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 출처 : 조선일보 2001년 3월 26일자
살고싶은 도시 4
걷고싶은 도시 / 덴마크 코펜하겐
◆사진설명 : 많은 시민들이 천천히 걸어서 오가는 호이브로 소광장.스트로이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동서 양쪽으로 뷔토브 광장과 뉘토브 광장으로 연결된다./코펜하겐
/한영희기자
계단-육고-車 없는 ‘걷는 사람 천국’
그곳엔 계단이 없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엄마들이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곳. 당연히 육교와 지하도에 대한 개념이 아예 들어있지 않았다. 도로 횡단지점의 신호등은 보행자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고,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는 야간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걷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계단을 없애고 발길을 가로막는 설치물도 없앤 도시, 코펜하겐은 모든 것이 걷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다듬어진 도시였다. 모든 건물은 시청 종탑보다 낮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건물 높이를 6층으로 제한한 800년 역사의 도시는 ‘아름다운 탑이 보이는 거리’가 됐다.
인구 60만명, 주변 메트로폴리탄 지역을 더해 160만명의 바이킹 후예들이 살고 있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발트해 연안을 끼고 걸어서 하루면 시내를 다 둘러볼 수 있는 종로구 3.5배 정도의 넓이다. 안데르센, 레고 장난감 등이 유명하지만, 유럽인들에게는 가장 성공한 ‘보행자 도시’로 꼽힌다.
그 성공의 중심에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보행자 전용도로 ‘스트로이’가 있다. 덴마크어로 ‘산책’이란 의미를 가진 스트로이는 콩겐스 뉘토우광장에서 시청앞 보행자 광장까지 5개 보행자 전용도로를 통칭하는 말이다. 시민들은 “스트로이를 다녀오지 않고 코펜하겐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사람의 보행 한계거리는 보통 500m 남짓이다. 이를 넘으면 피곤을 느끼고 걷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1.4km에 이르는 스트로이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끝까지 걷는다. 어떻게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들의 걷는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보행 인프라 구축이 비결이다. 폭 10미터 안팎의 길 양쪽 중세풍 건물에는 고급명품점, 레스토랑 등 2000여개의 작은 가게들이 살아 숨쉬는 도시의 갯벌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디자인하지 않은 듯한 디자인! 보행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길에는 조형물이나 벤치가 없다. 시설투자에 막대한 돈을 들인 것도 아니다. 시측은 새 도로 건설이나 도로 확장 계획이 전혀 없으며, 2000년 도로 유지관리 예산도 80억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560m 인사동길 도로치장에 40억원이나 들어가는 우리 현실. 문화가 빈곤할수록 겉치레는 늘어난다.
여기에 덧붙여 1960년대에 자동차 급증으로 몸살을 앓았다는 사실, 세 번의 대화재로 중세풍 건물들이 지어진 지 100년밖에 안된 점 등의 뒷얘깃거리가 있다. 또 1960년대 과다한 공공투자로 인플레이션에 직면하자 보행자 가로망 확장, 역사 건축물의 보존과 활용, 교통체계 개조 등으로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1962년, 스트로이에 내려진 차량통행금지 조치도 그 일환이다. 자동차를 줄이면 환경피해가 줄고 관광수입과 도심 경제는 반대로 살아날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곧 교통전문가들과 상인들의 맹렬한 반대가 이어졌다. 주변 도로의 교통이 악화되고 자동차통행금지로 영업손실이 초래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도 일반 시민의 지지를 업고 62년 11월부터 시범실시에 들어간 이 세계 유례없는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상인들은 적극적 지지자로 돌아섰고, 2년 뒤 스트로이는 세계 최초로 영구적인 보행자 전용도로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시청사 앞 보행자광장에서 콩겐스 뉘토브광장으로 이어지는 3개의 거리에 국한됐지만, 68년 그라브로드레토브와 피올거리가 보행자 전용구역과 도로로 지정됐다.
이후 62~67년 사이 1일 평균 보행자수가 40%나 증가했다. 이제 상인들은 ‘코펜하겐 시티센터’를 통해 관광청 산하기구 ‘원더풀 코펜하겐’과 협력하면서 거리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코펜하겐은 작은 도시여서 상점과 문화예술인 참여 행사가 중요합니다. 하루 10만여명의 내외국인들이 뭔가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이곳을 찾게 하자는 거죠.”(키에스턴 톡스베 시티센터 사무총장)
저비용으로 ‘보행’을 ‘문화’로 업그레이드한 도시. 다른 도시와 다를 바 없었던 코펜하겐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통해 유럽의 보행자 도시로 재출발했다.
◆코펜하겐의 성공비결...보행자도로-전용구역 지정
스트로이는 대형백화점보다 작은 명품점이나 부띠끄, 패션가게들이 번창한 곳이다. 보행자 도로와 보행자전용구역 설치가 가져온 성공이다. 도자기 명품점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250년된 로열 코펜하겐, 꽃을 사기 위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꽃장식에 자부심을 가진 테에 아나슨 꽃가게, 100년동안 한 자리에서 빵을 구워내는 라인반하원, 은그릇, 모피, 가구, 패션에 골동품, 고서적까지 갖가지 명품점들과 함께 싸구려 할인마트나 기념품 코너도 공존하고 있다.
작은 가게들의 성공은 보행자전용도로와 역사적 건물의 재생을 연계시키는 계획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세 번의 대화재로 절반 이상 파괴되었던 도심은 새롭게 재건되었지만, 건축물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 지어졌고 주택들은 투기목적으로 부실건축되었다. 오래된 건축물을 재생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1972년까지 2700동의 건물이 수복되었고, 1980년까지 모두 5000동 이상의 건물이 재생되었다.
현재에도 도심 곳곳에는 재생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오래된 건물의 재생으로 스트로이는 사람과 자본이 공존하는 친근하고 인간적인 스케일을 가지고 작은 가게들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그 바탕에는 1947년에 시작된 ‘핑거플랜’이 있다. 도시과밀화와 도심집중을 억제하고 손가락 모양으로 벌려진 5개의 대중교통축에 도시개발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원리를 토대로 삼고 있는 핑거플랜은 직주근접의 원칙에 따라 대중 교통축 가까이에 주거지나 직장을 배치해서 전체 이동시간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이 플랜에 따라 도심에서 손가락모양으로 벌린 5개의 대중교통축에 접해서 도시를 개발했다.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는 보행자도시 코펜하겐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최정한·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