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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원어성경을 연구해야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메세지는 원래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한 문서였다. 원본은 수 많은 세월 속에 묻혀 사라졌고 지금까지 우리 손에까지 주어진 성경은 원본을 필사한 사본들이다. 비록 사본이지만 원본과 조금도 틀리지 않게 필사한 고대 사본들이 많이 발견과 발굴 되었다. 특히 주전 100년 전후에 필사된 사본들이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므로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그 이후로 원어성경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원어사본을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함으로서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양적인 부흥이 낳은 부작용 또한 적지 않음을 시인하지 아니할 수 없는게 현실이다.
번역은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메세지가 옳바르게 전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곡되게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번역성경의 오역과 누락의 결과라고 볼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리더들에게 맡긴 양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므로 리더자들이 전하는 메세지가 듣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메신저가 메시지이다"라는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마샬 맥루한의 말을 통해서 확실히 알것이다. 그 나라의 언어는 그 나라만의 특성과 고유성이 있기 때문에 더 더욱 번역서보다는 원서를 알아야 한다.
원어 원문을 통한 성경연구는 번역서에서 찾을 수 없는 알고자 하는 문자의 어근이나 파생된 유래나 비교되는 단어의 연구를 폭 넓게 할 수있는 다양함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번역을 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연구 할 단어 추적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그 문자를 어떻게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알아야 본문에 충실한 해석과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한 설교문이 작성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대변자인 리더자의 역할에 있어서 의사소통과 언어의 중요성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바이다. 신약 성경이 헬라어,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기록을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라는 두 언어를 택하셨다면, 우리는 성경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원어들에 대해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고 꼭 원어성경만이 구원을 이루고 천국을 가게 한다는 최선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번역성경으로도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굶주린 양들에게 맛있는 꼴로 배불리 먹일 수만 있다면 모든 사역자들은 원어성경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성경원어연구를 기피하는 이유는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어는 십 년을 공부해도 원전 성경조차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다른 것에 투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성경원어는 성경학자들이나 공부하는 것이지 목회현장에 있는 우리들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그렇다면 정말 원어가 우리에게 힘들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모든 외국어는 배우기가 힘들다. 성경 원어가 힘든 것은 원어 자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외국어 보다는 배우기가 무척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원어가 다른 외국어에 비해, 쉬운 점도 있다. 그것은 회화나 작문 등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어 역시 신구약에 쓰여진 단어로 한정되어 있고, 독해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점이다.
성경원어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못 느끼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원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기피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 안 그래도 목회하느라 바쁜데 다른 짐을 지우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원어 연구는 우리에게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정확히 알게 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되도록이면 쉽게 원어를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기존의 원어 학습 방법은 우리에게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한 가지 다행한 점은 아직도 원어 연구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 어떻게 하면 보다 쉽게 원어를 배울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계신 분들이 한국에도 많다는 점이다.
성경을 원어로 읽는 것은 성지순례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라는 얘기를 종종 듣곤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하는 것이 우리 목회자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목회자라면 누구나 성경을 원어로 읽어야겠다는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왜 원어성경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가?
구자수 목사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고, 지금까지 한글성경으로 진리를 배워왔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았는데 오늘날이라고 해서 새삼스럽게 원어를 알아야 하며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그런 질문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어떤 면에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원어를 알아야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골치아프게 왜 원어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가? 원어를 가르치고 알아야 할 필요성을 말하는 이유가 자랑하기 위해서이거나 특이한 내용을 이야기 하거나 허튼 소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요즈음 원어를 다루는 단체나 교회 심지어 가정까지 생겨나고 있는 것이 추세인데 이에 반발하여 원어를 말하는 것조차 반대하며 오히려 알레르기 반응까지 일으키는 목사나 신자들이 있는데 참으로 답답하다. 한때 나이 드신 목사님들이 당신들은 한자나 고사성어를 유창하게 인용하며 사용하면서도 젊은 목사들이 영어를 사용하면 교만하다느니, 자랑하려고 한다느니 하면서 막았었다. 그러면 당신들이 쓰는 고사성어나 한자어는 유식하게 보이려는 것 아닌가? 자기들이 쓰는 것은 괜찮고 다른 사람이 자기가 아는 것을 사용하는 일에 반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현상들이 한국교회의 발전을 막고 분열을 조장하는 악한 결과를 가져왔다.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지식과 교인들의 수준은 외면한 채 과거에 매여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안일함과 미래를 준비하는 일을 게을리한 결과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가리워졌었던 것을 어떻게 부인하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원어연구를 하는 것이 최고다’라고 말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원어를 몰라도 좋고 원어공부를 안해도 좋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알자. 원어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해 검증을 할 수 있고, 원어연구를 통해 숨겨져 있는 말씀이 열리는 결과가 나타난다면 막지는 말자는 것이다.
또한 원어는 목사들이 알아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평신도들이 원어를 알게 되면 교인들이 교만해지고, 목사들이 설교하기가 힘들어진다는 얘기에 대해선 목사들이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더욱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고 신자들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가르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할 생각을 해야지 신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울 것인가? 성경을 모르게 만들었던 중세시대의 암흑으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그럼 목사가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은 누가 견제할 것인가? 이제는 무조건 목사가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따라오라고 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언제 깨우칠 것인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교인들도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한 차원 더 나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이런 목사의 의식을 깨뜨리는 종교개혁이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인은 원어성경을 배우고 연구하는 일에 대해서 모세나 바울사도가 말씀하셨던 것을 대신 인용하고자 한다.
고전 14:37~40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이것은 예언이나 방언이나 기타 은사문제에 대해 말한 내용인데, 이와 같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을 잘 활용하여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해야 할 것과 그러한 일들이 풍성하기를 기도하며 격려해야지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거나 거부감을 느낀다고 해서 막는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겠는가? 하나된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것인가? 제발 부탁하건대 최소한 바울의 심정이라도 갖기를 바란다.
민 11:24~29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하시기를 원하노라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했다. 동일하게 이 시대의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다 원어성경을 알아 참뜻을 알기를 원한다. 한가지 조심할 것은 원어를 가지고도 엉뚱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디에도 있었고 원어가 아니라도 영어성경, 한글성경으로도 있어왔다. 그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지 않을 순 없지 않은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그분이 주신 계시의 영을 따라 말씀을 밝혀 나가야 한다는 정신이 중요하다. 그럼 이제 여기서 원어성경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누구든지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그들의 견해를 들어보고 자신이 취할 태도를 결정하라. 원어성경을 보든지 말든지 말이다. 그로 인한 결과 또한 본인의 몫이라는 것도 명심할 일이란 것을 기억하고…
●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지난 날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을 읽으면서 풀리지 않는 많은 의문들을 해결하지 못한채 그냥 넘어가야 했던 무지의 고통이 비단 필자망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필자는 그동안 원어성경을 연구하면서 과거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선명하게 깨닫고 나서 번역성경의 한계를 알 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심각한 수준에 이른 신앙의 왜곡들이 잘못된 번역들에 근거하여 무분별하게 가르친데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옥석을 가려내어 바로 잡아야겠다는 뜻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한편 필자가 강조하는 바이지만 우리의 개역성경이 비록 오역을 많이 하기는 하였어도 모든 오역마다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에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을 당장 원어성경으로 바꾸라는 식으로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말 성경과 원문을 대조하여 번역에 오류는 없는지를 확인한 후에 말씀을 준비한다면 완벽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말씀에 갈급한 성도들에게는 오늘날 잘못된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줌으로써 신앙쇄신운동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안유섭 목사의 ‘원어로 여는 성경’의 머리말에서-
● 오늘날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는 신자들이 성경을 접할 수조차 없던 중세 암흑기에 비하면 복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스많은 번역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오늘날의 번역성경은 원문과의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차이와 또한 번역자의 입장의 차이 등이 개연됨으로써 원문이 가르치는 본래의 의미를 온전히 간직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00여년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래 우리 나라의 기독교는 유래 없는 엄청난 양적 팽창을 이루어냈는데 그 기저에는 우리 나라 신앙인들의 밑거름이 되어 왔던 개역성경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개역성경은 영감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한국의 기독교를 성장케 한 원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작금에 와서는 원문과 비교할 때 수많은 오역이 드러남으로써 그 동안 우리 나라의 기독교가 (외적)성장 위주로 흐르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함과 진실성에서는 미흡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최근 자명하게 보이는 한국 기독교의 쇠퇴현상은 이제까지 한국 기독교를 지탱해 주던 신앙자체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드디어 그 한계가 도래한 것이다. 개역성경은 그 모체가 정통사본인 표준원문(Textus Receptus)대신에 바티칸 계열의 사본을 따르는 미국개역성경(Revised Version)과 중국어 성경이며, 아울러 최초의 번역자였던 로스가 밝힌 번역 취지를 보면 축자 번역이 아니라 조선말의 의미에 유의하여 조선어의 뜻을 그대로 살리는 의미 번역을 하였다고 했다. 잘못된 번역은 잘못된 번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신앙으로 이끌어 그에게 생명을 주는 대신에 오히려 멸망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까지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 신자들은 자신들의 현재 신앙으로 넉넉히 최종안식에 들어가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신앙생활 하다가 ‘(내 백성이)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평생 신앙의 결과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천국입성의 거절로 나타난다면 그때는 아무리 해도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메시야를 죽이고도 자신들의 헛된 이상을 채워줄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조차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그들은 진리도 모르는 자들이었으며 지식이 없어서 망한 자들이었다.(진리가 그속에 없는 사단의 자식들이었다. 요8:44) - 안유섭 목사의 ‘원어로 여는 성경’의 서론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신약학 교수 다드(C.H.Dod)의 수제자인 데비스(W.D.Davies)교수는 듀크 대학원에서 강의하는 중에 성경과 신학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근원으로’돌아가는 것이며 모든 신학적 논쟁의 최후 귀결은 ‘원문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가?’에 귀착된다고 역설하였다. 희랍어 신약성경과 히브리어 구약성경보다 더 높고 귀하고 좋은 우리 신학의 기록서적과 교과서는 이 세계에 없다. 모든 신학과 교리서들은 (조직신학, 기독교윤리, 실천신학, 기독교교육, 종교음악)원문성경 다음 차례에 오는 부교재와 부수교육일 따름이다. -남욱진 목사의 희랍어 성경연구(유다서)의 장국원 박사 추천사 중에서-
●필자는 원어성서원으로부터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 한글이 대조되어 있는 스테판 신구약 성경과 관련 성구사전을 선물받았다. 받은 김에 며칠 사이에 창세기를 단어 한자 놓치지 않고 자세히 읽었다. 원어를 전혀 모르던 필자에게 얼마나 힘들었을 것인지 독자들도 짐작이 가실 것이다. 원어성구사전 뒤지랴, 기초 문법서를 읽으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번 일을 통하여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원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자냐 영이냐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번역된 성경을 읽든, 원어성경을 읽든 성경을 읽는 분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권고하는 바이다. 이번 글에서 원어성경의 말씀들을 어느 정도 인용하긴 했지만 그것은 원래 원어성경에서 얻은 것이 아니고, 번역성경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다만 원어가 그 깨달음대로 확신시켜 주기에 증거로써 채택한 것이다. -조도재씨의 새로 본 창세기 ‘아담과 예수’의 머리말에서-
●지금까지 역자가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번역한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보여주려 함이었으며, 결코 「그리스어 신약성경」이나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어로 된 필사본이 있었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나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며 따라서 원어를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어로 된 필사본이나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지 않고 영어로 된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습니다. 이유는 영어나 원어 모두 한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어떤 원어가 나왔을 때 그 단어의 여러 가지 뜻 가운데에서 과연 어느 것이 그 문장에 맞는 뜻인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원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특정한 원어 단어를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학이 달라지고, 심지어 이단 교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 시대를 따라 세계 공통어로 사용하신 영어로 , 그것도 당대에 신학자들을 감동하사 번역하게 하신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권위역으로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뿌리와 역사의 ‘원어성경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에서-
●한때는 전혀 오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한글 개역성경 」이 지금은 많은 신학자들과 또 그것을 출간한 대한성서공회 등에 의해 공격을 받고 결국 또 다시 개정되는 운명을 맞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도 크리스천들간에 ‘참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라는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으며 100종이 넘는 책들이 소위 성경이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편역자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게 되었으며, 소위 성경대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근본주의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킹제임스」만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교회는 100년이 넘는 복음전파 기간 중에 단 한 번도 참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고 보존해 온 성경 본문에 근간을 둔 성경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표준이 삐뚤어지게 되었고 ,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신앙행태가 버젓이 교회내에서 자리잡고 성장해 왔습니다. 또한 말씀에 근거하여 확실한 복음선포에 의해 영혼을 구령하는 것이 아니고, ‘빈야드 운동, 펜사콜라 부흥’ 등의 오순절 은사 운동 프로그램 및 ‘트레스 디아스, 프라미스 키퍼’ 등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각종 인본주의적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사람의 혼만을 어루만져주고 그들로 하여금 마치 구원받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이제는 우리가 한국의 전통적 기독교를 벗어나 성경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주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여 악한 것은 과감히 제해 버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한글 성경이 많지만 참으로 「한글 개역성경」 만큼 많은 성도들을 감동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한 성경은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 역시 이 「한글 개역성경」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개역성경」은 본문이 천주교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일부 그 내용이 바뀌거나 삭제된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틴 루터나 존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개혁 본문에 근거를 두지 두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글 개역성경」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전체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부분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뿌리와 역사의 편역자 정동수 교수의 서문에서-(부분 부분 발췌하였음)
●지금의 한국말 번역성경들은 한결같이 원어성경에서 라틴어 성경으로, 라틴어 성경이 다시 영어성경으로, 그 영어성경이 다시 중국어 성경으로, 중국어 성경이 한글성경으로 번역되는 여러 차례의 이질적 문화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온 것이므로 원본에 비추어보면 어떤 부분은 원본과 비슷하지도 않은 원본 아닌 원본이 된 기분이 들 정도로 변질(?)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 말한 대로 “번역서는 원서의 파괴자”라는 말이 옳은 것이다. 성경의 번역서들(번역성경)은 독자로 하여금 원어 성경의 이해를 돕게하는 역할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다만 독자들이 이해한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아주 적절하고 적합하게 표현하는 것인가에 대해 어휘력이 부족하고 또 어휘를 알고 있다 해도 그때 그때 즉시로 유효 적절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경우 등을 돕기 위해 다양하게 표현된 다른 번역 성경들을 참조하여 적당한 어휘를 선택하는 기회를 드리기 위하여 본 「월간 원어성경」이 창간되게 된 것이며 본 칼럼을 연재하는 것이다. -이선호 목사의 월간 원어성경 중에서-
●제가 어느 날 대전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할 사람들을 찾고 있는 중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불경을 한문으로 읽으려면 어느 정도 한자를 공부해야 합니까?” 그는 대답하기를“평범한 사람이 7년 정도는 한문을 공부해야만 팔만대장경 같은 불경을 볼 수 있는데 완전하게 터득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묻지도 않은 말에 다음 대답이 재미있었습니다. “지금은 번역본이 많아서 그렇게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해서 한문으로 기록된 불경을 읽는다해도 그것도 불경의 원전이 아닙니다. 성경을 원전으로 읽어야 할 필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원전으로 자유롭게 읽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전이라도 찾으면서 다양한 역본들의 오류를 찾아내고 올바른 본문을 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는 전문가입니다. 전문가는 자기 분야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비교적 쉬운 원어로 되어 있어서 조금만 노력하면 원전을 대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경우 약 1,000개 정도의 단어를 외우고 문법과 약간의 구문을 공부하면 어렵지 않게 읽어갈 수 있습니다. 회교도들은 모국어가 무엇인가와는 상관없이 모든 열심있는 회교도는 아랍어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어성경 읽기를 위해 특별한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신학교 시절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단지 학점을 따기 위해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몇 학기 공부하고 즉시 그만둡니다. 그러나 마실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물이 있을지라도 샘 안에 고인 물이 가장 순수하고 정결하듯이 게시의 가장 올바른 의미도 원어성경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는 교인들이 듣기에 쉽게 설교하는 대중 설교자였지만 그 역시 성경 원어 연구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의 원어인 희랍어를 통달하려고 결심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다. ”
-김남준 목사의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의 ‘지성적 준비’에서-
●원어성서원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스테판 원어성경」은 원어를 연구하는데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유용한 책들이 신학생들과 평신도들, 특히 목회자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한국교계에 원어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와 더욱 바르고 풍부한 설교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세윤 풀러신학대학 신약학 교수, 총신대학 총장, 96세계 신약학회 발표자-
●10여년 기간에 걸쳐 기계문명의 최고봉인 컴퓨터로 연인원 200여명이 동원되어 작업완료 출판된 「스테판 원어성경」은 성경원문에 대한 일반인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책이다. 원어성서원에서 13년동안 지속적으로 실시해 온 원어성경 (무료)교육이 목회자들의 재교육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장국원 순신대 대학원 주임교수-
이상 여러 목사 그리고 교수 , 평신도들의 견해를 살펴 보았다. 그 외에도 상당수 잡지와 책들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접할 수가 있다. 아직도 원어연구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한국교회 안에는 팽배하다. 오순절 운동이 안들어 가 있는 교단이 없고, 영성운동이니, 교회성장이니 하는 쪽으로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 일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열심들인가? 목사 개인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일인가? 주님이 과연 무엇을 기뻐하실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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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것은 원어성경연구라고 봅니다.
원어성경연구를 15년 넘게 해오신 목사님을 모시고 이곳 동부육군지역 광양에서 전임강사로 모시고 깨어있는 분들을 위해 저희교회에서 강의를 추진하려고 합니다.
전임강사 목사님 프로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요셉목사
.구 총신대학(B.A)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M.Div) .성경원어연구원(Th.M) .호헌총회목회대학원(M.Div)
.P.U.I기독교교육학박사(Ed.Dr).히브리어,헬라어 교수(전) .조직신학 교수(전)
.사랑의빛교회 담임목사(전) .생명의빛교회담임목사(전).호헌총회 전남노회 서기(전)
.국제연합신학대학 대학원 설립자(전) .퓨리턴총회 사단법인설립(현)
.퓨리턴총신대(구국제연합신학대학대학원)개명
이요셉목사님은 목회를 하시다가 두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고난의 과정도 있었다 함. 목회자라면 반드시 통과해야할 원전의 벽을 넘으시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교육과정은 처음실시되는 상황이므로 다소 미숙한점과 운영의 미숙도 양해바랍니다.
장소도 시설이 좋지 못한점도 널리 양해를 바랍니다. 그러나 교육의 내용은 충분한 필요를 채워질것이라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스테판원어성경과 수퍼바이블이나 디럭스바이블을 가지고 성경원어교육을 합니다.
원어속에 숨어있는 주님의 뜻을 찿는 귀한 교육이 될것입니다.
* 신구약 원어성경강해 매주 세미나(제1기생모집) *
.전임강사:이요셉목사
.일시 : 2007.11.8(목) 오후2시10분부터 첫강의 시작함.
.장소: 새순중앙교회당
.강의시간: 1교시:오후 2시10분-3시(히.헬),2교시: 3시10-4시(말씀적용),3교시;토론 및 교제
.1기생(1년과정):초급반(6개월),중급반(6개월):1년과정으로 방학없이 매주 강의함.
.수강료: 매월2만원(강사 식대와 교통비 및 수강생님들 차와 다과를 제공하기 위해 불가피 한달 회비 2만원입니다)
.지참물: 오실 때 성경 또는 원어성경,필기도구.개인컴퓨터(개인자유임)
.교회주소:광양읍 덕례리 1757-6( 덕례리 대림아파트앞 4거리에 위치함)
교통편:77번,777번 이용시(덕례리 예구마을하차하여 대림아파트4거리쪽으로 도보10분거리) 91번,91-1번 이용시 (대림아파트 4거리 예구마을하차)
.모집기간:2007년10월31일까지 모집(사전에 등록해주시기 바랍니다.)
.자격 및 인원 : 원어로 성경을 보고 말씀을 사모하는 누구나. 0명선착순 모집
.등록접수방법- 전화나 이메일
.연락처:061-761-3408,011-9617-3408 이메일 c9114s@hanmail.net
.*한두명이라도 강의는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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