 이곳까지 찾은 것은 흔치 않은 일인 듯 옆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이 왔다”며 수다를 떤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고택을 나서 나카쓰성으로 향하는 길. 편의점에서 ‘벤토’를 하나 사서 인근 어린이 공원에서 먹었다. 세금 포함해서 701엔, 우리 돈으로 7000원이다. 따뜻한 쌀밥에 생선가스와 함박스테이크, 계란말이, 우메보시, 후식용 과일까지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벤토는 역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다. 공원 이름은 ‘와다 도요지(和田豊治) 기념공원’이다. 공원 뒤쪽으로 와다 도요지의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져 있다. 생소한 인물이어서 안내판을 보니 와다 도요지는 이곳 태생으로 메이지~다이쇼 시대에 기업가,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외국 유학을 다녀와서 방직산업을 일으켰고, 은퇴 후에는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장학사업 등을 했다고 한다. 일본 어디를 가나 그 지역 출신으로 지역사회나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동상이나 송덕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병철기념공원, 정주영 송덕비가 서는 날이 있을까? 와다 도요지 기념공원뿐이 아니었다. 길거리 담장 모퉁이마다 이 지역 출신 위인들을 소개하는 패널들이 걸려 있었다. 위인을 기억하는 그 풍토가 부러웠다. 구로다 가문, 오쿠다이라 가문
나카쓰섬
나카쓰번을 지재했던 구로다 가문과 오쿠다이라 가문의 섬으로 1964년 재건됐다
나카쓰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군사(軍師)였던 구로다 간베에(黒田官兵衛·구로다 요시타카[孝高]라고도 함)가 1588년에 축성(築城)했다. 구로다 간베에는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혼노지(本能寺)의 변(變)’으로 죽은 후, 당황해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고 채근해 도요토미의 천하 제패를 도운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군사 간베에’로 유명하다. 나카쓰성 아래 있는 적벽사(赤壁寺)라는 절은 구로다 가문이 나카쓰를 접수할 당시 구(舊)지배층인 우쓰노미야(宇都宮) 일족과 그 가신들을 참살한 곳이다. 이들이 흘린 피가 흰 담장에 묻었는데, 아무리 지우려 해도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아 아예 붉은색으로 담장을 칠했다고 한다.
구로다 가문이 나카쓰를 접수할 때 저항하는 구 세력을 학살했던 합원사(合元寺)는 '적병사'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를 차지한 후에는 오쿠다이라(奧平) 가문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오쿠다이라 가문은 원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섬기다가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귀순, 나가시노 전투에서 활약했다. 이때 무공을 세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奧平信昌)는 후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가 되었다. 1717년 오쿠다이라 마사시게(奧平昌成・사다마사[定昌]라고도 함)가 나카쓰번의 번주가 되면서, 오쿠다이라 가문이 154년간 이곳을 지배했다. 나카쓰성은 오쿠다이라 가문의 거성(居城)이었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의 건의로 성 대부분이 헐렸다. 지금 있는 천수각(天守閣)은 1964년 옛 번주였던 오쿠다이라 가문과 시민들이 힘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아직까지도 일본의 많은 지역은 자신들의 정체성(正體性)을 옛날의 번에서 찾고 있다. ‘나카쓰, 10만 석(도쿠가와 막부 시절 번주의 연봉) 오쿠다이라가(家)’ 하는 식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봉건적인 번이 폐지되고 근대적 지방행정단위인 현이 설치된 지 147년이 지나도록 그러는 것이 외부인의 눈에는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 어딜 가나 그 고장만의 특산물이 있고, 지역적 자부심이 넘치는 것은 바로 그런 전통 덕분일 것이다. ‘지방분권(地方分權)’이라는 것은 정치적 구호나 헌법상의 명문 규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도리이 스네에몬의 죽음
나카쓰성 천수각에 전시중인 옛날 갑옷, 왼쪽이 도쿠가외 이에야스의 갑옷이다
천수각 안을 돌아보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갑주(甲胄), 철포(鐵砲), 일본도(日本刀)…. 그러다가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훈도시 차림으로 십자가에 묶인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 그의 이름은 도리이 스네에몬(鳥居 强右衛門). 1575년 나가시노 전투 당시, 오쿠다이라 마사시게가 지키던 나가시노성은 다케다 가쓰요리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오쿠다이라는 도리이 스네에몬을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내 원병(援兵)을 청하게 했다. 스네에몬은 천신만고 끝에 오다-도쿠가와를 만나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는 길에 다케다군의 포로가 됐다. 다케다군은 그에게 “성의 방어군에게 ‘오다와 도쿠가와의 부대가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그려냈다. 〈꽁꽁 묶인 스네에몬은 가까운 본성의 망루가 잘 보이는 앞 바위 위로 끌려갔다. 스네에몬은 시키는 대로 성을 향하여 외쳤다. “성안에 있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바위 위에 오른 스네에몬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리이 스네에몬, 성으로 돌아가려다 이렇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오다와 도쿠가와 두 대장님은…” 일단 말을 끊었다. “이미 4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카자키를 출발하셨습니다. 이삼일 안으로 반드시 운이 트일 것입니다. 성을 굳건히 지켜주십시오!” “와아!” 성안에서 함성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다케다군 졸병 두 명이 바위에 뛰어올라 스네에몬을 끌어내어 사정없이 구타했다. (중략)
나가시노 전투 당시 주군인 오쿠다이라 가문을 위해 목숨을 던진 도이리스네에몬
스네에몬에게 놀림을 당해서 분노할 대로 분노한 가쓰요리는 그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스네에몬은 십자가에 묶이고 손에 못이 박힌 채 성을 바라보는 바위 위에 높이 세워졌다. 구타로 정신을 잃은 스네에몬이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두 겨드랑이 밑에서 창끝이 교차하여 양 어깨를 뚫고 나갔다. “으으으…” 스네에몬의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귀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런 가운데서 누군가가 열심히 무언가를 말했다. “도리이님! 도리이님이야말로 참다운 무사, 그 충성을 본받기 위해 최후의 모습을 그려 기치로 삼으려 하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다케다 군의 가신 오치아이 사헤이치(落合 左平次). “스네에몬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스네에몬은 그 말에 웃음으로 답하려 했으나 더 이상 표정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방 무사는 붓통을 꺼내 종이에 스네에몬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다. 장소는 아루미가하라, 사다마사 부대 야마가카 사부로베에의 진지 앞. 이미 대지에는 석양이 시뻘겋게 물든 핏빛을 비추어 반사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독립자존 도리이 스네에몬의 최후를 그린 이 그림은 이렇게 그려진 것이다. 문득 박근혜 정권의 인간 군상(群像)의 모습이 떠오른다. 장관, 수석비서관, 심지어는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던 ‘문고리 3인방’마저 저마다 자기만 살겠다며 권력을 잃고 영어(囹圄)의 몸이 된 주군(主君)의 등에 칼을 꽂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보여주고 죽은 사내의 죽음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나카쓰성 앞에는 ‘獨立自尊’이라는 글자를 새긴 커다란 비석이 있다. ‘독립자존’은 후쿠자와 유키치 평생의 가르침이었다. 일본 국민을 독립자존의 근대인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독립자존의 근대 문명국가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국가나 사회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자존’의 인간 아닐까?⊙
[출처]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일본역사기행> / 월간조선
4. 메이지유신 150주년, 교토를 가다
- 도바·후시미 전투 벌어진 곳에는 쓸쓸한 표지석만…
⊙ 교토의 옛 황궁인 교토고쇼(御所), 이제는 사전 허가 없이 관람 가능 ⊙ 정원이 아름다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별장 무린안, 이토 히로부미 등이 모여 러일전쟁 결심한 곳 ⊙ 사카모토 료마가 습격당했던 데라다야 여관과 막부군과 조슈·사쓰마군 간 도바·후시미 전투 전적지
는 걸어서 10분 거리
야마카타 아리토모의 별장 무린안
히가시야마를 마치 정원의 일부인 것 처럼 끌어안도 있다
2년여 만에 다시 교토(京都)를 찾았다. 올해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50주년이 되는 해. 메이지유신은 우리에게는 일제(日帝)식민통치로 이어지는 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도전(挑戰)에 일본이 어떻게 응전(應戰)했는지를 아는 것은,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처음 찾은 곳은 신센구미(新選組)의 최초 주둔지였던 미부데라(壬生寺)였다. 신센구미는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 지사들의 출현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1863년 9월 막부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치안보조 조직이다. 낭인(浪人) 무사들로 이루어진 신센구미는 자유당 말기의 ‘정치깡패’ 비슷한 조직이었다. 그런 집단의 이야기를 시바 료타로, 아사다 지로 등의 작가들은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면서까지 사무라이의 마코토(誠)를 실천하려 한 진정한 무사집단으로 그려냈다.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는 ‘있었던 사실로서의 역사’를 주장했다지만, ‘있었던 사실’이 모두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후세가 기억해 주는 사실’이 역사가 된다. 교토에서도 후미진 동네 골목길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절이지만 미부데라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인도 있지만, 서양인들도 보인다. 신센구미의 이야기가 일본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얘기다. 휘파람새 복도
교토에 있는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성인 니조성 니노마루 궁전, 니조점의 본관이다
니조(二條)성은 1606년 완공된 도쿠가와 막부 쇼군(將軍)의 성(城)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 두었기 때문에 니조성은 치소(治所)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니조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평정할 무렵에 만들어진 성이다. 때문에 전국(戰國)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성들에 비하면 해자(垓字)의 폭이 좁고 천수각(天守閣)도 높지 않다. 본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니노마루 궁전으로 들어가면 무사 대기소가 나온다. 호랑이와 표범의 그림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우리나라 건물에 학(鶴)이 그려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역시 무사의 나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건물의 마루는 ‘휘파람새 복도’라고 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걸쇠와 복도를 지탱하는 못이 닿으면서 휘파람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닌자(忍者)의 침입을 알아챌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속설(俗說)이 있다. 니노마루 궁전의 주실(主室)인 대형실에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와 다이묘(大名), 중신(重臣)들의 실물 크기 인형들이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에 앞서 1867년 10월 13일 다이묘와 막부 중신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10월 15일 천황은 쇼군의 상주(上奏)를 수락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니노마루 궁전 앞 정원이 아름답다. 군데군데 눈에 덮인 풍경이 일품이다. 언젠가 꽃피는 계절에 아내와 같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여 년간 황궁이었던 교토고쇼
궁내청이 관리하는 교토고쇼는 이제 사전 신청 없이 관람할 수 없다
옛 황궁인 교토고쇼(御所)까지는 차량으로 10분 거리다. 1331~1869년 황궁으로 쓰인 곳이다. 막부 말기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 전후 일본 정치의 중심이 됐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막부정치 시절, 천황의 존재는 유명무실(有名無實)했다. 전국시대의 천황들 중에는 글씨나 그림을 팔아 끼니를 이어야 했던 이도 있었다. ‘상갓집 개’ 같던 천황의 팔자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후 약간 피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중견 다이묘 수준의 대우를 해준 것이다. 대신 막부는 1615년 7월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를 반포했다. 천황과 공경들을 규제하는 법령이었다.
제1조는 “천황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학문이다”였다. 정치는 신경 쓰지 말고 고전 공부 열심히 하면서 조상 제사나 잘 지내라는 얘기였다. 니조성에 파견한 막부의 관리들은 천황이나 공경들이 다이묘들과 결탁해 딴짓을 하지 않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들어가 국교(國交)를 요구하자, 막부는 다이묘들에게 대책을 구하는 한편, 천황에게도 이 사실을 상주했다. 막부로서는 널리 ‘소통(疏通)’을 하면서 천황의 권위를 빌려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막부의 권력 유지 측면에서 마이너스가 됐다. 260년 동안 다이묘와 천황을 정치에서 배제해 왔던 막부가 새삼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막부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됐다. 고메이 천황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孝明) 천황은 병적일 정도로 서양인들을 두려워했다. 막부는 미국・영국・프랑스 등 구미(歐美) 열강과 수교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천황은 ‘양이’를 고집했다. 전국이 존왕양이 주장으로 들끓는 판국에 막부는 천황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막부가 양이와 관련해 천황에게 양보할 때마다 막부의 권위는 추락하고 천황의 권위는 올라갔다. 고메이 천황은 ‘양이’는 절실하게 원했지만, ‘존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타협해서 편하게 살고 싶어 했지,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런 천황의 의중을 잘못 읽은 조슈 세력이 막부 타도를 서두르다가 오히려 교토의 정치에서 밀려난 사건이 1863년의 8・18정변이었다. 이듬해 조슈 세력은 교토에서의 정국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해 7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교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아이즈(會津)와 사쓰마번, 신센구미가 이를 진압했다. 이를 ‘하마구리몬(蛤門)의 변(變)’이라고 한다.
교토고쇼 바깥쪽에 있는 하마구리몬에는 아직도 당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구사카 겐즈이, 이리에 구이치, 기시마 마타베, 데라지마 주사부로 등이 자결했다. 하마구리몬 근처에는 특이한 모양의 나무가 있다. 이 앞에서 조슈의 지사들이 목숨을 끊었다. 고메이 천황은 1867년 1월 36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때문에 암살설이 나돌기도 했다. 고메이 천황은 유약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천황의 정치적 권위는 높아졌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메이지 천황이 유신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선포한 곳, 시신덴
교토고쇼의 정전인 시신덴
1868년 3월 14일 메이지유신을 선포한 곳이다
조슈의 지사들이 자결한 나무 오른쪽으로 담장이 쳐진 곳이 바로 고쇼이다. 재작년에 왔을 때만 해도 고쇼는 일반 공개가 되지 않았다. 궁내청에 사전에 견학 신청을 해야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사전 신청 없이도 관람할 수 있게 됐다. 대박! 고쇼 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시신덴(紫宸殿)이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勤政殿)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노송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이곳에서 1868년 3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공경과 다이묘들을 거느리고 하늘과 땅의 신(神)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가 ‘5개조 어서문(五箇條御誓文)’을 낭독했다. 1.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에 따라 나라의 정치를 한다. 2. 상하가 마음을 합쳐 국가정책(경륜)을 활발하게 펼친다. 3. 중앙 관리, 지방 무사가 하나가 되고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뜻한 바를 이루어 불만이 없도록 한다. 4. 옛날부터 내려오는 낡은 관습을 깨뜨리고 천지의 공도(公道)에 따른다. 5.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황국의 기반을 크게 진작시킨다. 동양에서 예부터 군신(君臣)이 개혁을 다짐할 때에 으레 하는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선서문은 바로 메이지유신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대호령(大號令)이었다. 세이료덴(清涼殿・청량전)은 천황의 생활공간이었다.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에 해당한다. 오가쿠몬쇼(御學問所)는 이름 그대로 천황과 신하들이 학문을 공부하던 곳이다.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에 해당한다. 고고쇼(小御所)도 메이지유신의 현장이다. 1867년 12월 9일 밤, 이곳에서 왕정복고(王政復古) 모의가 이루어졌다. 고쇼 내에는 두 개의 정원이 있다. 오이케니와 정원과 고나이테이 정원이다. 같이 이어져 있지만, 천황의 개인 정원인 후자(後者)가 더 아기자기하고 정감이 있다. 꽃피는 봄에 오면 더 좋겠지만, 군데군데 눈이 덮여 있는 풍광도 좋다. 같은 장소에서 죽은 두 거물
오무라 마스지로(왼쪽)와 사쿠마쇼잔의 조난비
두 사람은 5년 시이로 같은 장소에서 암살 당했다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 등과 함께 유신 3걸로 불리는 인물이다. 조슈 상급 사무라이 출신인 그는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으로 사쓰마와의 동맹을 주도했다. 유신 후에는 폐번치현(廢藩治縣) 등 굵직굵직한 개혁들을 지원했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무리한 정한론(征韓論)을 막았다. 젊은 시절,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라고 불리던 그는 신센구미가 조슈 지사들을 습격한 이케다야 사건(1864년 6월)에서 살아남은 후 한동안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때 그를 도와준 사람이 기온의 게이샤 이쿠마쓰(幾松)였다. 두 사람이 살던 곳이 오쿠라호텔 뒤쪽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가쓰라 고고로와 이쿠마쓰가 살던 곳에는 이쿠마쓰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 있다. 가격표를 보니 ‘벤토’ 값만 해도 ‘악’ 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쿠마쓰 길 건너편에 보니 석벽에 무슨 부조(浮彫) 같은 것이 보였다. 살펴보니, 세상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1811~1864)과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1824~1869)의 조난비(遭難碑)다. 사쿠마 쇼잔은 나가노 마쓰시로 출신의 학자로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스승이다(《월간조선》 2017년 11월호 〈나가노시 마쓰시로-징용의 한, 유신의 뿌리〉 참조).
오무라 마스지로는 조슈 출신의 군인으로 메이지유신 후 병부대보(兵部大輔・국방차관)로 있으면서 근대 일본 육군 건설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두 사람이 암살당한 곳은 교토에서 꼭 찾아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들이 5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같은 곳에서 암살당했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신 3걸 중의 하나가 숨어 살았다니 기연(奇緣)이다. 이곳에서 걸어서 10여 분쯤 되는 거리에는 신센구미가 조슈 지사들을 습격했던 이케다야(池田屋) 자리가 있다.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당한 오우미야(近江屋)는 이케다야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인근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한 혼노지(本能寺)가 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가보지 못했다. 러일전쟁을 결심한 무린안
무린안 양관 2층 회의실
1903년 3월 이토히로부미 등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한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 꼭 찾아가 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무린안(無隣庵)이다. 교토를 찾는 한국인들이 한두 번은 지나쳐가게 되는 헤이안신궁(平安神宮)에서 풍광이 좋은 것으로 이름난 난젠지(南禪寺)로 가는 큰길가에 있다.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어 안이 보이지 않는다. 제법 큰 저택이나 고급 요정이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이곳은, ‘일본 육군의 교황’이라고 불리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의 별장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요시다 쇼인에게 배운 인물이다. 일제 침략 과정에 등장하는 가쓰라 다로(桂太郞),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등이 모두 야마가타 슬하에서 성장한 조슈 군벌들이었다. 무린안은 그런 무단(武斷) 정치인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 무린안 바깥에 있는 히가시야마(東山)까지도 마치 무린안의 일부인 것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것을 차경(借景)정원이라고 한다던가? 겨울이라 꽃은 없지만 상록수들과 개울, 눈, 이끼가 어우러진 풍광이 기가 막히다. 이곳을 찾은 것은 우리에게는 아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1903년 4월 21일 이곳에 네 명의 거물이 모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로(元老)로 정우회 총재인 이토 히로부미, 총리 가쓰라 다로,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였다. 무린안에 있는 양관(洋館) 2층에서 이들은 ‘대(對)러시아방침 4개조’를 결정했다. 한마디로 만주는 러시아가, 조선은 일본이 차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때 고종은, 조정 대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세계 속 우리의 운명도 이런 식으로 거래 대상으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국제사회에서 약자(弱者)에겐 친구가 없다. ‘무린(無隣)’ 두 글자가 비수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깃발이 승패를 가른 도바·후시미 전투
도바-후시미 전투 전적지 - 막부군과 조슈-사쓰마군이 격돌한 곳이다
2년 전 여행에서 놓쳤던 도바・후시미(鳥羽-伏見) 전투 발발지와 데라다야(寺田屋)도 이번에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다리 곁에 ‘도바・후시미 전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도바・후시미 전투는 1868년 1월 27~30일 막부군과 조슈・사쓰마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대정봉환 이후에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를 내놓고 은퇴할 것을 요구했다.
정권을 반납하면 다이묘평의회 의장 자격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로서는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하지만 조슈와 사쓰마는 그런 식으로 도쿠가와 가문과 권력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은 계속 막부 측을 도발했다. 견디다 못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명분으로 막부군을 교토로 진격시켰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총포도, 군대도 아니었다. 천황을 상징하는 국화꽃 문양을 수놓은 ‘금기(錦旗)’였다. 이 깃발이 전장에 나타나자 막부군 지휘관들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기들이 ‘관군’으로서 반란군인 조슈・사쓰마군을 토벌하러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금기’는 조슈・사쓰마군이 천황의 군대, 즉 관군이고, 자신들은 역도라는 의미였다. 막부군은 한순간에 사기를 잃고 후퇴했다. 막부군은, 상징 싸움, 정통성 싸움에서 진 것이다. 오사카성에 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군함을 타고 에도로 도주했다. 막부 측을 대표한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 1868년 6월 10일 에도 성문을 열었다. 그해 9월 신정부는 연호를 ‘메이지’로 바꾸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막부가 마지막 순간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망한 것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체성(正體性)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傍系)인 미토(水戶)번 출신이었다. 미토번은 천황을 존숭하는 국수주의(國粹主義) 학문인 국학(國學), 일명 ‘미토학’의 본산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역시 미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영명했던 그는 언젠가는 도쿠가와 가문을 짊어질 인재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결국 ‘쇼군’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운명을 놓고 목숨을 걸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어려서부터 천황 존숭 사상인 미토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성장한 그로서는 조슈-사쓰마가 앞세운 ‘천황’에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도바・후시미 전투 이래 내내 무기력하게 처신했다. 최고 지도부가 적의 이데올로기에 전염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잘 보여준다. 료마가 죽다 살아난 데라다야
데라다야 여관
사카모토 료마가 막부 관헌들의 습격을 받아 죽을뻔한 곳이다
데라다야 여관은 도바・후시미 전투 전적지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분 거리에 있다. 1866년 3월 8일 사카모토 료마가 후시미 부교(奉行・행정장관)가 보낸 관헌들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곳이다.
료마의 애인 오료가 목욕을 하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달려가 위급을 알려주었다. 료마와 그의 동지들은 칼을 휘두르고 권총을 쏘면서 간신히 탈출했다. 건물 옆 마당에는 이 사건을 알려주는 커다란 기념비와 료마의 동상이 서 있다. 데라다야 사건, 도바-후시미 전투가 일어난 것은 이곳 후시미가 교토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를 벤 칼
료젠역사관에 있는 이 칼에 대한 안내문에 의하면 료마를 죽인 사람은 막부의 보조 경찰조직 미마와리구미(見廻組) 소속 가쓰라 하야노서케라고 한다
료마와 오료의 작은 동상이 보이는 시냇가 다리 위에서 생각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한밤중에 어둠을 뚫고 정신없이 도주할 때, 조슈의 지사들이 하마구리몬 앞에서 동지들끼리 끌어안고 목숨을 끊을 때, 가쓰라 고고로가 이케다야에서 신센구미에게 동지들을 잃고 도망 다닐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절망뿐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들이 꿈꾸는 세상이 오리라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비명(非命)에 갔다. 하지만 그래도 꿈을 잃지 않고 내달린 사람들은 꿈을 이루었다. 독립되고 부강한 나라라는 꿈을….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 그 꿈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다.⊙
[출처]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일본역사기행> / 월간조선
5. 한국 근대사를 흔든 ‘維新의 심장’ 가고시마에 가다
⊙ 가고시마(사쓰마)는 야마구치(조슈)와 함께 메이지유신의 양대 주역 ⊙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유신 성공시킨 후 征韓論 주장하다가 몰락
… 오쿠보 도시미치, ‘관료국가 일본’ 原型 만들어
⊙ 작은 마을 가지야초,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야마 이와오, 도고 헤이하치로 등 배출 ⊙ 시마즈 나리아키라, 자기 별장 센간엔에 제철시설, 유리 공장, 도자기 공장 등 만들어 근대화 추진 ⊙ 일장기·기미가요의 고향, 임진왜란 때는 陶工들 납치해 가고 이순신 장군 전사시켜
세이난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시로야마전망대에서 바라본 사쿠라지마.
가고시마의 상징 사쿠라지마는 지금도 수시로 분화하는 활화산이다
‘가고 싶은 가고시마.’
오래전 일본 가고시마(鹿兒島)현 관광국이 서울시내에 내걸었던 광고 문구다. 이 광고 문구처럼 가고시마는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고시마는 그렇게 유쾌한 곳은 아니다. 1598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은 사쓰마(薩摩·가고시마의 옛 이름)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함대와 전투 중 전사(戰死)했다.
사쓰마번은 전쟁 중에는 수많은 조선 도공(陶工)을 납치(일본인들은 ‘연행’이라고 표현)해 갔다. 우리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는 일본 국기 일장기(日章旗)는 원래 사쓰마의 함선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강화도조약의 빌미가 된 운요(雲揚)호 사건(1875)을 일으킨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도 사쓰마 출신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을 불쾌하게 하는 기억은 사쓰마 출신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제창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1828~1877)일 것이다.
내가 가고시마에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것도 사이고 다카모리, 아니 그가 원훈(元勳) 중 하나로 꼽히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마침 금년은 메이지유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일본 NHK는 이를 기념해 금년 한 해 동안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재로 한 대하사극 〈세고돈〉을 방영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터를 돌아보는 관광객들.
NHK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념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재로 한 대하사극 〈세고돈〉을 방영했다
.
우리나라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을 주장했던 침략의 원흉(元兇)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왜일까? 아마 메이지유신의 1등 공신이면서도, 유신 이후 몰락해 가는 사무라이들과의 의리(義理) 때문에 자신이 세운 메이지 정부에 반역했다가 비명(非命)에 간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직정적(直情的)이고 솔직담백하며 포용성 있고 정(情)이 많은 그의 품성도 일본인들을 매료시키는 요소이다. 당연히 가고시마의 메이지유신 탐방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궤적을 따라가는 게 된다. 시작은 가지야초(加治屋町)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에서 시작된다. 가고시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중앙역이나 텐몬칸(天文館)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쓰구미치(從道·가고시마에서는 ‘주도’라고 함)도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사이고 쓰구미치는 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동조하지 않고 메이지 정부에 남았다.
해군대신·문부대신·내무대신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해군 원수(元帥·육해군 대장 가운데 공이 많은 군인에게 천황이 부여한 명예 칭호)·원로(元老·국가에 공로가 많은 신하에게 천황이 내린 최고의 명예 칭호)까지 지냈다. NHK 드라마 〈세고돈〉 덕분일까?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쿠보 도시미치, 요시다 시게루, 아소 다로
사이고 형제의 집에서 150m쯤 떨어진 천변(川邊)의 녹지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강변 둑에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념하는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다. ‘성공한 근대화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곳이 바로 메이지유신 3대 원훈 중의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의 생장지(生長地)다. 오쿠보와 사이고는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아버지가 정변(政變)에 연루되어 유배된 후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던 오쿠보는 배를 곯다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지면 사이고의 집으로 갔다. 사이고 형제는 오쿠보가 밥상에 끼어들면 아무 말 없이 자기들의 밥을 덜어주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또래들과 사쿠라지마(櫻島)까지 헤엄을 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오쿠보를 살려준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은 막부를 타도하고 유신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둘도 없는 동지였다. 하지만 후일 그들은 정한론 때문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 정부 초기에 내무경(內務卿)을 지냈다. 행정·지방·경찰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내무행정은 물론 산업·교육·언론·보건복지 등 그야말로 모든 국내 정책을 관장하는 자리였다. 오쿠보는 사실상의 총리였다.
오쿠보는 신정부의 관료제도를 정비하고,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이라는 이름의 경제건설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관료국가 일본’의 원형(原型)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오쿠보였다.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풍운아와 함께 오쿠보 같은 경세가(輕世家)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일본의 행운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장지임을 알리는 비석 근처에 또 다른 비석이 있다.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1861~1949)의 출생지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마키노는 메이지~쇼와(昭和)시대의 정치가로 외무대신·문부대신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특히 1930년대에 히로히토 천황의 고문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키노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그의 아버지가 바로 오쿠보 도시미치이기 때문이다. 노부아키는 마키노 가문의 양자(養子)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버지와는 다른 성(姓)을 쓰게 된 것이다.
마키노의 사위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4번에 걸쳐 총리를 역임하면서 부흥을 이끈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다.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자가 아소 다로(麻生太郞·1940~) 전 일본 총리(현 부총리 겸 재무대신)이다.
‘유신의 고향’
고쓰키가와 川邊에 휘날리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 깃발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유신후루사토관’이고, 그 앞쪽이 오쿠보 도시미치가 자란 곳이다
오쿠보 도시미치 생장지 옆에는 ‘유신후루사토관’이라는 메이지유신기념관이 있다. ‘후루사토’란 ‘고향’이라는 뜻이다. 메이지유신의 또 다른 축이었던 야마구치(山口·옛 이름 조슈)가 ‘유신의 발상지’ ‘유신의 책원지(策源地)’임을 자처하듯이 가고시마(사쓰마)는 ‘유신의 고향’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유신의 고향’ 가고시마에서도 가지야초는 유독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에서 북동쪽으로 170m쯤 떨어진 곳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총사령관이었던 오야마 이와오(大山巌·1842~1916)의 생가터가 있다.
오야마 이와오는 메이지유신 후 자신이 좋아하던 옛 시가(詩歌)에 곡을 붙여 군가(軍歌)로 삼았는데, 이것이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됐다. 여기서 길을 건너면 가고시마중앙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우측 면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8~1934)의 생가터가 있다.
여기서 350m를 더 올라간 곳에서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대신으로 후일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야마모토 곤베에(山本兵衛·1852~1933)가 태어났다. 불과 500여m를 사이에 두고 일본 근대사를 만든 주역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유신후루사토관은 막부 말기 및 메이지유신 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의 유품과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사료(史料)들을 전시하고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입었던 바지, 러일전쟁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입었던 해군 예복 등이 눈길을 끈다.
갑돌천, 고려교, 고려마을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 오쿠보는 ‘관료국가 일본’의 원형을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장지 및 유신후루사토관 앞을 흐르는 작은 내(川)의 이름이다. 고쓰키가와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甲突川(갑돌천)’이라고 쓴다. ‘갑돌이’ ‘갑순이’ 할 때의 ‘갑돌’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오쿠보는 원래 고쓰키가와 건너 고라이마치(高麗町·고려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지야초와 고라이마치를 잇는 다리의 이름은 고라이바시(高麗橋·고려교)이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가고시마 출신임을 자랑하는 일본 청년들에게 “일본에서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예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 가고시마”라고 일갈했다던데,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유신후루사토관을 나와서 가고시마중앙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새파란 하늘 아래 고쓰키가와를 배경으로 멋진 신사의 동상이 서 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이다. 동상의 오쿠보는 서양인들도 울고 갈 정도로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수염은 ‘가발’이라고 한다. 서양을 순방했을 때, 서양의 귀족·고관들이 멋진 수염을 가진 것을 보고 수염을 길러보려다가 여의치 않자 ‘수염 가발’을 사 왔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서양을 따라잡으려 안간힘을 쓰던 당시 일본인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고라이바시 남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가터를 찾아가 보았다. 앞서 들렀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장지에서 직선거리로 500m쯤 되는 곳이다. 주차장 한구석에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덩그러니 서 있다. 그런데 오쿠보의 생가터에서 불과 50m쯤 떨어진 곳에 또 다른 표지석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1845~1929)의 생가터였다. 이노우에 요시카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는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운요호의 함장이었다.
운요호 사건 당시 해군 소좌였던 그는 후일 해군 원수까지 승진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첫걸음이 된 운요호 사건의 유발자가 ‘고려마을’ 출신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 측 특명전권대사로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구로다 기요타카(田隆·1840~1900)도 사쓰마 출신이었다. 구로다는 제2대 총리로 ‘대일본제국헌법’을 발포(發布)한 인물이다
데루쿠니신사
가고시마 중앙공원 인근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서양식 군복 차림이다
다음날. 걷는 데도 한계가 있다 싶어 가고시마 시티뷰(city view) 버스에 올랐다. 가고시마 시내의 주요 사적지 대부분을 도는 버스다. 600엔짜리 티켓(1일권)을 사면 하루에 몇 번이고 승하차가 가능하다. 티켓은 버스에서도 살 수 있다.
시티뷰 버스뿐 아니라 시내 노면전차(트램)나 공영버스, 사쿠라지마행 페리, 사쿠라지마 아일랜드 뷰 버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가고시마 큐트 티켓도 있는데, 1200엔(1일권)이다. 버스에서 ‘사이고 도조 마에(사이고 동상 앞)’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차창 밖으로 서양식 군복 차림을 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보인다. 메이지유신 성사 직후 육군 대장, 근위도독(近衛都督)으로 위세 당당하던 시절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원래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록(家祿) 47석에 불과한 하급 무사의 아들이었다. 역사의 격랑을 타지 못했다면, 그는 일본에서도 유달리 엄격했던 사쓰마의 사무라이 위계질서 아래서 피곤한 인생을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져 갔을지도 모른다. 사이고 동상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는 데루쿠니신사(照國神社)가 있다. 가고시마의 야스쿠니(靖國)신사라고 할 만한 곳이다. 경내에는 메이지유신 후 신정부와 막부파 간의 내란이었던 무진(戊辰)전쟁(1868~1869)이나 태평양전쟁 전몰자, 원폭(原爆) 희생자 등을 기리는 비(碑)들이 서 있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막부 말~메이지 시기 사쓰마를 이끌었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 1809~1858),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1817~1887),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1840~1897)의 동상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사쓰마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시마즈 집안의 가신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운명도 이들과 밀접하게 엮여 있다.
시마즈 가문
사쓰마번은 영주인 시마즈 가문의 별저인 센간엔 일대에 근대 공업시설을 만들었다. 사진은 기계공장이던 슈세이칸의 모습이다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16세기 후반부터 남규슈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다. 일본의 패권을 놓고 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맞섰다가 패하기는 했지만, 사쓰마번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내내 비(非)도쿠가와계 번 중에서는 최대 규모, 일본 전역을 통틀어 세 번째 규모의 웅번(雄藩)이었다. 제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자신의 별저(別邸)인 센간엔(仙巖園)에 근대식 공업시설인 슈세이칸(集成館)을 설치, 사쓰마번 차원의 부국강병(富國强兵)정책을 추진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발탁한 것도 나리아키라였다. 1858년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 그의 조카인 시마즈 다다요시가 뒤를 이었다. 다다요시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쓰가 섭정(攝政)으로 사실상 번주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은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과 이듬해 미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격동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부르짖었다. ‘존왕’은 ‘막부타도’, ‘양이’는 ‘배외주의(排外主義)’를 의미했다. 특히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패한 후 도쿠가와 막부에게 영토의 3분의 2를 빼앗기고 혼슈(本州) 서쪽 끝으로 쫓겨 가야 했던 조슈(長州·야마구치)는 교토(京都)의 천황 세력을 선동하면서 존왕양이 운동의 선봉에 섰다. 반면에 시마즈 히사미쓰는 과격한 존왕양이 주장은 배격하면서 도쿠가와 막부 내부의 개혁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나리아키라의 양녀 아쓰히메(篤姫·1836~1883)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에게 시집간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쓰마의 이런 노선은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막부 타도에 몰두하던 조슈와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교토의 사쓰마군은 교토수호(京都守護·교토경비사령관)인 아이즈(會津)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와 손잡고 조슈 세력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1863년 8월 18일 교토의 사쓰마-아이즈연합군은 천황 주변의 공경(전통귀족)들과 연대해 과격한 존왕양이 주장을 펴는 조슈 세력을 추방했다. 이를 8·18정변이라고 한다. 이듬해 7월 조슈는 교토에서의 주도권 회복을 위해 무력(武力)으로 황궁 장악을 시도했다. 이것이 ‘금문(禁門)의 변(變)’이다.
이때 교토 주둔 사쓰마군 지휘관으로 이를 진압한 사람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조슈와 사쓰마는 철천지원수가 됐다
사카모토 료마와 삿초동맹
견원지간(犬猿之間)이던 조슈와 사쓰마를 화해시킨 사람이 바로 도사(土佐)번 출신 낭인(浪人)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였다. 료마는 막부와 주요 번(웅번·雄蕃)들이 계속 분열·갈등하는 틈을 타서 영국·프랑스 등 외세가 개입하면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사이고에게 역설했다.
료마에게 설복된 사이고는 료마와 함께 사쓰마로 가서 번의 중신들을 설득했다. 료마는 더 나아가 사쓰마로부터 자금을 얻어내 1865년 나가사키에 가메야마사추(龜山社中)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존왕양이의 선봉이었던 조슈는 교토의 조정과 에도의 막부 모두로부터 공적(公敵)이 되어 있었다. 교토의 고메이(孝明) 천황은 강경한 양이론자(배외주의자)였지만, 막부체제에 도전할 의사는 없었기 때문에 조슈와 등을 졌다. 사카모토 료마는 고립된 조슈와 사쓰마 간의 동맹을 추진했다. 그 무렵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를 토벌하려 하고 있었다. 조슈는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이를 입수할 방도가 없었다. 1865년 료마는 사쓰마의 자금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서양 함선과 총기들을 구입한 후, 자신의 가메야마사추 소속 선박을 이용해 조슈에 제공해 주는 방안을 제안, 이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조슈와 사쓰마, 그리고 료마의 출신 번인 도사번 간 동맹의 토대가 닦였다. 이때 조슈번에서 무기 구입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10)였다. 그해 말 사쓰마에 흉년이 들자 조슈는 사쓰마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으로 빚을 갚았다. 이렇게 해서 신뢰가 구축되자 1866년 1월 교토에 있는 사쓰마의 중신 고마쓰 다테와키(小松帶刀·1835~1870)의 저택에서 사쓰마를 대표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를 대표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1833~1877)가 회동했다.
가쓰라 고고로는 그동안 사쓰마에 대해 품고 있던 울분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사이고의 사내다운 태도에 두 번 간의 갈등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로써 사쓰마와 조슈 간의 동맹, 즉 삿초동맹이 성립됐다. 덕분에 조슈는 1866년 막부의 조슈토벌(제2차 조슈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가고시마 관광버스들에 그려진 메이지유신 시기 사쓰마의 인물들. 왼쪽부터 고마쓰 다테와키, 사이고 다카모리, 시마즈 나리아키라, 아쓰히메, 오쿠보 도시미치다. 버스 뒤로 16세기 중반 가고시마에 천주교를 전파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를 기념하는 성당이 보인다
삿초동맹은 1867년에 이르러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정치동맹으로 발전했다. 궁지에 몰린 것을 감지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는 1867년 10월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했다.
그래도 도쿠가와 가문은 일본에서 가장 큰 영지와 무력을 보유한 세력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를 바탕으로 다이묘(大名·영주)평의회 의장 자격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도사번을 비롯한 많은 번이 이러한 방안을 지지했다. 하지만 사쓰마와 조슈는 차제에 도쿠가와 막부를 완전히 타도하려 들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교토 시내에서 막부 시설과 기관들에 대한 도발을 자행,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자극했다. 결국 1868년 1월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의 지지 세력인 아이즈번, 신센구미(新選組) 등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지만, 역사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해 4월 신정부군은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江戶)로 진격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의 중신인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와 담판, 에도성에 무혈(無血) 입성했다. 막부의 잔당이 홋카이도로 도주해 에조(蝦夷)공화국을 세우고 저항했지만, 그들도 이듬해 5월 신정부에 항복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메이지유신 초기 신정부의 총구를 장악한 것은 삿초, 그중에서도 사쓰마였다. 그리고 그 사쓰마를 대표하는 사람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그는 육군 대장, 근위도독으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메이지 정부의 실권자(實權者)였다.
征韓論
사이고 동상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영광을 보여준다면, 그다음에 찾은 사이고동굴과 사학교터, 그리고 그의 자결지는 그의 몰락을 보여준다. 메이지 신정부는 폐번치현(廢藩置縣·1871), 폐도령(廢刀令·1871), 징병령(1873) 등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 유신이 지향하는 근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지만, 이는 사무라이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신을 위해 피를 흘렸던 사무라이들에게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메이지유신 후인 1868년 이래 일본은 수차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알리고 새로운 관계 수립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보냈다.
여기에는 황상(皇上) 운운하면서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중국에 사대(事大)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질겁할 일이었다. 조선은 국서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일본은 일본대로 격분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를 기화로 정한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해 달라고 조정에 요구했다.
1873년 조정 공경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이고는 “사절은 반드시 폭살당할 것이다.…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외국으로 돌려 국가를 흥하게 하는 책략…” 운운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좌우명으로 내세우던 사람답지 않은 황당한 논리였지만, 그가 정한론을 주장한 속셈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사이고를 조선에 사절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뜻밖의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일부 조정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1871년 12월부터 1년 10개월에 걸쳐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을 구미(歐美)에 파견했었다. 공식 사절 46명, 개인 수행원 및 유학생까지 포함해서 107명에 달하는 사절단에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1825~1883),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등 신정부의 핵심 요인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 구미 12개국을 순방하면서 세계정세를 직접 관찰했다. 귀국 후 이들은 서양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부터 각국의 정치체제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 《미구회람실기(美歐回覽實記)》 5권을 발간, 국민들에게 보급했다.
이들이 보기에 “5개 대대만 있으면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오쿠보 등은 “지금은 외정(外征)을 할 때가 아니라 내실(內實)을 다질 때”라고 주장했다. 결국 오쿠보 등은 교묘한 궁정공작을 벌여 메이지 천황으로 하여금 사이고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취소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수완을 발휘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와쿠라사절단으로 구미를 순방할 때부터 이토를 눈여겨보았던 오쿠보는 이를 계기로 이토를 더욱 총애하게 됐다. 오쿠보가 죽은 후 이토가 일본 정계의 기린아(麒麟兒)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세이난전쟁
서양인들을 포함한 관광객들이 가면을 쓰고 사이고 흉내를 내며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앞 광장의 포토 존(photo zone)을 돌고 있다
죽마고우에게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 10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했다. 정부와 군부의 요직에 있던 벳푸 신스케(別府晋介),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 등 그의 측근들도 행동을 같이했다.
사쓰마 출신 장교들은 물론 하사관들까지 줄줄이 낙향하는 바람에 군 간부 자리가 텅텅 빌 지경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동조했던 도사번 출신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1837~1919) 등도 정부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조슈 출신들이 메우면서, 이들이 향후 메이지 시대를 주도하게 됐다. 이를 ‘정한론정변(政變)’ 혹은 ‘메이지 6년의 정변’이라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학교(私學校)를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교외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소일했다. 정부가 파견한 가고시마현 지사마저도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동조했다. 가고시마는 점점 사이고의 영향력이 지배하는 반(半)독립국가처럼 변해갔다. 도쿄에 있는 내무경 오쿠보는 이런 가고시마의 동향에 신경이 쓰였다. 오쿠보의 의중을 읽은 대경시(大警視·경찰청장)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1834~1879)는 밀정을 보내 사이고의 동향을 감시하기 시작했다(일본 경찰의 창설자인 가와지 도시요시도 사쓰마 출신이다. 가고시마현 경찰본부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이를 알게 된 사학교 학생들은 격앙됐다. 사학교 학생들은 1877년 1월 말 가와지가 보낸 밀정들을 체포하는 한편, 가고시마에 있는 육해군탄약고를 점거한 후, 다음달 반란을 일으켰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너희,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며 경악했다.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제자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의 주장처럼 일본 특유의 ‘공기’가 사이고 다카모리까지 지배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반란군은 규슈 중부의 구마모토(熊本)까지 진출했지만, 정부군에게 저지당했다. 유서 깊은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징병제 실시 후 만들어진 농민 출신 ‘국민군’에게 패한 것이다. 7개월간 계속된 내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을 통틀어 1만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
난슈묘지에 있는 고다마 5형제의 묘. 그들은 무엇을 위해 죽어갔을까?
그해 9월 24일 가고시마 시내 시로야마(城山)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인근의 작은 동굴(사이고동굴)에서 잠시 쉰 후 600m쯤 떨어진 수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사이고는 “신(벳푸 신스케)아, 이제 그만 하자꾸나”라고 말하고 도쿄의 황궁을 향해 절을 한 후 할복(割腹)자결했다.
가고시마의 역사를 보여주는 레이메이칸(黎明館)에서 시로야마터널 방향으로 200m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철길을 160m쯤 간 곳이다. 그가 제자들을 길러냈던 사학교에서는 300여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사학교 터에는 가고시마 메디컬센터가 들어서 있다. 메디컬센터를 둘러싸고 아직도 남아 있는 돌벽에는 세이난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2003년에 나온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바로 이 세이난전쟁과 사이고 다카모리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메디컬센터 앞(사쓰마의사비 앞)에서 시티뷰 버스를 탄다. 다음 목적지는 난슈묘지와 사이고난슈현창관이다. ‘난슈(南州)’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호(雅號)이다. 사쓰마를 일컫던 말이기도 하다. 난슈묘지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벳푸 신스케, 무라타 신파치(村田新八) 등을 비롯해 세이난전쟁에서 전사한 ‘반란군’들을 안장한 곳이다. 어리면 10대 중반, 많으면 서른 남짓한 젊은 사무라이들의 무덤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특히 발걸음을 잡은 것은 고다마(兒玉) 5형제의 묘비였다. 맏이인 사네나오(實直)는 35세, 막내 히로키치(彦吉)는 17세에 전사했다. 사네나오, 셋째 사네야스(實休·당시 28세), 넷째 사네타케(實健·당시 23세)는 1877년 3월, 두 주 사이에 구마모토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죽어간 것일까? 세이난전쟁 이후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게 되었다. 시대의 마지막 모순을 끌어안고 동귀어진(同歸於盡)했으니, 그것으로 이들은 역사의 소명을 다한 것일까? 그런 희생 위에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끝없이 이어지는 석비의 행렬을 보며 새삼 ‘역사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죽은 지 8개월 후인 1878년 5월 오쿠보 도시미치는 출근길에 불평 사족(士族)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보다 1년 전인 1877년 5월에는 조슈 출신 유신 원훈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가 병사(病死)했다. 1년 사이에 유신의 3대 원훈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들의 빈자리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면서도 외국물을 먹은 보다 젊은 세대들이 메웠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세례를 받은 지도자들이 일찍 사라져 준 것이 메이지유신의 진행에는 오히려 득이 됐다
슈세이칸과 리진칸
시마즈 가문의 별저인 센간엔은 정원과 풍광이 아름다운 名勝이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이곳에 각종 근대 산업시설을 지었다
난슈공원 다음 목적지는 센간엔이다. 긴코만(錦江灣) 바닷가에 위치한 시마즈 가문의 별장이다. 정원도 일품이거니와,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긴코만과 사쿠라지마의 모습은 절경이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이 일대에 제철용 반사로(反射爐), 기계 공장, 유리 공장, 수력발전 시설, 도자기 공장 등을 만들었다. 자신이 아끼는 별장에 이런 시설들을 들여놓은 데서 근대화를 향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사쓰마가 추진한 일련의 근대화사업은 나리아키라 사후(死後)에도 계속됐다. 이를 1865년 만들어진 기계 공장 슈세이칸(集成館)의 이름을 따서 ‘슈세이칸사업’이라고 한다. 슈세이칸 관련 유적들은 2015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나리아키라가 발탁한 사람 가운데 무라타 쓰네요시(村田經芳·1838~1921)라는 사람이 있었다. 소총 연구에 평생을 바친 그는 서양식 소총을 개량한 무라타 소총의 개발자이다. ‘무라타 소총’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94년 12월 공주 우금치전투 때, 총알도 피해가게 해준다는 주문(呪文)을 외우며 돌진하는 동학군에게 쏟아진 것도 무라타 소총탄이었다. 여기에 개틀링 기관포까지 더해지면서 동학군은 일방적으로 살육당했다. 일본군에서는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와 전(前)근대의 대결이었다.
센간엔에 있는 반사로터. 무기 제작용 철을 생산하기 위해 만든 반사로가 있던 곳이다
센간엔의 반사로터에 서는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근대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왕과 왕비는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복이나 빌고 있지 않았나?’
사쓰마번이 초빙했던 영국인 방적기술자의 숙소 리진칸. 서양식 건물 모양을 하고 있는 목조건물이다
센간엔에서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리진칸(異人館)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867년 사쓰마번이 초빙한 영국인 방적기술자의 숙소로 지은 건물이다. 외관만 보면, 유리창까지 달린 번듯한 서양식 건물이다. 하지만 목조건물이다. 문득 교토에서 본 류고쿠(龍谷)대학 구(舊)본관 건물이 생각났다. 1879년 건립한 이 건물은 외양은 서양식 석조건물이지만 내부는 일본 전래의 목조건축 방식으로 지었다.
서양식 건축기술을 배워오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서양식으로 짓자니 자신이 없어서 외양만 석조로 서양식으로 꾸미고 내부는 일본 목조건축기법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고시마의 리진칸과 비교하면 불과 10여 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룬 셈이다. 두 건물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을 모방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또 그 발전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1896년에 이르면 일본 건축가가 일본은행 건물을 서양식으로 건립하게 된다.
사쓰에이전쟁
가고시마중앙역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1864년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후일 각 분야의 선구자가 된 사쓰마의 젊은이 17명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센간엔에서 다시 버스를 탄다. 5분 정도 달린 후 이시바시(石橋)기념공원에서 내린다. 인근 기온노슈(祇園之洲)공원을 가기 위해서다. 이 공원에는 세이난전쟁 당시 관군전몰자위령비와 함께 사쓰에이(薩英)전쟁기념비와 당시의 포대가 있다. 사쓰에이전쟁이란 1863년 6월 벌어졌던 사쓰마와 영국의 전쟁을 말한다. 사쓰에이전쟁은 1862년 8월 요코하마의 나마무기(生麥)에서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을 가로막은 영국인들을 사쓰마 무사들이 베어버린 사건이 발단이 됐다.
사쓰에이전쟁 당시, 사쓰마군은 영국군의 상륙은 저지했지만, 영국군의 함포사격으로 가고시마 시내가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서구 열강의 무력을 호되게 체험한 사쓰마는 이후 양이(攘夷) 주장을 버리고,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864년 사쓰마는 17명의 젊은이를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가고시마중앙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이라는 이름의 동상은 바로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13세,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34세였다.
이들 가운데서 메이지 정부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1832~1893),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森有礼·1847~1889), 초대 일본은행 총재 요시하라 시게토시(吉原重俊·1845~1887) 등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됐다. 조슈도 비슷했다. 무리하게 양이를 하겠다면서 서양 선박들에 포격을 가했다가 1864년 8월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의 연합함대로부터 두들겨 맞은 후, 서양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들이 ‘양이’에 대한 입장을 바꾼 논리는 간단했다. 외세를 감정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소양이(小攘夷)’이고, 외세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은 ‘대양이(大攘夷)’라는 것이었다.
도전과 응전
다카야마에서 긴코만을 내려다보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동상.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메이지유신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기온노슈공원 위쪽 다카야마(多賀山)공원에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해협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궤멸시킨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동상이 서 있다. 등신대(等身大)의 아담한 크기의 동상이다. 일본인들은 도고 헤이하치로의 승리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문명사적 도전(挑戰)에 대한 응전(應戰)이었던 메이지유신의 마지막 장(章)을 장식했다. ‘대양이’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에 맛 들인 일본은 이후 제국주의·군국주의의 길로 폭주하다가 40년 후 패망(敗亡)하고 만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메이지유신은 여전히 ‘성공한 근대화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본 NHK는 3년에 한 번꼴로 막부 말~메이지시대를 다룬 대하사극을 방영, 그 기억을 반추(反芻)한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이해 올해 방영한 〈세고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구한말(舊韓末) 동학이나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 고종의 의사(擬似)근대화에 대한 과장된 미화(美化)만 있을 뿐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윗세대가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이만한 나라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폄훼하지 못해 안달인 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다카야마 꼭대기에서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자문(自問)해 본다. ‘150여 년 전 어리석은 조상들 때문에 한 세기에 걸쳐 고난을 겪어 놓고,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나? 100년, 150년 후의 후손들은 오늘의 우리를 두고 뭐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질을 할까?’
[출처] : 배진명 월간조선 기자 : <일본역사기행 - 한국 근대사를 흔든 ‘維新의 심장’ 가고시마에 가다> / 월간조선 201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