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와 전쟁 세대 복고풍 드라마 주제가로 대히트방송 연출가 이남섭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1절)
그 옛날 옥색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
봄 나비 나래 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
날으는 낙엽 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네
무심한 강물 위에 잔주름 여울지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50대 이상이면 잊혀지지 않는 1970년대 TV드라마와 주제가가 있다. 바로 <여로>이다. 머리에 기계충 구멍이 난 바보 ‘영구’(장욱제), 묵묵히 내조하며 한 많은 삶을 산 그의 색시(태현실) 주연으로 유명한 드라마와 이미자가 부른 그 주제가 <여로>가 그것이다.
1972년 4월 3일 첫 방송된 KBS-TV 드라마 ‘여로’는 당시 연출가와 작가 겸업을 했던 이남섭씨가 연출 겸 극본을 맡았던 일일연속극이다. 불우한 운명 속에 태어난 분이란 여인이 가난에 못 이겨 술집 작부, 사창가를 맴돌다 남의 집 씨받이로 들어갔으나 쫓겨나는 수난을 겪다가 부와 행복을 되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드라마 속의 영구는 지금도 코미디로 리메이크될 만큼 화제의 인물이었다. 부스럼을 앓아 동그랗게 벗겨진 더벅머리에 눈은 게슴츠레하고 몸은 굼뜬데 ‘영구 없다’며 혀 짧은 소리를 내다 동네아이들에게 두들겨 맡기 일쑤다. 그래도 자기 마누라 귀한 줄은 알아 ‘색시야’를 입에 달고 다닌다.
90회로 예정 되었던 ‘여로’는 시청자들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방송 횟수를 두 배 이상 늘렸다. ‘여로’는 100% 스튜디오 내 제작으로 진행됐던 그 때의 관행을 깨고 경기도 송추 등에서 야외촬영을 하는 방송사적 의미도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이런 흐름의 드라마는 ‘여로’가 처음은 아니다. 3개 TV채널 중 뒤늦게 출발한 MBC가 1969년 ‘개구리 남편’이란 불륜 소재 극으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이듬해 TBC가 ‘아씨’로 일일극의 틀을 굳혔다.
‘여로’가 ‘아씨’ 성공에 힘입어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부터 6·25전쟁을 거쳐 1960년대까지를 훑는 복고풍드라마란 발상이 같다. 또 고생하며 험한 삶을 버텨낸 현모양처가 주인공이란 점도 다르지 않다. 그 무렵 중·노년층 여성들에게 대단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일일드라마 특성상 줄거리를 자세히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대본이 남아있지 않고 영상물도 1~2회분만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대본을 풀어놓은 듯한 소설 ‘여로’(인문출판사·1973년)가 남아 있어 작품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1942년 무렵 여주의 감나무골에서 동네 유지로 행세하던 어진 성격의 최 주사(정민 분)는 전처소생인 바보 아들 영구, 새로 맞은 부인 윤 씨(박주아 분), 윤 씨의 친딸인 영숙(권미혜 분)과 살고 있었다. 그러나 최 주사는 애물단지인 영구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주인공 분이는 돈에 팔리다시피 부잣집 최 주사 댁으로 시집온다. 시아버지는 어질고 현명하건만 재산이 영구에게 갈 것을 염려한 계모 시어머니, 이복 시누이는 분이를 내쫓으려고 시도해 고통을 당한다. 게다가 분이를 빼내어 이 집에 팔아먹은 달중이는 분이의 지난날을 빌미삼아 겁탈을 시도하는 등 끈덕지게 집적거린다. 여기에 최 주사 친구 아들인 상준(최정훈 분)이 독립운동가가 되어 집에 머슴으로 숨어 있고, 이를 잡으려는 일본 형사들의 괴롭힘이 드라마 중반부 고난의 핵심을 이룬다. 시아버지가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된 틈을 타 시어머니와 달중이가 분이 과거를 들춰 그녀는 쫓겨난다.
종반부는 시간을 건너뛰어 전쟁 중 영구와 아들(기웅)의 구두닦이로 연명하는 최 주사 가족과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작은 식당을 연 분이가 아슬아슬 만나지 못한 채 부산에서 살고, 여기에 군인이 된 상준이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며 긴장감 속에 극이 펼쳐진다.
6·25전쟁 통에 이들 가족의 재회는 희박해져 갔다.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스칠 듯 말 듯 만나지 못하는 분이와 영구. 이들의 사랑은 ‘분이가 국밥집을 하며 큰돈을 모아 사회 환원했다’는 신문기사가 실리면서 다시 만난다.
악극 ‘여로’로 크게 인기
결말 처리가 꽤 대중적이다. 아들이 대학에 수석입학하면서 식당업으로 억대 부자가 된 분이가 가족들과 만나고 못된 인간들이 개과천선하며, 분이 재산으로 고향에 땅과 집을 도로 사서 그 집에 모여 사는 내용으로 막을 내린다.
연출자 이남섭은 가끔 자신의 연출작을 직접 집필했다. ‘여로’는 작가적 문필력보다 매회 긴박한 사건들로 끌어가는 연출가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는 ‘아들 낳고 딸 낳고’(1971년) 등 코믹한 분위기의 작품들을 잘 썼다.
그가 노랫말을 쓴 주제가 <여로>는 백영호 곡으로 이미자가 불러 히트했다. 드라마 인기가 주제가로 이어져 재미를 본 것이다. ‘그 옛날 옥색 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로 나가는 이 노래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 가사가 구구절절 이어진다. 여기에 이미자의 맑고 애조 띤 음색까지 곁들여져 듣노라면 가슴이 뭉클해온다. 특히 드라마 ‘여로’의 여주공인 분이처럼 한 많은 삶은 살아온 여성들에겐 자신의 지난 삶을 얘기하는 것처럼 들려 눈물샘을 자극한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리듬의 이 노래는 드라마 열풍으로 인기 대열에 올랐다. 또 극중의 영구 흉내를 낸 심형래의 ‘소쩍 꿍 소쩍 꿍~’ 하는 전통가요 <낭랑 십팔세>도 한동안 상종가를 쳤다. 40대 이상의 중년이라면 그 코미디의 바탕 소재가 된 영구와 ‘봄이 왔네 봄이 와~’로 나가는 <처녀총각>을 떠올릴 것이다.
2001년 ‘여로’는 악극으로 부활, 또 한 번 눈길을 모았다. 1991년 SBS 탤런트 공채 1기로 연예계에 입문해 SBS-TV 드라마 <은실이>의 빨간 양말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성동일이 주인공 ‘영구’역을 소화했다. 또 김현식·김광석 등 대중음악 가수 공연과 앨범 제작에 1천 회 이상 참여한 피아노·아코디언 연주자 윤효간씨가 악극의 음악감독과 작곡, 편곡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