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빼어난 경치로 세태 따라 주인 바뀌어 ***
1993.06.10 압구정 마을의 역사 제2회 글 / 임 시 현
지난 1호에 겸재정선의 압구정 진경산수화 한 장을 소개하고 나는 그 그림의 원본을 찾아보았다.
원본은 내가 소개했던 그림보다 압구정 마을 쪽으로 약 사분의 일 정도가 더 있고 마을의 민가가
많이 그려져 있으며 좋은 기와집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너무 성급하게 소개한 것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겸재정선의 그림이 있기에 역사적으로 압구정을 증명했다는
것이 큰 수확이라 생각한다. 나는 또 한 장의 압구정 진경산수화를 찾아 여기에 소개 하고자 한다.
한 화가가 같은 주제를 두개 그렸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화가는 압구정의 자연경치와
웅장한 정자에 큰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난호의 그림과 이번 그림은 구도의 방향이
정반대에 가깝다. 정자를 근경으로 초점을 맞추어 신촌 오관수 하구 뚝섬벌이 중경으로 보이고
아차산. 불암산. 수락산 등이 원경으로 보인다. 그러면 압구정 그림에 대한 학자의 해설내용을 요점만
간추려서 소개해보려 한다. 원본은 독일 성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고 압구정의 시정어린 옛
모습은 한명회가 이곳에 짓고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에게 청하여 지어 받은 정자의 이름이 압구정이다.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한강의 뱃놀이를 즐겼던 적이 있는 예겸은 한강에 한가히 날아드는 갈매기
떼를 잊지 못하고 이런 이름을 지었던 모양으로 그가 지은 압구정기문에서 대강 이 뜻을 적고 있다.
낮은 언덕이 강변에 옹기종기 일어나고 그 위로 숲속에 둘러싸인 마을이 있어 겸재정선 당시에는
압구정 주변에 기와집이 즐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나무 비슷한 거목이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언덕 위에 유일한 누각이 있는데 그 언덕은 낭떠러지를 이루며 그 아래로는 강물이 굽이쳐 흐른다.
바로 압구정에 오르면 두모포가 대안이 되어 남산 자락이 한강에 잠겨드는 아름아운 풍경이며.
사방을 둘러보면 삼각산. 도봉산. 한강하구. 관악산. 우면산. 대모산 등이 눈앞에 보인다.
이렇게 내려다보면 빼어난 경치이므로 세태의 변천이 있을 때마다 정자의 주인이 바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해설에서 추린 요점이다. 겸재 정선이 압구정을 그린연대는 1741년경으로
그의 나이 65세 때이며 압구정을 1457년 세조(世祖)2년에 건축한 것으로 볼 때 이 두 그림은
압구정이 건립 된지 284년 후에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압구정마을은 정자 터를 위시해서 야산에
소나무 숲이 울창한 것으로 전해지고 고종(高宗) 때 일본인이 찍은 사진으로도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겸재정선의 그림에는 소나무가 없다. 그것은 화가가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마음대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은 한 인물 한명회의 생애를 정사의 행적은 지면 관계로 생략하고 야사에 비친 압구정에
직접으로 관계되는 것만 추려 보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순수하고 착한 성품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선하고 악해지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특수한 인물 한명회는 사람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 인물의 평가가 다르다. 즉 그를 악한 쪽으로
보는 면이 많다. 하여간 그는 한 나라의 최고 재상을 지낸 공신으로 깊이 생각해 볼 인물이다.
한명회는 태종(太宗)15년에서 1418 ~ 1487 성종(成宗)18년까지 파란 많은 일생을 73세까지 누렸다.
조선조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로 명신록에 ‘생월수년방시성형’이라 기록했다 태어 난지 이삼년이
지나서야 사람같이 형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팔뜨기요, 머리가 뾰족하게 솟아 이것을 보고 영통사
큰스님이 ‘광혁첨’이니 귀히 될 징조라고 하였다. 칠삭둥이라 하여 아이 적부터 놀림감이 되고 모친마저
일찍 여의고 어린 시절을 버림받다시피 살아왔다. 당당한 양반의 후손이라 하여 나이 10세 되던 해
해주부사 민대생의 사위가 되었다. 장모되는 허씨와 처가에서는 모두 좋아하지 않았으며. 민대생만 후일
대성할 인물이라고 잘 대해줄 뿐이었다. 나이 30이 넘도록 과거한번 응시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한명회는 세상을 비관하기 시작하며 ‘세상에 과거에 응시 못한 사람은 죽어야 싸지 하며 그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한다. 나이 38세에 겨울 송도 경덕궁 궁지기로 떠나면서 마음속에 권력과 재물을 얻는데
생애의 승부를 걸었다. 사람들은 그가 뱃심이 좋은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양심이 없고 음모와 모략과
욕심이 가득 찬 꾀가 있을 뿐이라고 미워했다. 궁지기로 있을 때 한양에서 온 송도유수가 주동이
되어 한양출신 관원들이 친목계를 만들었다. 한명회가 “나도 한양출신이오니 끼어주시오”하니까
계원들은 궁지기 따위가 어디에 끼느냐고 하며 또 칠삭둥이 제 꼴 남에게 보일 것 뭐 있나 하며 비웃고
상대를 안했다. 한명회는 배짱 좋게 앉아서 술 한잔를 받아 술잔을 내던지고 “이 교만한 송도 계원들아
두고 보자. 나도 한번 설 때가 있다”하고 이를 갈았다. 다음날 궁지기직을 내놓고 세상을 한번 뒤집어
보겠다고 결심하며 한양으로 올라가 권람을 찾아가 권람의 중개로 수양대군과 연을 맺게 된다.
한명회의 비상한 꾀는 수양대군을 흡족하게 하고 청년시절부터 떠돌이 생활을 한고로 도성 안에서
주먹깨나 쓰는 어깨두목들을 많이 사귀어 그들을 모아 힘과 조직을 키웠다. 그 때도 성안에
어깨두목들은 대다수가 두모포(옥수동)에 모여 살았던 고로 이때부터 두모포가 두목개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한명회는 어깨두목들과 같이 두목개에 와서 한강을 바라볼 기회가 많았다.
화가 겸재 정선이 압구정을 그릴 때는 예술적인 산수를 보고 방향과 구도를 잡았고 한명회가 압구정
터를 본 것은 풍수설에서 방향과 구도를 잡은 것이다.
풍수설에서 물은 부를 상징하기 때문에 흡족하며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을 힘에 기가 솟아 정자 터로
마음먹고 있었다. 다음 사진은 1956년 찍은 두목개에서 한강 건너편 압구정을 바라본 것이다.
이사진의 구도는 한명회가 바라본 그 자리이며 울창한 소나무에 덮인 압구정 야산 줄기는 마치 큰 용이
한강에 머리를 박고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이다. 이 형상이 뚜렷한 사진을 다음호에 소개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