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여왕 선교열정
“전국체전 성화봉송 최종주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현역이 아닌 제가 뛰어도 될지 당황했어요. WEC 선교사로 팀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동료 선교사들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했어요.”
1997년 연합통신 기자 출신 이영철 선교사의 아내로 몽골로 훌쩍 떠났던 ‘녹색 테이블의 영웅’ 양영자(39) 선교사가 돌아왔다.
그녀의 한국행은 동료 선교사들의 동의를 얻은 뒤에야 이뤄졌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는 WEC 국제선교회의 사역 정신 때문이다.
1980년대 2.5g의 탁구공으로 세계를 제패한 그녀였지만 선교지의 생활은 주특기인 탁구와는 무관했다. 선교지에서 보낸 첫 4년간은 몽골어를 배우고 눈이 오는 고비사막에서 남편과 함께 교회개척,성경번역 사역에 몰두했다. 여름은 섭씨 40도,겨울은 영하 40∼45도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곳이었지만 선교지에서의 생활은 감사의 연속이었다. 양 선교사 부부와 현지인 1명이 첫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사역을 이끌어가실 것을 기대하며 묵묵히 봉사했다. 매일 새벽 동트기 전 큐티를 시작,2시간여동안 중보기도를 해나갔다. 그 결과 1기 사역은 풍성한 수확으로 마무리됐다. 주일 평균 예배인원이 40여명을 넘어선 것이다.
“요즘 ‘탁구선교사’로서의 제자리를 찾았어요. 1년6개월간 영국과 호주에서 안식년을 보낸 뒤 지난해부터 울란바트로에서 탁구클럽들을 이끌고 있거든요.”
1주일에 4일은 탁구를 지도하고 매주 토요일이면 손수 기타 반주로 예배를 인도한다. 내년 1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릴 예정인 12세 이하 동아시아호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몽골 청소년 대표선수 훈련도 맡고 있다. 비록 기술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몽골 어린이들의 순진한 모습을 보며 내일의 몽골을 꿈꾸고 있다. “만년 꼴찌라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이들은 훗날 몽골을 이끌어나갈 기독인 지도자가 될겁니다.”
양 선교사는 ‘달란트가 없어서요’‘부족해서요’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나님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기독인들을 경계했다. 선교사를 조금이라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그곳이 선교지이며 누구나 선교사로 헌신해야 한다는 ‘만인선교사론’을 강조했다.
“모든 기독인은 영?육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며,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근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또 다른 시작입니다.”
그녀의 신앙고백은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았던 체험의 열매다. 양 선교사는 2000년 2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다. 왼쪽 안면근육마비가 온 것. 주님만 보고 달려간 선교사의 길이었기에 순간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모래바람이 불 때면 입속에 모래가 가득 찼지만 즐거웠어요. 그러나 제 몸이 아프자 적잖은 시험이 되더라고요.” 울란바트로의 연세친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한편 기도동역자들에게 긴급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전인적 치유를 간구한 결과 거의 완치됐다. 하지만 본인만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이 남아있다. 이 또한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요즘 양 선교사는 자녀교육에 대한 시름을 덜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선교사 자녀교육 담당 선교사로 영국인 로즈메리 우드가 3년간 합류해 봉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으로 두 딸 반재(10) 윤재(9)를 키우고 싶었으나 마땅한 학교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우드 선교사가 온 것이다.
“작은 교회들을 위한 선교대회에 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선교를 해보니 선교사는 선교지에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오는 26일부터 WEC 한국본부가 국내 중소형 교회의 선교 동력화를 이끌기 위해 갖는 선교대회에서 사용할 양 선교사의 영상 멘트다. 인터뷰를 마친 뒤 영상 멘트를 준비하는 양 선교사의 목소리에는 선교지를 그리워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거룩한 부담감이 배어 있었다. 짧은 고국 방문 일정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몽골에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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