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나무에게
황 금 찬
소나무는
늙지 않는다
병들지 않는다
기후의 변화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백 년의 인정이 꽃으로 피고
구름이나 철새들이
그 지친 날개를 쉬어간다
내게 시대의 적막이
물결처럼 밀려올 때
나는 그 자주 그 소나무를 찾아간다
표주박으로 하늘의 지혜를 담아
내게 주곤 했디
<소나무>
이제 그 소나무는
아침 안개같이 대지를 덮는
하늘의 이치와
지혜를 이 땅에 심는다
어느 날
이 땅에 다시 숲을 이룰
그 소나무들을
기다리며
불 꽃
최 은 하
불꽃들이 타오른다
깊은 어둠의 마지막을 모여 춤으로 어우른다.
합창의 노래는 여울을 이루다기
별무리로 떠오른다.
이 시간은 누구나 눈을 감고
숙연히 팔을 치켜 벌린다.
저마다 되돌리지 못하는 슬픔은
추억으로 남고 훗날엔
회상으로 번지어 이야기가 된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지금 어디에 있는다, 떠도는가
불꽃으로 터오르다가
한점 불티로 삭아 흩날리는가.
물음은 물음의 사슬로 엮어지고
누구던가, 아련히 기억은 멀어지기만 한다.
가슴 깊숙이 타오르던 불꽃은
무거운 그림자 떨쳐버리고
이제야 차지한 자유로움으로
하늘 향해 훨훨 날아가는구나.
손짓하여 부르거나
무슨 수작의 시늉일랑 하지 말아라.
바람 따라 들어 올리는 그 모습은
제대로의 완성일지니
불꽃의 환상은 가까이 별로 뜨고
별들은 사람의 머리 위에 자리한다.
향 수
황 송 문
고추잠자리가 몰려오네
하늘에 빨간 수를 놓으며
한데 어울려 날아오네.
어느 고향에서 보내오기에
저리도 빨갛게
상기되어 오는가.
저렇게 찾아왔던
그 해는
참으로 건강한 여름이었지.
그대 꽃불 같은
우리들의 강냉이 밭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
잔모래로 이를 닦으시던 할아버지의
상투 끝에 맴돌던 잠자리 같이
강냉이 이빨을 흉내내며
단물을 빨던 나의 눈앞에
떼지어 오는 고추잠자리는
누가 보낸 전령인가.
어디서 오는 전령이기에
노스텔지어의 손을 흔들며
저리도 붉게
가슴 이리저리 맴돌며 오는가.
무주(茂朱)에서
김 년 균
이곳엔 언제나 가파른 산과 계곡이 있어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이 언제나 그러하듯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모두 순탄치 않듯
무주의 구천동(九千洞)은 첩첩이 가파르다.
아흔 아홉의 신비한 계곡이 모여
신(神)이 머무는 자리를 만든다.
무성한 나무와 어여쁜 새들이 서로 손 잡고
만리(萬里)까지 뻗치는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의 모유(母乳)처럼 살찐 물결이
사시사철 계곡에 넘쳐흐른다.
대추나무 연 걸리듯 고통과 절망에 빠져
하루에도 골백 번은 넘어지는 사람들,
그런 핏줄은 하나도 없고,
이곳은 오로지 신록(新綠)이다.
마음 고운 길손이 이곳에 찾아들면
하늘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학(鶴)처럼 춤추는 선녀(仙女)도 본다.
어머니의 무지개
이 세 연
수화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외침 따라
한밤을 헤치고 달려간다.
방안 가득 일상의 물건 흐트러졌고
어머니는 목젖이 보이도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건네시며 다급한 몸짓이다.
중환자실에서 오래 머무르다 나설 때
잃어버린 말 언제쯤이나 되찾으시려는지.
바닥에 뉘인 등 일으키지 못하여
물러터지는 발가락 개미떼에게 내어주고도
아픈 표정 눈빛만으로 가리키다가
끝내 지쳐서 잠에 빠지신다.
누구도 헤아려주지 않는 속내
어디에다 풀고 계시는지.
말라터진 입술 달싹이며
눈꺼풀 연신 파르르 떠신다.
보란 듯이 자리 털고 일어나
가고 싶던 고행 언덕 오르고
어릴 적 동무도 만나실까.
화분 하나 없는 방 어둡고 눅눅해도
어머니 거니시는 꿈길엔
꽃향기 자욱하고 무지개도 걸렸겠지.
호수에 돌을 던지며
최 창 일
낮은 데로 흘러서
가장 낮은 데 고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눈물이다
오늘도 그대를 위해
빛나는 영혼의 돌 하나를 닦아
그대 가슴에 던지고 싶다
두꺼운 유리를 뚫는 햇살이라도
눈물의 밑바닥까지는 닿을 수 없는 일,
그 깊은 데에 빠져 죽기위해
돌멩이로 날아가
그대 깊은 물바닥에 잠겨 무덤을 짓고
속치마까지 보이는 투명한 그곳에
하나의 사리로 남으려
발길에 체이는 돌멩이라도 아프지 않았다
더 깨어질 수 없는 부드러운 입술로
그대에게 잠기면
우리가 살아온 나이테보다 많은 파문으로
파문으로 아파오고
그대 눈물 속에
하나의 탑이 솟아 오르것다
이 세상에 가장 낮은 데에 고이는
그대 모습 위에 비치는 맑은 모습 하나를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어머니가 일러주신 별 이름
이 오 장
어머니, 지금 고향집엔
땅거미 내린 마당 가득 고추잠자리 맴돌고
가마솥 저녁밥물 부뚜막을 적시겠지요.
김 서린 정지에서 허리 굽히고 바삐 오가시는 모습
멀리서도 훤히 보입니다.
외양간 앞 쟁기 손질하시던 아버지
모깃불 피워 생쑥 한 다발 덮어 놓고
멍석 까시려 바지랑대 치우셨지요.
빨랫줄에 앉았던 제비들
시끄럽게 지저귀다가 제집으로 들어가고
저녁 마당에 호야등불 밝겠네요.
어머니, 뒷집 감나무는 얼마나 열렸나요
담 너머 간 감은 너희 것이라던 길자 어머니의 말
아직도 또렷하게 들립니다.
장맛비에 떨어진 땡감 주워
모리항아리 속에 담았다가 먹던 맛
이제껏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
하늘 가득 피어나던 별송인 그대로인지요
가르쳐주신 별들 이름 기억나지만
이곳 타향살이에선 보이지 않아요.
희뿌연한 밤하늘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오늘도 잠 못 이루고 꿈길을 헤매네요.
조 기
지 창 영
몸을 죽여 보시하는 것은
여래의 마음인가.
향수도 잊은 채
어쩌면 저리도
편안할 수 있을까.
황금빛 비늘을 날리며
떼지어 누비던 서해 바다
과거에의 집착을 끊고
가난한 노모의 진지에 오르기를
순교자처럼 기다리는가.
윤회의 한 순간에
기꺼이 먹혀지는 제물이기를
말 없는 깨달음으로
자유로운 열반에 드는가.
세파가 물결치는 시장 한 켠
짭짤히 절여진 채
해탈의 세계를 유영한다.
가장 작은 그림자
유 회 숙
소요산 입구에 봄이 왔다. 산책로에 한 줄로 선 단풍
나무 봄볕에 졸고 있다. 누군가 버리고 간, 작은 보따
리일까. 할머니는 봄을 모르고 앉아계신다. 해진 발끝
만 쳐다보는 할머니, 한때는 지아비의 늦은 귀가를 기
다리던 젊은 날 있었으리. 등굣길 막내아들 도시락을
챙겨주며 아이의 하얀 이마를 짚어주던 날도 많았으리.
세상에서 가장 작은 그림자 어머니 이름일까. 검버섯
남루해진 그림자
누구에게 짐이 될까 마음 조이며
그림자 내린 땅속으로
스미고 싶었으리, 깃털이 되어
멀리 날아가고 싶었으리
일요일 산을 오르는 내 발목
끝내 놓아주지 않는 어머니
집이 어디냐는 물음에 나무그늘이 당신 집인 양 아
이처럼 웃는다. 할머니 웃음에 눈물 어린다
일요일 소요산을 오르는 발걸음
놓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그림자
어머니, 봄을 모르고 앉아계신다
기억의 방
김 혜 경
기억의 방엔 벽이 없다.
사방으로 구멍 숭숭 뚫려
빛이 없어도 들여다 보인다.
빗물이 들이쳐서
바닥은 연못을 이루고
가끔 날아드는 팔매가
몇겹 물살 일으키면
퍼뜩이는 기억들이
은빛으로 솟구쳐 오른다.
때때로 벨벳 밤하늘에 박아두었던
유년의 별을 찾아내 이야기하고
만나고 싶은 이를 기다리느라
종일 빈 집만 지키다 돌아오기도 한다.
달려도 달려도 숨차지 않는
야트막한 산과 들에
숲이 품었던 새들은
옛곡조를 목청껏 노래하며 날고
꽃들은 시들 줄 모르고 웃어제낀다.
오늘은 골짜기에
한 사람을 묻어주고 돌아왔다.
기억의 방은 다시 잠잠해지고
수면 아래서
헤매던 시간들 뿌리 내려
물풀 따라 일렁인다.
모란시장 풍경
오 정 수
수지리 고개 넘어가면
온갖 풍물이 모여드는 모란시장이 선다.
올해는 백년만의 무더위가 온다는데
장터행길에는 차량과 인파가 뒤범벅이 되고
삿대질하는 운전자의 고함소리쯤은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도 않는 거리
점심때인지, 보신탕 집 가마솥은 마냥 끊어오르고
개장에 갇힌 개들은 뻥튀기는 소리에 놀라 두리번 거린다.
단골손님인지, 벌건 얼굴에 모자를 눌러쓴채
00포교원 뒷문으로 사라지고
같은 시간 수족관에서 빠져나온 장어 한 마리도
주인 몰래 수채구멍으로 사라진다.
페인트칠 벗겨진 낡은 건물 옥상 성인극장 간판에는
주연배우 입맞춤이 그려져 있고
지나가던 배꼽티 아가씨는 성형수술 반액세일 팻말 앞을 서성거린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하나 둘 천막을 치우기 시작하면
지붕 위 웅크렸던 비둘기가 파장터에 날아들고
오늘밤엔 큰비 온다는 예보가 끝나자
천둥번개와 함께 까만 비구름이 밀려온다.
금성산성
송 선 애
이끼 낀 돌 틈으로
날선 햇살이 꽂히고
발효된 세월의 흔적들이
성벽마다 앙금으로 남아있다.
침묵 속에
내장을 드러낸 어족들
정지된 시간의 화석을 바라본다.
금 간 우주의 파편 속으로
날리는 새떼들
어지러이 널린 흔적들이
나그네의 발길을 막는다.
낡은 역사책 속에서
절묘하게 비상하는 새들이
산맥 같은 힘줄 속에서
온종일 파닥이고 있었다.
밤 낚시터
정 희
어둠이 홀연 강을 삼키고
수심은 먹물처럼 어둡다
강 건너 온 불빗이 물 위에 흔들리고
강변을 따라 야광찌만 즐비하다
미동도 않는 낚시꾼의 어깨에
달빛이 묻는다
스치는 바람이 찌를 흔든다
쪼그려 앉은 그
강물 속으로 떠오르는 달이다
야광찌 하나 쑤욱 들어간다
빈 낚싯대에
붉은 달이 물렸다
가르마
이 병 훈
젖은 머리를 말려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가르자
거울에 내 나이가
무색하게 들여다보인다.
한쪽으로 조금 치우쳤는지
다른 한 편이
서운한 듯 바라본다.
어머니처럼 공평하고 반듯하게
반으로 나누지 못하여
가녀린 바람에도
쉽게 헝클어지는 머리카락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태껏 흔들리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허옇게 세어
성긴 머릿속이 부끄럽기만 하다.
나무의 울음
최 연 숙
마을 뒤 산등성이 타고
소슬 바람 따라
홀연히 떠나셨던 아버지
한 그루 나무로 정정히 서 계시네.
내가 곁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예전에 듣지 못했던 울음
오늘에야 여기서 듣네.
진달래술 익을 때면
어머니는 앞치마 마를 날 없었고
아버지는 벗들 불러 마당에 웃음 가득 했네.
병아리들은 그 웃음소리에 어미닭 되어
홰치는 소리에 새벽은 밝아 왔네.
돌아오지 못할 먼 길 가신다는 말씀 없어서
구두 닦아놓지 못했고
손수건도 챙겨 드릴 수 없었는데
이제 큰 나무로 우뚝 서서
바람이 불 때마다
맨몸으로 빈 둥지 지키며
시름시름 울음 흘리네.
특 집
한국시인협회 무주지부 시인들
숲에는 숲만 있다
전 선 자
새는 잠들어 꿈을 꾸어도
숲은 언제나 꿈 밖에서 서서 잠들지 못한다
나무들은 울음이나 아픔, 그리움 등을
가슴속 깊이 감추어둔 채
남은 과립의 앙금들 반짝반짝 가지로 실어 나르지만
여름은 그 곁에 몸을 부리고 마냥 코를 곤다, 그러나
밤을 지샌 바람들은 시퍼런 칼날 세우고도
감히 쳐들어가지 못해 휘파람만 휘휘 볼 아프게
불어댄다.
숲이 잠들어 꿈속에 들면
나무의 보석들은 일어나 눈을 반짝인다
그 많은 시선들이 제각각
서로 다른 빛을 사방에 뿌리자 세상은 온통
초록의 바닷물로 출렁인다.
더욱 장엄한 숲,
빛나는 꿈들의 천국,
숲은 숲의 색깔들을 버무려 안개 속에
무지개를 띄운다
숲, 그 속엔 그런 보물들이 들끓는다.
바람의 간지럼을 참고 있는 것도
눈발의 회초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도
세상은 모두가
하나의 빛이고 그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숲엔 숲으로만 통하는 길이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가고 있다
함께 숲이 되어
빛이고 그늘이 되어.
정원사(庭園師)
이 여 산
나는 나는 정원사에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꽃을 피우기 위해
한 평생 뭄바친 정원사.
제지들 앞에 서면
얼굴 빨개지던 꽃다운 스무 살부터
무지개 빛 고운 꿈 엮어
오색실로 수를 놓았죠.
찬란한 아침 햇살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어요
잘 참고 사랑하여
더 좋은 꽃 피게 해달라고,
어느 덧 황혼이 깃드니
이젠 더욱 찬란한 내일을 기약해야겠죠.
나는 다시 태어난다해도
이길 밖엔 모른다오
언제나 희망에 찾던
행복한 정원사.
거 미
신 해 식
이제 집을 하나 짓자.
먼 길을 걸어오다 망각했던
고래 힘줄만큼 질긴 인연의 끈으로 엮어서
집을 하나 짓자.
아침이면 문틈으로 보이는 세상 바깥쪽의
이야기도 받아보면서 물 맑은
생각의 집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찾아올 사람 없어 하참 햇살 밝게 비치는 행복한
강가의 마을. 나뭇잎 사이로 내려꽂히는
죽음의 요새. 부활의 휘파람을
불면서 강가의 모래알을
밟으면 밀리고 밀어내는
수액의 진한 방울 어느새
소매 끝으로 흘러내리고
하루살이 서글픈 삶이
때로는 낯설어 질 때도 있겠지.
그 곳으로
길 영 자
앞 산마루 황혼 숲 어우러지면
길 떠난 새떼들 모여들고
작은 풀꽃 나풀대는 그곳
푸른 배추밭아래
어미 찾아 허둥대는
어린 염소들
사냥스레 울어대는 그 동네
텃밭에 호박덩쿨
호롱 같은 노랑 꽃
사는 냄새 진하게 피어 올리고
눈빛 선한 멍멍개
단잠 들면
딸을 바라보듯
아들 키우듯
별빛되어 은은히 뜨는
애틋한 그 정
나 그곳으로 가고 싶다.
물안개
이 영 선
어둠이 쌓인 용마공원의 정자에 앉아 있노라니
알콜 중독으로 세상을 버린 이의
숨결이 바람처럼 밀려온다
세상 고통 짊어진 흐느적거림이
땅바닥에서 솟아올라 닭살로 이어지고
어쩌지 못하는 자포자기의 얼굴은
저려오는 아픔으로 온다
버려 두고 가야만 하는 편안함이었을까
의문이 엄습함에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함이여
수 년이 흘러 나무는 나의 키보다 커가고
전자도 그 자리에 보수되어 세워져 있지만
떠난 사람의 흔적은 없다
이 밤, 아파한 모습의 숨결과 추태가
아련히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개망초
서 영 숙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렇게, 온통 내 이야기로 수군거리는데
낯설고 천덕꾸러기면 어때
왜풀이면 어떻고, 왜풀데기면 어때
나, 그대 발길 닿은 곳은 어디라도 좋아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을 거야
허드레 땅, 버려진 집터면 어때
가슴앓이로 얼굴이 푸석푸석해도 좋아
울타리도 만들지 않을 거야
낯선 바람과 물선 이웃에 햇살 빌어
내 심지 곧게 뿌리내리고
그대와 어깨동무하고, 때론 허리도 기대가며
달빛 잠든 그믐밤엔 눈물로 별들과 키도 대보면서
가끔은 까르르 배꼽 잡는 수다를 떨다가
하늘 고함소리에 혼비백산해도 좋아
죽사발 팽개치듯 땅바닥에 나뒹굴기도 하고
둥장군 칼바람에 더덕더덕 상처도 나겠지
봄이면 배시시 일어나 여시웃음 지으며
한 땀 한 땀 십자수를 놓고
이리저리 길 터 놓을 거야
그 길, 풀벌레들 숨 재워놓고 한 참 쉬어가겠지
어디든, 그대 눈길 틈틈이
하이얀 얼굴 새록새록 열어 보일 거야
나, 억척스레 버틸 거야
나의 아내 원희에게
송 종 엽
여보! 원희씨 저녁참에 마당가 과꽃이 환하게 피어오
르네
올 봄 다호와 함께 씨를 뿌렸는데 저렇게 아름답구
려...
저녁엔 밝은 별빛 파란하늘을 보며 어머니의 이야기
나누고 자다 깨어 방문을 열어 시원한 공기를 접하니
정신 맑아와 알 수 없는 상념으로 화두를 들다가 당신
생각을 했소
새벽하늘 낮게 드리우고 있는 희미한 별빛들이 나를
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어리어리한 슬픔 외로움들이 설핏하니
문득 어느 때부터 당신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는 현실
이었소
요즘 집에 갈 때 집안 가득한 난 향기를 맡으면...
날렵하고 고운 잎새로 천상의 꽃을 피우는 것이 꼭
당신 같아서 나의 당신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 한량없구
려.
덕유산 바위 같고 적상산 돌덩이 같은 나릉 안고 살
아가는 게 무척 힘들 줄 아오.
바위처럼 버티고 돌덩이처럼 아무렇게 굴러 쌓이는
행동에 얼마나 마음 상하오.
그래도 한마디 불평 없이 따라주는 당신이 내게는 덕
유산 적상산 이상으로 자리하여 태산이라오.
당신의 성품을 닮은 아이들은 잘 크고 건강하여 무척
행복한데.
꽃처럼 약한 당신을 기쁘게 해줄 재주가 없는 나는
무식한 술꾼이요, 그래도 당신의 건강을 매일 매일
걱정한다오.
티끌도 용서하지 않는 깔끔한 성품이 반석 같고
나를 대하는 예를 깍듯이 하니 내가 죽어도 못 잊으
리라.
기다림의 흔적
문 민 숙
먼 산 감고 돌아
너른 들녘 내달리는 바람처럼
그러다가
망연히
길을 잃고 서 있는 미아가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만큼
잊고 살았던 나의 허물 들어 날까 봐
두근두근
그 나날들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흘러갔는지...
마냥 외로움의 시간 속이었습니다
기다림을 잊고 돌아온 이 망각
어찌 외로움과 그리움이었습니까?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일들...
또 하나, 나의 외로움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따끔따끔 아파오는 상처
숙연한 가을바람 속에 설핏 반쯤 웃고 있는 세월이었습니다
벗이여
길 영 자
벗이여
싸리나무 울타리 아래
봉선화 백일홍 심어
분꽃과 함께 자라며
철없이 삶의 미학을
배웠던 그 때를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토끼풀 꽃 뜯어
꽃반지 나눠 끼고
자운영 꽃 피는 논둑에 서서
새끼손가락 걸며
사랑을 먼저 배우던 그 때가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돌아서 보면
발목까지 차 오르던
소낙비 내리던 날
비닐우산 함께 쓰고
정이란 것을 아련히 느껴보던
그 날이 정말 좋았어.
우리는
김 주 순
혼자서는 절대로
제댈 설 수도 없고
가슴에 별을 무수히 담고도
혼자서는 절대로
빛 발하지 못하는
내 몸이 부서져도
네 우울 가벼이 봐 넘기지 못하고
내 배불러 터져도
너 밥맛 잃어 쳐지면
기꺼이 수저 들어
너 밥맛 나게 하는
방 구들장 지고
아픈 허리 지지다가도
차 끓여 봇짐으로 메고 향로봉에 올라
아픔과 슬픔을
소나무 사이로 밀어내고
괄괄한 성격으로
취지 못해 꺽이는
내 버팀목도 되었다가
마음의 몸살 앓는
네 주치의도 되어지는
절대 같이 있어야
구색이 맞는
우리는 소중한 친구였더라.
수레꾼
심 차 보
나는 수레꾼이 올시다
나는 수레꾼이 올시다
어쩌다보니 나도 모르게
수레꾼이 되었습니다.
남에게 부꾸럽지도 않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습니다
시대에 뒤 떨어졌다고 해도 좋습니다.
고급 승용차가 달리는 자동차로는
내가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주 장날 시장에 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는 수레가 좋습니다.
돈 벌기 위함도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무주 장날 힘이 없고 약하고 꼬부라진
촌로들에게 작은 힘이 되고파서입니다.
나는 수레를 끌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인생은 어차피 빈 수레인 것을 배웁니다.
인생에게는 누거에게나 무거운 짐이 있음을 배웁니다.
겸손과 사랑을 배웁니다.
희생과 봉사를 배웁니다.
더 내려갈 자리가 없어서 좋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몇 만 분지 일이라도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 메시지를 수렐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무주 장날 수레꾼으로 오래오래 남고 싶습니다.
-무주 반딧불시장 희망상담소장 심태형 장로님께 바침
서른을 지나며
김 성 옥
가을비인가 봐...
촉촉이 내린다.
친구야 이렇게 가을은 내게로 왔다
이 가을엔 무엇을 할까?
이러다 보면 또 이 가을은 흔적도 없이
겨울을 데려다 놓고 사라지겠지?
겨울을 데리고 소리 없이 나만 뒤로한 채 흘러간다.
그토록 설레였던 서른이 이제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서른의 설레임이 엊그제 같건만 이제
마흔을 향해 달리고 있구나
내 새끼 크는 것과 내 나이 먹는 것이 왜 이리
더디게민 생각되는지...
아직도 흐린 하늘에 비가 오면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백지에 연필을 잡으면 뭔가가 적혀지는...
어느 날 늦은 밤 친구가 보고 싶어 대문 앞에 불러내
보고 싶다 말 한마디 남기고 집으로 돌아오고...
어느 비 오는 날 무작정 바닷가로 달려가고 싶어지
는...
아직도 난 18세 순인 것 같은데
오늘따라 이 서른이 넘어감이 서글퍼지는구나
흔들리는 술잔 속에 백열등을 훌쩍 마셔버려야지
한밤의 콘서트
성 진 숙
하루가 힘없이 무너지는 자정 무렵
잠 오지 않는 중년이
텔레비전 채널만 바삐 움직인다.
밤은 깊어 가고
자꾸만 머어지는 하루를 뒤로 한 채
고정된 채널에 혼을 빼앗기고 만다.
한밤의 콘서트,
하프 연주 호암아트홀 실황 생중계,
언뜻 보아 칠순이 넘어 뵈는 그녀는 멋있었다.
적당히 그려진 세월의 잔주름
화려한 드레스가 하프와 어울려 심금을 울리는 연주
순간, 아!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시간을 망각하고 흡수되어 있는 나도
어느덧 칠순을 넘고 있었다.
추억을 더듬고 있을 때
하단에 깔리는 자막 1952년생
믿기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운 연주와 함께
내 안에 스크랩되고 있었다.
골리섬
방 형 순
갯비린 내음 풍기는
물살을 토해 내는
작은 섬이 누워
돛대 달은 작은 배가
뭍으로 오고 가는 사람 실어 나르네
뱃전에 갈매기 날개 펴고 날으면
많은 사람 새가 된다.
찰삭거리는 밀물에
고기떼 뛰놀며
그리움이 겹겹이 쌓여 오듯
하얀 물살 겹겹이 쌓여
해초를 덮어 휘몰아가고
공중에 꽃이 피고
하늘엔 햇꽃이 피고
밤이면 별꽃이 피는
적요한 바다의 꽃이 된다.
바위에 앉은 물오리 한 마리
님 그리워 오늘도 서쪽하늘 바라보면
눈물 삼치며
노을 탄 바닷가에 미련 남기고
떠나가네
잘있거라 골리섬아.
시월에
신 영 자
잠시 눈 감으려 합니다
빛나는 세월에 두발 담그고
아주 소중했던 사람
잊으려는 연습으로 길을 갑니다.
한 밤중 갈증에 깨어 일어나
머리 곁 어디쯤
마음 저어봐도
더 멀리 숨어버린 해갈
우두커니 뒷짐한 모습이 미워서는 아닙니다
달 아래 거기쯤 나였노라
살작한 그림자
흘려 놓고 떠났어도
아주 잊는 연습
아껴 두려 했습니다.
거기인가
여기인가
더듬어 찾아봐도 홀로 사랑
아직 매듭 못한 몇 가닥 사연들이
기억의 갈피에 편지처럼 쓰여
눈 안에 새록한데
잊는 연습도 이별의 시작이라
두 눈 가린 술래는 소경입니다.
내도리
정 달 영
은은하게 머물러 있는 희뿌연 안개
드문드문 가로막은 썰렁한 층암
스르르 침묵으로 미끄러져 가는
그 개울 앞에 서면
어릴 적, 멱 감던 생각
아슴하게 떠오른다.
강 따라
발길 닿는 대로
흐르다 보면
육지 속의 섬 하나
마음을 밀어올린 듯
가볍게 떠 있다
외돌 향하던 길
박 종 기
땅끝에 다다랐을 때
파도는 우리들 몰래
발 밑을 후려치고 있었다.
쉼 없이
가로 닦았을 터
오만과 불손을
이만큼 꺽어놓고도
아직도 그걸
더 깍아내고 씻겨내야 하는지.
처얼석 쏴아
처얼석 쏴아아...
둥근 조약돌에 부딪치는
멍든 언어들의
끝간데 없는 해조음
그 아픔의 순간순간들이
물거픔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시인의 아내
이 현 정
시인의 아내는
참 좋겠다.
그는 별이 되어
밤하늘을 수놓고
꽃으로 피어
함초롬히 웃음 짓는다.
시인의 아내는
눈물이 되어
시인의 가슴속에
시냇물 되어
추억의 강물로 흐른다.
시인의 아내는
죽어서도
시인의 영혼에 살아
시가 되고
노래도 된다.
시인의 아내는 알까?
이 녘이
시인의 시라는 걸
그의 전부라는 걸
몰랐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이미
별이 되어
꽃이 되어
노래가 되어
아니
시가 되었으니까.
해바라기
문 충 곤
긴긴 여름날
햇님만 보고 있으면
기쁘고 즐겁고 언제나 웃고만 있지요.
행여 햇님 돌아서 갈 땐
해바라기 따라 가면 안달이지요
저녁이 되면 긴 한숨으로 이별하고요.
구름끼고 비오는 날은
짜증이 나고 외롭다 하다가
태풍불고 폭풍우 치면
추워서 오들 오들 떨다간
무섭기만 하여
야속한 햇님 원망하며 통곡하지요.
목이 쉬고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죽음을 연상하기도 하며
악다구리 쓰다가
어느 사이
햇살이 구름 틈 새로 비칠 때
해바라기는
어린애 마냥 활짝 웃으며
눈만 찡긋
구름에 가려 햇님이 숨을 때
야속하단 투정부림 뉘우치고
다시 온 햇님 그저 반갑기만 하죠
품에 안겨 흐느끼며 반가워하지요.
햇님은 안스러운 해바라기 감싸 안으며
더욱 사랑하지요.
이제는 영영
햇님사랑 듬뿍듬뿍 받으며 살아갈래요
아기해바라기도 위하면서......
당신에게로 /수필 중에서
이 연 희
적막한 시간입니다. 이토록 조용한 시간에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만을 길러 모아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낮
동안의 온갖잡념이나 걱정 따위를 물리치고 아무런 방
해 없이 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이 밤, 나의 영혼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당신은 부
드러운 손길로 나를 감싸주시겠지요. 그리하면 나는 가
슴속의 눅눅한 습기를 몰아내고 오색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산홍엽의 충만
함으로 봄내 여름내 당신을 흠모해 오던 가슴에 활활
정염의 불꽃을 사르겠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강이 바라다 보이는 찻집이 있었으면
합니다. 찻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사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단풍나무 아래서
조용히 참선하실 때쯤 문안 여쭙기로 해요.
극과 극은 상통한다고 했던가요. 꽉 차서 텅 빈 것
같은, 마냥 행복해서 울고 싶은 밤이 깊어 가면 풍경소
리를 듣기로 해요. 챙챙챙, 바닷속처럼 깊은 맘 구석구
석 비워 보라 하겠지요. 내 영혼의 가난함까지 씻어내
라시면 그저 송구할 따름이겠지요. 마루 끝에 턱 괴고
앉아 밤의 소리를 들어요. 이 산과 저 산, 골 깊은 능선
따라 피어오르는 밤안개 속에서 달빛이 산을 부르는 소
리에 귀 기울여봐요. 삼계유일심이라고 했지만, 언감생
심 돈오의 경지를 바라다니요. 다만 그 시간, 잡힐 듯
말 듯 모호한 감정이 촛농처럼 녹아 내릴 수 있기를 바
랄 뿐이에요.
자운영꽃 / 수필 중에서
박 영 애
언제 돌아보아도 내 마음에 유년은 봄으로 다가 온다
전자음 소리에 아침이 알리어지면 불처럼 일어나야
되는 바쁜 일상들이지만 세월의 몇 구비를 지난 요즘에
도 그 때의 생각들은 늘 푸르기만 하다
나와 유년을 보낸 그들은 나를 잊었으려니 생각하지
만 그렇지 않았다
유년의 내 가슴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이 짙었다
일상에서는 다른 집처럼 해가 기울면 무섬증 없이 밤
을 맞고 싶음이었고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오시면 선
물을 많이 사 오시는 것이 좋아서 늘 아버지를 기다렸
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기다리는 만큼의 십분의 일도
와 주시질 않았다 그럴적 마다 나는 자운영 꽃을 쥐어
뜯기도 했다 아프지만 소중한 기억이 담겨있는 어린 날
의 그 꽃밭은 참으로 신비한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배
인 곳 이다
명시 감상 |
임께서 부르시면
신 석 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글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기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들길에 서서
신 석 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더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슬픈구도
신 석 정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워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신석정(辛夕汀, 1907~1974)약력
전북 부안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중앙불교전문 강원에서 1년여 간 박한영
스님의 지도로 수학함. 1924년<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했고, 박용
철이 주재한 <시문학>의 동인 활동을 통해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전원
적이고 목가적인 시풍으로 일관한 시인이다. 광복 후에는 민족과 조국을 의
식한 현실적 관심이 반영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촛불>
(1939), <슬픈목가>(1947)등이 있다.
다시 찾아 읽는 글(수필)
흘러가는 모두를 위하여
최 은 하
타성화된 하루하루의 생활주변에서도 어떤 원한의 집
념이든지 아니면 마냥 안쓰럽고 아쉽게 느껴지는 모두
가 흘러가버리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흘러가는 것이
있으면 흘러오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실제도 그렇고
나를 대한 유형무형의 것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흘러
가는 그 흐름 속에 시간이 있어 하루가 저물고 밤이 깊
으며 거기 내가 사는 세월이 있고 이웃과 우리들의 어
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하늘과 땅의 서린 이야기가 있
습니다.
꽃 피던 계절에 약속이 있었고 안개 낀 달밤의 맹세
도 있었으며 잎 지던 언덕이나 강변에서의 가슴 저미는
작볍도 있었고 눈 내리던 날의 추억이 숱하게 많기도
하였습니다.
뉘 몰래 간직한 나만의 독백으로 어울린 세계의 오솔
길도 뻗히어 있었으며 드높인 야망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정열도 들끓었고 살았다는 감격에 젖어 함초롬
이 눈빛을 닦아내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무
엇 하나하나에 얼마만큼이라도 머물던 것은 거의 없었
고 그저 모두가 덧없이 비껴서 스쳐가는 것들뿐이었습
니다.
그래도 나에게 밀려온 곱고 아까운 것들을 그 얼마나
붙들고 매달아두려고 발버둥대며 애달파 했고 기진의
방황, 그 발길이었는지 모릅니다. 역시 이 하늘 아래서
머물러 고이 정지해 있는 것은 어느 무엇 한 가지도 없
나봅니다. 그래서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사람들은 마음
졸이며 영원을 동경하고 고독을 쌓는 게 화석의 비원인
지도 모릅니다.
실상 우리들에게 있어서 [잊지 못한다]는 말도 따지
고 살펴보면 그것은 기억의 한 편린에 불과한 것이지
시간과 세월을 역류해서 불망의 비석을 세워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나
정체해 있는 것, 열을 내어 발광하는 것이나 어둠으로
묻혀 가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이 한결같이 스러지고 퇴색하며 마
멸되는 흐름 속에 가득히 휩쓸려가는 것입니다.
바람소리가 유난히 거센 밤입니다. 어둠의 적막 속에
무한의 우주 저 쪽으로 내달려 가는 하나부터 열까지의
이름을 가진 것들. 그리고 그 실체들을 알아봅니다. 존
재하는 것은 언제나 흐름으로만 함께 있고 그것은 다시
말하여 최후의 제 자리를 잠깐 머무는 것일 뿐, 우리는
그 요란하거나 고요한 와중을 들끓거나 서성거리며 분
실하고 닳아빠지며 포기하기도 하는가 하면 초월하려
엉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자존은 끝끝내 엄연할 뿐, 의식은 찬란
히 빛을 내며 밝힙니다. 여기에 남는 바 답안은 나도
어김 없는 유전의 한 갈래로서 흘러가는 모두를 위해
무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망설임일 뿐입니
다.
아무리 생각을 펼쳐보아도 생명은 하찮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것일 수는 없습니다. 단 한 차례인 탄생과
생명의 기회인 이 하늘 밑, 땅 위에서 나는 어떤 이야
기와 회상의 주인공일까를 성찰해보고 참담한 역경과
안개 속 몽롱으로부터 닦아온 얼굴을 거울에 비춰봅니
다.
아직은 그래도 남아 있을 내 여정의 어느 굽이, 바람
소리 가득한 모서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