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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칼빈이 다녔던 학교 |
관련된 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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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뻬뜨 초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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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 |
빠리 마르슈대학 |
라틴어 교사 마뚜랭 꼬르디에르가 가르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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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떼귀대학 |
중세 스콜라주의 학풍을 고수하는 수도원 학교. 열악한 환경에서 4년 동안 공부하여 19살의 나이에 문학사가 된다. |
1527 |
오를레앙 |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를레앙으로 간다. 멜키오르 볼마르는 칼빈에게 헬라어 공부를 권한다. |
1529 |
부르쥬대학 |
친구 프랑수와 다니엘과 니꼴라 뒤슈맹과 함께 안드레아 알키아티가 강의하고 있는 부르쥬로 옮겨갔다. |
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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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아버지가 사망된다. |
1533 |
오를레앙 |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
1) 칼빈의 회심
칼빈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갑작스러운 회심”으로 표현한다. 무엇보다 그의 회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운 방향을 여시고 말씀으로 그의 완고한 마음을 사로잡아 강권적으로 몰아가신 것이었다. 특히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로 변화되는 즉 의지의 전적인 개조와 갱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자신이 회시한 이후에 참된 경건에 대한 강한 욕구와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칼빈은 “깊은 진흙의 수렁”과도 같은 “교황제도의 미신”에서 벗어나 비로소 “참된 경건의 맛과 지식”을 얻었고 “순수한 교리”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처럼 변화된 자신을 가리켜 참된 경건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가진 “초보자와 초심자”로 표현하였다. 즉 참된 경건과 교리 즉 복음적 신앙 안에서 거듭난 “초심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칼빈은 1534년 5월 4일 고향 노용 성당에 가서 자신의 성직록을 포기하게 된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공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이 사건은 그 이전에 이미 칼빈의 회심이 일어났음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1533년과 1534년 사이 어느 한 시점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회심의 첫 시작인 중생의 체험을 통해 새 사람으로 변화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2) 칼빈의 초기 저술들
최초의 칼빈 저술은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글에 대한 주석인데, 1532년에 출판되었다. 뷔데와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적 학자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그의 소망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칼빈의 첫 저술은 분명 훌륭한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학자들에게 주목 받지 못했다. 칼빈은 그 인문주의를 더 이상 성취해야 될 목표로 삼지 않고, 자신의 성경적 사고를 표현하고 설득하는 수단으로만 삼았다.
칼빈의 최초의 신학저술은 “싸이코파니키아”인데, 이것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혼이 죽음 이후에 잠잔다고 주장한 당대의 어떤 재세례파의 주장에 반대하여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깨어있음을 논증하는 글이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경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추천서문은 칼빈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신약성경의 두 번째 추천서문도 1545년 이후부터는 칼빈에게 돌린다. 그는 이 번역본의 개정작업에도 참여하였다.
“기독교강요”는 1536년에 바젤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으나, 그 책의 서문은 1535년 8월 23일자로 되었고,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이 라틴어 초판은 바른 속도로 매진되었는데, 이것은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출판할 때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칼빈은 기대감을 가지고 출판했던 자신의 최초의 인문주의 저술에 의해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독교강요”초판(1536년)에 의해 유명하게 되었다.
칼빈이 이 책을 완성한 장소는 장서가 많은 자신의 친구 루이 뒤 띠예의 집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차례의 개정중보를 거듭하여 1559년에 라틴어 최종판이 완성된 이 “기독교강요”는 당대뿐만 아니라, 이후 세계 역사 속에 칼빈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으며, 불후의 명작으로 남게 된다.
3. 칼빈의 제1차 제네바 개혁(1536-1538)
“기독교강요”의 저자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제네바의 개혁가 파렐은 칼빈을 찾아와 함께 동역하는 것을 강권하였고 이에 설복당한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칼빈은 파렐의 강권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욤 파렐 선생이 제네바에서 나를 붙들었는데, 그것은 충고와 권유로써 뿐만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높은 데서 손을 내밀어 나를 잡아채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저주로써였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로서 칼빈이 처음 맡은 직책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봉독자”로 시작했다. 칼빈은 1536년 10월 1-8일 사이에 이웃 도시인 로잔느에서 벌어진 신학논쟁에 참석하여 교부들에 대한 로마교 학자들의 잘못된 인용을 수정할 만큼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과 암기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로잔느 시의 성공적인 교회 조직에 힘입어 칼빈은 1537년 1월에 “제네바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규정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여 제네바 시의 소의회와 200인 의회에 제출했으며, 1개월 후 자신의 “기독교강요” 초판의 축소판과도 같은 “신앙교육과 고백”을 출판했다. 이 불어판의 라틴어 번역판은 다음 해인 1538년에 바젤에서 “교리교육서 혹은 기독교강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에 칼빈은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문제로 삐에르 카롤리와 악연을 맺게 된다.
1538년 1월 4일에 제네바 시 당국은 목사들이 교인을 성찬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금지시켰다. 제네바 시는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이웃의 힘 잇는 도시 베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급기야 목사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베른의 예배 의식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결정을 수용하지 않고 반항한 목사 꾸로에게 설교금지 처분이 내려졌으나, 불복했기 때문에 투옥되고 말았다. 이러한 설교금지 결정에도 불구하고 부활절에 칼빈과 파렐이 각각 삐에르교회와 제르베교회의 강단에 올라가 성찬 집행을 거부하는 사건을 일으키자, 결국 4월 23일에 제네바 시 당국은 칼빈과 파렐과 꾸로에게 삼일 내에 제네바 시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추방된 칼빈과 파렐은 곧장 바젤로 떠났다.
4.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 거주(1538-1541)
칼빈은 7월 초에 자신을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로 초청하는 마르틴 부써와 볼프강 카피토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거듭된 부써의 요청을 계속 거절할 수 없었다. 칼빈은 그곳에서 성경 교사의 직무를 동시에 맡게 되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성경교사로서, 주석가와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열심히 일했다. 1539년 7월 29일에 자청하여 이 도시의 시민권을 얻었으며 헌법의 규정에 따라 지역의 거주민으로 등록하였다.
3년 동안 칼빈은 자신보다 17세나 연상인 부써와 함께 같은 도시에서 이웃으로 지내면서 그가 얼마나 큰 인물인지 깨닫게 된다. 스트라스부르크 대학 신학부 교수였던 쟈끄 꾸르부와지에르의 가장 인상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부써를 공부한 다음에 칼빈을 읽으면, 그가 꼼꼼히 따져 가지들을 치고 잘 정리했으며, 사상적으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한 또 하나의 부써 같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칼빈은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1539년 “기독교강요”의 두 번째 라틴어판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1536년 초판의 3배 분량이었다. 이 두 번째 판의 일부는 “알쿠이누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하였는데, 그것은 박해 받고 있는 그의 조국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라틴어판 “기독교강요”는 2년 후인 1541년에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불어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칼빈이 직접 번역했다.
같은 해에 칼빈은 또한 시편 찬송집을 편집하여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후에 개혁교회 시편 찬송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칼빈은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부합하고자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도 썼는데 그것이 1541년 제네바에서 출판된 “성만찬 소고”이다.
1539년 2월 그는 자진하여 스트라스부르크의 시장인 스투름과 함께 개신교와 로마교 사이의 반목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 위한 준비 모임이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가기도 했다. 거기서 칼빈은 비록 교리적인 면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우정을 나누며 교제하게 될 인물 멜랑흐톤을 만나게 된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아 부인 이들레뜨 드 뷔르와 함께 아들과 딸을 데리고 스트라스부르크로 왔다. 1540년 봄에 그가 페스트로 사망하자, 1540년 8월 6일 칼빈은 미망인 이들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병약한 그녀는 1549년에 사망했다.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칼빈의 결혼생활은 두 사람 모두 질병으로 고생한 것 외에는 행복했던 것 같다.
제네바 시는 칼빈을 추방한지 1년도 채 못 되어 그를 다시 불러들이는 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제네바 시 의회는 1540년 9월 21일 소의회는 칼빈이 돌아와야 한다고 표결로 결정했다. 칼빈은 여러 방면에서 제네바로 돌아오라고 계속 압력을 받았다. 파렐뿐만 아니라, 꼬르디에르와 비레 역시 칼빈에게 제네바로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1540년 10월 24일에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면 파렐이 원하는 일, 즉 제네바로 돌아가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가 자주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저는 제 심장을 도살된 것처럼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칼빈의 좌우명이 된 이 말은 그의 기념주화에 새겨진 그림이 되었다. 그 기념 주화에서는 심장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그려져 있고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파렐의 강력한 8월 25일자 편지로 인해 마침내 칼빈은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541년 9월에 제네바를 향해 출발했다.
5. 칼빈의 제2차 제네바 개혁(1541-1564)
1) 교회의 조직가
칼빈은 1538년에 떠났을 때보다 더 성숙한 사람으로 1541년에 제네바로 돌아왔다. 신학적으로 발전하고 깊이를 가졌을 뿐 아니라 교회 예식문을 작성하고 교회음악을 사용하는 목회적 경험을 하였으며 대학교육의 경험을 가지고 돌아왔다. 독일 남부 교회들과 루터파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고 협상과 외교에 참여하는 경험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전처럼 분명하고 단호하였지만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 자신의 길을 터득하였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분인 시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초청한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신앙의 가르침에서 뿐 아니라 교회의 조직과 구조에 있어서의 개혁을 동반하였다. 돌아온 수개월 안에 3가지 주요한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 문서들은 바로 교회법규, 교리교육서, 그리고 기도문이다.
(1) 교회법규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시에 도착하자마자 개회 중인 시의회에 참석하였다. 의원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 자리에서 제네바 교회를 위한 교회법규를 초안할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그 필요성을 그가 얼마나 긴급하게 생각했느냐를 잘 보여준다. 3주 안에 그 법규의 초안 발의를 이끌어내었다. 시의회에서 그 초안이 검토되고 수정되어졌다. 시의회와 목사들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지고 소의회에 의해 다시 수정을 거쳐 마침내 1541년 11월 20일에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러한 법규의 내용들은 그 후에 제네바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약간의 수정과 더불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교회들의 모델이 되었다.
① 4중적 사역
목사는 말씀과 성례의 집행 그리고 권징을 감독하는 책임을 지게 하였다. 교사는 성경 또는 초급반 교사들을 말한다. 장로는 교회법규의 시행을 감독하는 책임을 졌다. 집사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며 이들을 위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책임을 졌다.
② 목사회
종교개혁 초기의 혼란 가운데 이해와 일치를 이루지 못할 때에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일치와 단결을 촉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작으나 연합된 목사회는 제네바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다.
③ 종무국
각 시의회에서 선정한 12명의 장로들과 8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다. 시의원들은 시의 각 구역으로부터 선출되었기 때문에 모든 지역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시민들의 신앙과 도덕적인 개혁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2) 교리교육서
1541-1542년 겨울에 칼빈은 교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사람들은 교리문답서 인쇄물을 구하기 위해 서둘러 인쇄소로 찾아왔다. 루터는 소교리교육서를 목사가 질문하고 학생들이 개인의 헌신을 확정하여 답하는 문답을 혁신적인 형식으로 작성하였는데 칼빈은 1542년 제네바 교리교육서에서 이러한 형식을 도입하였다. 칼빈의 교리교육서는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3) 기도문
예배의식 즉 예배의 형식을 제정함에 있어서 칼빈에게는 그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목회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기도문은 주로 Clement Marot가 작성한 30여 편에 달하는 운율을 가진 시편들에 집중되어 있다. 1544년 Marot가 죽기 전까지 20여 편을 더 작성하였다. 이 작업은 계속되어 1561년에는 전 시편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약간의 수정과 더불어 시편집은 19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고 지금까지도 상당한 부분의 가사와 곡들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편집은 1541-1542년 시리즈와 별도로 출판된 것은 아닐지라도 이것이야말로 칼빈의 개혁 작업 중에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개혁자들이 로마교에 대해 계속 비판한 것 중에 하나가 기성교회의 음악이 노래 말이 전혀 알 수 없는 불협화음과 다성부 음악으로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교회에서 부르는 “무게 있고 장엄한” 시편들은 무반주로 제창할 것이 요구되어졌다. 엄숙한 형태의 음악이었지만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2) 목회자와 설교자
사람들이 칼빈을 “제네바의 독재자”로서 언급할 때 사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잊어버린 것이다. 첫째, 1559년까지 그는 제네바의 투표할 권한도 없는 시민권이 없는 한 거주자였다. 둘째, 목사와 성경 교사의 신분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는 시 정부로부터 생활비를 지급받는 시민의 한 충복이었다. 셋째, 그가 공적으로 말할 때는 항상 목사회의 이름으로 하였고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다. 신학자와 사상가로서의 그의 재능과 위업이 그를 다른 동료들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사실 그의 권위는 영적 도덕적인 권위였을 뿐이다.
(1) 목회자
제네바에서의 그의 주요한 역할은 교회의 예배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4번의 성찬식이 있었고 그 때마다 처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어린이들에게 신앙 문답을 시행하고 신앙이 약한 성도들을 권면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세례의 결혼 예식을 집행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 정규 예배를 인도하는 일이었다. 제네바 예배의식에 있어 설교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공식 문서에는 “예배”라는 말보다 “설교”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칼빈의 설교는 그가 제네바의 시민들과 접촉하는 주요한 사건으로서 성경을 계속해서 주해하는 연속적인 설교였다. 프랑스 난민이었던 드니 라그니에는 칼빈의 설교를 속기해 두었다가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것을 다시 풀어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 설교들도 3/4이 분실되었다. 그 설교들 중에 600여 편만이 잔존해있어 편집 중에 있다.
칼빈은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성경의 본문을 적용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이중음성 즉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외치는 음성과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의 음성으로 회중들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과중한 설교의 부담과 더불어 칼빈은 학교에서 강의도 하였다. 이 강의들은 성경 주석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매우 천천히 거의 불러주는 형식으로 라틴어로 강의하였다. 3명의 학생들이 강의들을 정리하여 한 권으로 묶어 칼빈의 검수 과정을 거쳐 출판을 하였다. 이러한 강의록과 칼빈 자신이 직접 저술한 주석들로 그의 생애에 거의 한번 정도 전 성경을 취급하였다. 그의 많은 서신들을 통해 그의 활발한 활동들을 엿볼 수 있다.
Nicolas Colladon은 칼빈의 저술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토록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게 잠을 자곤 했다. 이로부터 생기는 그 모든 권태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자신의 사역과 직무를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설교할 차례가 아닐 때는 5시 또는 6시에 침대에 책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필할 사람과 함께 저술을 하였다. 만약 자신이 설교해야 할 주일에는 항상 강단에 갈 시간을 준비하였다. 설교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옷을 입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서 책을 저술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2) 칼빈과 목사회와 시의회
칼빈이 제네바에서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강단에서 시민들을 권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칼빈과 목사들은 제네바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구현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회는 무언가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을 때에는 종종 시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대변인의 역할을 칼빈이 감당해야만 했다.
의회가 질서 회복을 위해 결정한 것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리문답에 보내야만 하고, 법률관들은 시의 법령들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며, 목사들은 그들의 열심을 배나 더해야 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제네바 시의 개혁을 위한 노력은 길고도 힘든 투쟁의 연속이었다. 제네바 시민들의 부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개혁의 자세는 그 어떤 중단과 신축성도 스스로 허용할 수 없었던 열망과 염려의 사람 칼빈의 엄격한 청교도적인 측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16세기는 일반적으로 매우 부도덕한 시대였다는 것과 그에 대한 칼빈의 대응은 그가 정죄한 잘못들만큼 단호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카드놀이와 노래, 춤과 같은 것들에 대한 규범들은 결코 제네바에만 국한된 것들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었다. 다만 차이점은 제네바에서는 그 법들이 그대로 시행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적인 효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556년에 John Knox가 한 런던 상인의 아내였던 Anne Lock에게 보낸 편지에 분명히 언급한 바대로 “사도 시대 이래로 지상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가장 완벽한 학교”가 된 것이다.
이단적인 사상들과의 투쟁도 매우 격렬하였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실은 초기 개혁자들은 매우 다양한 재경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개종한 사제와 수도사, 평신도, 지식인, 그리고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양한 신앙과 주장들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네바 교회의 통일성을 보호하기 위해 목사회를 구성한 칼빈의 예견은 적절한 것이었다.
3) 신학자
칼빈에 대한 한 전기를 보면 “개혁주의 개신교의 조직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 저자의 의도는 칼빈은 이전 세대의 루터와 즈윙글리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한 듯하다. 종교개혁의 교리를 규명하는 개척적인 작업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루터와 즈윙글리가 그렇게 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지만 칼빈은 그러한 교리들을 명료하고도 조직화된 구조 속에 집어넣는 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 신학의 내용 중에 심지어 예정의 교리조차도 특별히 “칼빈주의”라고 구별되게 부를 만한 완전히 새로운 어떤 사상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새로운 지적인 체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성경의 진리 체계를 일관된 진술을 통해 재생하는 일종의 복고적인 신학을 수행한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어 온 바대로 “기독교강요”야말로 그의 가장 체계적인 저술로서 칼빈의 신학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기독교강요: 개정판들
첫판은 1536년 Basle에서 라틴어로 출판되었고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4장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세례와 성찬의 성례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5장은 보다 변증적인 것으로 개혁자들이 로마교의 나머지 다섯 가지 의식들(견진성사, 혼인성사, 임직성사, 고해성사, 종부성사)을 성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6장은 교회조직과 시민정부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러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1539년에 출판한 라틴어 제2판이다. 이것을 1541년에 불어로 번역하였다. 6장에서 17장으로 증보되었다. 이 판이야 말로 기독교강요의 전 표제인 “경건과 구원의 교리에 관하여 실제적으로 필히 알아야 할 모든 것들에 대한 요약을 포함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신실한 기독교 왕이신 프랑소와 1세에게 바치는 서문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으로서 드리는 책”이라는 표현과 잘 어울린다.
1543년에 칼빈은 다시 4장을 더 추가함으로 기독교강요를 새롭게 증보하였다. 1550년에 다른 증보판을 만들 때에는 새로운 장을 추가하지는 않고 다만 자료를 더 추가하였다. 여기서 이루어진 중요한 작업은 찾기 쉽도록 각 장들에 있는 단락에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1559년에 책의 전 구조를 개편하면서 모두 4권의 책으로 나누고 각 책의 장과 절을 다시 나누었다. 1559년에 라틴어로 그리고 1560년에 프랑스어로 인쇄된 이 결정판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강요이다.
이 결정판은 1539년의 초판에 비해 많이 확대되었는데 그 대부분의 확장은 예정과 삼위일체 그리고 성만찬 등과 같은 주제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의 결과로서 그는 자신의 사상을 보다 더 정확하고 명료하게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최종판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4권의 책으로 재구성하면서 사도신경의 구조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강요는 칼빈의 사상을 전 유럽으로 전파되도록 한 책이다. 학자들에게 유용한 라틴어판과 더불어 1600년 이전에 이미 영어, 독어, 화란어, 그리고 이태리어로 번역되어 보급되었다. 지금은 8개의 영어판(6개의 축소판), 3개의 독일어판(4개의 발췌본), 4개의 화란어판(2개의 발췌본), 한 개의 이태리어판(1개의 발췌본), 그리고 한 개의 폴란드어로 된 축소판이 출판되었다.
(2) 기독교강요: 저술의 목적
① 제1판(1536)
“경건에 관하여 열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읽혀져야만 하는 가장 가치 있는 책”으로서 성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의학의 개요서 즉 가톨릭의 신앙을 떠나 성경적 진리를 추구하는 프랑스 신자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Francis 1세에 보내는 서한에 밝혔다.
② 제2판(1539)
제2판은 특별히 신학후보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한 준비”를 목적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그리고 “어려움 없이 말씀 안에서의 진보를 위해” 저술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라틴어 제2판의 1541년의 불어 번역판 서두에서도 기독교강요를 성경에의 “key”와 “door”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제2판에 로마서 주석을 첨부한 것은 기독교강요에 의한 실제적인 성경연구의 본보기로서 제시한 것이다.
③ 제3판(1543)
제3판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후 제4판 1550년 라틴어판은 총 21장을 1217절로 구분하였다. 종교를 가르치고 도덕을 개선하고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기록한다고 하였다.
④ 최종판(1559)
1558년 겨울 심한 열병 중에서 완성하여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총 4권 8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두 가지 목적 즉 복음적 경건과 신앙을 소개하는 것과 박해 중의 프랑스 개신교를 변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저술하였다고 할수 있다.
(3) 기독교강요: Humanism의 영향
① Similarities (dependence)
칼빈은 르네상스의 교육적 배경 속에서 배운 고전의 연구의 방법을 교부들의 사상연구에 적용하였다. Humanism과 동일한 용어와 개념을 사용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고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즉 진리에 대한 ‘a guide’가 아닌 ‘an illustration’으로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경적 개념과 사상을 좀 더 명료화하기 위한 하나의 단순한 대비로서 또는 스콜라 신학의 반대적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성경적 사상의 틀을 형성하기 위해 인용하였을 뿐이다. 그들의 사상을 논할 때에도 지속적, 조직적 논증이 아닌 역사적, 취사선택적인 언급을 하였다. 즉 성경진리를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한 수단과 대비로서 그리고 역사적 자료로서 취사 선택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② Differences (rejection)
“고전”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읽으라. 그러나 그대는 성경을 읽는데 무엇보다도 열중해야 할 것이다. 좁다란 식견을 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깊은 감명은 고전이 주는 즐거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즉 고대의 웅변가들과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정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 모든 천부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들 보다 훨씬 뛰어나서 어떤 신적인 것과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항상 성경을 고전에 나타난 사상을 “시정”하는 표준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기독교강요: 설득력
칼빈이 자신의 저술에 대하여 가장 염원하였던 바는 보다 “명료하게”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논증을 정리하고 그것을 단순하고 용이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바랐던 것은 독자들이 그 주제를 단순히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동의와 응답에까지 나아가는 것이었다. 논리만이 아닌 수사학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그는 명료할 뿐 아니라 설득력 있게 기록하였다. 강요의 전 판에 걸쳐 항상 수록하였던 프랑소와 1세에게 보낸 서신 가운데 이러한 힘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시작하여 수사학적인 운율과 중복으로 이어지고, 당시 개신교 신자들의 절망적인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의 장려함과 그 장려함을 전달하기 위한 수많은 성경적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상기와 더불어 프랑스 왕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아니하였다.
Ⅲ. 칼빈주의의 역사적 발전
독일의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Wittenberg 대학에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제시함으로 시작하여 Mellanchton과 Westphal에 의해 계승되었고 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확산되어 루터파 교회를 형성한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Ulrich Zwingli(1483-1531)가 1519년 스위스 북부의 독어를 사용하던 Grossmunster 교회에서 신약 강의를 통하여 연옥설, 수도원제도, 교황 무오설 등을 비판함으로 시작하여 1522년에 개종한 Heinrich Bullinger(1505-1575)에 의해 계승되었다. 스위스 남서부 제네바의 칼빈에 이르러 개혁파 교회를 형성하여 T. Beza와 F. Turretin에 의해 계승되었다.
칼빈 동시대의 개혁자들은 Martin Bucer, Pter Martyr Vermigli, John Oecolampadius, Wolfgang Musculus이었다. 개혁파 교회는 주로 프랑스, 화란, 독일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동쪽으로 보헤미아와 헝가리로 그리고 서족으로는 도버 해협을 거쳐 영국(장로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 칼빈주의와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
칼빈이 파리대학 재학 시에 프랑스는 이미 인문주의의 고전연구에 의한 성경원어연구가 활기를 띄고 있었다. 16세기초 유럽의 최고의 학자이며 파리대학의 교수였던 Jacque Lefevre d'Etaples이 신약성경을 불어로 번역하였으며, 그의 1512년 바울서신 주석은 “최초의 종교개혁의 책”으로 불리어진다.
Francis 1세는 처음에 복음적 신앙운동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초기에 독일 개신교 영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인문주의자들과 개신교도들을 보호하려고 하였으나 플랑카드 사건(1534)과 독일의 뮌스터를 중심한 재세례파 왕국건설의 무산(1535) 등으로 자신의 통치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545년에는 왈도파 신자 3천여 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안에 개신교도들은 점점 더 성장하였으며, 1559년에 칼빈의 도움으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갈리칸 신앙고백서)를 채택한 프랑스 개신교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위그노로 불리게 되었다.
1559년 앙리 2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내 Catherine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위그노들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앙리 2세의 삼촌이었던 기즈 집안이 가세하였다. 칼빈이 죽은 후 8년이 지난 1572년 8월 24일에 Navarre의 앙리 왕자(개신교)의 로마교도인 공주와의 결혼식에 화해를 희망하는 많은 개신교도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까뜨린느와 기즈 집안의 무서운 음모로 St. Germain 성당의 저녁 종소리와 더불어 위그노들에 대한 대학살(7-9천여 명)이 시작되었다. 전국으로 확산되어 6주간에 3-7만 명의 위그노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회함으로 위그노들에 대한 박해는 공식화되었다. 그 당시에 4-0만 정도의 위그노들이 화란, 독일, 영국, 스위스를 위시하여 북미와 아프리카 등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였다. 그 박해에도 프랑스 개혁파 교회는 Antoine Court와 Paul Rabaut 등의 영도 아래 계속 존속되었다. 1715년 제1회 사막총회를 소집하여 교회를 재건하려 하였고, 1787년에 가서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유 칙령이 선포되었다. 박해 속에 핀 칼빈주의 교회와 신앙이 세계로 확산되어 갔다.
2. 칼빈주의와 영국의 청교도
대륙의 종교개혁 시작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로마교의 확고한 진영으로 머물러 있었다. 1377년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위클리프의 활동으로부터 시작한 개신교 운동은 1520년대에는 스코틀랜드에까지 파급되었다. 1547년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고 Somerset 공작(칼빈이 에드워드 6세에게는 이사야서 주석을 그리고 서머셋에게는 디모데전서 주석을 헌정)이 섭정을 하면서 실제적인 교회개혁이 이루어졌다. 바로 그 당시에 개혁주의 신앙의 영향을 반영한 “42개 신조서”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1553년 케더린 왕후의 딸 Marry 여왕의 집권(5년간)으로 영국은 로마교로 복귀하고 박해를 받던(300여 명이 순교ㅗ를 당하고 800여 명이 제네바로 피신) 개혁자들과 개신교도들이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당시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제네바로 피신한 망명인들 중에 John Knox가 있었고 그가 당시 제네바의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의 목사로 봉사하면서 칼빈의 교회개혁을 배울 수 있었다. 1558년 Marry 여왕이 죽은 후에 헨리 8세와 Ann Boleyn의 딸 Elizabeth 1세 여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장령으로 복귀하였고, 1562-1563년에 영국교회는 “42개 신조서”를 개정하여 “32개 신조서”를 작성하였고 이것은 지금까지 영국 국교회의 공식 신앙고백서가 되어있다.
1564년경에 제네바로 피신 갔던 개신교도들이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Purify!”를 외치면서 교회개혁을 주도한 것에서“Puritans”(청교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칼빈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이 점차 성장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장로 제도를 도입한 장로교회를 형성하였다.
3. 칼빈주의와 화란의 개혁파 교회
독일의 루터 이전에 화란에서는 어거스틴을 추종하면서 경건생활과 성경연구를 강조한 공동생활 형제단의 활약으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1550년대 후반에 개신교가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1561년에 Guy be Bres가 칼빈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위그노들의 갈리칸 신앙고백서를 참고하여 개인적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이것이 1566년Antwerp 회의에서 화란 개혁교회의 공식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고, 1618년에 도르트총회에서 벨직신앙고백서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와 도르트 신조서와 더불어 화란 개혁교회의 표준문서가 되었다.
그 후에 개혁파 교회가 로마교의 스페인에 대항하였던 화란 독립전쟁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참여하여 승리함으로 개혁교회가 화란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화란의 개혁교회는 세계의 개혁주의 사상을 건설함에 dTdj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Jacob Arminius의 교리적 도전에 대한 신학 논쟁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승리함을 개혁신앙의 구원론이 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의 신학적 차이점
루터파 교회 |
개혁파 교회 |
루터의 신학 |
칼빈의 신학 |
성경이 금하지 않는 모든 전통을 양심의 자유로 수용할 수 있다. 즉 성경에 명령 금지된 것만 문자적으로 순종하면 된다. |
성경이 명령하는 전통만을 수용해야 한다. 즉 불분명한 것도 성경의 원리를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보다 철저한 오직 성경 사상이다. |
칭의론을 강조하며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강조하며 하나님 중심적이다. |
대학 중심의 학문적 개혁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였다. |
교회의 성경적 교리와 윤리, 예배 개혁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였다. |
성찬의 공재설 |
성찬의 영적 실재설 |
경건한 군주제도를 지지하여 정치적 보수적 우익 성향을 보임. |
공화정 정치제도를 지지하여 대의 민주주의의 성향을 보임 |
인문주의를 의심하고 배격 |
인문주의의 유익을 수용하고 활용 |
독일 영토 내부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에 국한 |
스위스로부터 전 유럽으로 확삭 |
두 왕국설에 의해 경건한 군주 정치를 옹호 |
두 영역의 한 주권에 의한 신정정치 형태를 지지 |
율법과 복음은 근본적으로 대립관계 |
율법과 복음의 상호 보완 관계 |
그리스도의 초상화 용인 |
3계명에 근거하여 초상화 폐지 |
성일과 교회 절기를 로마교로부터 수용 |
주일 외에 다른 성일 불인정 |
예수의 만인 속죄 위해 죽으심을 인정 |
보편속죄를 부정함 |
부분적 예정 |
전포괄적 예정 |
아담 원죄의 실재적 유전 |
언약적 대표 전가설 |
전국적 단위의 조직으로 주교가 치리 |
개 교회의 장로들의 치리 |
Ⅳ. 개혁주의 사상의 기본 원리
하나의 통일된 사상체계마다 그 사상체계를 일관성 있게 지배하는 몇 가지의 고유한 근본원리가 있듯이 개혁주의는 3가지의 기본 원리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1. 하나님 중심 사상
개혁주의의 근본 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교리에 궁극적 관심을 집중시킨다. 칼빈은 기독교강 제1장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있다. E. Doumergue는 “칼빈주의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신론은 교리 가운데 교리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교리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핵심적인 한 단어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개혁주의자는 항상 그 사상 중심에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을 시작하고 삶 전체의 걸음걸이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며 항상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오직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B. B. Warfield는 칼빈주의의 원리에 대하여 “칼빈주의자는 모든 만물의 현상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자이다. 따라서 그 만물의 현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따라 일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자면, 칼빈주의자는 기도하는 태도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전 생애를 살아가며, 그의 삶의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참된 영혼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고 하였다.
A. Kuyper는 “칼빈주의”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념이 칼빈주의 근저에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인간의 생활 전체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숨김없이 행하여야만 한다는 신념이 칼빈주의 근본사상이다. 이러한 강력한 사실에 의해서 생활의 전 분야가 지배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사상을 모체로 해서 칼빈주의의 모든 포괄적인 원리는 이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2.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최고의 입법자로서 자연계와 도덕계, 그리고 모든 만물에 대해 절대적이며 직접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며,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사하고 계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신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시라는 사실 때문에 피조된 만물의 절대적 소유자, 또는 궁극적 다스리시는 자이시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최종적인 해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의 행사는 그저 맹목적인 힘의 주권이 아니고 무한한 예지와 거룩 그리고 사랑이 결합된 주권이다. 고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 성경의 교리는 바로 믿고 바로 알기만 하면 우리 구원과 삶에 있어 큰 힘과 강한 확신을 주는 진리이다. 우리 중 누가 자기의 생활을 무한의 능력, 지혜, 성결, 자애로운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보다 운명, 우연, 자연법칙이나 자아에게 자신을 맡기기를 원하겠는가?
3. 오직 성경 사상
칼빈주의는 성경적 사상과 삶의 체계이다. 하나님을 모든 영역에서의 절대적 주권자로 보는 개혁주의 사상체계와 생활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자율적인 마음 대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직 성경만을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 또는 표준적인 진리지식의 원천으로 삼는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외형적 원리는 “오직 성경 중심의 사상”이다.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리임을 인정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칼빈주의는 모든 학문연구의 입장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인간경험과 철학에 기초하여 이해하려는 모든 사상체계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는 “성경이 가라는 데로 가고, 성경이 머물라는 데서 머물고, 성경이 침묵할 때 침묵한다.”