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는 전라남도 장흥이었다. 화개장, 함평장과 함께 ‘남도 3대 장’으로 꼽히는 장흥 5일장이 서는 곳. 아직 개발 바람을 타지 않은 남도 끝자락이라 전통 시장 규모가 여전하고, 바다와 기름진 땅을 맛댄 지역답게 먹을거리가 늘 넘치는 곳이다. 장흥시장은 네이버에서 맛집 블로그를 운영하는 프리랜서 여행가 신영철씨가 소개해 줬다. 신씨는 네이버의 맛집 관련 여행 블로그 중 가장 높은 페이지 뷰를 자랑하는 여행 고수다. 그의 글을 스크랩한 네티즌만 1만2000명이 넘을 정도다. 그는 최근 장흥 관련 여행 책을 집필하느라 수시로 이곳을 드나들면서 장터의 먹을거리에 푹 빠졌다고 했다.
‘남도 음식이야 어디든 유명한데 왜 굳이 장흥이냐?’고 물었더니 “남해바다가 지척이어서 해산물이 풍족한 데다 천관산과 제아산 등 남도 명산에서 나는 산나물도 지금부터 풍년”이란 대답이다. 남도의 젓줄인 섬진강과, 장흥을 지나 남해로 흐르는 탐진강이 흘러 민물고기도 많이 잡히는데, 이 재료들도 모두 장터로 모인단다. 산과 바다, 강에서 막 올라온 재료들이 한데 모인다는 얘기다. 맛 내는 데 제일 중요한 게 싱싱한 재료라면, 장흥은 남도에서도 좋은 조건을 갖춘 셈이다.
산과 바다가 한데 만나니 먹을거리가 늘 풍년 장흥읍에는 장이 두 개 선다. 2와 7이 들어가는 날에는 5일장이 열리고, 토요일마다 따로 장이 선다. 5일장과 토요시장은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데, 이왕 북적이는 장터 풍경을 보고 싶으면 4월 17일(토요일)처럼 두 시장이 함께 서는 날 가면 된다. 에디터는 3월 12일(금요일)에 5일장을 찾아 이튿날 토요시장까지 구경하고 왔다.
장흥 장터에 찾아가려면 내비게이션에 ‘장흥읍사무소’를 입력하면 된다. 읍사무소 바로 앞에 토요시장 간판이 보이고 간판 따라 길 안쪽으로 들어서면 거기부터가 전부 장터다. 장은 크게 두 갈래 길로 나뉜다. 한쪽에는 할머니들이 직접 캔 채소와 나물로 좌판을 벌이고, 반대편에는 해산물 시장이 들어섰다.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장터 뒤쪽에는 장흥 특산품인 한우를 파는 정육점과 식당들이 모여 있다. 해산물과 일부 채소 시장은 상설장이고, 할머니들의 좌판은 장날에만 구경할 수 있다.
시골 장터는 서울 토박이에게 한없이 낯설고 신기했다. 도넛보다 ‘도나스’라는 간판이 더 어울리고 어묵보다는 ‘덴뿌라 사세요’가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곳에서 해남 특산물인 호박고구마를 한 트럭 싣고 새벽같이 달려온 사람도, 제주에서 어젯밤 마지막 비행기로 가져온 한라봉을 좌판에 펼친 사람도 외지인에겐 색다른 볼거리였다. 오전 9시 즈음인데도 이미 길 양편에는 좌판이 가득 들어섰다. 여든을 앞둔 할머니들이 목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새벽 4시부터 자리싸움을 벌일 만큼 치열한 삶의 터전, 그곳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성미 급한 봄나물은 벌써 새순을 돋웠다 5일장에 들어서니 계절답게 봄나물이 풍년이었다. 좌판마다 달래며 돈나물, 취나물 같은 대표 봄나물들이 가득하다. 이곳 시장 봄나물은 크게 두 군데서 온다. 제일 많은 물량은 ‘장흥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제암산이나 천관산에서 온 산나물이다. 한 할머니에게 말을 붙여보니 제암산은 지금 온통 쑥으로 덮였고 천관산은 고사리가 풍년이란다. 특히 천관산은 나물 종류가 워낙 다양하고 양도 많아서 산나물 체험 마을을 운영해 벌이가 쏠쏠하다는 귀띔.
나머지는 대부분 좌판 할머니들이 손수 텃밭에서 키운 것들이다. 나물 파는 할머니가 100명도 넘게 모인 풍경이 신기했는데, 알고 보니 군청에서 전통 시장을 활성화하려고 ‘할머니 장터’를 만들었단다. 채소 직접 기르는 할머니들을 골라 이름표를 나눠주고 그 이름표를 가진 사람만 좌판을 벌일 수 있게 한 것. 도매 물건이나 중국 나물은 좌판에서 팔 수 없다. 대신 장에 나와 물건 파는 할머니에게는 군청에서 2만원씩 지원금을 준다. 비옥하고 볕 잘 드는 남도에서 손맛으로 키운 소박한 먹을거리, 천원짜리 두어 장이면 한 봉지 가득 인심이 담긴다. 나물 사다 직접 요리해도 좋고, 시장에서 구한 재료로 바로 요리해 주는 장터 안 식당에서 미리 봄맛을 느껴도 좋다. 반찬 인심 후한 남도답게 식당마다 봄나물 반찬만 열 가지가 넘게 나온다.
남도의 봄은 바다에서부터 온다 도시에 사는 기자는 산나물에서 봄을 느꼈지만, 장흥 토박이에겐 바다에서 나는 해초가 봄의 전령사일 터다. 좌판마다 널린 해초 중에서 대표 봄맛을 추천해 달라 했더니 다들 감태를 골라준다. 서울 사람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토박이들 밥상에는 빠지지 않는 봄 해초다. 양식 물량이 거의 없어 전부 자연산인데 4월 중순까지만 채취할 수 있어 그만큼 귀하다. 파래처럼 무쳐 먹기도 하고, 전을 부치거나 장아찌로도 담가 먹는다. 조리할 자신이 없어 특산물 판매장에서 파는 감태 무침을 한 통 샀다. 파래보다 조금 짭쪼롬하고 맛있었다.
3월 중순부터 제철이 시작된 주꾸미, 남도 물량의 대부분을 소화한다는 키조개도 한창이다. 조개 껍데기를 까는 아낙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니 대뜸 조개 자랑에 여념이 없다. “득량만에서 캐왔는데, 거기는 사람 얼굴만한 조개로 유명해서 근처에 터 잡은 5개 마을 사람들이 조개잡이만으로 1년을 먹고 산다”고 했다.
장흥에서는 10년 전만 해도 키조개가 워낙 흔해서 인기가 덜했다고 한다. 득량만 뱃사람들이 약주를 과하게 한 다음 날 아침상에 해장국으로 키조개탕을 올리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가이바시’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수출돼 인기를 끌면서 명성이 높아져 요즘은 국내 수요도 부쩍 늘었다. 여행 블로거 신씨는 “5월부터는 조개 물량이 달려 냉동 재료가 많아지니 지금이 싱싱한 키조개를 맛볼 마지막 기회”라고 귀띔했다. 말하자면 장흥의 마지막 봄맛인 셈이다. 키조개는 쫄깃한 식감 살려 회로 먹어도 좋고 살짝 구워 고소한 육즙을 느끼며 먹어도 맛있다. 이곳 토박이들은 김에 싸 먹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