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는 성도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자비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인간에게는 각 개인에게 주어진 독특한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 그것은 선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할 독특한 유심체(唯心體))이다. ‘유심체’란 정신적인 것과 실재(實在)하는 것의 중심이 마음이란 것으로서 인간에게만 주어진 사고능력이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함과 경험을 통하여 성취되어간다. 인격은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나 부한 사람에게나 지위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나 각인에게 선천적인것과 후천적인 교육과 수련을 통하여 형성되어진다. 개별적이고 독특하기에 타인과 비교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1.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36절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자비로운신 것처럼 성도들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자비로운’(οίκτίρμων 오이키티르몬)은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을 뜻한다. 이는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양면성이 있다. 즉 정신적으로 유약한 사람이거나 물질적으로 곤고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인격적인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기존적인 성품은 거의 동일하다. 그러기에 약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처럼 온전히 자비로울 수는 없다. 수준이나 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성도가 바라보고 따라야 할 푯대이다. 그리고 푯대가 분명해야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게 되고, 또한 최선을 다하고 부족함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자비를 베풀때에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은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연약함은 노력이 부족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결과라고 폄하하면서 돕는 것은 오히려 상대로 하여금 더욱 비참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차별 없이 자비를 베푸심을 본받아 너희도 사람 차별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다.
2.이기적인 자비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 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들에게 꾸어주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자기에게 선대하는 사람에게 선대하는 것도 그리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과는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세상은 보편적 원칙인 ‘받은 만큼 주기’(give and take)이다. 내가 준 만큼 되돌아 오지 않으면 서운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무시 당하였다고 생각한다. 도와 준 것만큼 되돌려 받지 못하면 배신당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남에게서 받는 것을 기록하여 보관했다가 기회가 되면 받은 만큼 돌려주려고 한다. 왜냐하면 배신자 프레임에 걸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지금 예수님께서는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꾸어주느니라’(34절)라고 꼬집으셨다.
세상에서는 계산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계산적이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호6:6)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 없이 주는 것이듯이 성도들의 사랑과 자비도 이기적인 것인 아니라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온전한 성도의 자비라고 생각한다.
3. 자비로운 삶에 하나님의 상급이있다.
36절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본문은 성도가 원수까지 사랑하고 선대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며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상’(μισθός 미스도스)는 ‘보상’ 또는 ‘보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그 사람의 행위대로 값아 주신다. 선을 행한 자에게는 선한 보상을 , 악을 행한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보응 즉 벌을 내리신다. 자비로운 삶에는 헌신과 희생이 따른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과 손해는 하나님이 보상하신다.
모압 여인 룻은 남편은 죽고 시어머니 나오미와는 다론 족속으로서 그녀에게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녀들은 가난하였고, 남편들도 없으며, 기업을 이어갈 희망이 전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젊은 과부 룻에게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명하였지만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라는 죽음을 각오하고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서라도 시모를 부양하고자 하는 룻에게 하나님은 다윗 왕의 할머니가되는 영광스로운 보상을 해 주셨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절망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지만 이방여인 룻은 불쌍한 시어머니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비를 베풀었다. 현대인에게 룻은 미련한 여인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나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자비가 아닌 하나님의 심정으로 시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푼 결과는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이었다.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자비가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없는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원수도 사랑 할 수 있는 고귀한 성품의 인격자만이 실천할 수 있다. 이는 힘이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자비로운 자가 되어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어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스러운 보상을 받아 후손에게 전하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기 바란다.
예수사랑선교회 임웅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