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교회주의자 김 교 신 ***
" 통해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없는 형
식의 껍질이요, 그 진보적이라는 것은 세속주의이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
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조차도 되지
못한다. 한수양소요, 한 문화기관이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된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
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던가?"
- " 하나님의 중심으로 돌아오라" 성서조선 1935,12-
"그러나 저를 향하여 세례와 성찬예식이 어떻다느니, 교회 안에만 하나님의 말
씀이 임한다느니,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느니, 일요일 보다 토요일을 지켜야 되
느니 운은의 모든 거짓말과 허튼 수작으로써 승인을 강요할 때는 무교회인은 온
순한 대로 수수발관하지 못한다. 비상한 폭격력으로써 주위를 진동시킬 것이다."
- "건드리지 말라" [성서조선] 1940.5 -
I. 인간 김교신
우리는 앞의 몇장에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갱신을 역설했던 것을 찾아보았다. 이를 한 마디로 유교회주의적 교회
갱신을 역설한 교회지도자들이라고 하겠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는 입장에서
기존 교회의 혁신과 새로운 교회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존재성
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교직제도를 비롯한 세례와 성찬예식 등도 고수하면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의 교회갱신 운동을 유교회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거의 같은 시기에 교회 갱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군의 평신도
가운데 한국 교회 갱신을 제도적인 교회 밖에서 성서 연구를 통해서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무교회의 근거에서 교회 갱신을 역설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무교회 신앙운동은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 등이 추진하엿단. 조선에서의 무교회운동은 이들이 동인지 형식으로
[성서조선]을 창간한 1927년 7월부터 출발한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이해이다.
이 새로운 신앙 형태는 "무교회의"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무교회주의 기독교
"로 부를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기독교의 존재 가능성은 교회 없이도 가능
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교회주의는 일명 '전적기독교'이다.. 그 증거로는 내촌 선생과 기타의 무교
회인의 저서가 순진한 평신도와 조선 기독교회 교역자들에게 까지 좋은 영량이
되는 일로써 알 수 있고, 순조선산 예수쟁이의 선배가 동시에 순조선산 무교회
주의자인 것으로써 증명된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 사포리에서 부친 김염희와 모친 양신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시절을 거의 그곳에서 보냈으며, 1912년
네살 위인 한매양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다. 1918년에 함흥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한창이던 바로 그 달에 일본에
건너가 동경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그는 인생의 문제나 사회의
문제에 관한 유교적 해석에 깊은 회의와 번민을 했다.
그러던 가운데 1920년 4월 16일 저년 동경우시고매구에서 성결교회의 노방전
도 설교에 깊이 감명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동경 시래정 성결교회에 출석
교인으로 등록하고, 그 교회에서 같은해 6월 27일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되
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
야 할 교회가 성도의 공동체로 이루어질 수 있는 체질을 상실하고 세속적이고
인본적인 기구로 운영되는 것과 청빈한 목사를 내쫓는 교회 내분을 지켜본 초신
자 김교신은 교회에 대하여 크게 실망했다. 교회에 대한 실망 가운데 그는 교회
의 제도화 및 성직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김교신은 자
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해 년말은 당하여 나의 교회에는 일대 내분이 발생하여 온공한 학자인 청수
목사는 사임하고 권무술책에 능한 파가 그 지위를 빼앗은 사건이 있었다.
온갖 불의와 권모가 횡행하는 조선 사회에서 생장한 내가 유일의 이상적 생활
과 이상사회를 동경하여 기독교회에 입참하였던 신앙의 초기에 이러한 불의의
음모의 비열한 술책이 교회 내에서 행해짐을 보고는 단지 교회 탈퇴뿐 아니라,
과연 기독교 신앙의 근저까지 동요치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은 교회에 참석치
않고 하숙방에서 홀로 예배하였다고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나의
신앙 생활의 일대 위기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내분을 목격하면서 심한 신앙의 갈등과 번민을 하며교회 출석을 단
념하고 반년 동안 신앙적으로 방황하다가 그해 말에 일본의 무교회주의 창도자
내촌감삼의 문하에 들어가 1927년 3월 귀국한 때까지 그의 성서 강의를 청강하
게 되었다.
한편 그는 1922년 4월에 일본 명문교인 동경 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전과과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며, 1927년 3월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기간은 한편으로는 내촌의 성서강의를
통한 기독교 신앙형성의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박식한 학문의 섭취와 교
양을 통한 인격형성의 시기였다. 그 동기를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때는 마침 1921년 1월 16일부터 동경 대수정 위생회관에서 내촌 선생의 일생의
대사업인 로마서 강의가 시작되어 초회부터 나중까지 비상한 열심으로써 이에
참석하였다.
또한 대수정 위생회 강당에서 로마서 강의를 들을 때의 나의 열성을 말하면 현
하 교회에 출석함으로써 목사의 환사를 받는 것이 의례인 줄로 습관된 교회 신
자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가소롭게 생각될 것이다. 내촌
감삼 선생의 신앙과 교리 혹은 사상의 심원한데 이르러서는 내가 과연 그 몇 부
분을 학습하였는지 지금 이것을 단언할 수가 없다.
감히 말하노니 내촌감삼 선생은 나에게 '유일의 선생'이다. 다시 말하노니 나는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김교신은 내촌 문하에서 7년동안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일생동안 실
천하려고 노력했다. 내촌의 로마서 강의를 열성으로 경청하면서 기독교의 속죄
신앙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25년부텨는 내촌 문하 한국인 유학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신약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신앙 동인들은 김교신을 비롯하여 앞에서 말
한 함석헌,송두용,정상훈,유석동,양인성 등이었다. 이들은 귀국한 다음 성서를
통한 한국 민족의 영혼구원에 함께 일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1927년 7월 이들은 동인지 형식으로 월간 잡지 [성서조선]을 발간하기 시작했
다. 이 [ 성서조선]은 "1927년 7월 1일에 본지의 창간호가 반도를 향하여 첫 소
리를 외치기 시작하였을 때는 독자 이미 아는 바와 같이 6인이 동인지로 되였었
다." [성서조선]의 발간 취지는 "조선에 기독교가 전래한지 약 반세기에 이르렀
으나 아직까지는 선진 구미 선교사등의 유풍을 모방하는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
였음을 유감으로 알아, 순수한 조선산기독교를 해설하고자 하여 [성서조선]을
발간한 것이다. 원컨대 조선에다 기독교의 능력적인 교훈을 전달하고 성서적인
진리의 기반 위에 영구불멸한 조선을 건립하고자 하는 소원이 [성서조선]이라
는 형태로써" 나타난 것이다.
[성서조선]은 30쪽 안팎의 '동인 6인의 합작'지였는데, 1930년 5월호인 제16호
부터 김교신이 주필로서, 그리고 인쇄인으로서 책임 발행하는 개인잡지의 성격
을 갖게 되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매월 발행하면서 12년간이나 호마다
총독부 검열을 받으며 이어왔다.
그러다가 1942년 3월 30일 158호에 권두문 "조와(조와,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
"가 발단이 되어 전국의 수백 독자들과 더불어 체포되었다. 그 가운데 함석헌,
송두용,유달영 등 13명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소위 [성서조선] 사건이다.
"조와"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야. 몹시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바위틈
의 얼음도 녹아내리고, 담의 얼음도 풀렸는데 여름부터 친구였던 개구리들이 지
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얼어 죽어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며 몹시 가슴이
아팠으나,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몇마리 개구리가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었
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라고 기뻐 감탄하며 글을 맺었
다.
이글은 단순히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 아니라, 혹독한 일본의 온갖 식민
통치를 겪으면서 꺾이고 죽임을 당했으나 살아남은 몇명의 애국자들이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살아남은 몇마리의 개구리들이 왕성
히 번식하여 머지않은 여름에는 개구리 천지를 이루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 몇명의 애국자들만이라도 끝까지 견대어내면 민족정기와 혼백은 죽지 않고
머지않아 왕성케 되리라는 깊은 의미가 함축된 글이라고 해석한다.
조선총독부의 검열관은 이 글을 대수롭지 않은 내용으로 보아 검열을 통과시켰
고, 그래서 합법적으로 인쇄되어 전국 독자들에게 배포도 되었다.
그런데 한 일본 경찰이 이 글을 심상치 않게 여기며 [성서조선]을 조사해 본
결과 [성서조선]의 글 속에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판단하여
[성서조선]창간호부터 거슬러 올라가 전국 독자 명단을 압수하여 독자들을 검거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성서조건] 폐간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그
해 10월에 일어났다.
1943년 3월 29일 1년의 옥살이를 하고 불기소로 나온 다음 신앙동지를 격려하
러 전국을 순회하였다. 1944년 7월에는 함남 흥남 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하여
3,000여 조선 노동자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다가 장치프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II. 김교신과 내촌감삼
김교신은 "나는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분명한 어조로 역설하였다. 그에게서
유일무이의 선생은 일본 무교회주의 창도자인 내촌감삼이었다. 그는 선생 내촌
에게서 "복음의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가 10년에 걸쳐 내촌 선생에게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경'이었다. '복음'이었다. 설령 내촌 선생
의 마음속에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건설하며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할지라
도 내가 배운 것은 부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다." 그는 또 한편으로
는 스승으로부터 나라사랑의 정신을 배웠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애국자로서 일본을 열애케 하여 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교신은 "내가 본 내촌감삼 선생"이란 글에서 내촌 선생의 실체를 다음과 같
이 간추려 말하고 있다.
첫째, 김교신은 내촌에게 애국심을 배웠다고 한다.
우리는 본대로 내촌 선생의 전용을 말하라면 아무 것보다도 먼저 내촌 선생은
용감한 애국자이었다. 기독교적 성도라기 보다 첫째로 황실에 진심충성하고 국
민을 열애하는 표식적 무사, 대표적 일본제국 신민이었다. 그야말로 내촌 선생
에게서 애국자라는 요소를 뺀다면 '고자 내촌'이 될 것이다. 내촌 선생의 모발
부터 발톱가지가 전부 참애국자의 화신이었다고 우리는 본다.
위의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교신은 내촌의 애국심에 깊은 영향과 감화를
받았으며, 내촌을 "참애국자의 화신"으로 승화하여 그려내고 있다. 내촌은 자기
조국 일본을 열렬히 사랑하는 일본제국의 황국시민으로서, 일본 천황에 충성하
는 일본 무사의 후예로서, 전형적인 애국자였다.
그러나 일본이 김교신의 조국은 아니다. 일본은 유일한 내촌의 조국이었고, 그
를 그의 유일한 선생 내촌의 조국이었고, 그를 하늘 같이 떠받들고 있는 제자의
나라를 강탈하고, 짓밟고, 포악무도한 식민통치로 무참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조선인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며 착취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일본의 교회들과 기독교 양심들은 그들이 무교회
주의자들이든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의 만행을 눈감아두면서 천황에 죽
음으로써 맹세하였고, 천황의 전쟁광기를 박수와 만세로 열렬히 지원하는 것을
애국으로 생각했다. 내촌의 조선 침략국 일본에 대한 열렬한 애국은 일본에는
애국이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나라가 강탈되었고, 민족과 문화가
말살되어가던, 일본에 종속된 조선의 입장에서는 김교신의 내촌 숭배론을 어떻
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미묘한 민족감정이 생길 뿐이다. 조선 총독은 일본
천황의 충신이며, 일본의 열렬한 애국자이지만, 그의 천황에 대한 애국충정이
그가 통치하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조선인들에게 조선 총
독은 식민지 내에서의 최고의 강폭한 표본이였으며, 조선인의 고통과 분노와 원
통함의 원흉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총독을 일본 애국자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열렬한 황실 총정의 무사며, "대표적 일본제국식민"인 내촌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본심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아마도 김교신을 비롯한
소위 조선인 내촌 문화생들이 무교회주의자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라든
가 김인서가 조선장로교회 평양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 제 12권 제 4호,
1930년 7월호에서 내촌을 공격한 것은 당시의 조선 지성인들과 애국지사들의 내
촌의 무교회주의 표방과 그의 일본 황국신민으로서의 애국심을 한국인으로 못
마땅하게 보면서 공격하려는 공감대를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반일의식과 민족주의의 사상에서 야기된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교신이 의외로 강한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면서 흥분과 격앙적 논조
로 내촌미화와 내촌 숭배의 경지에 가깝도록 열을 내고 혈기를 부리며 반박하고
있으니 매우 야속하고, 김인서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매우 안타가울 뿐
이다. 김교신의 김인서의 글에 대한 반박은 필요이상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거
의 전체가 내촌미화의 논리로 되어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지성인이며, 당
시로서는 민족의 실체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야 했을 위인
이 민족주의와 반일, 독립사상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시대적 상황(식민지)을 이
해하지 못하고, 그리고 일본인들이라면 거의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적인 부정적
조선인관을 파악하지 못하고 철두철미 조선교회를 부정하고 내촌주의를 무조건
변호하려는 그의 태도이다. 그가 내촌의 대한 비판에 대해 싸움꾼으로나서서 정
도 이상의 내촌숭배론을 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일본인이라 하다라도, 그 이상으로 더 위인모충하는 필의 혈전을 펴
지는 못했을 덧이다. 그를 민족의 애국자로 보는 사람들이 이 점을 어떻게 해
석할 것인가 궁금하다.
여기에서 그의 저의를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하여 그의 글의 한 부분을 살펴보
자.
내촌감삼 선생의 신앙과 교리 혹은 사상의 심원한 데 이르러서는 내가 과연
그 몇 부분을 학습하였는지 지금 이것을 단언할 수가 없다. 다소간 안 것이 있
다 할지라고 그것은 비교적 후기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내촌감삼이 아무것이
아닐지라도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인 것은 초기부터 이것을 간취하였다....
일본 애국자에게 조선까지 걱정시키니까. 문제도 생긱는 것이다. 일본 애국자로
서 일본을 열애케 하여 두라. 증오도 생길 것이 없을 뿐더러 가장 아름다운 것
을 거기서 발견할 것이다.
일본의 애국자가 일본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심혈을 경주하는 자리에 외
방 사람이 일석을 점유하고 앉았음은 너무도 황송하고 너무도 엄숙한 사정이었
다. 애국자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서는 차지하였던 의자를 일본 청년에게
사양하고 나는 의자 밑으로 들어가거나 천장에 구멍을 뚫고서라도 듣게만 되었
으면 만족하겠다는 것이 나의 실감이었다.
김교신 자신의 감회어린 글을 읽으며 우리는 무엇을 느낄수 있을까? 스승에 대
한 제자의 존경 이상의 모습, 아니 일본 청년에 대한 조선 청년의 자기비하가
겸손의 표현인지 열등의식의 단면을 드려낸 것인지, 실망과 함께 그의 충성되고
일편단심의 제자의 도에 한편 감탄과 보내는 바이다.
둘째, 김교신은 내촌 외에는 그 누구도 그의 선생이 아님을 스스로 고배하였다.
그는 그의 유일의 선생이 그에게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었다고 확인
하는 아주 확실하고 훌륭한 제자이었다.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해 보자.
내촌식 무교회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배운 대로는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
는 것이 내촌식 무교회주의의 전부이다. 이 이하의 것도 아니요, 이 이상의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김교신은 내촌식의 무교회주의를 자신의 내촌식의 무교회주의를 자신
의 신앙형태로 만들기 위한 이론적 논증을 시작하였다. 그는 무교회주의적 구원
론이 성서의 진리요, 복음의 핵심이 오직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으로
만 집약된 것으로 확신하면서 기독교의 여러 전승이란 교리들을 부정하고 있다
는 것을 놀랍게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므로 어떤 형태
로든지 종교적 형식과 내용, 그리고 전승된 신앙고백이나 교리들이 하나님의 구
원의 역사를 좌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종교란 절대자에 대한 신
앙과 신앙의 표현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므로 종교에서 구원 자체만을 확
신하며 무교회적으로 나간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더욱이 기독교는 세례와 성찬
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므로 이런 종교적 의례행위를 배척한 기독교는 사실상 기
독교는 사실상 기독교가 아니고, 도덕강론체일 뿐이다.
유교의 도덕륙에 의해 뼈가 자란 청년으로서,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 관해서 아
무런 교육도 받은 바 없는 20대 평신도로서, 뿐만 아니라 노방전도를 통해서 기
독교 입문한지 6개월도 안되는 초신자로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인
구원의 문제를 왈가왈부했다는 것 자체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그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학교에 배운 일이 없고, 목회으 직분을 받은 일이 없으니 평신도요, 특수한
경험으로서 크게 성신의 역사를 받아 동포나 또는 이방 만민을 위하여 세움을
받었다는 확신이 없으니 평신도이다.
그러면서 그는 좀더 진지한 신학 문제에 관해서 언급했다.
다만 천당에 관하야, 사후 생명, 부활에 관하야 마치 금강산이나 팔레스틴을
구경하고 와서 이야기하듯이 골골이 사사치 넘어 자세히 이야기하는 교역자는
우리가 신용치 안하니 이도 평신도인 탓이다.... 저는 모든 일 까지도 소위 '
확신'이란 것은 없다. 저의 하는 일은 백퍼센티의 확신으로 하기 보다는 항상
50%의 의혹과 싸우는 것이 일의 대부분이다.
그렇다 바로 김교신의 기독교 이해란 평신도로서의 도덕적 삶에 충실한 생활로
서 만족하는 것이다. 김교신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내촌으로부터 무교회주의를
배운, 그가 표현하기를 "순수한 무교회주신자"인 일본 산본태차랑의 무교회주의
에 관한 글을 [성서강의]지 5월호에서 번역하여 [성서조선] 1937년 6월호에 게
재하며, 이것이 "우리의 무교회"라고 표명하였다. 산본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무교회주의란 것은 진정한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요, 무교회주의자란 것은 진
정한 크리스챤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의 유무, 세례의 유무등은 하등 관계 없
다. 무교회주의 곧 복음, 무교회주의자 곧 신자이다. 나의 무교회주의란 이런
것이요, 이 무교회주의자야 말로 내가 내촌 선생께서 배운바 최선, 최미, 최고
의 것이오 이 의미에서 '무교회주의'곧 '감삼.내촌'이라고 확신한다. 아니, 이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자신의 정신이라고 확신한다.
김교신은 산본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명료한 표현을 자신의 무교회 신앙으로 받
아 들이면서 "이것이 본산지의무교회주의이요 또한 우리의 무교회주의이다."라
고 그의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여러 진술들을 분석해 보면서 김교신은 그의 스승으로부터
기독교를 올바로 배운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 내촌의
도덕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내촌의 도덕주의란 일본 정신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임을 말할 것도 없다. 한국 보다 대략 3세기 정도 먼저 기독교가 일본에 전래
되었으나 일본의 무사정신, 신도, 선불교, 일본 재래 종교 등과 일본인 특유의
섬백성 근성의 배타주의, 황국신민정신의 혼합된 소위 일본 정신 때문에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일본 사회에 깊이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본인들
이 기독교 보다도 일본 정신을 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기독교
를 윤리종교의 한 종류로 받아들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기독교의 본질을
알고 있지 못했다. 신사참배냐 교회출석이냐의 선택에서 내촌 정도의 인물도 교
회 출석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천황이냐 예수냐의 선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 무사도의 집안 후예로서 내촌의
기독교의 예배, 성례,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일본 문
화를 부정하고 일본을 배반하는 역적 행위처럼 보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서 그는 기독교의 성례전과 교회성에 대한 신앙적 접근보다는 무교회적 접근을
시도했다. 내촌은 기독교를 하나님의 명령의 종교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양심의 종교로서, 아니 좀더 명료히 표현한다면, 히브리사상이 삭제된, 헬라화
된 인본주의적 도덕 종교로서 이해했던 것처럼 보인다. 김교신은 내촌으로부터
바로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그가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내촌주의자로 긍지를
갖고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항해서 싸워온 것이다. 당시 한국 교회의 골치거리
는 적극신앙단 (신흥우),원산파 신비주의(백남주,유명화), 황국주의 열광신비주
의, 무교회주의였다. 많은 교회들은 [성서조선]을 이단적 잡지로서 간주하였으
며 독서를 금지ㅎ는 교회도 있었다.
III. 김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
김교신에 관하여 논평한 글들의 공통점은 김교신을 조선의 민족주의자나 애국
자로 묘사하는 점이다. 그가 창씨개명을 끝가지 안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애국
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김교신이 혈기왕성하고 의기충천하던 19세의
청년으로서 기미독립만세가 터져 조선 방방곡에서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무차별로 총을 쏘아대는 일본 순사들과 헌
변들의 총성이 조선 천지를 진동할 때, 그리고 총에 맞고 칼에 찔려 내장이 터
지고 골육이 찢겨지며 선혈을 흘리며 죽어가는 수많은 순국 열사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더욱이 만세 사건으로 인해서 조선인들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검거
선풍과 탄압이 더욱 심해졌던 바로 그 달에 민족의 비극을 묵묵히 바라보며 일
본으로 유학갔던 그를 어느 기준의 애국자요 민족의 지도자로 보아야 할지 애국
자의 기준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우리는 종종 김교신이 그의 유일의 선생
내촌을 영웅화하고, 애국자화하고, 거의 신격화하는 위인모충의 글을 보았는데,
지금은 많은 김교신 연구가들이나 김교신주의자들이 바로 그러한 김교신투의 글
로 김교신을 영웅화하고, 애국자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를 무
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십여년간
교사였던 경력을 들추어 민족의 교사요, 민족의 선구자 운운하며 영웅화를 시도
하고 있다.
이런 미사여구의 수식어들과 정도 이상의 인물 서술은 오히려 그를 인물됨에서
신화됨으로 옳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중학교나 고등보통학
교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한 학교에 몇명 안되는 한국인 교사들의 인기와 감화력
은 어느 교사를 막론하고 지대했었다. 일본인 교장의 엄격한 규율주의와 일본
총독부의 조선인 교사들에 대한 성분검사와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나 조선인 형
사 끄나풀들의 감시 속에서도 일본인 교장이나 일본인 동료교사들의 잊을 수 없
는 인상을 남길 정도라면 그는 친일분자이거나 적어도 반일분자는 아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김교신을 인물 그대로 분석해 보려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걱정
이 다만 논리적인 가능성으로만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김교신 추종자들
이 그에 붙여준 "민족의 스승" 혹은 "민족의 교육가"로서의 걸출한 민족주의
정신(?) 은 이런 가능성을 뒤엎기에 너무 부족함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는 우리 민족에 거족을 남긴 인물들,특히 한국 신학사상에 어떤 형태로든
지 영향을 끼쳤으며, 무엇인가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을 추적하여 한국 신학 사
상의 오늘의 현주소를 찾아 보려는데 궁극적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
서 종종 한국 신학사가들이나 한국 기독교 교회사가들의 냉철한 비판적 분석과
객관적 평가가 많은 길잡이가 되곤 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몇몇 교회사가들은 냉철한 비판적 분석과 객관적
평가가 결여된 무조건 인물돋구식의 인물평전함을 종종 서글프게 보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런 학자들이 그들의 사가로서의 책임을 너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통속적인 전기작가적 수법과 필치를 갖고 인물연구를 하려 하기 때문이
다. 처음부터 이들이 학술적 능력과 학문 방법론이 결여된 사람들이었다면 이
들에 대한 사적 평가를 기대하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처음부터 이런 기대감에
없었다면 실망도 크기 않았을 것이다.
김교신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농학자 유달영 교수는 "애국자로서의 김교신"이란
글에서 "[성서조선]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구검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었
다. 그당시 일인 경찰의 그 잔인성은 세계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을 알려져 있었
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또는 폐인이 되었었다.
그들 악독한 경찰 앞에서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때 일인 경찰이 김교신에
게 '황국신민서사'에 대하여 물었다.
경찰의 물음에 대하여 선생은 즉석에서 '황국신민서사는 반드시 망국신민서사가
될 것이다. 이것은 두고보면 알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경찰들이 아연실색 하였
다. 그들은 또 일본의 만주에 대한 경륜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그런
데 선생은 서슴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서 일본은 만주 침략으로 인해서 망할 것
이 분명하다.'고 대답하여 심문하던 형사가 '김교신을 취조하노라면 취조 경관
인 내가 다 아찔해진다'라고 소감을 말했다는 등의의 기록을 보면 김교신을 영
웅화, 초인화하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유교수의 개인적 목격담이므
로 진술의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기록된 논증 자료도 없는 형펀
이다. 그러나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 광기적인 공격성이 전반도에 넘쳐있던 전
시요, 더욱이 식민지 지배국 경찰로서 이 사건을 불기소처분할 정도로 다루었다
고 한다면 이런 정도의 일왕 모독적 언사와 일본패망 운운의 표현으로 무사했
을까 하는 의심이 아니날 수 없다. 만일 김교신이 사실 그런 정도의 대담한 말
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기소처분을 받고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면 유달
영 교수의 진술은 자기모순에 바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인 경찰의 그 잔인성
은 세계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고 했는데 김교신이 이런 진술로 무사했다면
그 당시 일인 경찰은 세계에서 가장 인자한 경찰이었거나 혹은 김교신의 제자인
유교수가 너무 과장되게 표현한 것일 것이다. "망국신민서사"니 "일본은 망한다
"느니 하는 말을 취조하는 경찰에게 하고 살아 남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 그 당시는 일본에 의해서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때이며, 만흔 교회들과 학
교에서 신사참배거부로 어려움을 당하던 때이다. 1934년에 신사참배 거부로 목
포 영흥중학교가 폐쇄된 것도 그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35년 부텨는 신사 참배 문제로 한국 교회가 시련을 받기도 했다.
1937년 6월에는 서북계 기독교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금되었
으며, 1937년 10월 YMCA농촌사업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1938년 흥업
부락부 사건, 겅성계 Y 지도자들 구금, 그리고 같은 해 평양숭실전문학교가 신
사참배 반대로 폐쇄되었으며, 6월 에는 농촌연구회 사건으로 주기철 목사를 비
롯한 여러 목사들이 구속되었다. 드디어 총독부는 YMCA를 해산시켜버렸다.
평양장로회 신학교도 폐교되었다. 1940년에는 선교사들을 대거 축출하였고, 신
사참배를 거부하는 조선 기독교인들은 대량 검거하여 투옥시켰다.
일제는 조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점점 더하여 갔다. 1941년 1월에는 평안북도
지방의 애국적 교회들에게 주일 예배 폐재를 강요하고, 그 교회당을 가마니 공
장으로 징용하여 교회를 없애 버렸으며, 심지어 3월에는 반전 기도일 사건으로
외국 여자선교사들까지 체포하였다. 마침내 군국주의 일본은 12월 이른바 대동
아 전쟁을 일으켰다. 1942년 황도 문화원을 설립하고 9월에는 외국 선교사 전원
을 출국조처했으며, 천주교 신부들도 35명이나 검거하였다. 1943년에는 안식교
, 성결교도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로 조선 기독교
를 사실상 일본 교회의 지배아래 두었다. 1944년 감리교 신학교를 황도정신 교
사 연성소로 강제로 바꿔 사실상 한국에서의 기독교 말살과 일본 황국신민 충성
의 기독교로 한국의 기독교인을 사이비 기독교 신자로 만들려는 깊은 음모를 진
행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여건들과 일본의 계획적인 기독교 말살음모의 실
천의지가 무수한 박해와 순교자를 배출시킨 그 즈음에 사실 김교신의 [성서조선
]운 일본 총독부의 평가 수준에서는 일본 식민지 통치에 골칫거리가 되지 않는
매우 건전하고 별로 뚜렷하게 반일적이거나 철저히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
적인 잡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말은 첫째, 그 잡지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장애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잡지로서 당시의 전쟁, 평화, 인류,정의
,정치 등에 관한 날카롭고 비판적인 선구자적 목소리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오
려 일본인 무사요, 대표적 황국신민인 내촌을 숭배하고 떠받드는 한국 지성인들
이란 점, 둘째, 이들의 글은 신앙열기와 부흥회를 통한 성령강림의 뜨거운 불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 기성 교회를 견제한 맞불작전과 같은 효과를 가질 수 있으
리라는 분석 판단, 셋째, 이들이 한국 기독교에의 서양적 영향을 배척하고 일본
적 영향력을 자신들의 돈을 들여가며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일
본 총독부 측에서 보면 어쩌면 내심으로 고마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인,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투쟁을 무교회주의자
들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통하여 맡아서 감당하기 때문이다. 1927년 7월부터
1942년 3월 폐간될 때까지 15년간을 민족의 고통하는 모습이나.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문이나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논문 한편도 실음이 없이, 그리고
민족주의 정신고취 등의 문제로 일본인 경찰에 의해 혹독한 어려움을 당함이 없
이 평탄하게 이어온 것은 이 [성서조선]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한국기독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반일의식은 고사하고 오히려 김교신의 글 가운데 일부에는 한국 교회를 음해하
려는 저의도 깔려있는 듯 했다. 아마도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들이나 과격하고
공격적인 표현들은 얼마나 그가 [성서조선]을 이끌어가며 기성 교회들로부터 어
려움을 당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교신으로서는 일
본의 경찰로부터는 고통을 받지 않았으나, 조선의 교회들로부터는 사방에서 공
격과 비난을 받으면서 매우 착잡한 심정에서 방어를 위한 공격을 시도했는지 모
른다. 그가 [성서조선]에 발표한 변론들의 제목으로도 그의 마음 움직임을 읽
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성서조선]에 "내촌감삼론에 답하여"(1930,8-9),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
도"( 1935.4), "[성서조선'이 전하는 복음"(1935.5), "교회와 우리의 관계-
[성서조선]은 [성서조선]대로 (1935.7), "금후의 조선 기독교" (1936.2), "무교
회 문답"(1936.3) "가(가) 교회" (1936.5), "교회가 거룩하냐"(1936.6), "나의
무교회"(1936.9) "대립항쟁의 대상"(1936.11) "우리의 입장을 건드리지 말라"
(1936.11), "내가 본 내촌감삼 선생"(1936.11), "우리의 무교회"(1937.6)," 두
사람이 증언-무교회론의 방향"(1937.6), "건드리지 마라"(1940.5), "우리의 우
려"(1940.7), "비판 공격의 조종 "(1940.9),"낙담하지 않는다"(1940.12), 등외
에도 여러 편의 글들에서 무교회주의를 방어하였다. 그를 공격한 교회들은 장로
교,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회중교회, 평양기도단과 기타 여러 기성교회 신
자들이 있음을 그의 [성서조선]에 실린 반박 논단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여러 교단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던 어려움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는 드디어 1941년 8월 "나는 무교회주의자다" 고 선언했고, "무교회인의 진로
"(1941.10)를 제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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