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설교
감사함으로 아뢰라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1]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둘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 셋째, 감사함으로 아뢰라. 우리가 줄줄 암송하고 있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권면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때는 대개 어떤 문제가 있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입니다. 그런 상황은 감사와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감사란 대개 만족과 풍요와 관계된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에게 감사하라니요?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이에 대한 힌트를 저희 집 아이가 수능을 볼 때 얻었습니다. 고3이 되자마자 첫 번째 모의고사를 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봤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일년 내내 모의고사 점수가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주님, 몇 점 이상은 맞게 해주셔야 합니다, 요행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래야 뿌린대로 거둔다는 성경적 삶의 법칙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요, 그래야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사에 성실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능 며칠 전, 시한부 삶을 사는 병든 아버지에게 신체의 일부를 떼어주기 위해 수술을 기다리는 어느 고3 학생의 사정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을 칠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워요. 시험만이라도 칠 수 있으면 원이 없겠어요." 점수의 높고 낮음을 떠나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간절한 소원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는 점수 때문에 걱정하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걱정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현실 자체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은총이요 축복이구나!
이런 깨달음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걱정거리가 많은 현실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계도 있습니다. 이때의 감사는 다른 사람의 현실과 비교하는 데서 오는 감사, 즉 '상대적인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비교에서 오는 감사, 상대적인 감사는 감사의 시작으로서는 중요합니다만, 이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비교의 구조 속에서 살게 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조건이 없으면 감사할 수 없게 합니다. 절대적인 감사, 조건을 뛰어넘은 감사,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봉헌할 수 있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이런 감사의 경지에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요?
[2] 오늘 주보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출처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글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감사는 계절도 시간도 없습니다. 감사는 어느 곳에서든 캐낼 수 있는 마음 따뜻한 선물입니다.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면 감사가 되고 불평을 캐어내면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는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해석입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고 믿음의 크기입니다.
소유에 비례하는 감사는 소유에 비례한 불평을 낳고 믿음의 감사는 조건에 매이지 않아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풍요롭게 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의 마음의 열매이며 섭리를 수용하는 자의 사유의 방식입니다. 감사한 만큼 삶이 여유 있고 따뜻합니다.
이 글은 감사의 본질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이다."(감사와 믿음) 이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고 믿음의 크기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대목은 조건이 좋아야 감사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소유해야 감사할 수 있다는 우리의 통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정말이지, 조건이 좋고 소유가 많아야 감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통념은 착각이요, 자기 기만입니다. 어디,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 요즘, 우리는 더 많은 감사를 하고 있던가요? 사는 형편이 과거에 비해 풍족하게 된 요즘 부모에게든, 배우자에게든 늘 고마워하면서 살아가던가요? 오히려 가져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한 시대가 요즘 아니던가요?
모든 것이 풍족한 우리 시대는 신기하게도(?) '감사의 시대'가 아닙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감사의 코드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대머리도 감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유를 여섯 가지 나열했습니다. 1.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할 일이다. 2. 대머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날마다 우리의 앞이마를 쓰다듬어 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3. 빌어먹는 사람 치고 대머리는 한 사람도 못 보았다. 4. 엘리사도 대머리였다. 목회자들 중 대머리가 된 사람은 엘리사의 후손인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5. 물자를 절약할 수 있다. 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다.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대머리 말리는 데 드는 시간은 1분 미만이다. 6. 하나님을 편하게 해드린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마 10:30). 대머리는 머리숱이 적어 셀 것이 거의 없으니 주님을 얼마나 편안하게 해드리는 일인가.
영어의 '감사'(Thank)는 '생각'(Think)으로부터 온 말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불행한 현실에 처해도 깊이 think하면 thank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고 깊이 묵상하면, 똑같은 현실도 다르게 해석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똑같은 현실을 놓고도 열 사람은 "거민을 삼키는 땅"을 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심히 아름다운 땅,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보았습니다. 열 사람의 정탐꾼은 "신장이 장대한 대장부들"을 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의 밥"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요, 그 믿음을 바탕으로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고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꼭 이렇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관점으로 현실을 깊이 think하는 사람들은 부족하고, 결핍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열어가시는 미래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과 결핍의 현실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삶의 모든 현실은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은총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모든 현실 속에서 바로 이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가능성, 하나님의 축복을 믿음의 눈으로 think하면서 감사의 코드로 해석하십시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감사가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삶의 조건이 다른 사람보다 나쁘다고 투덜거리면서 은총으로 가득한 삶을 원망과 불평으로 오염시키고 있습니까?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며, 믿음의 크기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가능성, 하나님의 은총을 think하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의 마음의 열매이다.(감사와 은혜) 당연한 말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곳에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는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할머니 한 분이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세상 떠나신 어느 목사님의 미망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할머니는 93세로, 혼자 되신 지 35년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돌아가신 뒤로 참 힘들게 살았지만, 지금은 병점에 있는 어느 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해주셔서 거기서 지내고 계시는데, 이따금 답답하면 지하철 타고 여기 저기 다니신다고 합니다. 교통비 하시라고 얼마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제 손을 붙잡고 연신 절을 하시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느끼면 감사는 절로 나오는 법입니다. 따라서, 요즘 우리 시대에 감사가 없다면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은혜를 모릅니다. 부부는 서로의 은혜를 모릅니다. 국민은 조국의 은혜를 모릅니다. 음지에서, 노동현장에서, 고독한 곳에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의 은혜를 모릅니다. 교인들도 은혜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여러분은 성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지난 목요일 새벽기도회 때는 혼자 기도하면서 '나는 무엇이 감사한가'라는 주제로 묵상을 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현존했던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과 아름다움과 생명의 큰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역사 속에 계시지 않았다면, 인류의 이 엄청난 죄악을 도대체 무엇으로 씻어버릴 수 있었겠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셨고, 부활을 통해 지금도 영으로서 믿는 자의 심령과 삶 속에 늘 임재하신다는 것, 세계 곳곳에 숨어서 신앙의 양심으로 불의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으신다면, 도대체 선한 지향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으며, 선을 위한 투쟁의 능력과 열정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이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원하고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하게 보입니다. 부시도 아닙니다. 고이즈미도 아닙니다. 노무현도 아니고, 서방 선진국가들도 아니고, APEC 회원국들도 아닙니다. 핵무기의 단추를 누르려 하다가도 그것을 중단하게 하는 양심의 바탕인 예수 그리스도, 수없이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려고 하다가도 지갑을 열어 구제의 손길을 펴게 하는 연민과 자비의 자궁 예수 그리스도, 공의와 사랑의 영원한 원천이며, 자극이며, 격려이며, 확증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다면, 이 세상은 멸망하더라도 골백번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셨다는 사실만큼 감사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믿음의 부모를 두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소개받고 알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깨달은 것, 허물 많고 죽어 마땅한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게 된 것,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삶도 예, 하면서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게 된 것, 불의의 병기였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의 병기가 될 수 있었던 것, 나의 삶의 자리가, 죄짓는 자리나, 불의한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리인 것, 살다가 힘든 때도 있었고, 억울한 때도 있었지만, 실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가까워진 것 등,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그 은혜를 알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이미 감사를 잉태한 사람입니다. 계절도 시간도 없이,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는 사람입니다.
깡패를 만나 피터지게 얻어맞고 들어와서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텐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또 저 강도에게 연민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매튜 헨리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고 계십니까? 부탁합니다. 이제 그만 눈물을 흘리십시오. 이제 그만 원망하십시오. 이제 그만 속상해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은혜의 코드로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감사는 섭리를 수용하는 자의 삶의 방식이다.(감사와 섭리) 섭리를 수용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섭리를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사업의 실패도, 병이 드는 것도,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일단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긍정하는 것입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서 자폐 수영선수 김진호의 어머니 수기가 연재된 적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울고 또 울었는데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진호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초등학교 입학을 유예했고 세 번째 입학통지서가 날아온 뒤 더 이상 입학을 미룰 수 없었다. 입학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했다. 아홉살이나 먹은 진호는 여전히 엄마라는 말도 못할 뿐 아니라 글자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도에 매달렸다. 한달에 20일은 철야기도를 하고, 21일째 되는 날엔 눈덮인 북한산 정상에 올라 비닐을 덮어쓰고 진호가 학교에 무사히 다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1994년 3월2일. 입학식 후 담임선생님께 진호에 대해 쓴 장문의 편지만 전해주고 나왔다. 다음날 선생님은 “진호 어머니 얼마나 힘드세요. 어제 주신 편지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선생님은 내가 교실에 들어가 진호의 수업을 도와주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데 39일째 되는 날, 선생님이 말했다. “처음엔 별 생각없이 어머니께 수업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는 없네요. 저도 점점 불편하고요. 수업 중에도 진호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이제 교실 밖에서 진호를 지켜보는 것이 어떨까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진호가 보여줄 행동이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엎드려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진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 아이는 내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다. 네 소유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맡겨준 대로 키워라. 그 아이에게 나의 계획이 있다.” 내 입에서 회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서 진호를 때렸던 일, 말을 가르치겠다고 회초리를 휘둘렀던 일, 나와 통하지 않을 때마다 내 감정대로 학대했던 일들이 나를 불길에 던져 넣어 태울 것처럼 무섭게 타올랐다.
그러고 보니 자폐를 발견한 후 아홉 살이 될 때까지 한번도 진호를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고통스러워 몸부림쳐왔을 뿐이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뱃속 깊숙히 곪고 아린 고름이 빠져나와 버린 듯 후련했다. 하나님은 먼저 나를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하루 하루가 너무나 감사했다. 샤워를 하면서, 음식을 만들면서, 운전을 하면서, 청소를 하면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기쁨이 충만했다. 진호는 그때부터 내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라 나를 구원한 소중한 존재로 변해갔다. 하나님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도록 깨어진 후 나를 티끌처럼 날려버리게 되자 그때부터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기 시작하셨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자기 감정에 빠져 몸부림치다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 이런 것이 섭리를 수용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내 인생의 걸림돌"을 "나를 구원한 소중한 존재"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 이런 것이 섭리를 수용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섭리를 수용한다는 것은 체념하고는 다릅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긍정한 후에,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요, 새로운 미래,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라는 운명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체념적으로, 자포자기적으로 머물지 않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지고 고뇌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희망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셨으며, 예수님을 의지하며 따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부활의 현실을 창조하도록 자극하시고, 격려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면 결핍, 부족, 고통, 괴로움 속에서 부르짖더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로운 미래를 미리 내다보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함으로 아뢰는 삶의 경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요, 바로 그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편에 서서 승리케 하신 삶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삶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믿음의 눈과 묵상의 능력을 더욱 가다듬어 주소서. 무엇보다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섭리를 수용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계절도 시간도 없이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게 하소서. 감사한 만큼 우리의 삶이 여유 있고 따뜻하게 하소서. 조건에 매이지 않는 믿음의 감사로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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